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
- 감독
- 장-루이 길예르모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스테파노 디오니시, 아네트 슈라이버, 미셀 셀로드, 미셸 갈라브루
※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흰 캔버스 위에 흑연을 든 손이 나타난다. 화가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그림을 지시하던 중 어떤 작품과 마주치고 누가 저것을 꺼냈냐며 묻자 카메라는 그 그림을 클로즈업한다. 그림의 제목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여인이 젖은 몸을 이끌고 섬 깊이 들어가 거대한 저택에 다다른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 저택에 온 여성 화가다. 언니의 운명을 물려받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와 그의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는 마리안느. 그는 모델이 되길 거부하는 엘로이즈에 의해 ‘산책 친구’로 위장하곤 엘로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며 초상화를 그린다. 엿본 얼굴의 조각들을 짜 맞추듯 완성한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그것이 자신과 비슷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혹평에 마리안느는 그림엔 ‘규칙과 관습’이 있다고 자신을 변호하지만, 그에 엘로이즈는 ‘생명력과 존재감’은 없냐며 되묻는다. 마리안느는 분에 차 그림을 뭉개버리고, 영화의 2막이 시작된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며 본격적인 초상화 작업에 들어간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응시하며 불꽃이 번져오르듯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엘로이즈는 응시하는 존재다. 그는 소피의 임신중절수술 현장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마리안느에게 고개를 돌려 마주하라고 말하며, 관찰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묘사하려는 마리안느에게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거듭 평등을 강조한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 세 여성이 나란히 담긴 부엌 신과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해 논쟁하는 신은 18세기 프랑스의 신분 제도를 배제해버린다. 한 폭의 명화 같기도 한 수평 앵글은 그 어떤 굴곡도 확대도 없이 고요하게 그들을 투과한다. 오직 타닥거리는 난롯불 소리, 세찬 파도 소리, 캔버스 위를 방황하는 붓 소리와 때때로의 정적만이 존재하는 화면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동등하고 평등하게 응시한다. 이러한 응시는 여태껏 남성적 시각에서 배척받아 온 여성의 이슈인 생리와 임신중절 또한 굴곡 없이 묘사한다. 소피의 임신중절수술을 재현해 그리자며 일어서는 엘로이즈를 따라 기억은 기록으로 진화하는데, 이는 여태껏 외면받아 온 여성의 역사에 대한 추상이기도 하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이는 복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 영화의 오프닝 속 마리안느다. 그는 엘로이즈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학생들 앞의 모델이 된다. 두 번째로 연주회장에서 울 듯 우는 엘로이즈의 옷은 저택서 조율이 안 된 피아노를 연주하던 마리안느의 옷과 닮아 있으며, 심지어 정사를 나누던 중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마리안느의 것처럼 검게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지속적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일체화함으로써 화가와 모델,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관계를 뒤집는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평등의 메시지와도 맞닿아있다. 뒤돌아봐. 마리안느는 자신 이전의 화가가 완성하지 못한, 얼굴이 지워진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불을 지른다. 마리안느가 붙인 가슴께의 작은 불씨가 캔버스에 번져 올라 엘로이즈를 삼키는 모습은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를 빨아들이는 지하 세계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지하 세계에서 자신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던 중 하데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뒤를 돌아봐 또다시 아내를 잃는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엘로이즈의 재해석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실상은 이렇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게 한 것은 그의 얕은 인내심이나 충동이 아닌, 에우리디케의 “뒤돌아봐요”라는 한마디 작별 인사다. 시간은 흐르고, 마리안느는 작별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담긴 그림을 출품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그림 속 오르페우스의 것과 같은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으며 에우리디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이는 마리안느가 마주한 엘로이즈의 마지막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헤어짐의 순간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말했다. “뒤돌아봐.” 엘로이즈는 지하세계에 남겨진 것일까? 그 옛 신화 속 에우리디케처럼. 뭐예요? 좋아하는 곡이요. 영화는 이들의 사랑을 다분히 정적으로 묘사한다.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절제된 채 묘사된 감정선은 영화 내에서 음악과 함께 두 번 고양되는데, 첫 번째는 하모니 신이다. 어두운 밤 모닥불 앞에 모인 여성들은 ‘그들은 도망칠 수 없다.’라는 노랫말을 반복해 부르며 하모니를 이룬다.(이 의문스러운 하모니는 상당히 성스럽고 웅대하게 들린다.) 이 음성과 함께 마리안느를 응시하던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이 붙고, 마리안느는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본다. 이 장면은 곧 마리안느에 의해 기억, 기록되며 추후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회상하며 그려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두 번째는 엔딩 신이다. 