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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미국 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
<바쿠라우> 온라인 스트리밍 페이지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 뉴스 업데이트가 중단되었다. 미국 내외 박스오피스 정보를 공유하는 웹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의 기록은 3월 19일이 마지막이다. 3월 17일부터 미국내 프랜차이즈 극장들이 미국질병본부 지시에 따라 일제히 문을 닫았다. 뉴욕의 예술영화 극장들도 대부분 뉴욕주의 지침에 따라 운영을 중단했다. 영사기는 멈췄고 스크린은 꺼졌다. 신작들의 개봉 연기 소식들만 앞다투어 이메일 함에 쌓인다. 자가 격리 기간 동안 넷플릭스에서 봐야할 영화 추천 리스트가 주요 영화 기사로 업데이트 된다. 영미권 매체에선 영화의 과거를 되짚는 기사들도 즐비하다. 몇 십 년 전 영화사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오늘이 영화사에 있어 무슨 기념일인지 등 영화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현재의 영화는 존재감을 잃어가고 추억의 영화들이 이 힘든 시기를 달래주기 위해 소환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미국을 위협하기 직전까지, 미국 언론은 <기생충>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과 미국내 비영어권 영화 흥행순위 4위 입성을 축하하며 [1] , <기생충>이 미국 독립 영화계에 미칠 긍정적 전망을 기대하던 중이었다. <기생충>으로 개봉작 역대 최고 수익을 올리는 독립영화 극장도 등장하는 등 지역 극장에 미친 영향도 상당했다. 게다가 2월과 3월은 미국 독립영화계에 중요한 시즌이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코리언 아메리칸 이민자 이야기를 다룬 <미나리>가 대상을 수상한 후, 이어지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 모마 뉴디렉터스/뉴 필름즈 영화제를 통해 상반기 독립영화들이 대거 쏟아질 예정이었다. <기생충> 미국 배급을 맡았던 네온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공개하며 배급 명가의 저력을 이어가던 중이었고, 오랜만에 신작 <퍼스트 카우>로 돌아온 켈리 리처트 감독은 개봉을 맞이해 관객과의 대화 일정으로 바빴다. ‘포스트 <기생충>’ 시대가 어떻게 펼쳐질지 설레며 맞이했던 3월의 생동감은 갑작스런 극장 폐쇄와 함께 어느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뉴욕 IFC 필름 센터의 영업 중단 메시지 (출처: IFC 필름 센터 페이스북) 극장을 잃은 개봉 영화들은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 나섰다. 유니버설의 애니메이션 <트롤: 월드 투어>가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20달러 프리미엄 대여 옵션으로 직행했을 때, 업계에선 ‘극장 창구의 신성함이 깨졌다’는 우려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온워드> <인비저블 맨> <엠마> <더 헌트> 등의 신작들이 뒤를 이어 아마존 프라임에서 공개되었다. 몇 번의 클릭으로 집에서 편하게 개봉작을 즐길 수 있게 되자, 극장 문화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SNS 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미국 극장은 전쟁 시기에도, 대공황 때도, 9/11 사태 때도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국가적, 세계적 고비가 생길 때마다 극장은 관객의 불안을 달래주는 피난처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2020년 영화 관람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큰 극장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문을 닫는다며 비장하게 물러섰지만 관객들은 극장이 없어도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불편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텍사스 블루 스타라이트 자동차 극장 (출처: Blue Starlight drive-in 페이스북) 극장에 대한 열망은 기대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문을 닫은 실내 극장과 달리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장되는 자동차 극장에 갑자기 관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번화가에서 벗어나 있어 접근이 쉽진 않은 데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급하게 취소되었던 페스티벌 SXSW는 텍사스 자동차 극장을 미처 상영되지 못한 단편 초청작들을 선보이는 플랫폼으로 활용한다. 페스티벌과 극장을 모두 그리워하는 관객들을 위한 소규모 이벤트인 셈이다. 인터넷 상영으로 관객을 유치하되 극장 수익은 지키는 색다른 실험도 시도된다. 해외영화제 수상작을 선보여왔던 배급사 키노 러버는 미국 독립 극장들과 제휴하여 인터넷 극장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각 극장 링크에서 티켓을 구매한 경우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배급사는 극장과 그 티켓 수익을 나눈다. 첫 영화는 3월에 개봉한 <바쿠라우>다. 비록 오프라인 극장 시스템을 이용하진 않지만 협력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대안적 배급이라 할 수 있다. 집에서 영화를 보더라도 중간 매개자로 극장이 존재한다는 걸 각인시키기 위해 디자인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판데믹이 끝난 후 예전의 극장 관람 문화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관해선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극장이 재개장을 해도 2미터의 사회적 거리두기 제한은 한동안 지속될 테고, 인구 밀도 높은 공공장소를 경계하는 인식이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극장 관람이 관객들에게 주는 유대감과 연결감, 가상의 소속감은 포기하기 힘든 긍정적 정서적 기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며칠 전 월스트리트 저널에 극장 재개장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그는 극장이 “사회 생활의 중요한 일부”이며 “이번 위기가 지나면 함께 사랑하고, 웃고, 우는 인간의 집단적 참여 행위의 필요성이 더 강해질 것”이라 호소한다. 놀란 감독 외에도 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극장의 부재를 안타까워 하는 영화계 인사들의 글을 종종 접하게 된다. 우리의 극장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적어도 추억으로 남지 않기만을 빌어볼 뿐이다. [1]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않은 절대 수입액만 놓고 봤을 때 <기생충>은 <와호장룡> <인생은 아름다워> <영웅>에 이어 역대 비영어권영화 개봉 흥행 4위를 기록 중이다.
