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세라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사마모토 스미, 나카니시 타에코, 히사무라 에이코, 사카모토 치카, 야오이타 마키, 이치류사이 테이유우, 와타나베 나오코, 나시와 유리, 깅가 반죠, 나카무라 슈세이, 송도영, 정희선, 박소현, 기경옥, 우문희, 서영애, 한규희
올해 리스트는 이전과 비교해도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Faces places >(아네스 바르다/JR, 2017)은 내가 올해 보았던 영화 중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이 선정했을 것 같아서 넣지 않았다. 그리고 공개된 리스트를 보니 역시나여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 더 포스트The post >(2017), <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 >(2018)과 같은 환상적인 스필버그 영화들이 나왔지만 <더 포스트>에 대해서는 분명 나보다 더 길게 이야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해서는 올해 지나치게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올해는 유달리 넷플릭스에서 본 작품들을 많이 뽑았다. 만약 < 로마Roma >(알폰소 쿠아론, 2018)나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에단코엔/조엘코엔, 2018)을 보았다면 그것들을 추가하느라 애를 먹었을 수도 있다. 이들 영화를 뽑은 건, 극장에서 본 영화들과 경쟁할한 작품들이어서이기도 했지만, 이 리스트를 통해 이들에게 극장 상영의 가능성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려나. 레이디 버드 우선 나는 < 레이디버드Lady bird >(그레타 거윅, 2017)와 < 패딩턴 2Paddington 2 >(폴 킹, 2017)을 뽑았다. 이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으니 둘 다 놀랄 만큼 영리한데도 불구하고 선량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 영화에서는, 특히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이 두 특성이 함께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영화들은 엔드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선의와 품위를 지키면서도 좋은 게 좋다는 흔해빠진 자세 따위는 취하지 않는다. <레이디버드>는 사내아이들의 독백과 불평으로 도배된 영화판에 정면 도전한 여자아이들의 이야기이고, <패딩턴 2>는 현대 영국 사회의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칼날을 꽂는다. 거의 전쟁터에 뛰어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두 영화는 끝까지 냉소나 경멸 없이 선하다. 이야기꾼들은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사적인 리스트이긴 하지만 < 델마Thelma >(요아킴 트리에, 2017)은 그 중에서도 유달리 사적인 이유로 뽑힌 작품이다. 아, 물론 좋은 영화다. 재미있기도 하고. 하지만 이 영화를 뽑은 건 종교와 초능력을 다루는 영화의 태도와 그 가차 없는 해법이, 한참 이야기 길이 막혀 고민이었던 나에게 하나 이상의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의 자존심이 있으니 이 영화의 해법들을 그대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Ex libris: New york public library >(프레더릭 와이즈먼, 2017)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이 러닝타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 사령혼: 죽은 넋Dead souls >(2018, 왕 빙) 대신 넣은 다큐멘터리는 에롤 모리스의 <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Wormwood >(2017)이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애매하다. 상당히 긴 재현 장면이 들어간 다큐멘터리이고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이다. 심지어 우리에게 익숙한 에롤 모리스의 스타일에서도 조금 벗어나 있다. 과연 이게 얼마나 도전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텔레비전 세계에서는 꽤 흔한 형식이니까. 하지만 형식이 어떻건, 에롤 모리스는 여전히 영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명탐정이며 기가 막힌 이야기꾼이다. <어느 세균학자의 죽음>에는 일급 추리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근사한 서스펜스와 발견의 쾌락이 있다. 그렇다고 영화의 주제가 그 쾌락에 묻히는 것도 아니다. 소공녀 < 소공녀 >(전고운, 2017)는 이 리스트에 오른 유일한 한국 영화이다. 아마 올해 개봉된 한국 영화 장편 중 가장 자기만의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 작품일 것이다. <소공녀>는 요새 한국 독립영화계의 분노와 억울함도, 보이지 않는 형님 앞에서 굽신거리는 주류영화의 비굴하고 밋밋한 분위기도 없다. <소공녀>는 그냥 차갑고 정확하게 세상을 보고 말없이 자기 길을 가며 그 때문에 올해의 한국 영화가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아름답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 < 서던 리치: 소멸의 땅Annihilation >(앨릭스 갈런드, 2018)은 올해 나온 미국 주류 SF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일 것이다. 