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부른다
- 감독
- 토마스 살바도르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토마스 살바도르, 루이즈 보르고앙, 마틴 슈발리에, 앙드라니크 마네, 로랑 푸아트르노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햄릿이 연출한 선왕 시해의 비밀이 담긴 극중극 《곤자고의 살인》이 나온다. 햄릿은 공연을 위해 극단원들에게 연기를 지도한다. 햄릿: 부탁하건대 그 대사를 읊을 때 내가 보여줬던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고함에 과장에 야단법석을 떨 바에는 차라리 장사꾼에게 배역을 맡기겠어. 손놀림도 허공을 휘젓지 말고 점잖게 움직여야 해. 폭풍처럼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평정을 잃어서는 안되네. (…)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워서도 곤란해. 각자 맡은 역할에 신중을 기하고 행동에 어울리는 말을 하고,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하게.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알겠나? 햄릿이 연기에 대해 피력한 견해들은 16세기 영국의 연기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담고 있다. 햄릿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생각한 당시 연기술과 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그리고 추구하는 연기술을 집약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에 작가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것을 작가의 자기반영적 기법이라고 한다. 몇 가지 예시를 더 살펴보자.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는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관찰자이므로 화폭에서 모델이 될 수 없는 작가가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한 것은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의사 출신인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작품마다 의사 역을 넣어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위폐범들』에서 주인공 에두아르를 「위폐범들」을 집필하는 소설가로 설정한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일기와 수첩에 「위폐범들」의 창작에 관한 구상을 기록하는데, 여기서 수첩의 내용은 지드의 실제 작품일지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작가가 등장하거나, 페르소나를 통해 작가의 견해를 대변하거나, 작품 속에 작품 제작에 관한 내용을 드러내는 것 모두 자기반영적 기법이다. 이는 작품 밖 작가 차원의 영역을 작품 안에 개입시키면서 작품 스스로 허구임을 드러내고, 관객은 작품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모호한 상태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즉, 작품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작품을 견인해 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잘 드러난다. 초창기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며 영화 안에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욕망의 법칙>에서 계산원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에서는 주인공들이 보는 TV속의 배우로 나타나 관객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하다가 작품에 등장한 감독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각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작품에 영화감독 역을 등장시킨다. <욕망의 법칙>, < 욕망의 낮과 밤 >(원제: 나를 묶어줘!)에서는 상대에 대한 집착과 욕정을 가진 감독으로, < 나쁜 교육 >에서는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을 그렸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 >는 감독 역할에 알모도바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기 시작한 작품이다. 영화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 扮)가 시각장애인이 된 다음에 온전히 음성으로만 듣고 편집한 장면을 돌려보는 앤딩의 대사는 마음을 울린다. “중요한 건 영화를 끝내는 거야. 비록 앞이 안 보여도 영화는 끝을 봐야 해.” 2020년 작 < 페인 앤 글로리 >는 알모도바르가 자기반영적 기법을 집약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는 영화를 두고 “나의 70년 인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영화의 포스터는 주인공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 扮)의 그림자를 알모도바르의 그림자로 배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자전적 영화임을 드러낸다. 알모도바르는 배우 반데라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세트를 재현했다. 