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굴
- 감독
- 이창희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박인혜, 강지훈, 박지한, 안창환
1 인간은 영화관에 가는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 2 정상적인 관객은 자신이 욕망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이며, 자신이 이미 인생에서 싫어하는 것을 영화관으로 보러 가지 않은 사람이다. -세르쥬 다네 3 일요일의 충무로는 처음이었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간 것도 처음… 한때 매일같이 충무로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로에 있던 회사에서 퇴근해 7011번 버스를 타고 매일경제본사 앞에서 내려 영한빌딩까지 걸어가 여자친구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던 20대 후반의 몇 년, 그리고 은평구에 있던 집에서 3호선을 타고 6번 출구로 나와 매일경제본사 맞은편에 있던 ‘동화삘딍’ 4층 사무실에서 아저씨들과 머리를 맞대고 한숨과 담배연기를 번갈아 내뱉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30대 후반의 일 년.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그때 충무로는 내게 해질 무렵의 골목, 커피와 생맥주, 닭꼬치, 돼지껍데기, 철판스테이크, 복지리, 통북어, 하루종일 가시지 않는 지독한 담배 냄새, 낡은 당구장, 서지 않는 택시 같은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영화였고(여자친구가 참여한), 그리고 영화였다(내가 연루된).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 처음 가는 충무로 역시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나를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화. 영화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영화가 아니라는 게… 4 영화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장 루이 뢰트라와 수잔 리앙드라 기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코 앞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악마의 소굴, 왕관을 다투는 시장, 배움의 장소—말하자면 감정교육, 많은 사람들의 오락, 일부 사람들의 직업, 어떤 사람들의 열정, 여기저기서 채취해 온 1-2시간의 소재, 별 아래서 보내는 온종일, 대낮 같은 밤, 어두운 밤으로 빨려드는 불빛, 친구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토론, 계속되는 이야기들, 역사의 단편, 움직임-지속의 덩어리, ‘현실’과의 아주 특별한 관계 설정(현실을 회피하시오, 그러면 현실이 당신을 따라가고, 현실을 따라가시오, 그러면 현실은 당신에게서 도망간다!), 위험할 정도로 서로가 닮아 있는 영화 속의 얼굴과 신체들, 진부하거나 기상천외한 대상들과 풍경들, 마치 우리가 항상 살았던 듯한 느낌을 갖는 상상 속의 저택과 또 다른 화려한 저택들, 일시적인 경험, 은밀하고 격렬한 열정이나 몸짓들, 나를 끌어들이고 빨려 들게 하는 방식, 또는 단숨에 혹은 한순간에 불확실하거나 형성중인 사고나 상상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 사회, 사람들이 말한 것, 타인과 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꿋꿋한 시선… 5 나는 이 목록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브루스 윌리스와 니콜라스 케이지. 내게 영화는 브루스 윌리스다. 동시에 내게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기도 하다.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블록버스터와 컬트무비와 허섭쓰레기를 오가는 그들의 긴-긴 필모그래피에서 함께 출연한 영화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그나마 브루스 윌리스가 출연한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 플래닛 테러 >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를 ‘동시상영’으로 묶은 <그라인드 하우스> 중간에 삽입된 4편의 가짜 영화 예고편 중에서 롭 좀비가 연출한 <나치의 늑대여인Werewolf Women of the S.S.>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경우가 가장 근접함). 따라서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으로 은퇴를 선언한 2022년 3월 31일은 영화가 죽은 날(the day the movie died)이다. 적어도 반쯤은 그렇다… 6 충무로를 다시 찾은 건 『마테리알』이 주최한 릴레이 발표대회 [오픈 스페이스: 영화를 가르는 패스]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4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모두 여섯 명의 발표자가 발표를 한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 독립 영화 사운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 최지영(사운드 디자이너) 언제나 밝은 방에서 여러개의 창을 틀어놓고 /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정당화하는 관점: 임흥순에 대한 불만 / 윤아랑(비평가) 일요일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 / 함연선(마테리알 편집인) 문화로서 영화: 누가 도대체 진지한 표정으로 영화 이야기를 들을까? 