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 삼대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김희라, 문희, 박노식, 장동휘, 김칠성, 이기홍, 최인숙, 문오장, 강민호, 김웅, 권오상, 박기택, 지용남, 최무웅, 최재호, 김영인, 조춘, 정성원, 김기범, 김주오, 이예성, 안일문, 김애경
구술사로 조명하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 연간 200여 편이 넘게 제작되며 대중문화의 유행을 선도하고 산업적인 전성기를 이끈 1960년대 한국영화는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깊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급속도로 확대‧성장한 매체의 특성으로 짧은 시간 동안 유입된 영화계의 많은 인력을 살펴보는 것은 녹록하지 않은 일이다. 영화산업 성장의 근간이 되는 제작규모와 그에 따른 인력 배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장르별, 제작사별, 시기별로 구분해 흐름을 살피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불안정한 제작 시스템과 상영관 규모 대비 과도한 제작 편수로 인해 분류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규모에 상응하는 방대한 영상사료와 문서사료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수행되어야 할 방법론이 구술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구술사방법론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나 주변부의 인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방면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 구술사 프로젝트에서 다양한 직능별로 이루어진 인력 구술은 이와 같은 여러 방면에 걸친 새로운 방식의 역사쓰기에 일조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배우 김영인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흐름과 변화이다. 2016년 한국영화 주제사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서 장르영화의 배우를 대표하여 이루어진 이 구술은 문서사료에는 기록될 수 없는 세밀한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구술은 특히 1960~1970년대 여러 장르가 번성하는 가운데 제작편수의 큰 부분을 차지한 액션영화를 다채롭게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시기별로 변화하는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장르영화의 성장과 확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특정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1대1 액션과 군중신의 촬영비화, 무술지도의 원칙 등을 큰 틀로 하여 1960~1970년대 액션영화의 특징을 구술한다. 그가 데뷔한 1961년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우연히도 액션영화의 성장과 쇠퇴와 맞물려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1960년대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의 성장 이면에서 인력의 유입과 이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림1) 김영인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에서 특징적인 점 중 하나는 영화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 구술이 상당수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특정 감독이나 배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뒷스태프’는 방대한 사료가 무색할 만큼 제대로 된 기본자료 하나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의 크레디트에 기록되지 않은 경우도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오롯이 구술자의 기억과 필름이 보존된 영화를 중심으로 구술을 완성해가야 한다. 때문에 영화의 기본 제작정보를 기반으로 구술자와 연구자가 내용을 쌓아 구술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네트워크를 그려내야 한다. 배우 김영인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활동 기간이 비교적 긴 반면에 조연으로 오랜 기간 활동한 탓에 매체 노출이 거의 없었고, 구술이나 회고록 등의 작업물도 없어 1차 자료를 수집하기가 어려우며 한국영상자료원의 데이터베이스 자료와 영상물 외에는 참고할 자료가 미비하다. 이럴 경우 최선의 방법은 예비접촉을 통해 질문지를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예비접촉을 바탕으로 구성한 김영인 구술의 큰 항목들은 첫째, 영화계 입문 배경, 둘째, 배우 데뷔 후의 연기활동, 셋째, 무술지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데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력을 회고함으로써 액션배우 김영인의 활동이 완성되었다. (그림2) 액션영화 촬영현장에서 ‘날으는 배우’의 탄생과 액션영화의 생생한 현장이야기 1) ‘스턴트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도 않던 시절, 김영인은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 주인공들의 액션 장면을 대신하며 ‘날으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인이 출연한 장면이 대역이란 것도 모를 정도로 영화제작 시스템에 어두웠던 그는 1966년 김기덕 감독의 조언으로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중 있는 배역이란 언급에 큰 맘 먹고 빚까지 내 신사복 세 벌을 맞췄다. 