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 영춘권 마스터
- 감독
- 서호봉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요범, 송가
<벤허>(1925)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동원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는 식민지 통치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제국은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기 위한 ‘무단통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강자’가 곧 ‘적자’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일반 문관뿐 아니라 교사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해 왔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3.1운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한꺼번에 상경했지만 치안 당국의 대응은 미온적인 수준에 그칠 따름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되었으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만세운동의 기운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가며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러모로 ‘3.1운동’은 제국의 통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비껴난 장면들을 연출해 냈던 셈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물리적 폭력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뚜렷한 한계에 부딪혔다. 만세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부담을 느낀 제국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유화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이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눈에 띄기 쉬운 헌병의 수는 줄었을지언정 실질적인 경찰력은 증대되었으며, 언론의 창간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했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동향을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통치의 요체는 감시와 처벌을 짝패로 한 안정적 관리 기술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극장 이 새로운 식민통치 기술의 주요한 시험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통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해도, ‘3.1운동’의 전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은 집단을 이룬 조선인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정치적 상상력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종족의 회집 장소였다. 극장업은 엄연한 합법의 영역 속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은 극장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안 유지에 유용한 기관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돌발적 사건에 의해 쉽게 자극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치부되었다. 비록 극장에서의 소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여파에 대한 추정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전거를 환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대 들어 검열 규정 들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1922년에 공포된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취급심득」은 공연에 대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무단 공연 시의 처벌조항도 적시했다. 이어 1923년에는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에 소재한 극장 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개선사항을 주문한 바 있었다. 특히 비밀결사와 음모단이 활동하는 내용의 활극은 유해하므로 피할 것, 변사가 사전 검열 내용과 다른 풍자적 언어를 쓰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1] 1926년부터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일본의 법규를 소급적용한 것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별도로 적용된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또한 이 규칙은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급성장한 영화 를 명백한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름 상영 전에 검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검열 기준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상영 시의 임검을 비롯한 현장취체 규정도 명문화되었다. 한편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가장 명시적인 표적은 외화 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에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가 제작된 이래 조선영화계는 본격적인 생산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상영된 영화의 절대 다수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떤 이유로 먼 나라의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상이한 풍속의 세계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기 극장이 형성해 온 무성영화의 상영 관습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극장에서 상영된 무성영화는 자족적인 텍스트라 보기 어려웠다. 무성영화는 항상 변사와 악사를 비롯한 인간매체의 개입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상영이라기보다는 연행 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표징으로 지목했던 영화의 성격이란 적어도 식민지기 극장에서는 유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를 관람하던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에 나타난 낯선 시각적 코드 와 변사를 통해 중계된 익숙한 구두적 코드 를 결합시켜야 했다. [2]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방식이라 해도 관객들은 극장 경험을 축적해 나가며 이를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문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무성영화의 관객들은 ‘소리’를 들었다고(혹은 상상했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 역시 외국 배우의 벙긋거리는 입술에서 모국어 발화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하다. 