심지어 미장센으로 사용된 살바도르의 부모님의 사진을 자신의 부모님 사진으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감독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나 어머니와의 관계, 건강상태 역시 알려진 사실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1) 2) 1)<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살바도르의 그림자는 알모도바르이다. 2)<페인 앤 글로리> 살바도르의 어머니 방에 있는 가족사진은 알바도르의 실제 부모님(안토니오 알모도바르와 프란체스카 카바예로)의 사진이다. 영화는 살바도르의 현재,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꿈, 그리고 첫사랑에 관해 고백하는 연극이라는 세 가지 구조를 통해 전개된다. 현재의 살바도르는 척추 융합 수술 후유증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의지를 상실한 휴직상태의 영화감독이다. 32년 전 개봉한 자신의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 한 기념으로 영상자료원에서 상영과 GV를 제안하는 바람에, 영화 이후 인연을 끊은 <맛>의 주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扮)와 3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알베르토로 인해 접하게 된 헤로인은 살바도르를 어린시절 고향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살바도르에게 영화적 감수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카톨릭 학교는 무신론자가 되게 하는, 미장이 형 에두아르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하는 계기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꿈에서의 어린 시절은 현재의 살바도르의 모든 원천이자 심연의 일부인 것이다. 살바도르의 자전적 이야기인 극중극 《중독》은 살바도르의 청년 시절, 동성애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모노로그 형식으로 전하는 연극이다. 살바로드의 집에 방문한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가 집필한 《중독》을 읽게 되고 매료되어 연극 무대에 올릴 것을 제안한다. 처음에 살바도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고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하나, 결국 알베르토의 뜻대로 대본을 넘겨주며 자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살바도르는 연극 무대와 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한다. 살바도르: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게 좋겠어. 스크린 하나, 의자 하나. 팔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의자에 앉아. 알베르토: 팔다리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거든! 살바도르: 수정하고 나서 좀 멜로드라마틱 해졌어. 알베르토: 걱정마, 내 전공이 멜로드라마니까. 멕시코에 있었던 게 도움이 되겠네. 살바도르: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감정을 좀 죽여야돼. 감정을 조절해. 울지마 배우들은 울 기회만 있으면 울더라. 잘 하는 배우는 눈물 흘리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니까. 알베르토: 뽀뽀해줘야겠다. (…)이번엔 셰익스피어도, 체호프도, 로르카도 아냐. 너를 연기하는 거야. 살바도르: 이상하게 하면 내 기분이 엉망이 될 거야. 잘 하면 훨씬 더 엉망이겠지. 《중독》에서 자신의 역을 맡은 알베르토에게 원작자로서 지시사항을 전하는 부분이다. 살바도르의 연극에 관한 견해는 곧 알모도바르의 견해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 것처럼, 알모바르도는 자전적 영화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를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내비치고 있다. 《중독》 무대에는 살바도르의 조언대로 스크린을 하나 놓았는데 그것을 통해 어린 시절 살바도르가 살던 동네, 보던 영화, 연인과 갔던 추억의 장소 등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비춘다. 이는 실제 알모도바르의 장소이기도 하다. 감독은 현재의 살바로드, 꿈속 어린 살바도르, 연극의 알베르토를 통해 자신을 대리하게 한다. 관객은 세 가지 버전의 알모도바르를 중첩시키면서 영화 내내 알모도바르를 상기하게 된다. 영화의 디제시스는 독립적이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정수는 앤딩 장면을 통해 구축된다.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한 살바도르는 다시 꿈을 꾸고, 영화 초반 등장한 기차역 꿈 장면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줌 아웃 되면 붐 마이크를 들고 있는 스텝과 바닥의 조명판이 드러나고, 살바로드가 컷을 한다. 스텝이 등장해 마지막 슬레이트를 치는데, 슬레이트에 적힌 영화 제목이 <첫 번째 열망>이다. 이 장면은 살바도르가 영화감독으로 제기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영화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준 모든 내러티브가 촬영의 일부였음을 암시하게 한다. 