대구와 경북의 극장들
대구에는 1910년 이전 달성관(達城館)이라는 연예회장이 있었다. 극장이라기보다는 각종 집회와 연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1912년 폐관되었다. 그 외에도 대구 서문과 북문 밖에는 가설극장들이 존재했으며 금정(錦町)의 금좌(錦座)와 대화정의 낭화관(浪花館), 대구구락부와 같은 활동사진이 상영되던 극장이 있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대구지역의 극장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① 칠성관(七星館), 대송관(大松館), 만경관(萬鏡館), 대경관(大鏡館), 호락관(互樂館) 대구부 촌상정(村上町)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6년 후루가와(古川文之助) 등이 청원하여지어졌다. 1922년 무렵 칠성관은 대송관으로 바뀌었다. 이후 대송관은 대영관(大榮館)에 인수되어 제2대영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8년 만경관(萬鏡館)을 운영하던 이제필이 만경관이 화재로 소실 된 후 대송관(제2대영관) 건물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이후 만경관이 신축되자 이제필은 이곳을 대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영화 대경관 신설>, 《동아일보》, 1929.01.02) 이제필이 운영하던 대경관은 1933년 8월 12일 윤무용(尹武用), 김상덕(金尙悳), 김파영(金波影) 등의 경영진 하에서 다시 이름이 호락관(互樂館)으로 바뀌었다. 1938년 시설 낙후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② 대구좌(大邱座), 대구극장(大邱劇場) 대구좌는 대구부 전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용산의 앵좌(櫻座)를 이전하여 건설한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던 대극장이었다. (<대구좌 신축 신보(新捗)>, 《조선시보(朝鮮時報)》, 1918.04.27) 1918년 5월 말 대구기업주식회사에서 세웠다. 극장의 운영은 나카무라(中村喜一)가 맡았다. 1925년 봄 야마네(山根初太郞)가 대구좌의 운영을 맡아, 외관과 내부를 수리한 후 9월 재개장 했다. 이 무렵 대구좌라는 명칭 대신 대구극장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대구극장은 경성의 부민관이나 평양의 금천대좌와 같이 다목적 회관의 성격을 지닌 극장으로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조선관(朝鮮館), 만경관(萬鏡館) 조선관은 대구부 경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이다. 1920년 대구의 전당포업자들의 모임인 십일회(十日會)와 대구좌(大邱座) 주인 나카무라(中村喜一), 조선인 배모(裵某)가 합작하여 만든 극장이었다. (<대구에 극장 신설>, 《매일신보》, 1920.02.26) 하지만 건립 직후 화재로 사라졌다. 1922년 8월 조선관이 있던 자리에 만경관(萬鏡館)이라는 새로운 극장이 지어졌다. 삼층의 벽돌 건물로 대구지역의 대표적 조선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었다. 192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만경관의 흥행을 맡아하던 이제필은 대송관(大松館)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갔다. 1929년 화재로 사라졌던 만경관이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만경관의 흥행주는 니시야마(西山吉五郞)이며, 72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대영관(大榮館), 소명관(昭明館), 신흥관(新興館),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 대영관(大榮館)은 대구부 전정 14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으로 1921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대영관은 소명관(昭明舘)으로 관명이 바뀌었으며, 1931년 4월에는 신흥관(新興館)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흥관은 1939년 6월 문을 닫았다. 18년 전 지어진 건물이라 시설이 낙후하였기 때문이다. 1940년 7월 5일 시마다(島田金四郞)가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을 설립했다. 신흥관의 흥행권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1943년 현재 대구송죽영화극장의 흥행주는 이토(伊藤勘吾)이며 객석 수는 570석이었다. 해방 후 대구동보극장(大邱東寶劇場)으로 바뀌었다. ⑤ 영락관(永樂館) 1930년 무렵 대구부 전정(田町) 11번지에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인 영락관(永樂館)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당시 경영자는 나가오(長尾喜重郞)이었다. 1934년 영락관을 운영하기 위해 주식회사 대구영흥상회(大邱映興商會)가 조직되었다. 