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하츠 갤러리
- 감독
- 나탈리 크린스키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제랄딘 비스와나탄, 데이커 몽고메리, 우카쉬 엠부드카, 수키 워터하우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햄릿이 연출한 선왕 시해의 비밀이 담긴 극중극 《곤자고의 살인》이 나온다. 햄릿은 공연을 위해 극단원들에게 연기를 지도한다. 햄릿: 부탁하건대 그 대사를 읊을 때 내가 보여줬던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고함에 과장에 야단법석을 떨 바에는 차라리 장사꾼에게 배역을 맡기겠어. 손놀림도 허공을 휘젓지 말고 점잖게 움직여야 해. 폭풍처럼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평정을 잃어서는 안되네. (…)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워서도 곤란해. 각자 맡은 역할에 신중을 기하고 행동에 어울리는 말을 하고,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하게.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알겠나? 햄릿이 연기에 대해 피력한 견해들은 16세기 영국의 연기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담고 있다. 햄릿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생각한 당시 연기술과 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그리고 추구하는 연기술을 집약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에 작가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것을 작가의 자기반영적 기법이라고 한다. 몇 가지 예시를 더 살펴보자.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는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관찰자이므로 화폭에서 모델이 될 수 없는 작가가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한 것은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의사 출신인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작품마다 의사 역을 넣어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위폐범들』에서 주인공 에두아르를 「위폐범들」을 집필하는 소설가로 설정한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일기와 수첩에 「위폐범들」의 창작에 관한 구상을 기록하는데, 여기서 수첩의 내용은 지드의 실제 작품일지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작가가 등장하거나, 페르소나를 통해 작가의 견해를 대변하거나, 작품 속에 작품 제작에 관한 내용을 드러내는 것 모두 자기반영적 기법이다. 이는 작품 밖 작가 차원의 영역을 작품 안에 개입시키면서 작품 스스로 허구임을 드러내고, 관객은 작품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모호한 상태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즉, 작품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작품을 견인해 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잘 드러난다. 초창기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며 영화 안에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욕망의 법칙>에서 계산원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에서는 주인공들이 보는 TV속의 배우로 나타나 관객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하다가 작품에 등장한 감독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각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작품에 영화감독 역을 등장시킨다. <욕망의 법칙>, < 욕망의 낮과 밤 >(원제: 나를 묶어줘!)에서는 상대에 대한 집착과 욕정을 가진 감독으로, < 나쁜 교육 >에서는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을 그렸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 >는 감독 역할에 알모도바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기 시작한 작품이다. 영화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 扮)가 시각장애인이 된 다음에 온전히 음성으로만 듣고 편집한 장면을 돌려보는 앤딩의 대사는 마음을 울린다. “중요한 건 영화를 끝내는 거야. 비록 앞이 안 보여도 영화는 끝을 봐야 해.” 2020년 작 < 페인 앤 글로리 >는 알모도바르가 자기반영적 기법을 집약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는 영화를 두고 “나의 70년 인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영화의 포스터는 주인공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 扮)의 그림자를 알모도바르의 그림자로 배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자전적 영화임을 드러낸다. 알모도바르는 배우 반데라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세트를 재현했다. 심지어 미장센으로 사용된 살바도르의 부모님의 사진을 자신의 부모님 사진으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감독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나 어머니와의 관계, 건강상태 역시 알려진 사실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1) 2) 1)<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살바도르의 그림자는 알모도바르이다. 