당신도 / 강덕구(작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운영자) 해적질과 영화 문화 / 한민수 모두 매력적인 주제들 가운데서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함연선의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 중에서도 한국 영화’였다. 때마침 JD와 나는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같은 이름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관객수로 줄을 세우지도 않으면서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영화들이 없었던 것처럼 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영화를 우리가 ‘발굴’한 것처럼 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행사 안내 페이지를 캡쳐해서 JD에게 보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수학 학원 선생님의 질문에 "화산고"라고 대답한 학생은 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차라리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했다면 괜찮았을까...?' 수치의 순간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한 사춘기 청소년은, 결국 유사-스노브로 성장하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영화 경험의 근원에는 "비천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원고를 위해 저는 여기에 가야겠어요, 그리고 어쩌면 임창정에 대해 쓸지도 모르겠네요, 쓰고 싶지 않지만요. 쏘옥, 소리와 함께 아이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답장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메시지를 작성 중이라는 말풍선조차 뜨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오픈 스페이스 날짜가 원고 마감일 이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원고 마감일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말은… 7 왜 모든 영화 관련 이벤트(GV, 강연, 세미나, 기타 등등)는 내가 가기 힘든 시간만 골라서 열리는지 모르겠다. 씨네필들은 가정이 없나? 아니면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살아가거나… 다네는 말한다. “영화 팬은? 헛되이 두 눈을 크게 껌뻑거리는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며, 프로다운 ‘영화 팬(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들이다.” 뢰트라와 기그는 여기에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을 지으면서 최대한 아주 늦게 도착하는 것이 틀림없이 사람들이 영화 팬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나는 영화-어쩌고가 아니며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영화 팬의 핵심을 수행하긴 했는데, 짧게 이야기하면 이렇다. 내가 차를 몰고 갔다는 사실은 앞서 말했다. 오픈 스페이스를 마치고 처갓집으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철거된 동화빌딩과 매일경제본사 사이에 있는 노상공영주차장(주말과 공휴일에는 무료개방)에 주차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저렴한 금액으로) 주차할 곳을 찾아 빙글빙글 돌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결국 (구)극동빌딩 (현)남산스퀘어빌딩에 차를 세우고 오픈 스페이스가 열리는 대한극장 뒷골목의 서울지역영화교육허브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도 더 늦은 시간이었다. 문앞에 선 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르면 첫 번째 발표에는 2시간이 배정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축제가 아직도 진행중이라고 믿는 표정 을 지으면서 발표회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발표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맨 앞자리까지 빽빽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으며… 8 한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표가 끝나버렸다. 스탠리 카벨은 누구나 자신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이 이 시간과 장소라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 자신의 역사가 펼쳐져서 이 방에, 이 길에,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을 잠깐이나마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썼는데, 그때 내가 그랬다. 질의응답이 시작되었지만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문윤기를 보았고—나와 그는 JD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실은 나와 ‘트친’인 영화평론가이고, 그밖에도 이 좁은 장소에 내가 타임라인에서 보아 왔던 사람들이 득시글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기이함the uncanny은 영화에서는 보통의 경험이다, 라고 스탠리 카벨은 계속해서 쓴다. 