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
- 감독
- 고어 버빈스키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조니 뎁, 올랜도 블룸, 키이라 나이틀리, 제프리 러쉬, 조나단 프라이스, 빌 나이, 주윤발, 스텔란 스카스가드
# 실제 사건 2018년 1월 13일 토요일, 오전 8시 7분. 핸드폰에 긴급재난문자가 울린다. “하와이로 향하는 탄도미사일 위협 발생. 즉시 대피소를 찾으세요. 이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1.4백만 하와이 시민은 임박한 죽음의 공포를 맞닥드리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떨어져있던 가족과 친구를 찾고, 대피소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도시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와이 주정부는 13분 뒤 트위터에 미사일 위협이 없다고 발표했지만 소셜미디어를 쓰지 않는 이들에게 정정 내용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거렸고, 앞선 문자와 트위터 중 무엇이 가짜뉴스인지 분간되지 않는 순간이 흘렀다. 최초 재난문자 전송 38분 뒤 주비상관리국은 정정내용을 다시 문자로 전송했다. 이 시간동안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골프장에 있었고,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미본토를 겨냥한 미사일 공격 발생시 대응 계획을 지난 30년간 시험해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방장관은 트위터에 “실수로 인한 핵전쟁 위험성은 가설이 아니다. 사고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인간은 또다시 실수를 할 것이다. 단순 실수가 수백만명의 목숨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도록 더욱 철저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남겼다. # VR 다큐 <당신이 깨어난 아침(세상의 끝까지)> (이하, <당신이 깨어난 아침>) < 당신이 깨어난 아침 >은 4년 전 하와이를 혼돈 속에 몰아넣은 정부의 가짜 탄도미사일 경보 사건을 다룬 VR 다큐이다. 총 3장으로 나누어진 38분 길이의 디지털 이미지 작업으로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 목소리와 나레이션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1장 ‘피신하라(Take Over)’는 사건 당일 아침 유난히 아름답던 하와이 하늘부터 지옥같은 공포에 이르기까지의 순간을 몇 인물의 구체적인 증언으로 담았다. 일터에 가기 전 평온하게 준비를 하던 안지 앤더슨(Angie Anderson)은 핸드폰 알람 소리에 평소처럼 홍수주의보인줄 알고 별생각없이 화면을 보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브루스 알린(Bruce Allyn)은 이 문자가 사실일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지난달 섬전체에서 실시한 대피훈련을 기억하며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서늘함을 마주한다. 하와이 출신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핵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은 이날 아침 도서관에서 친구들의 겁에 질린 메시지를 연쇄적으로 받으며 마지막일지 모를 사랑의 답변을 보낸다. 실제로 미사일이 발사된거라면 15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고, 평균 크기의 핵이 폭발한다고해도 호노룰루 전체가 시작부터 흔들리고 섬 전체가 유해물질로 뒤덮일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등에 업고 피신처에 겨우 도달한 한 남자는 “여긴 자리가 없으니 다른 데로 가세요!” 라고 소리지르는 군중의 민낯을 마주하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평화로운 상황이 이상했다. 태평양의 주요 군 핵심시설로 가득한 하와이에서 피신이라는 게 가능한지 의문을 가진 작가도 등장한다. 이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과연 무엇인지.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피신하라”는 말만 내놓는 것이 대안인지 의문을 가진 젊은 여성은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기도를 하며 바다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간다. 2장 ‘종말의 기계(The Doomsday Machine)’는 문자 발송 직후부터 긴급신고번호로 접수된 문의전화 녹음기록을 공개해 공적 권한을 지닌 이들에게도 정보가 도달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어떤 조언도 제시하지 못한 상황을 드러냈다. 공기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던 38분간, 시민들은 자신의 안전을 책임진다고 믿었던 정부기관에서는 어떤 답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셜미디어로 향한다. 각자의 처지와 정보를 교환하고 개인의 결정으로 대처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인터뷰가 이어진다. 