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몽
- 감독
- 조가현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정혜원, 강현중, 정재진, 신운섭, 홍예인, 이맑음, 리민, 김완, 김선수, 정정자, 박성훈, 한경석, 김택섭, 강신우, 서재원, 조병수, 허세훈, 이문기, 양용호, 신호진
한국에서 보기 힘든 단편애니메이션이 나왔다. 작품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자그레브와 안시 학생경쟁에 나란히 작품을 올렸다. 5월에 열린 SICAF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고, 자그레브에서 스페셜 멘션을 수상하였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는 이 작품은 바로 오서로 감독의 < 애프터눈 클래스 >이다. 오후의 수업시간을 생각해보자. 밥 먹으랴, 수다 떨랴, 친구들이랑 뛰어다녔던 점심시간이 지나고 찾아오는 오후 수업. 나른한 햇살. 조용한 교실.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졸음.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그래서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 애프터눈 클래스 >이다. 주인공의 머리는 자꾸만 무거운 것으로 바뀐다. 무거워진 머리는 책상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어떻게든 졸지 않으려고 주인공은 사방으로 머리를 돌리고, 흐르는 침을 닦고, 눈을 크게 떠본다. 심지어 특단의 조치로 볼펜으로 다리를 찔러보기도 한다. 다 소용없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꿈나라로 들어갔다. 정신이 희미해지면 글씨들이 이상한 모양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무언가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비전이 보이기 시작한다. 꿈속에 보이는 이들은 또 다른 나이다. 나는 그들에게 잠들면 안 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그들을 말려보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잠든 어릴 적의 나와, 내게 괜찮다며 손을 내미는 미래의 나를 만나는 순간 주인공도 그들과 함께 편안하게 잠이 든다. 작품의 애니메이팅과 타이밍은 수준급이다. 학생 졸업 작품이라고 보기 힘든 감각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주인공의 머리는 리듬감이 있어 보는 내내 생동감이 느껴진다.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건 훌륭한 타이밍에서 온다. 작품은 지루함을 느낄 새를 주지 않는다. 적당한 속도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아, 탄식과 그 사이의 놀라움이 널뛰기하듯 이어진다. 절정의 순간 주인공이 비몽사몽 꿈속의 세계를 헤맬 때, 우리들은 사실 주인공과 같이 잠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괜찮아’라는 위안에 함께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3분 5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감독은 관객을 몰입시켰다가, 턱하고 풀어놓으며 조용히 작품을 끝낸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또한 작품의 아트웍과 이미지는 매우 과감하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붉은 계통의 색감과 인물들은 오후의 나른함을 더해준다. 함께 쓰기 힘들 것 같은 붉은 계통의 색과 파란색의 이미지들이 조화로워 감독이 색을 선택하고 칠해나갈 때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 작품을 보다 보면, 종종 메시지와 스토리텔링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그러나 < 애프터눈 클래스 >는 대단한 메시지도 잘 짜인 스토리텔링도 없다. 그냥 졸린 상황 하나를 가지고 위트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짧은 콩트 같은 작품은 한국에서 가장 나오기 힘든 형식이다.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은 소중하다. 솔직히 이 작품에 대해 구구절절이 이야기하는 건 사족이다. 제목을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 될 때 그냥 작품을 한 번 보시라. 작품을 보면, 안시 영화제에서 밤 11시 상영 중 상영관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와 환호, 끝남과 동시에 터져 나오며 끝없이 이어지던 박수 소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
< 만추 > ( 이만희 , 1966) 우리들이 함께 영화를 보는 공동체라면 영화의 역사가 상상의 시네마테크인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우리들에게) 1966년은 이만희 의 < 만추 >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이만희의 영화. 물론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몇 차례이고 한국영화의 대가들을 만나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 오후 수박을 사들고 가서 김기영 감독님을 만나 한참 인터뷰를 한 다음 마지막에 질문하였다. 감독님에게 한국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잠시 나를 보더니 별로 생각하지 않고 내뱉듯이 별다른 수식을 더하지 않고 대답했다. “<만추>”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 동서영화그룹 친구들과 유현목 감독님을 모시고 가진 술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약간 눈을 가늘게 뜨시면서 잠시 생각을 한 다음 대답했다. “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이만희의 <만추>” 라고 하신 다음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이만희 그 놈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어” 임권택 감독님과 긴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같은 질문을 하였다. “나한테는 < 하녀 >와 <만추>요, 그건 내가 만들 수 없는 영화요” 그런 다음 그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졌다. 임권택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유일한 예외는 펠리니의 < 길 >뿐이다. 어쩌면 다시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사라졌다. 하여튼 <만추>는 임권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 영향은 예술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여기에는 미학적 감흥이라는 관계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흔적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통과하지 못하고 거기 남겨진 실패한 지연. 물론 나는 <만추>를 보지 못했다. 그 영화는 도대체 어떤 영화였던 것일까. 그해, 그러니까 1966년 임권택 은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 전쟁과 여교사 >, < 나는 왕이다 >, < 법창을 울린 옥이 >, 그리고 < 닐니리 > 그 중 <닐니리>는 필름이 분실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과 이만희 , 혹은 < 만추 >와 1966년의 영화를 서로 과도하게 가까이 다가오게 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다만 이런 질문을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투를 빌려) 다소 잔혹하게 해보고 싶다. 임권택은 그해 겨울 <만추>를 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 사이에 세워진 선에 계속해서 칸막이 친 다음 거기서 전술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잠시 멈춰 세우고 그 안에서 예언되는 것에 귀 기울이면서 지금부터 전개되고 있는 것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렇다. 기회의 도래만이 사건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형상. 각자의 정당성. 그것이 내가 노리는 것이다. 그때 어떻게 칸막이를 세울 것인가. 우리들의 삶은 예기치 않게 반복적으로 전과 후로 나뉜다. 그때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자리를 바꿀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순순히 이뤄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는다. 종종 자리 바꾸기라는 잘못된 환원에 이끌려 희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자유. 자유처럼 보이는 운명. 하지만 매개 없이 우리가 어떻게 도약을 할 수 있겠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몹시 위험하게 말하고 싶다. <만추>는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1960년대의 남한이 겪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빈곤과 혼란은 영화를 찍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만추>는 오직 단 한 번, 거기서 나온 영화라고 나는 믿는다. 그때 거기 있었던 공통의 환경. 함께 주어진 조건. 매일 아침 바라보는 같은 풍경. 하여튼 임권택은 거기 있었다. 나는 약간 소설처럼 써보고 싶다. 그리고 그해 겨울 어느 날 극장에 가서 <만추>를 보았을 것이다. 고유한 현실성. 거기서 이만희는 낯선 장면을 출현시켰다. 세상의 비참함을 함께 살아내면서 <만추>는 갑자기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호의 체계를 1966년이라는 현실 안에서 창조해냈다. 가능해진 새로운 이미지의 동작들. (후렴구처럼) 다시 한 번. 극장 안의 객석에서 그걸 구경하는 임권택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거기서 결핍된 그 무엇에서 생겨난 공감의 틈. 나는 <만추>가 그때 임권택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영화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이 영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만추>라는 경험은 그의 영화 안에서 (몹시 양보를 해서 말한다면, 수많은 영화중의 하나로서의) 증환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언제 활동을 개시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미를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 자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와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부름의 관계가 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 수 없게 서로 부르면서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벌어지는 예술적 감응의 프로그램은 끝내 겹치지 않는 평행선 사이에서의 강도가 만들어내는 공명의 이접적 종합이다. 소유하려는 유혹. 맹렬한 저항. 그 사이에서의 각자의 인정투쟁. 종종 부서지는 방어선. 이때 우리는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한 번 1966년 12월 3일. 그건 1954년 9월 7일 <이탈리아 여행> 다음날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가까스로 한국전쟁의 풍경이 지워져가고 있던 시간. 최인훈 이 <광장>을 썼고, 김수영이 시에게 침을 뱉었으며, 김승옥 이 무진에 여행을 다녀온 다음 1964년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른 사내들과 함께 그해 겨울 어느 날을 하릴없이 보냈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며 서있었다” 1966년, 말하자면 그 언저리의 시간. 그 해 17살 소녀 황옥순은 학교도 그만 두고 어머니와 세 동생의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 공장 일에 매달리지만 반복되는 빈혈과 빚에 시달리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함께 수면제를 먹은 두 동생은 죽고 살아남은 그녀는 법정에 선다. 임권택은 황옥순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다. 나는 다소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불러보고 싶다. 임권택은 <법창을 울린 옥이>를 <만추>를 보기 직전에 찍었다. 다시 첫 번째 길로 되돌아오자. 우리들은 영화에서 정감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비평은 항상 창백한 표정을 짓곤 했다. 혹은 이론은 자신의 영역 바깥에 내버려두곤 했다. 하지만 정감은 감각과 함께 영화와 세계가 서로 접촉할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경이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에 앞서 거기에 있는 것. 그것 그대로의 체험을 말하는 중이다. 이때 우리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오류. 할리우드에서 작성된 시나리오 기계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규칙에 따라 조직한 다음 눈물의 형태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가장 이상한 것은 아직 영화의 촬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정감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렇다면 촬영 ‘이후’의 영화의 ‘제작’ 과정은 정감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반대로 정감은 자율적으로 활동한다고 철학자들은 주장한다. 이때 두뇌는 어떻게 활동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여기서 실험해보고 싶다. 단순하게 말하면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줄거리를 먼저 읽은 사람들에게 다소 당혹스러울 만큼 슬프지 않다. 아니, 차라리 이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보는 사람을 거의 울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는 비극이지만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러일으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이러니를 동원한 희극으로 슬픔을 조롱하거나 역설적으로 고양시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그냥 하나의 세계가 있다. 1966년의 남한. 그런 다음 거기서 긴장상태를 내내 유지하면서 영화가 그것을 견딘다. 만일 슬프다면 그건 이 영화가 그것을 견디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여튼 무시무시한 무게로 짓누르는 세계의 비참한 중력 아래서 간신히 자신의 시청각적 기호들을 동원해서 자기가 품은 생명을 유지시켜나가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실내장면을 찍은 세트 안에서의 몇 개의 씬을 제외하면 이례적일 만큼 대부분의 장면을 길거리나 공장, 이리저리 이어진 골목길, 그 주변의 가게들, 때로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명백히 알 수 있었던 장소인)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진행되는 <법창을 울린 옥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면서도 그걸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다소 멀리 놓여있는 영화이다. 때로는 그게 너무 희미해서 종종 끈을 놓쳐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주면서 상투적인 드라마에 빠지려들다가도 현실이 부여하는 실재의 어떤 순간에로 재빨리 돌아오곤 한다. 이때 영화는 기괴한 모순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더도 덜도 없이 여기서 비참한 세계의 조건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황옥순과 그녀의 가족을 그저 마주본다. 물론이다. <법창을 울린 옥이>를 보고 있으면 다른 목표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가족은 1966년의 남한에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있는 가족. 수 없는 자살. 그런데 거기서 단순하게 그저 하나의 사례라는 차원에로 환원될 수 없는 황옥순의 사건 앞에서 임권택은 이 이야기 안의 무언가가 잘 진행되지 않는 순간들과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나는 다소 바쟁같은 말투로 다시 말하고 싶다) 영화로 잘 옮겨지지 않는 현실의 표면. 