하지만 그가 맡은 역할이 ‘깡패’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맞춤옷들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결국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구제 점퍼가 ‘유니폼’이 되었다. (그림3)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신문광고 데뷔작 이후 김영인은 <어명>(강조원, 1967), <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등의 영화부터 2000년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다수의 액션영화에서 활약했다. (사진 4) <피도 눈물도 없이>(류승완, 2002)의 백골 역의 김영인과 불곰역의 백찬기 (사진 5)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 2004) 왽쪽부터 김영인, 김지영, 안성기, 윤주상, 백찬기 1940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그는 학창시절에는 권투를 비롯한 다양한 운동을 섭렵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특히 1960년대 유명한 권투선수들을 배출한 한국체육관에서는 꽤 높은 순번인 ‘27번’을 받아 아마추어 시합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이 때 익힌 권투와 유도, 가라테 등은 후일 본인의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액션 지도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인의 구술은 본인이 출연하고 지도한 영화들의 액션 장면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그의 구술로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관습적인 장면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죽고 싶지 않은 배우와 필름을 아끼고 싶은 감독 사이의 신경전으로 “‘으아아악!’ 하구 그냥 멫 바꾸 돌아가서 그런 척을 했다가 쓰러져 가주구선 그냥 죽어야 될 텐데 안 죽구 풀 있는 거 풀 다 뽑구선 일어났다가 죽었다”는 에피소드나 한겨울 촬영한 사극에서 “말이 뛰구 돌아야 하는데 대개! 횃불 있는 데 가서 다 죽어” 있는 에피소드는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장의 열악함이 만들어낸 장르적 관습을 보여준다. (그림6) <어명>(강조원, 1967) 포스터 액션영화에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조직원들’의 반응 쇼트는 카메라를 한 번이라도 더 받기 위한 조·단역 배우들의 열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팔에 찬 단도를 보여주기 위해 괜스레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린다거나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보이더라도 양 손목에 시계를 찬다거나 단추라도 하나 더 달았다거나 하는 에피소드들은 그만큼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소품 전쟁”에서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은 구술자가 액션 영화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데 자산이 되었다. 액션 연기와 지도에서 구술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장감과 타이밍 그리고 약속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무리 작은 장면일지라도 실제 ‘싸움’에서 볼 수 있는 ‘몸짓’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액션 영화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과장이 필요하더라도 실전과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액션 지도를 할 때 가장 강조한 것 중의 하나가 리허설을 통한 ‘약속’이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실록 김두한>의 박치기대장 성팔이의 액션과 <동백꽃 신사>의 클라이맥스 액션은 이러한 약속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실록 김두한>의 대미를 장식하는 종로 거리 액션은 안양촬영소에서 3일에 걸쳐 촬영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중요한 장면이었다. 성산일출봉에서 촬영한 <동백꽃 신사>의 마지막 장면은 “틀림없이 죽어야 되는 장소”인 벼랑 끝에서 한 촬영이라 감독은커녕 카메라조차 대동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이대근과의 생동감 넘치는 일대일 액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림7)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 포스터 1960~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과 변화 1960년대 초중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 정창화, 이만희 등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스릴러와 만주물 등이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액션영화의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형사극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극영화의 군중신 등도 액션영화가 다양화되는 데 역할을 했다. 