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뛰빵빵 구조대
- 감독
- 방형우, 송인욱
- 제작년도
- 2010
1929년 6월 12일. 휘슬스톱 카페가 지난주에 개업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우체국 바로 옆 건물이지요. 카페 주인인 잇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미슨의 말로는 장사가 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잇지가 말하길, 자신은 요리를 하지 않으니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혹여 음식에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네요. 엄마가 몰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발견한 내가 왜 또 우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당황한 척하거나,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다. 엄마가 그럴 때마다 나도 매번 무안하고 울적해서 똑같이 고개를 돌리거나,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색적이고 수줍은 성품이라 늘 조용한 아버지나 동생과는 달리, 집안의 소음 데시벨을 담당하는 커플인 우리가, 서로에게 토라진 연인처럼 등 돌리기 시작하면 집안은 한겨울의 절간처럼 고요하고 추워졌다. 그러다 짜증이 날 때는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빌려와 주말이면 밤이 새도록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엄마가 내 뒤로 와서 자리를 잡아 앉았고, 영화가 재밌어질 무렵이면 쥐포를 구워 올 테니 일시정지를 해놓고 기다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딱딱한 어깨를 붙잡았다. 배꼽 잡게 웃기는 장면이 나올 때 엄마는 끅끅, 웃으며 내 등과 팔을 치거나 꼬집어댔고, 기분이 한없이 좋아지는 영화를 막 보고 났을 땐 묻지도 않았던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 놓곤 했다. “스무 살 무렵에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 당시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면서 짤막한 멘트를 곁들이는 디제이가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내 목소리가 꽤 좋잖아. 아무튼 한일극장에서 왔다고 하면, 대구 시내의 어떤 극장에라도 공짜로 들어가서 영화를 볼 수 있었거든. 그래서 그 무렵에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다 봤던 것 같아. 참, 내가 **대학교 연극영화과 시험 쳤다가 떨어진 거 얘기했었나?” 그러면서 한겨울의 절간 같았던 집 안에 숨어있던 온기가 차츰 돌기 시작하고, 조용한 거실을 벼락 치듯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온 가족이 비명을 지를 만큼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화해하고 토라지고를 수없이 반복하며 서로의 등과 팔을 후려치고 비틀고 꼬집으면서 함께 본 영화들이야말로, 피부처럼 붙어있는 내 취향의 통렬한 이정표이다. 그중에 하나가 지금 소개하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로, 비디오를 통해 먼저 보았던 이 영화는 연이어 원작소설을 구해 읽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 되었다. 원작소설의 정확한 번역제는 「휘슬 스톱 카페의 푸른 토마토 튀김 Fried Green Tomatoes at the Whistle Stop Cafe」으로, 동명 영화의 흑백 포스터가 박혀있는 초록색 커버의 그 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느라, 나중엔 두 권으로 쪼개졌던 기억이 난다. 빵빵 터지는 유머와 꼼짝없이 움츠려드는 스릴, 눈을 꾹 감게 만드는 비탄과 뻥 뚫리는 환호가 마구 뒤섞여 있는... (당시 그래봤자 중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끝내주는 재미의 책이었다. 루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꿀벌의 연인이야. 잇지 스레드굿, 그게 너란 사람이야.” 잇지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눈에 비친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이 여름 사랑에 빠진 그 누구만큼이나 행복했다. 1930년대 앨라배마의 작은 시골 마을과 80년대 중후반의 버밍햄이라는 도시의 시간들을 평행으로 놓고, 과거와 현재를 서로 교차해가며 다양한 개성을 가진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오밀조밀 풀어놓는 (디킨스 풍의) 대하소설이지만, 마을 우체국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의 내용 (시멘트에 찍힌 개 발자국 없애는 법을 아시는 분은 우체국에 들러 알려달라는 따위의 기사)를 매 챕터마다 끼워놓는다거나, 주변인물처럼 보이던 캐릭터를 한 챕터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방식의 포스트 모던한 구성을 보여주면서, 은근히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구조가 난삽하거나 시끄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서 닻을 내리고 있는, ‘잇지’와 ‘루스’라는 두 여성 캐릭터의 멜로드라마에 있을 것이다. ‘휘슬 스톱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인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루스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함께 키우는, 독립적인 자아와 경제력을 갖춘 젊고 용감한 여성들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당시 미국 남부의 시골이지만, 흑인들과 부랑자들에게 음식과 거처, 때로는 직업을 내어주며 썰렁한 유머까지 덤으로 선물하는, (언뜻 들으면 이상적으로 탈색된 캐릭터 같겠지만) 거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면서, 그 거침없는 활약상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쿵쾅대고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 그중에서도, ‘잇지 스레드굿’이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가 그를 가리켜 ‘허클베리 핀’이 결혼하고 싶을 사람이라며 추천사를 썼다던데... 