많이들 타르코프스키의 두 영화 < 솔라리스Solaris >(1972), < 잠입자Stalker >(1979)와 비교하는데,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 자의식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다. 무심하게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영역을 넓힌 작품인 것이다. 미국 외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고 생각한 배급업자들의 소심함이 아쉬울 뿐이다. 다들 호러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절이고, 『보그』지의 모 평론가 의견과는 상관없이 올해의 성취도 만만치 않았다. 올해는 두 편을 뽑았다. < 유전Hereditary >(아리 에스터, 2017)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가장 악랄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영화였고, 토니 콜렛이 이 영화로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다면 세상엔 정의는 없다. < 힐 하우스의 유령The huanting of hill house >(마이크 플러너건, 2018)은 스트리밍에서나 가능한 10부작 미니시리즈의 형식을 최대한 살린 작품으로 귀신 들린 집 소재의 온갖 테마를 총동원한 장대한 오라토리오와 같았다. 올해 부천영화제 최고 히트작인 < 호랑이는 겁이 없지Tigers are not afraid >(이사 로페즈, 2017)는 눈높이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멕시코 마약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는 대신,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아이들의 열망과 상상을 반영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정곡을 찌른다. 마지막으로 다룰 영화가 바로 <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오슨 웰스, 2018)이다. 아마 이 영화는 열성 시네필에게 넘겨주고 나는 보다 장르적인 작품들을 다루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작품은 <바람의 저편>이다. 독립적인 영화로 보는 건 큰 의미가 없는 작품이다. 물론 그렇게 보아도 재미있는 작품이긴 한데, 그래도 결국 영화의 제작과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생각해보라. 내레이터가 현대 디지털 모바일 환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작되는 오슨 웰스의 영화이고, 존 휴스턴, 수잔 스트라스버그, 머시디스 매케임브리지, 릴리 팔머와 같은 고인들이 출연하는 신작이다. 2018년에 완성된 작품이지만 시네필들은 몇십 년 동안 제목을 알고 있었던 영화이다. <바람의 저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SF의 언어를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골라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의 저편>은 암만 봐도 고전적인 20세기 SF 소설의 설정에서 튀어나온 영화처럼 보인다. 초현실적인 정체성 혼란을 겪는 존재가 주인공인 시간여행 이야기인 것이다. 정리를 해보자. 유럽에서 돌아온 오슨 웰스는 그의 경력을 마무리 지을 마지막 걸작 <바람의 저편>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만들다 만 수많은 미완성 영화들처럼 이 작품도 수많은 암초를 만나고 결국 웰스가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그 뒤 수십 년 동안 제목과 클립들만 떠돌다가 그의 후배였던 피터 보그다노비치에 의해 완성된다. 월터 머치가 <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 때 그랬던 것처럼 편집자 수준에서 마무리 지은 게 아니라 최첨단 인공지능까지 동원해 의미도, 맥락도 알 수 없는 수백 시간의 푸티지를 가까스로 정리해 그럴싸하게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 영화의 내용이란 것이 주변 사람들과 제작자를 괴롭히면서 찍던 마지막 영화 <바람의 저편>을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죽은 천재 영화감독의 마지막 나날을 모큐멘터리로 보여주며 중간중간에 그 미완성 영화를 끼워 넣는 식이다. 이 영화를 완성한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실제로 영화에서도 그를 모델로 한 인물로 출연했기 때문에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는 건 더 힘들어진다. 오슨 웰스의 스타일이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이 영화가 촬영되었던 70년대엔 극히 드물었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파운드 푸티지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더 당황스럽다. <바람의 저편>은 <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지만 놀랄 정도로 21세기스럽다. 