도주, 구출, 우연의 만남이나 근처에 있는 탓에 인생이 변모해버리는 것—이러한 우연과 만남은 영화의 모든 장르를 지탱해주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연한 만남은 우연한 만남일 뿐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건 또 아닌데, 모든 만남은 크건 작건 우리 안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위대한’ 영화가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백 편의 ‘비천한 영화’는 우리의 인생을 바꾼다, 제법 높은 확률로… 9 카벨은 음악이나 문학과 달리 영화의 경우에는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화를 모른다면 높은 레벨의 영화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의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다. 카벨 스스로 이미 ‘보통의 영화’와 ‘높은 레벨의 영화’를 구분 짓고 있는 판에 하물며 ‘비천한 영화’는 또 어떻게 말할 것인가? 질의응답 시간에 이어진 것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몰려 있는 비천한 영화들, 혹자는 OCN 영화들이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영화 경험의 근원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굳이 복원시킬—비평적 공론장으로 끌어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왔고, 현재의 영화 담론이 특수한 세대적 경험을 보편으로 인준하는 시스템 속에서 작동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영화들을 비평의 언어로 끌어들여 담론장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00년생이어서, 02년생이어서, 90년대 후반생이어서 오늘 언급된 < 달마야 놀자 >, < 신라의 달밤 >, < 두사부일체 >, < 조폭 마누라 > 같은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여기서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 나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10 항상 12살 짜리가 있는 법이고 그들에게 맞는 책이 역시 있는 법이다. 스탠리 카벨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이 아닌 다음에야, 예전 그대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어지는 카벨의 목록: 찰스 로튼과 클라크 게이블의 <전함 바운티>, <십자군>, <유니온 퍼시픽>, <새벽의 성찰>, < 캡틴 블러드 >, <알제리>, <찰리 챈>, <폭풍의 언덕>, < 스텔라 달라스 >, <킹스 로우>, <교수와 미녀>, 로날드 콜만의 < 젠다성의 포로 >, < 마음의 행로 >, < 잃어버린 지평선 >, <후아레즈>, <데드 엔드>, <모히칸족의 최후>, <부러진 화살>, <장군, 새벽에 죽다>, <밀드레드 피어스>, <오페라의 유령>, <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 >, <비에 노래하며>, < 캣 피플 >, <환상의 여인>, <도시의 절규>, <안녕, 내 사랑>, <화이트 히트> 등 그밖에 백 여편의 다른 영화들. 카벨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 영화들과 보낸 시간은 정말 전율의 시간이나 나날이었다. 중대한 순간이었지만 아주 일순간이었다. 기억과 회상에서만 포착 가능한 시간으로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이다. 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카벨은 지금 정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식이나 교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영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 동감 >, < 번지 점프를 하다 >, < 친구 >, < 엽기적인 그녀 >, < 킬러들의 수다 >, < 공공의 적 >, < 결혼은, 미친짓이다 >, < 후 아 유 >, < 라이터를 켜라 >, < 연애소설 >, < 광복절 특사 >, < 품행제로 >, < 클래식 >, < 동갑내기 과외하기 >, < 선생 김봉두 >, < 와일드 카드 >, < 싱글즈 >, < 오! 브라더스 >, < 황산벌 >, < 그녀를 믿지 마세요 >, < 어린신부 >, < 효자동 이발사 >, < 늑대의 유혹 >, < 바람의 파이터 >, < 시실리 2km >, < 알포인트 >, < 슈퍼스타 감사용 >, < 귀신이 산다 >, < 말아톤 >, < 잠복근무 >, < 혈의 누 >, < 사랑니 >, < 광식이 동생 광태 >, < 태풍 >, < 작업의 정석 >, < 싸움의 기술 >, < 흡혈형사 나도열 >, < 음란서생 >, < 달콤, 살벌한 연인 >, < 사생결단 >, < 구타유발자들 >, < 천하장사 마돈나 >, < 미녀는 괴로워 >, < 1번가의 기적 >, < 좋지 아니한가 >, < 이장과 군수 >, < 즐거운 인생 >, < 스카우트 > 기타 등등… 이것은 내가 왓챠피디아에 평가한 1499편의 영화 중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를 구작순으로 필터링한 것 중에서 봉, 홍, 박, 이 등의 작품과 여기에 제목을 쓴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작품을 빼고 나열해본 것이다. 모든 영화가 내게 전율을 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두 장면이라도 재미를 느낀 부분이 있었다고 말해야겠다. 나 역시 빙크스 볼링처럼 “못 만든 영화라도 일단 빠져들면 무척 행복”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11 다시. 문제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말하느냐다. 카벨은 모든 시대의 12살에게 맞는 공통의 책들이 있는 반면, 서로 다른 시대의 12살에게는 그때그때의 영화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걸작 리스트는 공유가 가능하지만 어쩌면 평범하거나 비천한 영화들의 리스트는 공유 불가능한 게 아닐까(“지금 당신이 이 영화들을 처음 본다면 재미있게 볼 뿐 아니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 당시 내가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진에 대한 바르트의 구분처럼, 걸작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스투디움의 영역이지만 비천한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달린 푼크툼 같은 게 아닐까? 