글쎄? ‘잇지’가 허클베리 핀과 그딴 걸 하고 싶을지.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9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잇지’를 연기했는데, 나는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그가 적어도 노미네이션은 됐어야 했다고 생각할 만큼 그의 ‘잇지’가 좋았다. 들짐승처럼 거침없는 소년의 매력도 충분하면서, 결코 숨기거나 가장하지 않는 감정들을 정확한 타이밍에 툭툭 터드리는 사랑꾼의 섬세한 얼굴도 훌륭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꿀벌의 연인’ 장면을 들여다보자. 원작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갑자기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성난 벌 떼들이 구멍에서 떼 지어 나오면서 하늘이 새카매졌다. 순식간에 잇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천 마리 벌들로 뒤덮였다. 잇지는 1분 정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손을 빼내고는 다시 루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면서. 루스가 있는 곳까지 왔을 즈음, 벌들은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고 그 새카맣던 물체는 다시 잇지가 되어 서 있었다. 자연산 벌꿀이 담긴 병을 들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으면서. 잇지는 병을 루스에게 주며 말했다. “이거 받아, 너에게 주고 싶어.” 이어서 이 장면이 어떻게 영화로 옮겨졌는지를 살펴볼까. (55초경부터 시작된다) IMDb 트리비아에서 읽었는데, 이 장면을 연기하기로 되어있던 스턴트우먼이 촬영 직전에 (무슨 일 때문인지) 그만둬버리면서,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직접 그 연기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그가 보여주는 생생하게 조심스러운 얼굴과 몸짓은 그야말로 진짜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루스’로 나오는 ‘메리 루이스 파커’의 얼굴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 ‘얼어붙은 경탄’ 또한, 어디서 후보지명 정도는 받아야 하는 연기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고, 다양하게 재미난 캐릭터들 중에서 영화에서 유독 더 강렬한 빛을 발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메리 루이스 파커’가 연기한 ‘루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한 성품의 주인공, 가정폭력의 안타까운 희생자에, 이른 나이에 병들어 죽는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로인... 의 면모를 모두 다 가진 배우처럼 보이지만, 그 자신은 거기에 별로 관심 없어 하는 모습이 ‘루스’라는 캐릭터에 흥미로운 긴장과 위트를 불어 넣어주었다. 나중에, 그가 < 위즈 Weeds >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생계를 위해 마약을 유통하는 위험천만한 가정주부로 나오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멜로드라마의 비극적인 주인공’의 외모를 은근히 즐기면서, 동시에 킬킬대며 비웃는 그 무심함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에 흐뭇하게 되더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이 두 젊은 여성의 이야기인 만큼이나, 80년대 중후반의 양로원에 거주하는 노인 ‘니니’와, 그로부터 ‘잇지’와 ‘루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이블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블린’은 자신의 삶이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이나 다름없다고 느끼며, 우물 밑바닥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사는 중년 부인이다. 영화 버전에선 캐시 베이츠가 영화사에 기록을 남길 만큼, 더 이상 적역일 수 없는 연기로 그를 체현해 보였고, 제시카 탠디가 이야기의 전달자, ‘니니’로 등장했다. 원작소설의 ‘니니’는 ‘잇지’의 시누이로, 존재감이 그닥 크지 않는 캐릭터지만, 각색된 영화에선 그가 어쩌면 나이 든 ‘잇지’일 수도 있다는, (원작을 읽은 독자들에겐 ‘Huh...?’ 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미스터리를 남기며 끝나는데, 일견 이해가 가는 선택이라고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영화가 작아지고, 텔레비전 영화처럼 소박하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분명한 커플이고 사랑하는 연인들인, 잇지와 루스의 관계를 강렬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로 축소시킨 것이나, 양로원의 그 노인이 결국엔 ‘잇지’일 것이라는 결말이 대중적으로 효과적인 각색이었다는 사실에 반쯤만 동의하고, 나머지 절반이 주는 아쉬움 탓인지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한 번씩 각색을 해보고 싶어진다.