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아제한
- 감독
- 엄심호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최남현, 김진규, 이대엽, 허장강, 문정숙, 한미나, 조용수, 한은진, 양미희, 김동원, 최승희, 고선애, 최명수, 차혜정, 이향자, 김희갑, 서경희, 정정희, 박태석, 지방열, 김희복, 김웅, 이용, 김진, 함국절
<화려한 외출> 에서 오프닝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기이하다. 한적한 도로를 지나는 승용차 한 대를 지켜보던 카메라는 이윽고 달리는 자동차에 들러붙어 탈 것의 시선으로 도시의 속도감을 전한다. 승용차와 함께 고층 빌딩 앞에 당도한 뒤에는 건물의 위용을 자신의 시야에 담으려는 듯 잠시 위를 올려다보고는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 앞에 미리 대기하던 일군의 무리는 마치 상사를 모시듯 깍듯이 에스코트한다. 카메라는 이제 하나의 캐릭터가 된 셈이다. 아직 한 번도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주인공의 시선을 카메라는 완벽히 대체한다. 집무실에 당도한 뒤에야 카메라는 시선의 주인인 주인공 공도희( 윤정희 )와 분리되는데, 그는 의외로 자그마한 여성이다. 의외성은 단지 여성 주인공이 관객의 남성화된 인식을 깨고 들어오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핸드헬드로 찍힌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간의 시선을 대체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중한 카메라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카메라의 시선은 그저 카메라의 시선일 뿐이다. 매끈하게 봉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누구의 시선으로 환원되지 않은 텅 빈 물체로서 카메라가 분명히 존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인공의 이름인 ‘공도희’는 어쩔 수 없이 비어 있다는 의미의 ‘공’(空)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카메라라는 물질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적합하다. 카메라와 공도희의 시선이 합치되었을 때 카메라의 시선이 공도희의 시선을 대변한 것이라 자동적으로 인지하게 마련이지만, 어쩌면 카메라가 공도희에게 존재 재현을 위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텅 빈 물체로서의 카메라가 공도희의 시선과 일체화되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존재화하는 건 공도희가 아니다.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를 에스코트하던 사람들이 그렇듯, 카메라 밖에서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야말로 카메라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다. 이들은 내러티브상으로는 공도희의 기억과 시선에 비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로 카메라를 향해 위협하거나 경계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존재론적인 이야기로 확장하자면 존재는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바깥에 있다. 공도희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시공간 속에서 실종되었다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는 존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공도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설정은 단지 모호한 현실의 경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애초에 공도희를 공도희로 만들었던 것도, 공도희를 다시 김명자로 만들었던 것도, 오직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에 외친 공도희의 마지막 말이 “나를 찾아주세요”인 것은 존재의 결정권이 타인에게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김수용 감독이 이러한 설정을 극단으로 끌고 갔다면 아마도 <트루먼 쇼>(1998)가 한국에서 먼저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트루먼 쇼>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이들을 통해 통째로 연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화려한 외출>은 그것이 연출된 것인지, 공도희의 망상증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다만 모호하다. 영화가 공개되던 당시 메시지가 모호하고 연출이 미숙하다는 혹평을 불러오기도 했던 이 모호함은 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꿈과 현실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은 이유는 <화려한 외출>의 목적이, <트루먼 쇼>가 그렇듯 존재를 잃어버린 인물이 존재를 찾는 것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공존, 혹은 흔히 비존재라고 생각한 것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영화는 더 치중한다. 