2)<페인 앤 글로리> 살바도르의 어머니 방에 있는 가족사진은 알바도르의 실제 부모님(안토니오 알모도바르와 프란체스카 카바예로)의 사진이다. 영화는 살바도르의 현재,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꿈, 그리고 첫사랑에 관해 고백하는 연극이라는 세 가지 구조를 통해 전개된다. 현재의 살바도르는 척추 융합 수술 후유증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의지를 상실한 휴직상태의 영화감독이다. 32년 전 개봉한 자신의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 한 기념으로 영상자료원에서 상영과 GV를 제안하는 바람에, 영화 이후 인연을 끊은 <맛>의 주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扮)와 3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알베르토로 인해 접하게 된 헤로인은 살바도르를 어린시절 고향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살바도르에게 영화적 감수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카톨릭 학교는 무신론자가 되게 하는, 미장이 형 에두아르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하는 계기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꿈에서의 어린 시절은 현재의 살바도르의 모든 원천이자 심연의 일부인 것이다. 살바도르의 자전적 이야기인 극중극 《중독》은 살바도르의 청년 시절, 동성애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모노로그 형식으로 전하는 연극이다. 살바로드의 집에 방문한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가 집필한 《중독》을 읽게 되고 매료되어 연극 무대에 올릴 것을 제안한다. 처음에 살바도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고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하나, 결국 알베르토의 뜻대로 대본을 넘겨주며 자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살바도르는 연극 무대와 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한다. 살바도르: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게 좋겠어. 스크린 하나, 의자 하나. 팔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의자에 앉아. 알베르토: 팔다리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거든! 살바도르: 수정하고 나서 좀 멜로드라마틱 해졌어. 알베르토: 걱정마, 내 전공이 멜로드라마니까. 멕시코에 있었던 게 도움이 되겠네. 살바도르: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감정을 좀 죽여야돼. 감정을 조절해. 울지마 배우들은 울 기회만 있으면 울더라. 잘 하는 배우는 눈물 흘리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니까. 알베르토: 뽀뽀해줘야겠다. (…)이번엔 셰익스피어도, 체호프도, 로르카도 아냐. 너를 연기하는 거야. 살바도르: 이상하게 하면 내 기분이 엉망이 될 거야. 잘 하면 훨씬 더 엉망이겠지. 《중독》에서 자신의 역을 맡은 알베르토에게 원작자로서 지시사항을 전하는 부분이다. 살바도르의 연극에 관한 견해는 곧 알모도바르의 견해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 것처럼, 알모바르도는 자전적 영화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를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내비치고 있다. 《중독》 무대에는 살바도르의 조언대로 스크린을 하나 놓았는데 그것을 통해 어린 시절 살바도르가 살던 동네, 보던 영화, 연인과 갔던 추억의 장소 등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비춘다. 이는 실제 알모도바르의 장소이기도 하다. 감독은 현재의 살바로드, 꿈속 어린 살바도르, 연극의 알베르토를 통해 자신을 대리하게 한다. 관객은 세 가지 버전의 알모도바르를 중첩시키면서 영화 내내 알모도바르를 상기하게 된다. 영화의 디제시스는 독립적이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정수는 앤딩 장면을 통해 구축된다.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한 살바도르는 다시 꿈을 꾸고, 영화 초반 등장한 기차역 꿈 장면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줌 아웃 되면 붐 마이크를 들고 있는 스텝과 바닥의 조명판이 드러나고, 살바로드가 컷을 한다. 스텝이 등장해 마지막 슬레이트를 치는데, 슬레이트에 적힌 영화 제목이 <첫 번째 열망>이다. 이 장면은 살바도르가 영화감독으로 제기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영화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준 모든 내러티브가 촬영의 일부였음을 암시하게 한다. 즉,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수미상관의 구조를 갖춤으로써 영화 속 세계의 층위가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구성을 취하는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실제를 바탕으로, 영화제작 과정, 영화적 현실, 꿈 그리고 연극이 상호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과 같다. 막이 내려도 관객은 영화의 무한 순환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총 망라되어있는 영화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현실을 순환시키며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유니버스에 관객을 가둔다. 팩트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상태, 그의 영화는 팩션이다. 어머니: 그 이야기꾼 표정하지 마라. 이런 얘기 네 영화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웃들 이 영화에 나오는 건 싫어. 난 팩션이 싫단다. 살바도르: 팩션에 대해 뭘 아신다고! 