그때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곡선 사이를 영화는 자기의 점근선으로 계산해야 한다. 위치의 함수. 체자레 자바티니의 경고. 여기서 영화는 세계를 은유의 방법으로 다루면 안 된다. 쳐다볼 때는 아무 모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이 세계는 표면 아래 있었던 종종 기괴하고 음산하며 때로는 도착적인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단순하게 보이는 이 사건은 거기서 단지 가난 때문에 생겨난 자살이라는 원인을 초과하는 대상의 과잉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살은 영화라는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적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실패한) 자살이라는 현실 안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라는 드라마가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저편에서 나타난 정감과 감각의 위기. 이때 임권택은 이 과잉을 어떻게 견뎌야 할 것인가,라는 힘겨운 문제를 만난다. 사건의 개요, 혹은 재빠르게 요약된 줄거리. 옥이는 어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식당이 팔리면서 일을 잃었고 집세를 내지 못해 그나마 있던 판잣집에서 쫓겨난다. 직장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빈혈로 종종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게다가 매달 빌린 돈을 받으러 아줌마들이 찾아와 아귀처럼 괴롭힌다. 그녀는 남자친구 철이를 군대에 보낸 다음 날 수면제를 사서 음독자살한다. 하지만 그녀가 먹는 걸 보고 맛있는 군것질 거리라고 생각한 동생들이 함께 먹은 다음 어린 두 명의 동생이 죽고 그녀는 살아남아서 법정에 선다. 황옥순 이야기의 시작은 맨 뒤에서, 그러니까 법정에 선 옥이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구조가 단지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멈추는 것보다 더 멀리 밀고 나아가고 싶다. 여기서 시간은 단지 이야기의 경제성 안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우리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처음은 어디인가요? 그런 다음 중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옥이는 오로지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차례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매 단락마다 생명은 질문할 것이다. 그때마다 생명의 정감. 그리고 삶의 감각.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들. 비가시적인 선들의 매듭. 그러나 임권택 은 그것을 다루어야만 한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해보자. 신문에서 이 사건의 기사를 읽었을 때 그녀가 어떤 법정형을 언도받을 것인가 보다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런 결심을 한 다음 행동에 옮겼을까, 를 먼저 질문할 것이다. 황옥순은 어린 두 동생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법의) 판단이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 궁금해진다. 말하자면 삶과 자살 사이의 틈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때 우리들의 귀납적 호기심은 영화의 구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처음에는 법정에서 사건의 개요를 알려준 다음 플래시백으로 맨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진행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 과정의 반복이다. 이때 핵심은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그녀의 죄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가 궁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황옥순의 변론이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설명하는 대신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그녀의 기억의 연대기 안으로 들어간다. 법정에서 황옥순을 지켜보던 이들은 사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물론 결론은 나쁜 효과일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동. 그때 그녀에게 무엇이 명령을 내렸을까. 여기서 임권택에게 남은 것을 별로 없다. 단 하나로 귀결되는 행동. 피하고 싶지만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청각 기호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과정의 방법을 보는 영화이다. 플래시백의 첫 장면. 법정에 선 옥이를 위해 변호사가 재판장과 검사에게 선처를 호소할 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본다. 그때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함께 수면제를 먹고 죽은 두 명의 동생이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름을 잔뜩 친 콘베어 벨트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이다. 다소 기괴하게도 그런 다음 영화는 옥이의 슬픈 감정을 지은 표정을 보여주는 대신 종종 소스라치는 듯한 두려움에 질린 그녀의 이 표정(close_up)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다시 한 번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짓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두 번의 자살. 혹은 자살의 반복. 임권택 은 지금 그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나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의 영화, 아니 < 잡초 > ‘이전’이라고 말해도 괜찮은데, 이상할 정도로 볼 때마다 그 세계가 어두침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이후’의 영화가 환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인상이라는 부정확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런 ‘다음’에는 점점 임권택의 영화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의 모델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어두침침하고 게다가 그 빛은 가냘프고 종종 거의 꺼져가는 것 같거나 희미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비로소 시간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역사가 이미지로 떠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을 임권택이 움켜쥐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들이 두 개, 혹은 세 개, 그렇게 점점 많아질수록 임권택의 영화 안의 어둠은 점점 중성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임권택의 영화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세계에 잠겨있는 밤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밤, 그런데 아직 살아있다. 이보다 더 두려운 밤이 있을까. 그때 임권택 이 이 어둠 속에서 견디는 방법은 옥이를 동정하는 대신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렇게 한다) 이 상황에서 느껴보는 옥이의 정감을 약간 기괴하게 쳐다본다. 이 참담한 상황의 수면 아래 옥이가 느껴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를 물어볼 때 현실은 이상하게 비틀려 보인다. 이야기는 진행되다 말고 플래시백 속에서 다시 플래시백이 한 번 더 나온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옥이는 화창한 점심 휴식 시간에 운동장에서 다른 직공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벽에 기대어 서서 드럼통에 담긴 물에 작은 돌을 던진다.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면 좋은 시절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시간의 입구. 옥이가 아버지와 함께 부유한 집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 여기서 의미의 흐름에 주목을 해주기 바란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기억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한 배열을 보여준다. 마치 옥이의 작은 돌을 집어 던지는 행동에 감응이라도 한 것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홍난파가 작곡한 ‘퐁당퐁당’을 부른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펴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나는 약간 좀 전의 말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옥이의 세 명의 동생들이다. 물론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 명의 동생들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옥이를 향해서 마치 그녀에게 그 노래를 바치듯이 부른다. 아버지는 그녀 곁에 서서 그 노래를 아코디온으로 반주하고 있다. 온 가족의 중심. 그때 옥이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자수를 놓으면서 그 노래를 음미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환기시키고 싶다. 옥이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생각이 없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때 어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옥이는 마치 그 아이들의 어머니이기라도 한 양, 마치 곁에 선 남자의 아내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에는 어떤 결핍도 없이 그 자체로 완성된 가족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나올 때 만일 동생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만 옥이가 결혼해서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부엌에서 어머니는 과일을 모두 깎은 다음 접시에 받쳐 들고 나온다. 사과는 구태여 부엌에서 깎아야 할 이유가 없는 과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이 장면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어머니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 그런 동선이 필요해진 것일까. 영화는 두 번 다시 이 행복한 시간에로 돌아오지 않는다. 약간의 해석. 물론 이 플래시백은 옥이의 주관적 기억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동시에 행복한 기억 속으로 침범한 현실을 본다. 이때 이 현실은 일종의 의무라는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약간만 앞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여기까지 보다말고 갑자기 옥이가 왜 이다지도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일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단지 가난을 넘어서서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가 거의 죽음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일을 하다 말고 쓰러지고 의사가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도 제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그런데 이 생명을 건 하소연은 그녀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이었을까. 그녀에게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아무도 명령하지 않는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의무의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나는 옥이의 플래시백에서 그녀가 가족 안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은 행복한 시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서 황옥순에게 내리는 (유교라는 이름의) 장남(長男)의식의 명령에 다름 아니다. 마치 이 플래시백 장면에 맞대응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현실의 장면이 나온다. (둘째이지만 장남인) 중학생 남동생이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경찰서로 간 옥이는 남동생이 훈방 조치된 것을 보고 다시 공장에 돌아갔다가 (남자친구와 짧은 데이트를 한 다음)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남동생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냐고 묻자 어머니는 어쩐 일이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옥이는 그날 낮의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갑자기 역정을 내면서 그녀를 꾸짖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대사) “아니, 그 지경이 된 아이를 혼자 보냈단 말이냐, 네가 데리고 오면 다리가 썩는다더냐, 허리가 휜다더냐” “공장 시간에 늦는데 제가 어떻게 데리고 와요” “하루 좀 쉰다고 떼돈을 놓치겠니, 실직을 당하겠니,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그렇게 소홀히 한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꼴 못 본다, 못 봐” “소홀히 하긴 누가 소홀히 한다고 그러세요” “경찰서까지 갔다 온 아이를 홀홀히 보내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조상 제사 볼 놈은 그 놈뿐이다. 늘그막에 의탁할 놈은 그 놈 뿐이란 말이다” 사실상 이 집은 이미 거의 부서진 가족의 모습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영화에는 단 한 번도 조상 제사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며 어머니의 친정과 시댁 식구들, 혹은 친척들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들도 가난으로 남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옥이를 야단치는 말 속에서 지금 집안을 간신히 버티게 일을 하는 옥이는 갑자기 미래의 시간 속에서 괄호 쳐진다. 이 두 개의 장면 사이의 차이에는 명령을 수행하는 옥이의 행복한 시간을 기억하는 플래시백과 현실의 네트워크 안에서 호명하는 어머니의 진술 사이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구태여 그 호명을 플래시백에서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 과잉의 잉여처럼 나타난 어머니가 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명령 속에서 기다리는 최후의 구원을 약속하는 시간은 결국 오지 않을 것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몇 차례를 반복해서 보아도 언제 옥이가 자살을 결심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단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만이 있다. 임권택 은 그 결심의 장면을 찍지 않았다. 물론 상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옥이는 무심결에 13일에 밀린 빚을 갚겠다고 매일처럼 집이고 공장이고 찾아와서 괴롭히는 이웃 아줌마들에게 약속을 했고 그날이 다가왔을 때 약속을 이행할 수 없자 자포자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살을 해서 이 빚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몫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지금 그걸 누가 갚을 수 있을까. 결국 결론은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옥이가 짊어져야한다고 믿었던 책임에 대한 포기가 있다. 이제 그 자리는 빈자리에요. 텅 빈 장남의 자리.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위의 네트워크의 교차. 