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
- 감독
- 이탁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오민애, 김재화, 이재인, 정연숙, 김수란, 고훈목, 허성우, 이삼용, 황민수
1. 2016년 12월 16일. 마르코 벨로치오는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로 전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레티치아, 조르조, 마리아, 알베르토 등 생존해 있는 그의 형제자매들이 배우자와 아들딸, 손주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마르코의 형제자매들은 다들 정정해 보이지만 나이들은 80줄을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살아생전에 모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벨로치오 감독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가족영화를 찍겠다고 했지만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하고는 곧 “천사였다는 카밀로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우리에게 알린다. 그러니 그의 말은 카밀로에 관한 영화를 찍으려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죄책감, 후회, 회한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에는 이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는 그의 쓰라린 탄식에는 이 가족의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은 그간의 시간이, 그 오랜 회피가, 그 질긴 침묵이 내포되어 있다. 카밀로에 관해, 카밀로가 품은 깊은 우울과 고통에 관해 몰랐던 이는 마르코만이 아니다. 지식인인 조르조 형도 아무것도 이해 못 했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도 몰랐고, 가여운 누이들도 아는 게 없었다. 여든 한살의 노감독은 ‘죽기 전에 이 일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가족의 비극을 재현하고 결국 기억하기”로. 그 결심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카밀로는 누구인가. 그는 마르코 벨로치오의 쌍둥이 동생이다.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한 해에 카밀로는 마르코가 태어나고 3시간 뒤에 거의 질식 상태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1968년 12월 26일, 카밀로는 29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을 맸다. 그 사이의 시간,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탐문하는 시간은 카밀로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29년의 시간이다. 마르코 벨로치오는 그의 쌍둥이 동생을 세상으로 불러내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이미지들을 끌어 모은다. 8mm 카메라로 찍은 홈 비디오 영상과 가족사진들,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정치사를 담은 아카이브 푸티지, 그리고 벨로치오의 극영화 클립들. 그 이미지들이 가족과 지인의 대화 장면과 인터뷰 영상에 픽션영화 같은 드라마틱한 활력과 논픽션의 운명적 생기를 덧입힌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이미지는 카밀로의 얼굴이다. 부드러움과 우울이 깃든 그의 얼굴은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하게 하는 매혹의 이미지지만 동시에 옅은 통증을 불러오는 슬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인상은 그가 살아남아 쌍둥이 형제 마르코의 나이에 이르렀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기도 하다. 카밀로의 부서질 듯한 연약한 아름다움은 너무 이른 때에, 자신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세상을 스스로 따돌리며 불시에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다. 관객인 우리는 물론, 벨로치오 형제자매들이 자신들의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고서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점. 어떤 언어로도, 어떤 지성으로도, 어떤 예술로도, 한 인간에 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 실패는 필연적이고 근원적이다. 이 영화의 저 깊은 하부에 내재된 어떤 쓰라린 느낌은 우리 존재의 근원적 비극을 희미하게 지시하고 있다. 마르코 벨로치오가 이들 가족의 비극을 보편적인 차원의 이야기로 환원하여 한 개인의 후회와 죄책감을 희석시키려 했다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그는 카밀로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고백하고 거기서 자신이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것, 듣고도 흘려버린 것을 여기 기록해 두기로 한다. 그가 지금, 이제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재현하고 기억하는 것 외에 뭐가 있을까. 벨로치오 감독은 마음을 기울여,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끌어 모아 카밀로를 둘러싼 벨로치오 가족의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한다. 