여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걸작을 나열하지도, 천만 영화 목록을 훑지도 않으면서. 다시 한 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한국 사람… 12 우리가 하려는 게 비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겠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내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카메라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다. 오픈 스페이스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 현장을 찍는 편이 나았을 거라는 말이다. 에세이 필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영화 그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스 케이지가. 최근 케이지는 < 참을 수 없는 무게의 미친 능력 >에서 한때 잘나가던 슈퍼스타였지만 이제는 빚더미에 올라 아무 영화나 막 찍는 ‘닉 케이지’를 연기했다. 그가 자신의 광팬이자 억만장자 마약왕인 페드로 파스칼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예기치 못한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라는데 내가 본 건 트위터에 돌아다니는 짧은, 그러나 영감으로 넘치는 클립이다. 으리으리한 페드로 파스칼의 집. 파스칼이 소파에 앉아 있는 케이지에게 와인을 따라준다. 케이지 고마워. (사이) 말 좀 그만 돌리고 대답해봐. 세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가 대체 뭐야?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파스칼, 결심한듯 내뱉는다. 파스칼 패딩턴 2 . 비명을 지르며 잔을 내려놓는 케이지. 케이지 뭐?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랑 <패딩턴 2>?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은, 잘난 척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파스칼 영화 보는 내내 울었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고. 케이지 야, X까! 장면 바뀌면, 화면을 바라보며 코를 훌쩍이는 케이지의 모습. 나는 JD에게 링크를 보내고, 기다린다.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다음 책들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 [영화를 생각하다](장 루이 뢰트라.수잔 리앙드라 기그, 김영모 옮김, 동문선, 2005) [눈에 비치는 세계](스탠리 카벨, 이두희.박진희 옮김, 이모션북스, 2014)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화면이 켜지면 그늘에 몸을 기대고 지루해 보이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린 아이 둘이 등장한다. 이내 한 아이가 달려오며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고, 아이들이 개구지게 웃어 보이며 영화는 생기를 얻는다. 달려오는 아이는 등을 보이며 뛰어온다. 영화는 이렇듯 ‘등’으로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등으로 시작한 영화를 열어보면, 관객은 이내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등’에 위치하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꿈과 환상의 세계인 디즈니랜드 인근의 빈곤한 모텔촌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디즈니랜드의 어두운 ‘등’에 위치한 사람들의 등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한 아이의 등은 관객을 그들의 세계로 초대하는 초대장과 다름이 없다. 관객은 아이의 등을 따라서 영화 속으로 입장하게 된다. 영화에는 수많은 등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등장인물들의 등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등을 수차례 조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인물들의 등을 따라 이동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한다. 이러한 화면은 인물들의 앞면, 즉 얼굴을 관객의 시야에서 차단함으로써 표정을 읽지 못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까지 차단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표정과 감정을 관객의 상상으로 채워 넣게 함으로써 인물들의 정서에 관객 자신의 정서가 섞이게 한다. 이 덕분에 관객은 보다 뚜렷하고 선명한 감정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인물의 등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종류에 따라 인물들의 등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먼저 어른의 등이다. 어른의 등은 정적인 등이라 할 수 있다. 모텔 매니저인 보비나 무니의 엄마인 핼리를 통해서 등장하는 어른의 등은 체념과 포기 같은 씁쓸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가 지고 일과가 마무리 된 저녁에 홀로 담배를 피우는 보비의 등이라던가, 몸을 팔기로 결정한 직후 담배를 피우는 핼리의 등에는 닥친 상황에 굴복한 이들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 모텔의 주민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있는 보비는 상사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핼리는 사회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폭력의 온전한 피해자이다. 