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로메틱 시즈
- 감독
- 구스타보 그래프 마리노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피터 웰러, 다릴 한나, 톰 베린저, 브라이언 제임스, 아드리안 핀티, 우 오크센크네츠, 제레미 레리엇, 이리나 모빌라, 라드마 아가나 자오, 프란시스 X. 맥카티, 스티브 이스틴, J. 패트릭 맥코맥, 미르체아 보도런, 프란시스코 레이이스, 오드리 림바우드, 서반 셀리아
<BECK: Mongolian Chop Squad> 중 (사진: " BECK: MONGOLIAN CHOP SQUAD ", MUBI)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H2』, 『러프』 등을 그린 청춘 스포츠 만화의 거장, 아다치 미츠루의 『미유키』엔 위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한 소녀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편집자적 논평으로 일체화해 드러낸 귀여운 사례다. 이 발화는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다치 미츠루가 소녀를 그린 만화의 컷은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커다랗다. 다만, 이 진담 섞인 농담처럼 만화의 컷은 진정 마음의 크기로 고스란히 치환될 수 있을까. 만화는 지면의 물리적인 크기 조정을 통해 독자적 의미 작용을 생성하는 매체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만화(일본식 만화인 ‘漫画’에 한정)의 컷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원리를 따르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사이의 차이, 그리고 ‘실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감각이 무엇을 낳았고 낳을 수 없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장난스러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치자면 우선 말의 역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화 속 감정의 크기가 컷의 크기에 따라서만 조율되진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 숏을 떠올리게 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공백 컷이 대표적인 만화적 감정의 형성 방식이다. 서사의 고조가 일어나야 할 플롯의 이음매에 잠자리나 하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집어넣어 감정과 정취 사이의 낙차를 일으키는 그것.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포수의 글러브 혹은 타자의 배트에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을 유예하려 들어선 무관한 이미지의 연속과 충돌들. 이처럼 아다치 미츠루는 칸의 크기뿐 아니라 청춘 스포츠 만화의 장르적 내러티브에서 탈락한 오브제의 개입과 몽타주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작가다. 아다치의 몽타주는 곧바로 영화의 용어로도 (거슬러 올라가) 통역된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에 따라 모더니즘 시대의 일본 만화가들은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의 몽타주 등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과 렌즈 기반의 카메라 문법을 흡수하여 만화의 컷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컷과 구분하기 위해 만화의 컷을 ‘칸’이라 씀)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이로부터 영화 기호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더불어 말년의 데즈카 오사무 등은 ‘필름 만화’를 통해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고찰했다. 필름 만화란 필름의 한 프레임에 담긴 움직임 하나하나를 만화의 칸 하나하나에 그대로 대입하여 그린 방식이다. 영화의 1초 24프레임 상영 이전 단계에서부터 컷과 칸의 의미를 사유하고, 이로써 필름 운동의 근원적 사진 이미지를 고찰하며,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한다. 근래의 만화가들도 이 유산을 지키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체인소 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물의 움직임을 앵글이나 칸 사이즈의 변화 없이 다수의 컷으로 나누어 그리는 필름 만화의 작법을 즐겨 쓰는 이다. 그러니 칸의 연속과 충돌이든, 몽타주이든, 기호적 이미지의 작용이든 만화와 영화의 칸-컷은 대개 분리 불가한 의미론 속에서 순환하는 편이다. 만화와 영화의 경계는 이래저래 더욱 희박해진다. 『H2』 중 (사진: “ Mitsuru Adachi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Original artist Mitsuru Adachi ‘천상의 목소리’란 <BECK>의 제약 만화와 영화의 친족관계를 하나씩 밝히다 보니 만화가 영화처럼 보이고, 영화가 만화처럼 읽힐 지경이라 어지럽다. 그럼에도 두 매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 차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선 또 다른 만화가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다. 재즈 만화 『블루 자이언트』의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가 처음 편집자에게 『블루 자이언트』의 기획을 전했을 때다. 편집자는 “자네, 종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거 알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에 작가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 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답한다. 