또한 지구 위에 존재하는 14,000개의 핵무기가 지구를 몇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취재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준비를 하라”던 교사의 지시에 부모의 위안이 필요했던 소녀, 이 속에서 살아남더라도 뱃 속의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줄 수 있는지 걱정하던 임산부의 증언은 시스템의 실패로 인류가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사건으로 이 날을 기록하고 있다. 3장 ‘쿨레아나(Kuleana)’ 는 책임이라는 뜻을 가진 하와이어로 사건이 종료된 시점부터 그 이후의 변화를 담고있다. “미사일 경고는 잘못된 문자였다” 라는 정정보도에도 사람들의 혼돈은 한동안 지속됐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그 사건 이후 어떤 것도 똑같지 않았다”라는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그저 앉아서 언제일지 모를 죽음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타고 나왔다. 정부는 미사일 경보 오발령의 원인으로 주정부 비상관리국 직원이 작업 교대 중 경보 시스템을 점검하다가 버튼을 잘못 누르며 생긴 개인의 실수였다고 밝혔다.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으며 사건은 종료됐다. 시민들은 “잘잘못을 묻고, 적과 아군을 나누고, 누군가를 해고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험과, 시스템이 실패할 수 있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살기보다 다른 대안을 원했다. 그리고 그 답은 기존의 사회작동 방식이 아닌 과거 하와이 선주민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 점점 개별화되는 사회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되찾고 보편적 인간성을 회복해야 가능하다는 목소리로 퍼진다. 타마라 패턴(Tamara Lilinoe Patton)의 증언 장면 트레일러 보기: On The Morning You Wake (To the End of the World) | Meta Quest # VR다큐 미학의 발전 가능성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특이점은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하려는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2장에 등장한 추억의 가족 비디오를 제외하고는 실제 촬영한 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 현실 이미지를 옮기기보다 디지털 이미지로 당시 일어난 상황을 묘사한다. 이는 다큐멘터리가 실제 현장의 이미지를 드러내며 힘을 발휘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미지의 힘을 포기한 것이냐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제작진은 표현방식 전략을 이 사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핵(이미지)과 목소리(사운드)로 세웠다. 핸드폰이라는 매체 덕분에 무언가를 알리고, 남겨두기 위한 현실 기록으로서 이미지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새로운 이미지는 일상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기록 영상과는 반대로 현실을 전제로 하되 디지털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야기를 해설하는 이미지도 모두 움직임에 반응하는 입자처럼 최소화해서 그 외 공간을 비우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와이 미사일 오보의 주요 쟁점인 ‘핵'과 그 여파를 이미지화한 그래픽, 모래처럼 산산히 부서지고 날아가는 세계, 하와이 섬의 모습 등을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했다. 명백히 인위적인 것임을 선언하는 이 작품의 시각 표현방식은 관객에게 거짓말 같은 실제에 대한 현실 인식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허구) 사람들에게는 실제 일어난 일(현실)이었고, 삶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단어가 적합해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작진은 미사일로 인해 핵폭발이 일어났다면 산산히 부서졌을 세계를 묘사의 한 방법으로 취했다. ‘만약’ 위험 경고가 사실이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증언과 사람들의 공간을 조각내 무너지게 하고 다시 구축하는 방식으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관객에게 가상 현실을 경험하게 해서 ‘정부'의 메시지라는 권위가 우리가 보는 이미지보다 더 허구적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언제든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고, 영상이 끝나도 우리의 현실이 여전히 헤드셋 밖에 남아있다고 알리는 장치로 이 디지털 이미지는 작동한다. 이러한 재현 이미지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강력한 힘은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음질에 관계없이 일어난 일에 대한 객관적 상황을 제시하고, 이들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세상의 끝을 마주한 당일의 감정이 불안하거나, 화를 내거나, 다급하게 온전히 전달되고 있다. 다시말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청각이 제공하는 강렬한 사실과 감정을 기초로 당시 상황을 디지털 이미지라는 가시적 형태로 표상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디지털 이미지 대신 실제 장면이 들어갔다면, 2D 영화였다면, <당신이 깨어난 아침>이 지금의 결과물과 같은 영향력을 주었을까? # 재난을 재현하는 매체와 이미지 사실을 증명하는 것보다, 리얼리즘 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작품은 관객이 받아들일 작품의 영향력을 답으로 고려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운동에 동참하세요" 문구가 드러내듯 평화와 비핵화 캠페인에 대한 선명한 의도를 지닌 작업이다. 