그리고 변사의 연행은 그러한 상상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수용은 매우 혼종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즉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코드에 의해 토착화되고 전유 되었으며 더 나아가 종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또한 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간자막의 내용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변사의 수준이란 관객이 지참해야 할 손수건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그들의 해설은 객석을 선동하여 집단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오독에 가까운 변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제멋대로인 해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관객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사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일종의 창작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을 자극하는 해설을 통해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유선영은 헐리우드 영화 < 동도(Way Down East)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20)가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 해설을 동반하여 상영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다소 비껴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동도>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미혼모 신세가 된 젊은 여성이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선한 행실을 통해 끝내 행복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도>는 권선징악의 시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둔 전형적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본 데이빗의 구애를 받게 되지만, 과거 그녀를 버렸던 레녹스와 다시 만나 과거사를 폭로 당했고, 데이빗의 아버지인 스콰이어는 부정한 행실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안나를 면전에서 모욕한다. 쫓겨난 안나는 눈보라 속에서 기절하고 강물에 휩쓸려 흘러가다가 폭포로 추락할 위기를 맞이하지만 뒤쫓아온 데이빗은 유빙들을 징검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극적으로 안나를 구해내게 된다. 이 장면은 <동도>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될 만큼 스펙터클의 요소가 부각되는 곳이며, 내용 측면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환이 가장 ‘통쾌’한 대목으로 회고했던 것은 데이빗이 아버지 스콰이어에 대해 ‘후레질’을 하며 대드는 장면이었다. 특히 데이빗은 ‘종교, 도덕, 법률’이 부재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데, 아버지의 ‘종교와 도덕’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장면이나, 안나에게는 ‘종교, 도덕, 법률’ 어느 것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선영은 이러한 반복이 다분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에 따라 취택되고 덧붙여진 장면에 가깝다고 보았다. 즉, 김영환이 느꼈던,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통쾌감’은 낡은 구질서와 도덕의 파괴, 자기혁신을 통한 개조,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절박한 기대감, 식민지민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자의식이 결합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4] 변사 김영환 / <동도>(1920) 중 (사진: “ Way Down East ”, IMDb) 이처럼 변사의 해설은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세계를 식민지의 서사로 환치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관객들은 은밀한 해석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전유의 독법을 체화해 나갔다. 더군다나 인간매체인 변사는 복제매체와 달리 돌발적 수행성 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설 대본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 배우의 애드립처럼 변사 역시 현장 분위기에 맞추어 임의로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필름 검열과 별도로 임석경관을 동반한 현장취체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대구 만경관 활동사진 순업단이 지난 팔일 진주에 도착하여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십일 밤 영사하는 사진, <암흑의 시(市)>에 설명 변사 김성두 군이 동 영화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빈한한 사람을 위하야 일하다가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전기의 판결을 담임한 판사의 아들이 역시 법망에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면서 현대사회 조직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법률이 없어도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잇다는 설명 을 마치자 곧 임석경관이 검속을 시키고 다음 사진도 못하게 함 에 오백여 군중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고함을 쳐 장내는 대소란을 일으켰는데 활동사진 설명까지 가혹히 취체함은 처음 일이며 진주경찰서의 근래 언론취체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더라. (진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6 』, 한국영상자료원, 2014, 177쪽. - 기사, “활동사진 설명 중 – 변사 돌연 검속”, 《조선일보》, 1926. 3. 13. (나) 지난 십육일 밤에 시내 조선극장에서 다수한 격문을 살포한 사건 이 있은 이후 경찰 당국의 극장 경계는 더한층 삼엄하여져서 시내 단성사 , 조선극장 , 우미관 등의 각 극장의 입구는 말할 것도 업고 밑의 층 위층에는 두어 간통만큼씩 십수 명의 정, 사복경관이 벌려서서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잇는데 그중에도 무대 정면에는 바로 변사 옆에 순사부장 한 사람이 걸상에 걸어 앉아서 활동사진을 영사하는 암흑한 속에서 끊임없이 관중과 눈싸움 을 하고 잇는 등 일찍이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진기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32쪽. - 기사, “각 극장마다 수십 경관 배치 – 변사 옆에 순사가 앉아”, 《조선일보》, 1930. 1. 