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 감독
- 대니 무니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리암 햄스워스, 테레사 팔머, 에이미 티가든, 크리스 로웰
한 감독의 새 영화를 보고 나서 그/그녀의 이전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과는 다른 일일 것이다. 특히, 홍상수 의 영화가 그렇다. 그의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일관성 때문이다. ‘반복’은 그의 개별 영화들의 구성 원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영화들 사이를 잇는 창작의 원리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들은 소급적인 ‘반향효과’를 통해서 더욱 두터워지고 깊어진다. 근 20편에 이르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단계를 설정하는 일, 그리고 그의 영화들 사이에서 걸작과 태작을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 보인다. 그의 모든 개별 영화들은 단 하나의 연작 중 일부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끊임없이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이항적 대칭 구조’의 형식을 취한 홍상수의 신작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를 보고 나서,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던 그의 초기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그 ‘반향효과’를 음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의 세 번째 작품인 < 오! 수정 >에 대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오! 수정 >은 표면적으로는 5개의 소제목이 붙은 장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 안에 동일한 과정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기억 사이의 대비가 함축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영화다. 재훈( 정보석 )과 은주( 이은주 )는,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합(수정, 또는 결혼)’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 세계 속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커플이자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인 커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 시민 케인 >이나 < 라쇼몽 > 같은 ‘기억의 모호성’을 다루는 영화들의 계보 안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였고, 전작인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과 < 강원도의 힘 >(1998)에 비해 좀 더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나타나는 어떤 변화의 징후로 읽었다(부정과 냉소에서 긍정과 유머로의 이행). 하지만 ‘반향효과’ 안에서 본 <오! 수정>은, 그 첫인상이라는 것이 일종의 오해, 또는 절반의 이해에 불과했던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오! 수정>은 ‘기억의 모호성’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화도 아니었고, ‘낭만적 해피엔딩’의 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두 남녀 사이의 기억의 차이는, 홍상수가 이항적 대칭 구조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동원하는 다른 많은 이항들(가령, 서로 같은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경유하는 두 인물, 서로 다른 공간-분위기에 놓인 한 인물, 현실과 꿈 등)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귀엽고 밝아진 인물들 역시 낭만적 낙관의 반영하는 거울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성찰을 위한 거울이었다. 무엇보다 분명해진 것은, 홍상수 의 일부 영화(특히, 초기영화)에서 나타나는 ‘이항 구조’가 사실은 처음부터 ‘n항 구조’에 이르기 위해 취한 방법론적 선택이자 제약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후 영화에서 나타나는 삼항 구조나 옴니버스 형식과 같은 다양한 형식적 변주는, 어떤 질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이 ‘이항 구조’의 양적인 확장에 더 가까운 것이다. 홍상수에게 ‘구조’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구속이다. ‘불안’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집중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놓은 틀이다. 이 제약에는 서사형식으로서의 ‘구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스타일적 요소들(가령, 고정쇼트, 미디엄쇼트, 롱테이크 등)도 포함된다. 홍상수는 스스로 설정해 놓은 이 제약 안에서 ‘우연’을 기다리고, 마주친 우연에 따라 ‘즉흥연주’를 한다. 