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는 그쳤나요
- 감독
- 장진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김관우, 박은빈, 공호석, 류승룡, 한승희, 이풍운, 정혜영, 김대령, 민현정, 김수빈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나는 하나의 모순된 세계를 다룬 단편영화들을 떠올렸다. 그 영화들은 한 인물의 양면적인 모습, 한 작품 안에서 기묘하게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사건,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반복 등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구성하는 모순적인 두 개의 상태를 다루었다. 그것들은 흡사 세계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통해서 삶에 대한 앎과 이해, 오해와 착각, 꿈과 몽상 등에 대해서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세계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지면을 활용하여 내가 한동안 매료되었던 그 작품들의 친숙함과 낯섦에 관해 쓰고자 한다. 김태양 감독의 < 달팽이 >는 서울 종로 일대를 배회하는 한 남자가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두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반부의 배경은 어느 화창한 여름날 오후이며, 남자는 을지로 3가 근방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어색한 인사, 공허한 말들, 그리고 엇갈린 기억을 통해 이들이 과거에 연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편의상 전반부에 등장하는 그 여인을 과거의 여자라고 해두자. 후반부는 전반부와 같은 날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시간대는 저녁으로 그리고 날씨는 소나기가 내린 뒤 그친다는 것으로 바뀐다. 남자는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한 여자를 만나 세운상가로 이동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친밀한 말투, 신체적 접촉, 서로 일치하는 기억을 통해서 두 사람이 현재 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의상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 여인을 현재의 여자라고 해두자. 혹자에게 이 영화는 익숙한 장르적 형식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은 저마다의 영화사를 품고 있다는 질 들뢰즈의 말처럼, 도시를 배경으로 제작된 일련의 영화들이 하나의 느슨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탓이리라. 초창기 무성영화 시절의 액츄얼리티 필름, 1920년대 독일의 거리영화, 1950년대 전후 유럽에서 등장한 여러 새로운 물결들에 속하는 영화들, 할리우드의 코미디 영화, 필름 누아르, 로드무비 등이 도시를 시각적인 인상이 형성되고 우연적인 사건과 만남이 발생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그런 점에서, <달팽이>가 서울 종로를 작품의 무대이자 배경으로 끌어들이고, 주요 인물들이 계속해서 도시를 걷고, 주인공 남자가 도시에서 우연한 만남을 갖는다는 것 자체는 모종의 영화적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이 영화에 관습만 있고 독창성이 없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종로를 오후와 저녁, 옛것과 새것, 소멸과 생성 등으로 구분되는 것들 사이의 기묘한 대립, 공존, 연속을 통해 그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 전체가 고유의 리듬과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 이 영화의 구성적인 단조로움은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상쇄된다. 이 영화는 전후반을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놓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로 물리적인 요소들과 관련이 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을지로 3가에서 우연히 만나 청계천로를 따라 종로 3가로 이동하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을지로 3가에서 만나 청계천로를 따라 종로 3가를 거쳐 종로 5가의 세운상가로 이동한다. 전후반을 이끌어가는 남자 주인공의 존재, 영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장소와 건물, 그리고 을지로3가에서 종로3가로 이어지는 동선의 일치 등을 통해 이 영화는 반복의 질서를 획득한다. 그 반복은 관객인 우리가 틀린 그림 찾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 등장하는 과거의 여자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현재의 여자로 대체되고, 화창한 날씨는 소나기가 내리는 날씨로 바뀌고, 관객의 시선을 기준으로 주로 화면 좌측 편에 위치하던 남자는 우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 일련의 변화는 영화 속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적 실재가 지속과 생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것은 이 작품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변해가는 도시를 통해서 작품 전체에 차이와 반복의 질서를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차이와 반복은 공간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시간적이거나 정신적인 것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반복 또한 중요하게 활용한다. 후자의 차이와 반복은 주로 기억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남자와 과거의 여자는 지나간 일들에 관해 담소를 나눈다. 