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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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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불 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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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음악 기록사(1919~1997)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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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영화상영심사에참여신청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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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영화"석가모니"제작신고접수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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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영화"석가모니"의 복사판검열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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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최금동(최금동) - 각본
영화인 가운데서도 최금동 (崔琴桐) 선생과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자릿수나 많은 대선배였지만 동연배의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서로 비밀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둘만이 통하는 암호 같은 은밀한 지칭도 나누게 되었다. 가령 단골 다방이 있는 명동 거리에서 예쁜 여성과 마주치게 되면 선생은 나의 손등을 툭 치며 “조너스가 온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으레 “그러네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자연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고, 작은 체구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서 ‘조너스’란 ‘좋다’는 표현과 ‘도너스’라는 명사의 합성어로, ‘좋은 도너스’란 뜻이다. 첫 자를 그대로 옮기면 “좋너스”가 돼 야한 비속어가 되므로 ㅎ 발음을 빼고 그냥 ‘조너스’라고 했다. 그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 후반 명동에 도너스 가게가 생기며 도넛을 좋아하게 된 최 선생이 이를 연상해 붙인 것이다. 최금동 선생과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인연은 1969년 나의 결혼식때 청첩인이 돼준 일이다. 지금은 이런 일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결혼 청첩에 양가를 대표하는 4, 5인의 청첩인이 들어가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나는 신랑 측 청첩인으로 대학의 은사인 김동리 (작가) 선생, 영화계의 유현목 감독과 함께 최 선생의 이름을 올렸다. 주례는 박목월 선생이 맡았다. 최 선생은 청첩인 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찍는 기념 촬영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내 곁에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선생이 집필한 시나리오 <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 유현목 , 1965)의 주제가( 박춘석 작곡, 최희준 노래) 작사자로 내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자신이 써놓은 노랫말에 나를 내세운 것은 “김형이 시인이기도 하니” 그리했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실토하지만 나도 그 뒤에 이와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다. 월간 학생 잡지 <학원> 편집부에 근무할 땐데 ‘지붕 없는 학교’란 제목의 사진소설을 최 선생 명의로 발표했던 것이다. 배우나 학생을 모델로 내세워 찍는 화보 형식의 소설이었다. 그는 문학청년적인 감성과 우국지사적인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다. 놀랍게도 그의 감성은 진부하지 않으며 민족의식 또한 보수적으로 기울지 않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칠순이 가까울 때까지 연애 감정을 유지했고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최금동 선생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아니, 역겨운 일, 눈꼴사나운 일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못했다. 남의 눈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모난 돌임을 자처했다. 1960년대 극장가에 일본색 표절 영화가 범람하자 지상을 통해 ‘왜색 영화를 방화하라’고 외쳤고, 이익을 재투자하지 않는 영화제작자에게는 ‘몰염치한 전주(錢主)’라며 몰아세웠다. 