다양한 액션영화의 등장에 맞춰 액션연출도 시기별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김영인의 출연작을 큰 줄기로 하여 액션연출과 액션연기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구술자가 한국영화 역사상 ‘거의 최초’의 스턴트맨으로 활약한 <5인의 해병>에서 주인공 5인의 액션연기는 지금 보면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하지만 그 시기 전쟁 액션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본적인 액션의 상황들을 보여주고 있다. 포탄 폭발, 전투 사격 등에 맞춰 몸을 좌우 혹은 상하로 움직여주는 연기들은 다양한 앵글로 표현되지 못한 탓에 액션의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군중 신의 경우도 롱 쇼트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기에 그 규모를 세밀하게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날으는 배우’의 진면목은 여간해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시기 전쟁액션의 제작스타일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불과 2년 후에 제작된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이만희 감독과 서정민 촬영감독의 스타일로 완성된 화려한 전쟁액션과 비교해본다면 1960년대 초기의 액션의 규모가 가늠될 것이다. (그림8)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군중 액션 <어명>을 통해서는 1960년대 중후반 수입되기 시작한 홍콩 무협영화와 한국에는 수입될 수 없었지만 흥행이나 스타일면에서 아시아 각 전역의 영화에 영향을 끼친 <자토이치> 시리즈를 필두로 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이 한국 액션영화에 미친 파급력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명>은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홍콩 무협영화와 일본 검객영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일본인 무술감독 나카하라 신(中原伸)의 영입은 이와 같은 스타일의 영향을 한국 액션영화에 녹여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영인은 구술에서 나카하라 신이 연출한 액션 신을 언급하며 홍콩영화와 일본영화에서 활용하는 ‘검술액션 연기’를 “세밀한 동선을 기본으로 지도하는 무용과도 같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의 구술을 통해 일본인 무술감독의 영입이 한국의 검객영화에서 액션을 좀 더 유려하게 연출하는 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9) <방랑의 결투>(호금전, 1966) 신문광고 (그림 10) <자토이치> 포스터 (그림11, 12, 13) <어명>(강조원, 1967)에서 나카하라 신이 지도한 액션 장면 1960년대 후반 영화 <샹하이부르스>와 <사나이 삼대>를 통해서는 한국 현대물 액션영화에서 액션연출이 좀 더 세밀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1960년대 <007> 시리즈와 마카로니 웨스턴 시리즈로 대표되는 서양 액션영화의 폭발적인 인기가 한국의 영화 관객과 한국 액션영화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 영화계에 새롭게 유입된 젊은 남성 배우들은 대규모 군중 신을 필수로 하는 현대물 액션과 무협 액션이 다수 제작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인력의 확대는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해봤을 때 규모면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었으며, 액션 연출의 측면에서도 규모의 성장뿐만 아니라 좀 더 깊이 있고 화려한 액션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4, 15, 16, 17) <샹하이부르스>(김기덕, 1969) 액션 장면 (세번째 사진에서 왼쪽이 김영인) <김두한> 시리즈(김효천)는 이러한 액션연출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TV 연기자까지 인력의 풀을 확대한 이 영화는 제작 규모도 컸지만 다양한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대규모 액션 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군중 액션 신의 조연 연기자들이 단체로 명시되거나 인식될 뿐 각각의 캐릭터 액션은 힘들었던 것에 비해 이 영화는 급격하게 커진 액션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군상들의 캐릭터들을 창조해 액션의 특기를 하나씩 부여함으로써 ‘캐릭터 액션’을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인 <실록 김두한>의 엄청난 흥행은 이러한 캐릭터 액션의 성공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었으며, 캐릭터의 성공적인 안착은 시리즈물이 연달아 성공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두한> 시리즈의 성공은 1970년대 합작액션영화들과 함께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는 시리즈 액션물이 유행하는 데 도화선이 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액션영화들이 이야기 중심보다는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시리즈 액션물 중심으로 번성한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실록 김두한>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진 18, 19, 20, 21, 22)<실록 김두한>(김효천, 1974) 종로거리 액션. 