물론 그 장면에서도 자살의 결심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찍지 않았다 할지라도 옥이는 어느 순간에 결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의 순간이 어머니가 옥이에게서 갑자기 의무를 빼앗아가는 이 장면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희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그녀에게서 의무의 명령이 철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옥이는 그 순간 자신을 세상 안에서 버티게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초자아의 버팀목이 사라져버리고 갑자기 어둠 속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혹은 어둠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S#1 S#2 이제 남은 것은 옥이의 자살이라는 행위뿐이다. 이때 자살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여기서 비로소 자기에게 내려진 명령에서 벗어나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행동이 옥이의 동선을 작동시키고 있다. 모든 인연과 결별하는 행위. < 법창을 울린 옥이 >의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작은 빛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어둡지만 (몹시 기괴하게도) 동시에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구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군대로 떠나는 철이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난 다음 새벽에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으로 함께 천천히 거의 멈출 듯이 걸어온다. 아, 제발 멈춰 주세요. 당신은 지금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약간 높은 데서 내려다보듯이 멀리서 보이는 두 사람. (high_angle_long_shot) 그때 멀리서 난데없이 교회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자살은 하느님 앞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나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옥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명백히 이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영화는 교회 종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나는 지금 옥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영화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이때 간절하게 교회는 종을 치면서 옥이의 죽음에 간섭하려고 한다. 아직 이른 길거리는 한산하고 그들이 걸어온 길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다. 두 사람의 발걸음. (close_up) 이상하게 두 사람은 약속한 것이 아닌데도 서로 발을 맞춰 걷는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마음의 쇼트. 어떤 투명성. 하지만 그들은 지금 헤어지기 위해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쇼트가 나온다. 갑자기 남자들이 얼어붙은 듯이 거리에 서 있다. 그래서 옥이와 철이가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함께 설 때 마치 정지된 화면 사이로 들어서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다시 한 번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멈춰 서버릴 것만 같은 세상.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 무언가 필사적이 된다. 나는 임권택이 생명을 소홀히 다루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저 소멸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반복적으로 보았다. 꺼져가는 빛. 사라져가는 세상. 그때 화면 안으로 침범하는 버스 때문에 서 있는 그들이 출근하기 위해 거기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올라타지만 철이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아니 차라리 그들이 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옥이와 철이는 서로 마주본다. (shot_reverse shot) 그때 철이는 (다소 뜬금없이) 옥이에게 마지막 인사처럼 간곡하게 말한다.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 건강해줘” 우리는 이제부터 옥이가 할 일을 알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철이의 작별인사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 종소리에 이어서 옥이의 자살을 말리는 두 번째 시도이다. 이때 이 말은 동시에 여기서 정반대로 기능한다.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 옥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이제 문득 그 시간이 왔음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버스가 도착하고 철이가 떠나갈 때 두 개의 쇼트를 교환한다. 하나는 버스에 올라타서 철이가 바라보는(point_of_view) 옥이의 멀어져가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옥이가 바라보는 멀어져가는 버스의 모습이다.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의 비대칭. 하지만 이 설명에는 놓친 것이 있다. 이때 단순하게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로 교차시키지 않고 갑자기 카메라가 옥이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다음 옥이가 버스를 쳐다보았을 때 이미 그 버스는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이 쇼트의 교환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철이는 멀어져가는 옥이를 보았지만 옥이는 멀어져가는 철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그 둘 사이에 개입해서 다가가는 카메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이에 낀 자율적인 운동. 그녀를 본다기보다는 다가간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동작. 하지만 이때 철이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반작용처럼 다가간 카메라. 마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는 듯한 이 운동이 일깨우는 것은 정반대로 둘 사이의 텅 빈 공집합의 효과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으며 그래서 이 운동은 다가간다기보다는 차라리 밀쳐내는 듯한 반작용의 힘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부터 옥이가 자살로 향하는 짧은 발걸음을 함께 한다. 옥이는 이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매번 멀리서 지켜보거나 그 앞을 지나쳐가거나 이미 지나친 옥이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옥이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걷는다. 그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그녀가 약국으로 들어섰을 때이다. 이때 영화는 자기의 무능력에 대해서 앙상해진다. 교회의 종소리. 철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저 카메라는 그녀와 동행할 뿐 그녀를 막을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마지막 침묵을 지킨다. 영화는 옥이가 수면제를 사는 장면을 찍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국 앞에서 서성거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 시간에 집에 어린 두 남매를 남겨놓고 무언가 저녁 찬거리를 위해 채소라도 얻으려 시부모 댁으로 나서는 어머니에로 옮겨간다. 어머니가 막 집 문을 나설 때 옥이는 반대편에서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으로 들어온다. 그때 옥이는 집을 나서는 어머니를 구태여 부를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를 부른다. 여기서 예기치 않게 어머니를 향해서 다시 한 번 가볍게 카메라가 다가간다. 아니 차라리 옥이의 목소리에 실려서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마치 그 순간 어머니가 무언가 낌새를 알아채고 옥이를 말렸다면, 아니 최소한의 위로를 했다면, 혹시나 완전히 버렸을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을 일깨워주기만 했더라면 지금 하려는 행위를 멈추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무심하게 오늘 공장에는 왜 나가지 않았냐고 물어본 다음, 하루 쉬어야겠다고 대답하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래, 라고만 말하고 힘없이 돌아서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녀가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혹은 자살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 여기서 걸어가는 어머니를 보는 옥이를 보는 카메라는 두 여자의 등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등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덧없어 보인다. 어머니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옥이 쪽을 돌아본다. 그게 어떤 제스처인지는 분명치 않다. 옥이가 한 대답에서 어떤 낌새를 느낀 때문인지, 아니면 공장도 쉬겠다고 말한 딸이 가엽고 미안한 마음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멀리서 자기를 지켜보는 딸을 문득 쳐다본 것인지를 달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멈칫 거리는 동작은 이상할 정도로 보는 사람의 마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골목을 돌아서서 사라지자 옥이는 이 불효막심한 딸을 용서하세요, 라는 마지막 작별인사를(voice-over_narration) 한다. 이때 이 인사는 몹시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어머니는 골목으로 사라진 다음이다. 그러므로 이 인사는 텅 빈 골목을 향해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직도 남아있을 어머니의 발걸음의 흔적을 향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자 마치 어머니가 돌아보기라도 하듯이 골목에서 옥이를 쳐다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마치 골목이 옥이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상한 비인칭의 시선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비인칭으로 느껴보는 정감, 그리고 비인칭으로 건드릴 듯이 다가가는 운동의 감각. 우리는 이미 철이를 태운 버스가 떠나버린 텅 빈 거리가 옥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았다. 옥이는 누군가를 보는데 그녀가 보는 상대방은 그녀를 보지 않은 대신 길거리, 혹은 골목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황. 그때 영화는 옥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대신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시작, 혹은 중단된 동선. 여기서 쇼트가 바로 이어지고 있는데도 옥이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대신 다음 장면은 두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놀고 있는 두 어린 남매를 보여준다.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병아리를 보여준다. 옥이에서 병아리로 그냥 넘어온 두 개의 연속된 쇼트는(S# 1_S# 2) 옥이를 가여운 병아리처럼 보이게 한다. 어린 남동생은 병아리를 잡으려다가 그만 죽여 버리고 만다. 어이없는 죽음. 그때 옥이는 죽은 병아리를 보면서 마치 자기의 시체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옥이는 자기 시신을 거두듯이 그 병아리를 집 앞 멀리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묻어준다. 그때 오늘 새벽에 떠나간 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voice_over) 이 병아리를 키워서 닭이 되면 다시 병아리를 낳게 될 것이며 금방 오백 마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 병아리는 옥이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줄 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옥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그 병아리를 모래 무덤에 덮어주는 것이다. 혹은 지금 꿈을 모래 무덤에 묻고 있는 중이다. 그런 다음 방에 앉아 옥이는 어머니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여기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유서를 쓰는 옥이를 바라보는 대신 재빨리 그 시간에 군것질을 하러 나간 어린 남매를 따라간다. 이때 우리는 매우 잔인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남매는 군것질을 하라고 준 동전으로 무엇을 사먹어야 할 지 망설이는 중이다. 이 아이들은 지금 거의 먹은 것이 없어서 몹시 허기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거의 군것질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오빠는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하마터면 그 귀한 동전을 하수도 맨홀에 빠트릴 뻔 한다. 깜짝 놀란 오빠는 동전을 집어 들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여동생에게 무얼 먹고 싶은지 묻자 번데기라고 대답한다. 오빠는 그러면 번데기를 산 다음 남은 돈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만나를 사겠다고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한묍영오活?떨어트려 이번에는 하수구를 덮어 놓은 맨홀의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거의 잃어버릴 뻔한 것을 되돌려준 다음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갈 때 어린 남매는 잃어버릴 뻔 했던 것을 되찾은 기쁨 자체를 잃어버린다. 이제 어린 남매는 집에 돌아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 손에 쥐어주었던 동전은 맨홀이 집어삼켰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어쩌면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옥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막 옥이는 수면제를 먹는 중이었다. 어린 두 동생은 제 시간에 도착했다. 왜 그 어린 두 동생은 그보다 좀 더 일찍, 아니면 차라리 (끔찍하게도 자살한 옥이의 모습을 보아야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살아서 볼 수 있는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게) 늦게 도착하지 않은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질문, 어떻게 주인공 옥이의 죽음을 가로 막고 그들은 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비극적 상황 속에서의 비극적 도착. 그런 다음 두 개의 자리를 바꿔치운다. 죽음과 삶. 이때 이 신비로운 도착은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질문해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두 동생의 도착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옥이는 병아리의 죽음을 본 다음 그 시체를 매장하면서 이미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죽음의 과정 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얼룩은 그녀의 어린 두 동생들뿐이다. 순결한 얼룩.