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
- 감독
- 조인한
- 제작년도
- 2019
갑자기 왜 난데없이 그 자리에 < 우상의 눈물 >이 나타났는지는 알겠다. 단지 임권택 의 목록만을 따라온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난처하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당신의 난처함을 알고 비통한 웃음을 짓게 된다. 성급하고 딱딱한 도식화. 직선적인 설명. 하지만 임권택의 영화들은 종종 우리들을 한국영화의 상황 앞에 데려다 놓은 다음 우울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시스템의 압력과 경제적인 결정과 검열을 경유한 배제와 제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는 목록들의 위태로운 질서가 숨어있다. 임권택에게 상황은 (...)을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금지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대신 (...)을 해야 한다, 라는 요구의 명령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화라는 시스템을 사이에 두고 다양한 관계들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일한 시스템.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임권택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영화에는 그런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토대 위에서 각자의 작동방식을 발명한 사람들이 있다. 간명한 비교의 예. 김기영은 자기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유현목은 그것을 만들지 못했다. 지금, 적어도 지금 한국영화에서 홍상수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시스템을 만들었다. 내게 이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좀 더 정교하게 설명할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빨리 원래의 시작에로 되돌아가자. 만다라(1981) 임권택 은 그때 < 깃발 없는 기수 >와 < 짝코 >을 완성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 만다라 >의 촬영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세상이 그의 영화를 아직 눈여겨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임권택의 영화는 충만하고 있었다. 그건 < 우상의 눈물 > ‘다음’을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영화 다음은 일정에 쫓기면서 (심지어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와 ‘가께모찌’로) 찍은 < 안개마을 >이다. <우상의 눈물>은 임권택이 시나리오 송길한 , 촬영 정일성 과 하나의 팀을 이룬 두 번째 영화이다. 그들은 이미 손발을 맞춰 본 다음이다. 그리고 그의 조감독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곽지균이었다. 하지만 <우상의 눈물>에는 임권택과 송길한, 그리고 정일성이 함께 있을 때만 만들 수 있었던 어떤 마법도 없다. 나는 여기서 없는 것을 채우거나 혹은 그것이 왜 없는지를 찾는 대신 이의신청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하나의 불가능. 그런데 왜 그것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일까. <우상의 눈물>은 임권택의 영화에서 어떤 불가능을 증언하는 영화이다. 물론 그것을 끌어내기 위하여 과도하게 전기적 사실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문제에 다가가면 모든 담론을 망칠 것이다. 그 대신 여기서는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표현 불가능성의 어떤 영역이 때로 경험 불가능성과 연결 지어진 것은 아닐까, 라는 순간과 마주할 때의 당혹스러운 시간이 있다. 나는 그 시간과 마주하는 것을 오랫동안 미루어왔다. 일종의 블랙홀.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고유한 자리를 설정할 때가 왔다고 용기를 내보고 싶다. 왜냐하면 명백히 임권택은 그 불가능성에 대해서 자기 영화를 통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한국영화사는 1974년 ‘이후’를 영상시대 동인들의 시대라고 문서화한다. 물론 < 별들의 고향 >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 바보들의 행진 >과 < 영자의 전성시대 >가 그 뒤를 이었다. 그 영화들이 비평 담론을 만들어냈으며 이장호 , 하길종 , 김호선 , 홍파 가 충무로에 새로운 물결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벌어진 일이 단지 그 하나뿐일 리가 없다. 나는 지금 그 하나 곁에 있었던 다른 하나,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다른 하나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긴급조치 9호 발령 당시 신문 잠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1974년 1월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통과되자마자 5월에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하였다. 그 이듬해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해체하고 공연윤리위원회를 설립하여 그 악명 높은 이중검열을 시작하였다. 단지 검열이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 제작사들이 통합되었고 운 나쁘게도 바로 그때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한 텔레비전은 한국영화의 가장 힘겨운 시기와 맞물렸다. 텔레비전은 값싼 시청료로 매일 저녁 제공하는 올 스타 드라마와 막 시작한 프로 야구로 대중을 매혹시켰다. 여기에 시장의 반지성주의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서방세계에서 누벨바그가 시작되었을 때 사실상 한국 극장은 그 흐름의 외곽으로 이탈한 다음 완전히 두절되었다. < 네 멋대로 해라 >는 보았지만 < 히로시마 내 사랑 >은 볼 수 없었다. < 카비리아의 밤 >은 펠리니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 태양은 외로워 >는 안토니오니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 소매치기 >는 브레송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서울에서 베리만과 파졸리니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영화에 관한 담론들은 부정확한 정보에 의지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개념의 대상에 관한 근거로 다루는 영화를 볼 수 없었으며 그러면서 점점 관념화되어갔다. 더듬거리는 개념의 손짓, 진부한 사유를 때려 부술 수 있는 기회의 상실. 무엇보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게토가 되어갔다. 경찰국가와 다름없는 상황. 창백해진 대중, 문화는 검열관의 가위 아래 무자비하게 잘려나가고 있었다. 어른들은 극장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이때 극장을 메운 것은 경제활동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거의 경제적인 자율적 결정에 사실상 여유가 없었던 도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들과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여기서 1970년대 후반의 영화 관객에 관한 해설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논점이 아니다. 거의 교집합이 없는 두 개의 관객 집단 중에서 내가 지금 건드리려는 것은 교복이라는 기호를 입은 중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을 미성년자라는 말로 다시 번역하는 것은 1970년대 남한 자본주의를 잘못 설명하는 것이다. 그때의 서울, 구로공단과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개미소굴과도 같은 거대한 노동현장은 값싼 노동인력을 미성년자들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노동법이 거의 작동하지 않은 그 시간에 이 무자비한 착취는 근대라는 과정 속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미성년자는 1970년대 남한에서 노동인구와 학생으로 그들의 계급적 기반에 따라 분화되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교복은 그때 하나의 기호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감시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호받았다. 물론 감시와 보호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때 학교는 사회로부터 그들을 방어하는 동시에 관찰하는 하나의 칸막이가 되었다. 교복을 입은 그들은 그 안에서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지식의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도 무자비한 서열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일정한 제도 기간이 끝나면 시험의 당락 여부와 관계없이 교복이라는 기호를 박탈당하고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핵심은 그때 학교 안과 바깥을 완전히 분리시킨 다음 ‘하이틴’ 혹은 ‘틴에이저’들의 독립된 세계인 것처럼 학교를 낭만적 유토피아로 각색해냈다. 물론 그것은 자기 최면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기제가 작동할 것이다. 그 깊은 밑바닥에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 중심 산업에로의 진입을 장기적으로 준비시키면서 제도의 학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자발적 복종의 규율이 반복적으로 요구되었다. 여고졸업반 (김응천, 1975) 열거한 항목들을 정식화시킬 차례이다. 어른이 철수한 극장은 새로운 관객을 찾고 있었다. 1975년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8월 23일 토요일 종로 낙원상가에 자리한 허리우드극장에서 < 여고졸업반 >이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뜻밖의 세 가지 효과를 거두었다. 첫 번째 효과. 중고등학생들은 경제적인 결정 외부에 놓여있지만 그들의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은 영화를 선택하기에 충분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여고졸업반>은 이 세대가 한국영화 수입구조에 진입하기 시작한 첫 번째 영화로 기록해야 한다. 나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반대로 이 세대가 21세기 한국영화에서 완전히 빠져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상상해보라. 그때는 어떤 배급업자도 웃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효과, 교복을 입은 관객을 목표로 한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가’ 등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제작 단계에서부터 제작자들과 감독을 예민하게 만든 검열로부터 마치 안전지대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중고등학생 관객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목표로 만든 영화에서 폭력과 섹스, 혹은 사회에 대한 문제를 확인시켜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단지 그들은 모르는 척할 뿐이다. 좀 기괴한 표현이지만 그들은 착한 관객의 역할을 했다. 이 영화들은 단체관람이 아니라 자발적인 관람을 통해서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중고등학생 관객들이 1970년대 후반에 일시적으로 왜 이런 집단 심리적 동의를 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들은 근본적으로 낭만적 유토피아의 꿈을 꾸는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장르이다. <여고졸업반>의 성공 이후 < 진짜 진짜 미안해 > < 진짜 진짜 좋아해 > < 진짜 진짜 잊지마 > 삼부작, ‘얄개’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세 번째 효과가 가장 이상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하이틴’ 영화들은 1979년 10월 26일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박정희가 사라지면서 이 장르의 효용성이 다하기라도 한 듯 사라졌다.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이 장르의 대표적인 세 감독 김응천 , 문여송 , 석래명 은 거의 동시에 여기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그들의 흥행의 마술도 사라졌다) 그래서 마치 여기에 전도된 사회의 낭만적 우울이 잘못된 충만함으로 가득한 채 투사되었다가 그 매듭이 풀린 순간 일시적으로 와해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일시적인 마법의 매듭. 그런 다음 풀려나기의 반복. 과도할 정도로 낭만적인 이 세계는 단지 사회로부터 격리된 것일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의 생활세계와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동요의 호소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물론 그것은 그들도 가져본 적이 없(을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토피아적인 세계이다. 「우상의 눈물」 그런 의미에서 < 우상의 눈물 >은 약간 시대착오라고 여겨질 것처럼 뒤늦게 만들어졌다. 물론 그때에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소설인 전상국 작가의 <우상의 눈물>은 계간 세계의 문학 1980년 봄 호에 게재되었고 영화가 이듬해에 만들어졌으니 단지 원작 소설과 영화의 관계로만 보면 발표하자마자 만들어진 셈이지만 이미 주변에서는 아무도 ‘하이틴’ 장르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 <우상의 눈물>이 문단의 주목을 모으긴 했지만 영화사가 관심을 가질만한 베스트셀러는 아니었고 (게다가 단편소설이다) 임권택 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상국 작가는 그 전해에 발표한 「아베의 가족」이 훨씬 흥미롭게 여겨졌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아베의 가족」은 한국전쟁 중에 낳은 벙어리인 아베를 버리고 이민을 떠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결국 <우상의 눈물>을 만들었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하이틴’ 영화는 이 영화 한 편뿐이다. 만일 주인공의 나이로만 셈을 하면 < 낙동강은 흐르는가 > 한 편이 더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두 영화의 주연은 모두 진유영 이다) 하지만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학도 의용군에 관한 전쟁영화이다. “원작이 좋았지요. 한 학급에 이야기를 몰아넣고 어떤 사회에서나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게다가 원작자가 고등학교 선생이었기 때문에 믿고 갈 수 있었던 것도 큰 몫을 차지했지요” 시나리오 작가인 송길한 도 다른 자리에서 거의 입을 맞춘 것처럼 같은 대답을 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촬영을 한 정일성 도 거의 이견이 없었다. “이건 권력에 관한 이야기이지 고등학생들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한번 해볼 만 하다는 생각을 한 거지” 임권택, 정일성, 송길한 우선 이 세 사람의 한계를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누구도 1970년대 고등학교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정일성 은 192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다음 거기서 자랐다. 그는 해방 전후에도 거기 남아있었다. 거기서 도쿄 제2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1951년에 서울에 와서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정일성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임권택 은 해방 직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부모님의 빨치산 입산으로 고통받는 나날이 되었다. 그가 알고 있는 고등학교는 어른들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통제 불가능 상태가 되어버린 집단이었다. 그들은 빨갱이 부모를 둔 임권택을 불러내 뒷산에 데려가 린치를 가했고 지금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백색테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어른들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무덤 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삶. 임권택은 어느 날 밤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고등학교에 관한 경험은 그날 밤 거기서 끝났다.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송길한 은 1940년생이다. 그의 고등학교 경험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직후였다. 게다가 그가 다닌 학교는 전라북도에서 우등생들만이 입학한 전주고등학교였다. “그저 공부만 한 거예요. 그래서 얼른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가는 것만이 효도를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지요. 집안 어른들이 모두 그렇게 말씀하셨고, 게다가 고향에서만 자랐으니 세상을 모르잖아요. 전쟁이 끝나고 거기 뭐가 남은 게 있었겠어요” 그런 다음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1960년 4월의 봄을 맞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고등학교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차이는 단지 학교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차이만큼 벌어져 있다. “사실 < 우상의 눈물 >을 찍을 때 고등학교 입학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으니까요. 왜냐하면 내가 관심이 없으니까,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니까, 그냥 신문에 입학시험을 본다,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그때는 내가 결혼을 하기 전이니 더 모르는 거죠. 그래서 전상국 작가의 경험만 믿고 간 거죠” 전상국 작가가 교사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며 물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변수가 있다. 춘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라고 내게 반문할 것이다. 그때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행정적으로 매우 괴상하게도 전국에서 동시에 적용된 것이 아니라 서울과 일부 도시에서만 먼저 적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전학을 둘러싼 매우 복잡한 조건이 따라붙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단지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제도의 행정적 차이 때문에 서울과 춘천의 고등학교는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는 학교가 되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려도 할 수 없다. 