1936년 여름 시설을 크게 개선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송전극장으로 바꾸었다. ⑥ 대구키네마구락부(大邱キネマ俱樂部), 대구보총극장(大邱寶塚劇場) 대구부 동성정 2정목 88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대구키네마구락부는 1938년 호락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1940년 이름을 대구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950석에 달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는데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⑦ 김천좌(金泉座), 김천극장(金泉劇場) 김천좌는 1910년대부터 흥행장으로 활용된 경상북도 김천의 극장이다. 정확한 설립연대와 설립자는 알 수 없다. 1925년 무렵 낡고 협소한 공간이 문제가 되어 당시 관주인 후쿠시마(福島格一)가 영업을 중지했다. 대신 1923년 잠시 문을 열었다가 문을 닫은 활동사진상설관 조선관(朝鮮館)의 건물을 인수받아 영업을 이어갔다. (<金泉唯一の娯楽塲>, 《朝鮮新聞》, 1925.08.22) 1938년 김천읍내 유지들로 구성된 경북흥업주식회사가 김천좌의 흥행권을 인수한 후 성내정의 부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극장을 신축하게 된다. (<경북흥업 신축 재이(在邇)>, 《동아일보》, 1938.02.24)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김천극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노(佐野秋千代), 지배인은 타니히치(谷久平)이다. 객석 수는 800석이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⑧ 영일좌(迎日座) 포항극장(浦項劇場) 1920년대 포항에는 영일좌(迎日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언제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영일좌에 이어 들어선 극장이 포항극장이다. 1936년 포항읍 대정정에 들어섰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노우치(山之內學)이며 객석 수는 597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영천극장(永川劇場) 경북 영천읍 창구동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34년 무렵 신문지상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하라(安原在玉)이며, 객석 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상주좌(尙州座), 상주극장(尙州劇場) 경북 상주읍 서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쿠쇼쿠(拓植光太郞)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⑪ 예천극장(醴泉劇場)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8년 1월 영업을 시작했다. 설립자는 예천 청년 김위진(金渭鎭)으로 1만 1천원의 비용을 들여 완성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위진(창씨명 正木渭鎭)이며 객석은 총 400석이었다. ⑫ 청도회관(淸道會館) 경북 청도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하라(大原基一)이다. ⑬ 안동극장(安東劇場) 경북 안동읍에 있었다. 1939년 무렵 개관을 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권투경기가 자주 열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가노(中野文雄)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⑭ 경주극장(慶州劇場) 경북 경주읍 동부리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8월 19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경주 학교조합관리자 기노시타(木下宇平)이다. (<慶州劇塲竣工>, 《朝鮮新聞》, 1928.8.17) 경주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으로 연극, 영화의 상연은 물론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39년 9월 17일 흥행주 기노시타(木下淸)가 낡고 좁은 건물을 증축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노시타(木下淸)이며 객석 수는 350석이다. ⑮ 대인좌(大仁座) 구룡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32년 11월 20일 설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다(多田仁助)이며 객석 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영주극장(榮州劇場) 영주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로타(廣田且吉), 지배인은 야스다(安田浩三)였다.