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어린 두 동생만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차이가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이 비참한 조화를 어지럽히는 순결한 존재의 소멸을 목표로 했다면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의도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의 메시지를 과도하게 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예기치 않은 외설적 지식의 이면과 힘겹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원래의 광경. 그 모습을 본 막내 여동생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언니 뭐 먹어”라고 묻는다. 이미 약을 먹은 옥이는 수면제에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저 비몽사몽간에 “아무 것도 안 먹어”라고 대답하지만 그 말은 배고픈데다가 이미 군것질 할 동전을 잃어버린 어린 두 남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맛있는 거 있으니까 혼자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라며 두 남매는 옥이의 손에 한 움큼 쥔 수면제를 빼앗기 위해서 함께 달려들어 손아귀를 벌린다. 이미 약에 취한 옥이는 허기진 두 남매로부터 수면제를 지킬 만한 힘을 빼앗긴 다음이다. 이때 거의 잠들어가는 옥이는 정반대로 마치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이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녀가 바라보는 두 명의 어린 동생들은 마치 아귀처럼 달려들어서 그녀의 손에서 수면제를 뺏으려고 한다. 죽어가는 옥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은 이미지 전체가 기형적으로 휘어서(mirror_focus) 마치 영화 전체의 얼룩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걸 바라보는 옥이는 두 동생을 가련하게 보는 대신 우리가 영화 맨 첫 장면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 그 커다랗게 떠진 눈, 두려움에 가득차서 바라보는 얼굴이 된다. 그때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들의 침입. 그런 다음 똑같은 기형적인 이미지로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두들 옥이에 대한 원망으로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는 환각이라기보다는, 환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이미지 뒤에 차라리 어떤 각성의 시선이 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갑자기 현실이라고 불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 사이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 진실이라는 외설. 가여운 옥이에게 자살은 거의 마지막 피난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 산산조각 나고 난 다음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그녀는 의무의 네트워크와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예기치 않게 대신 두 명의 동생을 죽인 다음 죄의식을 안겨주고 다시 되돌려 보낸다. 그러므로 옥이는 두 번째 삶을 의무보다 더 무거운 죄의식으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한다. (의무의) 감옥에서 출소하는 옥이는 지금 (죄의식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현실은 저 바깥에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중이다. 옥이는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옥이의 삶을 다루는 대신 자살이라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 거기서 말하여지는 네트워크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그때 무언가 완강하게 그걸 거절하는 것과 마주치고 있다. 그건 직접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 자리에 불려나온 황옥순의 자리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언가 절반만을 본 것만 같은 결여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똑같은 무게로 임권택은 이 이야기가 주는 과잉과 마주쳐서 시달린다. 네오리얼리즘이 부여한 현실과 영화 사이의 부등가 교환의 법칙. 그때 중심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대답은 황옥순이라는 간편한 대답을 취하는 대신 그 중심의 안이 사실은 텅 빈 공집합이며 단지 그것이 부서지지 않게 가까스로 유지시키는 힘들의 상태 속에서 정감과 감각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사실만을 영화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균형. 아니, 어쩌면 이건 균형이 아닐 지도 모른다. 중심이 검은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중심인 줄 알았던 얼룩을 지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임권택에게 정감이라는 구멍과 그것을 느껴보기 위해 얼룩을 둘러싸는 감각의 활동은 점점 까다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간극. 그 사이의 공백 속에서 임권택은 느닷없이 맹렬하게 주체를 세워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어렴풋이 어느 순간,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자살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그 마지막 장면 전체에서, 사건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가 도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임권택은 느껴본다. 나는 거의 지워질 듯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이 장면 안에서만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을 보았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적인 감흥을 느끼면서 영화의 기호들은 황옥순의 행위에서 분명하게 주체가 자기의 정감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영화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힘을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분명히 임권택도 몇 차례이고 이 순간에로 되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계속) 1966년 100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아성영화사 각본 이종택 각색 이연진 촬영 김연욱 조명 이한찬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
지금 내가 난처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는 < 몽녀 >를 보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3D로 보지 못했다. 차라리 이 영화가 사라진 다른 영화들처럼 어딘가에 숨어있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그냥 피해가면 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볼 수가 없다. 내가 먼저 할 일은 그에 관한 과정에 대해서 당신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과 첫 번째 인터뷰를 했을 때, 그러니까 1987년, <몽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갑자기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면서 대답을 한참을 미루었다. 나는 기억할 수 있다. 매 편마다 한편씩 이야기를 진행했기 때문에 그 순간에 느껴보는 공기를 나는 지금도 차례로 떠올릴 수 있다. <몽녀>는 우리의 대화를 잠시 멈추었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저 감독님의 말씀을 기다려야만 했다. 대답은 매우 간결했고,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며, 내용은 거의 텅 빈 채, 그저 기술적인 몇 가지 사실만을 열거한 다음 더 이상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피했다. 좀 더 질문을 했을 때, 그저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이며 촬영을 한 장석준 씨에게 물어보라, 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감스럽게 이미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은 세상에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멈춘 질문. 하지만 어떤 망설임. 내가 지금 추리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대답은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씀을 하시다 말고 그냥 문득, 나는 이 영화를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만났어요, 그냥 억지로 그런 장면을 만드는 거 말이에요. 이 말을 한 사람은 임권택이다. 당신은 영화가 가져야 하는 미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 부서져 가는 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에 대해서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예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임권택을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때 무심코 지나갔다. 그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영화에 대해서 충분히 질문을 던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질문은 계속해서 내게 머물렀다. 어떤 표시. 나는 무언가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 말과 영화 사이의 지탱이라는 버팀목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 다음 차례로 영화와 기술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영화에 대한 여정 중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롯셀리니와 ASA 500, 니콜라스 레이와 시네마스코프. 더글라스 서크와 테크니칼라. 누벨바그와 보렉스 카메라. 등등. 그리고 지금 디지털 카메라와 (누구보다도 먼저) 고다르, 마지막 베르이만, 데이빗 린치, 키아로스타미, 소쿠로프, 라스 폰 트리어, 지아장커, 페드로 코스타, 왕빙, 김기덕 과 홍상수 . 그리고 다시 임권택. (< 달빛 길어 올리기 >). 하지만 그런 다음 누구도 < 몽녀 >라는 영화 제목을 꺼내 들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 제목을 거의 잊었다. 아마 감독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2010년에 제임스 캐머런의 < 아바타 >가 ‘출현’했을 때 모두들 각자의 방식으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3D 영화가 21세기 영화를 새로이 열었다. 아니, 나는 이 말을 다소 수정하고 싶다. <아바타>가 새롭게 열어놓은 것은 21세기 영화 산업이었다. 종종 3D라는 문제를 미학의 자리로 끌고 가고 싶어 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 문제는 잉여가치의 이윤율의 문제이다. 제작 자본과 배급 자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이한 이윤율 사이의 평균 이윤율에서 최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새로운 진동으로서의 자본 투하는 가치의 전환형태로서의 새로운 연장을 위하여 시장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새로운 가격을 구현하도록 요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도입의 증가. 하지만 잉여가치가 증가했다고 과연 항상 이윤이 증가할까. 이제 새로운 유기적 결합의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평균이윤율의 저하. 여기는 자본의 전쟁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한 편에 2억불이 걸려있는 게임이다. 나는 사태를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자리는 영화의 정치경제학을 전개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3D는 갑자기 한 나라의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지나가 버린 한국영화사의 잊혀진 입체영화들의 계보가 호명되었다. <몽녀>는 갑자기 다시 불려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 이 영화를 말해야 한다. 여기서는 세계 영화사 안에서 3D 영화의 계보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 몽녀 >의 자리에 대해서는 다시 그 위치를 찾은 다음 그 자리가 취하게 될 의미를 물어볼 것이다. 위치? 왜 그런 것이 필요해졌을까. 우리는 여기서 그만 3D라는 소란스러운 논제에 걸려들어서 논점을 벗어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가교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 의 영화 안에서 다른 것을 중단시킨 기술에 대한 호기심. 그런 다음 마주치게 된 생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 그 무엇. < 심야의 별장 >(1959), 경향신문 광고(1960.7.30.) 한국 영화에 3D는 늦게 도착하였다. 1960년대 한국에서 입체영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 1960년 8월 25일 을지극장에서 개봉한 윌리엄 캐슬의 < 심야의 별장 (House on Haunted Hill) >이 “안경이 필요 없는 (眼鏡不要)” 입체영화라는 광고 카피를 달고 개봉하였다. 몇몇 자료는 이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된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삼 주 후인 9월 14일 경향신문에는 “극장윤리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가 “입체영화라고 관객을 속였”다면서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3D 사기라는 사실은 이미 광고 카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입체영화를 보기 위한 안경이 필요 없는 기술적 수준을 1960년에 이루었다면 2013년에 다시 안경을 끼고 3D 영화를 볼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심야의 별장>은 입체영화 기술로 찍은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무슨 재주로 수입을 해서 한국에서만 입체영화로 상영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사 안에서 첫 번째 ‘立體映畵’가 만들어진 것은 1968년 2월 8일 동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웅 의 < 천하장사 임꺽정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먼저 1963년 9월 26일 동아일보에는 “입체영화 제작 상영 간편화, (카메라) 한 대로 촬영에 성공”이라는 제목 아래 이성휘 촬영감독이 (당시 제일기공사에서 근무하던) 이교학, 이내원과 함께 입체영화 제작에 성공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방식은 피사체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서 반사하는 분상(分像)장치를 통해서 이미지를 둘로 나눈 다음 하나는 아나모픽 렌즈로, 다른 하나는 표준렌즈로 촬영해서 그 둘을 하나의 필름에 현상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방식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천하장사 임꺽정>에 사용된 촬영방법은 이 영화를 촬영한 장석준 촬영감독에 의해서 ‘발명’된 판스코프 방식이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천하장사 임꺽정>은 개봉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고, < 몽녀 >는 두 번째 ‘입체’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두 편의 개봉 시기는 서로 매우 가깝다. <몽녀>는 그해 8월 1일에 개봉하였다. 