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삶
- 감독
- 김미형
- 제작년도
- 2008
10편의 리스트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쉽지 않다. ‘여성’ ‘역사’ ‘일상에서 비켜난 삶’ 등 몇몇 개념이 떠오르지만 전체 리스트를 다 아우르지는 못한다. 다시 한번, 나 자신은 과연 이 영화들의 무엇에 끌렸나 질문한 끝에 이 리스트의 최대 공약수를 “존엄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군분투” 정도로 정리해 본다. 이 리스트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삶의 궁지에 몰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침범당한 삶, 위기에 빠진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 속에서 이들의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고 그들은 오직 자신의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골몰할 뿐이지만 그러한 고군분투 속에서 빛나는 삶에 대한 애착과 위로의 힘은 매우 크다. 타인의 인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으로서 자신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마닐라 빈민가의 뒷골목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게를 운영하면서 마약을 거래하는 로사를 윤리적인 인간이라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마’ 로사 >(브릴얀테 멘도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억척스럽게 뛰어다니는 그녀의 모호한 얼굴에서, 부패한 공권력이 지배하는 거친 뒷골목에서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강렬한 생의 에너지에서 우리는 순간이나마 숭고미마저 느끼게 된다. 라브 디아즈의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는 헤수스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필리핀의 어두운 과거와 비타협적으로 치열하게 싸워온 거장의 신작에서 여성혁명가 헤수스는 총살당한 혁명 영웅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시신을 찾아 산속을 헤맨다. 그녀를 통해 다시 한번 역사의 격변기를 호명하면서 영화는 과거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를 필리핀의 현재로 확장시킨다. 필리핀 민중에게 호소하는 감독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직설적인 울림이 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두 번째 장편 < 아쿠아리우스 >는 아름다운 노년 여성의 눈을 통해 개발과 보존, 기억과 망각이라는 사회정치적 이슈를 서정적이고 파워풀하게 그려낸다. 기억의 의미, 추억과 공간의 관계, 아카이브로서의 공간이라는 테마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멋지게 풀어낸 이 영화의 중심에도 섬세하고 강인한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 < 화염의 바다 >는 근래 유럽 다큐멘터리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난민 문제를 다룬 영화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관문인 람페두사를 배경으로 참혹한 난민 구조 현장과 섬 소년의 일상을 느슨하게 교차시킨 이 영화는, 아름다운 섬의 나른하고 잔잔한 일상이야말로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이 소망했던 삶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어쩌면 “바다에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난민 문제에 대한 모든 해법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 붉은 거북 >은 무인도에 난파되어 평생 외로움과 싸우다 늙어버린 남자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이미지의 힘만으로 고립된 남자의 외로움, 절대고독을 재현한 이 영화는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뒤늦게 덮친 쓰나미처럼 내 마음을 어지럽게 휘저어 놓는다.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때로 침묵이 무엇보다 강렬한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다. 짐 자무쉬의 < 패터슨 >은 단조로운 삶이 반복되는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그린다. 매일 반복되는 그의 일상은 집-버스-집-동네 주점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동선의 반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에도 변화는 있고 그러한 변화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 가장 큰 활력소인 시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진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만난 일본인에게 자신을 “시 쓰는 버스 기사”라고 소개한다. 시인이 아닌 시 쓰는 버스 기사. 평범한 삶의 특별함을 절제된 연출과 여백으로 보여주는 짐 자무쉬의 단단한 연출은 오즈 야스지로를 떠오르게 한다. 올해의 가장 뛰어난 영화라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하게 될 작품은 안제이 바이다의 < 애프터이미지 >이다. 이 영화는 토론토에서 처음 보고 부산에서 다시 한번 보았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감독의 부고를 들었다. 또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 가슴 속에서 쿵 소리가 울린다. 2차대전의 상처와 폴란드의 역사적 경험을 어루만지면서 폴란드의 역동적 변화와 공명해온 감독의 이력답게 <애프터이미지> 역시 스탈린 체제하의 폴란드라는 역사의 어두운 시기로 걸어 들어간다. 폴란드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표 작가인 스트르제민스키의 삶을 통해 스탈린 체제 하에서 예술에 가해진 억압에 대해 고발하는 이 영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스탈린의 예술 테제가 어떻게 예술의 숨통을 끊어놓고 예술을 프로파간다로 전락시켰는지 보여준다.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사물의 이미지가 망막에 남아있는 잔상 효과를 뜻하는 ‘애프터이미지 afterimage’는 스트르제민스키에게서 시각적 의식이 작용하는 특정한 메카니즘이자 역사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오프닝 신은 영화의 방향을 예시하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스트르제민스키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 새빨갛게 물든다. 거대한 붉은 천에 그려진 스탈린 초상화가 건물에 걸리면서 그의 작업실 전체를 가려버린 것이다. 붉게 물든 작업실은 스탈린의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폴란드 예술가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예술은 이념이 아닌 형태(form)라고 굳게 믿는 그에게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강요는 예술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의 강요 앞에 자신의 예술관을 꺾지 않던 그는 직장을 잃고 예술가조합에서 추방되며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동료 예술가인 아내 코브로와 헤어져 평생 만나지 않았던 이유도 예술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예술은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였던 것이다. 배고픔에 굶주려 빈 접시를 하염없이 핥아대면서도 체제 이데올로기의 겁박에 순응하지 않았던 이 고집 센 예술가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의 죽음 소식을 들은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 파란 물을 들인 꽃을 바친다. 아내가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졌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붉게 물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횡행하던 체제에 저항하듯이 푸른 꽃을 예술가 아내의 무덤에 바치던 예술가 역시 쓸쓸하게 죽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예술 형식을 중시한 폴란드의 대표 전위예술가이자 자신의 우상이었던 스트르제민스키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이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술의 비개성화를 주장하면서 대중의 미적 기준을 향상시키려 했던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 작업을 고려할 때 감독이 채택한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은 조금은 의외다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가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보다는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안제이 바이다 역시 역사가 되었다.
