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 감독
- 박헌수
- 제작년도
- 1994
- 출연
- 고소영, 정우성, 독고영재, 방은희, 이기영, 이근희, 서기웅, 권해효, 안석환, 소일섭, 권호웅, 민경진, 원근희, 권태원, 엄춘배, 이봉규, 지춘성, 정인기, 김필국, 박길수, 강남기, 홍석연, 이재록, 이석연, 최영래, 김민수, 신재명, 양정웅, 이운석
<로보트 태권브이>와 <외계에서 온 우뢰매>로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 영화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김청기 감독.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58년 18세에 단행본 만화를 발간하며 만화작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펜싱만화 <무적의 오프린>인데 펜싱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뒤 무작정 아리랑 문고를 찾아가 출판한 작품이었다. 당시 이화여대 근처에 인쇄소와 만화 총판들이 있었는데 만화책이 인쇄되어 나오면 자전거 부대가 각 동네의 대본소에 배달하는 방식으로 만화책이 유통되었다. 그래서 그는 때로 자전거부대가 대본소에서 신발주머니에 받아온 동전으로 작가료를 받기도 했다. 그가 만화작가 활동 중이던 1961년 5.16 이후 출판만화에 대한 검열이 생겨나 소재와 표현방법에 있어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예를들어 풍속에 위배 되기에 부모에게 반항적인 인물을 묘사할 수 없었고 한 컷 안에 총과 칼을 겨눌 수 없었으며 ‘이놈’, ‘이 새끼’, ‘이 자식’이라는 단어는 쓸 수 없었다. 결국 극적인 악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만화에 대한 공격은 심했고 어린이, 청소년 문제는 모두 만화 탓으로 돌려졌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작화가 서툴거나 느린 만화가의 그림 작업도 겸하며 수입 좋은 잘나가는 만화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59년 세기극장에서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를 본 뒤 그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림1)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의 한 장면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의 흥행을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방학시즌을 노리고 대거 제작된다. 그는 박영일의 애니메이션 영화 <손오공>(1968)과 <황금철인>(1968), <보물섬>(1969) 및 TBC 방송 애니메이션 <황금박쥐>(1968)의 원화 및 동화가로 참여한다. 그는 1968년 최초의 단편 애니메이션인 <개미와 베짱이>(1961)를 만든 박영일을 감독으로 세기상사가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인 <손오공>에 처음 참여했다. 작화가들 모두 만화를 그린 경험이 없는 시각디자인과 출신이다보니 작업이 도안 그리듯 늦어졌다. 결국 손이 빠른 그가 하룻밤에 120장씩 그리며 작업을 진척시켰다. 심지어 밑그림 없이 셀에 곧바로 동작을 그려낼 정도로 그의 작업속도는 빨랐다. 기여도가 커지자 월급 6천 원이 8천 원으로 올랐다. (그림2) <손오공>(박영일, 1968) 포스터. 그는 이 작품에 동화작가로 참여했다. 그는 <손오공> 제작 중에 TBC 방송국의 제안으로 TV애니메이션 <황금박쥐> 작업에 참여한다. TBC 방송국이 동화부를 두고 일본만화의 하청작업을 시작했을 때이다. 하지만 1초에 8장을 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었고 일본에서 지시받은 그대로 작업해야 했기에 그로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 TBC에서는 월급 1만 3천 원을 받았지만 그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세 달 만에 나와 다시 <손오공> 제작 현장으로 돌아갔다. 이때는 월급으로 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만원이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림3) <황금박쥐>(1968년 TBC방영)의 한 장면 그는 세기상사 제작의 <손오공>, <황금철인>, <보물선>에 참여할 때 세기상사가 수입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 <걸리버 여행기>(1939) 등의 필름을 보고 실사영화와 비교, 분석했다.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 리듬을 고려해야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림4) 그가 작업한 애니메이션 광고의 한 장면 삼성제약 <판토> (그림5) 롯데 라면땅 <황금박쥐>편 그림이 빠르고 애니메이션 작업 경험이 있는 그에게는 곧 많은 기회가 생겼다. 애니메이션이 들어가는 광고와 문화영화 등의 작업과 연출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는 1970년대 초 보림영화사, 선진문화사에 입사해 방송 CF, 각종 타이틀백, 문화영화,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애니메이션을 맡아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 잘 맞지 않아 유현목 감독의 문화영화사인 유프로덕션으로 옮겨가 프리랜서로 일한다. 유프로덕션에서 때로 기록영화와 문화영화를 맡아 자율적으로 자기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청년 감독들이었던 김호선, 하길종, 홍파 등과 교류하며 실사영화에 대한 흐름을 익히게 된다. 하지만 주요수입은 광고 스토리보드였다. 최고의 광고기획사였던 제일기획, 한일기획의 감독들이 집까지 찾아와 스토리보드를 그려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는 인기 있는 작가였다. 