그런 탓으로 그는 주위의 눈총을 받을 때가 적지 않았다. 1975년 3월, 내가 박정희 유신 정권 아래서 자유언론운동에 참여, 제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30여 명과 함께 조선일보사의 기자직에서 해직됐을 때는 누구보다도 먼저 전화를 걸어 장차 일을 걱정하며 위로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설날에는 특유의 친필 연하장을 잊지 않고 보내주었다. 이렇게 최 선생은 1958년 처음 알게 된 이후 1995년 6월 5일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37년 동안 일관되게 강직한 성품과 섬세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한쪽 눈으로 감당한 작가의식과 민족정신 1916년 7월 3일 전남 함평군 상교면 대동리에서 태어난 최금동 선생은 어릴 때 본명이 거문고 금(琴)자에 아이 동(童)자 금동이었다. 형은 일곱 살 때 죽고 한말의 의병에 가담해 도망 다니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거의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런 탓으로 그는 지겨울 만큼 이사를 자주 했다. 그러다보니 학교도 여러 번 옮겨야 했다. 이런 가운데 선천적인 백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잃었다. 그는 동네 아이들로부터 ‘눈 병신’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완도보통학교와 경성예비학교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진학할 무렵, 이런 열등감에 자극받아 쓴 ‘누나’라는 글이 조선중앙일보에 가작으로 뽑혔다. 이에 힘입은 그의 문학적 열정은 1936년 이 학교 3학년 때 동아일보 제1회 시나리오 현상모집에 투고한 <환무곡(幻舞曲)>이 당선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시나리오작가로서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김유영 (金幽影) 감독에 의해 < 애련송(愛戀頌) >이란 제명으로 1939년 명치좌에서 개봉되었다. 내용은 그가 인상 깊게 본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악>(윌리 폴스트, 1933)의 경우처럼 젊은 음악가의 사랑과 시련을 그린 것이었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나오자 1937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이후 서울신문 사회부장(1945), 독립신문 편집국장(1947)을 거쳐 1949년 한성일보 편집부국장직을 끝으로 12년간의 언론계 생활을 마감한다. 광복 시기에 직장을 떠난 그는 최은희 의 영화 데뷔작 < 새로운 맹서 >(1947)를 비롯해 < 3.1독립운동 >(1958), < 8.15전야 >(1959), < 이름 없는 별들 >(1959), < 아아, 백범 김구선생 >(1960), < 유관순 >(1961), < 동학란 >(1962), < 석가모니 >(1963), < 이성계 >(1967), < 상해임시정부 >(1970), < 의사 안중근 >(1971), <미처 못다 부른 노래>(1973), <팔만대장경>(1973), < 에밀레종 >(1974), <사명대사>(1980) 등 45년의 작가 생활을 통해 필름으로 옮겨진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50여 편을 남겼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최 선생의 작품은 일제 지배 아래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의 활동상과 기미년 독립만세,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 역사적인 사건과 존재, 그리고 투철한 국가관과 정체성을 강조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큰 스케일을 바탕으로 강렬한 주제의식과 민족정신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가 평소 영화 < 아리랑 >(1926)을 자주 언급하며 ‘춘사 나운규 의 정신’을 강조한 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칼럼]내 친구 데니스
금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다. 그는 캐리어를 끌고 전철의 맨 마지막 칸으로 들어서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미는 새까만 정장 차림의 덩치 큰 아저씨다. 순간 내 눈엔 땀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훤한 이마 위로 네온사인처럼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 석 자가 보이지만, 그는 내 손을 붙잡더니, ''정말 미안한데 너 이름이 뭐지?''라고 한다. -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농담이고, 백승빈. 그러자 친구는 시익 하고 웃는데 순간 옛날의 그 익살맞은 얼굴과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오버랩 되면서 소름이 쫙 돋는다. 반면에 스물넷에 결혼해서 지금은 세 아이의 아빠에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라는 얘긴 딱히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난 ''웃기시네!'' 라면서 그의 툭 튀어나온 배를 거의 칠 뻔 한다. 그는 예전에도 지금의 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머니들이 보시면, ‘그 친구 참 듬직하니 보기 좋네.’ 