어머니: 네 인터뷰에서 들었다. 이웃들도 영화에 나오는 건 싫을 거야. 시골 무지렁이처럼 표현한다고 생각할거다. 살바도르: 말이 왜그래요 엄마. 존경과 정성을 담아서 표현하는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엄마 얘길 한다고요. 엄마와 이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요. 전부 그분들 덕택이라고 하는데.. <페인 앤 글로리> 중. 지금까지 영화와 영화를, 영화와 연극을,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연결하며 형성하는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1편 「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편 「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3편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을 통해 알아보았다.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관람하고 싶어졌다면 알모도바르 팬으로서 절반은 성공했다 자평하고 싶다. 그리고 알모도바르 영화에 대해 엉켜있던 날실과 씨실이 조금은 풀렸기를... 감상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시각이 있다면 나눠주시길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고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첫 영화 개봉 이후 올해로 데뷔 41년을 맞은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놓으며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감독의 영화적 유니버스는 더욱 거대하고 견고해졌으며 이제는 많은 일반 관객을 그의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악동 기질이 드러나는 초창기 키치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과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또한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은 내러티브나 표현방식이 순화되고 세련되어졌다. 감독의 연륜과 함께 그의 영화도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일관된 관심이 여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영화에서 남성을 부재하거나 있어도 무능한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한다. < 내가 뭘 잘못했길래 >, < 하이힐 >, < 귀향 >의 남편들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아 아내와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에서 유일한 여주인공의 희망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과 친구는 성전환을 해서 가슴을 달고 나타난다. 심지어 수녀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반면 여성은 외연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성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해낸다. 오늘날 독립적 여성 캐릭터는 이미 정체성을 완고히 하고 있지만 80년대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설정은 파격적이었다.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떠난 남자의 목숨을 구한 뒤 당당히 이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짜릿함 마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여성이 자식과 어머니에게 갖는 애정을 최상위의 감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 < 하이힐 >, < 귀향 >, < 줄리에타 >는 십여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녀의 관계를 기반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사랑과 그것의 결핍으로 인한 그리움, 비뚤어진 질투까지, 모녀가 느낄 수 있는 회환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마약 중독자가 한번 약에 다시 손을 대면 몇 년을 끊고 살았더라도 다시 빠져들고 말지. 오랫동안 네 생각을 참으며 지냈지만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그 바보 같은 희망이 힘들게 쌓은 새 인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네가 없다는 공허함이 내 삶을 파괴하고 있어.” <줄리에타> 줄리에타의 일기 중. “난 평생 엄마를 따라하며 살았어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모든 면에서 엄마랑 경쟁하려 했다고요.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이겼었죠. 마누엘! 난 그와 결혼했죠. 엄마가 할 줄 알았는데! (…) 어렸을 때 난 귀찮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늘 엄마를 돕고 싶었다고요. 엄마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이힐> 레베카 대사 중.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눌려있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남편에 대한 결핍은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아픔일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여성들은 이 아픔을 다시금 여성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동질감, 모성애로 응축된 그들의 의리는 남성들이 외치는 의리보다 더욱 소리 없이 끈끈하고 질기다. 