소설 <우상의 눈물>을 읽고 있으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를 (서울에서 같은 시기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임권택 혹은 송길한이 믿을만하다고 말한 전상국 작가의 경험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본의 아니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 우상의 눈물 >은 괴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되었다. 그들이 < 여고졸업반 > 혹은 < 진짜 진짜 미안해 >로 설명되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유토피아적 낭만주의의 허구를 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고등학교라고 부르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임권택 , 송길한 , 정일성 은 처음부터 그 세계로 들어설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들 방식의 또 다른 완전히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우상의 눈물>이 사실주의 미학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고등학생들의 일상생활 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목표를 세운 영화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약간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왜 교복의 기호가 필요해졌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어른의 세계에서 훨씬 설득력 있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와야만 이 이야기가 성립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야기의 다른 차원에로의 이동이나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교정 불가능성이 버티고 있다. 먼저 일차적인 대답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좀 더 현실적인 근거. 세경흥업 영화사가 이미 성공을 거둔 ‘하이틴’ 장르 영화를 여기서 복습하고 싶었다면 임권택에게 이 영화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임권택의 쓸모를 잘 알고 있었다. 충무로는 감독들을 분류하였고 그런 다음 그들을 관리하면서 올바르게 배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임권택은 로맨스, 혹은 코미디에서 성공한 적이 없는 연출자이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세경흥업은 여기서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했다. 다른 무언가? 영화사는 <우상의 눈물>이 ‘하이틴’ 영화가 아니라 ‘문예’ 영화라고 (아마도) 생각했다. 그들은 원작(의 흔적)을 남겨놓아야만 했다. 흔적으로서의 기호. 하지만 여기서 임권택과 송길한 자신이 이 이야기에 매혹되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들은 < 만다라 >를 만들고 나서도 이 영화를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다라>는 임권택이 평생에 단 한 번 영화사에 “이 소설은 내가 꼭 좀 만들어야겠다”고 말한 유일한 영화이다. 그들은 <만다라>를 찍은 다음 함께 <우상의 눈물>을 찍겠다고 결정했다. 거기서 무엇을 찍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두 번째 대답이 중요해진다. 이야기의 개요. 먼저 소설의 판본을 따르겠다. 나는 차이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세부까지 건드릴 것이다. 이야기의 화자(話者)인 학생 유대는 같은 반의 재수파라고 불리는 패들에게 끌려가 담뱃불로 지지는 린치를 당한다. 단지 “메시껍게 군다”는 게 이유의 전부이다. 몇 차례 유급을 한 최기표가 이끄는 이 무리들은 반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새로 학년이 바뀌고 담임인 김 선생은 유대를 불러 최기표와 재수파 아이들의 정보를 얻으려 반장을 제안하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친구인 형우에게 떠넘긴다. 형우는 반장을 맡은 다음 “학급의 학내 등수를 올리기 위해 친구들을 도외주자”면서 우등생들을 불러 모아 최기표를 비롯한 열등생들에게 커닝 페이퍼를 건네주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시험 도중에 커닝 페이퍼를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에게 고자질한 것은 최기표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어떤 개새끼야?”라고 소리마저 지른다. 그때 형우가 일어나 “제가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우등생들이 차례로 일어나 서로 자기가 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감독 선생은 “여러분의 우정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말한다. 세 개의 같지만 서로 다른 말. 순식간에 이 말의 네트워크를 따라 예상치 않게 작동하는 힘의 이동. 유대의 예상대로 형우는 최기표와 재수파 일당에게 불려가 린치를 당한다. 몹시 심하게 당해서 전치 2주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다. 하지만 유대의 예상과 다른 것은 형우가 자신이 시비를 걸어 싸움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누가 린치를 가했는지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병문안을 간 유대에게 형우는 의미심장하게 이제 재수파는 끝났다고 알려준다. 학교로 돌아온 형우는 아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된다. 하지만 형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이들에게 최기표의 가난한 집안 사정을 낱낱이 말하면서도 이야기를 미화시켜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게 학교를 다니는지 몰랐고 그러니 우리가 반성의 의미로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 고 웅변 한다. 최기표는 매일 초라해져갔고 형우의 말 대로 더 이상 그의 주변에서 부하 노릇을 하는 재수파는 남아있지 않았다. 담임선생은 이걸 방송국에 알리고 세간에는 유명한 인정 미담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최기표는 그 언젠가부터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그가 여동생에게 남기고 간 편지 맨 앞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섭다,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첫 장면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야기의 중심을 약간 애매하게 만들었다. 유대를 그냥 남겨놓긴 했지만 영화에는 화자가 없다. 이야기의 소개에는 그게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은 사악한 인물들의 관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최기표는 단지 폭력을 휘두르는 불량배일 뿐이다. 형우는 똑똑하지만 교활하고 집단의 심리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그는 자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어떻게 최기표와 재수파 아이들을 무너트려야 할 줄 잘 알고 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지나치듯이 말하지만 최기표에게 일말의 연민도 없다. 유대는 비겁하게 자기에게 온 짐을 슬그머니 라이벌인 형우에게 떠넘긴 다음 야비한 자신의 태도를 숨기면서 그가 겪을 곤경을 구경할 참이었다. 유대가 화자로 설정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담임선생은 이들 사이의 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 둘을 이용하여 학급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력을 쌓을 궁리만 한다. 말하자면 마지막 순간에 가까워지면 우리는 최기표가 그저 장기판의 말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내 이름은 권달호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야기의 외곽에 위치하다시피 한 담임선생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그를 주인공으로 삼을 생각은 없다. 반대로 유대는 성격을 잃은 다음 거의 이야기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담임선생인 김 선생에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권달호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름이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연상시키거나 아니면 이야기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권달호는 이 학교에 새로 부임했으며 전국에서 그가 담임을 한 반이 여러 차례 우수학급으로 선정되어 우수교사로 표창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3학년 8반을 우수학급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래서 학습 진도가 부진한 반 학생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시험 준비를 시킨다. 권달호는 시간을 내서 가정방문을 하고 그들의 방과 후의 사연을 알고자 노력한다. 여기에는 어떤 나쁜 의도도 없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부당한 요구나 불미스러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권달호가 권위주의적이긴 하지만 그에겐 선한 의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 우상의 눈물 >이 계몽적이거나 따분한 유토피아 버전의 동화에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은 제도에 복종하는 권력의 위선적인 각색이 아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소설에서 다룬 교육 현장의 교사의 태도를 견디지 못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그들은 소설에 비친 거울을 마주 보지 못한다. 무언가 유보시켜야 할 현실.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완곡한 저항. 전상국 작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려낸 담임의 학급관리 기법. 더 엄밀하게 기법의 태도. 그들은 여기서 후퇴를 해야만 했다. 학급 안에서의 권력의 오작동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김 선생을 권달호의 자리까지 끌어올려야만 가까스로 이야기를 마주 볼 용기가 생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들도 이 이야기가 일종의 모델에 가까운 상징적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3학년 8반은 사실상 사회를 예습하는 일종의 통과제의에 가까운 수업 시간의 공간화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다. 이때 권달호는 담임선생이라기보다는 스승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 그건 무슨 차이가 있나요? 3학년 8반은 근대적인 교육 제도의 기구(의 일부)라기보다는 학급을 관리하는 주인의 권위와 의무에 의해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교실은 규율 공간의 규칙에 따라 표준화되고 평균화 되는 대신 권달호의 이름으로 새로운 규율이 정해지고 요구된다. 근대 제도로부터 유교적인 가치가 담임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장소로서의 교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교실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형식으로 권달호와 학생 사이의 거리를 다시 조정한다. 권달호는 자신의 역할을 교실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설에서 김 선생은 최기표의 집을 방문할 생각이 없다. 권달호는 힘겹게 달동네를 찾아간다. 김 선생은 자기 반 학생들의 성적에 별 관심이 없다. 권달호는 아무런 조건 없이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자기 집에서 합숙을 시켜가며 가르친다. 권달호는 종종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학생들을 관리한다. 이때 권달호의 말은 3학년 8반 교실에서 법이며 명령이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여기서 권력이 오작동을 일으킨다고 가정한다. 최기표 이 차이의 간극은 두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소설에서는 미숙하지만 이미 어른들의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3학년 8반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여기서 담임선생은 이 규율 제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제도의 수행자들은 최기표를 교정하는 대신 최기표라는 폭력의 기호를 무효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고 나간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면서 은밀하게 공모하고 있는 김 선생이나 형우는 최기표가 교정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믿음도 없다. 그래서 최기표(와 그의 재수파)가 반에서 폭력을 동원하여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경유한 힘을 무효화시키는 전술을 사용한다. 유대는 형우에게 물어본다, “넌 지금 네가 기표를 구원했다고 보니? 기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네가 구원하고 있다고 말야” 그러자 형우가 대답한다. “그건 기표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같은 말의 다른 말. 그건 대상이 생각할 일이 아니야. 소설에서 최기표의 대사는 커닝 페이퍼를 감독관 선생에게 이르는 말 이외에는 전혀 없다. 그는 시종일관 대상으로 머문다. 최기표를 목표로 하여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는 한 번도 주인의 자리에 오지 못한다. 힘의 네트워크 안에서 대상의 추락. 그것을 목표로 한 전술의 수행. 그래서 최기표가 반에서 빈칸이 되었을 때 누구도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않으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향한다. 이야기의 표면만을 보면 영화와 소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영화가 최기표를 교정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질 때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서 대상의 자리에 놓여있던 최기표에 대한 탐구로 옮겨간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할 준비가 되어있다. 소설에는 단지 없다기보다는 최기표의 일상생활 자체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래서 최기표가 방과 후에 무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종종 이야기의 진행과 별 상관이 없는데도 최기표를 따라 이야기 바깥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순수한 악마라고나 할까요” 주목할 만한 첫 번째 차이. 소설에서 최기표는, 그 주변의 재수파 아이들의 증언을 빌려 형우가 유대에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걔들이 모두 나한테 말했다. 기표는 악마라고, 자기들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영화에서 그 말을 전하는 사람은 기표의 2학년 담임이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올해 담임이 된 권달호 선생이다. 그때 전하는 말은 조금 다르다. “놈은 순수한 악마라고나 할까요” 그 말은 선술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앞에 놓인 생선 아구의 커다란 입을 보여주는 장면과 연결된다. 이때 나를 멈추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그 앞에 놓인 순수한, 이다. 악마가 순수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학년 담임선생은 최기표에게 선한 가능성 자체를 배제한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으며 교정될 수도 없는 무한정한 거리의 간극만이 놓여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쪽은 대상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만이 남는다. 그때 권달호 선생이 흥미를 느끼는 것은 순수한 악마의 순수성에 흠집을 어떻게 낼 수 있을 것인가, 에로 이끌린다. 한 가지 더, 그 말에 붙여놓은 아구의 벌어진 아가리가 두려운 모습이기만 하지만 그것이 음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악마를 요리하기.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라는 전미래적 이미지. 두 번째 차이. 이 말을 하는 인물의 자리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 말을 최기표와 같은 반 학생인 형우와 유대가 나눌 때 그 둘에게 이 말은 그들의 전술의 대상에 대한 정보이자 평가이다. 그런데 형우와 유대도 최기표와 같은 반 학생이다. 그들은 한 학급 안에서 최기표를 경험하고 있고 이미 그와 재수파의 린치를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각자 경험했다. 그런데도 형우와 유대는 경험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재수파 아이들의 고백을 빌려 최기표를 설명한다. 그때 최기표는 알 수 없는 대상이자 동시에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사악한 대상의 자리에 던져진다. 우리는 그를 알지 못했어요, 게다가 알고 보니 그는 더 나쁜 인간이었어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를 벌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이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했다. 형우와 유대는 자신들의 전술에 대한 실행을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말을 담임선생의 자리에 놓게 되면 단지 자리를 바꾼 것만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위쪽으로 옮겨진 다음 내려다보게 된다. 내려다보는 말. 그들은 “순수한 악마”를 내려다보는 중이다. 이 자리는 학교라는 제도에서 학생과 선생이 지니는 관계의 위계질서 안에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악마를 내려다보는 자리는 신의 자리가 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저 멀리서 근대적 제도교육을 외피로 두른 유교 교육의 절대적 권위와 폭력적인 강제성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세 번째 차이. 이제 맥락을 살펴볼 차례이다. 소설에서 형우와 유대의 대화는 거의 모든 사건이 모두 벌어진 다음 형우가 최기표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직전에 나온다. 이 말은 형우가 자신의 전술이 흡혈귀를 상대로 거둔 승리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거만하게 대상을 축소하는 수사적 포획에 다름 아니다. 상대방을 흡혈귀의 자리에 보낼 때 자신의 승리는 이미 예정된 것이다. 약점으로서의 흡혈귀. 자신은 이 흡혈귀를 물리칠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걸 알고 있는 한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 이것은 두려움의 표현이 아니라 경멸의 수사이며 이제 마지막으로 가하게 될 일격에 부여하는 정의로운 정당성의 부여에 다름 아니다. 