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 감독
- 최정환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노형욱, 윤혜리
사진: " 플로우 ", IMDb 한국영화로는 두 편을 골랐다. 이란희 의 < 3학년 2학기 >(2024)는 < 다음 소희 >(정주리, 2022)와 겹치는 영역을 다루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르다. 멜로드라마는 최소화되었고 아마도 지속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차분한 일상성이 들어온다. 무엇보다 이처럼 일상의 노동과 그 환경에 이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는 영화는 오래간만이다. 윤가은 의 < 세계의 주인 >(2025)을 통해 자주 다뤄진 특정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단호하고 명쾌한 방식은 놀랍고 새로우며 아름답다. <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2025)과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 2025)는 올해의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재료와 스타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까. < 내 말 좀 들어줘 >(마이크 리, 2024)는 마이크 리의 방법론이 아직도 새롭고 강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올해는 프랑스 영화가 두 편인데 < 여름의 랑데부 >(발렌틴 카디크, 2025)에서 우린 에릭 로메르에서 시작된 전통이 로메르의 영역을 넘어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 <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 2024)는 아마도 올해의 코미디인 것 같다. 사악하게 어처구니없지만 그러면서도 연민과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그리고 <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파얄 카파디아, 2024)이 그려보이는 뭄바이는 영화가 도시를 그리는 가장 완벽한 도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애니메이션을 두 개 골랐다. 너무 처참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너무 작정하고 못생겨서 오히려 사랑스러운 < 달팽이의 회고록 >(아담 엘리어트, 2024)과 바로 오늘 다룰 < 플로우 >(긴츠 질발로디스, 2024)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플로우>를 고른 데에는 개인적 이유가 있다. 작년에 나는 같이 살던 고양이 한 마리를 떠나보냈다. 사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내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플로우>를 처음 보았을 때 내 개인적인 경험은 영화의 감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가 드림웍스의 < 장화 신은 고양이 >(크리스 밀러, 2011)처럼 의인화된 고양이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만큼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긴츠 질발로디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고양이를 그렸느냐. 그러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그사이의 가느다란 길을 걷는다. 담벼락 위를 산책하는 진짜 고양이처럼. 질발로디스가 창조한 세계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들은 크게 부서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고양이가 사는 집에는 그곳에 살았던 인간들이 만든 것 같은 고양이 조각상과 스케치가 있다. 마치 마리 셀레스트호의 사라진 선원들처럼 인간들은 그냥 이유도 없이 갑자기 존재하기를 멈춘 것 같다. 등장하는 동물들도 이상하다. 고양이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같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캐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같은 공간에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우리가 사는 지구와 비슷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의 물리적 실제성을 계속 의심하게 된다. 이곳은 실재하는 공간보다는 애묘가의 몽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곳은 인터넷 사람들이 고양이별이라고 부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감독의 개인 경험을 의심하게 되는데, 정작 감독은 개를 기른다. 하지만 고양이와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이 영화의 정서적 흐름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사진: " 플로우 ", 네이버 영화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엔 대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집에 살던 고양이가 갑자기 홍수와 마주친다. 고양이는 물을 피해 달아나고 그러다가 빈 보트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다른 동물들이 한 마리씩 보트 위에 오른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타고난 습성도 다르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같이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동물들이 나오는 고전적인 틀의 동화이다. 