19. (가)는 임석경관이 변사의 임의적 해설을 문제 삼아 흥행 자체를 중지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대구 만경관 소속의 활동사진 순업단이 진주에서 영사회를 열었을 때, 변사 김성두는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볼온하게 해석될 만한 해설을 덧붙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 불합리하며, 법률이 없어도 충분히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연한 인도주의적 발상에 기댄 이 해설이 명시적인 불온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년도 5월부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 국사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시행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치안 당국은 법률 무용론을 설파한 해설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기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치안 당국을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극장은, 동맹휴학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학교와 더불어 경찰의 일급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들었던 극장은 격문을 살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나)는 조선극장 격문 살포 사건 이후 임석경관의 감시가 매우 노골적으로 표변한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는 객석의 가장 뒤편,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5] 그런데 격문 살포 사건이 발생하자, 경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순사부장이 아예 변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중과 눈싸움”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당국의 주안점이 변사의 해설 자체보다 그것이 촉발하는 객석의 정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러나 가시화된 임석경관의 존재는 외려 극장에 내재한 정치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석경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국의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현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극장에 내재된 불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임석경관에 의해 중지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기에, 임석경관은 극장에 모여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임석경관으로 대표되는 감시기제의 존재는 관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응시하면서 극장을 둘러싼 심상지리를 ‘불온한 공간’으로 스케치했으며, 관객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극장 흥행주들은 이러한 불온성을 흥행 코드로 치환 하는 데 은근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족의 수난 서사와 해방서사를 담아 낸 외화들은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컨대 1928년에 개봉되었던 <가우초>와 <이스라엘의 달>은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의 해방서사를 그려 낸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가우초>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터전을 둔 유목민 ‘가우초’의 영웅담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들의 수령인 주인공은 신전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관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신전의 보물을 노린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열세에 처한 주인공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신출귀몰한 책략”을 발휘하여 끝내 신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6] <십계>의 ‘자매편’이라 소개되었던 <이스라엘의 달>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 왔다. 그들을 동정해 왔던 이집트 왕자 세티는 ‘이스라엘의 달’이란 별칭을 가진 메라피와 만나게 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신문에 게재된 감상평은 동포의 자유를 위해 “어여ᄲᅳᆫ 청춘”을 바친 메라피의 희생을 ‘잔 다르크’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된 이집트 왕의 최후를 “확연한 인과의 결실”이라 규정한 바 있다. [7] <가우초>, <이스라엘의 달> 포스터 이듬해 식민지 조선에서 개봉한 < 벤허 >(프레드 니브로, 1925)는 유대민족의 수난사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극장 운영자와 실무자들은 서양영화를 경유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관객몰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필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단성사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며 <벤허> 검열 과정에 참여한 이구영 의 ‘무용담’은 흥행 실무자의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당대 검열행정의 공백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구영) 영화검열을 이거 통과해나가면, 대본을 보니까 이거 암만해도 위태로워요, 내가. 거기 몇 마디 다이알로그가 이건 아주 불온 천만한 얘기란 말이에요, 저 노예선이..., 거 지중핸가 거기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부 철사로 묶이고 거기에 이제 그..., 이... 저...? (면담자) 북? (이구영) 네, 북을 울리면서 리듬 맞춰가지고 노를 젓지 않습니까? 거기에 소위 선장이라고나 할까? 그게 나왔어. 나와서 채찍으로 갈기는 겝니다. 막! 덜 움직인다고... 그래 반항하는 거야. 이쪽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오스인가요? 반항하는 거야. 직접 대고. 그 선장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저어서 한 시간씩 늦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빨리 배를 저으란 말이야. 그 때 반항하는 거야. 그래서 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너의 한 시간은 말이야, 우리 유태 민족의 백 년이단 말이야.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알겠느냔 말이야. 그 대사가 하나 탁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하나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겝니다. 이것이 통과되야만, 되면 이거 아주 히트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데 검열관은, 소위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까라고 하는 검열관한테 이것이 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전부 가위질 다 당해서 아마 한 200피트 이상은 없어질 겝니다. 