이별 후 마리안느는 연주회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를 마주한다. 영화가 시작된 이래 줄곧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던 음악은 일방적인 재회의 현장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외딴 작은 섬에서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소리로 연주되던 비발디: 사계 여름이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재연주되고, 동시에 관객은 줌 인하는 카메라를 통해 빨려 들어가듯 엘로이즈의 내면세계와 동화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배제되던 음악이 절정의 순간에 느닷없이 튀어 오르는 연출은 셀린 시아마의 전작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 걸후드 >에선 ‘Diamonds’가, < 톰보이 >에선 ‘Always’가, 그리고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에선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이 화면 밖으로 솟구치며 굴절을 만들어낸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 외딴 섬이라는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18세기 프랑스라는 시간적 배경과 맞물려 영화의 피륙을 낭만적으로 직조한다. 해안가와 저택을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독 공간적 배경이 강조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포스터 속 파도 신이다. 이별을 앞둔 것을 실감한 후 다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거센 파도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흐느낀다. 이때 그들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파도와 파도 소리는 이들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허나 이 판타지적인 시공간적 배경과 대조적으로 이들 멜로의 결말은 꽤나 사실적이다. 이 파도 앞에서 마리안느는 용서해달라 말한다. 결혼하지 말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손을 잡고 몰래 섬을 빠져나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같은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이별을 선택한 것처럼 사랑의 도피가 아닌 일주일간의 추억을 택하며,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기를 약속한다. 사랑에 빠진 순간은 결코 명확할 수 없다. 그들이 처음 얼굴을 마주한 바닷가에서였는지, 은밀히 훔쳐본 얼굴을 되짚어보며 캔버스에 옮기던 낮이었는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던 밤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을 후회하지 않고 기억할 뿐이다. 나아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함께 행하는 그리기는 휘발성을 지닌 기억을 영구적이며 쌍방향의 입체성을 띠는 기록으로 승화시켜낸다. 어떠한 굴곡도 확대도 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그려진 사랑. 고요한 응시와 약간의 흑연으로 ‘기록’된 28페이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셀린 시아마의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은 두 여인의 짧은 기간 동안의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화실에서 초상화 수업을 하던 마리안느가 ‘치맛단에 불이 붙은 한 여인’을 묘사한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이 환기시키는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리안느는 정혼자에게 보낼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청탁받고 외딴 섬에 도착한다. 레즈비언 로맨스로서, 이야기의 중심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 있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동성애적 관계의 서사적 진전은 더디게 진행되고 지연된다. 이전에 초상화 모델이 되기를 거부했던 엘로이즈와 ‘산책 친구’로 가장하여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마리안느 사이의 긴장과 서로를 향한 관심이 서서히 차곡차곡 화면을 채워가지만, 영화는 하녀 소피를 포함한 세 여자의 유대내지는 연대적 관계 묘사에 집중한다. 애당초 여자들만 있는 공간이었지만, 가부장제의 대리인인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후, ‘집’은 다른 공간으로 전환된다. 그 곳은 신분도 계급도 ‘아버지’도 없는 해방의 공간이 된다. ‘아가씨’, ‘화가’, ‘하녀’는 서로에게 살가운 친구가 된다. 하녀는 수를 놓고 아가씨는 음식을 장만한다. 하녀는 앉아 있고 아가씨는 서서 가사 노동을 한다. 셋이서 나란히 식탁에 앉아 음식을 장만할 때, 삼각대형으로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할 때, 바닷가로 산책을 나갈 때, 잘 짜인 화면 구도와 카메라 움직임은 그들의 수평성을 강조한다. 이 해방의 공간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세 여자가 함께 책을 읽는 부분이다. 셋은 오르페우스신화를 읽고 있다. 이야기의 절정 부분, 에우리디케가 하데스의 세계, 지하의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장면에서, 세 여성은 각자의 해석과 의견을 제시한다. 예컨대, 소피는 지상의 입구에 도달하기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어긴 오르페우스의 행동에 분노한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오르페우스를 불러 뒤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녀의 의지로 지하세계로 돌아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해석은 영화의 의미화 층위에서 그녀가 마리안느와의 관계에서 행할 선택에 반향하며, 이후 마리안느의 그림으로 재차 반영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진정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여성관객성’에 대한 영화의 자기반영적 성찰로서 가지는 울림 때문이다. 텍스트에 저항하고, 결을 거슬러가며 독해하고, 행간을 채우고, 의미를 전유하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가부장적인 텍스트들에 둘러싸여 있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분노, 지성을 이용하여 쾌락을 만들어 가는 여성관객성의 핵심을 관통한다. 