마지막 사진의 가운데가 김영인 김영인 구술의 의미와 평가 상기한 것처럼 김영인의 구술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액션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구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학창시절 외국영화 관람의 경험이다. 1회라는 한정된 시간 때문에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짧은 시간 구술자가 예로 든 관람 환경과 예시로 든 영화는 흥미롭다. 학생 입장에서 개봉관은커녕 2번관도 가기 힘들어 3번관 이하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는데, 이 영화들은 주로 서부영화였으며, 데뷔 후 이 영화들의 액션을 많이 참조했다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러한 구술은 외국영화가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군중 신의 촬영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액션영화 촬영현장의 풍경이다. 액션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조직 대 조직의 대결을 들 수 있겠는데, 구술자는 장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시에 카메라에 띄기 위해 노력하는 조·단역 배우들의 모습들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재현한다. 소품과 미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조·단역들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극 중 인물을 표현했는지가 구술을 통해 자세하게 드러난다. 1960~1970년대 한국영화 환경의 특성상 한정된 배우 풀로 여러 장르를 생산해야하는 현실 안에서 동일한 배우들이 장르영화에 어떻게 적응하고, 표현해내는가를 지엽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1970년대 액션지도 방식이다. 구술자는 학창시절 권투와 가라테를 수련했고 영화계 입문 전 자칭 주먹 좀 쓰는 ‘개구쟁이’ 시절을 거쳤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의 싸움과 액션 연기의 차이를 구별하되, 연기에서 ‘리얼함’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액션 연기를 구성하고 지도했는지를 설명한다. 1대1 액션 장면, 현장에서의 소도구 이용 등의 구체적 예에서 구술자의 경험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었는지 자세하게 드러난다. 말하자면 실전의 경험을 열악한 영화제작 환경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액션지도는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사전 협의 하에 액션 콘티를 작성할 만큼 면밀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1)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55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액션영화의 뒤편에서 뛰다」를 수정·보완했다.
아, 명동! 일본 야쿠자 영화에 신주쿠가 있고 홍콩 누아르 영화에 침사추이가 있다면 한국 다찌마리 영화에는 명동이 있다. 고영남 의 < 명동44번지 >(1965)와 < 명동의 12 사나이 >(1971), 김효천 의 < 명동출신 >(1969)과 < 명동노신사 >(1970)와 < 명동사나이와 남포동사나이 >(1970), 김기덕 의 < 명동부르스 >(1970) 등 당대 다찌마리 영화의 대부분은 종로가 아닌 명동 중심이었다. <김두한> 혹은 < 장군의 아들 > 시리즈를 통해 종로가 건달들의 주 무대로 떠올랐을지 모르지만, 과거 다찌마리 영화의 본고장은 바로 홍콩의 밤거리만큼이나 별들이 소곤대던 금융과 패션의 중심지 명동이었던 것. 영상자료원에서 통계를 내주면 좋을 것 같다. <명동> 시리즈, <김두한> 시리즈, <왼손잡이> 시리즈, <용팔이> 시리즈 중 과연 어떤 제목이 가장 많은지... 당시 명동의 모습 아무튼 명동은 왠지 ‘명치정’이라 불러야 그 살벌한 다찌마리의 느낌이 살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명치정(명동), 황금정(을지로), 본정(충무로) 등 일본인들이 자기 식대로 정(町)을 갖다 붙인 곳들이 주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고, 조선인들은 종로와 동대문을 중심으로 한 경성 북쪽에 거주했다. 바로 그 명치정에 대한 허장강 의 간략한 소개로 시작하는(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 명동잔혹사 >는 변장호 , 최인현 , 임권택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다. 서로 다른 감독과 배우들이 시대별로 명동 뒷골목 주먹의 역사를 훑어 내려가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허장강만이 역사의 산증인처럼 세 편 모두 출연한다. 변장호 감독의 1화 <시끄러울 것잉께>는 일제 강점 말기 명동 뒷골목을 주름잡던 친일파 황두식( 황해 )과 감옥에서 막 나온 박민( 박노식 )의 대결을 그리고, 최인현 감독의 2화 <갖고 싶은 여자>는 암흑가 생활을 청산하려고 마음먹은 현( 최무룡 )이 숙( 윤정희 )과 결혼을 앞두고 보스의 계략에 빠져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뒤 복수를 꿈꾼다는 얘기다. 