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매
- 감독
- 김시현
- 제작년도
- 1976
- 출연
- 맹추, 장일도, 황인식, 김기주, 이예민, 소희, 조춘, 조덕성, 최일, 손전, 정미경, 최민규, 김정중, 정규영, 태일, 최형근, 장정국, 김우석, 나갑성, 서평석, 홍춘길, 이인수, 민정기
얼마 전 한참 선배인 모 영화감독, 영화평론가와 대화를 나누다 자정이 훌쩍 넘었고 다들 남자다 보니 화제는 자연스레(?) 에로영화로 넘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볼 때 그 두 사람의 영화 취향은 확연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미지의 여배우에 대한 애정의 크기만큼은 완벽히 일치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 첩혈쌍웅 >’같은 경이로운 조합이었다면 황당한 비유일까. 에로영화에 대해 나름 남부럽지 않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해왔음에도, “예상치도 않은 장면에서 훌러덩훌러덩 벗어서 충격적이었다”라거나 “그녀보다 뛰어난 에로배우는 많았지만 그녀만큼 몸이 예쁜 여배우는 없었던 것 같아”라는 그들의 원색적인 찬사 앞에 나의 무지를 탓해야만 했다. 그들이 여자 일행이 떠나길 기다려 한사코 자정이 넘어서야 애정을 고백했던 여배우는 바로 이기선 이었다. < 깊은 밤 갑자기 >의 이기선 , '몸이 참 예쁘구나' 아마도 영상자료원을 즐겨 찾는 이라면, 필름으로도 몇 번 상영했을뿐더러 VOD 관람도 가능한 고영남 감독의 컬트 호러 < 깊은 밤 갑자기 >(1981)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거기서 무당의 딸이자 가정부로 등장해 윤일봉 , 김영애 가족을 파국으로 몰고 갔던 여자가 바로 이기선 이다. 여기서도 김영애는 이기선의 몸을 씻겨 주며 “몸이 참 예쁘구나”라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이듬해 출연한 정소영 감독의 < 버려진 청춘 >(1982)에서 이기선은 그 빛나는 ‘야성’을 더욱 드러낸다.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라 불리던 이 시기 수많은 성인영화들 중에서 이처럼 ‘센’ 여자 캐릭터가 있었나 싶다. 영화가 시작하면, 배드민턴을 하는 남자들과 부딪혀 넘어진 그녀가 대뜸 “이 새끼들, 눈은 어디다 뒀어. 별 거지 같은 놈들 다 보겠네. 앞으로 조심해”라며 성깔을 표출한다. 그리고는 호텔 카운터에서 다짜고짜 마당에 주차돼 있는 빨간 피아트 자동차의 주인이 바로 자신의 오빠라고 거짓말하며 그의 방까지 급습한다. 우여곡절 끝에 방 주인을 만난 그녀는 빨간 비키니를 입은 채 대놓고 유혹한다. 성질 급한 남자를 향해 “왜 이리 급해, 도련님”이라며 저지하더니 샤워실까지 따라 들어온 것만은 못 이기는 척 어쩌지 못한다. 남자가 온몸에 비누칠을 한 이기선을 마구 껴안자, ‘이 새끼 걸려들었군’ 하는 나른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도도하게 손을 올리고는 말한다. “거칠게 다루지마, 숙녀야.” 이 새끼, 걸려들었군 그러니까 이기선 이 연기하는 ‘명자’는 바로 ‘꽃뱀’이다. 며칠 뒤 서울에 올라온 명자는 한 대궐 같은 부잣집으로 쳐들어가고, 문지기가 막아서자 당차게 외친다. 오는 말이 곱지 않으니 가는 말이 고울 리 없다. 아니, 명자는 오는 말이 고와도 가는 말이 더러운 여자다. “별 거지 깡깽이 같은 소리 다 들어보겠네, 비켜! 나 양회장 만나러 왔어. 양회장 아들한테 강간당한 사람이다, 왜?!!!” 집으로 들어가서도 그 기백은 여전하다. 대뜸 스타킹을 내리고 웃통을 벗어서 강간당한, 아니 자해 공갈 상처를 보여주며 5백만 원을 요구한다. 증거가 없다며 디스카운트를 요구하는 양회장과 비서실장에게 “양가집 규수가 아니면 정조도 없냐? 그럼 재판을 하자!”며 떼를 쓴다. 결국 명자는 가공할 ‘강짜’ 앞에 5백만 원을 약속한 양회장의 민머리에 뽀뽀를 하고는 유유히 사라진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집을 나와 자신을 미행하는 비서실장을 따돌리기 위해 명자는 낯선 빌딩의 화장실로 숨어들어가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는 얼굴에 큰 점을 찍는다. 너무나 티 나는 변장에 어이가 없지만, TV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점찍고 나타난 장서희 의 원조쯤 된다고 생각하면, 등잔 밑이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비서실장의 답답한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 버려진 청춘 >은 김기영 감독 < 하녀 >(1960)의 B급 신파 버전 혹은 줄리아 로버츠 주연 < 귀여운 여인 >(1990)의 하드코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양회장의 아들을 따돌리다가 격투 끝에(진짜 제대로 된 남녀의 격투다) 달아난 명자는 한사장( 남궁원 )의 벤츠에 숨어서 달아나게 되는데, 바로 이때부터 두 사람의 나이 차를 초월한 <귀여운 여인>스러운 달콤한 멜로드라마가 펼쳐진다. “홀아비에 부자인 남자 없어요? 