이 대화에서 남자는 오래전 자신이 과거의 여자에게 들려주었던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한 순간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의 여자는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혀 있던 여러 기억을 현재로 가져오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그것들은 남자의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져 있거나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 일련의 대화에서 남자와 과거의 여자가 어긋난 기억 그리고 어긋난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후반부에 등장하는 남자와 현재의 여자는 두 사람 사이에 공통의 기억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던 중 현재의 여자는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그 이야기를 남자가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남자는 현재의 여자에게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자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면서,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자와 현재의 여자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서 같은 시간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전반부의 어긋난 기억과 시간은 후반부의 공유되는 기억과 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가 강조하는 시간성은 달팽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영화 전반부에서 과거의 여자와 함께 길을 걷던 남자는 혼잣말처럼 “변할 게 뭐가 있나, 그냥 시간만 가는 거지”라고 말한다. 남자는 시간의 흐름이 제자리걸음과 같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남자의 생각은 영화가 끝나갈 즈음에 바뀐다. 남자는 현재의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언제나 제자리인 줄 알았던 시간의 흐름이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현재의 여자가 버스 창문에 나선형 형태의 원을 그리는데, 그것은 달팽이의 껍데기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나선형과 닮았다. 그것은 분명 차이와 반복 속에서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장면을 보면서 누군가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주인공 남녀가 삼나무 나이테를 바라보던 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를 따라 직선으로 뻗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을 품으면서 원을 그리듯이 나아가는 것과 같이 묘사된다. <현기증>에서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판이 삼나무였다면, <달팽이>에서 그런 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도시 그 자체이다. 이 지점에서 <달팽이>가 도시를 작품의 무대 혹은 배경으로 끌고 온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 영화의 연출자는 우리가 도시라는 삶의 공간 속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어제와 오늘,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영화적 시간에 대한 성찰로 연장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도시가 그러하듯, 영화는 지속과 생성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내게 다시금 비유와 함께 압축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 영화를 달팽이의 시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영화는 달팽이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예술인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1950년 4월 『문예(文藝)』 제9호에 발표된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는 「소나기」와 더불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작품이자,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소설이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이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독짓는 늙은이」를 영화화할 때에 몇 가지 어려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송영감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십여 쪽에 불과한 소설의 길이에 따른 내용의 부재를 어떤 방식으로 채워나갈 것이며 아내가 떠난 후로부터 시작되어 송영감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상황 묘사에 담긴 송영감의 심정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 등이다. 하지만 < 독짓는 늙은이 >( 최하원 , 1969)는 소설의 중요한 이야기를 중간에 배치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창작해서 액자구성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감독이 새롭게 해석한 부분과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감독의 관점을 강조한다. <독짓는 늙은이>는 양자로 보내졌던 당손( 김희라 )이 성인이 되어 집을 찾아온 장면부터 시작한다. 폐허가 된 집안을 둘러보다 가마를 발견한 당손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거지 떼 틈에 있는 송영감( 황해 )의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인( 허장강 )의 이야기엔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송영감과 옥수( 윤정희 )의 우연한 만남과 결혼, 당손을 낳고 살아가는 단란한 모습과 석현이 옥수를 찾아온 상황을 보태어놓는다. 다시 노인과 당손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가마 구석에 거지 행색의 엄마 옥수와 당손이 만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당손의 애끓는 그리움과 어머니의 죄의식으로 얼룩진 삶을 한 장소로 불러 모음으로써 어떻게 모자간에 묻어둔 감정이 해소되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최하원은 흥미롭게도 원작에는 거의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인 옥수의 기구한 삶(이름도 생겼다)과 죄의식을 관객들에게 상세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망가져버린 자신의 삶을 구제할 유일한 길을 아들 당손에게서 찾도록 한다. 아들의 사모곡과 어머니의 모성애는 뒤늦게라도 해후한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한겨울 길을 걷다 발견한 옥수를 데려와 동상에 걸린 몸을 녹여주고 보살펴주는 장면은 옥수의 젊고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독을 동일한 대상처럼 정성껏 대하는 송영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원작에 없는 이러한 접근은 송영감의 욕망이 발현되는 장면을 묘사하는 방식과 옥수와 석현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을 불과 물의 이미지로 대비시킨다. 