그 화면 전체를 막 끊고, 그런데 다행히 내가 거기 급사로 있던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대본이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가는 걸 알아다오. 그래 나중에 전화를 걸으니깐드루 요시다란 사람의 손으로 갔다, 길전(吉田)이한테... 됐단 말이야. 그럼 내가 성격을 아니깐 이거 꼭 내가 방법론을 써야 되겄다. 이제 검열실에 올라갔어요. 영화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소위 하이꾸라고 해서 그 배구(俳句)를 좀 할 줄 압니다. (면담자) 네, 하이꾸? (이구영) 네, 그게 경무 월간지가 있어요. 《경무월보》라고...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일부러, 그래서 고 문구를 외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줄담배입니다. 줄담배, 소위 아사히라고 하는 것을 밤낮, 이놈을 입에다 종일 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눈이 좀, 시력이 이상해서 아주 그냥 안경을 굉장한 걸 썼습니다. 도수가 깊은 것, 그래서 이제 고 화면이 한 5분이면 벌써 나타나기 쉬운 방면까지 왔어요, 벌써. 그래 내가 화면 보면서 대본 읽으면서 얘기하면서 이거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때는 그 배구에 대한 것, “당신 참 배구 참 멋지다 말이지. 이런 문구, 암만 생각해도 이건 정말 걸작인데, 이런 걸 왜 문단에 발표하지 않고 이런 데다 이렇게 내슈?” 막 칭찬하구 말이야. “당신, 자꾸 쓰슈, 자꾸 이런 글을. 이래야지, 우리도 좀 보지. 당신이 나 이런 걸 쓰는지 몰랐단 말이야. 오까~ 같으면 이런 걸 안 쓴단 말이야. 당신이니까 썼지.” 그렇게 하니까 칭찬해서 누가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아, 그러냐?구,’ “그래 평판이 대단하단 말이야, 요시다상, 이거 정말 문학에도 이렇게 조예가 있고 검열관으로 있기에는 참 아깝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 그렇냐’고 말이야. 그래 그러는데 그 화면이 지나가요. (면담자) 네, 그걸 지키기 위해... (이구영) 내 아주 잊질 않죠, 이제. 그 지나갔어요. 지나가서 얘기 딱 끊고, 뭐 참, 얘기가 너무 길었단 말이야. 그러고 영화 보는 게죠. 그러니까 지나갔죠. 그러니까 이제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 콱콱 내줬어요. 내가 춤을 추고 혼자 나오는데,(웃음) -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83~284쪽. <벤허>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벤허>는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 집안 출신의 자제이며, 체제에 반항하는 동족들을 밀고하라는 로마인 친구의 부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주목했던 것은 벤허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노예선 위에서 학대 받는 장면이었다. 채찍질하는 노예선의 선장에게 맞서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부르짖었던 대사가 “히트”를 예감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구영이 보기에도 반항기가 농후했던 이 대사가 온전히 검열을 통과할 리 만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구영은 ‘꼼수’를 동원한다. 어떤 검열관이 배정되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필름 검열 당시 문제의 장면이 지나갈 때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그의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 실력을 일부러 추켜세웠다는 것이다. 결국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을 받아 낸 이구영은 희희낙락하며 검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벤허>가 상영되었을 때, 이 대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즉각 임석경관의 중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벤허>는 필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었던 데다가 변사가 설명대본에 없는 대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열 당국은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영이 회고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검열관들 사이에 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큰 난리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벤허>는 계속 상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장상영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검열 역시 사람의 손으로 수행하는 작업인 이상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구영은 그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며,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이 발성영화로 전환된 1930년대 이후부터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성영화는 별도의 소리 연행자를 둘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텍스트였기에 필름 검열만으로도 불온한 장면들을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성영화의 사운드와 충돌할 때가 잦았던 변사의 목소리는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재래의 취향’으로 낙인찍히며 점차 주변화되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돌발적 수행성이 발휘될 여지(餘地)가 급격히 좁아져 간다는 점을 의미했다. *** [1] 기사, “활동사진 개선의 요점 - 비밀결사나 모험뎍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 《조선일보》, 1923. 4. 11. [2] 유선영, 「초기 영화의 문화적 수용과 관객성 : 근대적 시각문화의 변조와 재배치」, 『언론과 사회』 12,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2004. [3] 백문임, 「식민지 극장의 무성영화 관람성」, 『한국언어문화』 38, 한국언어문화학회, 2009. [4] 이러한 전유의 구조를 적용해 본다면, 안나는 피억압 약소민족으로 치환되며, 레녹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식민지를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으로, 스콰이어는 종교와 도덕을 말하면서도 침략자인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서구 강대국들로, 데이빗은 약소민족을 대변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인도와 정의를 구현하는 선인으로 전치될 수 있을 것이다. (유선영, 「식민지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전복적 전유와 징후적 영화경험」, 『미디어, 젠더 & 문화』 26,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3.) [5] 광주극장은 1930년대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임검석’의 위치도 보존해 놓았는데, 객석의 가장 뒤편인 출입구 바로 옆에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기사, “신영화 - 『더글라스』의 가우초”, 《조선일보》, 1928. 2. 