집도 있고 자가용도 많은데 인생이 재미없어 하품만 하는 늙은 남자 없냐구요”라며 애초에 진심 어린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명자지만, 아내와 아들이 7년 전에 비행기 사고로 죽으면서 홀로 된 한사장의 딱한 사연에 공감하게 된 것. 더구나 그 사고 이후 여자를 안을 수 없게 됐다는 한사장의 가슴 아픈 고백을 들은 명자의 반응이 걸작이다. “그럼 아저씨가 병신이란 말이에요? 아저씨는 내가 한 푼도 안 받고 고쳐줄게요.” 이후 한사장은 콘 아이스크림이 묻은 명자의 입술을 보면서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기력을 회복한다. 들판에서 말을 타다 말고 느닷없는 키스신이 이어지며 두 사람은 드디어 한몸이 된다. “오늘부터 아저씨는 환자고 나는 의사에요. 자신 있어요”라며 명자의 성격만큼이나 급하게 진행되는 ‘진도’앞에 두 눈이 즐겁다. 집에 돌아와서도 두 사람은 한 욕조에 있다. “불행한 과거는 싹 잊어버리는 거예요. 알았죠?”라는 명자의 애교 섞인 ‘치료’앞에 한사장은 잊고 지낸 감각을 되찾는다. 몽환적인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낮은 탄식과 함께. “아 간지럽다...” 경마장에서 기력 회복하시는 한사장님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명자가 뇌종양에 걸려 5,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 앞에 와르르 무너진다. 이때 길게 이어지는 명자의 플래시백이 가슴을 후벼 판다. 고향에서 보따리 하나 들고 도망친 명자는 서울의 공장과 술집을 오가며 범죄소굴에 빠져 소매치기까지 하고 살았다. 딱 천만 원만 있으면 술과 노름에 빠진 깡패 같은 아버지 밑에서 신음하는 엄마와 어린 두 남동생을 데리고 나와 시범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현재로 돌아와 명자는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돈을 들고 찾아가는데, 남동생은 “몸 팔아 번 돈은 필요 없다”며 누나를 반기지 않는다. 그렇게 누나의 가슴에 못을 박은 놈이 나중에는 울며 떠나는 누나의 버스를 쫓아 미안하다고 뛰어가니 이 불쌍한 가족을 어찌할꼬. 그게 다 이 나라 개발독재 근대화의 산물일 텐데 우리 가여운 명자가 ‘내가 더러운 짓을 많이 해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 자책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 버려진 청춘 >은 바로 김수현 작가가 부지런히 시나리오를 써내던 시절의 작품이다. 또한 이기선 의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1962년생 이기선은 1979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예계에 첫발을 디뎌 아쉽게도 데뷔작 < 야성의 처녀 >(1980) 이후 < 깊은 밤 갑자기 >와 <버려진 청춘> 그렇게 단 세 편의 영화만 남겼다. 이후 본업인 탤런트에 집중하며 MBC <조선왕조 5백 년>의 세 번째 이야기 <설중매>의 ‘폐비 윤씨’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데뷔 초기 혹독한 성인영화들에 지쳐 이후 TV 탤런트에 집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 보니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신인배우에게 <깊은 밤 갑자기>와 <버려진 청춘>은 실로 감당하기 버거운 영화였을 것 같다. 그러니 그녀가 더 대단해 보일 수밖에... 이기선 남궁원 감독: 정소영 각본: 김수현 개봉극장: 중앙 관람인원: 26,847(서울)명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 은 1956년 시대물인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 사향마곡 >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 의 < 단종애사 >와 < 마의 태자 >, 윤봉춘 이 < 처녀별 >과 < 논개 >, 이규환 의 < 심청전 >, 김소동 의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 정창화 의 < 장화홍련전 >, 김기영 의 < 봉선화 >, 안종화 의 < 천추의 한 >과 < 사도세자 >,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 홍일명 의 < 벼락감투 >, 신현호 의 < 숙영낭자전 > 등 13편과 권영순 의 데뷔작 < 옥단춘 >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 도 1956년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 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 최봉 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 은 김광주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 >와 라이트 코미디인 < 오해마세요 >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 오부자 >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 김희갑 , 구봉서 ,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 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 오부자 >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 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흙 > < 표류도 >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 정복자 >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 김지미 . 김승호 .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 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 오부자 >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 한 많은 청춘 >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 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 옥단추 >(56) < 옥난 공주와 활빈당 >(60) < 가야금 >(64) * 코미디물 : < 오부자 >(58) < 오해 마세요 >(57) < 8통8반 여반장 >(64) * 멜러물 : < 나는 너를 싫어한다 >(57) < 한 많은 청춘 >(58)<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59) < 가는 봄 오는 봄 >(59) < 양지를 찾아서 >(59) < 장미의 곡 >(60) < 그리운 얼굴 >(60) < 정과 정 사이에 >(72) < 모정 >(72) <축배> < 산녀 >(73) < 불꺼진 창 >(76) *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62) < 에밀레종 >(68) * 반공물 : < 국회 푸락치 >(74) * 문예물 : < 흙 >(60) < 표류도 >(60) *액션물 : < 목숨을 걸고 >(62) < 남아 일생 >(65) < 무적자 >(66) < 의리에 산다 >(70) < 6인의 난폭자 >(70) * 검객물 : < 비호 >(69) < 쌍용검 >(69) < 무정검 >(69) < 백면검귀 >(69) < 유정검화 >(70) < 복수의 마검 >(70) < 다섯개의 단검 >(71) * 괴기물 : < 대지옥 >(72) < 반수반인 >(75) < 용사왕 >(76) < 사향마곡 >(81) 권영순 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 흙 >과 박경리 원작소설 < 표류도 >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3년 3월 9일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5월 23일 사망 1956년 < 옥단춘 >데뷔 <작품명> 1956 옥단춘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 / 오해마세요 1958 오부자 / 한많은 청춘 1959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 가는 봄 오는 봄 / 양지를 찾아서 1960 흙 / 표류도 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65 모녀봉 1966 무적자 1968 풍운의 임난야화 1969 무정검 / 백면검귀 1970 유정검화 / 의리에 산다 / 복수마검 / 육인의 난폭자 1971 다섯개의 단검 1972 정과 정 사이에 / 모정 / 대지옥 1973 산녀 /축배 1974 국회프락치 1975 인사여무 / 태백산맥 1976 불꺼진 창 1988 칠삭동이의 설중매 등 50여 편
영화배우 이대근 (李大根)이라면 흔히 < 변강쇠 >를 연상하기 일수이다. 그만큼 그의 우람한 몸과 익살스런 연기가 어필,35년째 연기를 하면서 대명사처럼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통 연극배우로서 60년대 초 <노틀담의 곱추>로 인기를 모았던 인물이라는 것은 전문가들 아니면 잘 모르는 역사. 연극이나 영화 모두 연기자라면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지만, 영화는 배우가 흥행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관에 자신이 출연한 작품이 막을 올리면 유난히 노심 초사한다. 사실 연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가 연극을 할 때는 흔히 말하는 학사 엘리트들이 풍미할 때 였다. 해가 지면 서울 사직동에 있던 대포집 '대머리집'에 들르는게 당시 문화 예술인들의 낭만이었다. 여기서 연극에 대한 품평 등이 나오곤 했는데 그가 주연한 <노틀담의 꼽추>의 미국영화 주역을 맡았던 앤터니 퀸 못지 않았다는 연기평과 함께 그의 걸죽한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앤터니 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나 할까. 