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하고 누나하고
- 감독
- 이상언
- 제작년도
- 1978
- 출연
- 송승환, 정효진, 이상민, 추석양, 도금봉, 최정훈, 김석훈, 서정일, 한국남, 김지영, 조경희, 최지애, 주상호, 곽건, 최일, 최준, 박소영, 유지연, 양재원, 박원호, 이상철, 김종좌, 이진호, 이순재, 조학자, 임성포, 김기종
이번 원고를 위해 < 검은 장갑의 여인 >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해독하려 시도하는 중이다. 심우섭 감독, 이경재 원작, 박옥상 각색의 이 1962년 영화가 특별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연배우가 최무룡 , 황해 , 김혜정 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주인공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은근히 해독이 어렵다. 이유는 계속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교통사고(지문에는 ‘부레키 소리, 황인성 차에 치운다’라고 나와 있다.)로 시작하는 영화다. 차에 치인 황인성이란 사람은 한명건설 영업부장으로, 죽기 전에 목격자인 사진기자 윤덕호에게 “서류, 서류... 검은 장갑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말 그대로 검은 장갑을 낀 누군가가 그 서류를 훔쳐갔다는 말로, 지문에도 그 장면이 나온다. 겨우 페이지를 한 장 넘겼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상하다. 일단 경찰에 따르면 피해자는 사고 직전에 어떤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그 여자가 우리의 타이틀 롤인 ‘검은 장갑의 여인’일 텐데, 왜 얼굴과 이름을 알면서 ‘검은 장갑’이라고 했을까? 장갑이란 벗어버리면 그 뿐, 어떤 단서도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암만 봐도 교통사고를 위장한 계획 살인인데 그렇다면 운전사는 왜 브레이크를 밟았을까? 여기에 대한 어떤 논리적인 답변 같은 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란다. 호기심이 당긴 덕호는 독자적인 수사에 나선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이미 그가 그 검은 장갑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장갑은 미스 추라는 사람의 것인데, 덕호는 이미 미스 추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 사람은 그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연실이라는 모델과 룸메이트인 모양이다. 그리고 은주란 여자도 같은 방을 쓰는 모양이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도대체 장갑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건데? 그게 여자친구 룸메이트 것이란 건 어떻게 안 건데? 사라진 서류는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설계도이기 때문에 한명건설의 주 사장은 난리가 났다. 엉뚱하게도 덕호는 이 회사의 긴급회의 안에 버젓하게 들어간다. 주 사장이 고용한 이 변호사는 덕호를 믿을 수 있는 부하라고 소개하는데, 왜 그런 사람이 지금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를 하고 있을까? 죽은 남자가 남긴 수첩이 단서다. 박미라와 서장석이라는 이름이 있고 장효숙이란 여자 이름도 있다. 덕호가 장효숙을 찾아서 물어보니 죽은 남자는 사실 송 마담이라는 여자에게 빠져 있었단다. 송 마담을 찾아낸 덕호는 그 사람과 대충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덕호: 나같은 돈판이 지나치기에는 과거의 경력이 용서를 해야지. 송마담: 문제의 미인을 미행했군. 덕호: 그런데 그 미인이 지금 막 이빠 안으로 들어왔거든. 송마담: 지금? 응... 아무도 안 왔는데? 박원식: .... ‘나같은 돈판이...’가 어떻게 ‘문제의 미인을 미행했군’으로 연결되는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덕호는 송 마담이 검은 장갑의 여인이라고 우기다가 바에서 쫓겨나고 정체불명의 악당에게 얻어맞는다. 알고 봤더니 주 사장은 과거가 있다. 옛날엔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였고 죽은 황 부장은 그의 앞잡이였다고 한다. 하긴 60년대 초. 일제시대 친일파들이 아직 팔팔한 장년층이던 때다. 이건 내가 이 시나리오에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실이다. 송 마담은 여전히 자기가 검은 장갑의 여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주 사장의 오른팔인 박 상무의 여자친구란다. 그리고 덕호가 입원한 병원엔 아까 ‘...’로 첫 등장을 했고 잠시 뒤 그를 두들겨 팬 박원식이 전화를 걸어와 검은 장갑을 찾지 말라고 협박한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장갑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자기를 찾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꽃다발을 보내온다. 