또한 “결국 서사적 해결은 이야기를 만든 자의 선택”이라는 말을 통해, 스토리텔링 장치의 남성중심적 위치와 그 이데올로기적 지지대를 소환한다. 이러한 세 사람의 유대는 소피의 임신중절 과정을 함께 히는 것으로 확장된다. 원치 않은 임신에, 세 여성은 여성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간요법에 대한 지혜를 모아 시행하지만 실패한다. 영화의 표제가 된 미술 작품이 탄생하는 밤의 해변 장면은 고혹적이고도 아름답다. 밤에 여성들이 해변에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하는 장면은 신비로운 비의적 아우라에 쌓여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여성들은 그녀들만의 비밀스런 정보를 알음알음 교환하고 고통을 나누는 듯하다. 셀린 시아마는 여성들의 모임의 비의적 하모니 속에 관객들을 참여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곳, 여성들만의 비밀의 세계에서 엘로이즈의 치마에 불이 붙는다. 즉 그녀의 욕망이 타오른다. 소파시술 장면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놀라움을 주는 것으로서 여성 이슈에 대한 시아마의 깊은 탐구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지금이나 두 세기 전이나 여성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며 아이를 유산한다. 가려지고, 기록되지 않고, 재현되지 않은 여성의 역사에 대한 시아마의 소명 의식은, 집에서 엘로이즈가 소파시술 장면을 재연하고 마리안느에게 그리라고 할 때, 자기반영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질문한다. 여자가 여자를 그린다면, 여자가 여자를 응시한다면, 어떤 변화가 생성될까. 셀린 시아마가 한 인터뷰에 밝혔듯이, 1770년대 당시 여성 화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마리안느처럼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하였다. 여성 화가들에게 초상화는 배타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한에서 허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초상화는 남성 화가의 전유물이었다. 초상화에는 초상화가의 시선이 구조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고, ‘결혼을 위한 초상화’라는 분명한 목적은, 보는 자(화가와 관객)의 위치를 남성으로 못 박는다. 이 때 포즈를 잡는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신을 바라본다. 정혼자의 마음에 들만큼 예쁘게, 정혼자의 성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에로틱하게, 몸을 비틀고 ‘적당히’ 노출하도록 요구받는다. 남성 화가는 바라보고 행위하고, 여성 대상은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녀는 남성의 응시를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포즈’란 시선이 오고가고 부딪히는 과정이며 포즈를 체화하는 몸은 시선의 전쟁터이다. 엘로이즈가 이전 화가에게 포즈를 거부했던 것, 그리고 화가가 엘로이즈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뭉개놓았던 것이 엘로이즈가 남성 화가의 일방향적 응시에 저항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화가는 자신의 응시의 좌절과 그 분노감을 그림의 구조 속에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작업은 응시를 주고받음의 상호작용과정으로 전화시킨다. 마리안느의 시선 뿐 아니라, 엘로이즈의 시선이 카메라와 대사를 통해 명료화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응시를 통해 서로의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과 버릇, 그리고 사랑의 기미를 포착한다. 이때 셀린 시아마가 전경화하고 있는 것은 시각문화예술 전반에서의 시선의 문제 그 자체이다. 그것은 시선의 구조화를 둘러싼 영화 장치의 젠더 관계를 질문하고 드러내고 새롭게 구조화하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를 바라보고, 사랑의 눈으로 응시하고,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은, 엘로이즈의 몸에 마리안느의 얼굴이 겹쳐지는 누드화로 인장된다. 이는 서구의 회화 역사에서 보기 방식의 양식화를 통해 남성 관객 위치를 새겨 넣는 지배적 형식으로서의 누드화를 레즈비언의 에로틱한 시선으로 일순간에 전복시키는 순간이다. 귀족 가문의 거실에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놓일 것이라면, 그 누드화는 공적 초상화 밑면의 ‘네가 이미지’, 즉 음화(陰畫)이자 레즈비언 음화(淫畫)인 것이다. 시각화와 관련하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전은, 초상화같이 포착된 결혼식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의 이미지이다. 그 비전은 모순적 상황과 내적 갈등이 깊어지는 순간들에 마리안느에게 출몰한다. 검은 어둠을 배경삼아 정면에 시선을 둔 채 서있는, 엘로이즈의 전신을 담은 그 ‘초상’은 흡사 유령 같다. 깊은 어둠이 엘로이즈의 형상을 허공에 매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비전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의 실제 안으로 봉합됨으로써 일종의 플래시포워드로 재위치화 되는데, 이 이미지 역시 결혼 초상화의 밑면에 자리한 네거티브 이미지이다. 이 유령 신부의 이미지는 여성들의 생기, 여성들의 성애적 관계의 죽음으로서의 결혼의 의미를 드러낸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결혼 제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유령으로서의 삶이다. 꽤나 긴 길이의, 내레이션이 동반된 에필로그는 십중팔구 진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에필로그는 떨리는 화표면의 진동을 통해 보기 드물게 감동적인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 낸다. 두 사람의 이별 후 다른 화가의 시선과 손으로 그려졌을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며 관객들은 그 시각화의 과정을 예측하게 된다. 엘로이즈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어떻게 재현되기를 원하였으며, 초상화가와 어떤 시선의 협상을 하였는지를. 아울러 그것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측면을 강력한 힘으로 증언하는데, 이성애 실천 가운데 말소 되지 않는 동성애적 욕망의 존재이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 비발디의 음악을 매개로 한 엘로이즈의 얼굴 클로즈업은 기억의 한 챕터에 넣어두었던 여성 성애의 주이상스의 현현이다.