이때 형우는 자신의 잔인함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도 떨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2학년 담임 선생님과 권달호 선생의 대화는 영화 거의 앞부분에 나온다. 우리는 아직 최기표가 어떤 학생인지 알지 못한다. 이때 2학년 담임 선생님의 말은 소개에 가깝다. 이 소개는 우리들을 권달호의 자리로 데려간 다음 최기표를 관찰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미 같은 학급의 학생들은 최기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의 누군가는 이미 불려가서 린치를 당했고 그걸 오랫동안 지켜본 모두들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순수한 악마” 최기표에 대해서 임권택 (과 송길한 )은 부정적 이미지를 기대한 우리들을 배신하고 갑자기 그를 의협심 있고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친구들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인물로 보여준다. 최기표는 자기 학교 학생이 이웃 학교 학생에게 매를 맞자 그에게 요구한 것도 아닌데 구태여 그 학교에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복수를 한다. 이 에피소드는 (아마도) 임권택에게 인상 깊은 경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24년 뒤에 만든 < 하류인생 >의 앞부분에서 태웅은 자기 학교 학생이 맞고 왔다고 이웃 학교에 찾아가 상대방을 불러내 응징을 한다. “순수한 악마”라고 소개된 최기표가 그런 희생적인 수행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에 대해서 순수한, 이라는 수식어와 악마, 라는 정의가 서로 만나서 만들어내는 어떤 감흥에 매료되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최기표와 김두한(< 장군의 아들 >)과 태웅(<하류인생>)을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태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 동일한 인물처럼 다루고 싶다. 좀 더 이상한 것은 소설에서 최기표의 주변 인물은 맨 마지막 대목에 담임을 찾아오는 병든 어머니가 전부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초반부터 최기표 곁에 대학생 애인 혜원이 등장한다. 대학생 혜원이 왜 유급을 거듭하고 학교에서는 학업을 사실상 포기했으며 폭력배 무리들인 재수파를 끌고 다니는 고등학생 최기표에게 이끌려 애인의 역할을 하는지는 영화 안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다. 혜원은 재수파의 아이들과 달리 자발적으로 그의 곁에 애인으로 머무는 중이다. 그런데 <하류인생>에서도 거의 동일한 상황에 놓인 고등학생 태웅에게 대학생인 혜옥이 이끌리고 그 둘은 결혼을 한다. 아마 혜원과 혜옥은 상대방에게 거의 동일한 감흥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야기에서 혜원이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비밀을 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기를 기대한 우리에게 아무런 사연도 없다는 것을 알려줄 때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대학생 애인 혜원은 오로지 최기표를 수사하는 인물에 머물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겼을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전상국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남겨놓은 상태에서 최기표를 형우와 유대, 그리고 담임의 포획 가능한 대상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인물에로 점핑 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이야기는 동일한 결말을 맞지만 그 둘은 완전히 반대가 된다. 소설에서 최기표가 무단결석이라는 방법으로 학교에서 사라질 때 그것은 도피로 읽힌다. “(...)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기표의 자리가 빈 것을 알았다. 다음 날도 그는 결석을 했다. 무단결석이었다. 담임선생이 한 아이를 기표네 집에 보냈다. “집에도 없어. 이틀 전에 집을 나갔데” (중략) 기표가 내리 사흘이나 결석을 한 아침나절이었다” 최기표의 “병색이 완연해 뵈는” 어머니가 담임을 찾아온다. 그 어머니를 “내쫓듯 교무실에서 밀어”낸 다음 담임선생은 형우와 유대에게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던져준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전문이 길기 때문에 발췌하듯이 원작에서 빌려왔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아마도 그는 더 나쁜 상황에로 추락할 것이다. 반대로 영화에서 최기표는 형우와 담임이 쳐 놓은 계략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탈출한다. 그래서 임권택 은 최기표가 학교를 뛰쳐나가는 장면을 찍었다. 그 날 방송국에서 최기표와 그를 돕는 반 아이들을 찍기 위해서 방문할 예정이었고 아이들은 모두 들떠서 기표에게 한마디씩 던진다. 그들은 무례하게 말하면서 기쁜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때 최기표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집어 던지고 공책을 찢어서 아이들에게 뿌린 다음 교실을 뛰쳐나간다. 정일성 은 뛰쳐나가는 최기표를 용의주도하게 따라가는 척하다가 교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창문 앞에 카메라를 세운다. 그때 창문에는 쇠창살이 걸려 있어서 교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미 여러 차례 교실을 외부에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들여다보면서 감옥처럼 찍었다. 그 창문 안쪽에 앉아서 그걸 지켜보다가 고개를 떨구는 유대의 얼굴을 다가가서(zoom_in) 바라본다. (S#_1) 최기표는 학교를 벗어나서 있는 힘을 다해 길거리를 뛰어간다. 그때 그가 막 지나치는 길거리에는 ‘보호구역’이라는 공사 현장의 표시판이 보인다. 학교라는 ‘보호 구역’. 여기는 정말 ‘보호구역’이었을까. 그런데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역’이었을까. 최기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이 표시판을 지나쳐 간다. 아마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S#_2) 권달호 선생은 교무실에서 3학년 8반 교실로 들어왔을 때 상황을 알게 되고 아이들에게 최기표를 찾아오라고 소리친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나갈 때 반장 이유대는 권달호 선생에게 “최기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면서 최기표가 남기고 간 공책을 건네준다. (S#_14) 거기에는 “혜원아 무섭다, 혜원아 무섭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라고 쓰여 있다. (S#_15) 유대는 꾸짖듯이 권달호 선생에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서 고발한다. 나는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 선택인지에 대해서 단순하게 대답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차이는 단지 최기표를 중심으로 옮겨 놓았다거나 아니면 최기표를 주인의 자리에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최기표는 중심으로 이동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최기표가 이야기의 주인의 자리에로 재구성되지도 않는다.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최기표를 끝내 굴복당하지 않는 대상으로 다시 만들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전상국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의 작동방식을 완전히 인정하면서도 최기표를 전리품으로 삼는 승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의 제도. 전체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장치. 그걸 완전히 와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그럴 생각이 없다. 권달호는 조금도 나쁜 의도를 지닌 적이 없다. 그는 충실하게 이 장치가 작동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형우와 유대는 숨겨놓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그들만의 악의적인 기쁨을 위해서 권달호를 돕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이 정의라고 믿으며 그걸 행하는 것이 자신들이 배운 것을 실행하는 의무라고 한 치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를 굴복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이 원작소설을 선택한 이유가 이 이야기로부터 최기표를 구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마저 갖게 만들 지경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황당무계한 상상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일이 필요해진 것일까. 여기서 반복의 학습과 대면해야 한다. 학습이라고 했나요? 그렇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학습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임권택은 학습하고 다시 학습한다. 물론 배움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의 확장의 과정이지만 동시에 나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네트워크의 공동체 안으로 (약간 위험한 말이긴 하지만) 주체를 밀어 넣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젝이라면 (라캉을 경유하여) 훨씬 근사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결론만 빌려온 다음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다. 말하자면 동일성의 거대한 그림자. 이 그림자는 너무 무겁고 두터워서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반복의 재종합화라는 까다로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텍스트로부터 빠져나와 다소 기이하게 위장된 네트워크 사이에서 마주치는 불가능성이라는 자리에로 옮겨가야 한다. 나는 이미 시작하자마자 임권택의 영화에서 표현불가능성이라는 영역이 경험불가능성이라는 시간의 말소 안으로 들어선다는 말을 했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을 말하면서 잘 설명되지 않은 이 개념은 이따금 임권택의 영화 전체를 위기에 빠트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어떤 위기? 임권택은 자기 앞에 놓인 기호가 공동체 안에서 자의적인 가능성의 세계를 열려고 하는 순간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그의 세계는 수축되고 종종 그만큼 앞으로 나아간 것을 포기하기조차 한다. 계산 바깥에 있는 그 무엇. 그런데 예술에서 성질의 공동체란 가능한 표현일까. 이때 임권택은 이따금 실패를 계산에 넣고 불가능성의 셈을 치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임권택은 공동체를 벗어난 질서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표현불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떤 결정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할 때가 있다. 그때 너와 나, 라는 차이의 구별 대신 우리라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만 해결되는 공동의 시간성이라는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임권택 (과 송길한 , 그리고 정일성 )은 < 만다라 >를 막 찍고 난 다음이었다. 그들은 그때 여러 가지로 한국영화가 가지 않은 길을 밀고 나아갔다. 무엇보다 임권택은 그 이전에 그렇게 관념적인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었다. <만다라>를 미학적인 방법으로만 접근했을 때 임권택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마주쳤던 정신적인 이미지들의 기호, 그 기호들이 불러일으키는 한순간의 새로운 사유가 무언가 재현의 위기를 끌어들인다는 의심이 거기에 있다. 임권택은 경험불가능성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이미지의 위기라는 사실을 잘 아는 연출자이다. 여기서 연출자라는 말을 구태여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 들여다본 영화들의 실패가 모두 거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이다. 나는 약간 과감하게 말해보고 싶다. 영화에 대한 태도로만 접근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적어도 어느 순간부터 임권택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자신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로셀리니의 전통에 합류하였다. 내가 지금 떠올리는 것은 로셀리니가 잉그리드 버그만과 찍은 네 편의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재현은 언제나 세계에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아니, 거기 머물러야만 한다. 재현이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때 그건 덫에 걸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는다. 임권택에게 재현은 삶의 한 방식, 생명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만다라>는 세계로부터 연을 끊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경험의 고독함. 소승불교의 길. 하지만 세계 안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야만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무의미하다면 어떻게 거기서 영화를 더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영화는 공(空)의 이치를 따져 묻는 예술이 아니다. 임권택은 재빨리 가장 진부한 질서 안으로 되돌아와 안심하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어떤 회귀, 거의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공동체 안으로의 복귀. < 우상의 눈물 >은 임권택(과 송길한, 정일성)에게 실패의 상처가 아니라 안심의 표지이다. 우리들은 너무 멀리 간 것일지도 몰라요, 그러면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들은 이 영화가 실패할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성공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로 되돌아옵시다. 세상의 속된 관심. 한국영화가 겪는 어떤 수난. 그 안. 임권택은 종종 남들이 모두 하는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가 만행 길을 마치고 온 동료들과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세계는 전상국의 소설이 아니라 충무로의 동료들이 만들고 있는 하이틴 로맨스의 장르 안이었다, 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기표 옆에 머물고 있는 여대생 혜원의 존재를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우상의 눈물>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클리셰를 끌어들인 다음 할 수 있는 진부한 방식으로 그것이 작동하도록 내버려 둔다. 이때 혜원이라는 장치가 만들어내고 있는 도식의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혜원을 여고생으로부터 여대생으로 층위를 옮겨놓은 순간 그녀를 최기표가 착취할 수 있거나(이미 지적한 것이지만 환기하자면 소설에서 최기표는 자신의 주변 패거리들을 착취하고 있다) 반대로 구원할 수 있는(영화에서 최기표는 자신의 학교 학생이 다른 학교 학생에게 구타당하자 마치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듯이 그걸 복수하러 간다) 구도로부터 완전히 빼낸 다음 일정한 거리만큼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좀 더 간단하게 최기표와 혜원은 서로 다른 생활의 시간,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영역에 머물고 있다. 여기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들) 사이의 차이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차이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임권택(과 송길한)은 최기표와 혜원을 수평으로 놓는 대신 비스듬하게 엇갈려 배치한다. 이때 혜원은 다른 어떤 인물과도 교제가 불가능해진다. 오직 최기표의 애인으로서의 자리만이 주어진 혜원은 <우상의 눈물>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모든 가능성의 배제. 형우와 유대가 최기표를 공격 목표로 삼고 있지만 여기서 혜원은 모든 계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녀는 형우나 유대에게 어떤 관심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형우나 유대도 혜원과 어떤 접촉의 가능성도 열어놓지 않는다. 만일 혜원이 여고생이었다면 송길한은 왜 그녀가 모범생인 형우나 반장인 유대에게 이끌리지 않는지를 설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혜원이 그들에게 이끌리지 않을 수도 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영화에 로맨스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반대로 그렇다면 형우와 유대가 최기표에게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왜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지를 설명해야만 했을 것이다. 만일 형우와 유대의 최종목표가 혜원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견디기 힘들만큼 음란하거나 사악해졌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임권택(과 송길한)은 그 이야기를 참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유급을 한 최기표에게 혜원은 애인이지만 형우와 유대에게 혜원은 누나의 자리라는 넘기 힘든 선을 이미 설정하고 시작한다. 이상한 셈법. 되풀이되는 불가능성. 혜원 이번에는 재빨리 돌아와 끝내 완결될 수 없는 셈을 할 차례이다. 그러므로 이건 이상한 셈법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 우상의 눈물 >은 < 여고졸업반 >이나 < 진짜 진짜 미안해 >와 같은 구도 위에 있으면서 다르다. 가장 상투적인 설명. 하이틴 로맨스 장르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과정은 그들의 로맨스가 일시적인 시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들은 성공적으로 그들의 시련을 이겨내고 성인들의 사회로 진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때 그들에게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미루는 것뿐이다. “우리 대학 갈 때까지만 참자”라는 마법적인 문장. 그런데 그들이 미루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마음껏 연애할 수 있는 사회, 좀 더 외설적인 판본은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사회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토피아 안에 있으면서도 그걸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척)한다. 물론 그들은 학교를 벗어나자마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금방 배울 것이다. 리비도는 계급적 분화 과정 앞에서 훨씬 제도적인 통치를 받기 시작할 것이다. 