21세기 모바일 환경에 대한 대사는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추가한 것이지만 영화의 스타일 자체는 그냥 21세기의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온전한 모습으로 70년대에 개봉되었다면 미국 영화의 흐름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바람의 저편 훌륭한 SF 서사가 대부분 그런 것처럼 <바람의 저편>은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영화가 21세기 오슨 웰스가 만든 영화처럼 보이는 건 진짜로 오슨 웰스의 개성 때문인가, 아니면 영화를 완성한 사람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담고 있는 오슨 웰스의 스타일을 모방했기 때문인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 영화의 시대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모든 것들이 뛰어난 마술사였던 오슨 웰스 자신의 깜짝쇼일 가능성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하겠다. 그 자체로도 한 편의 완벽한 마술쇼였던 < 거짓의 F F for fake >(1973)를 본 관객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여전히 한국상업영화는 ‘2003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 올드보이 >(2003), < 지구를 지켜라! >(2003), < 살인의 추억 >(2003), < 장화홍련 >(2003) 등이 등장했던 2003년 즈음의 영화적 세계가 한국상업영화의 보편적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그 영화들이 한국 사회의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서 (혹은 그런 명목으로) 펼쳐 보였던 폭력의 스펙타클은 이제 비판의식조차 탈각된 채로 그저 형식적인 설정값이 되었다. 영화에서 세계는 그저 망가진 것이고, 폭력은 모든 사람의 존재 양식이 되었으며, 여자는 그 지옥도에서 고군분투하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요즘 한국상업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 있다. 다양한 장르, 서사와 이미지에서 과잉을 뺄 줄 아는 용기,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여자. 그런데 이런 한계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영화들이 있다. < 우리들 >( 윤가은 , 2015), < 소공녀 >( 전고운 , 2017), < 어른도감 >( 김인선 , 2017) 등 최근 개봉한 독립 장편 여성영화들이다. 이 세 작품은 모두 “내 마음을 그(것)에게 기꺼이 주었음”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 무엇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들인 것이다. 그 중 <어른도감>은 10대 여성이 등장하는 ‘소녀 버디물’이다. 열네 살 경언이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삼촌 재민을 만난다.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갑자기 삼촌이랍시고 나타난 재민은 어딘가 의심스럽지만, 당장 보호자를 찾을 수 없는 경언은 재민을 법적 후견인으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과,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는 아이”라는 콤비는 새로운 설정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익숙한 관계 안에서 아주 조금씩 변주를 줌으로써 새로운 합(合)을 끌어낸다. 그러면서 <어른도감>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또 다른 무언가를 선보였다. 그것은 아끼게 된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다. 최근 한국영화는 이미 잃은 것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하거나,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누구라도 짓밟을 수 있는 화가 난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경언과 재민은 좀 다르다. 끝을 모를 자기연민에 잠기거나 자신의 불행에 대해 무작정 분노하기보다는 부족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편이다. 나는 그것이 ‘감정’이라기보다는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른도감>은 감정 과잉의 영화들 틈에서 마음을 다루는 흔치 않은 영화가 되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교수들이 이 영화에 대해 “애매하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김인선 감독의 인터뷰에서 읽으면서 일전에 한 영화학도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의 단편영화에서 일상적인 고통과 불안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작품을 본 영화학과 교수들이 “좀 더 밀어붙이라”고 코멘트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영화는 강렬한 어떤 것을 관객들에게 내던짐으로써 메시지를 만들거나 쾌락을 줄 수도 있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언어로 시간을 천천히 쌓아가면서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충분히 시간을 들이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 더 밀어붙이라니. 뭘 더 밀어붙이라는 말이었을까?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제 서킷에 어필하기 위해서 ‘한국영화’, 특히 단편영화는 언제나 강한 한 방을 요구받게 된다. 