요컨대 만화와 영화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역시 소리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사운드가 기재될 수 없는 만화, 그 대척에 있는 영상 매체의 틈이 사운드의 유무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발상이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속성이 있다면 그것 역시 투수의 150km/h 짜리 직구가 날아가는 소리, 필로 숏 속 잠자리의 울음소리에 있을 것이란 뜻이다. 만화 『BECK』 시리즈(한국어판) 표지 (사진: “ BECK 10 ”, “ BECK 30 ”, 교보문고) 이러한 논지에서 만화와 영화의 관계 일변을 가장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예시는 해롤드 사쿠이시 작가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연재한 소년 밴드 만화 『BECK』이다. 『BECK』이 걸작의 자리에 오른 큰 이유는 만화가 밴드 공연을 그린다는 본원적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라이브의 순간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만화 매체의 커다란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BECK』이 택한 전략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주인공이자 밴드 BECK의 멤버인 유키오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타를 잡은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유키오가 단숨에 밴드 신의 스타가 되는 근거로 (아마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를 모티프로 한) 그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즉 만화 『BECK』은 음악 없는 음악 만화라는 제약에 ‘목소리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중의 제약을 가한다. 마치 『헌터x헌터』에 등장하는 제약과 서약의 원리(무언가를 제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단 설정)와도 같다. 유키오의 목소리를 만화로 그리지 못할 바엔 그것을 더욱 추상적인 경지로 이끌어, 독자에게 최대한 커다란 상상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BECK』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로 인기 만화의 상업적 운명으로 인해 작품의 영화화가 이뤄진 것이다. 보통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실사화할지란 큰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 BECK >(츠츠미 유키히코, 2010)은 아주 파격적인 작법을 택한다.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실사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아예 유키오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작중에서 소거해 버린 것이다. 유키오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보컬의 마이크를 끈 듯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한다. 2010년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객과 평자들은 이 선택을 비난했다. 음악 없는 음악 만화야 매체의 본질적 제약이라 친다 해도, 음악 있는 음악 영화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렇다면 영화 <BECK>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이브 무대에 실사의 ‘소리’를 덧대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외려 영화 <BECK>이 택한 소리의 공백은 원작 만화의 설정을 이어가며, 소리의 효과를 이미지의 기호로 펼치는 영화적 역량을 보여준 사례다. 영화 <BECK>의 방식은 근원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영화 기호론과 같은 일본 만화 고유의 작법을 세심히 이식한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유키오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화면은 일련의 몽타주를 늘어놓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슬로 모션으로 만화적 놀람의 표정을 기호로 발산하는 관객의 표정 등이 교차한다. ‘천상의 목소리에 놀란다’라는 사실을 가시적 문법이 아닌 기호의 원리에 빌려 구현하고, 소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가 강속구의 시간을 잠자리 등의 자연물과 인물들의 표정에 가뒀다면,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구름 등의 자연물과 청중들의 표정에 구속했다. 시간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만화의 영화적 작법이 한 바퀴 돌아 영화에 쓰인 것과도 같다. 돌고 돌아 만화와 영화는 또 비슷해지는 것일까. <BECK> 중 여기-있을 것의 애니메이션 여기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여 사고를 확장한 『BECK』의 산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바야시 오사무 감독이 2004년에 만든 『BECK』의 애니메이션 <BECK: Mongolian Chop Squad>다. <BECK: Mongolian Chop Squad>는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란 문제를 정공법으로 받아 쳤다. “HUSKING BEE”라는 실존 밴드의 보컬리스트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를 유키오의 가창 성우로 기용한 것이다. 유키오의 보컬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TVA 12화의 <Moon on the water> 라이브부터 BECK이 일본 최고의 화제 밴드로 일약 올라서는 그레이트풀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서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아닌 실제의 소리(가창)로 드러낸다.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가 ‘정말 천상의 목소리냐?’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여기서 재론하려는 바는 결국 매체 간의 차이다. 