이 말은 <천하장사 임꺽정>이 흥행에 성공하자 새로운 기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몽녀>는 뒤이어 바로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두 편 모두 같은 영화 제작사인 제일영화사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을 제외하고 스텝들이 그대로 넘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이 두 편 사이에서 두 가지 공통점과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두 가지 공통점. <천하장사 임꺽정>과 <몽녀> 두 편 모두 같은 촬영감독인 장석준이 찍었다. 기록에 따르면 두 편 모두 같은 방식의 판스코프로 찍었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편 모두 동아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점이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서울에서 동아극장만이 입체영화 상영이 가능한 극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1960년대 극장 상영 시스템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그저 추론일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한 가지 사실. 한국에서 입체영화 기술을 주도한 것은 제작자나 감독이 아니라 촬영이었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이때 입체영화는 산업이나 미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적으로) 순수하게 기술적인 이미지의 기계적인 운동과 그 재현에 따른 질적 변화에 더 기울어질 수도 있다. 물론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몽녀>로 이어질 때 그 둘 사이에서 단지 두 편의 입체영화라고 말하는 대신 사극 액션영화에서 반공 액션영화로 옮겨오면서 입체 화면의 효과에 대한 데이터에 관한 수집의 선택적 이행처럼 보인다. < 악마와 미녀 >(1969) 세 번째 입체영화는 시간을 좀 기다려야 했다. 이용민 이 연출한 < 악마와 미녀 >는 1969년 4월 10일에 개봉하였다. 이용민은 한국영화사에서 부당하게 대접받은 공포영화의 시네아스트이다. 이용민이 만든 두 편의 영화, < 목 없는 미녀 >와 < 살인마 >는 종종 진행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괴작이다. 그가 만든 입체영화 <악마와 미녀>를 볼 수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세 번째 입체영화로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도 장석준 촬영감독이 찍었다. 이 영화는 (제일영화사가 아니라) 안양필름에서 제작했고,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에는 극장들이 ‘프리미어’ 개봉 여부를 놓고 서로의 위계질서가 있었는데) 개봉관에서 상영하지 못하고 6개의 재개봉관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대중들은 벌써 입체영화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변덕스러운 대중들. 사극영화, 반공영화, 그리고 공포영화라는 데이터. 세 개의 효과. 그 중 어느 선택이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술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입체영화의 역사에 관해서만 말해야 한다면 1971년 4월 3일에 개봉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이 가장 궁금하다. 이 영화는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고 촬영을 한 영화이다. 장석준은 여기서 세 가지 모델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또 다른 모델로서 만주 웨스턴 장르를 만들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장석준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지지하루의 흑태양>이 만들어질 무렵 만주 웨스턴이 한국영화사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을 유행의 일부로 폄훼하는 것은 지나치게 상황 속에 맥락 짓는 것이다. 만주 웨스턴은 이미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그런 다음 정창화를 거쳐서 < 무숙자 >( 신상옥 , 1968), < 황야의 독수리 >( 임권택 , 1969), < 황야의 외팔이 >( 김영효 , 1970), < 당나귀 무법자 >( 안일남 , 1970), < 쇠사슬을 끊어라 >( 이만희 , 1971)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나는 많은 중요한 영화 제목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차라리 <지지하루의 흑태양>은 그 장르의 마지막 레퀴엠처럼 보인다. 입체영화 3D 만주 웨스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작별인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영화는 동양영화사에서 제작되었고, 다시 한 번 동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하지만 장석준 의 이름은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 입체영화의 역사는 거의 끝났다. 그런 다음 1976년 두 편의 입체영화가 개봉하였다. 한 편은 7월 23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 킹콩의 대역습 >이고, 다른 한 편은 9월 8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한 <홍길동>이다. 합작영화로 알려진 <킹콩의 대역습>은 (약간 놀랍긴 하지만) < Ape >란 제목으로 지역코드 1번으로 (미국에서) 2001년 10월 30일에 영어 더빙된 DVD로 출시되었으며 IMDb에서는 스텝과 배우들에 관해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료원 KMDb에서는 촬영기사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지만 IMDb에 따르면 토니 프랜시스와 다니엘 L 시머스가 공동 촬영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신은 이게 다소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DVD를 판매하고 있는 아마존.com 에 들어가서 유저들의 영화평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그러면 당신도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질지 모른다. 이 영화는 킹콩이 나온 역대 영화 중 ‘최악의 영화’의 반열에 올랐으며, 수많은 영화광들 사이트에서 영화사상 ‘최악의 영화 100편’의 목록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상해야할’ 만신전의 자리에 올랐다. 말하자면 에드 우드의 계보. (이쯤 되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최영철 과 폴 레더의 공동연출로 KMDb에 기록되어있는 이 영화는 IMDB에서는 감독으로 폴 레더의 이름만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인 < 홍길동 >은 최인현 이 연출하고 최길선 이 촬영하였다. 예고편에 따르면 한국에서 개발된 분광식(分光式) 촬영에 따른 세계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홍길동>이 판스코프와 또 다른 방식을 개발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장석준은 그해 그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을 때 다른 다섯 편의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 여자들만 사는 거리 >( 김호선 ), < 불 꺼진 창 >( 권영순 ), < 바다의 사자들 >( 이재웅 ), < 집념 >(최인현), < 마지막 밤의 탱고 >( 이성구 ).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자. 결국 나는 < 몽녀 >를 3D로 본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것도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상태가 아니라 어제 본 것처럼 너무나 생생해서 그 효과의 구석구석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효과의 기술적인 구현 과정과 발전 단계, 더 나아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3D 영화의 테크놀로지와 비교하면서, 거의 ‘사라져가는’ 한국영화 안의 입체영화들에 관한 계보를 설명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한국영화사. 영화가 기억을 저장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참조하고 조립하고 창조하는 뇌의 스크린이라면 한국영화사는 종종 그 일부를 상실한 채 치매의 진술을 하는 중이다. 나는 단지 3D에 한정 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영화들이 사라졌으며, 너무 많은 자료들이 사방에 흩어져있거나 말소되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지나가 버린 시간 속의 영화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건 단지 영화만이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하부 토대들, 카메라와 영사기, 조명, 녹음, 더 나아가 그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들의 시스템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때 부서지는 것은 한국영화사이다. 나는 질문을 임권택 의 <몽녀>에 한정 짓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몽녀>를 둘러싼 한국영화사 속의 입체영화의 계보에 관한 맥락을 알아야만 했다. 아마도 그 순간, 그러니까 1968년, 임권택 감독님도 이 맥락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공동체라기보다는 기술적 공동체로 묶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 이해 없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내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질문지를 들고 한국영상자료원 장광헌 부장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정성일 _ (깜짝 놀라 둘러보면서 감탄사와 함께) 이 카페는 누가 찾으신 거예요? 장소를 찾아낼 때마다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장소들을 내미셔 가지고, 이게 자료원이니까 가능한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웃음) 먼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 중인 < 몽녀 >의 3D 복원과정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2002년도에 임권택 감독님 인터뷰를 진행할 때, 벌써 십 년 전이군요, 저는 <몽녀>를 3D로 본 적이 없으니까 임권택 감독님께 질문 드릴 방법이 없어서 자료원에서 볼 수 있는지 문의를 했는데 필름 상태 자체가 볼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거예요. (인터뷰를 진행할 때 당시 스크리닝이 가능한 영화들은 자료원에서 모두 다시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거의 3D 영화들이 복원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하지만 아직 저는 <몽녀>를 3D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과정이 어떤지 아는 게 순서 같습니다. 장광헌_ (아이폰을 꺼내 들면서) 제가 조금 따왔습니다. (그런 다음 몽녀의 포지 필름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실제로 이것은 영화가 보여지는 상태가 아니고 영화 필름을 찍은 거예요. 한 프레임에 딱 들어오는 영상인데, 테크니스코프처럼 두 개의 프레임이 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테크니스코프와 다른 점은, (한국에서 개발한) 판스코프(Panscope)라는 것이, 그러니까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3D 영화는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그런 형식인데 한국의 판스코프는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두 개의 렌즈가 한 카메라에 붙어있는 겁니다. 마가진도 두 개가 붙어있고. 이건 저도 상상을 해보니까, (잠시 생각) 당시 어렵게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원래 입체라는 건요, 사람들이 누구나 볼 때, 어 이건 굉장히 어지러워, 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 이건 괜찮다, 라고 얘기하는 분이 있어요. 그게 가장 효과적인 입체를 보려면 (양 눈의 두 개의) 동공의 수정체 사이에서 11센티의 간극을 가지고 만든 입체영화가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렌즈 두 개를 어떻게든 딱 붙여서 그 거리 차이를 11센티로 만들어야 되는 거죠. 요새 나오는 카메라들이 점점 컴팩트해지는데, 이게 작아야지만 그만큼의 거리를 서로 붙일 수 있는 거지요. 렌즈가 예전의 ENG 카메라처럼 크면 절대로, 절대로, 이게 아무리 서로를 딱 붙여놔도 렌즈의 간격이 15센티에서 20센티 이상 나와 버리는 거죠. 그래서 컴팩트하게 만드는 요즘은 가능한 일일 텐데, 당시 1968년도의 카메라라면 굉장히 부피가 크고, 그래서 거기에 구멍을 내서 만든 다음 렌즈를 붙여서 만들지 않고서는 이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현재 자료원이 보유하고 < 몽녀 >의 필름은 원래 프린트 필름 단벌 하나만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저희가 입수한 필름인데, 원로 영화인으로부터 기증받은 프린트입니다. 그분이 < 천하장사 임꺽정 >과 그 다음에 <몽녀> 프린트필름 단벌, 각 한 벌씩 80년대에 자료원에 맡기셨어요. 당시에는 누가 기증했는지 출처가 없다가 2000년대 초반에 저희가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한테 확인을 하고, 다시 재정리를 해놨는데, 그러다보니까 처음엔 저희가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때는, 그냥 지금 이 프린트가 이 영화의 유일본 프린트였구나, 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보니까 어, 이거는 테크니스코프 같아. 왜냐하면 보시는 바와 같이 테크니스코프처럼 (아이폰의 필름을 가리키면서) 4 포퍼레이션 안에 2 프레임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상을 자세히 보면 위와 아래 두 개의 상이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거든요. 위에 있는 프레임과 아래에 있는 프레임이 영상이 동일한 이미지인데 그 크기가 서로 똑같지가 않아요. 필름검색기로 본 자료원 보유 < 몽녀 > 포지티브 필름 화면 정성일 _ 네, 지금 이 작은 프레임으로 보아도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네요. 장광헌_ 그게 이제 차이가 나는 건데, 테크니스코프 필름은 4 퍼포레이션 안에 두 개의 프레임을 나눈 것은 필름의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일부러 만든 거고, 똑같은 두 개의 프레임이 4 퍼포레이션 안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런데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는 두 개의 프레임이 서로 크기의 차이가 있는 같은 이미지인 거예요, 그래서... 정성일 _ 그럼 이걸 두 번 찍었다는 뜻이에요? 장광헌_ 두 번이 아니고요, 한 번을 찍을 때, (카메라에) 렌즈 두 개, (필름이 들어있는) 마가진 두 개가 달려 있는 거죠. 그렇게 한꺼번에 찍는 겁니다. (아이폰의 영상을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상을 찍을 때, 카메라가 팬 하게 되면 (왼쪽에 있는 렌즈로)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과 (오른쪽에 있는 렌즈로 찍는) 다른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이 서로 다르겠죠. 지금 기술과 비교를 하자면 굉장히 어지럽거나, 좀 더 전문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광원이 들어가는 부분, 고스트(ghost) 현상이라고 해서 중간에 안개처럼 스모그 현상들이 생기는 현상이 있는데, 그런 현상들을 처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완전한 입체라고 보기가 어렵다, 는 것이 오직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 몽녀 >만이 아니고 다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필름이 다섯, 여섯 편 정도 되는데요.... < 천하장사 임꺽정 >(1968), 경향신문 광고(1968.2.5.) / 영화기재국산화 필름도 50% 절약, 경향신문(1968.7.27.) 정성일 _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 장광헌_ 네,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죠. 