그리고 그 강한 한 방이란 대체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미에서의 폭력을 미학화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더 센 무엇”을 요구하는 영화교육 안에서 폭력 빼고는 논할 것이 없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 안에서 <어른도감> 같은 영화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누군가는 대세를 거슬러 조금 다른 것을 만들 용기를 내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 개의 역사 >( 김보람 )는 2017년 다수의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감독이 거주하는 서울 후암동 일대의 풍경 및 주민들과‘백구’라는 이름의 늙은 개, 감독 자신의 일상적 삶과 문제들, 감독의 새로운 주거지가 된 홍은동 주민들 등을 중심으로 촬영한 사적 다큐다. 관련하여 좋은 글들이 이미 있다. 개인적으로는 차한비, 설경숙, 변성찬이 쓴 세 편의 글을 읽었는데, 경청하고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이들의 글보다 <개의 역사>에 관하여 더 사려 깊게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개의 역사>를 인상 깊게 관람한 이들과 나의 경험을 짧게나마 나누는 동시에 약간의 다른 의견을 보태려는 마음 정도다.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의 초반부에 감독이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업 내용에서 일찌감치 드러난다. 우리의 삶 안에는 공공연하게 중요한 것으로 지정되는 몇 개의 사건과 사물들 외에도 눈을 돌려야 할 다수의 존재들이 많다는 것이다. 가령 동네의 늙은 개 백구가 그러한 존재일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감독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이 점을 시적으로 요약해 낸다. “쫓겨나고 밀려나는 것들, 신경 쓰지 못했을 때 사라져 버린 것들, 다시는 찾지 못할 그리운 것들. 이름 없는 것들의 찾지 못한 이름들, 사라져가는 것들의 지워져 가는 시간들.” 하지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시적 표현이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얼마간의 억측을 동원해서라도 그 안에 자리 잡은 민얼굴 그러니까 어쩌면 감독 스스로 드러내기를 주저한 것인지도 모를 적나라한 사적 항목들을 추론해보고 싶어진다. 첫째는 외로움이다. 영화 속에서 이 낱말은 감독의 가족사를 말할 때 한 번 등장할 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세며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은연중 배어 있다. 외로움이 이 영화의 기초적인 감정이라고 말하면 이 영화는 유치하거나 나약해 보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외로움의 정서가 주변의 무명한 것들에 관한 호기심을 자극한 동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외로움은 영화 만들기라는 실천적 차원을 자극한 생산적 외로움이다. 둘째는 가난함이다. 이 가난함은 두 층위로 다시 나뉜다. 먼저 물질적 가난함이다. 감독은 영화 안에서만 두 번의 이사를 한다. 옥탑방에서 옥탑방으로 건너가는 열네 번째, 열다섯 번째 이사다. 부유하다면 그렇게 이사를 다녀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며 그걸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 개의 역사 >는 전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에의 비판성을 담고 있는 사회학적 영화라기보다는 자신의 물질적 가난함을 쫓겨나고 밀려나는 것들 중 하나의 수세적 예제로 인식하여 이 영화의 환경으로 포함시킨 뒤에 그걸 영화 속 주변의 환경들과 접속하고 연계해가며 만든 영화다. 이 물질적 가난함이라는 측면에만 한정한다면, 2017년에 나온 영화들 중 <개의 역사>와 유사한 동기를 보유한 영화는 < 소공녀 >( 전고운 )다. 두 영화는 양식적 범주도 다르고, 성찰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유사한 물질적 환경에 처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가난함이 있다면, 그건 관계의 가난함이다. 물론 이 관계의 가난함의 다른 이름은 앞서 지적한 외로움이므로 더 첨언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니 두 층위, 물질적 가난함과 관계의 가난함 모두 영화 만들기라는 생산성에 일조한다. 셋째는 불가피함이다. 부모의 이혼, 백구의 죽음, 오래 키워온 개 못난이의 죽음, 애인과의 연애사적 역경 등은 감독에게 불가피하다. 부모의 이혼은 설명되진 않지만 피할 수 없었고, 죽음은 사람이나 개나 그 종의 구분을 떠나 피할 수 없다. 이유를 알 순 없으나 전화상으로만 등장하는 애인과의 연애 혹은 동거 혹은 결혼에의 실패라는 불행도 감독에게는 불가피한 역경인 것으로 묘사된다. 이 비운의 불가피함도 감독에게는 카메라를 들게 하는 역설적인 생산적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부러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외로움, 가난함, 불가피함이 오히려 < 개의 역사 >의 생산적 관심을 촉구한 것이라고 거듭 썼다. 감독이 그 정서적, 물질적, 운명적 환경에 처한 자신을 자기 위로하거나 자기비하하며 지쳐가는 대신 영화 만들기라는 구체적 활동으로 관찰하고 성찰해 본 것임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감독의 말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다듬고 세공한 끝에 찾아낸, 우리가 인용하여 옮겨 온, 저 시적 표현들이 아니다. 그 표현들은 오히려 너무 수사적으로 정식화되고 공론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중요하게 다룬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다름 아니라 이 짧은 말,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싶었다”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 생략되어 있으므로 추가되어야 할 말은 다시 두 가지다. 