만화와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도 작동할 수 있었지만, 왜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목소리를 택해야 했던 것일까. 단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영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두지 않는 일에서부터 발견될 것이다. 앞서 반복했듯이 만화와 영화의 유사성을 짚고, 그 바깥에서 애니메이션만이 독자적으로 지니는 돌출성을 찾음이 마땅하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는 공백의 범주에 있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이고 마술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 영화와 만화 <BECK>이 유키오의 목소리를 현실화하지 않고 소리의 불능이란 제약에 묶어뒀던 것을 이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만화의 원류가 영화적 뿌리에 깃들어 있다면 만화는 시간의 일상적 흐름을 거부하는 사진의 역량, 이와 동시에 칸과 컷의 공백(혹은 몽타주)을 활용해 감정의 찰나를 유예하는 영화의 힘을 함께 작동시킨다. 영화 <BECK>은 그러한 만화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거꾸로 옮겨와 실현한 경우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지대에 존재하는 매체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1995)과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츠루마키 카즈야, 1997)의 현대성에 대한 글에서 애니메이션을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라고 설명한 적 있다. [1] 영화적 이미지는 현실-스크린-관객 사이에서 도래하는 결과물이고, 만화는 그러한 영화적 망상에서 기반한 칸의 펼침이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망상은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도’의 집합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곤 사토시의 말처럼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은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창작자(들)의 순수한 망상이다. 현실에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유키오의 ‘천상의 목소리’란 현실에 기반한 영화와 만화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이데아적 사건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이 무한의 상상을 ‘의도적으로’ 실현해야만 자신의 미학을 지킬 수 있는 매체다. 요컨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분화한 <BECK>의 선택, 구체적으로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표현한 방식들은 각각의 매체성을 즐거이 논할 수 있는 사례다. 밴드물의 정전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합일될 정도로 각 매체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문제작이자 걸작이다. 아, 그러면 이쯤에서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라는 아다치 미츠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되새길 수 있겠다. 아마 의도의 측면에선 참이나 결과적으론 거짓일 듯하다. 영화적 논리에 기댄 칸의 크기는 결국 이미지와 시간의 공백으로서 독자(관객)의 능동성에 복무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의 만화는 결국 태초의 영화적 속성과 떼놓을 수 없이 다수의 실사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만의 ‘의도적 세계’는 만화-영화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이란 추상을 자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BECK: Mongolian Chop Squad> 유키오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고, 이 속의 유키오는 <Moon on the water>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BECK> (사진: “ BECK 22 ”, 교보문고 / “ Beck: Mongolian Chop Squad ”, IMDb) *** [1] “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 《씨네21》 1440호, 2024. 1. 18. 이우빈(영화기자) l 《 씨네21 》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본 1997년생.
영화사에 관한 책을 보면 누구라도 마주치게 되는 영화. 보고 있으면 단지 압도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그 무게에 눌려서 질린 상태가 되어 보게 되는 영화. 말 그대로 모든 점에서 훌륭하고 심지어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건 예언적인 영화. 그런데 한 번 보고 나면 두 번 볼 엄두가 안 나는 영화. 데이빗 워크 그리피스의 < 불관용 >은 처음 볼 때 있는 힘을 다해서 보아야 하는 영화이다. 왜냐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책에서 이 영화를 <인톨러런스>라고 그냥 ‘音讀’한다. 여기서는 번역어로 옮길 생각이다) 단지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게다가 내내 스펙터클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세트는 장엄하고 모든 장면들은 공들여 찍었다. 3,000명의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었고, 바빌론 궁전 세트는 높이 90미터에 이르는 건축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불관용>은 (다른 그리피스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멜로드라마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두 번 보기가 힘든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관용>은 영화사에서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구태여 말하자면) 마치 미켈란젤로가 1508년에서 12년 사이에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천장화>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위대하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 천장을 3시간 30분 동안 반복해서 볼 자신이 없다. (<불관용>은 여러 판본이 있다. 