라고 입을 모을 법한 푸근한 덩치와 붓다 같이 속을 알 수 없는 관조적인 인상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은, 커다랗고 고상한 석조건물 같은 아이였다. 복장 검사 때 바리깡에 앞머리를 밀려 빡구가 되어도, 월별 모의고사 성적표에 빨간 그래프가 땅바닥에 꽂혀도, 야자 시간에 짤짤이 하다가 걸려서 싸대기를 쳐맞더라도, 그의 얼굴은 여전하고 고요한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어떠한 자극도 그의 잔잔한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골프 용품 관련 회사에서 일한지 거의 십년이 다 되어간다는 그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마치 엊그제 옥상에서 유에프오를 봤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하며 듣는다. 그러자 스마트폰을 꺼내 내가 만든 영화의 제목을 또박또박 메모하더니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볼 수 있냐고 묻는데 뭔가 수줍은 나는 더듬더듬 얼버무린다. 성공하면 골프 한번 쳐야지? 명함 속 영어이름이 ‘데니스’인 그가 내게 소맥 한잔을 함께 말아서 건네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고는 시익, 웃는다. 그 난데없는 술 한 잔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드는 나는, 언젠가 내가 골프를 치게 된다면 반드시 너를 통해서 치겠노라는 식으로 주정한다. 귀엽게. - 두류역에서 내리지? 이제 나는 그의 스마트폰에 내 전화번호를 찍어주고, 내 이름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해준다. 세르게이... 아니고, 백승빈. 나는 그제서야 잘 가, 하며 그의 툭 튀어나온 배를 톡 하고 치는 미션을 완수하고, 작정하고 집 나온 사람의 짐 같은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열차에서 내린다. 내 등 뒤로 한참 머무는 그의 눈길이 느껴지는 나는 열차의 창문 너머를 한 번 더 돌아본다. 거인의 것처럼 우람하게 크고 두꺼운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데니스가 거기에서 웃고 있다. 그러자 다시 십년도 훨씬 전에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내가 왜 데니스의 석가모니 미소를 좋아했는지에 대한 어렴풋한 이유를 짐작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외롭고 수줍은 이 아이는 무법자들의 전쟁 같은 점심시간에 몰래 학교정원 한 구석, 울창한 이파리의 나무 밑으로 피신해 와서 혼자 삼각김밥을 먹으며 배를 채우고 있다. 때 마침 옆에 와서 앉는, 거인의 손을 가진 덩치 큰 친구. 삼단 찬합으로 된 자기 도시락을 하나씩 풀면서 묻는다. - 유부초밥 많은데 같이 먹을래? 여기서는 그 친구도 학교아이들의 먹이사슬 피라미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 없는 언더그라운드 캐릭터지만,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없는 덩치로 인해 왕따의 과녁을 간신히 피해간 케이스일 것이다. - 니가 만든 거야? 외롭고 수줍은 이 아이는 왠지 바보 같지만, 필요한 질문을 한다. - 응, 간단해, 어렵지 않다. 그때부터 외롭고 수줍은 아이는 친구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 같았던, 고요하고 여유로운 미소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니까 뭘 물어도, 괜찮다. 그건 간단하고 어렵지 않다고 대답할 것 같은 스마일. 바리깡에 밀린 앞머리 탓에 빡구처럼 보여도, 모의고사에서 전교 사백 오십등을 하더라도, 싸대기를 맞아서 울긋불긋 돌아가는 색깔의 얼굴 위로 늘 괜찮다고 웃는 내 친구 데니스. 물론 여기서 삼각김밥을 가슴에 품고 교실에서 도망나온 왕따아이와 그 옆에 삼단찬합 도시락을 놓고 앉아 유부초밥을 나눠먹은 덩치 큰 친구 간의 에피소드가 실제로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현재 골프 용품 관련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인 데니스란 내 친구가, 과거에나 지금에나 복잡한 고민을 사서 하면서 얼마 전엔 대상포진 같은 몹쓸 병에나 걸려 멘붕했던 내게, ‘괜찮아.’ 라며 톡 튀어나온 배 한 번 툭 치고 또 먼저 미래로 휘익, 갔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예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의 요지는, 누군가에겐 그토록 쉬워 보였던 영화 만들기 놀이가 내겐 전혀 그렇지 않아서 지치고 화딱지 났던 최근, 본가에 내려와 있으면서, 지난해 명절 귀향길에 만났던 데니스가 갑자기 생각나 그의 명함을 찾아봤지만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 근처에 있으면 소맥이나 한잔 해, 문자하려고 분명히 지갑에 넣어두었는데...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다보니 내가 그를 정말 만나긴 만났던 것일까에 생각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는 요즘 나를 가장 사로잡고 있는 유령이야기가 되기 시작했다. 그가 유령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이렇게 나는 붓다 미소를 가득 지은 채 데니스에게 정말 의외로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땡큐 노트를 쓴다. 영화작업도 그런 식으로 해야 필모도 ‘열심히 살았구나’식으로 길어질테고,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학교 동창의 유령들도 지금보다는 더 반갑게 만날 수 있을텐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