좀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이틴 로맨스가 끝나고 나면 학교 바깥에서 성인들의 눈물과 비탄으로 가득 찬 저 가혹한 멜로드라마와 전쟁터의 알레고리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홈드라마의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김응천 과 문여송 , 석래명 도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다만 그들은 애써 그걸 외면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졸업한 이후를 찍을 생각이 없다. 여기까지는 잘 알겠다. 그때 이 장르 안으로 들어오면서 임권택 (과 송길한 )은 하이틴 로맨스라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걸 보여주면서 이 장르의 결함을 드러내 보여주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음에 틀림없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전상국의 소설을 경유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사라는 체험 안에 담겨있는 경험주의. 경험 안에서의 형상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진부한 이야기의 앙상한 무대를 마주 보게 만들어서 그 안에 담겨있는 낯선 현실을 마주 보게 만들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전술을 < 길소뜸 >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거의 아무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거의 아무 것도 구성되지 않는다. 다시 첫 장면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교복이라는 기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을 할 차례이다. 나는 이 논의를 위해서 다소 긴 우회를 하였다. < 우상의 눈물 >이 < 여고졸업반 >이나 < 진짜 진짜 잊지마 >와 완전히 공유하는 것은 교복이라는 기호이다. 이 영화에는 사복의 세계가 없다.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교실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이따금 학교 바깥에 나갈 때조차 모든 등장인물들은 마치 다른 옷이 없다는 듯이, 이것이 하나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라도 하듯이, 차라리 교복을 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 기호 안에서만 활동한다. 흥미롭게도 <우상의 눈물>의 첫 장면에서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아침 조회를 위해 학생들이 운동장에 누가 누군지 전혀 구별할 수 없는 검은 교복을 입고 수없이 많은 검은 점처럼 서 있는 모습이다. 우글거리는 교복의 기호들. 임권택 (과 송길한 )은 교복의 기호들로 이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루어지는 기호들은 단지 외양에 멈춘 것이 아니다. 교복은 상징이 아니라 표시이며 제도의 기입이다. 이 기호들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문제. 말하자면 교육. 권달호 선생은 3학년 8반이라는 기호의 구역을 책임지고 교실에서 그들에게 자신의 교육은 “자율이며” 이 교실을 배에 비유한다. 얼핏 보면 여기까지 소설과 영화는 동일한 진행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에서도 김 선생은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이때 임권택(과 송길한)이 간과한 것은 교복의 기호들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상국이 이야기의 시작을 교복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장에서 시작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담임 김 선생을 외곽에 배치하고 이야기를 형우와 유대 사이의 심리적인 대결로 진행시키면서 교복들의 기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관찰한다. 담임선생과 반 아이들의 만남의 장면에서 결정적인 차이는 그걸 바라보는 자리이다. 전상국은 담임선생과의 첫 만남을 유대의 자리에서 지켜본다. 유대는 담임선생의 첫인사를 “완숙한 연출가는 배우 스스로가 연출하도록 유도하는 비결”을 가진 것처럼 “단 며칠이면 허물어질 아이들을” 상대로 “가슴 부풀리며 앉아있게” 만드는 “대단한 담임선생”을 만나게 되었다고 “우습게” 생각한다. (전상국의 소설에서 순서를 다소 바꾸었다) 교복의 기호들은 그 안에서 재빨리 분화하기 시작한다. 기호로부터 기호를 바라보기. 기호들과 기호의 외곽. 기호의 경계선. 담임선생은 대상에 머물면서 그의 모든 행동은 유대에게 관찰의 자리에 머문다. 기호의 고정점. 그것이 세상에 대한 상징적인 매트릭스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서는 그다음 문제이다. 전상국은 끝까지 담임선생이 기호들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임권택(과 송길한)도 담임선생 권달호가 기호들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실패했음을 (심지어 전상국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실패의 광경은 완전히 다르다. 소설에서 (반복하자면) 담임선생은 “편지 하나를 꺼내 우리에게 내던졌다.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 맨 앞줄에 이렇게 씌어있었다. -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소설에서 담임선생은 최기표의 편지를 먼저 읽었고 그걸 “우리들 앞에” (여기에는 ‘우리들’이라고만 되어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유대는 포함되어 있지만 형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던져줄 때 우리는 그 편지의 문장이 무얼 의미하는지 담임선생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최기표의 편지는 담임선생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그 편지는 담임선생을 우회하여 유대(와 우리들)에게 배송된 편지이다. 아마 담임선생은 최기표의 편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임권택(과 송길한)은 완전히 반대의 배송 경로를 따라 전달한다. 최기표는 자기의 노트에 “무섭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는 문장을 여동생이 아니라 혜원에게 쓴다. 이 수신자는 가족으로부터 애인에게로 옮겨가면서 갑자기 이 편지의 네트워크를 하이틴 로맨스의 장치 안으로 옮겨놓는다. 하지만 이 문장이 담겨있는 노트의 오작동이 기다리고 있다. 최기표는 그 노트를 반 아이들에게 집어 던진 다음 뛰쳐나간다. 그들 중에서 그 노트를 혜원에게 전달할 준비가 된 친구는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기호 안에 던져진 메시지. 그때 노트를 집어 든 사람은 유대이다. 그런 다음 그 메시지의 올바른 수신자가 담임선생 권달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더해서 최기표의 노트를 전달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메시지는 기호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것처럼 보이면서 기호들 전체를 대표하는 대문자 메시지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 이야기를 기호들 사이의 차이의 세계로부터 교복이라는 단일기호로 환원시켜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과정으로 바꿔 쳤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하게 이야기의 일반경제학에 따라 교환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기호들 사이의 차이의 정치경제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이 결론은 예정된 수순을 따라간 것이다. 유대를 외곽으로 보내고 담임선생 권달호를 따라갈 때 이 결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런 다음 임권택(과 송길한)은 이야기의 축을 담임선생 권달호와 기호들 사이의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최기표 사이의 대립의 구도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이야기가 규율권력에 관한 도식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것을 지나치게 빨리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대치시켜 버렸다는 의심이 든다.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순간은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에 나타난다. 최기표의 노트를 읽은 담임선생 권달호는 정확하게는 칠판을 향해 기대어 서서, 하지만 프레임의 구도상으로는 우리를 바라보고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라고 중얼거린다. 그게 우리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구도상의 이유로 그렇게 찍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영화는 여기까지 그런 구도로 찍은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갑자기 시간을 건너뛴다. 권달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의 동료는 커피숍에서 만나 다시 복직하기를 권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권달호가 최기표를 통해서 어떤 배움을 얻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만일 최기표의 메시지의 최종 목적지가 담임선생 권달호가 된다면 이 배송의 네트워크는 완전히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왜냐하면 단 한 번도 최기표의 메시지가 담임선생 권달호를 목표로 작성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기표는 반복해서 형우와 유대에게 자신의 노이즈를 전달했고 그것을 다시 메시지로 반송하려든 과정에서의 전술과 권력의 관계가 이 기호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기표가 자기의 메시지를 여동생에게 전달한 다음 담임선생을 경유하여 유대(와 우리들) 앞에 도착한 것은 정확하게 난 너희들의 전술을 잘 알고 있어, 라는 응답의 암호이다. 그것이 담임선생에게 읽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기호들 사이의 권력의 문제이다. 그런데 유대가 그걸 수신하는 대신 다시 담임선생인 권달호에게 떠넘길 때 그 메시지는 기호들의 네트워크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이때 이 영화는 거의 아무것도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기표의 메시지의 수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권달호는 동료와 헤어진 다음 두 번째 약속 상대를 만난다. 그 상대는 혜원이다. 나는 그 둘이 왜 만났는지 설명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최기표를 만나러 갈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준다. 그러자 권달호는 혜원에게 자신이 최기표를 한번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최기표가 혜원을 향해서 쓴 노트가 전달되었는지는 여기서 (그리고 끝내) 알 수 없다. 다음 장면은 부산 영도다리 앞 공장에서 일하는 최기표를 보여준다. 그 둘은 데이트를 하면서 최기표가 내년에는 검정고시를 볼 결심이라는 말을 한 다음 끝난다. 하지만 혜원은 권달호가 그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지는 않는다. 최기표도 권달호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혜원이 권달호를 만나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권달호는 마치 괄호처럼 사라진다. 그렇게 해서 최기표가 노트에 쓴 메시지가 한 바퀴 돌아서 마치 최기표 자신에게 반송된 것처럼 마주 보는 장면을 마지막 장면으로 끝난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표정이다. 아니, 그 말은 옳지 않다. 우리는 그 표정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는 최기표와 혜원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유히 최기표는 영화에서 빠져나간다. 아무것도 구성되지 않는 네트워크 속에서 메시지의 배달이 결국 실패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한참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최기표는 자기 앞으로 쓴 메시지를 재귀 대명사처럼 수신한다. 물론 두 명의 최기표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학교 안에서 교복을 입었을 때의 최기표와 공장에서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은 최기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다른 행동을 한다. 어쩌면 비로소 최기표는 혜원과 수평적인 자리에 간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처음부터 혜원을 수직 상승시킨 자리에 배치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지도 모른다. 이걸 성립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최기표는 복잡한 셈을 요구하지만 임권택 (과 송길한 )은 이미 할 이야기는 다 했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그저 에필로그처럼 슬그머니 다룰 뿐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교복이라는 기호의 네트워크로부터 이탈한 이 메시지는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메시지는 기호들의 네트워크 안에서만 활동하는 암호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내가 마주한 것은 하나의 불가능성이라는 상황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임권택이 마주해야 할 위험천만한 세계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가능세계는 현실로부터의 역산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나는 < 만다라 >를 다루면서 다시 이 문제와 만나게 될 것이다. 임권택이 난국을 해결하는 방식. 이 언저리에 놓인 심연. 나는 지금 그 어두운 심연 주변을 얼씬거리고 있는 중이다. (계속) 1981년 10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사 각본 송길한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김희수 음악 정민섭 진유영 박근형 김범기 이구순
1. 영화에 대한 논의는 항상 ‘보는 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 영화적 경험에서 보는 이는 존재하는 이와 동일하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는 앎과 감정, 행위를 매개하며 이를 통해 발생하는 심리적, 감정적 긴장은 영화가 제공하는 쾌락과 미적 경험뿐 아니라 미학적, 정치적 역사기술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이는 광학-카메라가 내포하는 소위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명백한 인과율 그리고 그 세계에서 구성되는 통일적 주체라는 허구가 아니라, 사건(이미지)들의 발생과 연쇄를 즉각적으로 대면하고 반응하는 ‘끊임없는 변화 속의 주체(관람자)’ 경험을 통해 파악된다. 요컨대, 영화가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미학적 역사기술은 속박되지 않는 이미지, 그리고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보는 이’라는 이미지-시각 동학의 재구성이라는 방법론을 가질 때 비로소 권력의 시선에서 제공되는 연대기와 인과율을 벗어나 대항-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치로 게라의 < 뱀의 포옹 >은 영화-역사-정치가 절합(articulation)되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영화는 신비한 효능을 가진 전설의 약초 야크루나(yakruna)를 찾는 독일 탐험가 테오와 그의 원주민 안내자인 만두카, 그리고 이들을 야크루나로 안내하게 될 젊은 무속인 카라마카테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카라마카테는 자기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압의 대상인 서구인 테오를 돕기 거부하고 서구적 관습을 흡수한 종족의 정보제공자(native informer) 만두카를 경멸하지만, 살아남은 종족의 생존을 돕겠다는 테오의 제안에 마지못해 두 사람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는 40여 년을 뛰어넘어 노인이 된 카라마카테와 야크루나를 찾으려는 미국인 에반스의 또 다른 만남을 보여주면서, 두 명의 서구인 탐험가가 떠나는 상이한 시간의 여정을 카라마카테의 존재를 통해 느슨하게 병치시킨다. 경이에 가까운 아름다움과 날것의 이미지가 자아내는 공포가 공존하는 아마존의 풍경은 그러나 서서히 원주민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식민권력의 폭력적 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여행자들은 천연고무 착취를 위한 원주민 학대나 원주민 아동들을 교화시키는 가톨릭 신부의 포악한 이면 등 서구 식민권력의 경제적, 문화적 폭력을 재현하는 장면들과 조우한다. 이 잔인한 식민지배/피지배의 무대에서 영화의 여행자들은 갈등하고 충돌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이어가면서 야크루나라는 목적을 향한 여정을 지속한다.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 리차드 에반스 슐츠 2. 실제로 19세기 독일인 탐험가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Theodore Koch-Grunberg)와 20세기 미국인 식물학자 리차드 에반스 슐츠(Richard Evans Schultes)라는 실존인물들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은 < 뱀의 포옹 >은 식민문학의 대표적 양식인 여행기(travelogue) 서사와 긴밀한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프론티어리즘에 입각한 서구적 영웅 서사와 기독교적 훈육제도, 공간이동 및 자연착취의 영역을 확대시킨 과학기술과 박물학, 휴머니즘과 이국애증, 제국주의적 욕망과 부르주아적 개인성에 바탕을 둔 여행기 양식은 유럽 식민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노골적인 얼굴이다. 그러나 여행기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착취에 기반한 지배/피지배라는 적대적 이분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행기 양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전통과 가치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기술자가 경험하는 긴장의 양태들인데, 이는 종종 기존의 제국주의 서사의 관습과 충돌하는 반-정복(anti-conquest) 서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반-정복 서사는 제국주의적 정복 서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결백을 지켜내고 싶었던 유럽의 부르주아 주체들이 활용한 재현 전략”(메리 루이즈 플랫)이다. < 뱀의 포옹 >이 서구 여행기 양식과 관련되는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가 유럽 제국주의와 맺고 있는 공모관계의 폭로라는 것이다. 영화는 테오/에반스와 카라마카테, 그리고 원주민들로 형상화되는 식민지배/피지배, 여행자/여행되는 자(travelees)라는 단순한 대립을 넘어 상이한 신념과 언어, 지식과 감정이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는 훨씬 복잡한 동학을 제시한다. 