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캐시 베이츠 (이블린), 제시카 탠디 (니니) 그래서 내가 가끔씩 굴려보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각색 버전은 (아직까진 설정만 있지만), 1950년대 전쟁 직후의 한국, 피난민들과 상이군인 가족들이 두 집 건너 한 곳에 살고 있는 대구를 배경으로 한다. 1954년의 대구 장관동을 배경으로 하는 「마당 깊은 집」을 최근에 읽어보았거나, 좋아하는 독자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으로 주요 공간을 이동하겠지만, 전후의 대구를 굳이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한국 전쟁 직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는 뻔한 맥락과 더불어, 「마당 깊은 집」의 길남이처럼 나 또한 그곳에서 우습고도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좀 더 익숙하게 수다를 떨 수 있을 거라는 편안함에서이다. 주요 공간은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식당이다. 원래는 대구 남구의 곱창/막창 골목으로 유명한, ‘안지랑/안지랭이’이라는 고개 이름을 빌려와서 <안지랭이 식당>으로 할까 했는데, 밋밋하고 별 특징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안지랭이’라는 이름이 ‘왕지렁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충동적으로 적용시켜 보았다. 이제 그렇다면 이 식당에도 ‘푸른 토마토 튀김’ 처럼 시그니쳐 메뉴가 있어야겠지. ‘왕지렁이 식당’의 대표 메뉴 역할을 하면서, 소울푸드 느낌이 물씬 나는 옛스런 단품 음식들을 찾아본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두메부추꽃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들깨순 통밀전무침’... 이거다 싶을 만큼 마땅한 메뉴가 생각나진 않지만, 이 부분은 언젠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 쉽사리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넘어간다. 아무튼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식당은 두 명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희야’라는 이름의 여자와 ‘옥이’라고 불리는 여자, 서너 살 이상의 나이 차가 있는 사이지만, 존대한다거나,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불리진 않는다. 다정한 반말이 격의 없이 오가는 사이의 이들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자 세상 그 자체라서 정확하고 분명한 연인이다. 그들에겐 어린 딸이 있는데, ‘옥이’가 ‘희야’의 도움으로 남편으로부터 도망 나오면서 업고 나온 자신의 아이다. 그 남편은 서울에서 군수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집을 나간 자신의 아내와 딸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며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미친놈처럼 중얼댈 것이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에는 두 여자뿐 아니라, ‘휘슬 스톱 카페’의 식구들처럼 다양한 크루들과 이웃들이 있는데, ‘길남이’라는 이름의 신문 배달 소년과 관계가 있는 사람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마당 깊은 집」의 에피소드와 연결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책의 팬이라면, 교묘하게 숨은 재미를 이 영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야말로 그 책의 대사들을 직접 소리 내 따라 해 볼 정도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곳에는 육체노동과 허드레 장사 일에 나서서 호구를 연명하는 이웃들과, 양키시장이라고 불리는 역전거리 시장에서 북한말과 중국말을 쓰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간다. 다양하고 재미난 개성의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희야’와 ‘옥이’가 있을 것이다. 코미디와 스릴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영화 중반에 일어난 ‘옥이 남편’의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 또 그것이 어떻게 감쪽같이 해결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클라이맥스를 맞을 것이다. 사건조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경찰이 별다른 소득 없이, 가마솥 국밥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맛있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뜨면, “비밀은 육수에 있지요.” 라고 중얼대며 비밀스런 시선을 교환하는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주인과 크루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2017년 서울의 어느 요양원, 치매가 의심되는 노인에 의해 (이런 이야기가 몹시 필요한) 누군가에게 말해지는 구성으로 소개되는 거다. 물론, 그 노인의 정체는... 생각해볼 문제겠지.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두 시간짜리 영화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넷플릭스에서 투자받아 16부작 드라마로 만들 수 있고 싶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6.25 전쟁 직후에 피란민들로 가득한 대구를 배경으로 만든다는 얘기만큼 어이없으면서 호기심 돋는 기획이 또 어디 있을까? 