다 확인을 했어요. 일일이 다 확인을 하고 왔는데, 방식이 다른 게 딱 하나가 있어요. 2000년대에 만들어진 < 평화의 시대 >라는 필름은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필름과는 다른 방식, 다른 방식이란 게 조금 더 말씀드리면, 독일의 뮌헨 박물관장이 입체영화에 굉장히 전문가신데, 그분이 한 번 방문을 하셔서 우리나라에서 입체영화를 찍은 게 있으면 보여 달라 해서 샘플을 그때 보여 드렸어요. 그랬더니 이거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동유럽에서 찍었던 방식과 같다, 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만 해도 할리우드는 50년대에 한 해 60편씩 엄청나게 입체영화를 찍었어요, 그리곤 확 죽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유행이 지나고 나서 들어오게 된 거죠. 지금 기록을 보면 59년에서 6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처음 입체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제작을 1968년도에 하게 됐는데, 장석준 촬영 감독님이 4년 정도를 고민하시고 만드셨대요.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걸 보고 그때부터 효과에 굉장히 호기심이 많이 있으셨던 거죠. (다른 사람들, 감독들이나 특히 제작자들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상태로 해서 (3D를 구현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실은 저희가 굉장히 이 영화에 대해 확인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원본 필름, 원본 네가 필름이 없으니까 어떤 형식인 줄을 몰랐던 거예요. 당시 기록들도 많지 않아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원로 영화인들을 통해서 확인했을 때는 당시에는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마가진 두 개로 두 개의 필름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좌우완 네가 필름이 존재를 했겠죠. 그냥 구술만 있는 상태에요. 게다가 할리우드는 우리나라 방식하고 여기서 달라지는 것이,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그렇게 만든 것을 가지고 레프트(left) 필름과 라이트(right) 필름으로 나눈 다음에 그걸 각각 프린트 인화해서 영사기 두 대로 교차상영을 해서 그 효과를 냅니다. 그게 원래의 할리우드의 3D (표준) 방식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건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두 개의 네가 필름이 존재하면서 인화를 할 때 하나의 필름으로 합쳐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까 두 개의 상이 생긴 것, 아래에 하나 위에 하나가 (할리우드와 비교하자면) 위에 좌, 밑에 우, 이런 식으로 해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내고 상영 시스템을 바꾼 겁니다. 상영 시스템, 영사기에, 제가 본 것은 영사기에 렌즈가 있으면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 안을 반쪽으로 나누어 두 개의 상을 보여주는 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래 위 필름이 내려갈 때 두 개의 프레임을 다 잡아 내는 거죠. 그렇게 영사를 하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 몽녀 >를 가지고 우리가 재현을 못 하느냐, 라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2007년에서 2008년까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테스트를 많이 했고 당시 디지털로도 할 수 있다고 해서 디지털로도 5분 정도를 테스트 했죠. 두 가지 결과를 먼저 말씀 드리면, 아날로그는 너무 상태가 안 좋으니까 필름이 불안정해서 이걸 보존용 필름으로 만드는 것도 과연 잘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결과였고 그리고 당시에는 원본 필름이 어떤 상태로 되어있는지 몰랐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실제로는 레프트 네가 필름과 라이트 네가 필름이 있어야지 정확한 복원이 되는 거잖습니까, 자료원은 원래의 원본을 복원하는 것이 목표이지 그걸 수정해서 상영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걸 모르니까 저희는 이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 필름을 그대로 밀착인화를 해서 찍어낸 거예요. 그게 가장 필름에 손상을 덜 가게 하는 거고 이 품질을 그대로 받아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그렇게 받아낸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그렇게 되면 이건 나중에 아날로그적으로 다시 재현하기는 어렵고, 디지털 방식으로서 나중에 이 프레임을 나눠서, (잠시 생각) 쉽게 말씀 드리면 번호를 매겨서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나눕니다. 나눠서 디지털로 볼 때는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두 개의 네가 필름 형태로 만드는 거죠. 저희가 로직을 그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하는 게 가장 맞는 방법인데 그때 당시에는 또 이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어요. 정성일 _ 그렇죠. 두 편의 영화를 찍는 꼴이 되니까. 장광헌_ 그렇죠.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를 하고, 단지 이제 디지털 복원의 방법으로서 테스트를 한 것은 과연 그렇게 디지털로 했을 때 품질이 어느 정도 나올까, 이거였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프로덕션에 당시 참여했던 분들하고, 그때 그분들은 (다른) 디지털 입체 영화에 대해서 테스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 영화를 테스트할 때 저희가 이거 한 번 테스트해보자, 해서 샘플을 드리고 스캔 작업해서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스크래치마저도 입체로 나와 버렸어요. (웃음) 정말로 기가 막히더라고요. 스크래치가 입체로 확 보여요. 정성일 _ 오히려 스크래치가 가장 효과적이었겠네요. (웃음) 장광헌_ 그러니까 저희는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해서 복원을 한다, 그러면 괜찮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스크래치라던가 (필름에 달라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해야만 하는 복원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건데, 저거는 도저히 손을 못 대겠다, 라는 결론이었죠. 왜냐하면,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저희가 디지털복원을 하면서 한 편을 복원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있는데 < 몽녀 >는 적어도 2.5배 내지는 3배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 거라는 계산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세 편 정도를 하는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는, 안 그래도 두 편으로 나누면 계산상으로는 서로 다른 두 편인데 거기다 난이도에 있어서도 최고의 난이도인 영화인 거죠. 정성일 _ 복원 작업도 현재의 기술과 함께 항상 경제적인 문제군요. 장광헌_ 그런데 당시 이런 게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 아바타 >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3D 영화에 대한 붐 아닌 붐이 일어나면서 저는 엄청난 압박을 받았어요. 당시에... 정성일 _ 아, 한국에는 왜 3D 영화의 역사가 없느냐는, (웃음) 사실 그때는 전 세계 모든 영화제가 갑자기 수준과 상관없이 3D 영화를 우대했었고, 시네마테크들은 3D 영화의 복원 사업에 매달리기도 했죠. 장광헌_ 한국에 있는 (입체) 고전영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하자. 영진위에서도 저희 보고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전에 아카이브로써 표준 영사 시스템을 갖추는 것과 복원의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항상 테스트를 하게 되는데 테스트를 한 결과를 놓고 복원을 여기서 이만큼 작업해 들어가는 건 우리가 지금 하기엔 현재의 기술과 역량으로서 힘들다, 라는 판단을 이야기해줬어요. 근데 계속 하자는 거예요. 계속 하는 것이 소모성으로 비친다 할지라도 꼭 해야 한다면 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필름을 몇 번이고 되 만져서 작업을 하면 이 필름은 나중에 정말 만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까, 그러면 나중에 정말 기술이 원하는 수준의 작업이 가능해졌을 때 만져볼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리니까, 그렇게 우리가 투자하기엔 이건 모험이다. 그래서 일단 미룬 거예요. 현재로서는 그렇게 미뤘지만 후회되진 않아요. 이 필름이 현재는 이렇게 있지만 지금 만약에 멋모르고 (작업을) 했다가 그러면 많은 부분에서 효과를 못 보고 낭비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차원에서는 지금의 저희 자료원의 보존기술센터에서는 잠시 보류해둔 상태이지만, 앞으로 어찌 되었건 다시 만져야 할 때는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다시 판단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좀 더 손쉬운 방법들이 생겨날 거예요. 정성일 _ 그러면 지금 < 몽녀 >는 어떤 상태입니까? 장광헌_ 현재는 원본 프린트 필름이 있고요 거기서 듀프 네가 필름, 밀착 인화를 해서 동일하게 밀착 인화된 테크니스코프처럼 생긴 듀프 네가 필름이 존재합니다. 거기까지. 그래서 재현되는 필름은 없다고 할 수 있죠. 전에 보여드렸다시피 중간에 텔레시네 작업을 하면서 2D로 만든 영상만 있습니다. 일단 저희가 확인을 하기 위해서 만든 영상이죠. 지금 현재로서 볼 수 있는 미디어로는 그거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볼 수 있는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중요하니까, 2D 방송용 규격으로 만든 것도 그게 무슨 내용인지 나중에 기록으로서도 남겨야 하니까 지금 형태의 미디어를 만들어야겠다, 해서 중간 결과물을 만들게 된 겁니다. 정성일 _ < 몽녀 >의 현재 복원 상태와 판스코프의 원리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뿐만 아니라 매우 오랬동안 이 상영방식을 입체영화라고 불렀습니다. 3D 라는 말은 한참 뒤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이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디즈니랜드에서 마이클 잭슨의 <캡틴 EO>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단지 표현의 차이 이상으로 자료원의 입장에서 영화 기술사의 관점에서 입체영화와 3D 영화를 어떻게 분류하고 있습니까? 장광헌_ 저도 한참을 고민해 봤는데, 제가 정답이라 말씀은 못 드리겠고, 입체영화라는 것이, 공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입체영화라는 개념이 나와서 기술적으로 구현이 되었고, 그러다 삼차원 영화, 3D라는 것이 삼차원이라는 것이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면 아이맥스 3D도 나왔고, 4D도 나왔고, 그리고 조금 더 발전적으로, 아직 이건 영화다, 라고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홀로그램 자체도 광고성 영상부터 해서 굉장히 많은 발전이 있는 분야 중 하나에요. 그렇다면 홀로그램도 나중에 영화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렇게 봤을 때는 삼차원 영화라고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거고, 우리는 예전에는 입체영화를 삼차원 영화라고 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입체영화라는 것이, 그게 평면적인 영화보다는 입체감을 주는 영화의 통칭이다, 라고 말하고 싶고요, 그 종류 중에 여러 가지, 3D영화, 아이맥스 4D 이런 것들이 입체영화를 표현하는 표현방식으로, 용어를 설명하는 게 맞지 않나.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정성일 _ 그렇게 말한다면, 테크놀로지의 개념 분류에만 한정 지어서 말한다면 한국 최초의 3D 영화는 < 7광구 >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그 전까지는 입체영화고.... 장광헌_ 그렇죠. 좀 더 논의의 필요성이 있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장석준 촬영감독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직접 설명한 판스코프 방식에 관한 인터뷰나 기록이 혹시 남아있나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80년도에 돌아가셨어요. (1980년 8월 15일에 별세하셨다) 그런 기록이 제가 알기로는 없고 그 이후에 그분과 함께 작업했던 분들의 기록, 어떤 구술 기록이라든지, 그런 것들로만 그 분이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외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어떤 영화를 모델로 삼았다던가, 하는 기록은 없고요. 입체영화라고 보여지는 것이 있었으면 국내든 해외든 어디든 가셨데요. 그런 기록은 있습니다. 정성일 _ 그 당시에요? 굉장하군요. 그때는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든 시기였는데요. 장광헌_ 그걸 4년간을 연구하셨다는 걸 보면, 어디든 가셔서 연구를 하셨다는 것이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죠. 정성일 _ 그럼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뮌헨 영화박물관장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때 유럽으로 흘러나온 동구 영화들을 보셨을 가능성이 크군요. 만일 할리우드 영화만을 참고했다면 사실 구태여 외국까지 나갈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장광헌_ 가능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죠. (잠시 생각) 그런데 그 부분은 정확하진 않아요. 기록상 할리우드 쪽으로 가신 기록은 있는데, 유럽 쪽에 가셔서 이게 맞다, 라고 하셨던, 이게 우리에게 적합할 거다, 라고 하셨던 기록은 현재 없거든요. 단지 테크니스코프가 만들어질 때 영화의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사실은 테크니스코프가 우리나라에서는 70년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이 만들어 나온 거지만, 61년에서 62년, 그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나온 거예요. 원래 있던 기술을 우리 식으로 맞춰서 만든 거니까.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이걸 최초로 만들었느냐. 몇몇 분들의 기록을 보면 최초로 만들어서 일본에 수출을 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까 이렇게 만든 형태는 이미 있었어요. 40년대 러시아에도 있었고, 50년대에도 동유럽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한국형으로 실용적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할리우드 쪽에서도 공감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참 잘 만들었다라고, 오히려 일본을 통해 수출을 하셨다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기술을 밖으로 수출하는 것에 대한 많은 관심을 안 갖고, 일본 쪽은 그런 영화 기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으니까 일본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출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원로영화인분들은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쪽에 관심을 갖지 않은 점, 그게 아쉽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정성일 _ < 몽녀 > 프린트를 CGV에서 시사를 하셨다고요. 장광헌_ 네, 용산 CGV에서 했습니다. 정성일 _ 그때 보셨을 때 입체 효과는 어땠어요? 장광헌_ 효과는요, 정말 좋았어요. 정성일 _ 아, 그래요? 장광헌_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아날로그로 보는 거와는 차이가 확실히 많이 났어요. 예상을 하긴 했는데, 저희가 < 몽녀 >를 보기 바로 직전에 뭘 봤냐면, 액션스쿨에서 제작한, 액션을 주로 취하는 영상이 효과가 많이 나니까 그걸 영상으로 찍은 다음 입체 영화로 만들어서 테스트를 했거든요. 그걸 보고 <몽녀>를 봤어요. 