카메라는 예순이 다 되도록 혼자 살아왔던 송영감이 옥수의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장면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눈덩이가 녹기 시작하자 옥수의 육체는 물기로 뒤덮이고, 송영감은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운 육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카메라는 옥수의 다리, 상체와 송영감의 얼굴을 번갈이 보여줌으로써 흙을 주무르듯 옥수의 등을 매만지고 곡선을 빚어내듯 옥수의 종아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강조한다. 그리고 노인의 뜸막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인서트로 삽입된다. 견고하고도 아름다운 독을 만들던 송영감의 손길이 아름다운 육신을 향한 염원으로 전이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섬세하고 끈질기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게다가 눈이 녹아 만들어내는 물은 다음 숏의 냇가로 이어진다. 옥수의 고무신 냄새를 맡다가 민망한 내색을 하고, 옥수의 속바지를 펼쳐 보이고 냄새를 맡는 장면은 옥수의 육체에 온기를 불어넣던 그의 손짓보다 강렬한 욕망의 표시이다. 설원 곁을 흘러가는 냇물이나 옥수의 어깨에서 스르륵 녹아내리는 눈은 초록이 우거진 봄날의 냇가로 이어진다. 특히 옥수의 욕망이 냇가에서 발현되는 장면은 소설과 다른 <독짓는 늙은이>만의 고유한 표지가 된다. 옥수가 어린 당손( 김정훈 )이 냇가로 흘려보낸 꽃을 들고 냄새를 맡는 장면은 눈여겨볼만하다. 옥수의 고무신/겨울/눈/송영감과 꽃/봄날/초록의 숲/옥수의 대비는 송영감의 욕망과 옥수가 욕망하는 대상을 대비시킴과 동시에 황혼녘의 송영감과 한창 젊은 나이인 옥수를 연상시킨다. 결정적인 장면은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 송영감이 자신을 가마로 밀어 넣는 악몽을 꾼 옥수의 눈에 비친 송영감의 시뻘건 얼굴이다. 물가에서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확인했던 옥수에게 불가에서 어른거리는 붉은 빛으로 물든 송영감의 얼굴은 욕망을 가로막는 불안이자 평생 불과 더불어 살아온 송영감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날 집을 뛰쳐나간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스틸 노인에게 불은 독을 완성시키는 존재이자 사경을 헤매던 옥수를 살려낸 존재이며 노인의 쇠락과 죽음을 지켜보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의 육신을 삼켜버린 존재이다. 최하원은 옥수 곁에 나무들과 산, 거세게 흐르는 물길을 배치하고 송영감의 곁에는 늘 장작불이나 가마의 불길을 배치시킨다. 아홉 살 때 흙을 만진 이후로 가마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송영감의 삶은 척박한 땅의 기운과 부드럽게 짓이긴 흙으로 대표되기에 그가 가마 앞에 단정히 앉아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몸을 던진 장면은 애처롭지만 한편으론 송영감이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삶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만든다. >> 독짓는 늙은이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햇살에 반짝이는 잔잔한 강물은 무심한 듯 아무 말이 없다. 아이들은 강가 옆 풀밭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맑은소리와 조용히 흐르는 강물 사이로 한가로운 여름날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 뒤로 어린 소녀의 주검이 강물에 흘러 떠내려온다. 그 주검 옆으로 영화의 제목인 < 시 >( 이창동 , 2010)의 필체가 그려진다. 너무나 강렬한 <시>의 첫 장면이다. 소녀의 시체와 <시> 상극인 두 세계의 매치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어서 나오는 병원 씬. 의사는 미자에게 “그거 기분 나쁘네요?”라며 반문한다. 일상의 단어들이 종종 생각이 안 나고, 잘 잊어버린다는 말에 감독은 의사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미자의 세계에 기분 나쁜 일 이 펼쳐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시는 아름답다. 글자에서 주는 어감과 은유적 단어들이 주는 창조적 상징들은 아름다우면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미자의 내면과 그녀가 처한 차가운 현실 세계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과연 두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가? 이분법적으로만 구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김용탁 시인은 문화센터 수강생들에게’본다’ 에 중점을 두며 가르친다. 일상의 모든 것 들에게 마음을 주며 진심으로 대한적이 있냐고, 깊이 들여다 본적이 있냐고, 이제까지 본건 진짜로 본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김용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지나칠 뿐이다. 시를 쓰려면 자세히 봐야 하고 그 봐야 하는 대상은 현실의 세계인 있는 일상의 공간뿐이다. 미자는 쓸쓸한 강물, 떨어지는 살구, 들판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지만 매일 하는 설거지 통에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시 낭송회에 갔다가 순수한 시를 읊는 자리에서 저질스런 농담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처음부터 그녀는 시와 일상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것만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손자가 성폭행의 가해자지만 아무일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행동하고, 소녀의 영정사진 앞에서 그냥 밥을 먹고, 별일 없는 것처럼 친구와 몰려다니며 게임을 하고 똑같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지만 미자는 괴로워한다. 소녀가 자살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다리에 올라가 소녀의 마음을 헤아린다.. 바람결에 모자가 강물에 떠내려가는걸 보고 소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굵은 소나기. 시 노트에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어쩌면 소녀의 눈물이 고스란히 미자에게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현실에서 소녀의 죽음을 자세히 관찰하며, 마음을 쏟고, 깊숙이 들여다봤다. 다른 가해자의 부모나, 슈퍼의 동네 아줌마들이 거들떠 보지 않았던 소녀의 죽음을. 그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진짜로 보는 것, 진짜로 마음을 쏟고,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을 이미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수강생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이 시를 완성한다. 