연극을 걸쳐 TV탤런트를 경험하다가 영화에서 자리를 굳힌 이대근 은 서울 태생이다. 능안리 라고도 불리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철저한 반공투사로 당시 반공청년단 단장. 그가 175센티의 82킬로가 되는 거구를 자랑하는 것도 타고난 것 일게다. 연극에 미쳤던 젊은이답게 그는 서라벌예대 출신이다. 연기자가 된 것은 63년. 졸업하자마자 이듬해에 KBS7기와 동시에 MBC개국으로 옮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영화에 데뷔한 것은 68년 최무룡 감독의 < 제3지대 >. 이후 지금까지 약 2백70 여 편에 출연해왔다. 그러니까 데뷔 35년째인 셈이다. 그의 출연작을 보면 대략 3∼4캐릭터로 분류할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이 어려웠던 시절에 제작에 만족해야 했던 '김두한'시리즈 5편의 액션물 주연및 74년부터 81년까지 무려 주연한 액션물 1백여 편이 첫째. 그런가하면 그에게 상복을 안겨준 토속물에서의 연기도 주류를 이룬다. 80년 대종상주연상을 안겨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87년 역시 대종상 조연상을 받은 < 감자 > 한국일보 백상대상의 주연상을 수상한 < 심봤다 > 영화평론가상을 따낸 < 뽕 > 등이 이들 작품. 여기에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 장마 >(1979) < 거지왕 김춘삼 >(1975, 이혁수 ) < 화려한 외출 >(1977, 김수용 ) < 연산군 >(1987,이혁수) 등이 내노라할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대근 을 일약 스타로 만든 작품은 < 변강쇠 >라고 단언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등장했을 당시인 86년. 제작자였던 고려영화사 사장 박태환 씨는 우리의 고전 중 기막힌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바로 이 작품이 판소리로 유명한 「변강쇠뎐」.이를 당시 신인이나 다름없었으나 오랜 현장 경험으로 인정받고 있던 엄종선 감독에 맡겨져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당초 엄감독은 이 영화를 작품이 지닌 특유의 해학과 섹슈얼 무브먼트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에 무척 고민했다. 이는 작품에 잘 나타난다. 주인공인 변강쇠 역의 이대근 의 몸매가 거구임을 표현하기 위해 의상인 한복 속에 솜을 잔뜩 집어넣어 과장한 것이라든가 상대역이었던 옹녀 역의 원미경 의 캐릭터를 요염의 극치로 표현한 것 등이 탈영화적이면서 풍자 짙게 만들어 관객의 호응을 얻어내는 계기가 됐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변강쇠의 섹스가 엄청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높은 절벽에서 그가 소변보는 장면을 풀커트로 표현하면서 소방차를 동원, 마치 폭포처럼 쏟아지는 오줌 줄기로 표현한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꼽을 잡게 한 것은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가 대히트 하면서 이대근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바뀌었다. 당연히 속편 제작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대근이 아연 실색,주인공이 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생각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 관리에 커다란 장애를 각져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다행히도 이후 방영하기 시작한 MBC TV 드라마 <설중매>의 홍윤성 역을 맡아 이미지를 다소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배역 역시 술을 독채 마시고 힘이 장사였던 것 이어서 거한의 인상을 지우기에는 쉽지 않았다. 정상급을 구가하는 엄청난 톱스타가 아니면서도 원미경 이미숙 강수연 등 숱한 미녀스타들과 공연한 그도 이제 60세.(43.7.1) 그는 젊었을 당시의 이미지와 달리 지금은 서울에서 혼자 사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 82년 부인과 3딸이 미국에 이민, 고생 끝에 안정을 찾은 교포이기도 하다. 부인이 억척스럽게 워싱턴 시내의 공공기관의 구내매점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그곳 정문에 커다랗고 멋진 스토어를 경영하고 있다. 3딸 역시 효녀 중 효녀. 두 딸은 이미 박사가 되어 정부의 중책을 맡고 있고 막내딸은 대학 졸업반. 3딸 모두 중·고교는 물론 대학도 장학생이었다. 이대근 역시 워싱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부지런쟁이. 