여기에는 잊기 힘든, 실은 가장 가슴 아픈 두 개의 순간,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벨로치오 감독의 기억에 없고 두 번째 이야기는 그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 대목인데, 이 영화가 카밀로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마르코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전환점이 이쯤인 것 같다. 벨로치오 감독은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의 가족과 이 가족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긴 내레이션 이후에 한동안 가족의 증언을 듣는 성실한 청자의 위치를 고수한다. 그러다 형 알베르토가 카밀로가 죽기 몇 년 전에 마르코에게 쓴 편지 얘기를 꺼내자 벨로치오 감독이 즉각적으로 프레임 안으로 소환된다. “나한테 쓴 편지라고?” 감독은 편지 내용은커녕 그 편지를 받은 기억조차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알베르토 형은 자신에게 온 편지도 아닌데 그 편지 사본을 갖고 있다(알베르토는 이 영화에서 카밀로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이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형 파올로나 청각장애를 가진 누이 레티치아처럼 돌봐줘야 할 존재도 아니고 존경받는 좌파 지식인인 조르조 형이나 유명한 영화감독인 마르코처럼 선망의 대상도 아니었던, 오히려 카밀로와 가장 비슷하게, 평범해서 덜 관심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 씬에서 벨로치오 감독은 카밀로가 죽은 방에서 50여 년 전에 그가 보내온 편지(사본)를 꺼내 소리 내어 읽는다. 너무 늦어버린 수신, 마르코의 목소리로 듣는 카밀로의 절박한 요청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불러온다.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면, 어쩌면 범상하게 읽힐 짧은 편지. “사랑하는 마르코. 서로 못 만난 지 1년이 다 됐네. 나 입대하기 전에 둘이서 길게 얘기했지. 제대한 다음에 뭘 하면 좋을지 말이야.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 여전히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기만 해. 미래에 대해 고민해도 해답이 안 나와. 그날 저녁에 내가 꺼낸 말 있잖아. 나도 영화계에서 일해 보면 어떨까 하고.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생각일까, 아니면 고려해 봐도 될까? 답장 보낼 때 네 생각을 확실하게 말해주면 좋겠어. 그럼 이만 줄일게. 보고 싶다. 잘 지내. 사랑을 담아, 카밀로가.” 이 씬 다음에 벨로치오 감독의 딸 엘레나의 쇼트가 곧장 붙는다. “그래서 답장하셨어요?” 아버지의 답변이 두렵다는 눈빛으로 엘레나가 묻자 벨로치오 감독은 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잘 기억이 안 나. 54년이나 지난 일인걸.” “답장 안 하셨군요.” 아들 피에르 조르조가 아버지의 대답에 이렇게 응답하자 벨로치오 감독도 “그랬던 것 같아”라고 시인한다. 이 장면이 지켜보기 괴로운 이유는 자식들이 느낄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느끼고 있을, 모든 면에서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에서 오는 허망한 감정이 우리에게도 절절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응답하지 않은 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죄. 이후 벨로치오 감독은 그 점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신부님께 털어놓는데, 그의 그런 고백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본 이들은 누구라도 알아챌 것이다. 그럼에도 반문해 보고 싶다.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죄책감에 관한 영화인가. 확신 없이 일단 말해보자면, 벨로치오 감독은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하기 위해 카밀로를 영화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너무나 늦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물론 그건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이 생각은 마지막 시퀀스에 가서야 들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카밀로에 관한 이야기들이 쌓여갈수록 자꾸만 그의 편지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이 이야기는 마지막 시퀀스에 가서 다시 말하기로 하자). 강력하게 각인된 두 번째 순간은 쌍둥이 형제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의 대화에서 나오는데, 벨로치오 감독의 기억 속에 선명한 그 순간은 일찍이 <그 눈, 그 입>(1982)에서 재현된 바 있다. 1968년, 그러니까 카밀로가 죽던 그 해에 마르코는 제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카밀로에게 민중들의 투쟁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하필 1968년이다. 유럽 대륙에 혁명의 돌풍이 불기 시작한 해. 이 영화의 제목이 된 “마르크스는 나중에”(<Marx can Wait>)라는 대사는 마르코의 제안에 대한 카밀로의 대답이다. 말하자면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혁명은 나중에…….”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좌파 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한 마르코 벨로치오가 강력한 정치 영화에 헌신하며 공산당에 가입한 해가 1968년이다. 