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14 수용소
- 감독
- 장 라플로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다이안 트로린, 토니 안젤로
<레닌> 몇 번이고 망설였다. 내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을 설정한 것은 아닐까. 이 날짜는 다른 자리에 맡기는 편이 나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순간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이름을 열거해야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이 순간을 말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렸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블라다미르 일리이치 율라노프. 우리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람. 지구상에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건립한 인물. 나는 레닌이 언제 처음 영화를 보았는지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영화가 처음 파리에서 상영되는 그때 1895년 12월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 동맹’을 결성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갔고 그런 다음 1897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 1900년 레닌은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을 갔다. 그는 정치적인 팸플릿을 끝없이 써서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러면서 런던을 오가면서 정치적인 집회에 참가하였다. 일시적으로 1905년 9월 8일 러시아에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른바) 2차 망명길에 올라 1917년까지 해외에 머물렀다. 왠지 저녁에 망명지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레닌의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레닌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듣고 난 다음 눈물을 글썽이면서 막심 고리끼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곡은 초인적인 음악입니다. 나는 인간이 정말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음악을 너무 자주 들을 수는 없습니다. 음악은 신경을 자극하여 멍청한 멋진 말을 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끔찍한 지옥에 살면서 그런 아름다운 창조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게 만듭니다. 하지만 누구의 머리도 쓰다듬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손을 물리게 될 것입니다” <전함 포템킨> 1917년 10월 혁명에 성공하였다. 전세계가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본가들은 두려움에 질렸고 노동자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혁명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즉각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미국은 한 편으로는 동맹을 맺고 다른 한 편으로는 러시아 내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였다. 지도자 레닌은 물론 이 혁명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과도기라는 테제를 제출하였다. 문제는 과도기라는 정식화에 대해서 볼쉐비키 내부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과격하게 혁명의 실천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정치적인 사상투쟁을 벌이는 동안 여전히 자본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부르주아들과 지주들이 연합하여 외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개시하였다. 레닌은 안과 바깥에서 싸워야만 했다. 이때 레닌은 다시 한 번 인민의 결집이 승리를 향한 전진이 될 것으로 믿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도시의 노동자들과 달리 혁명의 사상을 충분히 학습하지 못한 농민들에게 혁명의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인 장애는 농민들의 다수가 그 당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문맹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레닌은 ‘혁명적으로’ 농민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민들)을 위한 학습 도구로 영화를 선택했다. 그래서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세상을 농민들에게 영화를 통해 알리고 또 한 편으로 농민들의 농촌에서의 투쟁을 기록하여 다시 도시에서 배급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공장위원회와 소비협동조합을 통해 상영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새로운 탄생을 알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지가 베르토프> 1918년 8월 13일 모스크바 역에서 그 당시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볼가강 유역의 카잔 지역으로 첫 번째 혁명 프로파간다 열차가 출발하였다. 이 열차에는 볼쉐비키 군인들과 노동자들, 인민들을 위한 7,000권의 책과 팸플릿 문건을 인쇄 수 있는 인쇄기. 영사장비, 편집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열차에는 (훗날 에이젠쉬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촬영한) 에두아르드 티세와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 카우프만, 훗날 자기 이름을 지가 베르토프라고 부른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카잔 지역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매주 신문을 편집하였으며, 그리고 일부 순간들을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그리고 촬영 분량들은 ‘키노 네델리아(주간 영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구성되었다. 아마도 고몽영화사에서 시작한 ‘시네 주르날’이 그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들 각자의 역사. 그들 각자의 상황. 그리고 그들 각자의 영화. 