여성들이 소파에서 모여 수다를 하는 장면들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알모도바르는 미장센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80년대의 작품을 근래에 다시 보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주인공들의 의상과 세트, 그리고 갤러리에 와있는 듯한 회화의 향연은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를 거부라도 하는 듯 시각적으로 환기를 준다. 게다가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퀴즈,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색깔은? 눈치챘겠지만 정답은 빨강이다. <하이힐>의 저명한 아나운서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 扮)가 타는 차, <귀향>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의 어머니가 트렁크에 숨어있던 차, < 브로큰 임브레이스 >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죽음을 맞이하는 차, <줄리에타>의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 扮)가 떠난 딸을 찾으러 갈 때 타는 차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기종은 달라지지만 여주인공의 승용차가 빨간색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종종 버드 아이즈 뷰로 도로를 지나는 여주인공의 자동차의 모습을 담는다. 특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을 종과 횡으로 지나는 빨간 자동차 장면은 보색의 대비로 더욱 잔상이 각인된다. 빨간 자동차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시대와 장르를 그야말로 종과 횡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닐까? 빨간 자동차와 함께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영화를 연결하는 유니버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반복적으로 다시 출연시키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배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배역을 더욱 진짜처럼 믿게 하고 싶어서 혹은 뉴 페이스를 통해 새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일루전의 고조나 분위기의 전환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욱 강조하는 편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연부터 단역에 이르기까지 전작에서 봐온 익숙한 배우가 늘 다시 등장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세실리아 로스,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마리사 파레데스는 대표적인 감독의 페르소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 라이브 플레쉬 >에서 버스에서 아기를 낳는 창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연약하고 순수한 수녀, <귀향>에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매력적인 여배우를 연기했다. 변화무쌍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모두가 손꼽는 대표적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초기작 < 나쁜 버릇 >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고(故) 커스 람프리브는 엄마, 할머니, 이웃 등 단역으로 출연하며 웃음을 주는 씬스틸러이기도 했다. 마블의 팬들은 마블 유니버스가 총 망라되어있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에서 히어로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의 환호성을 질러봤을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팬들 역시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분하는 친근한 배우를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배우를 통해 감독의 전 작품들을 상기하다보면 어느새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컨벤션 외에도, 감독은 독특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전작들을 연결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와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 扮)가 찍은 코미디 <여인과 가방>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 <여인과 가방>의 편집본을 다시 보는 장면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알모도바르의 그로부터 20년 전의 개봉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릎을 탁 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종국에 친구가 된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扮)와 위마 로조(마리사 파레데스 扮)는 3년 뒤 < 그녀에게 >에서 야외공연 관람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관객에게 그녀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들 방에 걸려있던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는 <그녀에게>의 베니그노(하비에 카마라 扮)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영화는 연결된다. <욕망의 법칙>에서는 영화 감독인 파블로(유세비오 폰셀라 扮)를 통해 장 콕도의 희곡 <휴먼 보이스>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대리하게 하지만 13년 뒤 < 휴먼 보이스 >를 내놓으며 애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처럼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물, 오브제, 그리고 소재 등을 자신의 작품에 재투영하며 전작과 연결고리를 채운다. 