덕호는 꽃집을 찾아내 그 꽃을 사간 사람이 박미라라는 여자라는 걸 알아낸다. 하지만 이틀 동안 땡땡이를 치느라 잡지에 낼 화보를 찍는 걸 잊었다. 연실은 더 이상 모델을 안 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부터 덕호는 어디서 만났는지 은주를 찍고 있다. 은주에게 자기가 맡은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당연. 덕호가 서장석을 찾으러 대구로 내려간 동안 황인성을 죽인 운전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그는 바텐더인 박원식과 아는 사이다. 경찰은 박원식을 체포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엉뚱하게도 그의 알리바이를 대주는 사람은 덕호이다. 이유는 그냥 안 나오고. 물론 둘이 같은 차를 타고 있는 장면도 안 나온다. 여기서 갑자기 영화는 진상의 일부를 공개한다. 알고 봤다니 주 사장의 오른팔인 박 상무와 박원식은 형제이고 둘은 모두 주 사장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 이름이 혜린이라는 송 마담은 박 상무의 연인이기도 하지만 검은 장갑의 여자이기도 하고 그들과 한패이다. 그리고 그들은 막 주 사장의 아들을 유괴해 몸값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이 뒤부터는 그나마 말이 되기 시작한다. 주 사장은 고등계 형사였던 때에 은인이었던 친구를 배반했다. 그의 세 남매는 서장석이 키웠는데 그게 박 상무, 박원식, 은주다. 물론 은주는 박미라이기도 하다. 덕호에게 설득된 은주는 경찰 편이 된다. 박 상무는 주 사장의 재산을 정리한 뒤 그를 살해하고 자살한다. 박원식은 주 사장의 아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이다 갑자기 안 나오는데, 마지막 대사가 ‘앗’인 걸 보면 떨어져 죽거나 뭐 그랬나 보다. 송 마담도 자살했나 보다. 인물 관계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앞에 벌여놓은 이상한 난장판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몇십 년 전 한국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우리에겐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태평스럽게 늘어놓았고 나 역시 여기엔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각본은 그렇게 이해되는 수준의 무책임함을 넘어선다. 분명 여기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상자료원으로 각본이 넘어가는 동안 잘려나간 장면이 있거나, 없어진 지문에 설명이 있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 시시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진짜 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읽은 각본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최불암 (崔佛岩)의 특징은 어질고 수더분한 데에 있다. 그의 울림이 있는 음성과 여유로운 절제력은 자연인으로서도 신뢰감을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형상의 느낌은 스크린 이미지와도 거의 일치된다. 그가 지금까지 형상시킨 많은 인물의 공통점은 소시민적 친화력이다. 관객의 눈높이에서는 그 어떤 비밀이나 속마음을 털어놔도 포용해 줄 것 같은 격의 없는 인간미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정장형의 신사와는 거리가 멀다. 설령 정장을 했더라도 포마드 따위를 발라 멋을 냄이 없이 그저 두어 번 머리를 쓸어넘겨 빗질 시늉이나 했음직한 그런 모습이다. 그의 연기를 지켜 보노라면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의 스크린을 누볐던 명배우 김승호 를 연상케 한다. 최불암 은 앞의 선배 연기자가 지녔던 서민적 요소와 투철한 직업의식, 인물을 꿰뚫어 보는 해석과 형상력, 그리고 승부 근성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김승호가 상대를 제압하려는 독주의식과 신파 연극 출신이 갖기 마련인 ‘오버 액션’의 폐단을 버리지 못한데 비해, 그는 곰삭은 연기로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두상이 큰 김승호와는 달리 174센티의 키에 알맞은 신체적 균형감도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선배 배우가 지닌, 추월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보수의식, 강인한 카리스마가 다소 밀린다는 것이 아쉬움이라 할 것이다. 최불암 은 1940년 6월 15일 인천 동구 금곡동 1번지에서 사업가인 최철 (崔鐵)과 대한제국 때 궁내 악사를 지낸 어른의 딸인 이명숙(李明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한(英漢)이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후 귀국, 2년 반의 준비 끝에 인천일보사와 건설영화사를 설립했다. 