[RECANDPLAYNET]빛과 소음 - 분실
- 제작년도
- 2010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한성의 상설 실내극장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극장이 어우러져 극장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희대 는 여론의 추이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던 와중에 폐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다가, 1908년부터는 원각사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었다. 별도의 극장명 없이 활동사진을 영사해 왔던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창고 건물은 1907년부터 광무대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는 종로대로를 축선으로 삼아 장안사, 단성사 , 연흥사 가 신설되었으며, 새문 밖에서는 프랑스인 마전(馬田, martin)이 운영한 마전활동사진관 이 영업을 개시했다. 다만, 이들 극장이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영화가 간헐적으로 상영되기는 했지만 비중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상영물은 대개 단편적인 활동사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전통연희와 가무, 신파극 등이었다. ‘활동사진관’이라는 명칭을 내세웠던 마전활동사진관 역시 명창들의 공연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원각사 극장 전경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은 일본의 자본력이 동원되면서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술국치와 함께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는 시기와 맞물려 일어난 변화였다. 1910년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이 영업을 개시했고, 이후 황금관 , 대정관, 유락관, 제2대정관 이 개관하면서 새로운 극장가를 형성했다. 이상의 극장들은 핵심 소구 대상으로 상정했던 재조선 일본인의 거주지인 남촌 부근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일본인들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남촌의 극장들은 조선인들의 출입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고, 영화에 매혹된 조선인들 역시 새로운 사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남촌의 극장을 드나들었다. 결과적으로 1910년대의 극장가는 종족 혼합적 공간 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셈이다. 본디 극장은 입장료에 대한 지불능력만을 최소한의 문턱으로 삼는 곳이며, 수익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관객이라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다만,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의 백성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총칼을 앞세운 무단통치의 폭력 앞에서 그러한 반감이 대대적인 저항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만은 종종 불온한 공기를 형성해내곤 했다.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뒤섞여 있던 극장은 종족적 적대감을 징후적으로 노출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해냈다. 이구영 은 영화사가 이영일 과 진행한 구술 채록 과정에서 영화를 매개로 종족적 대결의식 이 촉발된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이구영) 그런데 거기서 사상적으로 충돌이 난 일이 한 번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걸 이제 내가 얘기할게요. 왜 그런고 하니, 유도하고 권투하고, 시합하는 단편영화가 있었어요. 그러면 이제 서상호가 무대에 서면, 서상호는 일본놈 편으로 무대에서 박수를 치라고 가르치고 관중들은 한국 사람이 절반이니까 와~ 소리가 나고 말이죠. 그래서 권투 시합에, 거기서 큰 혼란이 일어났었어요. 그냥. [일본놈 치고 때리고 난리 나다시피 하고, 그짝 나고 말이지.] 허허허, 이럴 때 아주 골아봐라 하고 그놈이 쫓아들어오고 말이지. 허허허. (중략) 그래 가지고는 [양자측이 있겠지만] 일본 놈은 그냥 나막신 신은 채로 구르고 몇번 구르고 한바탕 야단을 치는데, 한국 사람 심리가 그거예요. 우우 소리를, 그냥 반대로 한 거죠. 우우 했죠. 그러니까 이제 서상호는 일본 사람 편들었으니까. 무대 위에서라면 유도하는 아무개가 짜끄를 이겼단 말이야. 이렇게 소리지르면... 그러다가 이제 이기는 것이 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이제 권투가? 그 때는 관중이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나오는 데야... 흐흐흐. (이영일) 아하하하하. 그래 됐군요. (이구영) 그래서 그거 사상적으로 큰 문제가 벌어져서, 그게 중단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야단친 일이 있었어요. -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 소도, 2003, 195쪽. 이구영은 영화 < 쌍옥루 >(1925)로 첫 영화를 발표한 이래 < 낙화유수 >(1927), < 승방비곡 >(1930) 등을 연출한 감독이었으며, 1920년대의 대표적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바 있다. 