특정한 ‘공간-분위기’와 ‘배우-인물’이 조우하는 순간, 그의 반복되는 즉흥연주가 시작된다. 홍상수는 그 자유(우연의 수용)와 즉흥연주를 “어떤 당위나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 어차피 선택인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가 벗어나고자 하는 그 ‘당위나 나쁜 습관’은 세상의 그것(상식과 통념)이자 동시에 영화의 그것(관습적 재현 양식)이다. 대개는 ‘불륜관계’를 포함하는 남녀 사이의 다양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의 줄거리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TV 드라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그 줄거리 안에 결코 ‘법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데뷔작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에 예외적으로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불륜’ 때문은 아니었다). 홍상수는 그가 발견하고 재구성해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굳이 법정에 서지 않아도 그 인물들의 내면에서 언제나-이미 작동하고 있는 어떤 ‘법의 힘’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하고 저항하고 있다. < 오! 수정 >의 밝고 귀여운 인물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적 방법은 가부장제의 법이 작동하고 있는 일상에 대한 현미경적 관찰이지만, 그의 근본적인 영화적인 화두는 그 법의 외부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어떤 삶’의 지평에 다다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홍상수 영화의 본질은 ‘일상의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삶의 리얼리즘’에 있다. 홍상수는 언젠가 그것을 “완전한 구체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대한민국 연예계는 쑥대밭이 됐다. ‘그건 너’의 이장희 를 비롯해 신중현 , 윤형주 , 김추자 , 장현 , 정훈희 , 어니언스의 임창제 , 그리고 코미디언 이상해 등 구속과 불구속, 체포와 자수 등이 마구 뒤엉켜 23명의 가수, 2명의 코미디언, 26명의 악사, 그리고 3명의 배우가 붙들렸다. 이듬해 1976년까지 100명이 넘는 연예인들이 이른바 ‘대마초 파동’ 명단에 올랐으니, 방송국에서는 ‘틀 노래가 없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왔다. 이장희, 신중현, 김추자 등 낯익은 이름들 사이에서 발견한 이름이 바로 배우 정미하 다. 대부분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날 이후’ 완전히 사라져버린 정미하는 < 애종 >(1975)과 < 비녀 >(1976) 단 두 편만을 남겼다. 진하게 생기지 않은 그녀는 당시의 시선으로 보자면 무척 담백하고 세련된 외모였다. 신인으로서 연기력은 부족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도도하게 느껴졌다. 어쨌건 더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영화계를 영영 떠나버렸다. 시신의 발견과 다양한 과학수사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정보에 따르면 대한극장에서 433명의 관객만 관람한, 정미하 의 두 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작품인 < 비녀 >는 전형적인 B무비 스타일의 스릴러다. 데이트 중이던 연인들에 의해 무려 뼈다귀가 삐져나온 시체가 발견되는데, 의치를 단서로 밝혀낸 정보에 따르면 살해당한 시체(정미하)는 1년 전에 죽임을 당한 것이며 당시 나이는 27~28세였다. 이에 과학수사연구소에서 복안술의 권위자 송 박사( 최정훈 )와 황 박사(신구), 그리고 또 다른 여성연구원 하 박사( 김영애 )를 중심으로 수사가 펼쳐지고, 뼛속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으로 인해 익사로 판명된다(과학수사연구소의 놀라운 실력!). 그를 바탕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이가 바로 원경식 형사( 박근형 )다. 두 명의 ‘꽃할배’가 펼치는 공조수사랄까. 게다가 범행현장에 있던 벤츠 승용차의 차번호까지 입수되는데(3-3027이라는 번호판을 보고 ‘3학년3반 27번’으로 기억한 놀라운 소녀!) 정작 그 차의 주인 유옥련( 도금봉 )은 도둑맞은 차라며 발뺌한다. 그렇게 다른 단서들이 더해져 익사가 아니라 이미 죽임을 당한 상태에서 옮겨져 온 것임이 드러난다. 과학수사연구소 박사들과 원 형사 이후 과학수사연구소의 송 박사와 황 박사가 돋보기를 들고 증거물을 살펴보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뭔가 당시로선 대단한 과학수사 분위기를 뽐낸다. 비록 미흡한 세트이긴 하나 연구소 내부의 분위기도 어딘가 조악한 SF 세트 느낌이다. 중요한 전달사항은 내부의 스피커를 통해 방송되기도 한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더 압권이다. 신구는 마치 인기 TV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말투로 황 박사가 죽은 아가씨의 뻐드렁니를 근거로 예쁘지 않은 여성일 거라 판단하고, 반곱슬인 것으로 보아 성격이 강할 것이라 추측한다. 또한 가난한 여자가 값비싼 의치를 한 것에 더해 ‘정신 바른 여성은 염색을 하지 않는다’는 시대착오적인 멘트로 염색을 한 그 여성이 행실이 바르지 못한 일류 호스티스라는 결론까지 다다른다. 게다가 황 박사는 골반을 보고 직감하건대 ‘성행위가 아주 능한 여자라 생각된다’고도 말한다.