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강구회관(江口會館) 강구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지하라(藤原英一)였다. ⑱ 의성회관(義城會館) 의성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라노(平野文雄)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자료] 《朝鮮新聞》, 1928.08.17. 慶州劇塲竣工, 十九日落成式 (慶州)篤志家木下宇平氏は前學校組合管理者にして地方發展の爲慶州劇場建設を計畫し愈愈日頃竣工し上つたので新築落成式を兼ねこけら落しを擧行する事となり內地より松島家松鶴一座を招聘し來ろ19日午後3時より落成式を擧げ引續き6時から招待演劇を開幕すぺく多數各方面に夫夫招待狀を出しをりつあり [자료] 《매일신보》, 1940.11.11. 감포극장(甘浦劇場) 전소(全燒) 【경주】 감포극장(甘浦劇場)은 지난 八일 오전 二시경에 전소하였는데 원인과 손해는 방금 당지 주재소(駐在所)에서 조사 중이라는데 동 극장은 十여 년 전에 건축한 二층으로서 손해는 대략 三천원가량이라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7.05.19. 대구의 대극장, 만경관(萬鏡舘) 전소(全燒), 십팔일 새벽에 불이 낫다 【대구지국특전】 대구에 잇는 죠선인 죠합 조직의 활동사진상설관 만경관(萬鏡館)은 젼에 불탄 극쟝자리에 새로 셰운 남선유일의 큰 극장이엇섯는대 십팔일 새벽 돌연이 불이 나서 대구 시내의 소방대는 일제히 츌동하야 진화에 노력하야 연소는 없섯스나 만경관은 젼소되고 악긔와 및 비품도 젼부 소실되고 마랏다는대 진화는 오젼 여섯시경이었다. 손해는 오(五)만원, 원인은 실화인 듯 츌화한 원인에 대하야는 아직 조사 즁이나 삼층 우에서 발화되듯하다 하며 손해액은 젼부 오만원 이상에 달하겟고. 보험에는 삼만원 드러잇다고 한다. 만경관은 최근에 신츅된 남션 유수한 극장이다. [자료] 《동아일보》, 1922.06.28. 대구 이오극장(二五劇塲) 신설 대구부 경정(京町) 一정목 전(前) 조선관(朝鮮館) 기지(基址)에 대구 유력자 十二인이 합명하야 극장을 건설하고 기(其) 명(名)을 이오관(二五館)이라 하야 활동사진 ᄭᅡ 지 겸영(兼營)하리라더라.(대구) [자료] 《동아일보》, 1939.09.20. 경주극장 신장(新裝), 거(去) 십칠일부터 개관 【경주】 二만여 읍민의 유일한 관극장소인 경주극장(慶州劇場)은 과거에 넘우 자리가 협소하야 왜지의 큰 흥행단체도 흥행 “코-수”에 엇지안코 통과하는 일이 만흘뿐덜어 또한 조곰 조흔 극이 오면 즉시 만원이 되어 일반의 관극 상 불편이 적지 안엇는터인데 금번 극장주 목하청(木下淸)씨가 다대한 돈을 엇고 수리를 시작하야 낭하를 물리이고 장내를 확장하는 등 어느 정도의 신장을 보이게 되엇다. 그동안 근 수십일을 두고 휴업중에 잇든 경주극장도 지난 십칠일 밤부터 참신한 면목으로 손의 앞에 개관케 되엇다. 앞으로 속속 조흔 흥행물을 골나서 관중을 마즈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8.01.12. 예천극장 개관 【예천】 예천 지방에서 일반이 갈망하든 극장은 예천읍 발전 상 긴요한 숙제이든바 당지 청년 김위진(金渭鎭)씨의 노력으로 一만 一천여원의 금전과 五개월의 시일을 소비한 결과 지난달에 준공하고 그동안 모든 설비도 완비되엇으므로 신년 벽두를 기하야 지난 五, 六 양일간 주야겸행으로 일반에게 피로 공개한바 연일 초만원의 성황이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1.02. 영화 대경관(大鏡館) 신설 대구의 상설영화 만경관은 연전(年前)의 화재를 당한 후, 당시 경영자 이제필(李濟弼)씨는 촌상정동(村上町洞) 대송관(大松館) 집을 빌어 만경관 이름을 보게(保揭)하고 이래 적극적 노력을 하야 오든 바 금번 경정(京町) 소지(燒址)에 신관이 재성(再成)되고 신경자(新營者)가 현출(現出)됨으로 씨는 종래의 만경관 명을 해관(該館)에 양환(讓還)하는 동시, 신년 一월 一일부터 종래 씨의 경영하든 바 만경관은 『대경관』이라 개칭하야 더욱 확충에 진력하겟다는 바이로서 대구에 영화상설관은 양처(兩處)가 된다더라. 【대구】
[초이스]거인
오밀조밀하게 바닥에 깔린 마을로 거꾸로 몸을 떨구는 사람의 포스터 한 장, 그리고 욕조에 담긴 그득한 물에 간신히 눈코입만 내놓고 누워있는 사람의 포스터 한 장. ‘사는 게 숨이 차요’ 포스터와 카피가 인상적인 이 영화는 사는 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만치 버거운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영재는 부모님이 살아있지만 가정에서 사는 것이 어려워 그룹홈으로 들어와 사는 고등학생이다. 