첫 사업으로 당장 이윤이 나온다고 보장할 수 없는 언론과 영화사를 차린 걸 보면 그의 아버지 최철은 문화에 대한 인식과 소양이 매우 높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열악한 해방기의 환경 속에서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안종화 감독의 < 수우(愁雨) >(1948 · 김소영 , 전택이 주연)와 안진상 감독의 < 여명(黎明) >(1948 · 이민자 , 이금봉 주연)이 바로 그것이다. <수우>는 어느 항구의 밀수패 두목에 대한 아내의 끈질긴 만류를 그린 경찰 홍보용 극영화이고, <여명>은 어촌을 배경으로 한 밀수 근절 계몽 영화이다. 뒷날 문교부 제정 제1회 우수국산영화상 작품상을 받은 < 곰 >(1959 · 조긍하 감독)과 < 내일 없는 그날 > (1959 · 민경식 감독)등을 만든 아카데미 영화사 대표 최도선 (崔道善)은 최불암 의 큰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 여명 >의 개봉 3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아들이 여덟 살로 인천 신흥국민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날벼락 같은 아버지의 죽음에 미처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소년은 영정을 안고 시사회장에 앉아 있어야 했다. 영화라는 존재를 어린 나이에 시사회장에서 먼저 알게됨으로써 앞으로의 인생을 예고한 셈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여명 >의 시사회를 가졌던 동방극장 지하실에 ‘등대’라는 뮤직홀을 차린 것은 얼마 뒤였다. 덕택에 그는 많은 영화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 마음의 고향 >과 같은 한국 영화는 물론, < 인생 유전 > < 정부 마농 > 등 유명한 외국 영화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서울로 온 것은 중앙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연극에 대한 열망이 일기 시작한 것은 같은 계열인 중앙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연극반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때 동기생 가운데는 극작가가 된 김기팔 과 TV연속극 <아씨>로 잘 알려진 이철향 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생이 된 김기팔은 최불암 이 연극 연출가가 되기 위해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에 들어간 이후에는 미아리의 서라벌예술대학까지 찾아와 도강을 하곤 했다. 이때 교수들이 유명한 이광래 (극작가), 김규대(연출가), 이원경 (연출가)등이었다. 그러니까 김기팔은 철학과에 들어갔으나 친구가 다니는 남의 대학에서 돈 안들이고 극작술을 익힌 셈이다. 최불암 은 서라벌예대에 다니는 동안 연출 경험을 쌓았다. <저 하늘에도> <오셀로>등이 이 무렵 펼쳐보인 꿈의 카드였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연출에의 희망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예정된 <햄릿>의 연출이 마땅히 맡길만한 주인공 감이 없어 스스로 맡는 바람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그는 2년제인 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신협의 중요한 공연은 거의 놓치지 않고 보았다. <처용의 노래> <다이알 M을 돌려라> 등이 이때 관람한 연극이었다. 김동원 , 최은희 와 같은 연기자들을 특히 좋아했다. 영화배우로는 김승호 에게 매력을 느꼈다. 큰아버지가 제작한 < 곰 >, 이병일 감독의 < 시집가는 날 >(1956)을 볼 때 더욱 그러했다. 한양대학교 영화과로 진학한 것은 반년을 쉰 1960년이었다. 이철향 , 허동웅 등 친구들과 함께 연기 실력을 인정받고 ‘반장학생’으로 들어갔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졸업을 1년 반 정도 남기고 제작극회(1962), 국립극장(1965~67년), 자유극장(1969~71년) 단원으로 무대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눈여겨 본 로렌스 올리비에, 알렉 기네스, 말론 브란도 등의 연기를 떠올리며 데뷔작인 4·19 소재의 연극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0 · 차범석 작·연출)의 주인공을 비롯, <산화>(차범석 작), <따라지의 향연> (1966 · 김정옥 연출)등에 주요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특히 <따라지의 향연>의 연기는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여세 속에서 1976년 KBS TV에 특채로 들어가 <수양대군>의 김종서 역을 맡음으로써 보다 가깝게 대중과 친숙하게 되는 안방 극장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후 <새엄마> <아버지> <한백년> < 수사반장 > 등 연속 TV드라마에서 확고한 위상을 다지고, 최장기 드라마 < 전원일기 >에서 남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한국적인 인고의 아버지 상, 어질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줏대있는 노인의 전형을 창출해 내었다. 