15. [7] 기사, “내가 본 이스라엘의 月”(一), 《동아일보》, 1928. 2. 10.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1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 2 정상적인 관객은 자신이 욕망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이며, 자신이 이미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을 영화관으로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다. -세르쥬 다네 3 일요일의 충무로는 처음이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간 것도 처음… 한때 매일같이 충무로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던 회사에서 퇴근해 7011번 버스를 타고 매일경제본사 앞에서 내려 영한빌딩까지 걸어가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20대 후반의 몇 년, 그리고 은평구에 있던 집에서 3호선을 타고 6번 출구로 나와 매일경제본사 맞은편에 있던 ‘동화삘딍’ 4층 사무실에서 아저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숨과 담배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30대 후반의 일 년.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때 충무로는 내게 해질 무렵의 골목, 커피와 생맥주, 닭꼬치, 돼지껍데기, 철판스테이크, 복지리, 통북어,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낡은 당구장, 서지 않는 택시 같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였고(여자친구가 참여한), 그리고 영화였다(내가 연루된).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 처음 가는 충무로 역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나를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화. 영화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영화가 아니라는 게… 4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소굴, 왕관을 다투는 시장, 배움의 장소—말하자면 감정교육, 많은 사람들의 오락, 일부 사람들의 직업, 어떤 사람들의 열정, 여기저기서 채취해 온 1-2시간의 소재, 별 아래서 보내는 온종일, 대낮 같은 밤, 어두운 밤으로 빨려드는 불빛,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토론, 계속되는 이야기들, 역사의 단편, 움직임-지속의 덩어리, ‘현실’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 설정(현실을 회피하시오, 그러면 현실이 당신을 따라가고, 현실을 따라가시오, 그러면 현실은 당신에게서 도망간다!), 위험할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는 영화 속의 얼굴과 신체들, 진부하거나 기상천외한 대상들과 풍경들, 마치 우리가 항상 살았던 듯한 느낌을 갖는 상상 속의 저택과 또 다른 화려한 저택들, 일시적인 경험, 은밀하고 격렬한 열정이나 몸짓들, 나를 끌어들이고 빨려 들게 하는 방식, 또는 단숨에 혹은 한순간에 불확실하거나 형성중인 사고나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사회, 사람들이 말한 것, 타인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꿋꿋한 시선… 5 나는 이 목록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브루스 윌리스와 니콜라스 케이지. 내게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다. 동시에 내게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기도 하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블록버스터와 컬트무비와 허섭쓰레기를 오가는 그들의 긴-긴 필모그래피에서 함께 출연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그나마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 플래닛 테러 >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를 ‘동시상영’으로 묶은 <그라인드 하우스> 중간에 삽입된 4편의 가짜 영화 예고편 중에서 롭 좀비가 연출한 <나치의 늑대여인Werewolf Women of the S.S.>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경우가 가장 근접함). 따라서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2022년 3월 31일은 영화가 죽은 날(the day the movie died)이다. 적어도 반쯤은 그렇다… 6 충무로를 다시 찾은 건 『마테리알』이 주최한 릴레이 발표대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4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모두 여섯 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 독립 영화 사운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 최지영(사운드 디자이너)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개의 창을 틀어놓고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윤아랑(비평가) 일요일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 /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인)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 강덕구(작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자) 해적질과 영화 문화 / 한민수 모두 매력적인 주제들 가운데서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였다. 때마침 JD와 나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같은 이름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관객수로 줄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들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영화를 우리가 ‘발굴’한 것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행사 안내 페이지를 캡쳐해서 JD에게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질문에 "화산고"라고 대답한 학생은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차라리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면 괜찮았을까...?' 수치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 사춘기 청소년은, 결국 유사-스노브로 성장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화 경험의 근원에는 "비천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원고를 위해 저는 여기에 가야겠어요, 그리고 어쩌면 임창정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네요, 쓰고 싶지 않지만요. 쏘옥, 소리와 함께 아이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답장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작성 중이라는 말풍선조차 뜨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오픈 스페이스 날짜가 원고 마감일 이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7 왜 모든 영화 관련 이벤트(GV, 강연, 세미나, 기타 등등)는 내가 가기 힘든 시간만 골라서 열리는지 모르겠다. 