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혈동귀영웅
- 감독
- 새부, 맥려사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파상, 파라니도, 왕로
< 여고괴담 >은 386세대의 < 장화홍련전 >이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가련한 소녀가 귀신이 되어 떠돌고 있으니 어떻게든 위로하여 저승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단지 그 소녀를 죽인 건 사악한 계모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무능하고 잔인한 교육제도였고 귀신이 그렇게 소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은 다르다. 이 영화의 희생자들은 그냥 귀신의 모습에 놀라 알아서 죽은 게 아니다. < 여고괴담 >(1998)은 대성공작이었고 그 뒤로 세 편의 속편이 이어졌다(한 편 더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난 믿지 않는다.) 이 속편들은 흥미롭다. 속편이라는 것이 결코 1편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시리즈는 종종 자기만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 여고괴담 4 - 목소리 >(이하 목소리)(2005)에 도착하면, < 여고괴담 > 1편에 있었던 것들 중 남은 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나라 교육제도에 대한 분노, 증오, 혐오는 이전처럼 중요하지 않다. 장르 호러물의 충격 효과도 점점 축소된다. 대신 학생들의 로맨스는 점점 더 비중이 높아지고 또 일상화된다. 1편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고괴담’ 영화이고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1999)가 이 시리즈의 열성팬들이 생각하는 가장 원형적인 ‘여고괴담’ 영화라면 <목소리>는 그 와중에 스스로 생성된 ‘여고괴담’의 틀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완성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을 볼까? 굳이 서브 장르를 따진다면 < 목소리 >는 ‘귀신 탐정’ 이야기에 가깝다. 음악실에 혼자 남아 노래연습을 하고 있던 영언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살해당한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서 깨어나 보니, 영언은 학교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지박령이 되어 있고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없다. 다행히도 단짝 친구 선민이 영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둘은 그날 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2인조 탐정물 시리즈의 파일럿이 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배경의 무국적성이다. 앞의 세 편은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구체적인 나라의 여자고등학교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동성애, 집단 따돌림, 질투, 경쟁의식은 세상 어느 학교에도 있겠지만, 그건 모두 이 나라의 특수성이라는 필터를 통해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 목소리 >에는 그런 게 없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 가도 이식될 수 있다. 몇몇 조연들의 대사들을 제외하면 이들의 대사는 거의 외국 소설에서 번역한 것 같다. 그 때문에 열심히 또박또박 ‘여고괴담’ 연기를 하고 있는 풋내기 배우들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네” 같은 문어체 대사에 애를 먹는다. 이건 단점이 아니다. 그냥 재미있는 현상이다. < 목소리 >는 이런 한국적인 요소들을 모두 제거해도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여고괴담’ 영화이다. 대한민국 학교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시리즈의 틀이 어느 새부터 원래는 의도하지 않았던 자기만의 모양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이 국적을 떠난 추상적인 보편성을 얻었던 것이다. 이 변형 과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건 교사들의 묘사이다. < 목소리 >에 나오는 교사들은 대부분 무개성적이고 하찮고 생기 없고 무력한 카드 보드 인형들이고 영화는 종종 이들의 존재 없음을 대놓고 놀려댄다. 1편에서는 영화 전체를 투자해 파괴해야 했던 증오의 대상이 그냥 몇 초 비웃는 대상으로 추락한 것이다. 주인공들과 얽히는 유일한 교사인 ‘음악’ 희연 만이 여기서 예외인데, 이 사람은 <제복의 처녀 Madchen in Uniform>(1931)나 <올리비아 Olivia>(1951) 같은 유럽 기숙 학교물에 나오는 로맨틱한 레즈비언 교사 같으며 한국인처럼 행동할 의무 따위는 느끼지도 않는다.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부패한 선생들이 떠난 이 빈자리에 들어온 것은 기억의 불안정함, 사랑의 유한성, 죽음처럼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망각과 그에 대한 공포이다. 시리즈 사상 가장 철학적이고 묵직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인 것이다. 종종 그 때문에 이야기를 멈추고 설명을 하느라 속도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심지어 이들 주제와 소재는 그렇게 여성적이지도 않다. 영언, 선민, 중간에 선민과 어울리게 되는 귀신 보는 소녀 초아, 희연은 여성이고 여성적인 인물이지만, 여성이기 전에 이런 추상적 주제를 풀어가는 디폴트 성의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 목소리 >는 가장 멀리 간 ‘여고괴담’ 영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 여고괴담 > 속편들이 그렇듯, < 목소리 >도 ‘무섭지 않은 호러영화’라는 욕을 먹었다. 어차피 <여고괴담> 시리즈는 호러보다는 초자연현상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 쪽에 가까우므로 이 반응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무섭지 않은 영화인가?’란 질문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냉담하게 그리는 순수한 악의 묘사와 권선징악의 파괴가 과연 섬뜩하지 않은가? 꼭 영화의 공포가 피상적인 충격 효과를 통해서만 전달되어야 하는 걸까?