그것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같은 정신 나간 제목의 드라마로 말이다. 엄마와 함께 극장에서 본 영화 중엔 < 에일리언 2 >가 있었다. 미취학 아동이거나, 그와 비슷한 정신상태의 어린이였을 때도 함께 극장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있어 조각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경험은 그 영화가 최초였던 것 같다. 물론, 조각이라 하면, 징그러운 괴물이 인간의 배를 뚫고 나오는 그 장면 말이지. 그날 거기서 받은 시청각적 쇼크는 내 무의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나중에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제정신으로 다시 보면서 영화 전체를 새로운 감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내 작은 손을 붙잡고, ‘성인 1장이요’, 하고 극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던 것일까. 물론... 재밌고 싶어서겠지.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불만이 없다. 그래서 떠올려 본다. 거대한 기계 갑옷을 걸친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에게 경고하던 그 목소리를. “그 얘한테 당장 떨어져, 이 빗취! Get away from her, you, Bitch!” 엄마는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치고, 가만한 내 등과 팔을 후려치고 꼬집는다. 나는 몸을 비틀며 울상을 짓지만, 그래도 좋다. 엄마가 웃는 것.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1929년 6월 12일. 휘슬스톱 카페가 지난주에 개업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우체국 바로 옆 건물이지요. 카페 주인인 잇지 스레드굿과 루스 제미슨의 말로는 장사가 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잇지가 말하길, 자신은 요리를 하지 않으니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혹여 음식에 독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네요. 엄마가 몰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발견한 내가 왜 또 우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당황한 척하거나,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했다. 엄마가 그럴 때마다 나도 매번 무안하고 울적해서 똑같이 고개를 돌리거나,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색적이고 수줍은 성품이라 늘 조용한 아버지나 동생과는 달리, 집안의 소음 데시벨을 담당하는 커플인 우리가, 서로에게 토라진 연인처럼 등 돌리기 시작하면 집안은 한겨울의 절간처럼 고요하고 추워졌다. 그러다 짜증이 날 때는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빌려와 주말이면 밤이 새도록 영화를 보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엄마가 내 뒤로 와서 자리를 잡아 앉았고, 영화가 재밌어질 무렵이면 쥐포를 구워 올 테니 일시정지를 해놓고 기다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딱딱한 어깨를 붙잡았다. 배꼽 잡게 웃기는 장면이 나올 때 엄마는 끅끅, 웃으며 내 등과 팔을 치거나 꼬집어댔고, 기분이 한없이 좋아지는 영화를 막 보고 났을 땐 묻지도 않았던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은근슬쩍 꺼내 놓곤 했다. “스무 살 무렵에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지. 당시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면서 짤막한 멘트를 곁들이는 디제이가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했단다. 너도 알다시피 내 목소리가 꽤 좋잖아. 아무튼 한일극장에서 왔다고 하면, 대구 시내의 어떤 극장에라도 공짜로 들어가서 영화를 볼 수 있었거든. 그래서 그 무렵에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는 거의 다 봤던 것 같아. 참, 내가 **대학교 연극영화과 시험 쳤다가 떨어진 거 얘기했었나?” 그러면서 한겨울의 절간 같았던 집 안에 숨어있던 온기가 차츰 돌기 시작하고, 조용한 거실을 벼락 치듯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온 가족이 비명을 지를 만큼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화해하고 토라지고를 수없이 반복하며 서로의 등과 팔을 후려치고 비틀고 꼬집으면서 함께 본 영화들이야말로, 피부처럼 붙어있는 내 취향의 통렬한 이정표이다. 그중에 하나가 지금 소개하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로, 비디오를 통해 먼저 보았던 이 영화는 연이어 원작소설을 구해 읽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 되었다. 원작소설의 정확한 번역제는 「휘슬 스톱 카페의 푸른 토마토 튀김 Fried Green Tomatoes at the Whistle Stop Cafe」으로, 동명 영화의 흑백 포스터가 박혀있는 초록색 커버의 그 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느라, 나중엔 두 권으로 쪼개졌던 기억이 난다. 빵빵 터지는 유머와 꼼짝없이 움츠려드는 스릴, 눈을 꾹 감게 만드는 비탄과 뻥 뚫리는 환호가 마구 뒤섞여 있는... (당시 그래봤자 중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끝내주는 재미의 책이었다. 루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꿀벌의 연인이야. 