즉,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수미상관의 구조를 갖춤으로써 영화 속 세계의 층위가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구성을 취하는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실제를 바탕으로, 영화제작 과정, 영화적 현실, 꿈 그리고 연극이 상호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과 같다. 막이 내려도 관객은 영화의 무한 순환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총 망라되어있는 영화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현실을 순환시키며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유니버스에 관객을 가둔다. 팩트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상태, 그의 영화는 팩션이다. 어머니: 그 이야기꾼 표정하지 마라. 이런 얘기 네 영화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웃들 이 영화에 나오는 건 싫어. 난 팩션이 싫단다. 살바도르: 팩션에 대해 뭘 아신다고! 어머니: 네 인터뷰에서 들었다. 이웃들도 영화에 나오는 건 싫을 거야. 시골 무지렁이처럼 표현한다고 생각할거다. 살바도르: 말이 왜그래요 엄마. 존경과 정성을 담아서 표현하는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엄마 얘길 한다고요. 엄마와 이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요. 전부 그분들 덕택이라고 하는데.. <페인 앤 글로리> 중. 지금까지 영화와 영화를, 영화와 연극을,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연결하며 형성하는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1편 「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편 「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3편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을 통해 알아보았다.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관람하고 싶어졌다면 알모도바르 팬으로서 절반은 성공했다 자평하고 싶다. 그리고 알모도바르 영화에 대해 엉켜있던 날실과 씨실이 조금은 풀렸기를... 감상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시각이 있다면 나눠주시길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최근 개봉한 < 집으로 가는 길 >을 봤다. 안타까운 사연에 눈물도 많이 났지만, 다른 면으로는 우리나라 영화도 해외 로케이션이 많이 자연스러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파리, 마르티니크 섬이 서울 쪽 연출과 어색하지 않게 연결이 되고 있었다. 프로덕션의 방식과 과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겠고 연출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으니, 한국 최초의 파리 올 로케이션 영화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 다. 제목부터... 살벌하다. 곱슬거리는 정동환 의 수염 상투를 튼 정동환 이 피리를 불고 있다. 그런데 그의 입 주변에 난 수염이 뭔가 살바도르 달리스럽기도 하고 하여간 조선사람 몸에서는 안 나올 듯한 꼬불꼬불한 수염이다. 뒤에 바라보는 외국인 부자(어쩌면 모자일지도 모른다)의 미묘한 표정은 또 뭔가. 이 한 장의 이미지가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를 대변한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은 일반 시민들에겐 요원한 이야기였다. TV, 영화를 통해 접하는 해외의 모습이 전부였을 것이다. 영화 제작 시 해외로케이션에 대한 열망은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세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채비를 갖추던 한국인. 우리와는 생김새가 다른 외국들의 땅에서 활보하는 대한 남아(혹은 여아)의 모습을 당당하게 스크린에 담아 오겠다는 야심!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는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작자는 거기 갈 생각만 했지, 가서 뭘 할지는 충분히 생각하지는 못한 것 같다. 제목이 < OK 목장의 결투 >를 닮았지만 별로 비슷한 구석은 없는 영화다. 1987년에 개봉된 강대진 감독(제작자로 유명한 강대진 감독과는 동명이인이다.)의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는 앞서 말했듯 ‘한국 최초의 파리 올로케이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지금까지 안방극장의 지지않는 해로 존재하는 정동환 과 < 애마부인 > 하나로 모든 것을 평정했던 안소영 이 투톱으로 출연한다. 정동환 과 안소영 . 딱히 이 영화의 스틸컷은 아님. 아마도 빈센트 미넬리의 < 파리의 미국인 >을 느슨하게 가져오지 않았나 싶은 이야기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파리 유학을 떠난 진호( 정동환 )는 그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하지만 그의 파리 생활을 첫 도착부터 순탄치가 않다. 그가 신세를 지기로 한 황 화백의 집에서, 과거 미대 동기이자 연인이었던 희정( 이진경 )이 반라의 차림으로 나오는 것을 본 그는 파리에서의 첫 번째 좌절을 경험한다. 그녀는 돈 많은 재일교포이자 상업 작가인 황 화백의 재력과 박력에 넘어가 그와 함께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호는 이에 실망하고 곧 혼자 레스토랑 서빙을 하면서 그림 작업에 몰두한다. 