영화사의 순간들은 단지 국경을 넘어서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념,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그렇게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격동하는 역사를 온전히 자기 삶으로 감내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를 현미경으로 보듯 자세히 눈여겨보고 기록하는 자. 다큐멘터리 영화에선 이야기를 하는 자와 듣는 자, 기록되는 자와 기록하는 자의 긴장 관계에서 다양한 의미가 배태되곤 한다. 영화학자기도 한 김소영 감독은 2014년부터 유라시아 대륙으로 흩어진 고려인의 발자취를 찾아 다큐멘터리 영화로 담아왔다. < 눈의 마음: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2014)에선 고려인 2,3세의 삶을, < 고려아리랑:천산의 디바 >(2016)에선 고려인의 상실을 노래로 위로해온 고려극장의 디바 방 타마라와 이함덕의 예술 세계를 조명했다. 한국전쟁 당시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여덟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 굿바이 마이 러브NK:붉은 청춘 >은 ‘유라시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해방된 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당시 조국을 떠나야 했던 망명자들의 삶을 고집스럽게 뒤쫓은 기록을 만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이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냉전과 분단 등 국가주의 세계관으로는 보지 못한 역사의 이면, 그 안에서 이뤄진 개인의 선택. 김소영 감독의 세 작품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한 디아스포라 역사를 미시적으로 접근해 재정립한 결과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최전선에서 싸운 북한 청년들이 있었다. 20대 초반, 어렸지만 혁명을 향한 부푼 꿈을 안고 싸운 이들은 “알짜 빨갱이”로 인정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의 행선지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최국인 감독, 김종훈 촬영감독, 작가 한대용(이후 한진), 허웅배 등 여덟 명의 유학생은 말도 다른 타지에서 조국을 향한 신념으로 살아나갔다. 하지만 1956년 김일성의 주체사상 종파사건을 일어나며 모든 게 달라졌다. 허웅배는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재조선 유학생대회에서 북한의 1인 독재 체제를 비판했고 이 사건으로 대사관에 구금됐다가 58년 소련에 망명을 요청했다. 허웅배와 친구들은 모스크바에서 40여km 떨어진 모니노 숲에서 천막을 치고 소련의 답을 기다렸다. 그 때 허웅배는 “참사람이 되자는 뜻으로 여덟 명 모두 같은 이름 ‘진’을 쓰자”고 제안하며 결의를 다졌다. ‘모스크바 8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망명을 받아들인 소련은 이들을 소비에트 각 지역으로 흩뿌렸다. 한대용은 서부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여성 지나이다 이바노브다(이하 지나)와 결혼했고, 김종훈은 러시아 북서부에서, 최국인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살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는 8진의 마지막 생존자 김종훈, 2014년 김소영 감독이 알마티에서 만난 최국인, 그리고 한진의 미망인 지나다. 이들 말 속엔 혁명을 향한 신념과 조국에 대한 아쉬움, 동료에 대한 뜨거운 우정과 사랑이 알알이 박혀있다. 김종훈은 조국에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존경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갈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최국인은 카자흐스탄의 공훈 감독으로 활약했지만 “조국을 위한 영화를 만들지 못한 내 인생은 비참하다”고 돌이킨다. 지나는 ‘국적 부재’라 쓰인 여권을 가진 한진과 결혼을 하던 때를 떠올린다. “누가 이 고려인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냐”는 공무원에게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되묻던 기억을, 백발의 지나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사랑과 우정, 신념이 삶의 가장 값진 가치였던 시절. 풍족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던 인생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가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흥미로운 건 이들의 이야기를 유연하게 개입하고 재구성하는 연출이다. 한진이 쓴 글을 극영화 방식으로 연출한 영상이 등장하거나 한진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김소영 감독이 직접 읽기도 한다. 촬영 중 최국인 감독이 작고한 소식을 김 감독이 전하는 장면도 나온다. 감독이 단순히 이들 삶을 기록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그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듯 보인다. 다른 시공간을 살아온 모스크바 8진과 이를 끈덕지게 쫓아온 다큐멘터리 감독, 즉 찍는 대상과 찍는 주체가 수평적으로 연결된 상태가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 말미 김 감독은 내레이션으로 “왜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느냐”고 물은 김종훈에게 ‘영화로 다른 세상을 보고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 사실을 전한다. 긴 시간 영화로 주류 역사 이면을 끊임없이 탐구해온 영화 작가 김소영이 역사에 묻혀있던 찬란한 청춘과 조우한 방식은 역시 영화였다. <굿바이 마이 러브 NK:붉은 청춘>은 영화가 역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탐구할 수 있는 기록의 매체라는, 명징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김소영 감독의 고려인 삼부작 중 첫 작품 <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2014)(<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의 감독판)은 그야말로 슬픔을 위한, 애도를 위한 영화였다. 일제 강점기,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이주해 간 연해주. 그곳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기차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 여기저기에 버려진 고려인들. 이들에게는 차라리 죽음이 삶보다 가까이 있었다. 영화는 이 비극적 역사와 더불어 감독의 마음을 아프게 한 몇몇 죽음들을 마주하고 이를 애도한다. 이러한 죽음과 슬픔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는 그 고통스러운 삶을 지탱하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가는 영화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걸출한 두 명의 고려인 디바를 만난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고려극장 1대 춘향이자 고려인 최초 카자흐스탄 인민배우였던 이함덕의 삶을, 후반부에서 우아하면서도 위엄있는 목소리로 고려인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을 방 타마라의 삶을 조명한다. 