잇지 스레드굿, 그게 너란 사람이야.” 잇지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눈에 비친 맑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이 여름 사랑에 빠진 그 누구만큼이나 행복했다. 1930년대 앨라배마의 작은 시골 마을과 80년대 중후반의 버밍햄이라는 도시의 시간들을 평행으로 놓고, 과거와 현재를 서로 교차해가며 다양한 개성을 가진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오밀조밀 풀어놓는 (디킨스 풍의) 대하소설이지만, 마을 우체국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의 내용 (시멘트에 찍힌 개 발자국 없애는 법을 아시는 분은 우체국에 들러 알려달라는 따위의 기사)를 매 챕터마다 끼워놓는다거나, 주변인물처럼 보이던 캐릭터를 한 챕터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게 하는 방식의 포스트 모던한 구성을 보여주면서, 은근히 풍성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구조가 난삽하거나 시끄러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서 닻을 내리고 있는, ‘잇지’와 ‘루스’라는 두 여성 캐릭터의 멜로드라마에 있을 것이다. ‘휘슬 스톱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인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루스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함께 키우는, 독립적인 자아와 경제력을 갖춘 젊고 용감한 여성들이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당시 미국 남부의 시골이지만, 흑인들과 부랑자들에게 음식과 거처, 때로는 직업을 내어주며 썰렁한 유머까지 덤으로 선물하는, (언뜻 들으면 이상적으로 탈색된 캐릭터 같겠지만) 거의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면서, 그 거침없는 활약상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이 쿵쾅대고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이 그중에서도, ‘잇지 스레드굿’이다. 「앵무새 죽이기」를 쓴 ‘하퍼 리’가 그를 가리켜 ‘허클베리 핀’이 결혼하고 싶을 사람이라며 추천사를 썼다던데... 글쎄? ‘잇지’가 허클베리 핀과 그딴 걸 하고 싶을지.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9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잇지’를 연기했는데, 나는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그가 적어도 노미네이션은 됐어야 했다고 생각할 만큼 그의 ‘잇지’가 좋았다. 들짐승처럼 거침없는 소년의 매력도 충분하면서, 결코 숨기거나 가장하지 않는 감정들을 정확한 타이밍에 툭툭 터드리는 사랑꾼의 섬세한 얼굴도 훌륭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꿀벌의 연인’ 장면을 들여다보자. 원작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갑자기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성난 벌 떼들이 구멍에서 떼 지어 나오면서 하늘이 새카매졌다. 순식간에 잇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천 마리 벌들로 뒤덮였다. 잇지는 1분 정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나무에서 손을 빼내고는 다시 루스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면서. 루스가 있는 곳까지 왔을 즈음, 벌들은 거의 다 날아가고 없었고 그 새카맣던 물체는 다시 잇지가 되어 서 있었다. 자연산 벌꿀이 담긴 병을 들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으면서. 잇지는 병을 루스에게 주며 말했다. “이거 받아, 너에게 주고 싶어.” 이어서 이 장면이 어떻게 영화로 옮겨졌는지를 살펴볼까. (55초경부터 시작된다) IMDb 트리비아에서 읽었는데, 이 장면을 연기하기로 되어있던 스턴트우먼이 촬영 직전에 (무슨 일 때문인지) 그만둬버리면서,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이 직접 그 연기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그가 보여주는 생생하게 조심스러운 얼굴과 몸짓은 그야말로 진짜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루스’로 나오는 ‘메리 루이스 파커’의 얼굴 위로 조용히 떠오르는 ‘얼어붙은 경탄’ 또한, 어디서 후보지명 정도는 받아야 하는 연기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수없이 많고, 다양하게 재미난 캐릭터들 중에서 영화에서 유독 더 강렬한 빛을 발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메리 루이스 파커’가 연기한 ‘루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아름다운 외모와 따뜻한 성품의 주인공, 가정폭력의 안타까운 희생자에, 이른 나이에 병들어 죽는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로인... 의 면모를 모두 다 가진 배우처럼 보이지만, 그 자신은 거기에 별로 관심 없어 하는 모습이 ‘루스’라는 캐릭터에 흥미로운 긴장과 위트를 불어 넣어주었다. 나중에, 그가 <위즈 Weeds>라는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생계를 위해 마약을 유통하는 위험천만한 가정주부로 나오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멜로드라마의 비극적인 주인공’의 외모를 은근히 즐기면서, 동시에 킬킬대며 비웃는 그 무심함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에 흐뭇하게 되더라.