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 수련 기간
- 감독
- 마가렛 벳츠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마가렛 퀄리, 멜리사 레오, 줄라인 니콜슨, 다이아나 애그론, 모건 세일러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고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첫 영화 개봉 이후 올해로 데뷔 41년을 맞은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놓으며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감독의 영화적 유니버스는 더욱 거대하고 견고해졌으며 이제는 많은 일반 관객을 그의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악동 기질이 드러나는 초창기 키치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과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또한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은 내러티브나 표현방식이 순화되고 세련되어졌다. 감독의 연륜과 함께 그의 영화도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일관된 관심이 여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영화에서 남성을 부재하거나 있어도 무능한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한다. < 내가 뭘 잘못했길래 >, < 하이힐 >, < 귀향 >의 남편들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아 아내와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에서 유일한 여주인공의 희망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과 친구는 성전환을 해서 가슴을 달고 나타난다. 심지어 수녀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반면 여성은 외연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성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해낸다. 오늘날 독립적 여성 캐릭터는 이미 정체성을 완고히 하고 있지만 80년대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설정은 파격적이었다.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떠난 남자의 목숨을 구한 뒤 당당히 이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짜릿함 마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여성이 자식과 어머니에게 갖는 애정을 최상위의 감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 < 하이힐 >, < 귀향 >, < 줄리에타 >는 십여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녀의 관계를 기반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사랑과 그것의 결핍으로 인한 그리움, 비뚤어진 질투까지, 모녀가 느낄 수 있는 회환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마약 중독자가 한번 약에 다시 손을 대면 몇 년을 끊고 살았더라도 다시 빠져들고 말지. 오랫동안 네 생각을 참으며 지냈지만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그 바보 같은 희망이 힘들게 쌓은 새 인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네가 없다는 공허함이 내 삶을 파괴하고 있어.” <줄리에타> 줄리에타의 일기 중. “난 평생 엄마를 따라하며 살았어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모든 면에서 엄마랑 경쟁하려 했다고요.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이겼었죠. 마누엘! 난 그와 결혼했죠. 엄마가 할 줄 알았는데! (…) 어렸을 때 난 귀찮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늘 엄마를 돕고 싶었다고요. 엄마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이힐> 레베카 대사 중.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눌려있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남편에 대한 결핍은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아픔일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여성들은 이 아픔을 다시금 여성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동질감, 모성애로 응축된 그들의 의리는 남성들이 외치는 의리보다 더욱 소리 없이 끈끈하고 질기다. 여성들이 소파에서 모여 수다를 하는 장면들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알모도바르는 미장센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80년대의 작품을 근래에 다시 보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주인공들의 의상과 세트, 그리고 갤러리에 와있는 듯한 회화의 향연은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를 거부라도 하는 듯 시각적으로 환기를 준다. 게다가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퀴즈,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색깔은? 눈치챘겠지만 정답은 빨강이다. <하이힐>의 저명한 아나운서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 扮)가 타는 차, <귀향>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의 어머니가 트렁크에 숨어있던 차, < 브로큰 임브레이스 >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죽음을 맞이하는 차, <줄리에타>의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 扮)가 떠난 딸을 찾으러 갈 때 타는 차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기종은 달라지지만 여주인공의 승용차가 빨간색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종종 버드 아이즈 뷰로 도로를 지나는 여주인공의 자동차의 모습을 담는다. 특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을 종과 횡으로 지나는 빨간 자동차 장면은 보색의 대비로 더욱 잔상이 각인된다. 빨간 자동차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시대와 장르를 그야말로 종과 횡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닐까? 