교포들의 희노애락은 물론 각종 문화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그의 집은 워싱턴에서 조금 떨어진 버지니아 주택가. 숲 속에 가려진 3층집으로 얼마 전 타계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미국을 왕래한 것도 몇 번만 합치면 5백 번이 된다고 한다. 뉴욕 케네디 공항을 경유해서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그에게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하도 자주 드나드니까 툭 하면 꼬치꼬치 캐묻는 게 당연한 일. 궁여지책 끝에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가 시비를 거는 공항 관리들에게 선사하며 자신이 한국의 톱스타라고 으시대곤 했는데 이게 먹혀들어 이제는 무사 통과라고 껄껄 웃어 제키기도 한다. 지난 1월말인가. 그를 만나러 간 세종문화회관 커피숍에서 있었던 일. 베이지색 반코트에 아무 치장 없이 나타난 그를 보자마자 여기저기 앉았던 여인들이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지를 않는가. 아직도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더니 역시 껄껄 웃고 만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85년부터 배우협회이사. 영화인 협회 부회장을 맡아 뒷바라지도 해온 이대근 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하다. 얼마 전 히트한 송강호 주연의 < 반칙왕 >이 충무로에서 입에 오르내릴 때 그를 잘 아는 영화인들은 10여년전이라면 송강호 역할은 이대근이 적역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근은 본격적으로 레슬링을 한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우리배우들 중 레슬링을 한 인물을 꼽는다면 국회의원이기도한 신영균 과 이대근일 것 같다. 우락부락한 이미지답지 않게 그는 성경을 주제로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고 슬며시 말하곤 한다. 이대근 은 세상에서 연기만큼 좋은게 없단다. 일단 작품이 이뤄지면 돈도 가난도 미움도 아픔도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 최근 작품은 < 해적, 디스코왕 되다 >. 비록 주연작은 아니지만 아직도 영화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자체가 만족스럽다고. 이제까지 출연한 작품 가운데 가장 애정이 가는 영화는 <김두한> 5편 모두와 <연산군>. TV에서 시작했으나 신상옥감독에 의해서 영화에 매력을 느껴 이제까지 사명감을 갖고 임해왔다는 그는 군생활에서 국립묘지 초대나팔수로 지냈던 만큼 자신을 헌신하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지금까지는 훈련과정에 불과하다는 것. 앞으로는 < 벤허 > < 나사렛 예수 >와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연기자가 ,그것도 35년씩이나 연극 TV ,영화를 넘나들며 수백편씩 출연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보통 인생들도 외길로 인생을 초지일관한다는 것은 산을 깍는것보다 어렵다는게 통례. 이대근의 면모를 보면 아직도 젊음이 펄펄 살아 넘치는 30-40 대의 느낌이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수 없는것인지 그의 자태에서도 언뜻언뜻 연륜을 읽을 수 있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그의 이 같은 느낌은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세태속에서 자기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아닐까. 요즈음 젊은이들이 너무도 쉽게 스타가 되거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을 보면 오랜 연륜과 인고의 자기 연마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 인가를 알 수 있겠다. 김량삼(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43년 7월 1일 서울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졸업 1968년 최무룡 감독 < 제3지대 >로 데뷔 <주요 경력> 연극 : <성웅 이순신>, <노틀담의 꼽추>, <고려인 떡쇠> 등 약20편 방송 : <갈대>, <거상 임상옥>, <조선총독부>, < 수사반장 > 등 500여 편 영화 : <김두한>, < 거지왕 김춘삼 >, < 장마 >, < 심봤다 >,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뽕 >, < 변강쇠 >, < 만날 때까지 > 등 300여 편 <수상 경력> TV연기상, 인기상, 한국일보상, 영화평론가상, 대종상주연,조연상, 영화인협회표창장, 국제영화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