가장 힘주어 얘기하고 싶은 임권택 감독의 3화 <대결>은 상( 김희라 )이 자신을 돌봐준 보스( 장동휘 )의 복수를 실행에 옮기며 명동의 오랜 폭력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작품이다. 변장호, 임권택 감독은 물론 당대 최고 액션 스타들이 총출동했는데, 당시 영화제작 실패로 힘들어하던 최인현 감독을 돕기 위해 무보수로 나선 것이라 한다. 그 우정에 감동했는지 영화의 포스터에는 대문짝만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영화인전체’가 참가한 우정영화! 쇽크 초대작!” 1. 박노식 , 황해 / 2. 최무룡 , 윤정희 , 3. 장동휘 , 김희라 내용보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일정이 더 중요한 이런 ‘품앗이’ 영화는 감독과 배우는 물론, 시나리오 작가까지 ‘시간 되는대로’ 급조해서 뭉치는 B급 기획영화의 일종이다. 더구나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 ‘성금을 모아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상업적일 수밖에 없다. 함께 참여한 변장호 , 임권택 감독 중 누군가 괜히 ‘예술’을 하려 했다면, 급전이 필요한 최인현 감독으로서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은 빤한 이치다. 게다가 이런 영화가 가능하려면 그 나라의 영화계가 잘 돌아가고 있어야 한다. 한가한 ‘듣보잡’ 영화인들이 뭉쳐봤자 관객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것이다. 잘 나가고 바쁜 사람들이 품앗이를 해야 돈벌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 명동잔혹사 >는 당시 한국영화계의 전성기를 방증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 명동잔혹사 >와 비슷한 예, < 흑전사 > 포스터 가까운 예로 과거 1990년대 초반까지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한 홍콩영화계를 돌아볼 수 있다. 중국 수재민들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을 목적으로 < 호문야연 >(1991)이 만들어졌고, 역시 홍콩감독협회에서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 쌍룡회 >(1992)를 만들었으며, < 동사서독 >(1994)의 제작이 지연되자 추가 제작비도 마련할 겸 그 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해 만들어진 B급 코미디 < 동성서취 >(1993)도 있었다. 이들 영화가 정말 변변한 시나리오도 없이 그저 배우들의 개인기에 기대 말 그대로 속전속결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아마도 < 명동잔혹사 >와 가장 비슷한 예가 될 만한 영화가 바로 나름의 선 굵은 서사를 갖췄던 < 흑전사 >(1987)일 것이다. 홍콩 무협영화의 전설 장철 감독의 말년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해줄 요량으로 후배 영화인들이 똘똘 뭉쳤던(오우삼이 연출을 맡고 강대위, 이수현, 주성치 등이 출연했다) 영화로, 오우삼 감독 특유의 거침없는 액션 연출을 엿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준비나 촬영 기간이 짧다보니 두서없는 아이디어들을 마구잡이로 뒤섞었는데, 그것이 뜻하지 않게 묘한 B급 쾌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혹시나 오우삼 감독의 마음속에는 ‘내가 바쁜 시간 쪼개서 도와주는데, 뭐 좀 어설프다고 설마 나한테 항의라도 하겠어?’ 하는(그러니까 정작 자기 영화 연출할 때는 별로 가져보지 못했던) 여유로운 마음이 생기진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태도가 오히려 뒷걸음질치다 쥐 밟는 격으로 명장면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명동잔혹사>가 주는 의외의 쾌감도 그와 멀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임권택 의 다찌마리 영화는 주로 < 장군의 아들 > 3부작(1990-1992)으로 기억되지만, 그는 과거 꽤 많은 ‘주먹’ 영화를 만들었다. 실제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과거 그의 다찌마리 영화들에 깊이 매료돼 있었고, “요즘은 사내다운 사내가 없는 세상 아닙니까. 진짜 사내를 보여 줍시다”라며 <장군의 아들>을 제안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그 제안을 듣고 임권택 감독이 ‘왜 또 그런 영화를 만들라고 허는 거요’라며 버럭 화를 낸 일도 유명하다. 그는 같은 해 < 명동잔혹사 >에 참여하고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1972)를 만들며 그 세계를 완전히 떠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다찌마리 장르를 다루며 언제나 ‘손 씻고 떠나려는’ 주인공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존 포드가 그러하듯 보통 한 장르의 달인이 되어가면서 그런 성찰적 주인공에 이끌리는 법인데, 그는 아예 처음부터 주먹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그렸다. '(허걱 형님...)' / '똘마니가 건방지게 법률공부냐' '형님, 쉽게 살겠어요.' / '재주가 있는 놈들은 다 빠져 나가란 말이야.' -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 중에서 그런데 그런 지나친 강박이 B급 상상력으로까지 느껴지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엽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압권의 장면은 (당시로선) 그의 마지막 다찌마리 영화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에 있다. 