이렇게 매력 충만한 영화가 극장 개봉을 못 하다니, 좀 억울하지 싶은 생각이 든다. 스크린으로 못 보는 것도 그렇고, 덕분에 마케팅의 기회를 잃어 소개될 기회도 제한된다는 생각이 드니 그런 안타까움이 급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코너가 그래서 생겨났지 하는 생각에 일단의 안도감을 느끼며. < 더 브론즈 >는 굳이 카테고리를 찾자면, 스포츠영화다. 뼈대로만 보면 17살 체조선수가 부상 후 실의에 빠져 있다가 몇 년 후 후배 선수를 양성하며 다시 자아를 찾아 나가는 예측 가능한 형태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손쉽게 설명하고 말아버리면 영화의 매력이 손가락에서 모래 빠져나가듯이 쉬쉬쉬 다 빠져나가 버리고 만다. 기존 스포츠영화가 가진 식상한 도식들에서 벗어날 비장의 무기들을 잔뜩 챙겨가지고 있으니, 부디 일단은 빨,파,흰색 조합의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걸친 멜리사 로치의 <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 >스러운 스틸 컷에 일단 혹해주길 바랄 뿐이다. 호프 앤 그레고리(멜리사 로치)는 미국 중서부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에서 나고 자란 영웅이다. 올림픽 체조 동메달 선수로 명성을 얻어 마을 입구 비석에는 ‘세계 제일 사암의 고장’이라는 수식과 함께 ‘2004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호프 앤 그레고리의 고향’임이 자랑스럽게 표기되어 있다. 그녀의 동메달이 화제가 된 건 2004년 올림픽 도중 발목에 부상을 입은 채로 아픈 다리를 수습하고 이단 평행봉에 도전한 스포츠 정신을 높이 사서다. 그렇게 그녀는 일숨에 에머스트의 천사가 되었다. 착지의 순간, 브라운관을 빠져나온 카메라가 잡는 건 화면을 보며 쾌감에 젖은 현재의 호프다. 호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현재에는 ‘가망’이 없다. 부상으로 체조를 그만둔 그녀는, 일생 최고의 환호가 쏟아지던 순간을 되감기 하며 침대에서 자위를 하고 약물을 흡입하며 시간을 보낸다. 단둘이 사는 아버지에게는 온갖 짜증과 욕설을 퍼붓고, 우체부로 일하는 아버지의 우편물을 뒤져 돈을 훔치기 일쑤다. 마을 곳곳 상점에 동메달을 목에 건 빛바랜 사진으로 간신히 명성을 입증해야 하는 삶.(그러고 햄버거 할인을 받는 정도랄까) 호프의 현재에는 그러니까, 문제가 넘쳐흐른다. 호프 앤 그레고리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그녀가 한때 ‘공주’였으며, 공주가 아닌 현재의 그녀가 여전히 그 ‘한때’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온다. 부상으로 더 이상 선수생활은 불가능한데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선수, 연금이 이미 다 바닥났는데도 여전히 자신의 수익으로 집안이 유지된다고 믿는 자신감. 그 갭과 괴리감을 다른 누가 메꾸어 줄 수나 있을까. 일단 차림새부터 짚고 넘어가자면, 어딜 가나 호프 앤 그레고리를 모를 새라 등에 큼지막하게 U. S. A가 새겨진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를 보면서 찬란했던 그녀의 과거를 유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호프를 추락한 지금의 일상에서 끄집어내는 계기는, 자신이 지금 지도 중인 매기를 올림픽에 나가게 해준다면 50만 달러의 유산을 호프에게 상속해 주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택한 그녀의 전 코치에게 있다. 현실을 위해 50만 달러의 가능성을 수락하지만, 사실 호프에게 중요한 건 돈보다, 대중에게 천사로 군림해 온 자신의 자존심이다. 