영화 중반의 고무나무밭 장면은 서구 자본과 (서구화된 콜롬비아인으로 제시되는) 서구 제국의 내적 주체(domestic subject), 그리고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원주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고무 채취와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분노한 마카테가 채취된 고무액을 땅에 버리고, 이를 알게 된 원주민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를 이끄는 것은 폭압에 시달린 원주민의 팔 잘린 신체가 전달하는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테오의 유럽 휴머니즘의 정서다. 아마도 롤랑 조페의 <미션> 같은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해왔던 유럽 휴머니즘의 감정은 결국 마카테가 원주민을 자비롭게(!) 사살함으로써 설 자리를 잃은 채 훼손된다. 테오의 유럽/휴머니스트/부르주아 여행자의 정체성은 그의 여정 내내 계속하여 의문시된다.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테오는 호혜라는 관습과 가치를 평화롭게 습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한 원주민 아이가 그의 나침반을 가져가자 테오는 사유재산이자 (유럽의) 테크놀로지/지식을 위협/강탈한 원주민에게 적대와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상심에 빠진 테오에게 카라마카테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백인의 태도를 꼬집고 타자(유럽)의 지식을 접촉하려는 자기(원주민)의 욕망을 변호한다. 결국 테오는 결코 ‘결백하지’ 않은 것이다. 도전받는 것은 기독교/가톨릭이라는 서구 종교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아이들을 콜롬비아 자본가 세력이나 원시적 폭력에서 보호하고 훈육하는 가톨릭 신부의 종교적 자비는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 아동에 대한 가혹한 채찍 형벌이라는 폭력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한편 에반스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의 커뮤니티는 메시아라는 일원신과 교회의 제도가 원주민들에 의해 ‘번역되는’ 또 다른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제시한다. 결국 제국주의적 정복서사나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이를 전유하는 < 뱀의 포옹 >의 궁극적인 전략은 유럽 중심의 다위니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로컬의 경험을 역사화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자가 기술 민족지(autoethnography)’의 의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유럽중심의 시각에 반하는 원시 아마존의 전통을 로컬 역사의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구적 이성을 대변하는 테오/에반스와 원시 아마존의 철학을 들려주는 카라마카테의 부단한 대화라는 접촉지대,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낯섦과 몰이해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영화는 결국 신비한 약초 야크루나로 향하는 목적론적 세계를 부인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지막 순간 등장하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는) 우주적 이미지는 근대의 시간을 부정하고 고대의 시원을 복원한다는 신화적 상징이라기보다,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로컬의 탈 식민적 역사기술을 시각화하는 창조적 카오스의 이미지 같다. 3. 플랫은 여행서사가 유행했던 근대 유럽의 소위 ‘지구적 차원의 의식’이 근거했던 과학 담론, 특히 박물학과 분류학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여행기 양식이 제공하는 가장 커다란 매혹은 낯선 공간과 이질적 문화라는 대상이다. 여행기는 이 낯선 사물들을 박물관마냥 채집한다. 어떤 사물의 이질성과 낯섦을 규정짓는 것은 그것의 낯선 배치, 즉 무질서다. 여행기는 이 사물의 무질서에 대한 보는 이의 매혹과 동시에 이를 다시 질서화하려는 어떤 욕망, 즉 분류학자의 의지를 가진다. 19세기 독일의 탐험가 테오는 전형적인 채집가이자 분류학자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면서도 그가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은 나비 채집본과 기록, 그리고 원주민들의 사진이다. 채집가인 테오에게 사진은 기억의 담지물, 탐사의 증거다. 테오가 카라타마테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사진은 속이 텅 빈 채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도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출라차키)일 뿐이라고 답한다. 카라마카테의 사진을 유럽인들에게 보여줘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 테오는 그에게 목걸이로 보답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이 장면은 이미지-기억의 가치에 대한 상이한 개념과 감각이 만나는 접촉지대 그 자체를 보여준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에반스가 버리지 못하는 축음기 역시 마찬가지다. 테오/에반스와 카라카마테의 대화들에서 기억저장소인 복제-이미지와 그 채집은 다르게 해석되거나 혹은 부인된다. 무엇보다 테오의 여행기는 영화 안에서 완성되지 못하며 심지어 사실 에반스는 가짜 탐사가/채집가이다. 실패한 여행가/채집가로서의 테오/에반스가 서사적 차원에서 유럽 민족지 담론에서 벗어나는 전략이라면, < 뱀의 포옹 >이 담아내는 경이로운 아마존의 풍경은 ‘이미지-보는 이’라는 영화적 차원에서 타자를 대상화하는 시각적 민족지이길 거부한다. 6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쳐 영화는 콜롬비아 아마존의 원주민 문화를 꼼꼼하게 담아내는 동시에(실제로 치로 게라는 5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를 이용하여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며 카라마카테를 비롯한 원주민 캐릭터는 실제 원주민을 캐스팅했다) 아마존의 풍경을 경이로운 흑백 파노라마 화면으로 ‘채집한다’. 무한한 지평선을 그리는 강,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만이 존재하는 원시의 고원, 헬리캠으로 촬영된 대지는 근대 인간의 개입이 차단된 자연 그대로의 이미지, 칸트적 숭고의 이미지다. 그러나 테오/에반스는 결코 영화 안에서 이 이미지들을 포획하는 시선의 담지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쇼트-역쇼트의 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아마존의 풍경과 원주민의 이미지들은 테오/에반스의 시점쇼트에 대한 수동적 대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자연과 테오/에반스, 카라마카테, 원주민들은 하나의 공간(프레임) 안에 배치된다. 나아가 이 숭고한 자연-이미지들은 광학적/디지털 복제물로서의 스스로의 본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테오/에반스에게 포획되기도 분류되기도 거부하는 이 이미지들은 스크린-이미지를 ‘보는 이’인 우리에게도 포획되거나 분류되길 거부한다. 오히려 영화의 응시는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표범이나 뱀의 눈처럼 비-인간의 시선을 통해 구성되며 무질서로서의 자연-이미지는 기존의 분류/질서에 따른 풍경화(landscape)이길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 뱀의 포옹 >은 흑백-파노라마라는 광학 이미지에 각인된 지배적 질서와 가치(원시로서의 아마존과 헐벗은 신체, 기억저장장치로서의 카메라/축음기, 채집된 증거로서의 복제 이미지)로부터 보는 이인 우리를 해방시키고 이미지-관람자 사이의 자유로운 접촉을 촉구하면서 서구 민족지 기술을 해체하는 정치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인터뷰 첫 번째 이야기: “그때는 내가 쓰면 최고의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시나리오는 영화에서 애매한 위치에 멈춰 서 있다. 아무도 연극에서 희곡에 해당하는 지위를 영화에서 시나리오에 부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영화에서는 <햄릿>이나 <벚꽃 동산>처럼 반복해서 (그것도 원작을 존중해가며 단지 해석만을 덧붙이면서) 만들어지는 시나리오란 없다. 시나리오는 오직 그 영화의 완성만을 위해서 쓰고 그 영화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 거기서 더 이상의 활동을 멈춘다. 아주 예외적으로 리메이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이미 완성된 영화의 그림자 아래 놓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소재나 인물이 흥미로웠을 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디서 시작되는 지는 영화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그저 이미지라고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사건이라고 대답했다. 약간 신중하게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사람에 대한 흥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을 시작할 때도 있다. 저마다 다른 시작. 영화에서 아이디어는 사유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종종 영화에서 사유는 어디에 머무는가, 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찾아내야 할 것이다. 시작이라는 장소. 서로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아이디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 가장 먼저 문자에서 멈춘다. 왜 영화는 문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을까. 단지 기능적인 이유로? 그럴 지도 모른다. 이때 누군가는 이 과정이 영화를 산문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문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떠도는 아이디어를 멈출 수 있을까. 시나리오는 정확하게 그 자리에 있다.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시나리오를 보았다. 일부러 읽었다, 라고 하지 않고 보았다, 라고 썼다. 에이젠쉬테인의 < 이반 대제 >의 시나리오. 완전히 반대로 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의 시나리오. 장 르누아르의 < 게임의 규칙 >의 시나리오, 누가 이걸 읽은 다음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까. 브레송의 <무쉐뜨>의 시나리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문들. 누구라도 금방 쓸 것만 같은 오즈의 < 동경 이야기 >의 시나리오. 거의 메모(의 콜라주)에 가까운 고다르의 <수난; 노동과 사랑>의 시나리오. 차라리 책에 가까운 에릭 로메의 시나리오. 종종 비평가들은 여기서 잘못을 저지른다. 혹은 여기서 금방 영화에로 옮겨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시나리오는 감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단 쓰면 배우들의 독해라는 문제가 뒤따라온다. 그(녀)들은 감독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말하자면 시나리오는 그들에게 주어진 세계이다. 여기에 수정이란 없다. 단지 그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와 만나야만 한다. 대사에 불어넣어야 할 인격. 배우는 하여튼 그 말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무엇보다도 그 말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삶의 조건이라는 시나리오의 상황. 주어진 운명. 그 틈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똑같은 의미로 제작자는 이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돈의 문제와 만난다. 영화가 요구하는 자본. 자본이 요구하는 영화. 그 둘 사이에서 힘겨운 투쟁. 노동은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가치의 이동. 그 안에서 예술적 가치란 어디에 있을까. 이때 시나리오는 자본의 도면도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똑같은 시나리오를 읽어도 파올로 브랑코와 하비 와인스타인은 완전히 다른 전표를 만들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아마 그러기도 전에 두 사람 중 한 쪽이 완전히 매혹된 시나리오를 다른 한 쪽은 그냥 찢어버릴 것이에요. 그럴 것이다. 이때 영화는 어디에 살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만난다. 임권택 은 오래 전, 1983년에 (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되던) <월간 영화>에 ‘저질 시나리오와 좋은 영화’라는 글을 썼다. 그때는 < 만다라 >를 찍고 난 다음, 그리고 < 안개마을 >을 만들고 난 다음, < 불의 딸 >을 준비할 때이다. 다소 길게 인용할 생각이다. 여기에는 시나리오에 대한 임권택의 입장이랄까, 약간 과장한다면 기대의 지평이랄 만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 흔히들 영화 예술은 감독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좋은 시나리오를 감독이 망쳤다는 말은 자주 들었어도 저질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성공담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 영화를 생의 전부로 알고 살고 있던 영화인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어려운 생계를 위해 부업을 갖는 이조차 드문 것을 보면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향 감각을 잃고 구원의 손길이 외부로 와 닿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이런저런 구실에다 책임을 떠맡기고 저질연탄을 찍어내는 기능공정도에서 안주하고 있지나 않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때와 장소에 대해서 전혀 방향감각을 알 수 없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싫거니와 그런 인생을 사는 건 더더욱 이나 싫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함에 있어서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수정을 불허한다는 단서를 붙이고서야 작품을 내주셨던 분도 계셨다. 그까짓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느 경망스러운 감독이 한 지문인들 고치려 덤볐겠는가. 그 분의 작품은 모두 진실인 것을...” (<월간 영화> 7/8월호)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임권택 은 송길한 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송길한이 차지하는 위치는 임권택을 떼어놓고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아마도 한국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1960년대 영화였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그 당시에는 연출과 시나리오가 분리되어 있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가 돌아다녔다. 제작자는 감독을 구하고 그런 다음 재빨리 배우를 정했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신이 시나리오를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은 너무 많은 영화에 동시 출연을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두 세 개의 현장을 가야만 했다. 그들이 시나리오를 읽을 시간은 서로 다른 현장을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였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피로에 지친 그들은 그저 잠을 잤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한국영화는 동시녹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대사를 성우가 녹음실에서 알아서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단순하게 비난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영화의 서로 다른 전통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네오리얼리즘 이후에도 이탈리아 영화들은 거의 동시녹음을 하지 않아서 그 소란스러운 오페라 아리아와도 같은 대사들의 목소리와 배우의 입은 거의 맞지 않는다. 반대로 프랑스영화들은 신경질적일 정도로 일치시키려고 애를 쓴다. 홍콩영화는 처음부터 북경 표준어와 광동어 사이에서 교체 가능하게 녹음한다. 말하자면 시스템의 체제 안에서의 역량의 통제에 관한 문제, 혹은 복잡한 인과관계 안의 중층적 결정으로서의 목소리의 위치. 자,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송길한은 (트뤼포가 공격적으로 정의내린 샤를 스파크와 앙리 장승, 자크 프레베르의 지문과 대사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좋은 시나리오’의 그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는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 흑조 (黑潮)>라는 작품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첫 번째 작품이 영화 제작을 목표로 한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말은 송길한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한국 영화현장의 조건을 잘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시나리오 원작은 1970년 한국영화와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시나리오를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결정되었지만 영화로 옮겨지기까지 3년이나 걸렸다. 송길한은 나쁜 시간에 도착했다. 그해 6월 김지하는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계간 사상계는 폐간되었다. 경부 고속도로가 7월에 개통되었지만 11월 13일 전태일이 청계천 6가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다음 분신자살했다. 그래도 이듬해 4월 박정희는 다시 제 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정치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영화는 숨 죽였고,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한국영화는 무자비한 검열과 무조건적인 항복 아래 정책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그저 시시한 구경꺼리가 되었다. 막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송길한은 쓸 이야기가 많았지만 시간을 잘못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충무로에 남았다. 어쩌면 그 자신이 물러날 데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여기에 관한 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 자신은 “그냥 그게 내 운명인 거요”라는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그의 첫 시나리오인 <흑조>가 이상언 감독에 의해 원래의 작품과 다르게 다시 각색되어 영화화가 된 다음 1974년부터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송길한은 거의 모든 장르의 시나리오를 썼다. 하이틴 영화인 < 여고 얄개 >, < 우리들의 고교시대 >, 애니메이션인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 ( 민병권 과 공동 각본), 전쟁영화인 < 도솔산의 최후 >, < 제 3공작 >( 윤삼육 과 공동 각본), 에로물인 < 독신녀 >, 무국적 무술영화인 < 낭화비권 >, (그리고 좀 놀랍게도 성룡이 출연한) < 금강혈인 >. 