모범수로 출소한 민수( 신성일) 는 대학 진학에 실패해 어머니 볼 면목이 없어 조직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라(그러고 보면 2004년 작 < 하류인생 >에서 영화 속 조승우 가 모시는 선배 상필도 의대를 다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조직에 몸담은 인물이다), 부하들을 닥치는 대로 대학에 보내려 한다. 법대 출신 건달 준( 윤양하 )이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에서 법률 책을 펴놓고 고시 공부를 하고 있자, 민수는 재주가 있으면 이 습한 곳에서 다 빠져 나가라고 독려한다. 문득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CF 카피가 떠올랐다. 나와바리를 뺏기고 수금을 못 해와도 좋으니 공부만 잘 하면 된다는 조폭 보스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감독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시 만들기 싫은 다찌마리 영화를 억지로 만들게 하는 제작자를 ‘맥일려고’ 그런 장면을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몹쓸 생각까지 살짝 해봤다. 바꿔 말해 다찌마리 장르를 떠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너무나 간절했다. 이후 < 잡초 >(1973)와 < 족보 >(1978) 등을 만들며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그의 결심은 성공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다찌마리 영화 < 욕망의 결산 >(1964)에서 밀수꾼들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신성일이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에서는 새사람이 되어 출소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작과 끝인가. 그런데 같은 해 만들어진 < 명동잔혹사 > 속 <대결>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가 또 다른 다찌마리 걸작 < 사나이 삼대 >(1969)와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1971)를 만들며 터득한 장인의 세공술이 만개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장현수 감독의 < 게임의 법칙 >(1994)처럼 복수를 끝낸 박노식 이 젊은 송재호 에 의해 죽음을 맞는 1화 <시끄러울 것잉께>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대결>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놀라운 액션 연출은 앞의 두 작품을 압도한다. 당시 장동휘와 박노식을 잇는 다찌마리 장르의 ‘젊은 피’였던 김희라 는 라스트에 이르러 적들을 궤멸시키려고 작정한다. 장례식에 온갖 조폭 떨거지들이 모일 것을 알기에 다이너마이트까지 준비한다. 선글라스를 끼고 단신으로 장례식장을 찾아간 그의 카리스마가 진정으로 멋지다. 장동휘나 박노식이 보여준 어딘가 ‘구수한’ 멋과는 확실히 다른 세련된 느낌이다. 선글라스 카리스마 바로 여기서 오우삼의 < 흑전사 >가 떠올랐다. 임권택 은 돈을 벌어야 하는 영화의 기획의도에 맞게, 철저하게 관객들을 현혹하는 가공할 라스트 액션신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평소 자신의 다찌마리 영화보다 더 나가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작 자신의 단독 연출 장편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액션들이 속출한다. 김희라 는 수적 열세에 몰려 총상을 입으면서도 거의 전성기 홍콩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처럼 옆으로 몸을 날려 총을 쏘아댄다. 당시 이처럼 총기류를 액션영화에 사용한 한국영화가 있었나 싶다. 결국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해 그야말로 적들을 싹쓸이하는데, 임권택 감독이 이후 총기류를 다루는 대규모 액션영화를 연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다. ‘외인묘지에서 주인공이 일당백으로 싸운다’는 설정만 두고 그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신나게 연출했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에 불 붙이고, 몸을 날려 총 쏘고 그런데 그 무대는 바로 (지금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합정동 외국인묘지다. 천주교 성지라 불리는 절두산순교성지 바로 옆인 그곳은 좋은 일 많이 하신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래서 뭔가 주인공의 종교적 속죄를 위해(바로 오우삼 영화의 성당 같은 그런!) 그런 곳을 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는 그 엄청난 라스트신을 미련 없이 이 지긋지긋한 다찌마리 장르와의 성대한 작별인사라고 여겼을 것이다. “오늘의 명동에는 사랑과 낭만 우정이 있을 뿐, 지난날의 악몽은 가신지가 오래다. 명동이여 영광 있으라”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이제는 너무나 늦은 얘기겠지만, 진정으로 <대결>의 장편 확장판을 보고 싶다. / 글: 주성철 (씨네21 기자) PS.