또한 단성사 선전부장으로 재직한 이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초창기 영화가의 분위기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변사 서상호가 경성고등연예관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회고하면서 영화 상영이 종족 간의 패싸움으로 비화된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 유도선수와 서양 권투선수가 맞붙는 짧은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해설을 맡은 서상호는 일본 선수에 대한 응원을 유도했지만, 일본인 관객들의 호응과 달리 조선인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으며, 외려 서양 권투선수가 활약할 때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인 관객들과 조선인 관객들은 서로 욕설을 주고받고 방석과 귤껍질을 서로 집어던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경관들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할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종족 혼합적 극장의 분위기가 치안의 잠재적 불안요소로 지목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국면이었다. 한편, 영화가 극장의 핵심적 프로그램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북촌의 극장가 역시 이러한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1912년에는 우미관 이 건립되어 북촌의 영화상영관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미관이 조선인 관객을 독점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다는 점이다. 특히 제2대정관의 노선 전환과 관련된 맥락은 우미관의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대정관 관주는 1914년 6월에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수한 후 제2대정관을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특이하게도 이곳은 남촌에 소재해 있었지만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전용관을 표방하면서 김덕경, 최병룡 을 비롯한 조선인 변사도 영입한 바 있다. 그러나 제2대정관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인 전용관으로 노선 전환을 꾀한다. 아마도 입지조건상 조선인 관객들만을 유치하기에는 수익 창출이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김승구 는 이 과정에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이면계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우미관은 대정관이 조선인 전용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매월 200원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주1 물론 이것은 북촌에 영화 상설관이 우미관 하나뿐이었을 때만 유효한 전략이었을 따름이다. 1918년에는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 이 단성사를 인수한 후 영화를 본격적으로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경쟁 체제가 성립되었다. 또한 1922년에 조선극장 이 건립되자 북촌 극장가의 경쟁 구도는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우미관은 점차 일류 상설관으로서의 지위를 양보하고 저가 입장료 정책을 펴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모양새를 취했는데, 1920년대 이후부터는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양강 구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좌)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 단성사(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 (우) 조선극장 종족적 분할을 시도한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종족이 혼재된 객석의 풍경은 종족 간의 돌발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이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나가게 되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유선영은 조선인들이 주로 출입했던 극장들이 일본영화가 아닌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입장료도 저렴하게 책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인 전용극장들과 뚜렷한 지역적, 민족적 분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분할을 통해 조선인 극장은 식민치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 종족의 공간 ’이자 ‘ 집합의 공간 ’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극장이 스펙타클적 쾌락의 소비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족 집단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위무받기 위한 공간 이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주2 더 나아가 종족공간은 지정학적으로 분할 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물론, 북촌 지역에 건립된 일본인 극장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북촌은 조선인들의 공간이며 남촌은 일본인들의 공간이라는 심상지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백두산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에 북촌과 남촌의 경계는 기존 거류민들의 기질이나 위치(청계천)를 기준으로 구분되었지만, 식민지배 이후 경제적이고 종족적인 경계구역으로 맥락화되는 경향이 현저해지게 되었다. 