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는 이 두 젊은 여성의 이야기인 만큼이나, 80년대 중후반의 양로원에 거주하는 노인 ‘니니’와, 그로부터 ‘잇지’와 ‘루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이블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블린’은 자신의 삶이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이나 다름없다고 느끼며, 우물 밑바닥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사는 중년 부인이다. 영화 버전에선 캐시 베이츠가 영화사에 기록을 남길 만큼, 더 이상 적역일 수 없는 연기로 그를 체현해 보였고, 제시카 탠디가 이야기의 전달자, ‘니니’로 등장했다. 원작소설의 ‘니니’는 ‘잇지’의 시누이로, 존재감이 그닥 크지 않는 캐릭터지만, 각색된 영화에선 그가 어쩌면 나이 든 ‘잇지’일 수도 있다는, (원작을 읽은 독자들에겐 ‘Huh...?’ 하는 반응을 끌어내는) 미스터리를 남기며 끝나는데, 일견 이해가 가는 선택이라고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영화가 작아지고, 텔레비전 영화처럼 소박하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분명한 커플이고 사랑하는 연인들인, 잇지와 루스의 관계를 강렬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로 축소시킨 것이나, 양로원의 그 노인이 결국엔 ‘잇지’일 것이라는 결말이 대중적으로 효과적인 각색이었다는 사실에 반쯤만 동의하고, 나머지 절반이 주는 아쉬움 탓인지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한 번씩 각색을 해보고 싶어진다. 메리 루이스 파커 (루스),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잇지) 캐시 베이츠 (이블린), 제시카 탠디 (니니) 그래서 내가 가끔씩 굴려보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각색 버전은 (아직까진 설정만 있지만), 1950년대 전쟁 직후의 한국, 피난민들과 상이군인 가족들이 두 집 건너 한 곳에 살고 있는 대구를 배경으로 한다. 1954년의 대구 장관동을 배경으로 하는 「마당 깊은 집」을 최근에 읽어보았거나, 좋아하는 독자들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으로 주요 공간을 이동하겠지만, 전후의 대구를 굳이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한국 전쟁 직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본다는 뻔한 맥락과 더불어, 「마당 깊은 집」의 길남이처럼 나 또한 그곳에서 우습고도 고통스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좀 더 익숙하게 수다를 떨 수 있을 거라는 편안함에서이다. 주요 공간은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식당이다. 원래는 대구 남구의 곱창/막창 골목으로 유명한, ‘안지랑/안지랭이’이라는 고개 이름을 빌려와서 <안지랭이 식당>으로 할까 했는데, 밋밋하고 별 특징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안지랭이’라는 이름이 ‘왕지렁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충동적으로 적용시켜 보았다. 이제 그렇다면 이 식당에도 ‘푸른 토마토 튀김’ 처럼 시그니쳐 메뉴가 있어야겠지. ‘왕지렁이 식당’의 대표 메뉴 역할을 하면서, 소울푸드 느낌이 물씬 나는 옛스런 단품 음식들을 찾아본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두메부추꽃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들깨순 통밀전무침’... 이거다 싶을 만큼 마땅한 메뉴가 생각나진 않지만, 이 부분은 언젠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 쉽사리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넘어간다. 아무튼 ‘마루 밑 왕지렁이’라는 식당은 두 명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희야’라는 이름의 여자와 ‘옥이’라고 불리는 여자, 서너 살 이상의 나이 차가 있는 사이지만, 존대한다거나, 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불리진 않는다. 다정한 반말이 격의 없이 오가는 사이의 이들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자 세상 그 자체라서 정확하고 분명한 연인이다. 그들에겐 어린 딸이 있는데, ‘옥이’가 ‘희야’의 도움으로 남편으로부터 도망 나오면서 업고 나온 자신의 아이다. 그 남편은 서울에서 군수물품을 조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집을 나간 자신의 아내와 딸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며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미친놈처럼 중얼댈 것이다.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에는 두 여자뿐 아니라, ‘휘슬 스톱 카페’의 식구들처럼 다양한 크루들과 이웃들이 있는데, ‘길남이’라는 이름의 신문 배달 소년과 관계가 있는 사람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마당 깊은 집」의 에피소드와 연결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 책의 팬이라면, 교묘하게 숨은 재미를 이 영화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야말로 그 책의 대사들을 직접 소리 내 따라 해 볼 정도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곳에는 육체노동과 허드레 장사 일에 나서서 호구를 연명하는 이웃들과, 양키시장이라고 불리는 역전거리 시장에서 북한말과 중국말을 쓰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간다. 다양하고 재미난 개성의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희야’와 ‘옥이’가 있을 것이다. 