좀 더 자주 시네마테크에서 볼 수 있는 버전은 상영시간 3시간 17분 판본이다) 그리피스는 1915년 < 국가의 탄생 >을 완성했다. 영화에서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에 겨룰만한 성취를 얻어냈다고 에이젠쉬테인은 찬사를 보냈다. 미국에서는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언론과 지식인들은 <국가의 탄생>이 흑인에 대한 인종편견에 찬 영화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리피스는 이중적인 태도로 <불관용> 제작 연출에 착수하였다. 하나는 물론 알라바이이다. 자신이 인종편견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류애라는 휴머니즘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걸 영화로 증명하길 원했다. 속죄로서의 영화. 다른 하나는 그때 예술적으로 거의 정점에 올라온 그리피스는 자신의 영화적 가능성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불관용>은 거의 전례 없는 규모로 진행된 실험적인 영화이다. 모든 의미에서 <불관용>은 동시대 영화들과 차원을 달리한 영화였다. 아마도 <불관용>에 연출부였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토드 브라우닝은 그때 많은 것을 훔쳤을 것이다. 그리피스는 서사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 서기 전 539년. 바빌론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풍족한 왕국이었다. 벨샤자르 왕자는 펴민인 산골소녀를 돌보고 그녀는 왕자에게 사랑을 느낀다. 파국은 바깥에서 온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바빌론을 쳐들어온다. 서기 27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며 전도에 나섰을 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의 음모에 빠져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서기 1572년 8월 24일. 프랑스. 신교도 위그노들과 갈등을 빚어오던 가톨릭교도들은 그날 대규모의 신교도 학살을 한다. 1914년 현재. 가난한 젊은 청년은 공장에 다니면서 아내와 살고 있다. 공장에 파업이 일어나고 이에 연루되어 해고당한다. 이제 낯선 곳에서 먹고 살기위해 애쓰던 청년은 그만 범죄조직과 얽혀든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젊은 아내가 가련하게 애를 쓴다. 이제까지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서사를 가지게 되면 차례로 진행하였다. 그리피스는 야심적으로 이 네 개의 시대를 번갈아 오가는 구조로 재구성하였다. 다른 영화들이 이 쇼트와 저 쇼트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리피스는 영화 전체를 (아직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시간의 몽타주의 천장 벽화처럼 만들었다. 시간은 자유로이 여기서 저기로, 그리고 저기서 거기로, 그렇게 이동하면서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를 펼쳐보였다. 아놀드 하우저는 <불관용>을 본 다음 문학이 이제까지 이르려고 애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화는 시작하였다, 라고 탄식하듯이 썼다. 심지어 1916년은 제임스 조이스가 아직 <율리시즈>를 쓰고 있었고(이 소설은 1922년에 출판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두 번째 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를 발표했을 따름이다. (1912년에 초고가 끝났을 뿐이었다) 그리피스는 서사 전체의 시간, 차라리 인류의 역사 전체를 그렇게 잘게 쪼개놓은 다음 완전히 서사 바깥에 놓여있는 에피소드를 반복적으로 추가하였다. 릴리안 기쉬가 연기하는 어머니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어린 아기가 누워있는 요람을 흔드는 그 유명한 장면. (그래서 이제는 모든 영화교과서에서 문법처럼 인용되고 있는 장면) 그리피스는 여기서 우리에게 서로 다른 시대의 시간으로 산산 조각난 씬들을 하나의 고정점 아래 매듭을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세워 유기적 통일성을 부여하였다. 영화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의 순간 중의 하나. 하지만 <불관용>은 그리피스의 알리바이를 증명하지도 못했고, 동시에 미학적으로 대중적 승리를 맛보지도 못했다. 이 영화는 자기의 시대로부터 멀리 떠나왔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오락이 예술적인 목표를 향해 도약하는 새로운 도전을 참지 않았다. <불관용>은 대중들의 ‘인톨러런스’ 앞에서 거의 재난에 가까운 박스오피스를 마주했다. <불관용>의 가장 열렬한 관객은 예상치 않게도 (어쩌면 충분히 예상대로?) 볼쉐비키 혁명에 성공하고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가 필요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레닌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 역사의 ‘인톨러런스’로 읽어냈다. 그래서 <불관용>을 수입하여 러시아 전역에 대대적인 개봉을 했으며, 더 나아가 그리피스에게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산업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리피스는 이 자리를 거절했다. 나는 거절의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이 제안을 수락하고 그리피스가 소비에트에 갔다면, 그래서 젊은 제자들, 에이젠쉬테인,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 미하일 롬, 도브첸코, 보리스 바르넷을 가르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십년 후에 < 전함 포템킨 >을 보는 그리피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사의 순간들의 우연이 만들어내는 별자리들. (계속)