시설에서 살기에는 나이가 꽉 차 이제는 나가야 하지만 영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교회 돈만 노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불쌍한 동생이 살고 있는 곳은 영재에게, 본인 스스로 걸어 나온 순간부터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런 영재가 지내는 그룹홈 ‘이삭의 집’은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지만, 그곳에서조차 그의 안락을 방해하는 것들이 나타나 그를 편히 놔두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영재는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 영재는 새벽과 밤에 조용히 움직인다. 처연한 색감과 냉랭한 공기가 그의 상황과 어우러진다. 가냘프게 떨리는 핸드헬드로 촬영된 화면에서 그의 삶의 불안과 불편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는 이삭의 집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신발을 훔쳐다 학교에서 팔고, 자신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어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하는 이유 아닌 이유는 점점 거짓말이 되어간다. 영재가 “신부님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여기에 남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 사실은 ‘신부고 성당이고 쥐뿔도 관심 없지만 내가 살려면 신부가 되어야 한다’라도 누가 이 소년의 거짓말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 영재의 삶이 더욱 지리멸렬하고 절실해질수록 누군가 “너는 왜 여기에 있어야 하냐”고 물으면 그는 외운 것처럼 대사를 던지는데, 그 말을 하는 그조차 그 말의 목적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남은 단어는 ‘생존’밖에 없다. 영재를 구원해줄 것만 같은 인물들이 몇 등장하긴 하지만,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조언하는 예쁜 선생님조차 그를 도와줄 수 없다. 영재와 범태 김태용 감독의 영화에서는 휘두르려는 자와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는 자로 구성된 관계가 자주 등장한다. 세고 거칠게 한쪽이 한쪽을 제압하고 휘두르려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이 관계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는 쪽은 결국 휘두르려고 한 쪽이 된다. 가장 약한 최하위의 인물들이 서로 부딪히고 보듬으면서 한 줄기 빛도 없을 것 같아 보였던 그들의 삶에서 돌파구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그렇게 힘들게나마 영재를 계속 살게끔 부추기는 것은 어른들 중 그 누구도 아닌 같은 처지의 동생 민재, 그리고 같은 그룹홈의 친구 범태이다. 동생 민재를 윽박지르고, 그룹홈 내에서 여우 짓으로 얻어낸 신뢰를 무기로 범태를 무시하는 영재가 얼핏 그들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영재를 가르치며 그를 삶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은 반대로 그들이다. 원장아빠의 압박에 이삭의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길거리로 내몰렸을 때 그가 전화를 건 것은 먼저 집을 나간 범태에게였고, 자해소동을 벌인 뒤 성당에 갔을 때도 영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범태였다. 범태는 영재가 궁지에 몰려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어김없이 등장해 영재가 벌인 일들을 돌아보게끔 한다. 자신보다 더 깊게 바닥을 치며 살아가는 범태로부터 영재는 꾸짖음과 동시에 위로를 받는 듯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재는 민재를 보살핀다. 영재가 부모님의 무책임에 치를 떨면서도 누군가에게 똑같이 무책임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과 똑 닮은 민재이다. 동생을 자신처럼 만들고 싶지 않은 연민이 그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을 막고 있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온갖 불행을 다 떠안은 것 같고 삶은 힘들기만 한데, 또 끝까지 견디어내고도 싶다는 것이 안타깝다. 영화 안에서 주인공은 영재이지만, 누구든 영재처럼 때로는 폭발하며 때로는 꾹 눌러 참으며 누구에게도 도움을 기대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부대끼며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떠나는 차 안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울음을 삼키는 영재를 보며 작게 한숨을 지어본다. 영화의 시작부터 내내 차오르던 숨이 터지며 가슴이 먹먹해지다가 다시금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