하나는‘외로움과 가난함과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건절이고 또 하나는‘나는’이라는 주어다. 말뿐이지 않다. <개의 역사>는 삶을 사랑하는 법, 이라고 할 때의 그 ‘법’, 즉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고 싶은 자의 탐색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가능한 한 삶을 사랑 하고 싶어 할 것이다. 따라서 일반화에 가까운 이 소망의 피력만으로는 < 개의 역사 >의 특별함을 말할 수 없다. 때문에 관점을 옮겨, 이 영화가 삶을 사랑하는 법을 찾기 위해 시도하는, 아니 이 영화가 삶을 사랑하는 방법 그 자체인 그 탐색의 형식에 방점을 찍어야만 하겠다. 이 경우에 우리는 먼저 <개의 역사>가 어딘지 모르게 단번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한다. 복잡한 사건도 파악 불가능한 인물도 없는 이 영화는 그러나 결국 잘 잡히지 않는다. <개의 역사>는 떨어져서 보면 명료하고 싱거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들어가서 보면 애매한 경험이다. 화법의 문제가 우선 있다. 감독이 백구를 찍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암동의 주민 한 사람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감독에게 충고한다. 충고라기보다는 비난이다. 이 비난은 갑작스럽게 함부로 건네진 것이고 게다가 워낙 거센 강도여서 < 개의 역사 >를 인상 깊게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종종 못 잊을 대목으로 회자되는데, 사실 주목할 만한 것은 발언의 그 내용이나 수위 자체가 아니라 감독이 그 발언의 자리를 편집해내는 방식이다. 발언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만 화면에는 목소리의 주인 대신 백구가 잡힌다. 감독은 생산적으로 살라는 비난의 말을 힘없이 오줌 누는 백구의 이미지 위에 겹쳐 편집한다. 발언자를 자기 영화의 화면에 담기 싫어 내린 판단일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연유에서건 그를 카메라에 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효과는 분명하다. 생산적으로 살라는 비난의 말은 저 비생산적인 대상의 가장 비생산적인 행위와 겹쳐지며 괴이한 분위기 속에서 의미를 잃고 튕겨져 나간다. 발언자는 개를 찍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이 흐를 때 그가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한 그 대상이 무심하게 겹쳐지면서 오히려 이 위악적 논평의 권위는 은밀하게 추락하고 무화된다. 다만 그 발언자에게 반격하려는 공격성이 이 영화에는 없다. 기습해 온 저 말의 권력에 일직선으로 되받아치며 대항하는 대신, 영화는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 말의 핵심을 흩트리는 기술을 발휘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 말이 미치려 했던 권능에서 결국 갈라져 나와 다른 영역에 닿게 된다. 이것은 < 개의 역사 >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된 화법의 일부 사례에 속한다. 그것을, 중첩-분산-수렴의 화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속적으로 겹쳐 놓는 동시에(중첩) 가르고 흩트리는(분산) 과정을 거쳐 일부가 재차 돌아오거나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것(수렴)을 가능케 하는 것이 <개의 역사>의 화법이다. <개의 역사>는 그렇게 지속적으로 들고 나며 중첩과 분산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수렴해 간다. 말과 시선, 사운드와 이미지, 주체와 대상, 원인과 결과, 위와 아래, 중심과 변두리, 안과 바깥을 바꿔서 옮겨 다니며 기존의 중심성을 붕괴시킨다. 그렇게 배열되어 가는 영화적 흐름의 과감함 혹은 섬세함으로 이 영화의 감동할 만한 정조가 형성된다. < 개의 역사 >의 들고 나는 이 중첩-분산-수렴의 화법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전제하는 시간의 혼재성 때문이기도 하다. <개의 역사>가 시간을 담지 하는 태도는 영화의 초반부에 놓인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압축된다. 영화는 대관령 슈퍼가 철거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뒤이어 카메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거리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중이다. 그 카메라의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대관령 슈퍼가 있던 자리, 백구네 집 등의 바깥 풍경이 언뜻 보인다. 하지만 보이기 시작한 그 풍경은 이제 보이지 않고 구성된다.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찍힌 풍경들이 뒤섞여 편집된다. 백구는 그때 그 자리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 장면은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무작위의 상념 내지는 기억의 이미지인 것처럼 구성된다. 그 상념 내지는 기억의 장면 끝에는, 대관령 슈퍼 자리에 새로 생긴, 말끔하게 차려진 편의점을 보여주는 정면 쇼트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 개의 역사 >는 사건의 발생 순서로 시간을 따지거나 느끼지 않는다. 