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두
- 감독
- 최태연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제랄드 리뻔 다스, 모하메드 마라즈, 샤헌 암리 모뎀, 샴술 알봄, 조현철, 김재희, 이장노, 정성자, 문수희, 윤정필
한국 호러 영화가 비루한 조국의 건축 상황 때문에 애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했다. 성과 대저택이 있어야 제목도 근사하게 뽑고 그림도 나올 텐데, 현대 남한 땅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박윤교 가 감독하고 이종세가 각본을 쓴 < 마녀성 >에도 성은 안 나온다. 대신 영화는 제목의 성을 대체할 나쁘지 않은 공간을 찾아낸다. 바로 화장장이다. 화장장이라고 특별히 무서운 곳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이 공간에 대한 당시 한국 관객들의 편견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면 효과가 꽤 그럴싸했을 것이다. 요새 추모공원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먹히지 않겠지만.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등장하는 것도 화장장이다. 지문을 읽어보자. 뇌성벽력이 일면서 비바람이 사납게 분다. (중략) 번개불에 들어나는 화장장의 검은 굴뚝과 을시년스런 건물. (중략) 어디선가 비 바람결에 들려오는 여인의 애절한 통곡소리. 이후 등장하는 것들은 거미줄, 번개, 비바람, 뇌성, 호롱불. 이 정도면 호러 영화 분위기용 소도구들이 총동원된다고 할 수 있다.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 희정은 아시아 영화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클럽 가수이다. 당연히 미인이고 (‘백옥같이 아름다운 얼굴, 그 어딘가 우수에 가득 찬 얼굴,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는 눈동자’) 단골 팬들의 충성도도 높다. 지금 희정은 백영민이라는 모 회사의 전무와 연애 중인데, 영민의 청혼을 계속 거절하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유부남 시절(현재는 상처한 상태)부터 희정을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하나 있는데, 그는 상현이라는 악당이다. 여기서 악당이라는 걸 강조하는 이유는 더 이상 내가, 이런 행동을 나쁜 짓으로 인식하는 게 상식인 문명국에 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대사를 보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상현이 어떤 인간인지, 이 영화가 만들어진 60년대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어떤지 드러난다. 생각 같아서는 2010년대 문명인의 관점에서 마구 비웃어주고 싶지만... 하여간 들어보시라. 상현: 딴 놈이 생긴 모양이군. 허지만 난 아직 널 놓아주질 않았어. 이 김상현이가 그렇게 호락호락 할줄 알았나? 희정: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이죠? 상현: 어떡하다니? 결혼을 해야지. 희정: 뭐요? 상현: 왜 놀라지? 네게 있어서 나는 처음 남자라지 않았어? 그렇담 내가 책임을 져야지. 희정: 철면피! 그 수많은 여성을 울리고도 아직도 속이 풀리지 않으세요! 흥,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악마! (중략) 상현: 지금 난 어느때 보다도 네가 필요해. 어린것들이 할머니만을 의지하며 자라가는 게 내겐 견딜 수 없는 부담이거든... 아직도 이런 인간을 ‘효자에 상남자’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걸 생각하면 2010년대 문명인의 자존심은 허물어져 버린다. 상현과 헤어진 뒤에 화장장과 희정의 관계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희정은 화장장에 산다. 아버지인 이 서방은 화장터의 화부이고 이 직업을 조선 시대 백정처럼 수치스러워한다. 그가 직업 말고 수치스러워하는 건 그의 아내이다. 그에게 “젊은 네가 무슨 죄가 있다구. 어서 네 에미가 죽어야 할 텐데”는 당연한 일상 대화이다. 희정의 어머니이고 이 서방의 아내인 그 인물은 지문에 ‘괴여인’이라고 나온다. 여러 차례 묘사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헝크러진 기인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낡고 땟국이 흐르는 저고리를 입어 흡사 마귀할멈 같은 꼽추. 나중에 이 여인을 목격한 남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쌀자루같은 혹이 가슴까지 내려온 데다가 머리는 산발을 하고 마귀할멈처럼 아주 흉악한 얼굴의... 가장 중요한 외모 특징이 얼굴의 혹인데 처음 묘사에 나오지 않은 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각본가가 중간에 추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여간 희정이 자기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느낀 영민은 한밤중에 희정을 미행한다. 화장장에서 마주친 이 서방이 그를 되돌려보내려 하지만 그는 몰래 화장장 건물로 다시 들어간다. 그의 뒤를 지문이 ‘캡의 사나이’라고 부른 남자가 미행하는데, 그를 뒤에 붙인 건 상현이다. 이 뒤에 벌어지는 소동은 <스쿠비두>의 한 장면 같다. 화장터 테마의 귀신들린 집에서 두 남자가 벌벌 떨며 돌아다니다가 ‘괴여인’을 만나 기겁해 비명을 지르고 기절하거나 달아난다. ‘캡의 사나이’는 용하게 달아나는 데 성공하지만 영민은 그만큼 운이 좋지 못하다. 지문만 읽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택시 안에서 ‘캡의 사나이’의 말을 들은 상현이 ‘어쨋던 눈에 가시같던 그 녀석이 상송장이 되어 화구속으로 들어갔다는 건 좋은 현상이야’라고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죽었나 보다. 그 뒤로 영민은 그냥 안 나오고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Scooby Doo Openings 영민의 실종이 아닌 ‘괴여인’을 갖고 희정을 협박하던 상현은 (“몬도가네의 일급 가수 이희정과...