벨로치오 감독은 카밀로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 역시 아들딸에게 들려준다. “카밀로가 꺼내는 힘든 얘기를 피하고 싶은 생각에 난 혁명 어쩌고 하는 헛소리만 늘어놨어.” 정치가 개인보다, 혁명이 가족보다 앞설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널 불행하게 만든 것은 부르주아이니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이 흔해빠진 선동은 피상적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얼마나 무감하고 무성의한가. 2002년 벨로치오는 「더 인디펜던트 리뷰」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마르크시즘과 별 관련이 없는 내 생각들뿐이다. (...) 예술가로서 내게 변혁은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2.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올해 칸영화제의 신설 섹션인 ‘칸 프리미어’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리고 칸은 폐막식에서 그에게 명예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이 영화로 상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수상에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마르코 벨로치오는 사실상 데뷔작부터 줄기차게 가족의 문제를 다뤄왔고, 그 문제란 그 자신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것을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총결산한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 캔 웨이트>에는 그의 픽션영화의 일부가 논픽션의 진술들 사이에 정확히 자기 자리를 찾아 이음매 없이 제시된다. 이를테면 벨로치오 형제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장남 파올로의 광기를 말할 때, <리프 인 더 다크>(1980)에서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소리 지르는 광인 시퀀스로 연결된다. 거기서 하얀 잠옷을 입은 천사 같은 꼬마들은 형의 광기를 피해 귀를 막고 테이블 아래로 숨어들거나 미친 듯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벨로치오의 형제자매들은 말한다. “우리 모두 파올로 형이 차라리 죽어버리길 바랬지만 누구도 그 광인과 한 방을 쓰는 카밀로 걱정은 안 했다.” 아, 가여운 카밀로. <호주머니 속의 주먹>(1965), <그 눈, 그 입>(1982), <내 어머니의 미소>(2002)도 그런 방식으로 벨로치오의 가족사와 재접속한다. 하지만 픽션은 픽션일 뿐,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없었다면, 그 견고한 픽션의 세계는 그 자체로 온전히 남을 것이다.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그 세계에 균열을 낸다. 그 틈새로 가장 많이 노출되고 가장 큰 혼란을 겪는 것은 마르코 벨로치오 그 자신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벨로치오가 평생 탐구해온 가족의 비극상이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면,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픽션의 세계 뒤에 안전하게 몸을 숨겼던 그가 그 세계의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겪는 자기발견의 과정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여든에 접어든 대가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을까 싶다가도 종종 말을 잇지 못하거나 더듬거리고 시선을 마주 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목격하면 우리에게도 얼마간의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 비극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마르코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그런 순간들조차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데, 대신 외상은 기이한 방식으로 깊이 남는다. 그들은 이 죽음을 어찌 받아들였던가. 당시 카밀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어떤 불의의 사고를 떠올렸고, 심지어 현장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했던 누이들은 지금도 그 죽음을 ‘실수’나 ‘사고’라고 믿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자살한 아들이 지옥 불에 떨어질까 패닉에 빠진 신앙심 깊은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마치 사고였다는 듯 자식들이 모두 연극을 꾸며댄 탓인데 이 선하고 가련한 누이들은 어쩌다 그 연극에 영원히 갇혀버리게 되었다. 아직도 카밀로의 죽음을 실수거나 사고라고 믿는 누이들은 유서가 있었다고 해도 “난 본 적이 없어”라는 말로 일축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카밀로는 어떤 사람이던가.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수영을 할라치면 팔을 휘저을 때마다 물에 가라앉았고, 학업에서는 날이 갈수록 쌍둥이 형과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낙제를 거듭하고, 군대에 가서는 변방으로 자꾸만 밀려났다. 