악동과 성자, 고집불통과 재기발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알모도바르의 유니버스는 다음편에서도 계속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1편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2편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3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가 연재된다. 나가며... “돌아온 과거와의 우연한 만남이 두려웠지. 내 삶이 흔들릴까봐. 추억으로 가득한 그 밤이 두려웠지. 내 꿈이 뒤 엉킬까봐. 하지만 도망치던 나그네는 곧 발길을 멈추리라. 모든 걸 앗아간 망각이 내 오랜 망상들을 죽였다 해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귀향. 주름진 이마 세월의 눈이 쌓인 백발이 되어 귀향을 하네. 인생은 한 순간. 뜨거운 눈빛은 널 찾아 그림자 속을 헤메고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달콤한 추억에 의지해 내 영혼은 힘을 얻네 ” <귀향> 라이문다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귀향》의 가사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클리셰’는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진부함을 넘어 전혀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호주 영화 < 다윈으로 가는 마지막 택시 >(이하 <마지막 택시>)가 그런 경우다. 새로운 건 없다. 전형적인 로드 무비이며 죽음을 앞둔 노인의 모습에선 < 버킷 리스트 >(2007)가 연상된다. 여행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거대한 풍광 앞에서 경이감을 느끼는 것 역시 이 장르의 관습이며, ‘삶에 대한 긍정’도 수많은 영화가 품었던 테마다. 그럼에도 새롭다면, 욕심부리지 않고 차분하게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는 제레미 심스 감독의 기본기 충실한 연출 때문이다.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의 깊이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정공법. 결국엔 울림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삶에 대한 성찰, 로맨스, 유머와 페이소스. 영화의 스토리를 이루는 이러한 기본 요소들이 매끈하게 봉합되어 어우러지기가 의외로 어려운데, < 마지막 택시 >는 쉽게 해낸다. 원작은 레지널드 크립의 희곡이다. 호주의 작가이자 배우인 그는 제레미 심스 감독과 10년 전에 처음 만났다. 그 역시 배우였던 심스는 연출을 시도하며 데뷔작으로 크립의 희곡 <더 리턴>를 각색해 <프레오로 가는 마지막 기차>(2006)를 만들었다.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연히 함께하게 된 승객들이 주인공인 스릴러로, 배우들의 호연과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평단의 관심을 끌었다. 심스의 두 번째 작품 < 비니스 힐 60 >(2010)은 전쟁 영화로 기술적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세 번째 작품인 < 마지막 택시 >는 평단의 호응도 호응이었지만, 주인공 렉스 역을 맡은 마이클 케이턴의 인생 영화이기도 하다. 73세(1943년생)인 이 배우는 1969년에 데뷔해 TV를 중심으로 40년 넘게 거의 호주에서만 활동했다. 화장실 유머 ‘덕후’라면 < 애니멀 >(2001)에서 로브 슈나이더에게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던 미친 의사를 기억하실지도. 바로 그가 케이턴인데 <마지막 택시>를 만나 생애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이라는 걸 거머쥐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린 한 노인의 비루한 삶을 만난다. 호주 남부의 뉴 사우스 웨일즈에 있는 작은 도시 브로큰 힐. 택시 운전을 하는 렉스(마이클 케이턴)는 가족 없이 홀로 살아간다. 매일 저녁 바에서 만나는 몇 명의 술친구들과, 길 건너편에 사는 뚱뚱한 원주민 여성 폴리(닌갈리 로포드)가 인간관계의 전부다. 어느 날 그는 암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단호하게 입원을 거절하는 렉스. 이때 우연히 뉴스 하나를 접한다. 북부의 다윈 지역에서 호주 최초로 존엄사가 법으로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닥터 파머(재키 위버)는 자신이 개발한 기계를 체험할 첫 지원자를 찾고 있었고, 렉스는 곧장 전화한다. 장장 3,000㎞가 넘는 여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 마지막 택시 >는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선택에 대한 ‘실존적 영화’처럼 보이지만, 길이 펼쳐지면서 서서히 ‘풍경의 영화’로 바뀐다. 플린더스 산맥과 우드나다타를 경유해 내셔널 하이웨이를 달리는 길은 ‘죽기 위한 여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답다. 그는 황야에서 일몰을 보고, 세월을 알 수 없는 고목 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들고양이들을 매단 나무를 보며 잠시 죽음의 현실을 잠깐 떠올리지만, 그것마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관광엽서에 담길 이미지가 된다는 걸 깨닫는다. 거의 평생을 브로큰 힐이라는 작은 마을에 갇혀 살았던 렉스는, 죽음 직전이 되어서야 세상의 아름다움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셈이다. 아이러니다. 이때 동행자가 등장한다. 틸리(마크 콜스 스미스)라는 원주민 청년이다. 결혼해 두 아이까지 있지만,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다. 