그리고 마귀할멈! 이건 멋있는 탐정소설 감인데 핫핫핫... 어때? 내일 아침 조간에 특종뉴스로 네가 크로즈업 된단 말이야.”) 이번엔 ‘캡의 사나이’와 함께 직접 화장장을 찾는다. 앞에서와 거의 비슷한 소동이 벌어지다가 이번엔 상현이 자기를 공격하는 괴여인을 단도로 찔러 죽인다. 두 남자는 허겁지겁 달아나고 이 서방과 희정은 어머니를 화장한다. 그 뒤의 사건 전개는 어이가 없다. 희정은 정말로 상현과 결혼했다! 이제 이 서방은 화장터 화부 일을 그만두고 상현, 딸, 상현의 어머니 박 씨 그리고 전처가 낳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무도 상현이 괴여인의 죽음과 관련 있다고 믿지 않는 거 같다. 이들의 결혼에 상현의 협박이 관여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후 영화의 무대는 상현의 별장이고, 당연히 귀신이 된 괴여인의 복수가 중심이 된다. 첫 번째 희생자는 ‘캡의 사나이’인데, 지문을 보면... 유리창이 깨어지고 커텐자락이 아무렇게나 바람에 날린다. 그 침대위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처박혀 있는 사나이. 실내의 가구들이 파괴되어 방안이 난장판이다. 암만 봐도 살인 현장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박씨가 ‘꿈에 볼까 무섭다’며 아들을 현장에 보낼 뿐이다. 화장터에서 사라진 영민의 경우도 그렇고, 60년대 작가들에겐 단역의 죽음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나?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주로 전형적인 한국 호러 영화 깜짝쇼의 연속으로, 굳이 자세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단지 권선징악이 고픈 독자들을 위해, 영화가 불타는 별장 속에서 괴여인과 상현이 뒹굴면서 끝난다는 것은 밝혀두어야겠지.
“잡아. 언제까지 잡을 거야. 야 나 권리 말 못하는 거 어디 있어. 나 권리 말 할 수 있어. 왜 내 입 막아. 나 권리 이 한국 땅에 나 권리 이야기할 수 있어. 나 권리 이야기하면은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요”종로에서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저항하며 농성 중이던 이주노동자 비두씨의 외침. 상반신이 탈의 된 채 온 몸으로 절규하는 그의 몸을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저지하고 있는 경찰무리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외치는 이에게 지나가던 한 (한국인) 행인의 다그침. '도망가려고해 씨발놈이! 빨리 집어넣어.' 다큐멘터리 < 계속된다 >를 떠올리면 항상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다이내믹한 이미지이자, 이 영화에서 담아낸 가장 절박한 장면이다. 7년 전의 일이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은 순식간에 ‘불법 거주자’가 되었고, 이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그제껏 조용히 자국민들이 기피하는 소위 3D 현장에서 일을 해왔던 이들은 무분별한 단속과 강제추방에 저항하는 운동을 자발적으로 조직했다. 이전까지 남한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까지 대변해왔다면, 당시의 움직임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때였고, <계속된다>는 그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담아낸 최초의 독립 다큐멘터리였다. 지금까지도 내게 이 영화는 투쟁 현장의 모습만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목소리가 부재했던 만큼 감독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단속, 공장에서의 폭력 등을 차분히 들려준다. 영화의 전반은 중동건설붐 시절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을했던 감독의 아버지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거기서의 외로움은 말로 못'한다는 아버지의 씁씁한 얼굴은 과거의 남한 사람들 역시 타국에서 외로이 이주노동자로 살아야했던 삶을 증언한다. 그 사이 남한은 노동자 `수출국`에서 `수입국`이 되어, 과거를 잊은 채 일하는 공장을 옮길 수 없고 4년 이상 거주자는 자국으로 떠나야만 하는 `고용허가제`란 노예법에 가까운 규율로 이주노동자를 관리해왔다. 그로 인해 고국 방글라데시로 떠나야 했던 이는 '내 나라가 내 나라 같지 않다'고 씁쓸히 전한다. 전지구적 자본화는 국경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로든 넘나들 수 있게 되었지만, 일개 노동자의 삶은 그가 고국에서 날리는 연처럼 공중 높이 떠올라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이 부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 계속된다 >던 감독의 적합한 예측이었던지, 영화를 보았던 2003년의 이주노동자의 모습은 여전히 그때와 다름없이 불투명한 삶 속에 지속되고 있다. 사실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올랐던 것도 최근 G-20의 개최 여부에 따라 정부의 강화된 단속때문이었다. 필리핀에서 온 친구 미셸은 강제추방에 맞서 2주째 단식투쟁을 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글을 쓰는 시점인 오늘) 7월 6일 병원에 실려갔다. 다양성이니 다문화주의니 하는 시대에도 정작 그 주체인 이들의 삶은 외면당한 채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이곳에 함께 살아가며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외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은 침묵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 변하지 않는 서글픈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건지, 다시 영화를 보니 마음이 무겁게 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