코미디와 스릴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영화 중반에 일어난 ‘옥이 남편’의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 또 그것이 어떻게 감쪽같이 해결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클라이맥스를 맞을 것이다. 사건조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경찰이 별다른 소득 없이, 가마솥 국밥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맛있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뜨면, “비밀은 육수에 있지요.” 라고 중얼대며 비밀스런 시선을 교환하는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주인과 크루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가 2017년 서울의 어느 요양원, 치매가 의심되는 노인에 의해 (이런 이야기가 몹시 필요한) 누군가에게 말해지는 구성으로 소개되는 거다. 물론, 그 노인의 정체는... 생각해볼 문제겠지.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두 시간짜리 영화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넷플릭스에서 투자받아 16부작 드라마로 만들 수 있고 싶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6.25 전쟁 직후에 피란민들로 가득한 대구를 배경으로 만든다는 얘기만큼 어이없으면서 호기심 돋는 기획이 또 어디 있을까? 그것도, <마루 밑 왕지렁이 식당의 팥고물 호박고지 떡> 같은 정신 나간 제목의 드라마로 말이다. 엄마와 함께 극장에서 본 영화 중엔 <에일리언 2>가 있었다. 미취학 아동이거나, 그와 비슷한 정신상태의 어린이였을 때도 함께 극장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있어 조각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경험은 그 영화가 최초였던 것 같다. 물론, 조각이라 하면, 징그러운 괴물이 인간의 배를 뚫고 나오는 그 장면 말이지. 그날 거기서 받은 시청각적 쇼크는 내 무의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나중에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제정신으로 다시 보면서 영화 전체를 새로운 감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내 작은 손을 붙잡고, ‘성인 1장이요’, 하고 극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던 것일까. 물론... 재밌고 싶어서겠지.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불만이 없다. 그래서 떠올려 본다. 거대한 기계 갑옷을 걸친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에게 경고하던 그 목소리를. “그 얘한테 당장 떨어져, 이 빗취! Get away from her, you, Bitch!” 엄마는 깔깔 웃으며 박수를 치고, 가만한 내 등과 팔을 후려치고 꼬집는다. 나는 몸을 비틀며 울상을 짓지만, 그래도 좋다. 엄마가 웃는 것.
이번 충무로뮤지컬영화제 프리페스티벌(ChungmCHIMFF 2015)의 폐막작은 영화가 아니라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었던 ‘< 만추 >를 읽다’였다. 혹시 보셨는지? 나는 영상자료원에서 했던 공연을 먼저 보았다. <만추>는 네 번이나 리메이크되었지만 이만희 의 원본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우리가 이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녹음대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런 공연뿐이다. < 만추 >를 읽다, 공연 현장 이 칼럼에서 내가 맡은 역할도 필름이 사라진 영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니, ‘< 만추 >를 읽다’의 작업은 내 작업과 여러모로 겹치는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내 식으로 시나리오 리딩 공연의 작품을 선정해보면 어떨까? 몇몇 ‘거장’의 작품들을 놓고 고민한 끝에 김기영 의 64년 작 < 아스팔트 >를 골랐다. < 하녀 >와 같은 걸작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결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낭송에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기영의 그 독특한 대사 톤을 따라 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후반부의 몇몇 액션은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대사의 비중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제목의 의미는 뭐냐고? 도입부의 내레이션을 보라. 여기에 누가 어떻게 살고 있나 그건 아무도 모른다. 검은 거미줄과 같은 아스팔트 길위로 서로 노리고, 서로 겨누고, 아는것은 단 한사람 자기뿐일거다. 김진규 가 연기하는 김 형사가 석원근이라는 강도를 체포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이런 대사들이 속사포처럼 튀어나온다. 노파: 석원근의 어머닙니다. 형사 머리 깐 죄는 얼마나 더 받아야죠? 김형사: 공짭니다. 허나, 그 버릇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읍니까? 노파: 모두가 내 죄지요. 그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짐승보다 다 가난해서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못 먹이고 깨끗한 옷도 못 입혀 애미 구실을 못했어요. 그래, 나쁜짓을 해도 염치가 없는것 같아 채찍을 못들었어요. 김형사: 언젠가 절도로 잡힌 젊은 사람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살려달라기에 놔줬더니, 얼마 못가 살인을 저질렀읍니다. 