그러나 <당신이 깨어난 아침>은 전쟁이나 재난의 참혹함을 전시하여 관객에게 충격효과를 통해 마음을 움직이는 대신 스스로 질문하게하는 방식을 택했다. 제작진이 선택한 디지털 이미지 활용이라는 전략은 촬영할 수 없었던 지점을 시각화해주는 수단이자, 거짓말 같은 사건을 보도함에 있어 인위성이라는 한계를 오히려 현실 자각의 도구로(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당신에게도 이 허구가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미학의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 사용한 사례였다. 이 작업은 다른 층위의 질문을 연결한다. (하와이 원주민의 지혜가 답이 될 수 있는가하는 순진한 결말은 내용에 대한 것이고, 매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기에 여기서는 제외하겠다.) VR 매체 자체가 지닌 기술이 재난과 같은 사건을 다룰때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D 영화처럼 타인의 이야기로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닌 VR이 강조해온 몰입을 통한 “현재성"과 “경험”이 내 이야기로 느끼게 해준다면 윤리적 문제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누군가의 절망과 재난을 가상 체험한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걸까? 또한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디지털 이미지가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당신이 깨어난 아침>의 경우는 VR로 그 가능성을 선보였다. 왜냐하면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느낀 공포는 실제였기에 ‘가상 현실'이라는 매체를 통과하는 이야기를 제작진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리하게도 참혹함을 전시하지 않고 들려주는 방식으로 재난의 공포를 관객에게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된 논쟁인 재난의 이야기가 아름다워도 되는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 마무리하며 영화사의 주요한 변화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것이었다. 때론 예술가들의 미학적 측면이 기질을 발휘한 순간들이 있지만 진보의 동반자로서 영화를 이끈 데에는 기술을 사업으로 활용한 이들이 있었다. 관객의 지지와 거부가 영화사의 진행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고 상업적 생존 능력에 따라 영화는 발달되어 왔다. VR이 배급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3D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VR이 꼭 영화가 되어야 하는가? 재간의 산물로 남지 않더라도, 특정한 이야기에 맞는 매체로 ‘새로운 시각화 수단’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남는다. 어떤 이야기는 영화에, 어떤 이야기는 시리즈로 나누어 가는 것이 더 어울리듯 어떤 이야기는 VR에 맞는 것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 것이 이미지의 윤리적 문제 모두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특정' 이야기에는 적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리스트가 완벽한 영화를 뽑는 것이 아니듯 내게는 이 작품이 다큐 미학의 새로운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이미지 매체의 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이었다.
< 헤일, 시저! Hail, Caesar!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감독 | 조시 브롤린, 조지 클루니, 엘든 이렌리치, 랄프 파인즈, 요나 힐, 스칼렛 요한슨, 프랜시스 맥도먼드, 틸다 스윈튼, 채닝 테이텀 이 영화를 기대하는 모든 이유가 ‘코엔 형제의 신작’이라는 네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장르의 관습을 아무렇지 않게 뒤틀며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빗겨난다. 그 예상치 못한 길의 끝에는 우리네 삶의 소소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 헤일, 시저!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든 대작 영화의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주연배우 베어드(조지 클루니)가 사라진다. 이에 할리우드의 해결사 에디(조시 브롤린)가 그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진실 찾기는 늘 보잘것없는 답을 구하는 데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요지경 같거나 허무한 풍경 그 자체다. 그렇다면 <헤일, 시저!>가 그리는 그 풍경은 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찬란했던 모습일 테다. 