영화는 동물을 의인화한 수많은 동화에서 논리와 구조를 가져오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지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키를 잡고 보트를 조종하고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먹이사슬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잡아먹히는 동물들은 물고기밖에 없고 그들에겐 포유류나 조류의 생기가 제거되어 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영화의 묘사는 거기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여전히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수상쩍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캐피바라나 뱀잡이수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럴싸하다. 동작이나 행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그렇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양이 표정을 살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나 싶다. 스크린 위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묘사와 결합되면 관객들은 아주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Peullou( 좌 , 우 )", IMDb 홍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를 다룬 성서 이야기,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 하지만 이 두 주제는 이 영화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구약의 홍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처벌이다. 하지만 홍수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인간은 사라지고 없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로 보더라도 아귀가 맞지 않는데, 이 세계는 온난화를 촉진했을 기계 문명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 목가적 폐허와 환경 문제를 연결해 해석을 시도하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서 그냥 일상일까? 이 홍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는 암시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 속 동물들은 주기적인 홍수를 경험하며 살아온 것 같지도 않다. 이 영화의 월드 빌딩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느 단계에서 이상해진다. 결국 모든 게 애묘가의 꿈이라는 게 가장 그럴싸한 답이다. 영화를 연달아 보다 보면 이 세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에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둘째로, 이 영화를 이루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동정, 이해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친절함과 연대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기 위해 굳이 세계의 숨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명령 없이 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사진: " Peullou ", IMDb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1. 이 영화는 단 한 명의 인물만 등장하는 영화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해역에 위치한 세이블 섬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환경보호 활동가 조이 루커스가 그 주인공이다.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이 작은 모래섬의 흑백 사진을 보고 매료된 루커스는 1974년 세이블 섬의 바다표범을 연구하는 팀에 자원해 현장 보조원 겸 요리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유실되어가는 사구를 복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섬과 육지를 오가다, 1982년부터는 아예 거처를 옮겨 대부분의 시간을 섬에서 보내게 된다. 루커스는 섬의 생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동료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혼자 남아 세이블 섬의 거주자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루커스의 일상은 여러가지 반복적인 일들로 채워져 있다. 파도에 쓸려온 해양쓰레기를 수집해 분류하고, 동물의 똥에 든 이물질의 성분을 분석하고, 죽은 말의 발굽이나 곤충의 표본을 채집해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섬에는 500여 마리의 야생마가 서식하고 있는데, 루커스는 야생마들을 구분하려고 공책에다 말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 그려 넣고 보니 얼굴이 모두 달랐다. 이름 없는 야생마들이지만, 이들은 루커스의 공책 속에서 하나하나 고유한 개체로 호명된다. 공들여 관찰하고 기록한 덕분에, 섬의 말이 없어지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느 구역으로 이동했는지, 왜 이동했는지도. 성큼성큼 거닐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루커스의 행동은 마치 손바닥 속을 헤아리듯 섬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연, 무모한 도전들로 이루어진 낮, 낮이 물러간 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외로운 밤, 고립을 자처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을 삶의 또 다른 부분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회고 또한 생략한다. 