이 목록은 다소 참혹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1940년생 작가의 빛나는 30대에 보여줄 수 있는 재능의 시간을 어쩔 수 없는 세월 속에서 그렇게 낭비하듯이 보내버렸을 때 그건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운명에 대해서, 운명의 책임에 대해서, 존재의 물음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영화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불러 일깨운다. < 짝코 >(1980) (작품 연보에 따르면) 송길한 은 15편을 쓰고 난 다음, 그러니까 첫 번째 시나리오를 쓰고 난 다음 11년이 지나던 해, 1980년에 처음 임권택 을 만났다. 그때 임권택은 < 족보 >를 막 끝내고 난 다음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영화 < 낙동강은 흐르는가 >를 만들고 난 다음이다. 누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문제. 말하자면 사건. 누군가는 너무 일찍 만났기 때문에 서로의 인연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누군가는 너무 늦게 만났기 때문에 탄식을 할 지 모른다. 아마 임권택과 송길한은 몇 차례이고 충무로에서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충무로라는 경기장. 벤허다방에서의 전설적인 일화들. 베어가든, 혹은 퇴계로에서 을지로에로 이어지는 생선구이 대포집들. 두 사람은 충무로라는 좁은 골목길에서 11년을 서로 모르는 체 지냈다. 어떻게 서로를 모를 수 있을까. 어쩌면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둘 사이를 묶어내는 인연을 기다렸을 지도 모른다. 그 둘을 처음 묶어준 영화는 < 짝코 >이다. 지리산 태백산맥 어귀에서 만난 두 남자. 그 사이에 끼어든 한국전쟁이라는 시간. 빨치산 공비 짝코는 도망치고 그를 붙잡았던 송기열 경사는 그를 놓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 아마 그 자신도 짝코를 잡으려던 세월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짝코도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밤 그림자 타고 도망 다니게 될 것이라곤 몰랐을 것이다. 하긴 누군들 알았겠는가. 이야기는 그 둘 사이를 오가면서 플래시백이 시시때때로 스며든다. 두 남자의 삶의 시간. 우리들의 역사. 거미줄처럼 이어진 시간. 그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을 때 임권택과 송길한은 종종 좁디좁은 작은 방 안으로 삶을 수축시키기도 하고 때로 그 작은 사건을 역사 전체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끝없는 추락. 비탈에서 그렇게 떨어지는 짝코. 잘못된 미끄러짐. 그 앞에서 순간적인 송기열의 실수. 그런 다음 그들은 정반대의 이유이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의 오류. 단 한 마디로 이 영화는 걸작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이 영화를 알아보지 못했다. 21세기가 된 다음에 긴 세월의 먼지를 털고 이 영화는 임권택의 걸작의 반열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짝코>가 자신의 야심과 깊이를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더 멀리 갈 것이다. < 만다라 >(1981) 그렇다고 해서 금방 임권택 과 송길한 이 함께 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사이의 오랜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 노년의 루이스 부뉴엘과 장-클로드 카리에르, 데이빗 린과 로버트 볼트,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예. 하지만 종종 두 사람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 만다라 >의 첫 번째 각색자는 송길한이 아니라 이상현이었다. 송길한은 두 번째 각색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사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조건들이 겹쳤을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영화 <만다라>는 두 번째 판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송길한의 시나리오 판본을 읽어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미 임권택과 < 신궁 >에서 손발을 맞춰 본 정일성 촬영감독이 (잘 알려진 대로) 큰 수술을 받고 난 다음 “의사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찍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다는 심정으로” 촬영을 했다. <만다라>는 (아역배우를 하다 긴 공백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 주연 배우를 한 안성기 에게도 전환점이 되었다. <만다라>는 어떤 마술 같은 순간의 힘이 사방에서 빛나는 신기한 영화이다.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누군가의 힘, 때로는 감독, 혹은 배우, 가끔은 촬영이나 각본(의 대사)가 그 영화의 이것임을 드러내는 힘의 중심에서 형태를 만들어내고 존재를 증명하지만 또 어떤 영화는 그 모든 힘이 화음처럼 서로 조화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나는 기적이라고 썼다. 왜냐하면 이런 순간을 영화에서 맛보는 것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영화의 힘은 한편으로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긴장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이 긴장의 균형이 불화를 일으키고 종종 그 누군가의 힘으로 다른 힘들을 복종시킨다. 임권택 과 송길한 , 그리고 정일성 은 때로 제한된 조건과 시간 속에서조차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 안개마을 >은 한쪽에서 쓰고 다른 한쪽에서는 찍으면서 12일 만에 완성해낸 영화이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어떤 순간들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종종 대담한 힘의 결정. 그들은 그것을 때로 서로 믿었다. 서로 다른 힘들의 위상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구성. 갑자기 변형을 일으킨 시청각 기호들의 활용. 그들 자신은 별로 믿지 않았지만 그건 <안개마을>과 거의 동시에 찍은 < 나비 품에서 울었다 >의 알 수 없는 불균질에서 조차 그 힘을 가끔씩 거만하게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임권택과 송길한은 한국영화에서 거의 손대지 않은 영토를 차례로 건드려나갔다. < 불의 딸 >은 이미< 신궁 >에서 임권택이 다루었던 무속의 세계를 거의 환골탈태하다시피 하여 밀고 나아갔다. 여전히 숨어있는 이 걸작. 임권택과 송길한, 그들은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일상생활 안까지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 사람이 산사에서 불경을 외우면서 해탈을 꿈꾸는 승려라 할지라도(< 만다라 >), 혹은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들여다보면서 신 내린 무당일 지라도(<불의 딸>), 전쟁 통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강가에 빠져죽은 사람들 시체를 건져내서 살아가는 사내의 삶일지라도(< 길소뜸 >), 그저 삶의 비루한 곁에 다가가서 생활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생활 없이 인간이 어떻게 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 아마도 <길소뜸>은 임권택과 송길한이 만들어낸 화음의 절정일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대사, 모든 씬에서 어떻게 영화가 자기의 순간을 만들어내는지를 이끌어낸다. 여기서 모든 장면들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자기를 보존하면서 단지 체험되는 것을 매번 넘어서서 그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여기서 방점은 바라본다, 는 말이다. <길소뜸>은 대부분 불안정한 감정의 관계에 내내 머물면서도 매번 어느 순간 마치 곡예를 하듯이 그 안에서 자기 개연성을 찾아 균형을 맞추고야 만다. 이 영화는 분명히 그 두 사람 누구에게나 이전에 보여주지 못했던 경지에 스스로 가 닿은 작품이다. 비구니회 제작중단 요구 현장 그런 다음 < 비구니 >가 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한 여인의 비구니로서의 고행 길. 불가에서는 수행을 하기에 전쟁보다 더 좋은 시절은 없다, 라고 할 만큼 지옥의 수행의 나날들. 1984년 4월 7일 신흥사에서 주연배우 김지미 씨가 삭발의식을 하면서 첫 촬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국 비구니회에서 제작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유는 시나리오에서 다룬 비구니의 육보시 장면을 예로 들었다(고 한다). 나는 정확하게 어느 씬이 문제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시나리오를 읽어보았지만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추측으로) 아마도 씬 87, 한국전쟁 중에 피난중인 아이들을 떠안은 비구니 수경이 중공군을 피해서 추운 겨울날 남하하다가 타이어가 펑크 나서 수리중인 트럭에 아이들을 태워 고아원까지 내려가기를 부탁하자 운전수가 수경에게 담요를 내밀면서 “(은밀히) 마누라 잃은 지가 3년이우, 애들은 책임지고 태워줄 테니까 대신 내 사정도 좀 봐 주슈” 라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에는 그런 다음 별다른 장면이 없다. 아이들을 태우고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나면 다음 씬으로 옮겨간다. 4월 16일 전국 비구니회는 법원에 제작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그러자 영화인회의에서는 4월 31일에 창작자유 수호결의 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전국 비구니회는 5월 11일에 제작 중지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초파일이 그 무렵이었고 <비구니> 팀은 수몰 지구에서 일단 촬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항의는 점점 거세졌다. 태흥영화사는 6월 13일 제작중단을 선언했다. 분하지만 <비구니>는 거기서 끝났다. ( 임권택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전쟁 장면은 내가 이제까지 찍은 것 중에 가장 힘 있게 찍혔는데...” 라고 대답했지만 그건 이미 회고담이다. 시나리오를 읽은 내 기분으로 <비구니>는 < 만다라 >와 < 길소뜸 >, 그리고 < 아제아제 바라아제 >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았을 것만 같다. 혹은 그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다음 임권택 과 송길한 , 정일성 은 다시 함께 작업하지 못했다. 임권택과 송길한의 다음 작품 < 티켓 >은 구중모 가 찍었다. 강원도 항구도시 구석 지하에 자리 잡은 다방을 무대로 티켓을 팔며 먹고 사는 네 명의 여자와 그녀들을 다시 뜯어먹는 다방 마담을 중심으로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 삶의 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이 영화는 임권택과 송길한이 찾고 싶어 했던 리얼리즘의 한쪽 끝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리얼리즘은 임권택의 목표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일상생활의 디테일 안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오로지 그것만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안에서 성찰의 방법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게 조선시대가 되었건 일제 강점하가 되었건, 혹은 해방 전후의 혼란 속으로 들어가건 새마을 운동을 하던 농촌 마을로 가건 거기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소재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송길한은 <티켓>을 위해서 강원도 항구도시에 머물면서 여관방에서 계속 티켓을 끊어가며 낯선 다방에 커피 배달을 시켰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고 오래 전 인터뷰에서 내게 말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켜켜이 쌓이면서 이 영화의 인물이 되어갔다. <티켓>에는 사람에 대한 어두운 실망과 삶에 대한 피로가 가득히 고여 있다. 임권택과 송길한은 단 한 번도 그들의 작업을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단순히 반대말인 비극으로 끝냈다고 말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그저 열어놓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파국을 맞이했으며 그 앞에서 결국 비관적인 비감이 감돌고 있었다.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세상 앞에 선 슬픈 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에 대한 연민. 어쩌면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갔다면 임권택과 송길한은 각자에게 새로운 구성의 방법에로 나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공동 작업은 여기서 끝났다. < 씨받이 >를 작업하던 중 송길한은 미국에 가서 다음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의 취재를 했고 임권택은 그 시나리오를 부여잡고 세트에서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남자 아이를 낳으러 안채에 들여다 놓은 어린 소녀 옥녀의 이야기를 찍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었고 강수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유럽의 (이른바) 3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수상한 공식적인 첫 번째 호명이었다. 그들은 그런 다음 각자의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아마 긴 이야기가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누군가는 만날 것이며, 또 누군가는 헤어질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그렇게 자기의 힘을 가다듬을 것이다. 물론 송길한은 여전히 시나리오만을 고집스럽게 썼다. 장길수의 두 편의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와 <불의 나라>를 썼고, 노세한 의 두 편의 영화 < 아낌없이 주련다 >와 < 대학촌의 달빛 >을 썼다. 그런 다음 이장호 의 < 명자 아끼꼬 소냐 >를 쓰고 나서 그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작품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그가 임권택과 왜 더 오래 작업하지 않았느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왜 더 많은 작업을 더 오랜 기간 동안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만일 송길한이 이른바 1995년 세대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었다면 한국영화는 지금 보다 훨씬 성숙한 영화의 명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작업할 행운을 가질 수 있었던 젊은 감독들은 새로운 경지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다. 나는 다가올 시간을 기대하면서 송길한이라는 이 힘센 작가를 만나러 간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정성일 평론가(이하 정성일)_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먼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감독, 촬영, 편집, 배우, 이렇게 많은 결정 중에서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선택했습니다. 1970년 동아일보에 <흑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시나리오 작가로 입봉하였습니다.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다음 감독으로 다시 데뷔하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작업만을 해오셨습니다. 송길한 작가(이하 송길한)_ 처음부터 영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영화를 좋아하고 그랬지만, 근데 나이 육십을 넘어서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까 영화는 내게 적어도 운명이었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어. 그전에는 늘 전전긍긍이었지. 여차하면 보따리 싸려고 하다 세월이 간 거지. 그때 한번 해볼 만하다, 하고 나를 붙들어 주신 게 임권택 감독님이었어. 서로 그런 것이 없었으면 떠났지, 그렇게 수많은 감독하고 한 건 아니지만. 나는 영화하고는 안 맞았거든. 생계형이었던 거지. 나는 생계형이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엄밀히 말해 생계랑 상관없이 내가 모두 걸고 한번 써봐야지 하는 거랑은 다르거든. 생계형도 많이 썼지. 그건 서로 알아. 먹고 살아야지, 란 말이 안 나오고,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그 다음을 걸고 임 감독님이랑 같이 작업을 한 거여. < 피아골 > 정성일 _ 작가로서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는 어떤 작품들이었습니까? 송길한 _ 쥘리앙 뒤비비에부터 시작해야하는 얘기지. (고향) 전주라는 데가 군산 비행장이 바로 옆에 있어서 군인들에게 틀어줘야 하는 영화를 할리우드랑 프랑스 등지에서 많이 수급했어. 그걸 야매로 살짝 빼내가지고, 소위 ‘깡통극장’이라고 하는, 지붕이 깡통으로 되어 있고 낮은 나무의자가 있는 극장에서 봤었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뭔가 알만할 때가 고(등학교) 일, 이(학년)가 아닌가 싶어. 그때 한국영화 촬영장을 갔거든. 이강천 감독이 < 피아골 >, < 아리랑 >을 지리산, 전주에서 찍었다고. 참말로 그때만 해도 엉성스러웠고, (웃음) 그래도 소위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6.25 전쟁 끝나고 오고갈 데가 없으니까, 한 무더기가 부산에 있었고 한 무더기가 전주에 있었거든. 그때 전주 극장에서 그들을 먹여 살렸어. 거기서 있던 것이 김진규 선생, 허장강 선생, 이예춘 선생, 그들을 다 거기서 만났던 거야. 아주 조그만 골목이 있는데, 그땐 배우인줄도 몰랐는데, 뭔가 분위기가 달랐어. 어느 날 이강천 감독이, 그러니까 원래 전주가 아니고 군산에 있던 양반이야. 이 양반이 군산에서 극장 간판 그렸는데 미술을 잘했어. 전주 백도 극장 홍보맨으로 와서 극장 간판을 그렸어. 그때 아직 잔류 공비가 있어가지고 민간 버스가 털리고 그랬었는데, 휴전이 53년도 7월 27일이었는데 그 이후에도 공비들이 산간에서 버스 스톱시키고 먹을 거 다 거둬가고 그럴 때였으니까. 도(道) 경찰국에서 반공의식을 길러야한다는 의도에서 영화제작을 한 거야. 그게 그 유명한 <피아골>이야. 요 며칠 전에도 국군방송에서 그걸 봤어. 그 시나리오를 나중에 영화인 되고나서 이강천 감독이 줘서 시나리오를 봤는데 지금 봐도 잘 쓴 시나리오야. 영화가 여건상 그걸 못 따라가서 그렇지 참 잘 쓴 시나리오야. 전라북도 경찰국 공보과장 김종환 씨가 썼는데, 그 양반이 소위 빨치산을 많이 다루고 현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건 거짓말 없는 시나리오야. 그땐 몰랐어. 어느 땐가 돌아가신 노경희 씨가 김지미 씨를 붙잡고 <피아골>을 (다시 제작) 해볼 생각이 없냐, 했는데 나는 귀가 번쩍 뜨였지. 근데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 나는 그걸 좋게 생각하고 (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근데 그 무렵 패션에는 안 맞었어, 사실 (그때 제작을 하려고) 다루면 오히려 < 짝코 > 스타일이 되는 거였어. 빨치산이고, 적이다 공비다, 이런 반공 개념 말고. 