카메라라는 비존재의 시선을 분명히 드러낸 영화의 도입부가 단적인 예다. 공도희라는 존재가 비존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안,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이 영화가 드러내려 한 비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비밀스럽게 드러나는 존재는 공도희의 쌍둥이 자매다. 쌍둥이 자매는 공도희의 꿈에서 아기 무당으로 등장하는데, 그녀를 찾는 여정이 결국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을 상징화한 공간으로 이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분명히 믿기 힘든, 비가시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포함한 비존재들은 어쩔 수 없이 낙후되거나 뒤처진 것으로서의 전근대성에 포섭된다. 영화는 근대를 옹호하거나 전근대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근대의 어떤 측면을 강하게 옹호한다. 관련해 주목할 지점이 있다. 태아의 존재를 영화가 다루는 방식이다. 태아는 한번은 이미지로, 다른 한 번은 그에 관한 언급 속에서 드러난다. 전자는 상징적이고, 후자는 꽤 직설적이다. 공도희의 눈을 향해 줌인하던 카메라의 초점이 흐려진 자리에, 안구 단면을 연상시키는 자궁 속 쌍둥이 태아 이미지가 뚜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내러티브상으로는 공도희가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쌍둥이 자매를 상상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여성 지도자의 연설에서 드러나는 임신중절에 대한 분명한 거부야말로 그 이미지의 진짜 목적인 것 같다. 1970년대 산아제한의 명목으로 임신중절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장면은 근대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꼽는 동시에 이것이 전통적인 여성의 업무라고 인식되어 온 임신, 출산에 끼칠 영향을 근심한다. 어쩌면 영화가 지닌 진짜 모호함은 특히 인텔리 여성의 등장을 둘러싼 근대에 관한 애매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제목 ‘화려한 외출’은 공도희가 존재를 삭제당하는 동안의 부재를 ‘외출’이라고 표현하자, 신문 기자가 약간은 반어적인 의미로 뽑은 기사 타이틀이다. 공도희의 화려한 외출을 막는 것은 공도희에 반해 자신의 존재를 강변하는 그 모든 비존재다. 왜 이제 막 비존재에서 존재로 이동하려는 여성은 다른 층위의 비존재로서의 전근대에 사로잡혀 그것과 갈등하도록 강제되는가. 영화가 향해간 곳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적인 지대다. 그런 의미에서 <화려한 외출>은 근대를 돌아보는 작품인 동시에 예언적인 텍스트다. 주체의 자리를 비워놓아 그 안에 누구든 자신을 대입해볼 수 있는 텅 빈 물체처럼 <화려한 외출>은 씁쓸한 의문점을 남긴 채 거기 있다.
바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산아제한을 주제로 한 특집극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지? 옛날에 나도 한 편 본 적이 있다. 어떤 내용인지는 다 잊어버렸지만 후반부에 감옥에 갇힌 아들이 징징 짜면서 엄마를 욕하던 장면은 기억난다. “책임도 지지 못할 거면서 왜 저를 낳았어요!” 보면서 “작가가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 때문에 고생이 상당했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임희재 가 < 마부 >와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의 각본을 쓰기 1년 전에 쓴 < 산아제한 >을 읽으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도 저것과 비슷한 주제의 공익영화였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지. 이 나라에서 1960년이 얼마나 옛날인지 깜빡했던 것이다. 최남현 이 연기하는 주인공 고철민은 30년 경력의 여고 교사이다. 아들이 셋이다. 허장강이 연기하는 첫째는 방구석에서 돌덩이만 끌어안고 사는 광산 엔지니어다. 김진규 가 연기하는 둘째는 ‘원고지 허구 승갱이만 하’는 각본가다. 이대엽 이 연기하는 셋째는 건축학도다. 아들 둘은 모두 유부남이다. 첫째는 애가 셋. 둘째는 애가 둘인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아기를 낳아 역시 셋이 된다. 아들 둘은 직장이 없고, 막 취직한 막내는 아직 회사에서 봉급을 못 받는다. 계산해보라. 고철민이 버는 교사 봉급으로 13명이 먹고 살아야 한다. 인물 관계도 물론 이 영화는 코미디다. 약간의 과장은 허용이 된다. 그리고 5, 60년대에는 정말 저런 대가족이 그렇게까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이런 대가족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세계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나 역시 그렇다. 어떻게 경제적으로 저게 가능한가? 고철민은 산아제한의 지지자다. 학교에서도 자기주장을 설파하는데 그 때문에 교장에게 불려가 “신성한 교단에서 사춘기 여학생을 상대로 산아제한에 대한 강의를 한다는 것만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꾸중을 듣는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는가. 