조이 루커스는 그저 과거의 어느 날 섬에 당도했고, 섬에 적응하며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첫 문단에 쓴 내용들도 대부분 나중에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사실 카메라가 호기심을 가지고 비추는 것은 인물의 생애나 환경보전의 당위적 서사보다는 섬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순간들, 루커스의 손이 빚어내는 일상의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햇살 좋은 날 창문에 걸어 놓은, 쓰레기 조각들로 만든 예쁜 모빌 같은 것. 2.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쓰레기에 관한 영화다. 세이블 섬의 해안으로는 매일 수많은 쓰레기가 파도에 실려온다. 루커스는 해변에 나가 수거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려 종류별, 소재별, 브랜드별, 색깔별로 분류한다. 루커스가 수행하는 연구는 북대서양에 떠 있는 이 외딴 섬의 느리고 미세한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해안가로 밀려오는 자본주의적 삶의 파편들을 관찰하고 집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무풍선에 인쇄된 이름과 문구, 깡통과 플라스틱 뚜껑 따위에 달린 라벨, 각종 파티 및 행사의 흔적과 평범한 가정의 소비 품목들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색깔과 소재가 유행하고 있고, 어떤 단어가 지갑을 열게 만들며, 무엇이 사람들을 즐겁게 또는 슬프게 만드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해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김지혜 환경과학연구자의 논문 「해양쓰레기와 함께 세계 짓기」를 읽으면서 다시금 < 고독의 지리학 >이 내게 남긴 파문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최근의 해양쓰레기 연구는 해양쓰레기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없애야 할 문제적 사물 혹은 단순한 골칫거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삶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인류세 이후의 이 ‘얽혀 있는 삶’ 속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들과 작든 크든 혼종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기에 해양쓰레기가 특정 지역의 문제일 수 없듯이, 세이블이라는 작은 영토 위에서도 생명체들은 잎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식물 모두가 플라스틱 쓰레기, 유출된 석유, 침식작용과 같은 지형의 변화와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이 루커스도 이제 그 일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섬에 흘러 들어왔다가 섬과 함께 나이가 들어 어느새 할머니가 된 그의 머리칼은 바람에 나부끼는 섬의 억새와 똑같은 은빛이다. 어떤 장면들은 아무 대사도 없이 그저 이 은빛의 일렁임과 반짝임만을 담고 있다. 바람과 태양은 섬 안의 모든 것에 공평한 손길을 준다. 화면이 한 컷 한 컷 넘어갈 때마다 섬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 보인다. 죽은 말의 몸 위로 바람이 분다. 루커스가 그 사체를 해변에 묻어준다. 그러면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그 풀을 또 다른 말이 뜯어먹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리게 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딱정벌레가 걸어가는 소리.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 평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사실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그 소리들이 ‘영화음악’의 지위를 부여받고 무대에 오른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를 작곡한 것은 달팽이라는, 그 귀엽고도 엄연한 사실. 카메라는 섬 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소중하게 담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 한 사람만 등장한다는 말은 고쳐 쓸 필요가 있다. 해초, 달팽이, 회색 바다표범, 수달, 박쥐, 야생마, 야생마의 똥, 잔디, 언덕, 해안의 모래알, 어둠이 내리면 검은 모래 장판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 그리고 삶과 죽음, 모든 것의 순환을 품고 있는, 언젠가는 그 자신도 흔적으로 돌아갈 모래섬. 이들 모두가 이 섬의 주인이고,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3.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오물을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라 불렀다고 한다. 쓰레기란 그 형태와 성질이 그대로이더라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함께여야 할 존재들과 함께 있지 않는 순간부터 쓰레기로 규정되는, 이질적인 상태의 사물인 것이다. 그런데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이 루커스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다. 멀쩡한 대학 시간 강사 일까지 그만두고 혈혈단신 섬으로 들어가 평생을 모래 위의 동식물들과 함께 보낸다는 게 평범한 삶의 경로는 아닐 테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지난해 본 영화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에 관한 영화가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사로잡힌 사람. 무언가에 천착하다 못해 그 대상에 자신의 삶이 거의 겹쳐지다시피 한 사람. 