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엄한 평화 13부-울리지 못한 총성
- 감독
- 안문하, 조명길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박춘범, 서명산, 김련화, 리동철, 김영일, 오남숙, 강재만, 김경일, 리혜성, 서정호, 김대혁, 박섭, 박기수, 리선옥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두용 감독의 팬이었다. 어쩌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이를테면 프로야구 중계가 우천으로 취소된 토요일 오후에 땜빵용으로 TV에서 방영된 한국영화들 가운데 이두용의 영화가 있었다. < 오빠가 있다 >와 같은 정체가 괴이한 액션 멜로영화도 내 마음을 홀리곤 했다. 지리멸렬한 스토리였으나 액션이 시작되면 거두절미 박력 있게 이어지는 화면 리듬이 경이적이었다. 역시 TV에서 본 < 최후의 증인 >과 같은 영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극장에서 본 < 피막 >이나 < 물레야 물레야 >도 압권이었다. 나는 이두용의 신작을 1980년대 내내 기다렸다. 최재성 , 조용원 이 주연한 < 고속도로 >와 강수연 이 주연한 < 업 >을 보고 실망했다. 한 감독의 경력이 그렇게 허무하게 고꾸라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 내시 >는 나를 감동시킨 마지막 이두용 영화였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이후 난 2번관 3번관을 쫓아다니며 이 영화를 일곱 번 관람했다. 거듭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눈에 들어왔고 내 생애 처음 긴 평론을 쓴 영화도 이 영화였다. 신상옥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내시>는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기 위해 내시 신분으로 위장해 궁으로 들어간 한 양반 출신 사내 서정호의 이야기다. 그와 정분을 나눴던 여자 자옥은 세도가인 아버지의 정략에 따라 궁에 들어가 후궁으로 간택된 후 이제 함께 얘기도 할 수 없는 신분이 되어 있다. 비련의 러브스토리가 핵심이지만 영화는 이것보다 곁가지 플롯이 더 흥미를 끄는 형태로 전개된다. 남궁원 이 연기하는 내시감은 서정호와 자옥을 연기하는 안성기 , 이미숙 남녀 주연배우 못지않게 플롯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인데 그가 봉사하는 왕실권력의 비정함과 타락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서정호와 자옥 두 남녀 주인공은 종종 플롯의 흐름에서 사라진다. 그런데도 아무 지장이 없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한 궁녀가 임신하자 궁궐이 발칵 뒤집히고 내시감은 성 기능이 되살아난 내시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내시들을 집합시켜 하의를 벗기고 검사를 한다. 관객은 이 상황에서 안성기 가 연기하는 주인공 서정호의 정체가 혹 밝혀지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낀다. 내시들의 하체 검사가 끝나갈 무렵 서정호와 다른 한 명의 내시가 다른 곳에서 붙잡혀 끌려 나온다. 그 두 내시는 검사를 받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데 강제로 서정호와 함께 끌려온 내시의 바지를 벗긴 어의가 그의 되살아난 성기를 확인한다. 호위 내시감이 가차 없이 그의 몸을 칼로 내려친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화면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주인공인 서정호의 반응화면을 잡기 마련이다. 안성기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고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의 서스펜스는 서정호의 정체가 발각되느냐 여부에 있었다. 서정호의 반응화면은 나오지 않는다. 가차 없이 이두용 은 내시들이 하의를 추어 입는 멀리서 롱 숏으로 잡으며 이 장면을 끝낸다. 느닷없이 종결되는 그 호흡도 굉장하거니와 주인공의 존재를 잊은 듯 무심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 연출의 초점은 내시감이 봉사하는 왕실권력의 잔인함에 주어진다. 뼈를 깔끔하게 발라낸 생선살을 먹는 것과 같은 간편하고 유연한 커트감각의 맛이 이 장면에 있었다. < 뽕 >이나 < 물레야 물레야 >에서도 그랬지만 이두용은 줌렌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공간을 신축적으로 다룬다. 왕 앞에서 궁녀들이 공연을 하는 장면에서 궁녀들의 무리 가운데 유독 미모가 돋보이는 자옥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한 화면이 쑥 빠지면 부채춤을 추는 다른 궁녀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있는 것이 보이고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쑥 들어가면 또 다른 궁녀들의 무리가 잡히는 식이다. 번거롭게 달리나 크레인을 쓰지 않고도 카메라가 능란하게 돌아다닌다. 카메라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는 이야기의 운반수단으로 겸손하게 숨어서 화면에 박력과 긴장을 불어넣는다. 텅 빈 화면에 누군가의 발이 슥 들어오고 그가 멀어져 갈 때까지 죽 지켜보는 것과 같은 극적인 앵글도 곧잘 나오지만 전체적인 화면들의 균형감은 잘 맞는다. 겨울공화국의 시대에 이 영화는 궁궐 내부에서 벌어지는 추문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담았다. 영화의 말미, 동료의 죽음을 본 내시감은 칼을 들고 싸움에 나서며 감옥에 갇힌 서정호를 구해주고 도망치라고 충고한다. 서정호는 말을 듣지 않는다. 두 사람은 몰려드는 내시들과 병사들을 벤다. 크고 육중한 덩치를 지닌 내시감 역할의 남궁원 이 “물러들 가라. 아니면 내시라도 벨테다”고 손을 휘젓고 몸을 앞으로 내디디면 상대편 병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난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 곧잘 과장되는 움직임의 상응과 대비가 이 영화에서도 우람하게 이뤄진다. 내시감과 서정호가 싸울 때 왕과 자옥은 왕의 침실에서 정사를 나눈다. 격렬한 크로스커팅으로 성과 폭력이 클라이맥스에 전시된다. 영화는 곳곳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새벽 궁궐의 롱 숏으로 끝난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 이두용 이 보여준 박력의 스타일은 한국영화사에서 유일무이하다. < 내시 >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증명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