엄청나게 옛날이라고. 당시 사람들에겐 산아제한은 학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음란한 주제였던 거다. 참, 이 영화가 얼마나 괴상한 옛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 고철민 선생이 가르치는 여학생들은 대부분 산아제한에 반대였음을 밝히는 바다. 그 중 한 명은 심지어 이렇게 반박한다. “선생님,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말하자면... 휴머니즘의 반역자가 되시겠습니까?” 당시 여자아이들이 정말 그랬는지, 이게 1919년생 아저씨가 50년대 후반 여자아이들의 대사와 사고방식을 상상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난 후자라고 믿고 싶다. (제발 후자라고 해달라.) 학생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고철민은 절박하다. 집에 들어가 보면 허장강 , 김진규 , 이대엽 이 아들이라고 버티고 있는 꼴을 상상해보라. 게다가 며느리가 둘이고 손주가 각각 셋이다. 광산과를 나와 돌멩이에 미친 허장강 아들은 그래도 아버지가 모르는 계획과 비전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애가 셋인 김진규 아들의 경제관념과 가치관은 대략 이 문장 하나로 요약될 수 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것은 정신이 틀린 일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이 생겼다고 “생산은 하늘의 섭리야! 뭐, 걱정할 거 없어!” 이러고 앉았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뭔가 해야 한다. 드디어 고철민은 가족을 모두 모아놓고 선언한다. “각자의 자립경제의 토대가 설 때까진 무책임한 산아를 방지해야 할 것이란 말이야. 그 길만이 우리 집안의 경제적 위기를 모면해 나갈 수 있는 길이란 말이야.” 옳은 말이다. 이 상황에서 애를 또 낳는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지. 하지만 그의 해결책은 과학적인 피임이 아니라 집안의 남자들과 여자들을 분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린 고철민에게 산아제한이란 철저하게 추상적인 개념으로, 피임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사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각본이라면 당연히 고철민의 명령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상상하고 이를 통해 코미디를 연출해야 할 텐데, 정작 임희재 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 대신 그가 그 뒤로 (고철민의 명령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아들들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첫째는 엄청난 노다지가 될 광석을 찾아내 현장 엔지니어로 취직이 된다. 둘째는 아버지와 가족을 모델로 한 < 산아제한 >이라는 극본을 써서 당선된다. 셋째는 아버지가 뭐라건 그냥 결혼을 해버린다. 쓰다 보니 “어 내가 쓰던 건 이 이야기가 아닌데?”란 생각이 들었는지, 임희재 는 산아제한 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개 추가한다. 부부생활을 안 하다 보니 집안 분위기가 나빠졌고 결국 아내들은 다들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는 동안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고철민의 아내 오 여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을 배경음악처럼 읊고 있다. 원각사에서 <산아제한> 연극이 공연된다. 당연하지만 연극 이야기는 고철민과 가족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단지 연극 속 둘째는 더 가차 없어서, 아버지를 미치광이로 몰며 청량리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고 악을 쓴다. 당연히 고철민은 애비 욕을 썼다고 화를 내지만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성질을 부리지도 못한다. 연극이 끝나고 둘째가 나와 아버지에게 모든 영광을 바친다는 말도 안 되는 인사를 한 뒤로는 더더욱. 결국 그는 연극이 끝나고 졸도하고 만다. 각본에는 미안함과 흥분 때문이라고 나와 있지만 설마 그러려고. 막내며느리가 쌍둥이를 출산한 날에 고철민은 죽는다. 암만 봐도 아버지의 약한 심장을 겨냥한 둘째의 완전살인인데 아무도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죽으면서 고철민은 “왜 이 방에 가득 차게 아이들을 못 두었을까”라고 한탄하는데, 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당연히 죽어가는 영감의 한탄보다 멀쩡할 때의 생각이 더 중요하지. 하지만 영화가 주제로 내세우고 싶은 건 전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처음부터 산아제한에 반대하는 영화였던 거다. 산아제한은 생명에 반하고, 본성에 반한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두라. 물론 이 각본을 쓰던 임희재는 경제적, 사회적 압박 때문에 스스로 출산을 포기하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콘돔 없이 섹스하며 애를 순풍순풍 낳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