모두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했지만 그 말을 시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 시는 시로써, 일상은 일상으로써 그렇게 그들은 시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경계에 서 있음을 확증하며 그 이면의 다른 것들은 깊숙이 들여다 보지 않았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지만 시를 쓰려는 그 마음을 먹기가 어려운 것처럼. 과연 ‘시’란 어떤 것일까? 단순히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은유들로 가득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일까? 미자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시’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것과 인간의 추악함이 가득한 일상의 곳곳에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혜안의 열쇠일까? 평범한 우리들에게 시가 열리는 그 순간은 올 수 있을까? 미자 역을 맡은 윤정희는 60년대 3대 트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외모에 다양한 연기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다. 이창동 감독의 권유로 15년만에 출연을 결심했다던 그녀는 영화에서는 여타 60대 중반의 할머니와는 다른 톤의 연기를 보여준다. 일단 말투와 어감, 옷 입는 차림새, 생각하는 것, 시를 쓰는 것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대 또래와는 다른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미자’라는 인물은 영화 속에서 독특하게 묘사되며 그 캐릭터에 잘 녹아든다. 이제까지 감독의 전작에 나왔던 배우들과는 다른 질감이다. 영화 속 에서의 모습과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독특함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연기를 2시간 내내 보여줬다. 그 특유의 말투에 이질감이나 이상한 부분은 느낄 수 없었다. 영화 속 캐릭터의 특이성이 잘 발현된 배우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 부분이 미자와 잘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밀양에서 신애(전도연)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이야기 했다. 그녀는 그 힘듦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 했지만 가식적인 교회 사람들과. 자신이 불행할거라 단정지으며 불쌍히 보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교회를 등진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행동으로 모든걸 끝내려 한다. <시>에서는 밀양과는 반대로 가해자 입장에서의 용서를 말한다. 그 용서와 속죄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시’가 있다. 두 영화 다 ‘용서’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조금 다르다. 밀양은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모습 옆으로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은은하게 내리쬐는 그 햇볕의 의미는 뭘까? 그래도 세상은 한줄기 희망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다는 뜻일까? 아무런 설명 없이 빛으로 끝나는 이 장면은 깊은 여운을 준다. 그나마 이 빛이 조금이라도 세상 여러 곳곳에 비춰졌으면 하는 희망으로 보인다. <시>는 흐르는 강물위로 미자가 썼던 ‘시’만 나오고. 그녀는 자취를 감춘다. 긴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은 그녀의 자살을 의미하지만 영화 속에선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밀양의 희망과 달리 시는 속죄의 의미로 죽음을 택했다.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는지..감독의 선택에서 냉혹하리만치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시와 현실이 동일시 된다면 시의 완성으로 그녀는 존재해도 되지 않을까? 육체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져야 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학교의 교실, 운동장, 과학실, 배드민턴을 쳤던 빌라 앞 마당, 마을버스의 정류장, 피해자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어귀, 소녀가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물 위 다리, 그리고 희진의 미소 띈 얼굴이 보인다. 급격한 파도와 풍랑을 겪은 후 다시 일상의 모습들을 카메라는 천천히 훑는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동네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거나 담소를 나눈다, 강물은 첫 장면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흐른다. 모든 게 그대로인 일상. 이 평온한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흘려 보낸 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미자가 손자를 스스로 경찰에 넘김으로써 영화적 소명을 다 했다. 만약 현실이라면 부모들은 사고를 친 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어떻게든 보호하려 위해 애쓸 것이다. 절대로 먼저 본인들 손으로 경찰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코. 현실에서는 부모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영화 속에서 실현 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실현시키며 관객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를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룬 영화들을 본다고 해서 윤리적인 면죄부를 부여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영화들을 보며 과연 내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내 마음가짐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 시와 현실의 세계. 나아가서 영화와 현실의 세계에 대한 간극은 좁혀지고 더 많은 공감과 이해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지 모르겠다. 그건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