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의 ‘임권택 전작전’은 이례적으로 영화제 개막일보다 열흘 앞선 9월 23일(월)에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시작해 영화제 기간까지 계속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다찌마리 영화들도 당연히 포함돼 있으며, 9월 28일(토) 오후 4시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상영 후에는 오승욱 감독, 주성철 기자의 GV가 있습니다. 박노식 황해 최무룡 윤정희 김희라 장동휘 감독 변장호 , 최인현 , 임권택 개봉극장 아세아극장 개봉일 1972-06-04 관람인원 37,200(서울)명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활극 액션 영화의 현저한 융기는 장르의 국제적 경향이 로컬 시네마의 정체성과 교착되어가는 진기한 풍경을 보여준다. 서부극과 필름 누아르,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한국적 수용은 관객의 기호에 따라 장르의 양식과 스타일이 어떻게 내셔널 시네마의 아이덴티티로 변환되어가는 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낳았다. 임권택 감독의 < 사나이 삼대 >(1969)는 이러한 한국영화계의 정황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작품이다. 장르 연출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임권택의 액션 감각은 < 황야의 독수리 >(1969), <의리의 사나이, 애꾸눈 박 >(1970),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1971) 같은 평판작들에 뚜렷이 새겨져 있지만 나는 그 시절 최고작은 <사나이 삼대>라고 생각한다. 일본 동경에서 조총련 계 하수인 조직의 행동대장을 맡고 있는 금철( 김희라 )은 절친했던 친구 상현( 강민호 )이 조직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조직을 이탈하려 한다. 보스 호남( 박노식 )은 민단과의 세력싸움에 전투력이 탁월한 금철을 필요로 하지만 그가 명령을 거부하자 친구의 여동생이자 금철의 아내인 미연( 문희 )을 납치한다. 과거와 절연하고 새 삶을 찾으려는 금철은 연인과의 미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이게 된다. 서사의 표층은 일본 야쿠자 영화의 익숙한 플롯을 따라가고 있지만 < 사나이 삼대 >는 당대 한국영화로서는 드물게 필름 누아르의 비전과 스타일을 뚜렷이 구현한다. 조직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암흑가를 떠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갱스터의 고단한 여정을 그린 플롯은 야쿠자 영화의 전형이다. 임권택 감독은 여기에 누아르 적 인물과 스타일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충만한 장르적 쾌락을 창조하고 있다. 갱스터는 비극적인 영웅이고, 도덕적 모호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며, 제도화된 법 집행기관인 경찰은 정의를 실현하는데 무력하다. 금철과 호남의 스토리를 좇는 형사반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보다는 관찰자에 머문다. 장면의 대부분이 밤이나 실내에서 벌어지고, 인물들은 퇴락했으며, 운명론적인 주제로 기우는 이 영화에는 창조적인 어둠의 장르인 누아르의 원형질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곳곳에 있다.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미리 결정된 운명, 무기력의 정서가 팽배하고, 불안정한 사선 앵글은 위태로움을 조장한다. < 사나이 삼대 >는 임권택 이 얼마나 뛰어난 장면 연출가인지를 입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계산적인 커트의 분할과 표현주의적인 조명의 사용, 적재적소에서 끼어드는 대담무쌍한 클로즈업, 인물의 심리에 동기화된 시점 쇼트, 반복 재생되는 음악의 라이트모티프(전설의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황문평이 음악을 맡았다) 등 버려질 것이 없는 형식적 완결성을 구축하고 있다. 풋풋한 신인 시절 야성미가 넘쳤던 김희라의 생기와 절도 넘치는 박노식의 액션도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무엇보다 몸담았던 호남의 조직으로부터 곤죽이 되도록 린치를 당한 뒤 비척거리며 거리를 걷는 금철의 육체 위에 어리는 낙오자 정서는 잊히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쇼트의 구성적 긴장이 감각되는 장면도 여럿 있다. 상황에 대한 긴박하고 압축적인 제시, 어둠과 그림자의 적절한 활용, 공간의 심도를 활용한 맥락화는 스타일이 주제를 밝히는 누아르적인 룩의 전범이다. 영화가 열리자마자 자동차를 탄 네 명의 괴한들에게 상현이 쫓길 때 카메라는 자동차에 탄 이들의 시점과 도주하는 상현을 오가면서 긴박한 상황을 조성해낸다. 상현의 초조한 얼굴과 좁은 골목의 담벼락에 어리는 그림자만으로 우리는 별 설명 없이 필름 누아르의 검은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필사즉생의 각오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 금철이 호남의 아지트에 잠입했을 때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다가 어둠 속에서 스윽 나타나면서 작렬하는 육박전, 암전된 사무실의 어둠 아래서 금철과 호남이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도 뛰어나다. 장르 캐릭터에 대한 명징한 구축 위에 거칠고 눅눅한 누아르의 비전을 이식한 < 사나이 삼대 >는 오늘날의 임권택 영화를 떠올렸을 때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상을 전해준다. 장르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나 정확한 쇼트의 분할과 장면전환, 공간(특별히 심도)에 대한 통제와 연출의 능란함에서 대가의 뿌리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