형제 중 그를 가장 총애했던 아버지는 카밀로가 측량사가 되어 떼돈을 벌어 최신식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라틴어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그 잘난 형들에게 복수하기를 바랐지만 그건 그의 뜻과는 달랐다. 암으로 이르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에서 홀로 펑펑 울었던 그는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꼈다. 언제나 우스갯소리를 해대서 그 농담과 웃음 탓에 아무도 그의 내면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이가 있고 누구는 언제나 우울한 느낌이 드리워진 청년이라고도 했다. 소극적이고 불행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형들과의 끊임없는 비교에서 스스로를 실패자라 자책했던 그는 무엇보다 ‘애정의 관점에서 사막 같은 불모지’였던 가정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화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더 많은 얘기들이 더해진대도 우리가 이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느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보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문득 벨로치오가 이 영화로 무언가 다른 걸 시도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졌다. 가족 모임을 단체 사진 촬영으로 마무리한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은 단 하나의 쇼트 탓인가. 영화적 톤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도드라진 이 쇼트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유일한 픽션영화 쇼트라고 해도 될 법한데, 그래서인지 픽션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 저 멀리 돌다리를 걸어 전경으로 다가오는 벨로치오 감독이 보이고 곧 전경에서 프레임 인하여 아침조깅을 하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청년은 카밀로가 죽기 직전에 다녔던 체육교육원의 이니셜 ISEF이 등 뒤에 박힌 운동복을 입고 있다. 청년이 감독의 곁을 스쳐 후경으로 달려가자 벨로치오는 돌아서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는데, 이 광경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이 감정적 기습에 아름다운 선율의 배경음악도 가세하면서 내가 본 것 이상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돌다리 쇼트로 시작하여 크고 붉은 글씨체의 <마르크스 캔 웨이트>라는 영화 제목이 뜨고 카밀로와 마르코의 사진이 대화하듯 이어지다가 엔딩 타이틀에 이르는 그 (불)연속 편집이 저 깊은 감정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만 같다. 뒤돌아보는 벨로치오의 몸짓과 시선, 68년 그 뜨거운 거리를 메웠던 선명하게 붉은 구호를 아니러니하게 역전시킨 카밀로의 대답 ‘마르크스는 나중에’(“그래, 정치는 나중에”라는 마르코의 수긍이기도 한), 교차로 이어지는 카밀로와 마르코의 사진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는 카밀로를 바라보는 마르코의 모습이 있고, 이십대인 카밀로의 흑백 사진들 위에 나이 들어가는 마르코의 컬러 사진이 쇼트와 역쇼트처럼 마치 대화처럼 배열된다. 이 쇼트의 연결 속에서 나는 앞서 마르코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응답하지 않은 편지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카밀로에게’로 시작되는(그리고 ‘사랑을 담아, 마르코가’로 끝나는), 벨로치오 감독의 뒤늦은 답장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그가 여기서는 카밀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위안을 위한 것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어라 말해도,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품은 그 무거운 탄식과 이 영화가 안긴 깊은 감동은 조금도 희석되지는 않는다.
미성숙한 작가의식 < 수절 >(1973)은 하길종 자신의 말과 글에 의해 한동안 신비화된 작품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UCLA 대학원 동문이었으며 졸업 작품으로 MGM에서 주는 주요한 상을 받았고 귀국해서는 한국사회의 폭압성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풍의 전위적인 스타일로 형상화환 데뷔작 < 화분 >(1972)으로 비평적 스캔들을 일으켰던 하길종은 당시의 충무로를 활동사진적 의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 장터와 같은 곳으로 비유했으며 자신을 그 불모지에 처한 순교자 내지는 희생자로 여겼다. 대학원 동문 코폴라는 <대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본인은 영화예술의 폐허 한국에서 검열과 낙후된 시스템의 이중고 속에서 고통받는, 미완의 영화작가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순교자로 여겼다. 이 나르시시즘은 그의 예리한 평문이 지닌 설득력 덕분에 한동안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그 예시가 되는 작품 중 하나가 <수절>이었다. “<화분>을 연출한 후 써낸 나의 시나리오는 매번 제작자의 거부반응을 받거나 칼자루를 든 관(官)에서 항시 보이코트를 받아왔다.