씨네필들은 가정이 없나? 아니면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살아가거나… 다네는 말한다. “영화 팬은? 헛되이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는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며, 프로다운 ‘영화 팬(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들이다.” 뢰트라와 기그는 여기에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아주 늦게 도착하는 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이 영화 팬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나는 영화-어쩌고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영화 팬의 핵심을 수행하긴 했는데,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내가 차를 몰고 갔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다. 오픈 스페이스를 마치고 처갓집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화빌딩과 매일경제본사 사이에 있는 노상공영주차장(주말과 공휴일에는 무료개방)에 주차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저렴한 금액으로) 주차할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극동빌딩 (현)남산스퀘어빌딩에 차를 세우고 오픈 스페이스가 열리는 대한극장 뒷골목의 서울지역영화교육허브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도 더 늦은 시간이었다. 문앞에 선 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르면 첫 번째 발표에는 2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 을 지으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발표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맨 앞자리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으며… 8 한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표가 끝나버렸다. 스탠리 카벨은 누구나 자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이 시간과 장소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 자신의 역사가 펼쳐져서 이 방에, 이 길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을 잠깐이나마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지만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윤기를 보았고—나와 그는 JD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실은 나와 ‘트친’인 영화평론가이고, 그밖에도 이 좁은 장소에 내가 타임라인에서 보아 왔던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기이함the uncanny은 영화에서는 보통의 경험이다, 라고 스탠리 카벨은 계속해서 쓴다. 도주, 구출, 우연의 만남이나 근처에 있는 탓에 인생이 변모해버리는 것—이러한 우연과 만남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연한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 뿐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건 또 아닌데, 모든 만남은 크건 작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백 편의 ‘비천한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제법 높은 확률로… 9 카벨은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화를 모른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다. 카벨 스스로 이미 ‘보통의 영화’와 ‘높은 레벨의 영화’를 구분 짓고 있는 판에 하물며 ‘비천한 영화’는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진 것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몰려 있는 비천한 영화들, 혹자는 OCN 영화들이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영화 경험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복원시킬—비평적 공론장으로 끌어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왔고, 현재의 영화 담론이 특수한 세대적 경험을 보편으로 인준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의 언어로 끌어들여 담론장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00년생이어서, 02년생이어서, 90년대 후반생이어서 오늘 언급된 < 달마야 놀자 >, < 신라의 달밤 >, < 두사부일체 >, < 조폭 마누라 > 같은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10 항상 12살 짜리가 있는 법이고 그들에게 맞는 책이 역시 있는 법이다. 스탠리 카벨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이 아닌 다음에야, 예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어지는 카벨의 목록: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전함 바운티>, <십자군>, <유니온 퍼시픽>, <새벽의 성찰>, < 캡틴 블러드 >, <알제리>, <찰리 챈>, <폭풍의 언덕>, < 스텔라 달라스 >, <킹스 로우>, <교수와 미녀>, 로날드 콜만의 < 젠다성의 포로 >, < 마음의 행로 >, < 잃어버린 지평선 >, <후아레즈>, <데드 엔드>, <모히칸족의 최후>, <부러진 화살>, <장군, 새벽에 죽다>, <밀드레드 피어스>, <오페라의 유령>, <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 >, <비에 노래하며>, < 캣 피플 >, <환상의 여인>, <도시의 절규>, <안녕, 내 사랑>, <화이트 히트> 등 그밖에 백 여편의 다른 영화들. 카벨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영화들과 보낸 시간은 정말 전율의 시간이나 나날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아주 일순간이었다. 기억과 회상에서만 포착 가능한 시간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카벨은 지금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 동감 >, < 번지 점프를 하다 >, < 친구 >, < 엽기적인 그녀 >, < 킬러들의 수다 >, < 공공의 적 >, < 결혼은, 미친짓이다 >, < 후 아 유 >, < 라이터를 켜라 >, < 연애소설 >, < 광복절 특사 >, < 품행제로 >, < 클래식 >, < 동갑내기 과외하기 >, < 선생 김봉두 >, < 와일드 카드 >, < 싱글즈 >, < 오! 브라더스 >, < 황산벌 >, < 그녀를 믿지 마세요 >, < 어린신부 >, < 효자동 이발사 >, < 늑대의 유혹 >, < 바람의 파이터 >, < 시실리 2km >, < 알포인트 >, < 슈퍼스타 감사용 >, < 귀신이 산다 >, < 말아톤 >, < 잠복근무 >, < 혈의 누 >, < 사랑니 >, < 광식이 동생 광태 >, < 태풍 >, < 작업의 정석 >, < 싸움의 기술 >, < 흡혈형사 나도열 >, < 음란서생 >, < 달콤, 살벌한 연인 >, < 사생결단 >, < 구타유발자들 >, < 천하장사 마돈나 >, < 미녀는 괴로워 >, < 1번가의 기적 >, < 좋지 아니한가 >, < 이장과 군수 >, < 즐거운 인생 >, < 스카우트 > 기타 등등… 이것은 내가 왓챠피디아에 평가한 1499편의 영화 중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구작순으로 필터링한 것 중에서 봉, 홍, 박, 이 등의 작품과 여기에 제목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작품을 빼고 나열해본 것이다. 