영화업자가 극장 안에서 관객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 판타지아 >(1940)를 소개한다. 그러나 할리우드로부터 상영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는 <판타지아>의 ‘모조품’을 만들기로 하고, 감옥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애니메이터들을 데려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섯 곡의 클래식 음악과 함께 디즈니 <판타지아>에 대한 패러디와 풍자가 넘쳐나는 전복적인 애니메이션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블 음반 ‘더 월 The Wall’을 영상으로 옮긴 알란 파커 감독의 <더 월 The Wall>(1982), 비틀즈 음악을 소재로 만든 애니메이션 < 옐로우 서브마린 Yellow Submarine >(1968) 등과 함께 음악을 모티브로 한 영화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 알레그로 논 트로포 Allegro non Troppo >는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작가 브루노 보제토(1938~ )의 1976년 작품으로 <서부와 소다 West and Soda>(1965), <빕, 나의 형제 슈퍼맨 The Super Vips>(1968)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에피소드들 이 유머러스하고 디즈니 보수주의에 저항하는 대담한 옴니버스 장편 애니메이션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첫 곡은 드뷔시의 관현악 ‘목신의 오후 전주곡’으로 시작하는데, 감독은 < 판타지아 >의 ‘전원 교향곡’ 에피소드를 패러디하여 젊고 아름다운 목신(牧神)이 아닌 늙은 목신의 여성을 향한 관능적 몽상을 허망하게 그리고 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7번’이 흐르고, 파시즘과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풍자가 빛을 발한다.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콜라병이 등장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는 반복적인 메타모르포제 리듬을 타는 라벨의 ‘볼레로’를 배경 음악으로 하여 인류의 탄생과 진화를 충격적인 반전으로 패러디한 영상이다.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를 애니메이션 화한 네 번째 에피소드는 철거로 파괴된 황량한 도시에 살고 있는 작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음악과 어우러진 서정적인 화면은 아마도 이 작품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비발디의 ‘협주곡 C장조‘를 소재로 하였는데, 식사 준비를 방해받은 벌의 반격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애니메이터까지 싸움이 벌어져 온통 난장판이 되는 이야기이며,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로 시작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을 등장시켜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병폐와 모순을 거침없이 들춰내고, 다시 한 번 디즈니의 < 판타지아 >를 조롱하는 피날레로 이어진다. <타품! 무기의 역사! Tapum! Weapons History!>(1958), <서부와 소다 West and Soda>(1965) <미스터 로시, 자동차를 사다 Mister Rossi Buys a Car>(1966), <오페라 Opera>(1973)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국민작가’로 불리는 브루노 보제토는 1938년 밀라노 태생으로 10대 시절 만든 8mm 단편 애니메이션 <도날드 덕 카툰>(1953)을 시작으로 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만든 단편 <타품! 무기의 역사! Tapum! Weapons History!>(1958)를 계기로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그는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미스터 로시, 자동차를 사다 Mister Rossi Buys a Car>(1966), 바르셀로나 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피클즈 Pickles>(1971), 안시 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오페라 Opera>(1973), 히로시마 영화제에서 수상한 <지그문트 Sigmund>(1983),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한 <미스터 타오 Mister Tao>(1988),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메뚜기 Grasshoppers>(1990), 카툰스 온 더 베이 등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스파게티 가족 Spaghetti Family>(1996), <바쁘게 사는 자들의 세상에 대한 역사(History of the World for Those in a Hurry>(2001), <인생 Life>(2003), <도로의 무기 Weapons on the Road>(2008), <섹스&펀 Sex & Fun>(2012> 등 지난 60여 년 동안 거의 매해 거르지 않고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어 발표해왔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120여 회에 달하는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끊임없는 창작 의지로 일생을 바쳐 만든 70여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과 라이브액션 그리고 일곱 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특유의 풍자를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거장 브루노 보제토, 그의 다양한 애니메이션들은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user/BrunoBozzettoChannel )에서 온라인으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