말하자면, 내가 살인을 한 셈이죠. 그날부터 난 용서없이 죄인을 형무소로 보냅니다. 그리 사실적이라고 할 수 없는 대화지만 압축률과 속도가 엄청나다. 대화가 두 번씩 오갔을 뿐인데 벌써 김 형사가 어떤 인물인지 보인다. 김 형사( 김진규 ) 하여간 그는 20년 경력의 민완 형사이다. 범죄자를 잡은 상으로 받은 ‘양옥집’에서 아내, 애 둘과 함께 사는데 (잠깐, < 하녀 >와 공간과 설정이 은근히 비슷하지 않나?) 미국에서 과학수사를 공부하고 왔다는 인텔리 후배들에게 벌써 치이고 있다. 위의 대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체포되었던 석원근이 병원을 탈출해, 그 엘리트 후배 신 형사와 다시 잡으러 가야 한다. 석원근의 집으로 간 두 형사는 그의 누이동생인 현숙을 만나는데 김기영은 이 캐릭터에게 오좀싸개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신 형사가 현숙에게 수작거는 대사를 들어보라. 신형사: 아가씨, 별명이 오좀싸기라면서요? 현숙: 처녀 쌍통 깨는군요! 신형사: 절도를 저즐렀다면서? 현숙: 향수가 탐이 났어요. 신형사: 아--. 애인 때문에? 현숙: 몸에서 냄새가 나서요. 이동리엔 목욕탕두 없거든요. 신형사: 으-- 오좀 냄새 때문이군! 분명 신 형사는 현숙에게 호감이 있는데 이런 여자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 휴, 오좀냄새 나는구나! 하하하...”라니 참 김기영 스럽게 원초적이라고 할 수밖에. 척 봐도 석원근은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영화가 그의 가족에 집중하는 것은 김기영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젊은 시절에 보았던 암흑가 배경의 30년대 프랑스 멜로드라마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상업적 타협을 할 수밖에 없어 중간엔 <케이프 피어> 비슷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는 범죄자와 형사 가족의 일상 묘사가 기대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신 형사와 현숙은 데이트를 하고 김 형사의 가족 묘사도 상당히 길게 볼 수 있다. 그러는 동안 탈출한 석원근이 현숙의 밀고로 잡히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석원근은 형무소에서 최태원이라는 미치광이를 만났다. 그는 체포 과정 중 일어난 총격전으로 아내를 잃었는데 그는 곧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다. 그가 과연 자기 아내를 죽이고 그 사건의 상금으로 ‘양옥집’을 산 형사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화가 아니랄까 봐, 이 영화에서도 부동산 재산은 엄청 큰 무게를 가진다. 김형사: 양옥집이 원수다. 내가 상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처럼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때 나는 지휘자였고 내가 상금을 타고 내가 계급이 올라간것이 최태원 뿐만 아니라 세상이 내가 그의 처를 죽인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출옥한 최태원의 복수 목표가 그가 아닌 그의 아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셰익스피어스러운 독백이 하나 더 이어진다. 시나리오 리딩 공연이 현실화된다면 이 대사도 한번 듣고 싶다. 김형사: 어쩌면 좋으냐! 어제까지 무서운 것이 없든 형사가 여편네를 죽인다는 바람에 고양이 머리처럼 아물아물하게 생각되고 열병을 앓고난것 처럼 내 팔의 힘을 뺏어갔다. 최태원이는 내 처를 죽이러 온다. 도망 보낼까? 안돼? 내 처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순 없다. 김기영 은 김 형사 역의 김진규 이미지가 지나치게 우유부단해서 미스캐스팅이었다고 불평했던 모양인데, 이런 독백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고도 그렇게 생각한 건 좀 너무했던 거 같다. 이 영화의 김 형사는 더티 해리보다 햄릿에 더 가깝다.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결국 김 형사는 사표를 제출하고 경찰은 그를 미끼로 최태원을 잡기로 결정한다. 사방에 경찰이 깔리고 마침내 최태원은 그에게 협박 전화를 건다. 그와 아내가 ‘양옥집’ 테라스에 앉아 그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면 살인이 일어날 것이다. 정말 총격이 일어나지만 셜록 홈스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던 게 분명한 트릭으로 김 형사의 부인은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부인은 가출하고... 그렇다. 또 독백이다. 김형사: 처는 갔다. 처가 없는 생활, 그건 죽엄의 생활이었고나! 오늘 절실히 느꼈다. 세상에 의지했던 것이 싫거나 좋거나 내 처였다는걸 이제 생각하니 내 처에게 너무 무관심했고 너무 고생시켰어. 내가 여기서 죽으면 나의 처는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 이 뒤에 벌어지는 최태원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렇게 재미있거나 설득력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시나리오 리딩에서 굳이 이 부분에 집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김 형사의 가족 묘사(“난 이제 더 못먹겠어. 배가 부르니 대통령두 부럽지 않어!” 같은 대사를 하는 형사 아들 연기는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나 석원근 가족의 묘사는 건질 게 많을 것이며 여러 의미로 빵빵 터질 대사들도 많다. 그리고 김 형사 역의 배우에겐 앞으로 정복해야 할 수많은 독백들이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대사도 독백이다. “내버려 두자, 울어본 사람이...” 하지만 이것까지 다 읽어줄 필요는 없겠지. 시나리오의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