즉, 북촌 은 조선인의 종족적 공간이자 개발에서 낙후된 구도심 이라는 심상적 범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주3 이러한 변화는 치안당국의 통제를 용이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이순진 이 밝힌 바와 같이, 낙후된 북촌에 종족적 ‘게토’로서 조선인 극장가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종족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며, 감시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었다. *주4 다만, 극장 내에서 이루어진 종족 간의 갈등 상황이 어디까지나 극장의 울타리 안에서 봉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것과 달리, 종족의 연대를 통해 결집된 에너지가 극장 바깥으로 확산 될 가능성은 훨씬 커지게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현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했던 1937년 우미관 의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둘째번 연주회를 열던 십이일 밤 우미관에는 일장 대풍파가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들은즉 당일밤 아홉 시쯤 되어 무대에 섰던 이왕 다동 기생의 은희 아비가 품속에 있는 금시계를 잃어버린 소동 이 생기어 형사들은 필경 사람 많이 모인 중에서 못된 스리(소매치기)란 도적이 그리함인 줄 짐작하고 대활동을 개시하여 파하기 전에 틈틈이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제히 신체 수색 을 한 바 마침내 시간이 다 되어 수백의 관객은 물결치듯 솟쳐 나아가자 준비하고 있던 형사들은 나아가는 사람마다 일일이 신체 검사를 할 때, 모든 관객들은 표 사가지고 구경왔다가 신체 검사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당치 못할 일이라 하고 호성을 지르고 풍파 를 일으키어 그대로 솟쳐 나아갔으므로 한참동안 그러한 혼란은 없었고 신체검사도 마치지 못하여서 매우 살풍경을 이루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18-1920 』, 2009, 267쪽. 기사, “우미관의 소동”, 《매일신보》, 1919. 11. 14. 우미관에서 발생했던 경찰과 관객의 충돌은 종족공간의 파급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금시계를 분실한 관객의 신고가 접수된 후 임석경관은 소매치기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며, 극장을 나가는 수백 명의 관객들에 대해 일일이 신체 수색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표 사서 영화 보러 왔는데 신체검사가 가당키나 하냐”면서 강하게 항의하며 나가버리자 검사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무척이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행사된 공권력의 통제에 대해 공공연한 반감을 드러냈던 셈인데,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3.1운동이 시작되었던 1919년 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 조선 단위로 확대된 3.1운동의 여파가 남아 있던 경성에서 제국은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통제가 또 다른 저항운동의 도화선 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게 된 조선인 극장들은 중대한 소요사태가 예견될 때마다 치안 당국의 ‘일급 감시대상’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도 극장을 무조건 폐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외려 제국은 극장이 영업을 중단하게 된다면 치안에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아우구스또 보알이 지적했던 것처럼 극장은 사회적 불만이 대규모 대중투쟁으로 번져나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사회통제와 치안 유지를 위한 유력한 기구로 극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조선인 극장들의 영업을 허용하되, 종족의식에 기반한 폭발력을 적절히 제어 하는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1922)을 필두로 극장 취체규칙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던 것은 그 연장선에 놓인 조치였다. 3.1운동 이후 제국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던 바, 극장은 새로운 통제기술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한 유력한 시험대와도 같았다. *** 주1. 김승구, 「1910년대 경성 영화관들의 활동 양상」, 『한국문화』 5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주2. 유선영, 「극장구경과 활동사진 보기 : 충격의 근대 그리고 즐거움의 훈육」, 『역사비평』 64, 역사비평사, 2003. 주3. 백두산, 「1910년대 경성 북촌 조선인 극장가와 종족공간적 구성」, 『한국연극학』 63, 한국연극학회, 2017. 주4. 이순진, 『(조선인 극장)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34쪽.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이 영화를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첫 장면에 달려있다. 버스 정류장에 근처에 예닐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고정숏으로 보여준다. 어안렌즈로 찍은 것처럼 곡선으로 구부러진 버스가 정차 후 지나가면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남는다. 그들은 마치 사람들 사이 보호색을 띠었던 양 이제야 눈에 띄는데, 행색을 보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는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린 한 쌍처럼 보인다. 이들은 뒤로 보이는 연방 우체국의 우편물을 노린 3인조 가족 사기단이다. 이 장면의 압권은 딸 올드 돌리오(에반 레이첼 우드)가 선보이는 특별한 준비 동작이다. 