그들이 거기서 싸우고 최후까지 버텨내고 그런 게 결국 인간이거든, 이게 나는 뭉클했던 거지. 영화로는 (크리스티앙-자크감독의) <싱고아라 Singoara>(1949) 그게 어려운 영화였어. 어릴 때부터 좋은 영화를 많이 접했었어. 아주 어렸을 때 본 채플린 영화 빼고는 고등학생 쯤 되어 본 것은 < 나의 청춘 마리안느 >였는데, 그 영화 땜에 잠도 잘 못자고 (웃음) 난 그때 왜 그렇게 조숙했나 몰라.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프랑스 영화가 흥행성은 없어도 예술성이랄까 막연하나마 그게 월등히 차이난다는 것을 느꼈어. 이 차이가 중요한 거지. 영화판에 들어와서도 내게 암암리에 정신적 영향력을 줬을 거야. 내 감수성에 너무 맞았고 그때는 텔레비전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때 꿈을 주고 판타지를 주고 했던 게 영화가 아니었을까. 정성일 _ 선생님 연배의 영화인들을 뵙고 같은 질문을 하면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들, 특히 서부영화나 < 자전거 도둑 > 같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하시는데 선생님은 프랑스 영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게 참 인상적입니다. (웃음) 송길한 _ 난 프랑스 영화에 끌렸어. 물론 < 자전거 도둑 >이나 펠리니의 < 길 >이나 나도 다 재밌게 감동적으로 봤어. 여러 날 가슴 속에 생각하곤 했는데, 난 대사가 시끄럽고 그런지 이태리 영화보다 프랑스 영화가 훨씬 부드럽게 마음에 와 닿았어. 이태리 영화는 간단한 것도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지, (웃음) 나는 조용하게 젖어 들어오는 것들이 훨씬 좋았어. 쥘리앙 뒤비비에는 시인이기도 하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본 채플린은 만화 개념이었고, 영화가 이런 것이었구나, 아, 죽이네, 그런 생각이 든 건 프랑스 영화였어. < 나의 청춘 마리안느 >는 나를 숙성시킨 영화였어. 소년단계에서 청년 단계까지, 상당한 영향력이야. 주인공 마리안느를 왜 그렇게 찾고 싶었던지.. (웃음) < 오발탄 > 정성일 _ 선생님이 영화 현장에 도착하기 전 한국영화는 1960년대 황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대마다 한국영화에 대한 전제랄까., 선입견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 선생님에게 한국영화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유현목 감독의 < 오발탄 >을 보고 반했죠. 그게 이범선 의 소설도 좋았지만, 영상의 그 현실 감각이 너무 좋았다고. 아 이런 감독도 있었구나. 사실 유현목 감독을 흠모했어. 그때는 영화판에 들어 올라고 생각도 안했거든. 근데 그 뒤에 이 양반의 일련의 영화들은 그냥 그랬어. (잠시 생각) 한국영화 중에 특히 <오발탄>이 그렇게 좋았어. 그 리얼리즘도 좋았지만 그 속에 담긴 유현목 특유의 허무주의 같은 게 그때 감성에는 매우 맞았던 거 같아요. 정성일 _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송길한 _ 학교를 다니다가 관두고, 거 참, 개인 사정이 거기 있었는데, 나는 청춘이나 이런 거랑 거리가 멀게 이십대를 보낸 거야, 그러다가 대한 석탄공사 시험에 합격을 해서 도계 광합소에서 한 삼년 석탄을 캤지, 근데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석탄을 캐기는 아까운지 소장이 나를 계장으로 앉히더라고. 그때 수입이 괜찮았어. 술 좋아하고 여자들 많고 거기가 아주 재미있는 데였어. 근데 거기 계속 있는 게 아닌 거 같아서 퇴직금 받아서 나와 버렸지. 서울에 다시 오니 힘들지. 중부시장가면 까대기라는 게 있었어. 쌀 한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리면 5원, 들어 올리면 10원. 그런 노동을 했어. 살아야 하니까. 짬이 생기면 시네마 코리아 알지? 조선일보 있는 데 있던. 동시 상영할 때 난 그때 거기서 정말 좋은 영화를 많이 봤어. 아침에 일찍 가. 그래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저녁에 오고, 시원찮은 거 볼 때는 잠을 자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맨날 소비적으로 보기만 할 것인가 그래서 수첩에다 보기 좋았던 것, 인상적이었던 것, 대사가 쌈빡했던 것. 끄적 끄적 메모하면서 그걸 봤어 그게 나의 유일한 학교였어. 그러던 차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부문이 나오더라고. 근데 내가 무슨 텍스트가 있겠어, 탄광에서 서울 올라왔을 때 갈 데라고는 시네마 코리아뿐이 없는 거여. 한 씬에서 다음 씬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디렉션이 움직이는 거고, 이 씬에는 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가장 원시적인 거지. 그냥 무대뽀로 썼어. (웃음) 그때 돌아가신 오영진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셨어. 그런대로 심사평도 괜찮았어. 내용은 별 거 없고 프랑스 스타일의 러브 드라마였는데, 감각이나 그런 것이 씀씀이가 너무 아름답다고 뽑아주셨던 거죠. 그렇게 그 양반을 만나게 되고. 그 양반이 정치하느라고 무척 바빴는데, 시간 나면 토요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당사(堂舍) 앞으로 와라, 그러면 거기 가서 얘기 듣고, 이 양반은 얘기해도 시나리오 가르쳐줄 정신은 없고. 그런데 사상계에 이 양반 작품이 실렸는데 아, 이거 장난 아니구나, 많이 배웠어. 당선작은 이상언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서 당시 국도극장에 붙였는데 흥행은 부진했어요. 그때 당선작이 수준이 너무 높다고 한 단계만 낮춰서 신파로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때 내가 학을 띠고 속으로 여기서 얼른 짐을 싸야겠다 했어. 정성일 _ 맨 처음 시나리오를 쓰실 때 영화를 본 것 말고는 배운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양식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씬의 분류나 장면의 기술적 표기랄까, 그런 것들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송길한 _ 영화보고 배웠지. 이달 말이 동아일보 마감이야. 그런데 문서화를 해야 하니까, 그래서 생각을 해본 거지, 씬은 도대체 어떻게 되고. 고등학교인가 중학교인가, 교과서에 시나리오 단편 공부한 게 생각나서. 헌책방을 더듬어 갖고 그걸 다시 찾아봤어. 그게 유일한 교재였어. 그리고 나서 시네마코리아에서 본 것을 그 이튿날 또 종일 보고, 며칠 또 종일 보고, 내가 쓴 걸 그거하고 씬이나 지문을 맞춰 보는 거여. 씬이 구분이 되잖아. 요즘과 같이 커트로 갈 때도 아니고. 내가 쓰고 싶은 데로 썼는데 됐어. 그런 것이 오히려 오영진 선생한테 더 좋아 보였나봐. 실험적이고, 불란서 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였나봐. 내가 속았는지 그 양반이 속았는지 모르지(웃음) 정성일 _ 그 당시 문학은 모든 예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는 결국 이야기꾼이기도 한 건데, 그때 선생님께 영향을 미쳤었던 소설가 혹은 소설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당연히 최인훈의 <광장>이지. 딱 하나야. 두 개도 필요 없어. 나는 깜짝 놀랐어. 이런 작가가 우리나라에도 있는가. 그때 의식 있는 학생들에게는 센세이셔널 했지. 4.19 직후니까. 반짝 자유로울 때 그 찬스에 잡지에 실린 거야. 그러고 나서 바로 5.16으로 아작이 났지만. 그러니 참 우리 삶이 험준해. < 흑조 > 정성일 _ 죄송하게도 선생님의 당선작 < 흑조 >가 영화화 된 작품을 보지 못해서 그저 줄거리로 짐작을 해보면 줄거리는 불륜이지만 섬에 갇혀 벌어지는 이야기의 상황이랄까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부조리극과 실존주의적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만.... 송길한 _ 당연하지. 칼 마르크스, 이런 거 집어치우고 나면 가는 게 실존주의니까. 그리고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이 한마디에 우리는 완전히 갔어. 살아 실존하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문학이나 기타 등등 이런 거에 앞서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윤리나 도덕보다도 더 앞에 서서 우선 살고, 살아 숨 쉬고 보자는 거지. 이건 뭐, 굉장히 대단했지. 그래서 내게 영향을 줬던 것은 오히려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였지. 근데 오랜 기간 동안 이런 걸 못하고 영화 하니까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영화가 그때 장사가 잘 된 것도 아니고, 긴 시간 힘들었던 거지. 정성일 _ < 흑조 >를 쓰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송길한 _ 그 뒤에 본 것인데 클로드 를르슈의 < 남과 여 >를 볼 때, 아 이렇게 못 만드는가?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난 요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젊은 친구들의 창작과정이 불만이야. 그냥 머리만 써. 정말로 욕구하고 피나게 갈구하는 게 없으니까 안 되는 거다. 그게 뭔지 한번 찾아보고 생각해봐라, 그때는 그런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쓴 것 같아. 정성일 _ 시나리오 작가의 운명 중의 하나는 누가 자기 작품을 연출하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쩌면 처음 등단하신 무렵에는 임 감독님을 만나지 않는 쪽이 다행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때 감독님은 다찌마와리 액션영화, 만주 웨스턴 영화. 무국적 무협영화를 만들면서, 지금도 그때 시절 영화가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늘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송길한 _ 맞어. 감독님도 그런 소리했어. 기억 남는 것은 < 애꾸눈 박 >뿐이여. 그때에도 내가 볼 때 이 작품은 꽉 짜여있고 좋았다고 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구. (웃음) 정성일 _ 처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당시에 한국영화에서 활동 중인 감독 중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이 사람이 연출하면 참 좋겠다, 하고 염두에 둔 감독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없었어. 그게 유일하게 그나마 눈에 띠었던 것이 유현목 감독이었지. 신상옥, 한형모, 이 분들은 흥행은 됐지만 내가 하고 싶은 세계와는 멀었고, 그나마 얘기를 하면 좀 소통을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내가 작가가 되고 나서 우연히 유현목 감독을 만났는데, 둘이서 술도 먹고 이러고, 지금은 알겠는데, 그때는 이 양반이 뭔 얘기를 하는지 몰랐어. 자기하고 하나 해볼 생각이 없냐 그러는데, 이게 판타지인지 뭔지 모를 소릴 하는 거야. 어느 날 불쑥 나를 만나더니 <삼일로 왕>이라는 시나리오를 딱 주고, 그때 삼일빌딩이 생길 때거든. 그게 삼일빌딩 건축주의 입지전을 쓴 시나리오야. 그게 도저히 마음에 안 맞는다고 내게 각색을 해달라는 얘기야. 그런 얘기는 쓴 사람한테 가서 얘기하시죠. 건축주를 하늘같이 모시자는 얘긴데 < 오발탄 > 정신은 다 어디 갔냐고 내가 막 항의하고 자리를 떴어. 철이 없었지.(웃음) 내가 그때 상당히 사나웠어. (웃음) < 만추 > 정성일 _ 그 당시 감독들 중에서 김기영 감독이나 이만희 감독은 어땠습니까? 이를테면 < 하녀 >나 < 만추 >는 어른이 된 다음에 본 세대이기도 하신데요. 송길한 _ 두 개는 다 좋았지. 난 이만희 감독 작품 중에 < 만추 >에 빡 갔지. (웃음) 이 소재가 이만희 감독한테 딱 맞은 거야. (< 7인의 여포로 > 때문에) 반공법에 걸려 감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같은 감방에 있었던 사람이 휴가를 얻어 촬영현장에 있는 이만희를 만나러 온 거야. “너 언제 나왔냐” 그러니까 “석방이 아니라 휴가 나왔다.” 이게 포인트가 됐대요. 이게 정말 중요한 얘기여.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야. 이만희 감독이니까 그 생각을 한 거지. 이걸 여자로 바꾸면 어떨까 그림 나오잖아. 대단한 거여. 그 뒤에 < 삼포 가는 길 >도 처음은 괜찮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져서 좀 그냥 그랬고. 정성일 _ 선생님이 등단했을 때 시기가 안 좋았습니다. 정확하게 그때부터 한국영화가 이중 검열과 외화수입을 위한 스크린 쿼터제로 긴 시간 동안 내리막이었습니다. 아마도 매일 매일이 선생님께 실망의 시기가 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기 전 십년의 시간 동안 영화를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계셨습니다. 영화의 어떤 매력이 선생님을 실망 속에서도 붙잡아두었나요? 송길한 _ 내가 떠난다고 해도 세상에서 내가 딱히 할 만한 일이 안 떠올랐어요. 게다가 그 시절에는 내 노동에 대한 가치가 있고 대가가 있고 해야 할 텐데 그런 게 너무 없었어. 그 무렵에 찬스만 있으면 떠나고 싶었어. 더 볼 것이 없다. 예술이고 지랄이고 아무것도 없다. 완전히 공황 상태에다가 일종의 절망. 그래도 하자고 찾아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가 참말로 웃기는 시대로 가잖아. 저급한 멜로드라마 아니면 얄개시리즈까지. 또 여자 시리즈가 십 년 동안 판을 쳤어. 나도 여자 시리즈 많이 썼어. ‘여자’자 안 붙으면 간판을 못 걸 정도였으니까. < 순자야 > 정성일 _ (웃음) 작품 제목을 찾아보니 많이 쓰셨습니다. < 순자야 >랄까... 송길한 _ (정색을 하며) 그 중에 < 순자야 >는 괜찮았어요. 그건 하길종 , 최인호 가 보고 깜짝 놀란 작품이야. 원래 그 제목이 <순자야 문 열어라>야. 그게 전두환 부인한테 문열어라하니 시나리오 검열에서 가만있었겠어, ‘문 열어라’를 빼고 그냥 <순자야>로 간 거지. 그때 한진에서 하길종이 < 한네의 승천 >을 하려고 했던가, 그랬는데 최인호 작가랑 제목만 보고 킥킥 웃은 거야. 근데 읽어보니 그게 아닌 거야. 그걸 보고 최인호가 깜짝 놀랐지. 형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나도 재밌게 썼고. 그 내용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월부장사를 신성일 이가 하고 정윤희 가 순자를 했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신성일, 이영옥 주연) 미스캐스트에다 감독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영화 나온 거 보니까 부끄럽더라구. 감독이 운명이란 이야기를 했잖아. 아무리 잘 써도 최종집행은 감독이 하니까 감독이랑 소통이 안 되면 안 되잖아, 그때 짐 싸려고 하는데 삼영필림에서 (기획실장을 하라고) 나를 부른 거야. 그때 월급도 꽤 빵빵했지. 작품도 하고 싶은 거 쓰고 니가 해라. 이렇게 제의가 온 것이지. 거기서 제일 처음 하고 싶어 한 게 임권택 감독이야. 회사에서 전폭적인 기획권한을 내게 줬으니까. 그때 레퍼토리가 뭐냐. 맨 처음 만난 게 김원일의 <노을>이었어. <짝코>가 신(新) 빨치산 얘기라면 그것은 원조 빨치, 구(舊) 빨치산 얘기였어. 어떻게 해방직후 빨치가 태어났는가, 그걸 찍으려면 세트를 다 지어야 하는데, 몇 번이나 강대진 사장 옆구리 찔러봐도 대꾸가 없어.(웃음) 임 감독님한테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했어. 근데 읽고 오더니 이런 걸 영화하자는 사람이 다 있네, 이러는 거야. 긴 소리 짧은 소리 할 거 없고. 회사가 이 세트 지어줄 거 같아요? 나보고 그래. 그걸 맨 처음 하려고 했었어. 판이 무너지려고 했었는데 삼영필름 부속 영화사에서 임 감독님이랑 나를 부른 거야. 소위 탱크 부대 얘기였지. 탱크 부대를 찾아갔는데 안기부, 보안사 요원들이 따라붙는 거여. 탱크가 뒤집어져 폭파하는 얘긴데, 소대장이 부하들을 살려내고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장렬하게 죽었다는 신문기사인데 이건 반공영화나 우수영화상감이지, 우린 재미가 없었어. 그래도 일단 전방에 가봤지. 이 이야기는 소대장과 탱크 부대원간의 병영 생활이 어떻게 얽혀있는가가 키를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병영에서 머무르려고 했는데... 택도 없어. 완전 자포자기 하고 오다가 내가 < 짝코 > 얘기를 넌지시 했지. 여관방에 둘이 들어가서 소주를 한 잔씩 한 거여. 30년 동안 잡으러 댕기는 얘기인데 우리가 하자. 그렇게 시작된 거여. 정성일 _ 선생님께서 임권택 이라는 이름에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한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 _ < 잡초 >는 기억에서 좀 멀어지고 그렇게 와 닿지는 않더라고. 내가 깜짝 놀랐던 거는 그 < 족보 >. 아주 좋았어요. 주선태 로 상정되는 설씨 집안의 비극은 감독님의 직간접적인 체험이 없다면 그렇듯 생생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느꼈어요. 일제시대를 살아내면서 멸망하는 나라를 표현하는데 라스트의 만장행렬과 새파란 보리 싹이 돋아나는 황토 언덕을 보는데, 어휴 뭉클하게 하는 거요. 그리고 < 깃발 없는 기수 >, 해방 무렵에 전기부족으로 전봇대 불이 꺼졌다 들어왔다 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소품을 다루는 대가야. 그런 것들이 다 빈틈없고, 특히 선우휘의 원작 소설에서 간결하게 넘어간 대목들, 거기가 영화를 하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대목들이 있는데 거기서 추가한 부분들이 정말 빛나는 거야. 단순히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괄목할만한 발견이었죠. 임 감독님의 세심하고 사려 깊은 연출력에 대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을 사람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떠셨어요? 송길한 _ 뭐랄까. 눈이 빛나고, 순발력이 뛰어난 건 이미 소문이 나 있었지만, 안으로 많은 얘기를 간직한 분 같았어요. 내가 임 감독님을 굉장히 순수하게 본 거는, 언젠가 대포집에서 내게 그러더라고. 송 작가 나 그렇게 순진한 사람 아니요, (웃음) 그때 알아본 거지, 임권택 감독에게 사실 어느 시간이 제일 기가 막히게 좋았냐면 제도권의 시간이 아닐까 싶어요. 이 양반은 부담이 없잖아. 이때가 최고로 좋았던 때고 충만한 때인 거지. 우수영화만 찍으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 우선 상업성에서 벗어나는 것만 해도 살판나는 거지. 이거 아는 사람 별로 없어. 그때 이 양반이 정리하고 앞으로 가야하고 침잠되고 그러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이 딱 온 거야. 그거 낭비한 사람 무지 많거든. 난 그걸 굉장히 대단하게 봐. 좌충우돌하며 깨달은 것도 있지만 정돈해가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유용하게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어. 정성일 _ 그래서 그 시간에 임권택 감독님만 살아남은 거군요? 송길한 _ 다 좋았잖아. 작품이 나쁜 것 없었잖아. 박스오피스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다는 건 정말 행복한 거지. 거기서 자기 하고 싶은 걸 한다고 생각해봐. 그걸 또 백 프로 활용한 것도 무서운 거야. 유일하게 살아남았잖아. < 짝코 > 정성일 _ 선생님과 처음 만난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 짝코 >입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짝코>는 어떤 영화입니까? 송길한 _ (잠시 생각) 일단은 획기적이었고, 그때 소위 흐름이란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 짝코 >에 대한 시점을 사람을 위한 내면적인 측면(에 두고 보면), 영화상에는 그렇게 안 나타나 보인다고 하더라도 서브텍스트가 굉장히 좋은 영화야. 내면을 읽어나간 거요. 형식적으로 플래시백은 늘 있는 것이지만, 플래시백이 현재진행형에 들락날락하면서도 극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을 갖느냐, 안 갖느냐, 그게 문젠데 묘하게도 힘을 받는 거요. 처음에는 다들 이상하다 생각했지. 그때는 영화진흥공사에서 어떤 영화든지 영화인들을 모아놓고 시사를 했어. <짝코>가 상영되는 동안 임 감독님이랑 나랑 뒤에 서있었어. 완전히 사람들이 빨린 거야. 송길한 이 술만 마시고 하더니 다시 봤다고 하더라고. 임 감독님도 표정을 보니 흐뭇해하더라고. 그때 플래시백이 참 많았지만 딱 줄자로 잰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갔어. 플래시백은 내면의 흐름 이런 걸 모르면 안 돼. 그것이 살아있다는 거지. 지난 일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더 열 받게 하고 정서적으로 파란(波瀾)을 만들어내는 것. 거기서 서브텍스트가 들어가야 더 발전을 하거든. 그게 굉장한 생명력이야. 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어. 