이 때문에 보비는 보기 흉한 것들을 모텔 뒤편으로 치우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고, 핼리와 무니가 방을 빼게 한 뒤 사장의 등 뒤에서 몰래 꾸며진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래서 핼리는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싸 온 와플을 집어 던질 수밖에 없으며, 향수를 놓고 올 수밖에 없었고, 발을 구르고 응시하는 소심한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모두 각자에게 필연적일 정도로 느껴지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들에 갇혀 있다. 그 때 이들은 등을 보인다. 이 때의 등은 이들이 마주한 현실에서 잠시 뒤돌아서서 숨을 고르는 등이다. 그 때문에 어른의 등은 대체로 움직임이 없고,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이는 어른의 등은 현실을 마주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잠시 등을 지고 서있는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등은 이와는 사뭇 다른 정서를 품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리 현실을 등 지지 않을 뿐더러, 아이라는 이유로 현실과 격리되어 있지도 않다. 아이들은 오히려 놓인 현실을 마주본다. 현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것에 나름의 천진한 해석을 덧붙인다. 그래서 어른들의 우는 얼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이들에게 마약 소굴은 수 백 년 전에 지어진 집이자 댄스룸이고, 소 떼들이 모인 평지는 사파리이며, 다시 집에 찾아 온 성구매자 남성은 화장실이 급해서 돌아온 것이다. 영화는 이렇듯 일면 천진한 아이의 시점을 꾸준히 유지한다. 카메라를 내려 아이의 눈높이로 시선을 맞추고, 달려가는 아이들의 등을 마치 일행이 된 것처럼 따라간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대부분 그들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점은 아이들이 보지만 해석하지 못하는 것들을 증폭시킨다. 아이들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핼리나 선정적인 노래나 춤을 따라하고, 호객 행위를 하는 무니를 보면서 관객은 아이들은 알지 못하지만 그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폭력의 형태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의 등 뒤에서 그들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고 있기 때문에 관객마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른들 사이에 놓인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고, 시끄러운 노래를 들으며 목욕하는 무니는 엄마가 자신을 더 이상 씻겨주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관객 역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짐작만 할 뿐이며, 무니의 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관객의 시선이자 아이의 시점인 카메라는 아이들이라는 얇은 가림막에 막혀 한 장면의 다른 앵글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그 각도가 잠깐 수정되면서 관객이 그 가림막 너머를 볼 기회가 생긴다. 무니가 욕조에서 위치만 옮겼을 뿐인데, 무니를 보호해주던 커튼은 사라지고 한 남성을 마주하게 된다. 당황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성급히 커튼을 다시 쳐보지만, 가림막 바깥의 현실을 이미 마주한 상태이다. 그래서 무니는 나름의 해석을 붙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들의 등은 역동적인 등이다. 마주한 현실을 천진한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들은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한 방향으로 달릴 수 있다. 무지개를 보면서 그 밑에 묻힌 황금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요정을 쓰러트리려 달려 나간다. 어른들이 빈대가 드글거리고 내부는 어두컴컴하기만 한 모텔을 예쁜 색으로 페인트칠 하는 동안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계단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운다. 이들은 등 뒤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가리려 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찾고, 그것을 향해 달린다. 마지막 시퀀스에 핼리와 무니의 얼굴을 확대해서 보여준 두 장면은 이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등으로 보여지던 인물들은 마침내 돌아서 카메라를 마주하고 감정을 표출한다. 핼리는 여태껏 했던 욕설 중 가장 크고 진심이 담겨있을 욕을 하고, 무니는 울음을 터트린다. 소심한 복수를 하면서 등 지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어른은 비로소 앞을 보고 욕을 내뱉고, 한 구석이라도 반짝이던 현실이 잔인하게 날을 세웠을 때 아이는 등을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들의 삶이 가장 강하게 압박을 당하고, ‘어쩔 수 없음’이 가장 극심하게 엄습해올 때 이들은 그제서야 오래 전에 이미 표출했어야 할 무언가를 터트린다. 