굼떠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날랜 동작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낮은 난간을 뜀뛰기 하듯 넘나드는 모습이 놀라움을 안긴다. 그렇게 해서 과연 CCTV를 피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동작은 눈길을 끈다. 이는 임무 완수를 위한 제의 혹은 스트리트댄스 같다. 우스꽝스러운 동작은 다시 등장한다. 버블 공장에 딸린 사무실을 집처럼 사용하는 이들은 몇 달째 집세를 밀린 상황이다. 주인의 시선을 피해 낮은 담 아래로 몸을 굽히고 걸어가는데, 유독 돌리오만은 림보를 하듯 허리를 거의 180도로 뒤로 꺾은 채 성큼성큼 걷는다. 그 모양은 우스운 것을 넘어 그를 도시 공간과 소통하는 거리의 무용수처럼 보이게 한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한 몸개그로, 이것이 몸의 영화임을 다소 난해한 방식으로 예고한다. 이들의 거주지는 매일 일정 시간마다 천장 벽 틈새로 분홍색 비누 거품이 새어드는 곳이다. 그럴 때마다 집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에 가까워지며 무생물과 같은 거주자들과 반대 방향에서 접점을 만든다. 가짜 가족처럼 보이던 이들은 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인데, 애초에 이들에게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한 것 같다. 여기에서 가족은 비즈니스적 공동체이며 감정적 유대가 아닌 공평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수익과 손해는 3분의 1로 정확히 나눈다. 동시에 울리는 손목 알람에 따라 정해진 일을 수행하고 몫을 나누어 갖는다. 딸 올드 돌리오는 < 산책하는 침략자 >(2017)의 개념을 잃어버린 신조(마츠다 류헤이)처럼 모든 개념을 처음부터 습득해야 하는 부적응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26살에 뒤늦게 시작된 돌리오의 성장기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는 성장기가 아니라 ‘출생기’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과의 신체 접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 하지만 태어난 직후부터 접촉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환불 불가능한 마사지 쿠폰을 포기하는 대신 생애 처음 마사지를 받은 돌리오는 작은 터치에도 몸을 떨고 눈물을 보인다. 한 임산부의 부탁으로 예비 부모를 위한 강연에 참석한 돌리오는 아기가 어머니와 감정적 유대를 맺는 최초의 행위인 ‘브레스트 크롤’(태아가 엄마의 젖가슴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행위) 장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이 태어난 직후 엄마 테레사(데브라 윙거)와 접촉했는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비행기에서 부모와 떨어져 앉게 된 돌리오는 우연히 부모님과 나란히 앉은 멜라니(지나 로드리게즈)가 자신보다 더 그들의 딸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테레사의 애정에 더욱 집착한다. 돌리오가 대리 참석한 강연장에서 출산 영상이 등장하는 대목은 다소 급작스럽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 속의 모든 상황은 ‘태어남’을 은유하기 위한 치밀한 우연처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돌리오의 우체국 진입 장면 이후에는 우편함을 뒤지는 돌리오의 손을 보여주는 숏이 등장한다. 우체국 내부는 사방이 작은 우편함으로 구획된 어딘가 비현실적인 공간이며, 돌리오는 그중 한 곳을 열고는 좁은 구멍 속에서 손을 좌우로 더듬으며 우편물을 찾는다. 그러다 옆 칸에 놓인 긴 직사각형 형태의 우편물을 조심스럽게 빼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좁은 구멍으로 분만을 유도하는 출산 장면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멍을 통과한 뒤에는 진동처럼 지진이 찾아온다. 가족이 약진에 유난스럽게 반응하며 길가에 얼어붙을 때, 옆에서 행인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모습이 목격된다. 지진을 통해 세상은 개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운동성을 드러내고, 그럴수록 이 가족은 무생물처럼 고정된다. 진동하는 비행기는 이들이 세상을 체감하는 방식을 요약한 공포 체험의 장소다. 갑작스러운 난기류로 차체가 흔들리는 현상이 벌어지자 이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른다. 세상을 은유하던 비행기는 작은 우편함 구멍과 출산 비디오 영상과 어우러져 출산 체험을 위한 기구가 된다. 비행기는 누구나 망각했을 태어남의 순간을 내부에서 단체로 경험하는 물질로 도약한다. 내부의 시점에서 출산을 체험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은 후술하는 장면을 통해 마침내 성공적으로 충족된다. 테레사가 무심결에 멜라니를 ‘아가’(hon(ey))라고 부르자, 돌리오는 수하물 분실을 조작해 얻은 여행보험금을 걸고 자신에게 ‘아가야’라고 말해보라고 테레사를 채근한다. 그러나 테레사는 끝내 돌리오를 ‘아가야’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 집단에서 막내딸 정도의 역할일 줄 알았던 멜라니는 자신의 진짜 역할이 어머니임을 자각하고는 돌리오의 손을 잡고 집단을 벗어난다. 멜라니는 자신의 집을 새로운 활동 기지로 삼아 ‘아가야’라고 불러주기를 비롯해 테레사가 거절한 것의 목록을 만든 뒤 하나씩 실행에 옮긴다. 리스트의 핵심 항목은 단연 브레스트 크롤이다. 멜라니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며 실감나는 재현을 위해 불이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로 돌리오를 데려가 문을 잠근다. 어둠 속에서 지진이 찾아오자 겁에 질린 돌리오는 이것이 자신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진동이 멈춘 뒤 문이 열리고 다시 빛을 보게 된 돌리오는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기쁨에 젖어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생의 축복을 만끽한다. 아직 가장 중요한 동작이 남았다. 화장실에 갇힌 패닉 상황에서 실언을 내뱉어 멜라니에게 상처 입힌 돌리오는 그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콘크리트 바닥을 기어 멜라니에게로 다가간다. 돌리오의 첫 브레스트 크롤은 엄마의 품보다는 다소 거칠지만, 그보다 넓은 세상의 맨몸을 더듬는 행위이다. 덧붙여 누군가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이는 최초의 시도다. 그렇게 돌리오는 태어난다. 그리고 비로소 산다. <카조니어>에서 미란다 줄라이가 보여준 것은 아직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던 방식으로 시도된 사랑스럽고 무모한 퇴행이다.