임 감독님 말마따나 영화가 흐르는 방향, 영화가 가고자 하는 쪽으로 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게 그 말이여. 겉보기에는 그저 소박해보이지만 그 양반의 철학이 제일 맞는 철학이여. 영화도 생물이죠. 가고 싶은 쪽이 있다고 그런데 우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서 미끈하게 못 가잖아.. 굉장히 단순하고 철학적인 얘기야. 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부단히 그 길만 천착해 온 게 임 감독님이 지금까지 작업을 이뤄낸 저력인거 같아. 크게 봐서. 정성일 _ < 짝코 >를 작업할 때가 등단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전까지 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사람은 이 점은 좀 다르구나, 느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송길한 _ 치밀한 준비성! < 짝코 >를 나하고 얘기하면서도, 앉았다 누웠다 뒹굴뒹굴하면서 얘기한 거 같아도 며칠 준비한 거여. 나한테 준비한 메시지가. 어떤 에피소드를 갖고 웃다가도 자기 절제, 흐트러질까봐서 우리 너무 웃는 거 아니여? 그럴 때 나는 매력을 느꼈어. 그때 작가인 나도 경계를 하게 되는 거야. 우리가 집필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에피소드 얘기하면서 웃는 건 당연한 건데, 거기까지 절제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만만치 않네, 굉장하네. 무서움 같은 것이 느껴졌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이 < 짝코 >를 쓰기 전에 선생님에게 요구한 점이 있었습니까? 송길한 _ 없었어. 내가 초고를 썼지. 나는 다분히 그때 그 시절 검열을 솔찬히 의식했었어. 거기서 풀어지게 된 것, 내가 기뻤던 것이 뭐냐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인간으로 놔버리니까 그때부터 이야기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한 거야. 당신은 그 작품 준비하고, 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쓰고, 그리고 이삼일 만에 만나서 쓴 거 보여주면 군소리가 없었어. 그 양반 특징 중 하나가 아주 기분 좋고, 그 작품이 마음에 들면 아무 소리 없는 거여. 원고지를 낚아채듯이 확 갖고 없어져버려. 수고했고 그런 소리도 없어. 본인도 벅차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게 작가와 감독으로써 최고 희열이라고 생각해. 정성일 _ 처음 작업하셨을 때부터 표현이 그렇지만 서로 궁합이 잘 맞은 거군요. 송길한 _ 처음부터 잘 맞았지. 왜냐하면 살아온 배경이랄지 피차간에 개인적 편차가 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서 맞아 떨어지고, 살아있는 에피소드들이 둘 다 있거든. 지금까지 은밀하게 다져놓은 것들이 서로에게서 막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정성일 _ < 짝코 >는 플래시백이 몹시 복잡하게 진행됩니다. 시간을 압축시킬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이야기 안의 긴 시간 때문에 리듬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구성을 결정했을 때 어떤 위기감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송길한 _ 당연하죠.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삼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떻게 제한된 시간에 구겨 넣겠어. 정성일 _ 한편으로는 이전에 해 오셨던 작법에서 시행착오와 함께 훈련을 해 온 방법이 아니라 < 짝코 >에서 거의 처음 쓰다시피 한 작법이 아닙니까? 송길한 _ 그건 둘이 다 마찬가지야. 그래서 어느 정도 모험성도 있었다고 봐. 구성상도 그렇고 이야기도. 여기엔 그때의 냉혹한 검열에 대해 모험이 있었어. 그런데 검열에서 딱 핵심만 잘라냈어. 그들이 한수 위지. 그런 다음에 반공영화상도 두 번이나 타고.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반공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여. 가만 두면 그럭저럭 살 사람들을, 이 많은 햇수 내내 둘이 도망가고 잡게 만들었냐는 거지. 이 두 사람의 긴 기간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궁극적으로 무화(無化)가 되어버리는 이 허망한 삶, 이것을 안 그릴 수 없죠. 정성일 _ 시나리오를 쓰시면서 선생님만의 원칙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 무조건 엔딩을 먼저 쓴다고 합니다. 그래야만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도 엔딩을 향해 달려가서 길을 잃지 않으니까. 선생님만이 갖고 있는 그런 습관이랄까, 원칙이 있습니까? 송길한 _ 나는 엔딩을 설정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아. 변화 가능하다. 가변성을 두고. 엔딩을 정해두면 목적성이 있어서 좀 스피디하게 갈 수 있어도 이게 휘어지면 엉뚱하게 휘어진단 말이야. 언제든지 가변성이 있되 일차적으로는 엔딩이 있지. 그게 < 길소뜸 >같은 경우지. 이게 말하자면 글을 꾸리기 위한 나름의 계산이지. 이야기를 어떤 구조로 가느냐. 우리는 그냥 가보자, 엔딩을 설정하지 말자. 일단 글이 흘러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따르되 많은 고민을 했어. 완성을 하고도. 우리 조선 사람으로서는 에미들이 갖고 있는 멜로드라마적인 속성이 있잖아. 어떻게 자식을 버려. 그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이라이트지. 그렇게 통일을 본거지. 정성일 _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어느 정도 쓰고자하는 얘기의 배경을 취재하시는 지요? 이를테면 < 짝코 >에서 두 사람의 삶에 대해 배경이 되는 갱생원이란 장소는 범인들은 쉽게 알기 힘든 세계이지 않습니까? < 만다라 >의 산사 안의 스님들의 세계도 잘 모르는 세계고. 또 < 티켓 >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일상생활도 그렇고... 송길한 _ 그렇지. 나는 시나리오 쓸 때 절대 머리로 쓰지 마라 이거지. 발로 써라 가슴으로 써라. 가보지도 않고 비슷한 삶을 산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니 멋대로 규정화하고 작위적인 것을 쓰지 마라. 정성일 _ 배경이 되는 것을 늘 취재하세요? 송길한 _ 그건 필연적으로 하는 거지. < 짝코 >의 갱생원도 원래 갱생원이 아니여. 그냥 행려병자 병원이야. 이것을 회사에 얘기해서 서울시에 질문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모아둔 데가 있어. 거기를 감독님이랑 나랑 갔어. 가보니까 완전 깡패 소굴이야. 대장은 고가의 외제 오토바이도 갖고 있고. 실제로 가보니까. 그리고 집도 절도 없고 이판 사판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루기가 힘들잖아. 실장 이런 놈들은 주먹도 세고. 그리고 아마 갱생원 원장하고 커넥션 같은 다른 것도 있는 거 같아. 우리 작품이 그걸 얘기하려는 게 아니어서 관심을 껐는데 실제는 그런 상황이었지. 근데 그런 것은 다르지. <짝코>에서 군 내무반 같은 실내는 우리가 설정해야지. 왜냐면 갱생원 거기는 다 온돌방이거든. 카메라 워킹도 안 되고. 노숙자들이 밥만 기다리고 앉아있는데 극을 어떻게 진행하겠어. 일단 메인 세팅이 될 수 있는 곳은 다 가서 헌팅 해야지. 그걸 그러려니 하고 머리로만 하려고 하면 안 되지. 인물들의 삶의 터전이고 생활 현장인데. < 짝코 >의 최윤석 < 짝코 >의 김희라 정성일 _ < 짝코 >를 보고 있으면 두 인물이 연기를 통해 영화에서 구현되는 것도 그렇지만 시나리오에서도 두 인물이 주는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실제 모델이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생생한 생기를 불어넣은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지요? 송길한 _ 특별한 작법이 있는 건 아니고,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나도 많이 봤고, 임 감독님도 많이 봤어. 하나는 음흉하고 교활하지. 짝코 같은 경우에. 이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 엄마 만나려고 고향집에 가는 거 보면 소년인데, 험한 세상 살다보니 그렇게 음흉해지고 교활해진 거여. 또 송기열 같은 경우는 오히려 심플하면서도 올곧았거든. 그러니까 편집증이 생긴 거야. 자기가 안했는데 했다고 하니까. 그건 평생을 갈 수밖에 없어. 도망 다니는 놈과 잡으러 다니는 놈은 톰과 제리가 되는 거고 이들이 갖고 있는 갈등이 정서적인 원한과 회한의 앙금이고 그러니 상당히 긴장이 살 수밖에 없지. 인물들이 뭘 해도 다 의미가 있는 것이고. 헛소리를 할 짬이 없지. 그러니 캐릭터가 살아나지. 정성일 _ 시나리오에서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그걸 연기하는 것은 뼈와 살을 가진 배우이기 때문에 실제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구체적인 배우를 염두에 둘 때가 있습니까? 송길한 _ 나는 천지차이라고 봐. 제일 처음에 짝코 는 김희라 를 찍어놨어. 송기열을 하려고 보니, 곽지균 이가 젊은 시절의 백윤식 을 데리고 왔어. 감독님이 나를 이렇게 보더라고. (웃음) 이게 소위 섹스어필한 데가 없어. 근데 최윤석 은 섹시한 데가 있어. 그때 텔레비전에선 알랭 들롱으로 막 떴을 때거든. 이놈을 짝코랑 비교하면 집요한 성격이 확 보이지. (잠시 생각) 시나리오를 쓸 때 미리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대부분 주인공은 상정이 돼. 감독님도 갖고 있고 나도 비슷하고. 뭐 누구라고 딱 지칭하고 거기에 맞출 수는 없는 거고. 시나리오 쓸 때랑 영화 캐릭터랑 편차가 많이 컸지. 김지미 랑 < 길소뜸 > 할 때도, 우리가 이 캐릭터를 밟아버리자. 아예 아작 내는 방향으로 가자했어. 김지미 씨가 쌓아온 기성 이미지가 있잖아. 이거 그대로 가져갔다가는 우리 셋 다 죽는 거지. 감독도 죽고 나도 죽고 배우도 죽고 영화도 죽고. 그러니까 그 얘기를 임 감독님이 나한테 가끔 해. < 잡초 > 때 김지미 보고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한번 하라는데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대. 그런데 결국에 이기적인 에미의 모습을 <길소뜸>의 화영에서 결국 한 거지. 그걸 임 감독이 굉장히 깊이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더라고. <잡초>때는 그것까지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김지미가 <길소뜸>에서는 했거든. 정성일 _ 디테일에 관한 질문입니다. < 짝코 >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짝코가 지리산 토벌대에서 쫓기다가 점순이 손을 잡고 언덕에서 뛰어내릴 때 슬로우 모션으로 화면이 바뀌면서 김영동 의 음악이 깔리는 대목입니다. 제 질문은, 이 장면을 시나리오에서 찾아보니 슬로우 모션을 지문으로 써놓은 것입니다. ( S#_39. 지리산 계곡. 포화 속에 도망쳐 오는 짝코와 점순. 공비들도 뿔뿔이 도망쳐간다. 사방에 터지는 포탄과 총소리. 계속 달리고 있는 짝코와 점순. 앞서 도망치던 공비 하나가 총을 맞고 나뒹군다. 쫙 깔려 포위하고 있던 전경대원들이 일제히 사격한다. 너울거리듯 도망치고 도망치는 짝코와 점순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계속되다가 멎어서면 더벅머리의 공비 하나가 두 사람 앞에 다가와 선다) 이건 연출의 권리라는 게 제 생각인데, 임권택 감독님과의 작업에서 이런 대목들은 미리 이야기를 나누신 것인가요? 송길한 _ 그것은 내가 썼을 수도 있어. 왜 그러냐면 이건 절박한 상황이라고. 슬로우 모션 효과가 뭐여, 발이 땅에서 안 떨어지는 거잖아. 사랑한 여자가 임신해서 데리고 도망가야 하는데 그게 우리에게도 안타까움이 있어야 되잖아. 막 쏘아대고 있는데. 모든 빨치산이 다 그랬을 거야. 급박할 때일수록 몸은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는 게 사람 아닌가? 아마 나는 그런 감정으로 썼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촬영) 부분에 일체 개입을 안 해. 그건 시나리오 작가가 할 일이 아니야. 감독이 할일이지. 그리고 임 감독은 절대 나에게 콘티에 대해 귀뜸 안 해. 나는 촬영현장을 거의 안 빠지고 갔거든. 그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한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난 좋았지. 말을 나누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래도 서로 아니까. 그리고 감독님이 검열관이었어. 며칠 만에 와서 보고 기분 좋으면 휙 나가고. < 짝코 >같은 경우는 시나리오 손 한번 안대고 그냥 찍었다고. 그건 이게 유일한 시나리오야. 그만큼 집필 전 사전협의가 충분했던 거죠. 정성일 _ 방에서 끝나지 않고 촬영 현장까지 쫓아갔다고 하셨는데, < 짝코 > 이전에도 그러셨나요? 송길한 _ 안 그랬어요. 어떻게 찍고 있나 우선 그것도 궁금했고, 어느 날은 현장에 갔는데, 임 감독이 나보고 넌지시 그러는 거여 “어이, 자기 감독 하려고 그러지” 대답을 했지.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 안 해요. 이것, 시나리오 하나만으로도 가랑이가 찢어지려는데” 임 감독님 입장에서는 자기를 알고 그렇게 쉽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가가 어디 쉽냐고. 그리고 작가가 현장에 있나 없나, 는 실제적으로 큰 차이가 있어. 유명한 얘기인데 가령 < 만다라 >때 후시 작업할 때 녹음실에 보니까 찍힌 게 녹음이 나온 거여. 지산이 “나 같은 짐승도 제도를 해주고”하는 장면이 있는데 ‘짐승’은 아닌 거여. ‘짐승’을 영어 번역하면 ‘애니멀’인데 여기서는 중생(衆生)이지. 근데 당시 시나리오를 인쇄하던 <영문사>에서 타자를 잘못 친 거야. 아무리 자기를 낮춘다고 해도 짐승은 아닌 거지. 그런데 그러려면 녹음을 새로 해야 하는데 녹음실에서 누가 좋아 하겠냐고. 그래도 바르게 가야지. 단어 하나지만 엄청 큰 차이가 있어. 그리고 안성기 와 함께 수학했던 도반 수관이 손가락을 불사를 때 인상만 쓰고 있는 거여. “감독님 지가 도통한 놈이 아닌데, 손가락에 불이 닿았는데 이마빡에 땀도 안나요?” “맞어. 땀 나야해…” (웃음) 작가는 그런 조그만 한 것들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애정을 갖고 또 정확하게 봐주니까. 임권택 감독하고 작업할 때는 거진 현장에 있었어. 정성일 _ 임권택 감독님과 < 짝코 >를 처음 작업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 _ 둘이 죽이 맞는 것. 시대적 배경이나 얘기하는 것들이 착착 앵기니까. (웃음) 감독님이 고등학교 삼학년이면 내 나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거든, 여섯 살 차이니까. 지금 청소년시절에서 청년단계로 갈 때가 감독님이었다면 난 소년이었으니까. 그때가 전쟁이라는 시국이어서 감독님도 나도 굉장히 민감했거든. 그런 과거의 시절이 분출이 되는 지점이 공유되니까 굉장히 좋았지. 하여튼 둘이 많이 웃었어. 정성일 _ 그러면 첫 번째 작업을 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송길한 _ 특별히 힘들었던 점은 없었어. 해야 할 얘기를 하고 있고, 해야 할 감독과 같이 하고 있다는 게 더 이상 좋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얘기도 두 번 얘기할 필요 없이 한 번에 거두절미하고 통하니까 얼마나 해피한 거겠어. 정성일 _ 제가 임권택 감독님을 1987년에 인터뷰하면서 외람된 질문이지만 “감독님, 이제까지 찍은 모든 영화중 한 번 더 다시 찍으라고 한다면 어떤 영화입니까”라고 질문 드리니 “< 짝코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점이 두 분에게 제일 아쉬웠습니까? 송길한 _ 많이 아쉽지. 우선 필름도 싼 이스트만 컬러인데 게다가 불량품이었고, 근자에 다시 한 번 보니까 내가 손대고 싶은 부분도 있고, 아마 감독님도 더 찍을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보완해야할 부분이 꽤 있었어요. 정성일 _ 기술적인 부분들 말고 작품 내적인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아쉬웠습니까? 송길한 _ 내적인 부분을 보면, (잠시 생각) 본인이 리메이크하려고 했다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고 하는 거는 지금 내용에서 크게 상황이 바뀔 수는 없다는 거지. 외면을 매끈하게 더 근사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원천적인 소스를 바꿀 수 없는 거지. 그때가 작품이 없어서 궁핍할 때가 아니었거든. 어느 날, 동숭로라고 생각되는데, 거기서 술을 먹는데 < 짝코 >를 다시 만들어보자는 그 얘기를 하는 거야. ''''''''좋지요'''''''' 나도 그 생각을 했거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소리가 없어. 그리고 서로 해야 하는 작품이 있었고... 임권택 감독님은 본인이 프로로써 견지하고 살아왔고,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것이 충무로 판에서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에 감독님은 그래. 뒤늦었지만, 내 결론은 천재였어. 적어도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는 천재였어. 존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스터리를 심도 있게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의 달인이기도 하고, 나는 그 양반을 얘기하라면 이제 그것밖에 안남아. 작가로써 상당한 시간을 같이 겪었고, 떨어져서 쳐다보기도 했지만, 예찬이 아니라 임권택 감독님에 대해 냉정하게 말하더라도 달인이고 천재였어. 생각해봐. 아니면 백편 넘는 작품을 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서로 다른 소재를 소화해 내다니 놀라울 따름이죠. < 우상의 눈물 > 정성일 _ 다음 작품은 < 우상의 눈물 >입니다. 전상국 작가의 원작에 먼저 끌린 것은 두 분 중 누구입니까? 송길한 _ 감독님은 다음 작품이 준비되어 있어야 안심이 되는 분 같아요. 아까 언급했던 준비성! 하루는 나한테 < 우상의 눈물 >이라고 읽어봤어,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단편을 전상국씨 만나서 판권을 사왔어. <우상의 눈물>과 <돼지새끼들의 울음> 단편 두 개를 합쳤어. 주인공(기표)는 낙제해 꿇었지만 동(同)학년으로 여대생이 된 애인을 설정하자. 너무 남자 애들만 나오니까. 그렇게 하고 간 거여. 정성일 _ < 우상의 눈물 >에서부터 임권택 감독님과 정일성 촬영감독님, 그리고 선생님, 어쩌면 198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팀워크가 갖춰졌습니다.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가장 높이 산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송길한 _ 임 감독하고는 < 신궁 >에서 둘이 이미 만났어. 일단은 풍광이었지. < 만다라 >에서 이게 특히 중요했는데 이 영화는 풍광이 없으면 안 되는 영화니까. 너무 관념적인 게 많으니까. 사토 다다오 평론가한테 <만다라> 알겠냐? 물어보니 안다는 거야. 표정이나 언어 리듬이나 풍광이나 백그라운드에 가진 영상들을 통해 감은 잡혔겠지. 관념 투성이의 그 언어들을 어떻게 알겠어? 어쨌든 <만다라>에선 풍광이 인물들의 심상을 많이 반영했지요. 정성일 _ 잠시만 < 우상의 눈물 >을 좀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그때 한국영화에서 하이틴 청춘물이 유행이긴 했지만 이 영화는 십대들이 주인공이긴 해도 하이틴들이 볼 수 없는 정치적인 알레고리의 영화입니다. 말하자면 관객이 없는 이상한 영화라고 할까요. 송길한 _ 이것은 군사정권에 대한 어떤 은유지. 전상국 의 단편소설이 갖고 있는 은유야. 권위 있는 담임선생이 아이들을 동원해 주인공의 순수한 야성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얘기지. 개성이 있어야 하는데 개인의 개성을 밟아 일사불란 통솔하는 얘기잖아. 전상국 씨도 보통 맹랑한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너무 짧은 단편인 거야. 그래서 전상국 씨의 다른 단편도 합쳐서 각색한 거죠. 나는 주제가 선명해서 오히려 그게 좋았어요. 전상국 씨가 그때 대학교 교수가 아니라 고등학교 선생이었거든. 그래서 애들을 잘 알아. 그걸 정치적인 시각으로 봤기 때문에 생생하게 끌어낸 거지, 하지만 이 영화는 어른 영화지. 그런데 이걸 제작한 영화사는 얄개 시리즈인 줄 안거야. (웃음) 그래서 (시나리오) 잔금 받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얄개>시리즈인줄 알았는데 작품이 이게 뭐냐고,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래서 눈 똑똑히 뜨고 소설 다시 봐. 그게 어디 얄개냐? 감독한테는 못 그러고 나를 만만하게 보고 막 그러는 거야. 내가 만만한가. 입금 안하면 회사 불질러버리겠다고 했지(웃음) (첫 번째 이야기 끝, 두 번째 이야기 계속) 인터뷰_ 11월 10일, 날씨 화창했지만 바람이 몹시 차가웠음. 정리, 진행,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