이함덕의 시대에 살았던 누구나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이함덕에 대한 인상적인 구술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있는 고려인 노인단에서 만난 한 할머니로부터 전해졌다. 이함덕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단박에 그녀를 기억해낸 할머니는 “아아, 이함덕. 잘 놀았소.”라고 한다. 배우에게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그녀는 훌륭한 스승이자 선배이기도 했다. 3대 춘향이었던 최 타찌아나는 반년 동안 이함덕의 집에 머물며 그녀로부터 한글과 춤을 배웠던 일화를 들려준다. 고려극장의 음악 감독 출신인 한 야곱은 두 번이나 극장을 뛰쳐나갔던 자신을 번번이 붙잡아준 이함덕을 기억한다. 다행히도 이함덕의 노래와 춤이 담긴 푸티지를 통해 생전 그녀의 몸짓과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영상 속 이함덕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그녀를 기억하는 동료의 말처럼 곱고, 녹음된 그녀의 노랫소리는 청아하고 구슬프며 간드러진다. 이함덕의 부분이 끝나면, 이함덕의 것과는 정 반대편에 위치한, 어떤 사연도 담아낼 듯 넓고 풍부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또 한 명의 전설적인 디바, 방 타마라가 걸어온다. 그녀가 들려준 한 일화는 그녀가, 고려극장이, 아리랑가무단이 고려인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에 있는 군사기밀구역에 공연을 갔다. 거기서 그녀는 “거대한 하늘”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내용은 이러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군인은 탈출하는 대신 비행기를 사람들이 없는 도시 외곽으로 몰고 갔다. 그는 죽었지만, 그 죽음으로 더 많은 이들을 살렸다.’ 노래가 끝나자 꽃다발이 그녀의 무릎까지 차올랐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울었다. 그녀의 공연이 있기 바로 전, 비행기가 두 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고려극장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기후, 고된 노동, 고향에 대한 그리움, 무수한 죽음과 슬픔을 견뎌낼 힘과 위안을 준 것이다. 방 타마라. 그녀에게는 고려인이 겪어야 했던 모진 역사 외에도 가족사적인 비극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고 담담하게 이를 털어놓는 그녀이지만 뒤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녀가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게 한다. 그녀는 “극장에서 교회로 넘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한다. 이제 그녀가 노래하는 곳은 신의 앞인 예배당, 자신을 불러주는 소수의 사람들 앞이다. 영화 끝에 다다라서야 들을 수 있는 현재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풍성하고 넓으며, 여기에 더하여 생의 고통과 모순을 끌어안는 깊이와 평안함이 깃들어 있다. 젊은 시절,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손가락 부상과 이로 인한 5년여의 공백을 딛고 작년,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앨범을 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신앙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과연 연주회장에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은 음악의 신을 빙의한 것 같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니라, 기도를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러한 정경화의 모습이 어느 병원에서 평안한 표정으로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르던 방 타마라의 모습과 겹쳐진다. 영화에는 이 두 디바의 이야기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우슈토베 고려인 노인단에서 우연히 만난 마리아 코발렌코의 딸. 마리아 코발렌코는 우크라이나 여성으로, 김소영 감독의 고려인 3부작에 영향을 준 고려인 2세 송 라브렌티 감독의 <고려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려인 가정에 입양되어 고려인으로 키워진 그녀는 강제이주 때 고려인들과 함께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오게 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백인 여성임에도 장을 맛있게 담그고, 완벽한 고려말을 구사하는 그녀의 존재는 고려인이, 디아스포라의 삶이 얼마나 혼성적이며 다양한 층위를 가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극작가이자 이함덕의 남편인 태장춘이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일생을 다룬 “의병들”이라는 연극을 올렸고, 홍범도가 죽기 일 년 전 이를 관람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방 타마라의 부분에서는 그녀의 두 딸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어린 시절, 순회공연을 하는 엄마를 따라 소련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 학교를 삼사일씩밖에 다니지 못했고, 노래는 혼자나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것이 좋으며, 엄마가 가수인 것에 만족한다 말하던 큰딸의 깊고 그윽한 표정. 언니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엄마를 따라 가수의 길을 가고 있는 둘째 딸, 그리고 그녀가 엄마에게 바치는 노래. <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에는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화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여전히 궁금하고 알고 싶은 기억과 역사가 담겨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자주 위안과 기쁨을 느꼈다. 유사 이래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승화하고 이를 견디어 내게 해준 것, 다름 아닌 예술.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음악이다. 아무것도 없이 허허벌판에 버려진 사람들, 헤아리기 힘든 고통과 셀 수 없는 죽음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고 살게 해준 고려극장의 음악. 그 정점에 이함덕과 방 타마라가 있었다. 그녀들의 삶과 노래. 영화는 이렇듯 생의 비밀을 전해주는 것이었으므로, 영화를 보는 동안 위안과 기쁨을 얻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