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해서 만든 <수절>은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는 이유로 20분이 커트 당했고 극장에서는 알맹이가 빠진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졌다.” 사지가 잘려나갔다는 고통을 하길종 스스로 느꼈다는 <수절>의 검열 수난사는 그의 말대로 검열에 다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공개됐다면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함의를 남긴다. 1970년대의 엄혹한 유신정권 시대의 검열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남아 있는 필름 <수절>에서 하길종의 영화작가로서의 재능은 그의 자의식에 비해 별로 드러나는 게 없다. 그보다는 한국영화의 부족한 물적 시스템을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에 비해 이상만 높았던 야심가의 무모한 시도가 참혹하게 실패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수절>의 배경은 한사군 시대. 행복한 삶을 살던 유는 아내 길과 딸 영을 남겨두고 전쟁터로 떠난다. 유는 적군의 포로가 된다. 10년 만에 돌아온 유는 아내와 딸을 만나지만 그들이 귀신임을 알게 되고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는다. 유의 귀환을 믿었던 아내와 딸은 빈곤과 전염병, 가뭄을 이겨내지만 도읍의 실력자인 장군에게 모녀가 함께 윤간, 살해당한다. 마지막 시퀀스는 유와 장군의 결투. 폭정에 대한 저항이라는 알레고리는 쉽게 드러나지만 장면의 컨티뉴어티 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쇼트의 연결은 조악하다. <수절>의 전반적인 문제는 아무리 검열과 열악한 제작환경의 이중고를 겪었다고 하더라도 1970년대의 다른 한국영화에 비해서도 완연히 처지는 구성감각이다. 쇼트와 쇼트가 붙는다는 느낌이 없이 쇼트 하나에 잔뜩 힘을 주지만 그 다음 쇼트와의 배열에는 무능한, 검열에서 잘린 탓이라고 하기엔 장면들내의 리듬이 아예 성립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초반에 유가 귀신이 된 아내와 딸을 만나는 장면을 비롯해 이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의 < 우게츠 이야기 >의 영향이 희미하게 어른거리지만 이걸 인용, 참조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것이 수평적 비교가 아예 불가능한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한때 하길종의 동료였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홍파 는 이에 관해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영화>지에 실은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매섭게 지적했다. “하길종이 ‘활동사진’論을 약간 늦춘 것은 그 자신이 두 번째 연출한 <수절> 이후쯤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그 작품이 그가 그렇게 매도해 마지않았던 ‘활동사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결과의 양심이었음에 분명했다. 그는 비로소 한국영화 풍토를 익혔으며 진정한 추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제작 실태의 과정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고독해 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만났지만 더욱 고독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그를 어느 제작자도 찾지 않았다. 괴팍하고 열기찬 그는 제작자들이 원하는 고분고분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서라벌예대, 서울예술전문교의 학생들에게 영화 열정을 심어주려 애쓰기도 했다.” 그 이후의 하길종의 삶은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다. 그는 지속적으로 매서운 필봉을 휘둘렀으며 (감독으로서만큼이나 비평가로서 하길종이 한국영화사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한국영화시스템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그 자신의 영화적 호흡을 가늠하게 하는 준수한 영화를 만들었다. < 바보들의 행진 >과 < 속 별들의 고향 >, < 병태와 영자 >는 동시대의 한국영화계를 내려다보는 오만 없이 수평적으로 영화인들과 소통하면서 해낸 상대적으로 성공한 그의 작업결과물이다. <수절>까지의 그는 병사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돌격을 명하는 전쟁터의 무모한 장군과 같았다. <수절>에는 그런 지휘자의 돌격 구호에 따라 배우들이 느꼈을 엄청난 물리적 고통이 화면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다. 구원에의 전망이 사라진 고대 세계를 묘사하면서 하길종은 당대의 한국사회를 비유하려 했다. 그것이 너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만큼이나 폭정, 억압, 가난, 전염병에 시달리는 <수절>의 화면 속 인물들의 고통도 생생하다. >> 수절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이용민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는 불모지에 가까웠던 공포영화 장르를 개척한 선각자이다. 공포의 양식화라는 측면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지알로 호러를 대표하는 마리오 바바나 일본 괴담영화의 거두인 나카가와 노부오와 유사한 부류로 범주화할 수 있다. 공포와 스릴러, 판타지를 혼융한 < 악마와 미녀 >(1969)는 공포영화 감독으로서 이용민의 개성과 스타일에 대한 유용한 개요를 제공한다. 