이를테면 얼어붙은 설산으로 돌진하다 실종된 사람(알피니스트: 마크-앙드레 르클렉), 또는 폭발하는 용암을 쫓아다니다 화산재에 뒤덮여 죽은 사람(불 속의 연인: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빙벽, 설산, 파도, 용암, 번개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매혹은 사실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나 대단히 위용 넘치는 경관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세이블 섬에서도 나는 비슷한 종류의 이끌림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죽음이라고 하는, 언어로 내뱉고 나면 너무나 간단해지고 마는, 우리 삶에 내재한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침식작용 같은 것을, 짐작건대 루커스는 섬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홀리듯이, 혹은 저항하듯이, 그 세계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영화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비 또한 인상적이다. 해안 가까이에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순환 속에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인공물질과 분해 불가능한 플라스틱들이 있다면, 섬 안쪽에는 시간의 비질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소멸해가는 사물이 있다. 루커스가 정착 초기에 나무를 잘라 짓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옛집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낡고 거의 무너져내려 지금은 뼈대만 남은 쇠락한 풍경이 되었다. 폐허를 훑는 카메라의 시선에 몇 줄기의 바람이 걸린다. 텅 빈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람은 말없는 증언자, ‘문명’이라는 세계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이따금 상기시켜주는 존재 같다. 세이블 섬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영화란 그런 것 아닐까? 언젠가는 소멸할 무언가를 붙잡아 기록하겠다는 환상. 그 진심. 4. 그래서 다시 쓰자면,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고독의 지리학>을 한평생 환경 보존에 헌신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으면 영화는 아주 건전한 두 시간짜리 자연(혹은 인물) 다큐멘터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매혹당한 두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편이 더 좋다. 그러면 이 고요한 산책과도 같은 시간 속에 소리없이 들끓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보인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는 루커스의 앞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최대한 조용히 뒤를 따를 뿐 앞지르거나 섣불리 말을 걸어 돌려세우지 않는다. 그러다 딱 한 번 정면으로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이 있다. 루커스가 아직 20대였던 시절, 누군가의 캠코더로 촬영된 과거의 한 순간이다. 모래가 유실되어가는 섬을 지켜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발언을 하던 젊은 루커스는 인터뷰어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잠시 카메라를 응시하다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섬을 사랑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장면이 있다. <고독의 지리학>이 전주영화제에서 국내 첫 상영되었을 때, 영화가 시작하기 전 젊은 여성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재클린 밀스 감독이 보내온 인사 영상이었다.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는 정말 애정으로 만든 작업입니다.” 두 개의 하릴없는 고백을 지구 반대편에서 수십 명이 컴컴한 동굴에 모여 앉아 지켜보고 있는 광경. 그건 확실히 조금 이상한 감동이었다. 재클린 밀스 감독은 네 살 때 뉴스를 보고 루커스와 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들을 담은 영화를 일평생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마다 매혹 그 자체만이 아니라, 매혹당한 사람에게 매혹당한, 기록자의 생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부지런히 쫓고 수집하고 잘라서 정성스레 이어붙이는 작업에 대해서. 직접 돌진하는 대신에, 몇 겹의 렌즈와 필터와 녹음기를 경유해 이 불가해한 세상을 대면하고 이해하려 하는 삶의 한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앞에 선 한 무리의 ‘우리’에 대해서. 여기에 이르면 <고독의 지리학>이라는 난해한 제목도 모종의 설득력을 얻는다. 고독은 외따로 떨어진 홀로의 감각이고 전혀 지리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감각과 조우한 영화는 필연적으로 어딘가로 향한다. 섬을 구석구석 훑고, 섬을 한 바퀴 돌고, 이윽고 섬을 떠나,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영화의 바깥으로 기나긴 별자리를 만든다. 그 허구의 지표 위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사람은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의 점들은 이상하게도 전혀 고독하지가 않은 것이다.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하얀 눈밭 위에 놓인 빨간 자동차일 것이다. 이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치유하는 서사의 정점이다. 끌어안은 두 사람의 형상에서는 다소 직접적이고 고전적인 위로와 연대가 묻어난다. 