활기와 권태, 기쁨과 슬픔을 껴안는 방식에 관하여 ‘나’는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청년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치코와 동행한다. 사치코는 한 잔 할 것을 제안하고 ‘나’는 몇 시간 후에 문자하겠다고 하고 헤어졌지만 ‘나’는 그만 잠을 자느라 약속시간을 어긴다. 그 날 ‘나’는 룸메이트 시즈오와 밤새 술을 마신다. 다음날 ‘나’는 카페에서 점심을 해결하다 사치코를 또 만난다. ‘나’는 어제의 약속을 어긴 것을 사치코에게 희미하게 사과하고 사치코는 애매하게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 관계인 듯 아닌 듯한 관계가 시작된다. ‘나’와 사치코가 처음 섹스하던 날 귀가하던 시즈오는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시즈오가 두 사람 곁에서 물러나는 건 이때가 마지막이다. 그 후로 세 사람은 거의 늘 함께 한다. 함께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당구 치고 탁구 치고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운다. ‘나’는 누구의 삶에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삶을 원하며 사치코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태도로 대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치코는 그런 ‘나’의 쿨함 또는 무심함에 슬쩍 마음이 상한다. ‘나’와 사귀기 전 서점 사장과 연인관계였던 사치코가 그 관계를 정리하려 할 때 ‘나’는 그런 사치코의 결정을 남 얘기 듣듯 하고 사치코는 ‘나’의 진지하지 못한 반응을 나무란다. 그 후 사치코는 ‘나’보다는 시즈오에게 끌린다. 뭔가 슬픔을 품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 시즈오는 뚜렷한 직업 없이 하루 하루를 소일하며 친구들에게 사심 없이 마음을 내어준다. 그런 시즈오에게 사치코는 ‘나’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사치코가 말한다.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시즈오가 말한다. “그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거야.” 시즈오의 말은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그런 척 한다. 약간의 선의를 품은 채 ‘나’는 가급적 세상으로부터 벽을 치고 방해받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연애도 ‘나’에게는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다. 사치코가 시즈오와 더 가깝게 지내자 ‘나’는 그런 사치코의 변화를 기꺼이 수긍한다. 미야케 쇼 감독의 세 번째 장편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2018)는 사토 야스시의 소설이 원작이며 요절한 작가가 서른 한 살에 쓴 작품을 역시 서른 한 살의 영화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으나 감독의 말에 따르면 원작의 비극적 결말을 소거하고 좀 더 무채색에 가까운 감정으로 옮겨낸 이 청춘의 이야기에서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환희와 피로는 불가해한 형태로 뒤엉켜 공존한다.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파트타임 직업으로 호구를 삼고 미래에 대한 별다른 계획도 없으며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출구 없는 삶을 사는 젊은이들의 전형이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견디고 있는 상태에서 바깥으로부터 오는 행복의 신호에 부드럽게 반응한다. 사치코는 권태와 무의미의 극단에 삶이 처해 있는 듯한 서점 사장과의 관계를 가만히 견디면서 ‘나’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구애의 의사를 전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가족 관계가 화면에 상술되지 않는 사치코는 ‘나’와 시즈오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며 그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밤새 바에서 술 마시고 춤을 출 때 무리에서 빠져나와 DJ 앞에서 홀로 자기만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치코의 모습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순간의 농도를 제공하는 관계의 즐거움을 기꺼이 만끽하며 동시에 자기만의 영역을 세심히 지키는 행동을 보여준다. 시즈오는 딱히 뭘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는 청년인데 길거리에서 경찰 심문에 걸려 살짝 모욕을 겪어도 실실 미소를 흘리는 여유를 잃지 않고 직업소개소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옆 자리 사람이 건네는 사탕 한 알을 물고 천진한 웃음을 짓는 만사태평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그는 치명적인 병을 앓는 어머니가 있다. 가끔 술을 마시며 심드렁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이들 모자는 필사적으로 절망을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그의 병상을 정리하면서 시즈오는 생각한다. “병원 냄새를 참을 수 없다. 