과연 코엔 형제가 지금의 스타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바라본 할리우드 황금기는 어떤 시대일까. < 워 머신 War Machine >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 | 브래드 피트, 벤 킹슬리, 에모리 코헨, 토퍼 그레이스 < 트리 오브 라이프 >(2011) < 머니볼 >(2011) < 노예 12년 >(2013) < 셀마 >(2014) < 빅쇼트 >(2015)로 확실해진 사실 하나.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실험적이며, 완성도 높고, 문제의식 가득하며, 대담한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는 바로 플랜B라는 사실이다. 맞다. 브래드 피트가 소유한 바로 그 영화 제작사다. < 워 머신 >은 플랜B가 2016년에 선보이는 코미디 전쟁 영화다.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인 스탠리 맥크리스털의 이야기를 쓴 동명 논픽션(2012)이 원작이다. 맥크리스털은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한 것이 문제가 돼 사령관직을 사직했다. 플랜B는 이 영화에서 맥크리스털(브래드 피트)이란 인물을 통해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얼마나 신랄하고 기발하게 풍자할까. 더욱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은 이는 호주의 기대주 데이비드 미코드 감독이다. 최근작 < 더 로버 >(2014)는 실망스러웠지만, 그의 첫 장편 < 애니멀 킹덤 >(2010)이 안겨줬던 충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플랜B가 선택한 미코드 감독의 연출력을 한 번 더 믿기로 한다. < 곡성 > 나홍진 감독 | 곽도원 , 황정민 , 천우희 첫 장편 연출작 < 추격자 >(2008)로 강렬하게 증명했듯, 나홍진 감독은 한국영화 특유의 사실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장르의 박진감을 증폭하는 전략을 쓴다. 그의 두 번째 장편 < 황해 >(2010)는 그 실험이 더 극한으로 치달았던 작품이다. 연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구남( 하정우 )의 수난기는 사실적이다 못해 극단적이었고, 대형 트럭이 맞부딪치고 나뒹구는 액션 장면은 기존 한국영화 속 자동차 액션의 규모와 스펙터클을 뛰어넘겠다는 야심이 엿보였다. 그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극단적 사실성과 장르적 쾌감 모두 배가하려는 <황해>의 시도는 그 둘의 불균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과연 나홍진 감독은 <황해>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 곡성 >이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기이한 소문과 사건을 그리는 미스터리 영화라는 것밖에, 지금으로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 지독한 감독의 절치부심이 어떤 작품을 낳았을지,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실험의 결과가 궁금하다. < 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 > 자비에 돌란 감독 | 가스파르 울리엘, 나탈리 베이, 마리옹 꼬띠아르, 레아 세이두, 뱅상 카셀 자비에 돌란이란 이름이 그저 ‘젊고 잘생기고 재능 있는 인물’에 열광하는 힙스터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돌란 감독은 < 마미 >(2014)를 통해 똑똑히 증명해 보였다. <마미>에서 보듯 그의 영화에는 흡사 뮤직 비디오 같은, 젊고 감각적인 영상이 있는가 하면, 낡고 나이 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한눈에 세상을 뒤흔드는 사랑에 빠지는 순수가 있는가 하면,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다. 매혹의 뒤편에 공포와 슬픔을 그리고, 희망의 뒷면에 절망을 새긴다. 돌란은 한마디로 똑 떨어지는 단순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단지 세상의 끝>은 만드는 영화마다 자신의 세계를 한 발씩 넓혀온 돌란이 <마미> 이후 선보이는 신작이다. 1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작가 루이스(가스파리 울리엘)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 안에 돌란의 더 넓은 우주가 담겨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촬영현장 < 레스터 버티컬 Rester Vertical > 알랭 기로디 감독 | 크리스티앙 발레트, 인디아 헤어, 로르 칼라미 2013년 한 영화제에서 알랭 기로디 감독의 < 호수의 이방인 >을 봤을 때를 기억한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노골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호숫가에서 벌어진 살인에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이 영화는, 그 무엇도 거리낄 것 없는 대담한 표현과, 한 순간 영화의 분위기를 뒤흔드는 강렬한 연출로 알랭 기로디란 이름을 관객의 뇌리에 박아 넣었다. <호수의 이방인>이 등급 심의 문제로 여전히 국내 개봉을 못하고 있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기로디 감독은 그동안 벌써 다음 영화의 촬영을 끝냈는데 말이다. 그의 신작이 바로 < 레스터 버티컬 >이다. 그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비밀에 부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집에 가까이 가는 긴 여정에서 믿기 어려운 것을 믿게 되는 광경을 그리고자 했다.” 배짱 넘치는 그의 신작을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한 말이다. 올해 영화제에서 볼 수 있기를 첫손에 꼽는 작품이다.