그의 열정은 ‘다다이즘 거장’ 삐숑 선생님의 마음을 열게도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달라는 진호의 부탁을 거절하자 그는 외친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삐숑 선생님의 가정부가 감동하고 3초 만에 설득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게 된다.(다다이스트들이란!) 이제 곧 개인전을 열 것 같이 꿈에 부푼 진호는, 아르바이트하는 레스토랑에서 만난 윤 여인( 안소영 )에게도 호감을 가진다. 그녀에게 모델을 제안하자, ‘사생활에 대해선 절대 묻지 말라’며 조건부로 제안을 수락한 윤여인은 급기야 누드모델까지 허락하지만, 술 취해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에게 다시는 연락 말라며 매몰차게 내친다. 그렇게 두 번째 좌절. 이후로는 좌절의 연속이다. 아니, 그냥 외국인 부랑아라고 해도 좋다. 이 부분에 대한 연출이 꽤 재미있는데, 진호는 파리 내의 관광 명소들을 골라가며 방황을 한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려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센 강 인근에서 술을 마시며 방황을 하며, 길거리에서 정치, 문화를 이야기하는 청년들에게 한국인의 세계사 지식을 뽐내기며 먹을 것은 얻어먹기도 한다. 진호의 방황을 핑계로 파리의 관광코스를 쭉 훑은 영화는 급기야 그를 프랑스인들의 새해 행사인 성 실베스트리의 날에 등장시켜 들뜬 사람들 사이에 혼자 심각하게 서서 술을 들이키게 한다. 그런 그의 방황은 한 창녀에게 이끌려 갔다가 바지가 벗겨지면서 끝난다.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 돼! 바지춤을 부여잡고 창녀의 집을 나서면서 본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순간, 진호는 자신의 방황에 대해 반성하고 정신을 차리지만, 영화를 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탄식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그림 그리기 그런 방황 중 우연히 버스킹을 하는 거리 예술가들을 본 진호는 기발한 생각을 해내게 된다. 몽마르뜨 언덕에 위치한 계단에서 한국 전통의 의상과 악기를 통해 색다른 문화를 선보이며 호객을 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명해진 진호는 파리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개인전 의뢰를 받게 되고,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이에 때맞춰 희정도 황 화백을 떠나 진호에게 돌아오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개인전은 사실 윤 여인이 뒤에서 진호를 위해 기획한 것이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한국인 미술대생의 개인전을 개최하기 위해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이다.(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윤 여인은 화랑 주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진호는 윤 여인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 충격적인 장면을 본다. 윤 여인이 사생활에 대해 알리기를 극구 꺼린 것은 장애인 남편을 수발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휠체어에 앉아 선글라스를 낀 남자를 수발하는 윤 여인을 멀리서 바라보던 진호는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랬군요. 그랬었군요. 멀찌감치서 그녀를 보던 진호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그때, 윤 여인은 진호를 불러 세우고, 둘은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유럽에 대한 예술적인 동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멜로 영화다. 물론 그 만듦새가 탄탄하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이 영화는 주인공 진호가 그렇듯 일단 외국에 나가긴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야기는 중구난방이고 인물들은 저마다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모두 헤맨다. 비밀을 가진 듯 행동하는 윤 여인의 사정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고 영화의 라스트씬에 가면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자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말하자면, 80년대 우리가 ‘외국’, 특히 ‘유럽’을 생각하면 떠오를만한 이미지들을 대충 엮고 그 위에 ‘한국의 미술 대학생’을 쑤셔 넣은 영화가 < 몽마르뜨 언덕의 상투 > 되겠다. 그래서 그 충돌이 재미있다. 이 글 초반에 올라가 있는 사진처럼, 미묘하게 안 어울려 충돌하는 이미지와 행동들이, 세계에 편입되고 싶은 대책 없는 욕망이 끓어오르던 80년대 중후반의 당시의 모습을 비춰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거지가 만든 두 세계의 이상한 만남. 이후로 세계는 급속히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진짜로 그렇게 되고 있는지는 뭐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동환 안소영 감독: 강대진 각본: 박철민 개봉극장: 스카라 관람인원: 4,618(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