전도유망한 후배 선수 매기에게 기름진 햄버거만 먹여 망쳐놓는 건,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해 줄 코치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만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열망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현실과 과거에서 오는 영광의 갭을 줄이지 못하는 걸 탓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인정욕구 역시 호프가 별나서가 아니다. 올림픽 출전을 꿈꾸며, 메달을 향해 달려왔던 이 영화의 선수들 모두가 그렇다. 호프와 티격태격하며 시종 그녀를 시기하는 팀 코디네이터 랜스 터커는 그리하여 이렇게 폭발한다. “난 금메달, 은메달 다 땄는데, 사람들은 모두 동메달 딴 ‘호프의 기적’만 대단하다고 말한다고!” 체중 조절을 위해 ‘한 달 동안 수박주스만 먹어, 씹는 법을 새로 익혀야 할 정도’인데다, 가슴이 나오지 않도록 붕대로 가슴을 꽁꽁 싸매고 다닌 호프 같은 사춘기의 선수들에게 대중의 인정은 곧 폼 나는 삶을 유지할 동력이다. 경쟁, 시기, 낮은 자존감, 부상 같은 변수들 앞에서 영화의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 모두 자신이 획득한 영웅의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무시무시한 공포를 끌어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정상적인 어른이 되어갈 뿐이다. 호프는 결국 매기가 올림픽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돕게 되지만, 그러기까지는 환호 속에 존재하던 자신이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이 씁쓸한 현실 어디에도 여느 스포츠 영화의 ‘재기와 갱생의 프로젝트’가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 더 브론즈 >의 장면 중 마음을 흔드는 하나의 장면은 올림픽 경기에서 매기가 환호를 받는 순간 자신의 영광을 뒤로하고 멀어져가는 호프의 뒷모습이다. 관중은 새로운 영웅을 주목할 뿐, 그 순간 과거의 영웅은 빛을 잃는다. 그 교체의 시간을 안타깝고 길게 응시해주는 건 호프의 아버지뿐이다. 브라이언 버클리 감독은 체조경기의 쾌감은 모두 덜어낸 채, 오롯이 대중의 심리가 움직이는 역동성 안에서 벌어지는, 이 감정의 분투를 지켜본다. 이 영화가 신기한 지점은 욕쟁이 호프를 위시한 어느 하나 선뜻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호프 정도는 좀 포장해줄 법한데, 그러지 않는다는 데 오히려 점수를 주고 싶다. 시트콤 < 빅뱅 이론 >에서 독특한 목소리로 시종 웃음을 끌어내는 베르나데트 역의 멜리사 로치가 심통스런 호프 역을 맛깔나게 연기할 뿐 아니라, 그녀의 남편 윈스턴 로치와 공동 각본을 집필했는데, 그녀의 코믹함을 십분 투여했지만 그게 <빅뱅 이론>에서처럼 귀엽고 유쾌한 웃음과는 거리가 좀 멀다. 그들은 그냥, 지질하고 있는 그대로여서 웃길 뿐이다. 아, 호프와 랜스가 급작스럽게 돌진하는 19금 체조 섹스 장면에서만큼은 호프의 캐릭터만큼이나 제대로 ‘병맛’ 살린다. 미국을 대표하는 남녀 국가대표 체조의 다양한 동작들이 격렬한 체위로 수행되는 그 과정에 대해 랜스 역을 연기한 세바스티안 스탄은 인터뷰를 통해 “어떻게 하면 병맛을 살릴지 스태프들과 함께 엄청난 구상과 아이디어를 통해 만들었다“고 밝힌다. IPTV 서비스로는 안타깝지만 그 장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는 바람에, 그렇게 고심해서 찍었을 게 분명한 정말 중요한 장면 하나를 놓치고 만다는 걸 미리 알려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