열아홉의 여름, 자신의 첫 경험 상대인 ‘춘기’( 김수현 )가 조기유학을 중도하차하고 돌아오자 인선(배혜미)은 묘한 기대에 휩싸인다. 일찍부터 절친이자 상당한 포스의 소유자 ‘노박’(김은미)이 이들 무리를 리드하고, 같이 놀면 망한다는 꼬리표가 붙은 ‘망’( 정소민 )이 엮이는 사이 이들의 한 시절에 마침표가 찍힌다. 그리고 인선의 마음을 감독의 목소리로 전하는 마지막 방백. “가끔씩 그때 했던 생각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중략) 찬스는 끝났다”. 경쾌한 매너로 먹먹한 얘기를 풀어내는 이 단편을 어쩌다보니 프리뷰 DVD로, 영화제의 스크린에서, 그리고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해 반복감상했다. 그때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영화의 카피를 궁리하게 된다. 군살 없는 런닝타임 동안 여러 결의 감정과 고비를 선보이는 때문. 그렇게 구상한 치기어린 카피들을 늘어놓자면 - 종부세 폐지촉구 현수막이 걸린 압구정 한양아파트 앞의 ‘세 친구’(임순례). 중삐리 때부터 같은 라인에 살며 부루마블 게임으로 일탈을 하던 낭만적인 ‘국외자들’(고다르). 부모의 명으로 조기유학을 떠나거나 낙하의 퍼포먼스로 나름 수성을 하며 성인은 되었지만 여전히 꼰대들의 손바닥, 그런 강남의 ‘포스트모던보이 & 가십걸’들이 부모의 재산소득 바깥에서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이지민)’. 즉, 이들이 획득한 시민권은 강남 중산계급의 대학생 자식이라는 코스프레에 다름 아닌지라 과외로 진학을 한 후 남의 과외가 파생시킨 또 다른 과외로 용돈을 버는 속절없는 순환에서 벗어날 요량이 없다. 혹 남녀 캐릭터의 역할이 전형적으로 머물렀거나 (가령, 있는 집 아들네미들의 까닭 모를 허기와, 그와 대립하는 도덕적 주체로서의 여성이 나오는 일일연속극처럼), 또는 인물의 경제적 조건을 하향 평준화시켰다면 (그러니까, 영화학교의 중산층 자제들이 차상위층의 고난을 제 규격에 맞추어 재현하며 취업을 예비하는 포트폴리오처럼) 그저 흔한 습작이 됐을지 모르지만, 자기 계급과 세대의 분열증을 쳐다볼 줄 아는 감독은 온갖 클리셰를 조금씩 미끄러뜨리는 상당한 나레이션의 - 고다르보다는 에이미 핵커링에 가까운 - 영화를 빚어냈다. 이 단편의 유머나 냉소가 자기 재주나 스펙의 전시가 아니라 사람과 시절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은 해가 갈수록 증명되리라. 제목과 정반대의 퀄리티를 지닌 최고의 단편. 부디 여러분은 “찬스”를 놓치지 마시라. ps. 요새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배우 김수현 과 역시 TV 쪽의 유망주 정소민 의 보다 풋풋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주연인 배혜미와 김은미의 연기와 인상도 적절하고 훌륭하다. 한편, 조성희 감독의 중편 < 남매의 집 >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남궁선 감독의 이전 단편 < 세상의 끝 >에서는 2011년의 걸출한 장편데뷔작 < 파수꾼 > (감독 윤성현) 의 ‘베키’ 박정민 이 아마도 첫 연기를 선보인다. 재주와 미모를 겸비한 청년들을 발굴하는 재주가 있는 감독이다. 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