아이들의 반짝임과 파스텔 톤의 화면에 흐려져 있었던 이들의 현실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야 비로소 저항도 아닌 폭발로써 관객들에게 성큼 다가오는 것이다. 내몰린 상황 속에서 어른은 비로소 앞을 봤다. 하지만 여태껏 앞을 보고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마주한 현실이 두려워 등을 돌리고 쓰러졌다. 그런 무니의 손을 잡아 다시 달린 것은 비슷한 처지인 친구 잰시였다. 잰시 덕분에 방향성을 잃었던 무니의 등은 다시금 움직임을 갖고 디즈니랜드로 향한다. 밴드가 있어도 들어갈 수 없었고 특별한 날에 바깥에서 쳐다만 볼 수 있었던 디즈니랜드, 즉 그들 삶의 앞면을 향해 아이들은 달려나간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질감은 이전까지와 완전히 달라지고, 흔들림은 심해진다. 이전 장면들과 다른 톤과 분절 쇼트 등은 아이들이 정말 디즈니랜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럼에도 단 한가지 명백한 것은 어쨌든 꿈과 희망의 상징인 디즈니랜드의 성을 향해 아이들이 달려나가고 있다는 것이고, 현실에 막혀 쓰러진 무니는 비록 당장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라도 쓰러진 채로라도 자라고 있다는 점이다. 성 앞에 다다른 아이들의 등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관객들에겐 디즈니랜드가 남는다. 거대한 성의 등 뒤에서부터 함께 달려온 아이들이 성 앞에 관객을 내려놓고 다시 달려 사라질 때, 이들의 등을 줄곧 따라온 관객은 어딘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들의 등이 올바른 앞면을 향했으므로, 이들이 결국 우리를 디즈니랜드로 데려다 줬으므로, 아이들도 밝은 디즈니랜드로 달려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이들은 관객보다 앞으로 나아가 성의 정문을 열지도 모른다.
서양화가 청구(靑駒) 이마동(1906-1981)은 1932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1933년 7월부터 동아일보에 출근했다. 미술 분야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다. 그러던 1935년 여름, 이마동은 서울 시내 곳곳을 직접 돌아보고 풍경을 스케치해 '서울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1회부터 4회까지는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바라본 서울을 스케치했다. 옥상을 내려와 그린 다섯 번째 서울풍경은 종로 네거리였는데 "종로의 옛 기억을 환기시키는 현존한 유일의 기념물"이자 "침묵의 종(鐘)으로서 이 서울의 몸부림을 응시" 1 하는 보신각을 스케치했다. 그다음 연재에서는 "점쟁이, 관상쟁이, 천냥만냥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권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고 있는" 2 탑동공원(파고다공원)을, 이어서 7회차에서는 동관 네거리 풍경을 스케치했다. 이 동관 네거리 스케치에는 다음과 같은 경안(耿岸) 서항석의 감상이 덧붙여져 있다.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는 이른바 ‘대경성(大京城)’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그때, 도시 생활자의 머릿속에서 경성은 이미 ‘대경성’이 돼 있는 듯 하다. 서울이 변하여 대경성(大京城)이 되고 대경성이 나눠져 남촌(南村), 북촌(北村)이 된 오늘 북촌의 번화처(繁華處)로는 종로 네거리가 첫째요, 거기 따르려는 것이 동관 네거리다. 십자로에 가로는 전차, 세로는 버스, 제법 교통도 빈번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는 종로 네거리와는 딴 냄새가 있다. 북향하여 바라보면 좌편으로는 명월관을 앞세우고 돈의동 일대의 색주가굴이 유위(有爲)한 청년의 고혈을 기다리고 있고, 우편으로는 단성사가 신장(新粧)을 말쑥이 하고 나앉아 외국영화 봉절관은 나뿐이오, 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저 혼자 바쁘다. 말하자면 여기가 북촌의 환락경(歡樂境)이다. 저기 서있는 망대야. 너는 서울을 화재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이 언저리에서 심연에 빠지는 자들을 또한 감시해 주어야하겠다. 아차, 내가 발 앞을 보고 잔소리하기에 저기 어마어마한 돈화문이 그 옛날을 잊은 듯이 입을 닫힌 채 말없이 서있는 그 심정을 모른 체 했구나. 3 동아일보 사옥에서 시작하여 종로의 보신각과 탑동공원을 지나 동관 네거리까지, 이마동의 북촌 스케치들은 오늘날 독자들의 눈에 그저 고요하고 적막하게 보인다. ‘작은 도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제국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남촌에 비해, 조선인들의 북촌 거리는 소박하다. 근대 건축물이 들어서고, 전봇대가 늘어서고, 전차와 버스가 다니는 풍경 속에 조선왕조의 건축물이 조용히 서 있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이마동의 스케치에 글을 보탠 동아일보 기자들의 감상에는 북촌 거리가 ‘번화한 풍경’으로 공들여 서술되지만, 종로 네거리 다음으로 북촌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동관 네거리가 서항석은 오히려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요릿집과 색주가와 극장으로 시끄럽고 요란한 이 뒷골목의 ‘환락경’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조차 ‘심연(深淵)’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때 서항석의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 대로, 동관 네거리에는 돈화문(창덕궁 정문)이 지키고 서있다. 