그는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최불암 이 스크린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67년 신상옥 감독의 < 마적(馬賊) >에 의해서였다. 일본 헌병대에 감금된 독립단원을 석방해 준다는 조건으로 비적이 납치해 간 영국 영사의 딸을 구해내는 한국 독립 투사들의 활약상을 담은 이 영화에서 그는 영사 딸(비바 프린통)의 상대역을 맡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 만종 >(1970 · 신상옥 감독), < 내일 없는 우정 >(1970· 김시현 감독), < 사나이의 멋진 이별 >(1971· 김효천 감독), < 잊을 수는 없겠지 >(1974· 김진태 감독), < 파계 >(1974· 김기영 감독), < 왕십리 >(1976· 임권택 감독), < 빨간 구두 >(1975· 이성구 감독), < 정말 꿈이 있다구 >(1976· 문여송 감독), < 가족 >(1976· 이혁수 감독), < 졸업생 >(1976· 김기 감독), < 문 >(1977· 유현목 감독>, < 세종대왕 >(1978· 최인현 감독), < 로맨스 그레이 >(1979· 문여송 감독), < 달려라, 만석아 > (1979· 김수용 감독), < 최후의 증인 >(1980· 이두용 감독), < 사람의 아들 >(1980·유현목),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장호 감독), < 길소뜸 >(1985·임권택 감독),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배창호 감독) 등 35편 내외에 출연하였다. 그가 주로 연기한 것은 노인 역이었다. 아버지 역이나 늙은 남편 역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현상은 대학 시절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다보니 키스신이 나오는 장면은 한두 편 손꼽힐 정도였다. 그동안 그가 소화해낸 인물 유형을 보면, 결혼을 앞두고 교환 살인을 제의받지만 거절하는 사나이( 사나이의 멋진 이별 )나 아내의 입원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워하는 중학교 교사( 졸업생 )등을 제외하고는 중년 이상 세상의 풍상을 겪은 캐릭터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아내를 잃고 세 남매와 함께 외롭게 사는 중학교 교장(父), 전화 속에 헤매던 고아를 중으로 만드는 노스님( 파계 ), 고층 공사판에서 죽으려는 벙어리 소년을 구출하여 돌보는 중년의 형사, 자식을 찾아 상경했다가 역경을 겪고 귀향하는 시골 영감( 가족 ), 한라산에 은거중인 가야금의 명인( 문 ), 청백리의 귀감이 된 조선조의 황희 정승( 세종대왕 ), 가정에 충실했으나 늦바람 난 중진 교수( 로맨스 그레이 ), 시골로 내려와 손주와 함꼐 고향 찾기 운동을 돕는 할아버지(달 려라 만석아 ), 지리산 공비의 딸을 돌봐 아내로 맞아들이는 모진 시련의 노인 황바우( 최후의 증인 ), 서울 변두리의 개발지역에 기생하는 중년의 건달( 바람 불어 좋은 날 ), 그리고 수줍음 타는 대학생 아들의 조언자인 < 기쁜 우리 젊은 날 >의 속깊은 아버지와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것은 < 문 >(1977)과 < 세종대왕 >(1978), < 달려라, 만석아 >(1979), < 최후의 증인 >(1980)등의 연기였다. 이중 < 문 >을 제외하고는 세 편이 각기 대종상 남우조연상(세종대왕), 대종상 남우주연상(달려라, 만석아), 과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자연기상(최후의 증인)을 수상함으로써 객관적인 평가를 받았다. 최불암 은 이처럼 큰 내색없이 기대해온 연기의 성과를 거둔 다음에야 뒤늦게 미루어온 한양대학교의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1980년 봄이었다. 그동안 그는 2년반의 열애 끝에 1970년 영화 < 생일 없는 소년 >에도 출연한 바 있는 인기 탤런트 김민자 (金敏子)와 결혼, 1남(東歷:33세), 1녀(東妃:27세)를 두었다. 이로써 그는 2대째 영화와 관련된 명실상부한 예술 가족을 이루게된 것이다. 그러나 은성 주점을 경영하며 유명 문화인들을 끌어 모으고 풍요로운 명동 문화시대를 구가케 했던 어머니 이명숙 여사는 유명을 달리했다. 아쉬운 것은 1987년 < 기쁜 우리 젊은 날 > 이후 16년째 그의 질퍽한 연기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종원 (청주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40년 6월 15일 인천 출생 1963년 한양대학교 영화학과 졸업 <주요 경력> 중앙국립극단, 탤런트, 극단 현대예술극장 대표 14대 국회의원, 호서대 연극영화과 교수 현재 웰컴 투 코리아 시민협의회 회장,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장 <수상 경력> 대통령훈장, 문화공보부 장관상, 대한민국 방송상 주연상, 대종상조연상 한국복지재단(대통령 국민목련장) 외외 50여 수상 <주요 작품> 세종대왕 , 달려라 만석아 , 최후의 증인 , 파계 , 여마적 , 문 , 의사 안중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