빨간 자동차와 함께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영화를 연결하는 유니버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반복적으로 다시 출연시키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배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배역을 더욱 진짜처럼 믿게 하고 싶어서 혹은 뉴 페이스를 통해 새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일루전의 고조나 분위기의 전환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욱 강조하는 편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연부터 단역에 이르기까지 전작에서 봐온 익숙한 배우가 늘 다시 등장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세실리아 로스,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마리사 파레데스는 대표적인 감독의 페르소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 라이브 플레쉬 >에서 버스에서 아기를 낳는 창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연약하고 순수한 수녀, <귀향>에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매력적인 여배우를 연기했다. 변화무쌍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모두가 손꼽는 대표적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초기작 < 나쁜 버릇 >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고(故) 커스 람프리브는 엄마, 할머니, 이웃 등 단역으로 출연하며 웃음을 주는 씬스틸러이기도 했다. 마블의 팬들은 마블 유니버스가 총 망라되어있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에서 히어로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의 환호성을 질러봤을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팬들 역시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분하는 친근한 배우를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배우를 통해 감독의 전 작품들을 상기하다보면 어느새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컨벤션 외에도, 감독은 독특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전작들을 연결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와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 扮)가 찍은 코미디 <여인과 가방>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 <여인과 가방>의 편집본을 다시 보는 장면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알모도바르의 그로부터 20년 전의 개봉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릎을 탁 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종국에 친구가 된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扮)와 위마 로조(마리사 파레데스 扮)는 3년 뒤 < 그녀에게 >에서 야외공연 관람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관객에게 그녀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들 방에 걸려있던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는 <그녀에게>의 베니그노(하비에 카마라 扮)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영화는 연결된다. <욕망의 법칙>에서는 영화 감독인 파블로(유세비오 폰셀라 扮)를 통해 장 콕도의 희곡 <휴먼 보이스>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대리하게 하지만 13년 뒤 < 휴먼 보이스 >를 내놓으며 애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처럼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물, 오브제, 그리고 소재 등을 자신의 작품에 재투영하며 전작과 연결고리를 채운다. 악동과 성자, 고집불통과 재기발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알모도바르의 유니버스는 다음편에서도 계속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1편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2편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3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가 연재된다. 나가며... “돌아온 과거와의 우연한 만남이 두려웠지. 내 삶이 흔들릴까봐. 추억으로 가득한 그 밤이 두려웠지. 내 꿈이 뒤 엉킬까봐. 하지만 도망치던 나그네는 곧 발길을 멈추리라. 모든 걸 앗아간 망각이 내 오랜 망상들을 죽였다 해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귀향. 주름진 이마 세월의 눈이 쌓인 백발이 되어 귀향을 하네. 인생은 한 순간. 뜨거운 눈빛은 널 찾아 그림자 속을 헤메고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달콤한 추억에 의지해 내 영혼은 힘을 얻네 ” <귀향> 라이문다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귀향》의 가사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오스트리아의 외딴 마을, 거기서도 다른 이웃들과 뚝 떨어져 홀로 서 있는 고급 주택. 아홉 살짜리 쌍둥이 형제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성형수술을 받으러 떠난 엄마를 기다리며 집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빈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학교도 다니지 않고 타인과의 일체의 교류 없이 오로지 둘만의 세계에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왔다. 반갑게 이층으로 뛰어오르며 엄마를 부르던 소년들은 우뚝 멈춰 선다.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은 채 돌아온 엄마는 아주 낯설다. 손님도 받지 말고 외출도 하지 말고 집안에서는 절대 정숙하라며 온갖 새로운 규칙들을 열거하는 엄마는, 병원에서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주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이 사람은 싸늘하고 신경질적이며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 같다. 엘리아스와 루카스는 조금씩, 이 사람이 엄마인 척하는 타인일 것이라는 의심을 시작한다. 베로니카 프란츠와 스베린 피알라가 공동으로 연출한 2014년 영화 <굿나잇 마미>의 첫 장면은 볼프강 리벤라이너의 1956년 작 <트랩 가족(Die Trapp-Familie)>의 클립이다. 1965년 할리우드에서 다시 만들어진 <사운드 오브 뮤직>의 원안이 되는 이 영화에서, 오스트리아 민속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과 일곱 명의 아이들이 브람스의 <자장가>를 합창하고 있다. 일곱 아이들의 새엄마가 된 견습 수녀 출신 마리아와 아이들 간의 따스한 교감과 호흡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엄마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프란츠와 피알라는 왜 하필 이 영화의 이 장면을 선택했을까? 연구자 리에스 란크만이 지적한 대로, <트랩 가족>이 배경으로 하는 시간대는 의미심장하다. 마리아가 이 가족에 합류한 것은 1927년이었고, 폰트랩 가족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무렵 미국으로 떠났다. 