보신각이 자리 잡은 종로 네거리처럼, 돈화문이 자리한 동관 네거리 역시 민족이라는 정체성 집단과 조선인을 매개하는 ‘기억의 터’임을, 서항석은 대경성 사업으로 한창 소란스러운 와중에 한번쯤 되새겨보았을지 모른다. 이마동이 스케치한 연작의 제목이 환기시키는 것은 그러한 기억의 장소들, ‘경성’과는 다른 ‘서울’의 풍경이었으리라. 다시 말해 이마동의 「서울풍경」은 도시 개발과 근대화가 진행되던 당시의 '경성'을 스케치의 여백 너머에서 읽게끔 두고, 현재 발 딛고 생활하고 있는 '서울'을 기억이 공간화되는 장소로 바꿔놓는다. 신축한 3층 건물에 RCA 발성영화 영사기를 들여놓고 토키라는 시대적 변화에 드디어 발을 맞춰가기 시작한 단성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남촌에 화려한 외관의 명치좌와 약초극장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외국영화 봉절권은 나뿐이오"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더 좋은 설비와 안락한 편의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최신의 명화를 감상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토키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극장'이라는 구획은 이전만큼의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채권자와의 분쟁으로 이미 안팎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단성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외국영화 필름 임대료가 폭등하자 신작 상영도 힘들어졌다. 일본의 배급 체인과 손잡지 못한 채 필름 수급에 난항을 거듭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바쁘다는 서항석의 비아냥은 차라리 그리운 것이 된다. 사진1. 토키 극장으로 개축한 단성사 출처: 『조선과 건축』 1935년 2월호 사진2. 남촌에 신축 개장한 명치좌 출처: 『조선과 건축』 1936년 12월호 조선극장이 화재로 전소(1936)된 이래 북촌 유일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는, 결국 1939년 명치좌 관주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인수된다. 쇼치쿠 체인의 제2봉절관으로서 '대륙극장'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30여 년의 단성사 역사도 시대의 저편으로 기울어 간다. 제 기능을 잃은 보신각과 돈화문을 보며 조선왕조를 떠올리듯, 대륙극장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북촌의 밤을 지키는 단성사도 누군가에게 '기억의 터'가 되었으리라. 1)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5)」《동아일보》 1935년 7월 2일자, 석간 3면 2)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6)」《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자, 석간 3면 3) 이마동 그림·경안 서항석 글,「서울풍경 (7)」《동아일보》 1935년 7월 9일자, 석간 3면 상단 그림 1. 동관 네거리 출처: 이마동, 「서울 풍경」 연작 중에서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백암동인(白岩洞人),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비판』1938년 10월호, 74~76쪽. 지금이나 조금 오래 전이나 사십만 부민 때나 칠십만 부민 때나 경성의 소위 북촌에 극장이라는 것은 늘은 것은 없고 오히려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이면 기생퇴물 같이 얼굴이 시퍼러둥둥한 헌 건물의 우미관과 싸움투성이의 단성사라는 것이 있고, 조선의 흥행극장이나마라도 기업적으로 연극단체를 조직해놓고 통제적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동양극장이 새 깃발을 들고 나온 것뿐이다. 우리들이 무엇이나 지나간 것을 너무 캐고 비판한들 돌아오는 그 문제만큼은 신통할 것 없으니 조선극장, 단성사에 대해서는 현재가 너무 비참하니 윤곽만 잠시 말하고 동양극장에 대하여 아는 데까지 써보기로 하자. 조선극장이 처음 세워지기는 현재 불탄 자욱만 남은 인사정 [필자 주: 仁寺町, 인사동] 인데 내지인 조천(早川)이란 사람이 세워놓고 얼마하다 이태진(李泰鎭)에게 넘어가고 그 후 김찬영에게 그리고 현재 제일극장의 관주인 미나토(ミナト)에게 팔려 넘겼었는데, 물론 그 사이에 현철, 신용희, 김조성 등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추잡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많고 또 어느 때는 양화(洋畫) 제일봉절(第一封切)로 경성에서 내로라 하고 행세한 적도 있었으나 그나마라도 지금 극장이나 있고 무엇을 한다면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문제라도 붙여보겠으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느니만큼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일청년(一靑年)의 성냥불 장난으로 다 타버리고 땅덩어리만 남아 겨울에는 가련하게도 스케이트 장, 그렇지 않으면 시골로 다니는 곡마단 부스러기가 와서 지나가는 행인의 고개를 기웃거리게 할 뿐이요, 우미관이래야 5전 입장료를 받을 때를 최고로 지금은 경성 내에서 제일 더러운 집으로 소위 “겡가도리" [필자 주: 喧嘩どり, 싸움꾼이라는 의미] 의 소굴이던 우미관패의 잔해가 그저 남아있는 것 같고, 제일극장이래야 그 역 우미관류이며, 오직 북촌에서 문제되어 때로는 서로 경영상 혹은 영업상으로 경쟁도 하고 흥행방식을 때때로 꾀하는 것도 결국 동양극장과 단성사뿐이다. 