감독은 전작 <아사코>, <우연과 상상>에서도 두 인물의 만남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아사코는 우연히 전 남자친구와 동일한 얼굴의 남자를 만났다. <우연과 상상>3부의 나츠코는 우연히 첫사랑과 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기 <드라이브 마이카>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배정된 드라이버는 꼭 가후쿠처럼 가족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여기서도 가후쿠가 우연의 힘을 빌려 위로받고 나아가도록 만들까? 앞서 언급한 설산의 이미지를 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카>에는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의 서사에서 연기자는 주인공이 아니라 상대편에 부여된 몫이었다. 주인공은 첫만남에 상대를 오인하는 쪽인 관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인공 가후쿠가 아예 연극배우로 설정되었으며 그의 연극은 극중극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아사코>와 <우연과 상상>을 떠올리면 주인공을 미사키로 설정하는 서사도 있음직하다. 그녀가 연극배우인 가후쿠와 그의 연극을 차례로 만나 상실을 극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왜 이번에는 관객, 즉 연기를 듣는 위치(청자)의 시선이 아니라 연기자, 즉 연기를 발화하는 위치(화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여줄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그렇게 되면 난 이 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없어.” 부인 오토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이어지는 씬은 가후쿠의 클로즈업한 눈물도, 오토가 떠난 빈 집도 아니다. 그것은 연극<바냐 아저씨>의 실연 장면이다. 여기서 가후쿠는 공연 도중 연기를 중단한다. 무대에서 뛰쳐 나온 가후쿠의 등 뒤로 “나도 말할거야. 내 아내는 달아났다고.”라는 대사가 지나간다. 영화를 위해 발췌된 <바냐아저씨> 대사들은 매번 가후쿠의 상황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를 보고 대사가 곧 그의 속마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1차원적이다. 그보다는 연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선언하는 이 장면이 영화 2부의 시작임에 집중해보자. 시간이 흘러 2부의 마지막은 이전처럼 연기가 가능해진 상태의 가후쿠를 보여주며 닫힌다. 사실 그는 배우들의 뒷모습만 보고도 ‘무언가 일어났음’을 캐치하는 능숙한 연기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2부는 그가 대사를 발화할 수 없는 순간에서 시작해 대사를 발화할 수 있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영화는 연기불가능 상태에서 출발해 가능 상태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따라가게 만든다. 발화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를 하다’이다. 부인 오토가 죽던 날, 가후쿠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끌면서 대화를 미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실은 가후쿠를 이 상황 속에 가둔다. 오토는 첫 등장부터 흐릿한 형체와 또렷한 목소리를 보여주었고 딱 그 모습대로 자동차 속에서 반복재생된다. 2년 후,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는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의 릴과 겹쳐 보인다. 가후쿠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청자인 오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바냐아저씨’의 자리를 빌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후일 미사키에게 ‘아내는 2년 전 죽었어. 그 테이프를 듣기가 무서워졌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2년 전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행동은 스스로도 무섭다고 생각한 걸까. 그럼에도 오토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한 가후쿠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바냐의 언어’밖에 없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아저씨>에는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다국적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되 연극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2부가 새롭게 시작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가후쿠가 이 ‘다국어 연극’의 연출직을 위해 히로시마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곧 2부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바냐의 언어’에 갇힌 가후쿠의 앞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연기의 바탕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고방식을 밝힌다. 이 말은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의 연출가 가후쿠를 떠올리게 한다. 연기 현장의 하마구치 감독과 가후쿠는 둘 다 ‘날 것의 섬세한 무언가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하며 그 불안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 소냐와 엘레냐 역의 배우들은 연기 도중 가후쿠를 등지고 선다. 가후쿠는 연기를 볼 수 없음에도 확신있게 “방금 무언가가 일어났어”라고 외친다. 여기서 가후쿠가 발견한 ‘무언가’를 탄생시킨 주체는 잎사귀를 주워 내민 이유나의 손이다. 수화언어로 연기하는 이유나의 등장마다 우리는 그녀의 손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빨려 들어간다. 