그 시기 오스트리아 여성들은 네 명 이상의 아이를 낳은 순수한 혈통의 어머니들에게 부여되는 ‘다산모 십자훈장’을 받는 ‘영광’을 얻도록 노력해야 했다. 본인도 소녀티를 갓 벗었으면서 기꺼이 외로운 일곱 아이의 새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마리아는 사실 ‘다산모 십자훈장’의 명예 회원으로 추대받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1) 그러므로 <트랩 가족> 속 (그리고 현실 속) 마리아 폰트랩이 <굿나잇 마미>의 오프닝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영화 속 모성성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위한 카운터파트로서다. 가족이 갑자기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오는 이야기의 다수는, 요정이 요람 속 인간 아기를 훔쳐가고 대신 요정 아기를 남겨두는 ‘체인즐링’ 설화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굿나잇 마미>에서는 그 설정이 역으로 제시된다. 무엇 때문인지 불분명한 이유로 성형수술을 받은 엄마가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달라진 외양이 달라진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붕대를 감은 엄마는 예전 엄마처럼 다정하고 따뜻하지 않다. 동생 루카스에게 식사도 차려주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이며 형 엘리아스에게는 손찌검까지 가한다. 가족 앨범에서 아빠의 사진이 사라진 것처럼(‘우리의 결혼식’이라고 태그가 달린 페이지는 텅 비었다), 별거 이후 아빠의 존재가 ‘우리 가족’으로부터 빠르게 삭제당하고 부정당한 것처럼, 엄마도 혹시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건 아닐까? 어떤 ‘신체강탈자’가 엄마의 영혼을 바꿔치기한 건 아닐까? 아이들은 가족 앨범에서 발견한 낯선 여자의 사진을 주목한다. 엄마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 여자는 누굴까? 혹시 엄마에게 숨겨진 쌍둥이 형제가 있었던가? 엄마라면, 자신의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모를 리 없다. 엄마라면,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엄마라면, 냉동 피자로 냉장고를 가득 채우면 안 된다. 엄마라면, 아이의 눈물 어린 호소에 24시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트랩 가족>(더 쉽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처럼, 상처받은 아이들의 행위 이면에 발화되지 않은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마음으로 앞질러 선험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과 화음을 맞춰 함께 노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 낯선 여자는 너무나 자주 신경질을 부리거나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아이들을 돌보는 대신 화상캠으로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방송 진행자로서의 커리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수술 전의 엄마(혹은 수술 전에 그랬다고 아이들이 믿는 엄마)를 돌려놓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마을과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 있고 내부에 각종 모퉁이와 모서리가 많은 이 집은 그 자체로 미로처럼 작동한다. 마치 엄마처럼, 이 집도 불현듯 아이들에게 불친절하고 적대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에게 가족 혹은 집은 모두 공포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아이들은 집안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없고 지저분하게 물건을 늘어놓을 수 없으며 햇빛을 차단해야 한다. 아이들은 엄마를 만나려면 단단히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정중하게 노크를 해야만 한다. 지하실 구석에는 그들이 몰래 키우던 고양이의 시체가 박혀 있다. 아이들이 엄마를 피해 집안 어딘가로 달아났을 때 엄마는 그들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집안에서의 숨바꼭질, 쫓고 쫓기는 추격전, ‘진짜’ 엄마를 찾는 모험, 그리고 결국엔 텅 빈 앨범 페이지의 거대한 공포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부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행위. <굿나잇 마미>에서는 아주 유명한 호러 스릴러 영화(제목만 언급해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차마 적을 수 없다)의 또다시 이걸 쓸 수 있을까 싶었던 전제가 영리하게 변주된다. 이를테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다시 쓰기한 작품을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 그런 케이스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소설에서만 가능한 ‘생략’을 이용한 서술 트릭을 사용했던 것처럼, <굿나잇 마미>는 원제 ‘Ich seh, Ich she’처럼 ‘본다’라는 행위의 맹점을 활용한 트릭으로 관객을 속여넘긴다.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이 영화를 부디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항. 이 영화의 프로듀서는 울리히 사이들이다. <개 같은 나날><지하실에서><파라다이스 러브> 등을 통해 ‘뉴 오스트리아 필름’의 대표주자로 불리던 그 감독은, <굿나잇 마미>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베로니카 프란츠의 남편이기도 하다. *** 1)Lies Lanckman, 「‘I see, I see . . .’ Goodnight Mommy (2014) as Austrian Gothic」, 『Gothic Heroines on Screen : Representation, Interpretation, and Feminist Enquiry』, Edited by Tamar Jeffers McDonald & Frances A. Kamm, Routledge, 2019. (https://uhra.herts.ac.uk/bitstream/handle/2299/22115/Goodnight_Mommy_Lanckman_1.pdf?sequence=1&isAllowed=y)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영화는 소설가 존 디디온의 한 문구로 시작한다. “캘리포니아의 쾌락주의를 논하는 자는 새크라멘토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 봐야 한다.” 시작부터 이야기가 펼쳐질 곳이 얼마나 지루한 곳인지 알려주는 이 영화에는 모든 것을 지루해하는 여자애가 등장한다. 기찻길 옆 낡은 주택에서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오빠의 여자친구와 살고 있는 이 여자애의 이름은 ‘크리스틴’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 여자애의 이름이 ‘크리스틴’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크리스틴이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부를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기 때문이다. 