모든 영화가 내게 전율을 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두 장면이라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 역시 빙크스 볼링처럼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11 다시. 문제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말하느냐다. 카벨은 모든 시대의 12살에게 맞는 공통의 책들이 있는 반면, 서로 다른 시대의 12살에게는 그때그때의 영화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걸작 리스트는 공유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거나 비천한 영화들의 리스트는 공유 불가능한 게 아닐까(“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구분처럼, 걸작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스투디움의 영역이지만 비천한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푼크툼 같은 게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걸작을 나열하지도, 천만 영화 목록을 훑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한국 사람… 12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오픈 스페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 현장을 찍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다. 에세이 필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영화 그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근 케이지는 <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미친 능력 >에서 한때 잘나가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빚더미에 올라 아무 영화나 막 찍는 ‘닉 케이지’를 연기했다. 그가 자신의 광팬이자 억만장자 마약왕인 페드로 파스칼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라는데 내가 본 건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짧은, 그러나 영감으로 넘치는 클립이다. 으리으리한 페드로 파스칼의 집. 파스칼이 소파에 앉아 있는 케이지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케이지 고마워. (사이) 말 좀 그만 돌리고 대답해봐.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대체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파스칼, 결심한듯 내뱉는다. 파스칼 패딩턴 2 . 비명을 지르며 잔을 내려놓는 케이지. 케이지 뭐?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랑 <패딩턴 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은,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칼 영화 보는 내내 울었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케이지 야, X까! 장면 바뀌면, 화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 케이지의 모습. 나는 JD에게 링크를 보내고, 기다린다.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다음 책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영화를 생각하다](장 루이 뢰트라.수잔 리앙드라 기그, 김영모 옮김, 동문선, 2005) [눈에 비치는 세계](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이모션북스, 2014)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문화영화는 특정한 사상의 전파와 일반 대중의 계몽 혹은 지식의 전파를 증진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각종 형태의 영화를 일컫는 용어이다. 보통은 관에서 주도하여 제작한 홍보영화와 계몽영화 등이 이러한 범주 안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영화의 상영은 관에서 조직한 활동사진반의 순회영사 등을 통해 무료로 상영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문화영화를 통한 시국선전활동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1939년 제정된 일본영화법 15조에서는 문화영화에 관한 규정을 두어 그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도 문화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조선문화영화사, 조선문화영화협회와 같은 영화제작회사가 설립되었고 조선영화사와 고려영화협회 같은 기존 극영화제작사에도 문화영화부가 설치되는 등 기존의 영화회사도 문화영화 제작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문화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의 설립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문화영화 전용관의 설립은 기존에 영화관 출입이 어려웠던 학생 관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일본정부가 든 문화영화관 설립의 주된 이유는 정부에서 지정하는 문화영화 혹은 각 지방 장관이 문화영화로서 추천하는 영화를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널리 구경시켜 지적인 면을 함양케 하는 동시에 정서 교육으로 많은 도움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문화영화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도 문화영화 관람 기회를 늘리기 위해 문화영화관 설립이 가시화 된다. 조선에서 문화영화관은 백화점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일반 영화관처럼 대극장이 아니어도 괜찮을 뿐더러 많은 관객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도 고려되었다. 당시 백화점 업계에서는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지속적인 불황을 타개하려 백화점 내에 극장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국의 문화영화관 설립 움직임과 맞아 떨어지면서 백화점 안에 영화관 설립이 추진된다. 1939년 서울의 백화점들은 상품선전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영업방식을 강구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 백화점으로 알려진 미쓰코시(三越),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아(丁字屋) 등 남촌의 세 백화점은 연합하여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영화관을 지어 일정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무료입장권을 제공해주는 계획을 세운다. 문화영화관 설립을 추진 중이던 조선총독부는 백화점 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치하는 것을 허가해 준다. 