영화 <닉카터, 형사들의 왕> 포스터 영화사의 위대한 많은 순간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전문적인 영화 고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모든 순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시네마테크 혹은 영화제에서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영화사 속의 제목, 혹은 이름을 만나면 어떤 단서도 달지 않고 그냥 보러 간다. 빅토랭-이폴리트 자세(Victorin-Hippolyte Jasset)의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기적 같은 행운은 그렇게 얻어진 것이다. 말 그대로 잊힌 위대한 이름. 빅토랭-이폴리트 자세의 영화 제목을 열거하는 건 이 시기의 시네아스트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꽤 까다롭고 무척 곤란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련의 연작들을 찍었고 마치 연속극처럼 이어지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빅토랭-이폴리트 자세의 영화 대부분이 분실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60여 개의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그 편수는 100여 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연쇄극은 조루주 아토가 미국에서 출판된 탐정소설을 각색한 <닉 카터, 형사들의 왕 Nick Carter, le roi des detectives>이라는 제목 아래 1908년에 만든 6편의 영화였다. 이 영화는 단지 대중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의 카페에서 영화 문화를 이루던 (아마도) 첫 번째 시네필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진지한 야심을 지니고 있던 영화제작자들은 질투심을 안고 지켜보았다. 그중에는 루이 푀이야드도 포함되어 있다. 루이 푀이야드는 이 연쇄극의 마지막 편인 <검은 옷을 입은 강도들 Nick Carter, le roi des detectives-Episode 6: Les bandits en habits noirs>을 보고 나온 다음 “그날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보았다”라고 약간 탄식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빅토랭-이폴리트 자세가 장르영화만 만든 것은 아니다. 그는 아프리카 튀니지에 여행을 가서 (아마도 뤼미에르 형제의 영향을 받은)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며, 에밀 졸라의 소설을 각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영화도 (내가 본 영화에 한정 지어 말하면) 시네마테크들의 필사적인 복원작업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의 네거티브 필름이 사라졌거나 원본을 식별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망가졌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 펼쳐진 영화들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림자처럼 남의 집에 들어가 마술처럼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도둑질하는 악당들. 시적인 자동차 추격 장면들, 연극의 전통 아래 있으면서도 배우들은 사용할 수 없는 목소리 대신 표정과 제스처를 사용하기 위해 연기할 때, 거기서 빅토랭-이폴리트 자세는 영화만의 거리를 발명해냈다. 이 영화들이 없었다면 위대한 영화의 어떤 계보는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빅토랭-이폴리트 자세의 열렬한 지지자인 도미니크 피아니는 좀 더 근사하게 설명했다. “빅토랭-이폴리트 자세는 필름 다르로부터 영화를 구해냈어요. 그는 연극 무대나 뮤직홀에 있던 영화를 길거리로 가져나온 다음 예술적으로 화면의 미장센을 불결하게 만들었지요. 그런 다음 거기에 빠른 속도, 그 속도감을 부여했습니다. 영화가 속도를 갖지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빅토랭-이폴리트 자세가 야심을 갖고 각색을 시작한 쥘 베른의 소설 두 편을 영화로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영화로 판타지 영화의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병이 그를 쓰러뜨렸다. 1913년 6월 22일 빅토랭-이폴리트 자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빅토랭-이폴리트 자세는 아마도 영화 연출과 영화 이론을 겸한 첫 번째 시네아스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1911년 10월 11일 「시네 저널」 165호에 ‘시네마토그래프에서 미장센에 관한 연구’라는 글을 썼다. 짧지만 분명하게 필름 다르 영화들을 비판한 다음 미국영화에서의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소개했다. 그런 다음 배우들의 연기와 그것을 바라보는 현장에서의 연출 관점 차이를 말하면서 영화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 의해 어떻게 “리얼리티의 환상을 완성하는지”를 약간 신비롭게 쳐다보듯이 썼다. 이 감탄할 만한 통찰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