단성사라면 조선사람의 머리에는 아직까지도 머리에 인상이 깊은 것은 고(故) 박승필 씨가 처음 시작해서 중간에 그 분이 돌아가고 박정현 씨가 맡아 하게 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추문, 소문 등이 많았어도 경영체는 늘 박씨의 일파에서 해온 것으로 북촌에서 조선사람의 극장 경영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고, 무성영화 시대의 조선영화는 거의 다 단성사에서 봉절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극장을 신축하고 최신 RCA 영사기를 배치하여 한때는 전 경성(全京城)의 양화 봉절관으로 수위를 점령했던 것도 지금에는 옛 꿈, 갖은 비화(悲話), 애화(哀話)만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단성사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제일의 원인은 물론 가급적 현대적 설비를 해놓은 명치좌, 약초극장 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2류 극장으로 아니 떨어질 수 없었지만, 결국 단성사를 오늘날 비경(悲境)에 빠지게 한 것은 신무대 때문이요, 지엽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든다면 내부의 추잡한 문제를 들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성사를 신축할 때에 그 설계의 빈약함을 지금 또 탓을 아니 할 수 없다. 일지사변 [필자 주:日支事變, 중일전쟁] 이 나기 전까지도 조선극장이 그 뒤터를 더 사서 늘여서 크게 지려다가 옆집에서 땅을 아니 파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터로 4계(階)로 짓는다고 했고 구(舊) 종로서 터에 모(某)가 극장을 짓는다는 둥 또는 공평정 [필자 주:公平町, 공평동] 공설시장 비스듬히 건너편 광장에 내지(內地)의 재벌이 나와 극장을 짓는다는 소문의 소문이 돌아다녔으나 북지(北支)의 총소리 한방으로 그런 말은 꼬리를 없애버리고 오직 현재는 숨넘어가는 어린애와 같은 운명에 있는 단성사와 조선 흥행극계에 무적함대와 같이 돌진해가는 동양극장이 있을 뿐이다. 동양극장이 처음 개관식을 하기는 소화(昭和) 10년 가을인 모양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홍순언 씨가 극장 명의 관계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씨와 형식상으로 손을 잡고 실상의 극장의 경영은 한때 조선문단에 너무나 거탄적 존재이며 신문연재소설의 왕좌격이던 최독견 씨를 지배인으로 맞아들인 홍순언 씨의 두뇌의 명석함을 가히 짐작할 바니, 최독견 씨가 동양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일하여 왔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연극은 기업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조선에서 뚜렷이 보여준 이가 최씨이며 배우들도 연극으로 생활을 안정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넣어준 것도 최씨이니 현재 동극 [필자 주: 東劇, 동양극장의 줄임말] 에서 매월 월급을 먹고 있는 사람이 이백여 명이요, 배우들도 전부 매월 최저 사십오 원에서 최고 백여 원의 월급을 받고들 있다. 동극이 처음 탄생할 때에 큰 공로를 한 분이 현재 동극 문예부에 있는 이운방 씨인데, 그 분의 알선으로 청춘좌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그의 멤버는 대개 토월회의 후신이라고 할 만한 송영, 서월영, 박제행 씨 등이 중요한 멤버이었다. 이 청춘좌는 주로 동양극장에서 경성 손님을 상대로 하려고 조직한 것이니 그 다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야 하겠으므로 동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험으로 조선에서도 손님을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조직해보겠다는 것이 주점(主點)으로 희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해서 수차 흥행을 하여보았으나 아직 조선에서는 일러(그렇다면 오늘의 조선의 연극팬은 눈물을 즐겨하는 모양이다.) 결국 실패하고 동극좌와 희극좌와 합병을 시킨 것이 결국은 금일의 호화선이라는 것인 게, 결국 동양극장의 달러 상(箱)은 청춘좌이다. 그러면 오늘날 연극을 궤도에 잡아 올리고 통제와 기업적 조직 아래에서 연극흥행을 해나가며 배우의 이상과 출세의 길을 열어준 것이 오늘의 동양극장이라면 그것을 운전해온 사람이 즉 최독견 씨이다. 조선의 연극흥행에 있어서 그의 공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년 봄에 들어가 동양극장에서는 이중흥행을 하여 낮에는 영화를 2회 상영하고 야간에만 평상대로 연극을 상연하는데 이것이야 재래의 연극 주야 2회 상연으로 인한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 완전히 구해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극장 경영상이나 연극의 질적 향상이나 사회적 문제로 보더라도 배우들의 보건을 위하여 크게 기뻐할 바다. 그런데 그 극장의 설계가 얼뜬 보기에는 객석을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으나 실은 무대에 돈을 더 들이고 연구를 하여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회전무대라는 것을 만들어왔다. 이렇게 비약과 진전이 있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없을 수 없어, 혹은 청춘좌의 일부 배우가 탈퇴를 하여 중앙무대라는 것을 조직해서 중간극이니 무엇이니 해봤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금년 5월 1일 동양극장은 여러 가지 풍문 속에서 극계의 성공아 최독견 씨의 손에 경영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과거의 동양극장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현재의 동극의 전권을 장악한 최씨의 수완을 크게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나 벌써 들리는 말에는 조선영화 배급계의 오소리티 [authority] 인 이창용 씨와 같이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여 조선영화제작도 한다 하니 불행과 비운만 거듭하던 조선흥행계에서 기린아 최독견 씨의 앞날의 원대한 성공을 빌며 붓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