이용민 감독은 여기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 모티프를 병합한 설정을 중심축으로 삼아 한국적인 원귀 서사, 사무라이 활극, 폐쇄적인 실내극 양식, 표현주의 스타일을 다층적으로 쌓아올린다. 특히 프랑켄슈타인 서사는 이용민의 후기작 < 공포의 이중인간 >(1975) 등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귀기서린 괴 저택을 무대로 한 괴담이라는 일부 설정은 나카가와 노부오의 <망령의 괴묘저택>(1958)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몇 개의 촬영 세트에서 진행되는 조잡한 프로덕션 디자인에서는 저예산 속성 제작의 흔적이 여실하지만 이런 흠결은 장르의 특장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도리어 기이한 스토리를 증폭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화의 무대는 으슥한 숲속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양식 병원이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병원의 수장인 곤도( 이예춘 )는 유리관에 누워있는 아내( 도금봉 )를 위해 매일 생피를 주입한다. 곤도의 계획은 뇌수이식에 성공하여 빈사 상태의 아내를 구제하고 인간의 영생을 이루는 것. 신선한 피를 얻기 위해 곤도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느 날 미스터리한 가족사를 품은 간호사 옥경( 오은이 )이 조수로 들어오면서 곤도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진다. 옥경의 수상한 활동을 기점으로 거악(巨惡)의 씨앗이 발아하게 된 경위가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면서 미친 과학자의 스토리는 번개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의 절반이 곤도의 음모와 옥경의 복수에 전념하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사를 기술하고, 곤도의 한국인 조수 원석( 김석훈 )과 옥경의 로맨스도 양념으로 첨가된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등장한 옥경이 점차 동정적인 캐릭터로 변모함에 따라 초자연적 복수 미스터리의 균형이 조정되면서 곤도와 옥경의 대립관계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악마와 미녀>의 각본은 허흥 이라는 작가가 썼다. 허흥은 유일하게 이 영화의 각본가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감독 자신의 가명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악마와 미녀>의 스토리는 갈짓 자를 그린다. 허무맹랑한 신념에 강박된 의학박사의 맹목을 따라가다가 그의 악마성이 폭로되는 과거 장면들 이후에는 복수의 스토리로, 옥경과 원석의 대립과 공모로 국면이 전환되자 멜로드라마의 정동이 느닷없이 폭발한다. 현실과 단절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허구이지만 스토리 안에 있는 우매한 믿음과 광기, 냉담한 복수와 같은 요소는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도 있다. 음모나 배신의 트라우마로 복수를 다짐하는 원한에 찬 여성의 스토리는 한국 고전 공포영화의 공식이다. <악마와 미녀>도 이 공식을 따르지만 원녀(怨女)의 존재가 인간과 유령의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반면에 인류의 삶을 뒤바꿀 의학기술의 신기원에 도달하겠다는 망집에 빠진 의학박사는 서양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형이다. 영화의 주요한 소재로 채택된 수혈과 흡혈은 역시 드라큘라 전설에서 파생된 설정이다. 생명 연장을 위해 타인의 생피를 주입한다는 설정은 생명의 기원으로서 피의 의미를 강조한다. 피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곤도의 야심은 옥경으로 전이되는데,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옥경이 우연히 피맛을 알게 되어 흡혈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피에 굶주린 살인광 박사를 전형적인 공포와 구별하는 독특함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서사에 새겨진 무국적성일 것이다. 이처럼 <악마와 미녀>에는 상이한 뿌리를 갖는 이야기의 요소들과 사물들, 영화 기술, 정서들을 두서없이 교배한 흔적들이 넘친다. 고립된 서양식 병원과 일본식 장검을 휘두르는 곤도의 표상, 액션 활극에나 어울릴법한 옥경의 초인적인 퍼포먼스, 곤도의 어수룩한 일본인 조수의 생뚱맞은 사랑 고백 등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이 태연자약하게 이루어진다. 두 대의 카메라를 사용한 전통적 방식의 3D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둥둥 떠다니는 원귀들의 얼굴, 무덤을 뚫고 나오는 손, 카메라를 향해 날아드는 몽둥이와 램프 등 입체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적인 연출도 눈에 띈다. 영화의 색조는 시종일관 어둡고 여러 면에서 특이하게 보일 뿐 아니라 과장된 연극적 연기로 일관하는 배우들의 뻣뻣한 말투는 비현실적이어서 더욱 이목을 끈다. 촬영감독으로 영화 이력을 시작한 감독답게 이용민의 장면 연출은 카메라의 활용을 중심에 둔다. 옥경이 수행하는 역동적인 액션 신을 제외하면 대다수 장면을 실내 세트에서 촬영하여 속성 제작의 효율성도 성취한다. 곤도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원귀들의 환영은 조잡한 특수효과로 제시되어 B급 공포영화의 무드를 조성하고, 시각적으로 로우 키 조명으로 방과 복도 세트를 채우면서 공포영화의 표현 스타일을 확실히 구현한다. >> 악마와 미녀 고화질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