뮤지컬부 오디션에서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에 왜 인용부호가 붙였냐는 질문에 “제가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이거든요. 저에게 제가 준 거예요.”라고 말하는 ‘레이디 버드’의 모습은 무척 당차지만 그 뒤 이어지는 노래와 댄스는 조금 우스꽝스럽다. 그렇다. 레이디 버드는 사실 조금 우스꽝스럽다. 말과 행동은 왠지 과장되어 있고 튀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 애초에 새 몸통에 자신의 얼굴을 붙인 포스터로 학생회장에 출마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급 주택이 자신의 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나 수녀 선생님 차 뒤에 “방금 예수님과 결혼했어요.”라는 푯말을 붙이는 종류의 장면들을 보다 보면 레이디 버드 혼자서 펼치는 1인 코미디쇼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런 과장된 행동들은 레이디 버드가 ‘모든 것을 지루해 하는 여자애’인 것과 관련이 있다. 그건 영화의 초반 장면부터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좋겠어.” 대학 탐방을 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레이디 버드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자 엄마는 레이디 버드의 ‘의지 없음’을 지적하고 그것은 모녀 사이의 대화가 대게 그러하듯 곧 말싸움으로 번진다. 레이디 버드는 결국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린다. 이 장면은 우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발칙한 고등학생인지 보여준다. 엄마에게 지지 않기 위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정도라니. 또한 이 장면은 레이디 버드는 지루함을 기꺼이 참아주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화면이 전환되고 가톨릭 미사에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설렁설렁 임하는 주인공을 보며 우리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새크라멘토, 가톨릭 학교, 잔소리 하는 엄마 등 레이디 버드를 둘러싼 것들이 얼마나 지루한지 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레이디 버드가 지루한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뮤지컬 반에 들어가고 첫 연애를 하고 엄마 몰래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지원하는 과정들은 바로 레이디 버드의 ‘지루함’ 때문에 일어났다. 첫 남자친구를 사귀고 첫 섹스를 하고 베스트 프렌드 대신 잘나가는 새 친구를 사귀어보려는 시도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타의 성장 영화들처럼 도망침의 결말에 주목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도망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완벽하지 않고 실수투성이이다. 프롬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러 가서 엄마는 레이디 버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항상 완벽한 모습이기를 원했어.” 레이디 버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게 나의 완벽한 모습이라면?” 영화는 완벽하지 않은 십대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성장의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미숙하다. 이 영화가 레이디 버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성장의 속성이다. 크리스틴이 직접 지은 ‘레이디 버드’라는 예명도 꽤나 상징적이다. 실수투성이인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아직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데미안의 새 이미지라던가 날아오르기 연습을 하는 아기새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영화가 다루는 불완전성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둘의 관계는 묘하다. 서로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가장 사랑한다. 서로가 완벽한 존재이기를 원하지만 가장 불완전하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영화는 레이디 버드의 성장 영화이기 전에 모녀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둘의 이러한 기묘한 관계는 초반 자동차 장면에서부터 드러난다. 대학 탐방에서 돌아오던 날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다가도 곧바로 사소한 말다툼을 하는 관계. 구제 옷가게에서 티격태격하다가도 괜찮은 드레스를 발견하자 바로 표정과 말투가 밝아진다. 앞서 영화가 크리스틴 혼자 펼치는 1인 코미디극 같은 느낌을 준다고 이야기했었다. 초반에 받았던 그 느낌은 후반으로 갈수록 옅어진다. 가장 큰 이유는 관객이 ‘레이디 버드’ 너머의 것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를 둘러싼 친구, 엄마, 아빠 등의 이름의 관계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경험할 만한 순간들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다 보면 레이디 버드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다. 진솔함을 느끼게 되는 데는 이 영화의 시선도 한 몫 한다. 이야기 전개를 화려하게 비틀고 이끌어 나간다기 보다는 어떤 관찰자가 그저 담담히 성장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후반부에서 영화는 1인 코미디극에서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로 변모한다. 끝까지 영화는 어떤 대단하거나 놀라운 순간을 통해 성장을 축복하려 하지 않는다. 완벽은 이 영화의 종착지가 아니다. 대신 새크라멘토의 풍경처럼 소박하고 천천히 그녀가 성장했음을 알린다. 첫 시퀀스에서 엄마와 딸의 대화 장면을 통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레이디 버드에게 있어 ‘지루함’의 대상에서 ‘그리움’의 대상인 것들을 나열해 보여준다. 교회와 부모님, 새크라멘토 말이다. 신입생 파티에서 술에 취해 깨어난 다음 날 아침, 레이디 버드는 뉴욕의 낯선 거리를 배회한다. 그러다 발길이 향한 곳은 그토록 지겨워했던 교회였다. 교회에서 나온 레이디 버드는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아빠, 저에요.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이 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아빠에게 양해를 구하고 엄마에게 할 말을 이어간다. “엄마도 새크라멘토 도로를 처음 달릴 때 감상에 젖었어? 말해주고 싶었어. 모든 건물들이 정겹게 느껴졌거든.”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새크라멘토와 엄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드러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것을 그리워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조명하는 성장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