프로 풋볼팀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성격과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은 그를 계속 표류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여정의 1/2쯤 되는 앨리스 스프링스를 거쳐 2/3쯤 되는 달리 워터스에 도착한다. 이 지역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줄리(엠마 해밀턴)는 영국에서 온 전직 간호사. 자유로운 삶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렉스의 외로운 여행길과 풍경을 담던 영화는 어느새 세 사람의 로드 무비가 된다. 렉스의 건강은 점점 악화된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렉스는 자살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힘들군. 목숨 끊는 게….” 결국 세 사람은 함께 다윈으로 향하고, 영화는 힐링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운전을 하기 힘들 정도로 지친(하지만 결코 운전대를 놓지 않는) 렉스는, 틸리와 줄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계곡의 옥빛 물에 몸을 담근다. 난생처음 바다를 보는 렉스는 다윈의 해변에서 줄리에게 말한다. “아름답군.” 하지만 이젠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다. 원칙적으론 여기서 영화가 끝나야 한다. 렉스는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잠들 듯 죽어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 죽음을 추모해야 한다. 하지만 < 마지막 택시 >는 여정의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 죽음을 앞둔 그는 전화로 고백을 시작한다. 고백의 대상은 앞집에 사는 폴리다. 그녀에게 청혼하려 했지만 단념한 적이 있었던 렉스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와 가족과 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전한다. 그리고 다윈에서 브로큰 힐로 돌아가는 긴 여정에 오른다. 홀로 떠났듯 홀로 돌아가는 길이 끝나고, 렉스는 폴리와 만난다. “당신 살 냄새가 좋네… 이젠 안 아파….” 렉스는 폴리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다.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시작한 영화는 잔잔한 로맨스로 저문다. 그런데 < 마지막 택시 >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인종 화합의 메시지다. 렉스가 죽음의 충동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일종의 구원으로 본다면, 구원자는 다름 아닌 원주민 여성 폴리다. 그녀 역시 홀로 살고 있으며, 까칠해 보이지만 렉스를 품어 주는 유일한 여성이다. 영화는 렉스와 폴리가 깍지를 끼며 잡은 손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데, 이 신은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순간이다. 렉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상속했고, 결국은 돌아와 그녀 옆에 앉는다. 폴리는 렉스에게 가족을 선사하는 셈이며, 그녀 덕분에 렉스는 가족의 품에서 삶을 마감할 수 있다. 렉스가 길 위에서 만나는 틸리도 역시 원주민이다. 그는 렉스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으며, 렉스는 그가 풋볼 선수로 살아갈 수 있게 격려하고 돕는다. 틸리는 렉스에게 아들 같은 존재인 셈이다. 게다가 틸리는 백인인 ‘영국 여성’ 줄리와 연인이 된다. 영국은 호주에게 역사적으로 ‘본국’과도 같은 나라다. 그곳에서 온 백인이 호주의 원주민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는다는 설정은, 줄리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는 설정을 통해 영화에선 대수롭지 않게 표현되지만 사실은 파격적인 것이다. 렉스와 폴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이 많은 백인 노인이 원주민 중년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호주 사회에선 꽤나 조심스럽다. 영화 초반부, 폴리는 매일 차를 가져와 렉스에게 대접하고, 두 사람은 함께 의자에 앉아 다정한 시간을 가진다. 이때 옆집의 ‘백인’ 중년 여성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자 렉스는 잡고 있던 폴리의 손을 슬며시 놓고 일어선다. 마치 들켜선 안 되는 관계처럼 말이다. < 마지막 택시 >는 인종 문제에 대해 절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미시적인 시선을 통해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호주 사회를 보여준다. 그리고 로맨스를 통해, 즉 충돌이 아닌 융화의 방식으로 사회적 모순을 누그러트리는 ‘휴머니즘’의 시선을 보여준다. 다른 인종 사이의 인간적 관계가 먼저 형성되었을 때 본격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브로큰 힐을 떠나 다윈으로 향했던 렉스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렉스는 줄리에게 틸리가 유부남임을 이야기하고, 망설이던 줄리는 틸리 곁을 떠나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다. 줄리와 이별한 틸리는 다윈에서 풋볼 선수 생활을 하며, 방치했던 가족을 다시 찾는다. < 마지막 택시 >는 길 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끝난다. 그리고 아들과 딸 같았던 틸리와 줄리를 떠나 보낸 렉스는, 아내와 같은 존재인 폴리에게 의지한다. 이 영화가 결국 선택하는 종착지는 ‘가족주의’인 셈인데, 이 단어에서 흔히 ‘화목함’이나 ‘포근함’ 같은 뉘앙스가 떠오른다면, <마지막 택시>의 ‘가족주의’는 일종의 ‘연민’이다. 죽어가는 자에겐 죽음을 지켜보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렉스가 긴 여정에서 깨달은 유일한 진리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 그의 곁엔 폴리라는 ‘가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