첫 등장인 오디션 장면에서 카메라는 ‘손의 언어’를 복잡한 동선과 숏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보여준다. 다른 배우들의 다국어 오디션이 카메라로 쪼개지고 붙여지는 동안에도 침묵 속 ‘손의 언어’는 굳건하다. 유나와 윤수가 마련한 식사자리 장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메라가 나머지 세 사람 의 등을 비추며 어둠 속에 위치할 때도 그녀의 손은 중앙의 빛나는 공간에 놓여있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만난 새로운 언어는 ‘손’외에도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침묵하되 매번 섬세한 응답을 보내 주는 드라이버 미사키의 언어이다. 미사키는 어디든 가 달라는 가후쿠의 질문에 긴말없이 ‘있다가 없어진 흔적의 공간’으로 차를 몬다. 가후쿠의 과거사를 들은 뒤엔 “소중하게 대해 온 게 느껴져 그의 자동차가 좋다”는 말을 고른다. 그 정점은 가후쿠가 생각할 만한 장소를 물을 때 그녀가 자동차를 툭툭 두드린 몸짓이다. “차 안이 좋겠네요”같은 말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어쩌면 겉으로는 상응하지 않는 듯 보이는 문답이지만 드라이버 미사키가 가진 ‘운전수의 언어’는 결국 가후쿠를 아픔에서 건져낸다. 그를 설산 위의 빨간 자동차까지 데려간다. 다시 하마구치의 말로 돌아와 보자. 섬세한 연기의 탄생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 불안은 ‘바냐의 언어’를 붙잡고 싶은 가후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정해둔 청자를 놓치기 싫은 불안감이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는 곧 자신이 선택한 청자와의 연결통로를 만든다. 이 다국어 연극 속에서는 상대배우의 낯선 언어가 끊임없이 낯선 연결통로를 만들고 있다. 가후쿠는 이 연극의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감정을 제외하고 대본의 글자만 읽게끔 지시한다. 미리 결정하고 외워서 재현하는 감정표현과 그것을 서로의 큐사인으로 사용하는 순간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작 가후쿠 자신은 그것에 실패했다. 그는 오토가 가진 ‘꿈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되돌려 주었을 뿐이다. 꿈이야기의 소녀처럼 징표를 남기고 싶어한 오토의 부유를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가후쿠가 ‘대본의 언어’뒤로 숨고, 오토가 ‘꿈의 언어’뒤로 숨었을 때 둘은 ‘좀 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다. 경계했어야 했다. 야외 리허설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유나가 상대 배우를 등 뒤에서 껴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는 불쑥 상대의 눈 앞으로 수화를 등장시킨다. 통상의 음성언어에서는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서 있을 때 껴안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낯선 손의 언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나뭇잎을 주워 주며, 바냐 아저씨의 가슴과 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 낯선 연결통로의 생성은 ‘무언가’를 만든 힘이고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를 안아주게 한 동력이다. “실제로 섬세한 연기가 탄생하는 것과 가후쿠를 비롯한 상처받은 영혼들이 재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감독의 대담 속 한 구절을 통과하며, <드라이브 마이카>의 차별점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물론 영화는 전작들의 장기인 ‘어긋남과 기다림’의 테마를 가후쿠-오토의 관계 속에 능숙하게 녹여낸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숏은 ‘오토를 외면한 가후쿠가 상처를 직면하고 나아간다’는 하마구치 식 서사구조 역시도 또렷히 전달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기에 연기자 가후쿠의 시선을 덧붙인다. 연기 불가능 상태인 가후쿠에서 시작해 연기 가능상태인 가후쿠에 도착하는 과정. 가후쿠가 연극을 둘러싼 새로운 언어들을 만나 불안을 겪고, 그 불안에서 탄생한 섬세한 위로를 경험하는 과정. 왜 이번에는 맞은편인 연기자의 시선을 경험하게 하면서 이 서사구조를 보여주었을까. <아사코> 속 아사코의 맞은편에는 새 남자친구인 료헤이가 있다. 료헤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아사코가 전 남자친구와 갔던 사진관에 놓인다. <우연과 상상> 속 나츠코의 맞은편에는 미카가 있다. 미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 속 첫사랑의 자리에 놓인다. 이때 주인공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대를 오인하고 맞은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후쿠의 시선을 경유하며 이 시간이 단순한 오인이나 관찰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연기를 ‘요구’하는 중임을 안다. 맞은편의 상대에게 낯선 언어와 낯선 연결통로를 제안하는 중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제안이 상대방의 재생을 촉구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는 그동안 스크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객석에도 해당된다. 우리도 가후쿠처럼 하마구치 영화에서 주인공의 맞은편에서 자리한 채 낯선 언어를 제안받아 재생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는 야외리허설 장면과 동일한 정면샷으로 가후쿠를 안아준다. 하지만 객석을 등을 지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보며 안아준다. 그렇게 연습 당시 두 배우 사이에 일어난 ‘무언가’가 드디어 객석의 미사키에게도, 스크린을 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