봤는데 못지않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시에는 저는 그걸 몰랐죠. 입체를 의식하고 연출을 하느냐 마느냐 이것도 많이 좌우를 하는데,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만약 풀 3D라면 전체가 공간적인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 연출을 했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때에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입체영화들의 대부분은, 이를테면 주먹이 날아온다거나 도끼가 날아온다든가 이런 쪽에만 표현을 3D로 한 거예요. 나머지는 2D로 한 거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실제로. 지금도 그때 <몽녀>가 완전히 표현이 되진 않지만 3D처럼 표현이 되는 부분, 머리가 확 나온다든가 이런 부분들을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효과는 아날로그로 보던 것과는 많이 차이가 났죠.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스크래치가 3D로 쫙, 그러자 화면에 기둥 하나가 탁! (웃음) 정성일 _ (웃음) 먼지 속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장광헌_ 놀랐습니다. 저 기둥은 뭐냐. 딱 봤더니 스크래치에요. (웃음) 새벽 3시에 비몽사몽간에 보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당시 3D에 대해 국산화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떠들썩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는 그런 쪽에 관심 있는 게 아니었고 고전영화에 입체영화가 있다는 데, 그걸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그게 되느냐. 그게 관심거리였어요. 효과는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거죠. 이런 것들이 저희들에게 걸림돌이었죠. 기술적으로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그냥 스크래치를 다 지우는 것이 완전히 복원이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영상을 다 뭉개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요. 최대한 그걸 가능한 많이 손대지 않는 쪽으로 하는 게 사실은 복원의 방법인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깨끗하고 선명하고 이런 것들을 좋아해서 외국, 유럽 쪽의 복원영화와 우리나라의 관람객들이 보는 복원영화의 눈높이는 그런 데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정성일 _ 제가 어렸을 때 입체영화들을 볼 때의 안경이 기억나는데요. 지금이랑 완전 딴판의 안경이었잖아요. 그 당시의 판스코프 비전을 보려면 그 당시의 안경이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지금의 안경으로 봐도 효과가 같은 건가요? 장광헌_ 그 당시의 안경으로 봐야 해요. 정성일 _ 그럼 디지털 복원 테스트 시사에서는 그걸로 보셨어요? 장광헌_ 우리가 만들었죠. 그러니까 당시 기록에 따라 셀룰로이드를 사서 저희 직원이 그대로 만들었어요. 할 수 있는 한 그대로. 테스트를 하려고 안경을 두 개를 만들었어요. 진짜 되더라고요. 그건 아날로그 방식을 보려고 했던 거고요. 저희가 아날로그 테스트를 하려면 기존의 영사기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식으로 생겼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래 보면 반이 쪼개져 있어요. 그 프레임을 (위 아래로 있는)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잡아내는 그런 렌즈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테스트할 때, 우리나라에 (그 렌즈가) 6개밖에 없었거든요. 그 중 3개를 어찌어찌 빌렸어요. 그 중 하나는 고장이 나서 또 안 됐고 두 개를 가지고 했는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영화 중에 < 공포의 축제 >라고 86년도 영화가 있습니다. 그 프린트가 가장 온전한 상태로 있어서... 정성일 _ 그 영화도 판스코프 방식인가요? 장광헌_ 네, 그렇죠. 그걸 봤죠. 그걸 보면서 안경을 만들었고, 편광안경을 만드는데,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편광방식을 패시브(passive) 방식이라고 하는데 리얼D, 돌비3D 이런 것들이 있는데, 처음에는 이 방식들이 같은 편광안경인 줄 알았는데 각자 다 다르더라고요. 리얼D면 리얼D 안경으로 만들어진 걸로 봐야 하는. 그리고 액티브 글래스(active glass) 방식이라는 것은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주는 방식이어서 안경이 비싸죠. 수신 장치가 따로 있고. 이런 건 프로젝터가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여도 보이는 거죠. 그런데 옛날 영사기는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예전에 < 몽녀 >를 만들어놓고 보니까 영사가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미러 박스를 만들어서 영사기에 장착해서 영사를 하셨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지방을 다니며 영사를 할 때는 장석준 기사가 직접 다니면서 미러 박스를 설치하고 영사까지 했답니다. 정성일 _ 순회공연이었네요. (웃음) 장광헌_ 직접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영화촬영을 못 했다, 그런 기록도 봤습니다.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그때의 배급 방식이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네요. 지금처럼 동시 개봉하고 그러면.. 장광헌_ 지금과 같은 엄청난 스크린이 있었으면 못했죠. 정성일 _ 기록에 의하면 < 몽녀 >는 유영길 과 장석준 , 두 분이 찍은 걸로 되어 있습니다. 장광헌_ 아, 유영길 촬영감독은 그때 보조역할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조역할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론 장석준 기사님께서 메인을 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성일 _ 저는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를 모두 3D 스크린으로 구현된 것을 보지 못해서 궁금합니다. 두 영화 사이의 기술적 차이는 어떻습니까? 단지 경험적 차이인지요? 장광헌_ < 몽녀 >가 두 번째 작품이잖아요. 저는 기술적인 적용치는 동일하다고 보고요. 방식은, (잠시 생각) 입체영화를 찍으면서 실제로 이 장비로 찍어서 잘 찍힌다, 이런 것보다 엔지니어의 노하우로 많이 좌지우지 하거든요. 신문 기사라든가, 당시의 구술 기록을 보면 < 천하장사 임꺽정 >을 찍어서 효과는 확실히 보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몽녀>를 찍을 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있다, 라고 하시고 계세요. 그래서 <몽녀>를 찍었을 때 카메라의 잘못 찍혔을 것에 대한 부분적이 보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경험치가 많이 업그레이드가 되었다고 보지,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신 영화까지도, 70년대 영화까지도, 동일한 방식이라고 알고 있어요. 정성일 _ 네, 그럼 하여튼 당시의 판스코프 방식을 보려면 지금의 관객들에게 옛날 방식의 편광안경을 만들어서 나눠줘야만 한다는 거군요. 장광헌_ 맞습니다. 그때 당시의 필름을 어찌어찌해서 복원을 해서 그 필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안경도 그렇게 만들어서 보여줘야겠죠. 정성일 _ 영사기의 문제도 또 있는 거죠? 장광헌_ 있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된 렌즈를 구해서 영사기에 장착을 해서 영사를 해야겠죠. 정성일 _ 한국영화사 안에서는 거의 저주받은 역사로군요. 6편의 역사라고나 할까? 장광헌_ 시도를 했다는 차원에서 많이 긍정적으로 봐주시죠. (웃음) 그런데 정말 손을 많이 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제가 전반적으로 봤을 때 (양팔을 크게 벌리면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손봐야 하는데, 이런 걸 장석준 촬영감독님은 하셨어요. 하신 걸 보니까, 정말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일을,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으면.... <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 입체 영상 정성일 _ 지난 5월에 자료원에 자리한 시네마테크에서 알프레드 힛치콕의 < 다이알 M을 돌려라 >를 3D 방식으로 상영하였습니다. 이 판본은 일종의 복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광헌_ 이번에 상영된 < 다이얼 M을 돌려라 >는 디지털 시네마 형태로 만들어진 3D 영화입니다. 1954년에 처음 개봉했을 때 어떤 시스템으로 상영되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연간 60편의 입체영화를 제작한 할리우드 방식을 봤을 때, 영사기 두 대를 돌려서 상영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그게 가장 유력한 방식이죠. 지금 상영하는 디지털시네마는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간편해졌죠. 둘 사이에 동일한 거는 찍어서 원 소스가 되는 영상은 좌우 영상 두 개가 존재합니다. 근데 만들어서 일종의 프린트 역할을 하는 디지털 시네마 패키지라고 하는 DCP 형태의 데이터는 그 영상을 디지털 기술로 합쳐서 보여주는 거예요. 대신에 데이터가 합쳐진 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고요, 관건이 되는 건 그렇게 합쳐진 데이터와 영사하는 시스템이 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영사기에 렌즈를 장착하고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다시피, 아날로그식으로는 영사 시스템이 간편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디지털은 또 영사 시스템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지금 나와 있는 것이, 아까 잠깐 설명 드린 것처럼, 크게는 패시브 방식과 액티브 글래스 방식 두 가지가 있고요, 액티브 글래스 방식은 어떤 특허 기술을 내서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 주는 겁니다. 기존의 디지털 프로젝트가 있는데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로 그 데이터를 DCP 영상으로 상영하게 되면 그 앞에 분배기 같은 역할을 하는 장비를 그 앞에 놔둬요. 분배기와 같은 수신기가 있는데요, 일종의 수신기를 놓으면 관객석에 있는 사람이 끼고 있는 안경 가운데 수신 장치가 있거든요, 그 수신 장치로 찰칵찰칵, 실제로는 여러 번 프레임을 나눠주면서 양쪽에 영상을 수신하면서 받아주는 역할을 해요, 그렇게 보여주는 방식이 있는데, 이 방식은 안경이 굉장히 고가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디지털 일반 프로젝트를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장단점이 있고요, 반면에 패시브 방식은 디지털 프로젝터를 가공해야 해요. 뭔가 앞에 렌즈 두 개를 붙이거나, 리얼D 방식은 렌즈 두 개가 나와 있는 방식이고요. 지금 일반적으로 CGV에 소니의 장비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소니 장비는 입체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리얼D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앞에 렌즈가 두 개 달려 있어요. 그래서 프로젝트 하나에 렌즈 두 개가 붙어있는 방식인 거죠. 그 외 다른 건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마스터 이미지란 것이 있고, 돌비3D란 것이 있는데, 이거는 그 기종에 해당되는 것만 되지, 다른 기기와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3D가 아직은 그렇게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아요. 디지털 3D 기술이 제작에 있어서는 간편해졌는데, 상영 시스템은 좀 복잡해요. 아날로그와 다른 점이 그런 겁니다. 정성일 _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보면서 이안이 참 영리한 연출자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 영화는 사실 3D 화면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걸 종종 여러 화면 사이즈로 다시 분할한 다음 시각적 효과라는 것을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힛치콕의 < 다이얼 M을 돌려라 >에서도 부분적으로만 3D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인 연출이라기보다는 기술적 한계라는 측면을 포함해서 < 몽녀 >의 입체 연출 장면은 영화 전체의 어느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지요? 장광헌_ 전체를 3D로 재현해서 보질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은 안 되지만 당시 기록을 봤을 때 풀 3D는 전혀 아니었어요. 연출자의 연출에 의해서 그런 장면만 3D 형태로 구현을 하는 방식이었고,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를테면 80년대에 만든 < 공포의 축제 >는 확실히 말씀하신 것처럼 2D 부분이 있고, 어느 부분은 갑자기 3D 부분이 있고 그런데, (잠시 생각) 3D 부분이 많지 않았어요. 대충 어림잡으면 많아 봐야 4분의 1 정도가 3D 정도일까, 그런 효과를 내는 장면을 만드는 거죠. 근래 영화들도 실사 영화들은 풀 3D로 만드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고요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거의 풀 3D로 만들죠. 정성일 _ 당시 기사를 보면 < 몽녀 >는 이재웅 녹음기사가 입체음향으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건가요? 장광헌_ 아, 그건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입체 영화니까 사운드도 입체감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확인해 보니까 당시 < 몽녀 >를 제작했을 때는 3트랙으로 만드는 녹음 방식을 취하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4트랙이 스테레오인데 스테레오와 비슷한 형태였던 거죠. 웃음이 나오는 부분은, 당시 그렇게 만들었는데 극장에서 상영할 때 구현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석준 촬영감독이 당시 동아극장, 그러니까 나중에 아세아 극장이죠. (아세아 극장은 지금의 세운상가에 자리했다가 2001년에 문을 닫았다) 아세아 극장에서 입체음향을 내기 위해서 영사기에다 3트랙을 읽어 들이는 영사장치를 또 개발해서 붙이셨어요. 그렇게 해서 상영을 했다고 합니다. 정성일 _ 트랙이야 필름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실제로 테스트 영사를 했었을 때 현대의 극장에서 구현된 사운드의 느낌이 어땠어요? 장광헌_ 아, 그거를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래 원본은 없고, 사운드 필름도 없었고,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를 만들었는데, 갖고 있는 원본 프린트는 모노입니다. 정성일 _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거군요. 장광헌_ 그렇죠. 그런데 80년대에 저희에게 들어온 프린트도 원래 당시의 사운드를 낼 수 있는 필름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저희가 생각 하건데 3트랙짜리 사운드가 아니고 이건 그 이후에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프린트가 아닐까, 라고 추정하는 겁니다. 정성일 _ 만약에 추론컨대, 그 방식을 그 시스템으로, 실제로 들었으면 어떤 사운드가 들렸을 거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지금으로 따지면요, (잠시 생각) 그냥 스테레오죠. 스테레오와 비슷하게, 라는 거죠. 완전한 스테레오는 아니지만 모노의, 단방향의 센터에서 보내는 음향이 들리는 것보다는 양쪽에서 들리는 부분은 굉장히 낫겠죠. 모노보다는. 레프트 라이트로 나눌 수 있었을 겁니다. 정성일 _ 그럼 복원을 하게 되면 음향도 복원 대상이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사운드도 복원 대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제까지 저희가 복원했던 작품들은 대체로 사운드가 모두 모노였어요. 모노였기 때문에 굳이 그 트랙을 나눠서 다시 맞춰가면서 하진 않았어요. 단지 포커스를 맞춘 부분은 노이즈 쪽이었죠. 노이즈가 많은, 여러 가지 불편한 음향들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 쪽에 포커스를 맞췄지, 실제 마스터링을 다시 하는 쪽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5.1채널, 7채널 같은 거야 이후에 그걸 복원한다면 그렇게 다시 나눠야겠죠. 