친구들과 단골로 갔던 장소의 냄새를 기억해내고 싶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사치코와 시즈오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삶이지만 행복의 징후가 보이면 반갑게 그걸 껴안는 두 사람과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잠시 충만한 그 행복의 흐름에 무심한 척 몸을 맡기는 사람이다. ‘나’가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간섭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서점에서 책을 훔쳐가는 손님의 행동을 보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나’의 태도에 동료 점원은 분개하지만 동료점원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태연하던 그가 사장과 바람피운다며 사치코를 비아냥거리는 동료점원의 말을 참지 못하고 혼내주는 건 누군가를 함부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무례에 ‘나’가 예민한 성격임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태도만으로 그의 삶이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사치코와 시즈오가 둘이서만 캠핑을 떠난 시간에 홀로 거리를 산책하던 ‘나’는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누군가로부터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나’의 앞에 시즈오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온 시즈오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나’는 사과가 담긴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내민다. ‘나’를 좋은 아이라고 칭찬해주며 떠나는 시즈오의 어머니는 ‘나’ 앞에서 보인 호기로운 태도와는 달리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어가며 울적한 뒷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즈오의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켜 의식불명으로 쓰러진다. 이런 장면들에서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른 등장인물들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그들의 다면성을 이해시키는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이 드러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별 다른 사건 없이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행복한 순간만 서로 주고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일상의 순간들을 늘일 수 있는 만큼 늘이는 영화이다. ‘나’와 사치코와 시즈오가 바에서 밤새우며 노는 장면은 거의 7분 분량을 넘어서는데 별다른 사건 없이도 그들이 노는 모습만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는데도 화면에는 활기와 매력이 넘친다. 심지어 세 사람이 편의점 내부를 돌며 먹을거리와 마실 것을 사는 평범한 장면에서도 카메라와 인물의 움직임은 서로 조응하며 자그마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밤새워 논 다음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곤죽이 되어 졸고 있는 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희열과 상실의 순환으로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자잘한 일상을 궁극의 낙관적 기운으로 담아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할 것처럼 즐기고 그 다음에 오는 허무의 기운을 부드럽게 응시하며 껴안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각자의 존재를 스스로 보호하면서 상대에게 부드러운 선의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의 후반부, 늦은 밤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시즈오는 다음날 첫 기차를 타기 전까지 ‘나’와 사치코와 함께 단골 바에 가서 늘 그랬듯이 즐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슬픈 상황에서 그들은 함께 있음으로써 그 시간들을 견딘다. 다음날 일찍 시즈오과 집을 나설 채비를 할 때 그런 시즈오의 행장을 도와주는 ‘나’와 어둠 속에서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치코의 옆모습을 잡는 카메라는 기쁨도, 슬픔도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나누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보여준다. ‘나’역의 에모토 타스쿠, 사치코 역의 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 역의 소메타니 쇼타 세 배우는 특정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특정 역할로 특정 공간에서 살아가는 현대적 배우의 매력을 조용히 웅변한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스타일로 인상적인 걸음걸이를 보여주며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때의 표정과 동작으로 그들 각자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감독 미야케 쇼를 만났을 때 그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예견하는 나의 건방진 덕담을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자신이 영화를 하는 것은 영화를 준비하고 찍으며 동료들과 누릴 수 있는 시간의 행복을 음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촬영하면서 그는 배우들과 최상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 모두 영화 촬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회상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행복에의 추구가 영화 바깥의 과정에서도 관철되었다는 그의 말은 만남과 이별이 늘 한 쌍을 이루는 인생의 궤도에서 슬픔을 견디면서도 기쁨을 폭발적으로 나누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실감하게 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젊다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게 만든 드문 활기의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