총독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립, 많은 이들이 시국선전용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1939년 12월 23일,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경일문화영화극장이 준공되어 개장식을 거행하였다. 경성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이 영화관은 200석의 좌석을 가졌으며 어른 20전, 군인과 소학생은 10전씩 요금을 받았으며 매일 오전 10시 개관하여 <경일세계 뉴-스>와 <요미우리신문 뉴-스>와 같은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관에서 문화영화를 감상한 임화(林和)는 극장의 규모가 좁아서 기분이 아담하고 저렴한 가격, 상대적으로 짧은 상영시간(1시간 반), 아이들과 어른들 누구나 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프로그램과 같은 장점들을 나열한 후 북촌에도 조선어신문사가 운영하는 이런 문화영화관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문화영화가 극영화 중심의 재래영화의 신생면의 하나라면 문화영화극장은 영화흥행 및 감상에 새로운 경지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임화, ““뉴-스”와 만화 경일문화영화극장“, 《매일신보》, 1940.2.9.) 라며 문화영화관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남촌의 백화점이 적극적인 영업정책을 세우자 북촌에 자리한 화신백화점도 백화점 6층의 다목적 홀을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으로 개조하여 영업활동에 이용하기로 한다. 1940년 5월 28일 화신백화점 6층에 개관한 화신영화관은 경일문화영화관과 마찬가지로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비롯해 각종 선전영화들을 상영하게 된다. 1940년 11월 1일부터는 문화영화가 모든 극장에서 강제상영 된다. 아울러 조선 내에서 문화영화 제작도 활발해진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도 문화영화관의 설립이 추진되는데 1941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상인천역 앞의 400여 평에 현대식 건축물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를 상영할 극장을 세웠다. 경일영화문화관과 화신영화관 같은 문화영화 전용관이 들어서면서 백화점 업자들은 극장을 운영하는 것에 더해 독점적 영화제작이나 영화배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장기화를 이유로 영화산업의 신체제를 천명하고 독점화로 산업재편을 꾀하자 백화점업자들은 이 독점기업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경성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다나카 시계점을 운영하던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郞)를 중심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이 당시 조지야백화점의 고바야시 겐로쿠(小林源六)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朴興植) 등이 발기인 겸 주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화영화관을 운영하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각각 독점적 영화배급사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설립될 당시에 자본금 총 15만원 중 각각 2만5천 원씩을 투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선전활동의 주요한 장소로 큰 역할을 담당했던 문화영화관들은 해방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중 화신영화관은 일반상영관으로 전용되었으며 경일문화영화극장은 폐관 되었다. * [사진](상단) 미나카이백화점 뒷편 경일문화영화관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12.24. 경일 ( 京日 ) 문화영화극장 준공되어 성대히 개관 본정 ( 本町 ) 삼중정 ( 三中井 ) 백화점 뒤에 짓기 시작하든 경일문화영화극장 ( 京日文化映畵劇場 ) 은 저간에 준공되어서 23 일 개장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 이 영화극장은 반도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 전당으로서 각 방면에서 오래전부터 긔대하던터이라 개장하는 날 각 방면 인사가 만히 와 관람하얏는데 좌석은 200 명을 수용할 수 잇고 입장료금은 어른 이십전 , 군인과 소학생은 십전씩이며 매일 오전 열시부터 개관하는데 경일세계 『 뉴 - 스 』 와 독매 ( 讀賣 ) 신문 『 뉴 - 스 』 문화영화와 밋 만화 등을 상연한다고 한다 . ( 사진은 경일문화영화극장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3.07.23. 예술가들도 총동원 , 호화롭게 전개될 징병축하행사 오는 팔월 일일부터 일주일간에 걸쳐 전개될 징병제 실시 감사의 기ᄲᅳᆷ은 전 동아에 펼쳐질 것으로 이 경축행사의 감격은 바야흐로 반도에 물 ᄭᅳᆯ듯 이러나고 잇는데 경성에서는 조선연맹 , 경기도연맹 , 경성부 등 삼연맹의 주최로 문화행사를 거행하기로 되엇다 . ▼ 팔월 삼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경성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조선영화배급회사 , 조선음악협회 , 조선축음기제조협회 찬조로 음악과 영화의 밤을 개최할 터인데 제일부 음악데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연주와 이인범 ( 李仁範 ) 씨의 국민가요 독창 , 현제명씨의 군가독창 등이 잇고 영화부에는 조선시보 , 일본 『 뉴 - 스 』 , 무적전차 ( 無敵戰車 ) 공의 신병 ( 神兵 ) 의 상영이 잇슬 터이다 . ▼ 그 이튿날 사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연극협회 , 조선문인보국회 , 조선영화제작회사 , 조선축음기제작협회 협찬으로 연극과 낭독의 밤을 열 터이다 . 영화극으로 조선해협 ( 朝鮮海峽 ) 의 상연이 잇슬 터인데 이 극에는 조영배우 일동이 출연하고 연극으로는 제일악극대 ( 第一樂劇隊 ) 의 『 격멸하고야 만다 』 일장의 상연이 잇게 되엿는데 참관 희망자는 이십육일ᄭᅡ지 왕복엽서로 조선연맹문화과에 신청하여 주기 바란다 . ▼ 그리고 미술과 문학전람회는 팔월 일일부터 칠일간 삼월 ( 三越 ) 백화점 조선 미술협회 조선문인협회 협찬으로 문인보국회 동인의 작품을 미술가들이 붓을 든 작품전시와 육해군에 관한 회화와 만화의 전람회를 개최할 터이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1.02. 고려영화 신작 풍년가 스틸전 ( 展 ) 정자옥 ( 丁字屋 ) 서 개최중 고려영화 신작 방한준 『 씨나리오 』 , 연출 金井成一 카메라 , 『 풍년가 』 는 저간 경성서 제작종료 하야 십월 중순경 방한준씨가 원판을 동경으로 가저가 전부 완료하야 래 ( 來 ) 오일 『 프린트 』 와 함께 귀성하기로 되엿는데 , 이에 압서 고영 ( 高映 ) 선전부에서는 지난 삼십일일부터 삼일간 확대 『 캐비네 』 백여점을 정자옥 사층 홀에 진열하고 『 풍년가 』 스틸전람회를 개최중이다 . 동 『 스틸 』 전람회는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잇는데 오전 중에는 출연배우 김신재 , 최운봉 , 전택이 제씨가 『 푸로마이트 』 에 싸인을 해주기로 되어 잇는데 방금 신곡감사제 ( 新穀感謝祭 ) 로 풍년제를 각 기관에서 거행 중인 이ᄯᅢ 영화 『 풍년가 』 는 큰 의의를 가진 작품으로서 그 봉절이 자못 기대되어 잇다 . ( 사진은 스틸 전람회장 ) [ 자료 ] 《동아일보》 , 1940.05.28. 화신 ( 和信 ) 영화관 입팔일 ( 廿八日 ) 부터 개관 , 화신백화점 ( 和信百貨店 ) 에서는 뉴 - 스 영화관을 계획 중이엇는데 요즈음 준비가 되어 이십팔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상영영화는 내외 뉴 - 스 급 문화영화 등으로 장안 종로 일대에 영화오락기관의 한 거름을 앞서 뉴 - 스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제공하기로 되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