그건 시간에 관한 일반론일 뿐, 이 영화의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영화가 시간을 재구성하지만 <개의 역사>는 시간의 재구성에 필요한 논리조차도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오히려 시간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오해시킨다. 아니 시간에 대한 현기증을 일으킨다고 표현해야 더 맞을 것인가. 영화는 크게 보면, 후암동에서 홍은동으로라는, 감독의 주거지 이전이라는 평범한 연속성을 전제하고는 있지만, 그 사이에는 실제 벌어진 사건의 순차나 재구성의 논리와 무관한 무언가의 흐름이 자주 출몰하게 된다. 이때 이것들이 따르는 바는 오직 한 가지다. 사건에 대한 감독의 감정적 연상의 순서와 중요도다. 처음부터 그러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등장하는, 가령 이 영화의 중대한 사건들을 제시하는, 다음 네 개의 문장을 유심히 보자. “백구가 죽었다. 백구를 돌봐주던 대관령 슈퍼는 29년 만에 문을 닫았다. 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다”는 문장이 자막으로 제시된다. 감독의 일상생활이 잠시 흐른 뒤, “열세 번째 이사를 했다”는 감독 자신의 근황도 자막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네 개의 자막 사용법은 굉장히 의아하다. 왜 그런 것일까. 이 자막은 먼저 이런 사건의 순서로 이해될 것이다. 백구가 죽고 난 뒤, 대관령 슈퍼도 문을 닫고, 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으며, 그 음 감독은 열세 번째 이사를 한 것이라고.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자막들은 실제 사건의 발생순서와 완전히 무관한 질서로 구성된다(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자막이 기술된 순서). 사건 발생 순서로 보면, “열세 번째 이사를 했다”(4)가 첫 번째인 것 같다. 맥락상 이때의 이사가 감독이 후암동으로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때 백구와 대관령 슈퍼는 이미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백구를 돌봐주던 대관령 슈퍼는 29년 만에 문을 닫았다”(2)와“백구가 살던 창고 옆 계단에 엘리베이터가 세워졌다(3)중 어느 것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인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3). 하지만 적어도 이 두 사건은 백구의 죽음 이전에 존재했다. 슈퍼가 문 닫은 뒤에도 백구는 그 자리에 살고 있었으며, 영화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백구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백구는 얼마 뒤에 죽는다. 그러니“백구가 죽었다”(1)가 마지막이다. 아직 이 부분에 대한 논평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상상컨대 누군가는 단순한 실수라고 지적할 것이다. 혹은 누군가는 더 강도 높은 차원에서, 사건들을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문장구조로 기술하려다 생긴 왜곡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실수이건 지나친 왜곡이건 이것을 사실적 시간의 질서에 연연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으려는 이 영화의 첫 번째 증상이자 중대한 대목으로 받아들인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연상적 배열의 핵은, 무엇보다 백구, 백구의 죽음이다. 이 영화는 거의 아무도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 백구의 삶과 죽음에 관한 언급을 절대적으로 중요한 첫머리에 위치시킨 뒤 그 밖의 사건과 시간을 연상적으로 재배열 해 나간다. 그리고 그 재배열을 주관하는 것은 치밀한 논리가 아니라 어떤 직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많은 이미지들은 일차적으로 가공하며 시작한 그 자막의 주요 네 가지 사건들을, 다시 본격적으로 중첩, 분산, 수렴해나가며 만드는, 혼재된 시간화이자 연상화의 결과물일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정작 백구의 죽음과 매장의 장면은 간결하게 다섯 개의 쇼트로 처리한다. 반면에 백구의 빈집을 보여주며 생전에 백구의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는 장면은 세심하게 기술한다. 영화는 죽은 백구의 생전의 삶을 그 자리에서 회고하며 일종의 주술을 읊는다. 그러자 그즈음 새로운 백구가 출현한다. 대관령 슈퍼의 백구는 죽었지만 아직 이름 없는 또 다른 흰 개가 전철역 인근을 배회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렇다면 그 개도 백구일 것이다. “촬영을 시작하자 백구가 돌아왔다. 백구는 사라지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감독 자신을 포함하여, 백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어디에나 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지켜온 거짓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감독은 백구가 살던 그 계단 앞을 보여주며 영화의 후반부에 말했는데, 관객인 나는 < 개의 역사 >의 무엇이 나를 매혹한 것인가 영화가 끝난 뒤 잠시 생각했다. 주변의 낡은 것들, 힘없는 것들, 오래된 것들, 무명한 것들, 죽음에 가까운 것들을 둘러보는, 중첩-분산-수렴에 관하여, 시간의 혼재성에 관하여, 연상의 힘에 관하여 말했다. 이것들이 바로 <개의 역사>가 삶을 사랑하는 특별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