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얘기들이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과학적 접근이라 여기는 듯하다. 그렇게만 끝나면 황당하겠지만, 당연히 과학수사도 잊지 않는다. ‘피해여성의 음모는 범죄해결의 열쇠’라며 털 집착증을 보이는 황 박사는 그 털 대신 피해자의 손톱에서 남자의 피 흔적을 발견하면서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띤다. 그렇게 얻은 정보들로 과학수사연구소는 무려 3D로 복원해낸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한다. 하지만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밝혀지는 사연은 무척 기구하다. 거의 < 화차 >와도 같은 이야기다. 몽타주가 신문에 실리면서 피해자가 자신의 사촌 동생인 것 같다는 울산으로부터 제보가 도착한다. 시골 출신의 ‘깍쟁이’ 미라( 정미하 )라는 여자가 집을 나간 지 7년이나 됐고 성형수술을 한 뒤 유력 재벌 고두만의 정부로 생활했다. 그 사이 ‘옷 벗고 버는 직업’으로 돈을 벌었고 직업소개를 통해 바에 취직도 했으며 심지어 이름 또한 ‘변화자’로 바꾸었다. ‘화자’라는 이름 또한 왠지 <화차>를 떠올리게 한다, 고 그냥 마음대로 생각해봤다. 원 형사가 그 행적을 뒤쫓는 긴박한 수사장면은 정지화면의 스틸컷으로 스타일리시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다 숨겨진 남자친구 유종근( 김추련 )의 존재도 알게 된다. 그를 상대로 마치 거짓말 탐지기 사용하듯 심문하는 하 박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음악 좋아해요?” “자동차 운전할 줄 아세요?” 어떤 기준으로 뽑은 질문인지 모르겠으나 김영애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급기야 발뺌하는 유종근 앞에 미라의 골반뼈를 보여준 다음 실제 머리를 보여주는데, 잠깐이나마 진짜 정미하의 머리가 드러날 때는 거의 소스라칠 정도로 놀랍다(정미하가 테이블 밑에 들어가 머리만 쏙 나오게 한 것이다). 그를 통해 서서히 사건의 충격적인 전말이 드러난다. 결국 회장에게 살해될 수밖에 없었으나, 미라 혹은 화자는 끝까지 매력적인 ‘센’ 여자였다. 그와 별개로 < 비녀 >의 비디오 재킷은 하얗게 메이크업을 한, 실제 출연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 도금봉 의 사진이 꽉 차 있어서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도금봉’과 ‘비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웃는 머리 정미하 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더 가슴 아픈 영화는 그녀의 데뷔작인 정진우 감독의 < 애종 >이다. 끝내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애종>은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1974)으로 시작된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영향권 아래 있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버지( 최불암 )가 몰락하고 세상을 뜨면서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된 미다(정미하)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첫 장면부터 지긋지긋하다. 여관방에서 취업을 미끼로 미다를 성적으로 유린하려는 총무과장은 침대 위에서 뻣뻣하게 누워만 있는 미다에게 “너 송장이냐? 협조해야 할 것 아냐!”라고 다그친다. 순진한 미다는 “어떻게 하는 게 협조인가요?”라고 되묻는다. 첫 장면부터 과감한 노출을 선보이는데 그 육체가 아름다울수록, 나이 든 총무과장의 얼굴 뒤로 ‘집에 연탄 한 장 없다’는 어머니의 보이스오버가 겹칠 때 거의 지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죽하면 여관방을 탈출하듯 나와서는 명동성당 앞을 지나며 “당신의 아들 예수는 죽었나요? 그럼 나한테 멀쩡한 취직자리 하나 달라고 해주세요.”라는 독백까지 내뱉는다. < 애종 >이 더욱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다른 호스티스 드라마의 여주인공들과 달리 이런저런 남자들에 인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살롱에서 연주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된 상황에서 “앞으로 < 대부 >는 바흐를, < 러브 스토리 >는 베토벤을, < 007 >은 모차르트를 생각하며 치겠어요. 개가 돼서 개처럼 살아가렵니다.” 혹은 “바흐보다는 ‘목포의 눈물’이 돈이 되는 세상이에요.”라고 한탄할 때 가슴이 찢어진다. 결국 미다는 그토록 좋아했던 바흐를 연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비록 단 두 편이지만 공교롭게도 정미하 는 매번 죽음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 안타깝게도 뭔가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대마초 파동을 겪으며 현실의 배우로서의 삶도 끝났다. 정미하가 이후 순탄하게 더 활동하며 대단한 배우가 됐을 거라 감히 마음대로 상상할 수는 없겠으나, < 애종 >과 < 비녀 > 단 두 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던 배우다. 영화 속에서 뭔가 멍하게 슬픔 가득한 표정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정미하 박근형 김영애 신구 김추련 도금봉 감독: 이신명 각본: 문상훈 개봉극장: 대한 관람인원: 43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