일본의 경우 음향과 대사를 분리해 고전영화 사운드를 리마스터링 하긴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럴 여건이 못 되는 게 현실입니다. 정성일 _ 문제는 < 몽녀 >같은 작품은 장석준 촬영감독님이나 이재웅 녹음기사, 모두 세상에 지금 계시지 않으니 복원을 할 때 가이드 라인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군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은 1980년에 돌아가셨고, 이재웅 기사는 2010년까지 생존해 계신 걸로 확인했는데 그 이후는 지금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 지지하루의 흑태양 >(1971), 경향신문 광고(1971.4.1.)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도 보셨습니까? 장광헌_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프린트는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성일 _ 그럼 그 이후의 입체영화로 자료원에는 어떤 영화가 있는지요? 장광헌_ < 홍길동 >입니다. 근데 이 <홍길동>이, 오늘 아침에 제가 확인했는데, 그게 현재까지도 네가 필름만 있는데 필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이걸 프린트로 옮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3D였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맞는데 2D 영상은 하나만 있으니까 그게 분명히 레프트, 라이트 중 하나만 저희가 갖고 있는 거고요, 하나의 영상이 없는 겁니다. 네가만 존재하고 기록이 없으니까 이제까지 저희 직원들은 모두 이게 3D 영화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은 3D 영화로 분류하되, 하지만 좌, 우중에 하나다, 라고 확인을 한 정도입니다. 정성일 _ 그럼 < 천하장사 임꺽정 >, < 몽녀 >, < 홍길동 > 이렇게 순서대로 보면서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모두 판스코프로 촬영했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요? 이 문제는 미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촬영의 입장에서는 기술의 개선이라는 문제로 먼저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스코프의 촬영방식에서 어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나요? 장광헌_ 그런데 이게, (잠시 생각) 제가 계속 말씀 드리는데, 그 전에 < 악마와 미녀 >도 있고, 전부다 똑같이 지금 3D로 재현한 필름이 없어요. 그러니까 본 사람이 없는 거고, 본 사람이라고 해봤자 80년대 초반, 그 이후에는 본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저희가 보기에는. 그래서 이게 어디가 어떻게 변천되면서, 뭐가 고쳐졌다, 라고 확인할 길이 없는 거죠. 저희가 봤을 때 방식은 같아요. 대체로 지금 디지털 3D 기술도 마찬가지지만 찍는 사람의 노하우가 많이 좌우를 하거든요. 얼마나 빨리 찍고 얼마나 잘 찍을 수 있는지, 고스트 현상을 없앨 수 있는지 촬영기사와 지금의 스테레오그래퍼 라는 특수한 직업의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양각과 음각, 들어간 것과 나오는 것을 연출하면서 촬영 감독과 같이 보고 모니터링을 함께 해요. 그래서 모니터를 할 때 예전에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이렇게 보다가 입체영화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스테레오그래퍼 이렇게 같이 보는 거죠. 3D 기술은 그렇게 바뀌었는데, 물론 장비의 개선을 하시려고 했겠죠. (잠시 생각)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렌즈가 크면요, 아무리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아요. 렌즈와 렌즈 사이의 간극이 11센티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옛날 방식의 카메라들은 분명히 다 크니까 렌즈가 그 간극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모두 크잖아요, 아무리 둘 사이를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을 테니까 이걸 어떻게 하면 컴팩트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관심이 집중되었겠죠, 이런 면에서 줌 렌즈를 쓰는 것이 또한 개선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성일 _ 아, 줌 렌즈요... 만약 그 방식이라면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거의 동시에 발생하지 않습니까. 결국 카메라를 가능하면 세워 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3D 효과를 구현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좀 더 까다로운 기술적 난점과 만나게 될 텐데... 장광헌_ 아 조금 더 말씀 드리면요. 왜 장석준 촬영감독이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찍으려고 하셨을까, 를 한번 생각해 봤어요. 지금 3D 영화들은 트라이포트처럼 생긴 곳에 받침대 같은 게 있습니다. 그 받침대에 카메라 두 대를 장착해서 찍습니다. 근데 이게 수평이 정확하게 맞거나 간극도 정확하게 맞아야 해요. 근데 요 받침대가, 실제로 리그라고 합니다만, 이 리그를 어떻게 정밀하게 깎느냐가 기술이에요. 그런데 카메라가 한 쇼트만 찍는 게 아니고 계속 움직이면서도 찍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돌아가면,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의 상이 겹치는 상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걸 고스트 현상이라고 해요. 또 광원이 들어갔는데 우완 영상에는 햇빛이 없는데, 좌완 영상에는 햇빛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날로그로 찍으면 절대 고칠 수가 없거든요. 디지털로 찍게 되면 그건 디지털 소프트웨어로 고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솔루션화 해서 만들어진 게 요 근래 디지털 3D의 발전적인 기술인데, 생각을 해보면 그때 아날로그적인 기술로 봤을 때는 두 대의 카메라로 찍으면요, 왼쪽 렌즈와 오른 쪽 렌즈로는 상을 같이 맞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추정하건데, 카메라 한 대로 만드신 게, 카메라 한 대에 렌즈가 붙어있으니까 (둘 사이의 서로 다른) 움직임은 적어도 없지 않았을까 라는 거죠. 생각해볼수록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이거 정말 괜찮은 생각을 하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는 지금의 3D 기술에서 가장 난점이 되고 고도화 기술이 되는 부분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카메라 한 대로 렌즈 두 개를 장착해서 찍었다. 그게 오, 저는 굉장히 일리 있는 기술적인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_ < 몽녀 >와 주변의 입체 영화들을 복원하는 과정의 경험치가, 한편으로는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 3D 영화들에서 프린트 이외에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 거네요. 안경과 영사기, 말하자면 관람방식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문제. 장광헌_ 안경은 당시의 그 방식에 대한 기록만 있으면 만들 순 있어요. 데이터만 있으면 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그 데이터가 없으면 정말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죠. 근데 저희가 알았던 것은 일본 쪽에서 그런 옛날 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로 하니 딱 맞는 거예요. 당시 장석준 촬영 감독이 그렇게 만든 카메라가 거꾸로 일본으로 가서 많이 쓰였다고 하니까, 60년대 괴수영화를 보면 일본 기술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많이 찍었다고 하는데, 근데 입체영화는 거꾸로 수출을 하게 된 거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큰 공을,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상할 정도로 그 시기에 임권택 감독님이 미학적 관심보다는 기술적 관심에 대해 크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 몽녀 >에서는 3D 촬영을, 그리고 <증언>에서는 미니어처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쫓아가고 있으면 마치 앞으로 자신의 연출이 가야할 하나의 방향이라는 느낌이 든달 까요, 장광헌_ < 천하장사 임꺽정 >이 68년 초에 만들어진 거고 이 < 몽녀 >가 그해 여름에 찍은 걸로 알고 있어요. 3D 영화로 두 번째 찍은 건데, 정말 저는 개인적으로 감독님께 궁금한 게 왜 갑자기 입체 영화를 찍으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기술적인 관심이 있어서 한번 이거 해볼까 라고 생각하신 건지. 지금은 보조 역할을 하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당시에 완전 3D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연출하시는 분이 아, 여기는 입체감을 줘야겠다, 라고 연출을 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거든요. 말하자면 당시의 3D 영화는 전적으로 연출자의 연출과 촬영하는 쪽의 기술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거죠. 정성일 _ < 몽녀 >에서 3D 테스트 시사를 할 때 선택한 장면은 그걸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장광헌_ 아 테스트 장면이요. 자동차 신, 움직이는 신, 저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가장 움직임이 많은 쪽을 하려고 했어요. 복원을 할 때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손상이 많이 간 부분과 덜 간 부분을 샘플로 골라서 작업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이건 입체 영화니까, 입체 효과가 많이 나는 부분, 자동차가 확 앞으로 지나가는 신이었던가, 이 장면을 선정했어요. 사실 저희가 그 장면을 선택해서 이야기한 건 아니고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입체 작업을 할 때 가장 이 부분이 낫겠다, 라고 그쪽과 이야기해서 정한 거죠. 정성일 _ < 홍길동 >도 보셨나요? 장광헌_ 볼 수 있는 매체는 현재 없습니다. 정성일 _ 기록상으로 < 홍길동 >은 일본 제작진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이전 방식과 다른 빙식을 취한 건가요? 장광헌_ 기록상에 보면, 신상옥 감독이 일본 기술진과 (협력)해서 기술 개발을 했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확인할 길은 근데 없어요. 제 생각으로 오히려 기술개발을 했다면 촬영기술 쪽에 기술개발을 한 게 맞지 않을까 추정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판스코프 방식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갖고 있는 게 포지티브가 있는 게 아니고 네거티브가 있는데, 그 네거티브 중에서 좌완, 우완이 있는 게 맞는 데 그 둘 중 하나만 있는 거니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판스코프 방식은 좌완, 우완 네거티브가 있고 이걸 프린트 인화할 때 프린트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이 기술인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죠. 만약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면 그것도 동일하게 판스코프 방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정성일 _ 만약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한국에는 두 가지 입체 시스템이 있었던 셈이군요, 추정컨대, 혹은 기록상으로 이것 말고 또 다른 방식이 있나요? 장광헌_ 지금 2000년대 들어서 만든 영화는 < 평화의 시대 >라고 해서 HOT 나오는 영화가 있었어요. HOT 팬들을 위해서 만든 29분 길이의 영화인데요, 이걸 만든 방식은 판스코프 방식이 아니고, 프린트가 레프트 프린트, 라이트 프린트가 따로 있어서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프린트만 특이하게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중에 할리우드에서 촬영하고 영사하는 방식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홍길동 >은 확인이 안 되고요. 판스코프 카메라 정성일 _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가 현재 보존되어 있나요? 장광헌_ 카메라는 없고요.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영화진흥공사 시절에 기증을 하셨어요. 그 카메라를 종합촬영소에 전시를 했었어요. 그게 90년대까지는 보셨대요. 그런데 현재는 어떤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실되었습니다. 그 카메라가 있으면, 작은 카메라는 아니고요, 독특하게 생긴 카메라죠, 카메라 박스에 마가진 두 개. 달린. 정성일 _ 혹시 사진이 남아 있나요? 장광헌_ 사진은 지금 저희에겐 없고요.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면 러시아에서 나온 사진기 자체가, 그 원리를 알 수 있는 사진기는 (볼 수) 있어요. 저도 이게 어떻게 생긴 건진 본적이 없으니까. 영진위에는 찍어놓은 사진이 있겠죠. 분실돼서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됐는데, 이게 어디 가지는 않았을 텐데... 정성일 _ < 홍길동 >은 장석준 촬영감독이 관여하지 않은 3D 영화입니다. 기술 판권문제는 제가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영화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누차 이야기한 것처럼 3D 촬영에는 단지 기술만이 아니라 경험치가 필요하다면 더더구나 거의 유일한 촬영 전문가인 장석준 촬영감독의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활동 중이었습니다. 장광헌_ 약간 까다로운 문제가 있어요. 실제로는 신상옥 감독이 < 홍길동 > 제작에 참여했다고 했잖아요. 우리 기록에는 그 필름 크레딧이 있는데 거기엔 삼영필름이에요. 정성일 _ 아 신필름이 아니고요? 장광헌_ 네, 그래서 저도 그게 의아해서 자료를 맞춰보았어요. 그때는 (다른 영화사 이름을 빌려서) 대명(代名)제작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게 76년도 영화이고, 그럼 신필름이 폐업한 이후의 일이니까 혹시 신상옥 감독님이 제작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대명제작을 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럼 보통 대명제작을 하게 되면 제작은 아니더라도 기획에 대명제작을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도 야, 이건 좀 이상하다. 확인을 해봐라, 이러는 중입니다. 이게 과연 신상옥 제작이냐, 현재 기록상으로는 삼영필름 강대진 제작으로 돼있어요. 그게 좀,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개발 방식이 판스코프 방식이냐 아니냐, 그것도 반반인 거 같아요. 판스코프방식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정성일 _ 그 사이에 일본 쪽에서도 계속 개발을 하고 있었을테니까, 장광헌_ 그런데 그 시간에, 공존하는 시간에 장석준 촬영감독님이 판스코프 방식을 계속 유지하고 계실 때였어요. 그러니까 만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 홍길동 >을 촬영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판권을 주장했을 수 있었겠네요, 이를테면 내가 찍지 않는 영화는 허용할 수 없다, 그 정도 열정을 갖고 3D 촬영에 임했다면 그 정도 자부심을 갖고 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장광헌_ 그게 이번에 조사하면서, 우리도 데이터가 부족하니까, 이건 좀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라고 생각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정성일 _ 그렇군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전 < 몽녀 >를 3D로 볼 수 없는 상태로 보면서, 하여튼, 역설적인 상황 안에서 제 일을 수행해야겠군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인터뷰_ 2013년 6월 21일 날씨 가끔 흐리고 참 더웠음 대담_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서비스부 부장 장광헌 진행, 정리, 사진_ 유성관 진행,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