1968 년 만들어져 검열 문제로 상영되지 못했다가 2005년 관객들에게 소개된 < 휴일 >은 일순간에 당대의 시네필을 사로잡았다. 주변으로 밀려난 청춘의 모습과 모던한 영화의 짜임새가 시간을 가로 질러 다가 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도시의 자연에 놓인 나무, 풀, 소품, 조형들은 인물과 불화한다. 휴일의 위안은 오지 않는다. 영화는 시네필적 현현의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시각적, 감정적 동요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흙바람 날리는 공원에 서있는 무기력한 연인 그리고 그 프레임을 침범하는 나뭇가지들은 치유불가능한 듯 보이는 삶의 비극들을 슬그머니 주입한다. 영화 오프닝 ,기울어진 앵글, 사각으로 포착된 명동성당과 소나무가 실루엣으로 보인다. 이어 남자의 발걸음이 클로즈업된다. 보이스 오버가 들린다. ‘그 여자의 이름은 지연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일요일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몇 개의 깃발이 펄럭대는 장충 체육관 외부에서 남자 허욱 ( 신성일 )이 안에서 들리는 관중들의 함성을 지나쳐간다. 이러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디자인은 전체 영화의 톤을 응축 적으로 전달한다. < 휴일 >은 일요일 오전 10시 17분, 허욱이 택시를 공짜로 얻어 타는 것에서 시작해 , 전차 운행이 끝나는 시간 , 원효로 종점 무렵에서 끝난다. 이 하루가 못되는 시간, 우리는 허욱이 지연( 전지연 )과 남산에서 만나고, 그녀의 중절 수술비를 위해 친구의 돈을 훔치는 등의 사건들을 보게된다. 이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 보다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어떠한 무드다. 무드는 관찰 가능한 심리적 상태이자 감정의 조합이다. 예의 사각 앵글과 프레임 중앙을 벗어난 인물의 배치 , 그 프레임을 틈입한 공원의 빈 나뭇가지들, 시멘트 빌딩, 애조 띈 음악의 반복은 이 무드를 오케스트레이션 하는 스타일로 다가온다. 가난에 몰린 하릴없는 청춘. 노동도 휴식도 가능하지 않은 휴일의 죽은 시간과 공간을 배회하는 아름다운 젊은 남녀가 처한 위기, 청춘의 빛나는 삶의 약동은 여기엔 없다. 우울이 지배한다. 1968년 이러한 우울은 반사회적이고 무기력한 것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저항의 함의를 가질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동원체제, 군대식개발동원체제 하에서 노동과 생산, 동원에 부적합한 이러한 정조는 오히려 반국가적 범주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욱이 머리를 깎고 군대에 가는 것으로 영화의 결말을 처리하면 통과시켜 주겠다고 한 검열당국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정조를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72년의 10월 유신을 몇 년 앞둔 3기 (1968-1972) 에 만들어져 이런 검열의 요구에 응하는 대신 상영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 휴일 >의 경우 이 우울 무드는 당시 수출 드라이브 사회, 1969년 신년사인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라는 사회적 조증을 거스르는 것이다. 수출 드라이브라는 경제적, 정치적 명령이 사회를 지배할 때 지식인 층에 속하는 개인과 집단의 심리적 드라이브는 죽음을 향한 드라이브 ( the death drive, todestrieb) 로 기울어져 가며 특히 청춘이 그러한 경사로의 하향선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는 < 다이알 112를 돌려라 > ,< 만추 >등은 당시 <영화세계>나 <주간한국>,<조선일보>등의 평을 보면 , 평단의 호감이 이만희 가 자아내는 무드에 집중하고 있다. <만추>에 대해 조선일보는 “ 66년도 수작. 짜릿한 시정과 함께 가슴 메는 인간의 고독, 뛰어난 영상과 ‘무드’의 66년도 수작”이라고 평했다. <휴일>은 개봉되지 않아 평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이만희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이 무드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폭압이 전제하던 시절, 일요일이라는 노동, 생산, 동원의 시간체로부터 상대적으로 벗어난 단위의 시간, 휴일을 선택해 이만희의 무드와 스타일은 죽음의 드라이브를 수출의 드라이브와 오버랩 시킨다. 그 무심한 듯 보이는 포개짐에서 드러나는 것은 수출 드라이브 사회의 죽음에 이르는 비활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