감각있는 그의 스토리보드만이 광고주에게 쉽사리 통과되었기 때문이었다. 종합적으로 그는 이즈음 CF나 문화영화 한 편을 온전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즉, 스토리와 구성, 작화, 음악, 녹음까지 가능한 연출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 준비가 되었다. (광고경험으로 그는 편집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이런 감각은 빠른 속도감으로 탄생했다. 당시 극영화는 700커트 정도였는데 <태권브이>는 1200커트였고 예고편 3분짜리가 극영화 20분 분량의 커트 수였다.)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는 애니메이터 육성을 위한 키프로덕션을 용산에 만든다. 키프로덕션에서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통일전선에 대한 애니메이션을 수주받아 납품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제1땅굴이 발견되자 아이디어를 얻어 <똘이장군>의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의 지원을 받아 완성, 개봉시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1974년 박영일과 디즈니를 목표로 애니메이션 회사 서울프로덕션을 광화문에 설립한다. 우선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CF를 작업을 하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던 중 1975년 박영일 감독이 서거한다. 결국 그는 홀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도한다. 마침 TBC 방송에서 상영한 애니메이션 <마징가>가 일본만화인지 모른 채 어린들에게 인기를 끌고 완구가 마구 팔리는 등 애니메이터로서 경각심이 생겨나던 차였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화영화 라이센스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친분이 있던 유프로덕션을 찾아갔다. 유현목 감독은 지상학 작가의 시나리오 “마징가 태권”을 그에게 권했다. “마징가”라는 주인공 설정이 불쾌해 거절한 그는 제목부터 바꾸고 스토리도 지상학 작가과 함께 한 달간 새롭게 만들며 아이디어와 스토리를 글이 아닌 콘티로 풀어나갔다. 워낙 그림으로 생각하는 게 편하고 빨라 심지어 실제 작업에서도 원화 없이 바로 작화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로보트 태권 V>는 1976년 초 제작에 들어가 그해 7월 21일 개봉했다. (그림6) <로보트 태권 V> 얼굴 이미지 ‘태권 V’라는 설정은 ‘마징가에 대응할 우리 것을 뭘 하면 좋겠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탄생했다. 당시 태권도 액션 영화들이 등장하고 태권도가 군인들에게 국기로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주변의 반응 또한 ‘태권도라면 괜찮다. 제목이 좋다’ 였다. ‘태권 V’의 이미지는 사무실이 있던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힌트를 얻었다. 당시 모든 학교에 장군의 동상이 있을 정도로 군부정권은 정권의 정통성을 만들어내고자 무장 출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성웅화 작업에 열심히였다. 그래서 그는 국난의 영웅 중 최고로 칭송받는 이순신 장군에서 모티브를 따와 근엄하고 멋진 이미지를 태권브이에 심어줬다. (그림7,8) <로보트 태권 V> 중 훈이와 마사오의 대련장면 <로보트 태권 V> 대결장면도 월트 디즈니의 책을 참고해 <백설공주>의 ‘로토스코핑 기법’ 즉 실사영화로 찍은 뒤 화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왕호 도장 유단자들과 유승선이 선릉에서 대련하는 것을 16미리 카메라로 찍고 편집한 뒤 그대로 그려 훈과 마사오의 대련장면에 사용해 리얼한 연출 효과를 냈다. (그림9) <로보트 태권 V>의 캐릭터들 왼쪽부터 윤박사, 악당 카프박사, 훈이, 깡통로봇 철이, 카프박사가 만든 인조인간 메리, 영희 <로보트 태권 V>는 태권도를 하는 로보트 외에도 컴플렉스가 심한 ‘카프 박사’, 인간이 되고 싶은 안드로이드 ‘메리’, 엉뚱하지만 친근한 ‘깡통로봇 철이’ 등 캐릭터 하나하나가 굉장히 흥미롭다. 이중 ‘메리’는 매력과 연민을 지닌 복합적인 캐릭터였다. 당시 <6백만 불의 사나이>(1976년~1978년 TBC 방송), <소머즈>(1976년~1978년 MBC 방송) 같은 사이보그 캐릭터들이 인기를 끌어 ‘메리’라는 인조인간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예쁜 여자아이가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도덕적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선한 설정을 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케이스다. 깡통로봇 철이는 그가 어린시절 학교의 큰 주전자를 보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캐릭터를 재현한 결과물이다. (그림10,11) 안드로이드 메리와 깡통로봇 철이 <로보트 태권 V>의 음악은 최창권이 맡았는데 금관, 목관악기 편성을 잘해 음색이 깨끗하고 화려했다. 활기찬 주제곡 또한 인상적인데 태권브이 주제가는 최창권의 큰아들인 가수 최효섭이, 깡통로봇 주제는 작은아들이 불렀다. 효과는 김벌래가 담당했다. OST도 발매해 좋은 반응과 큰 수익을 얻었다. <로보트 태권 V>시리즈는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적을 북한을 의미하는 붉은 제국으로 설정하는 등 반공정신이 투철한 작가의 작품으로 인식시키려 했지만 <로보트 태권 V 제2탄 우주작전>에서 3분 20초 즉, 일주일의 작업분량을 삭제해야 했다. 일본 선수 마사오와 훈이 대결하는 장면에서 마사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데 장발이었다는 이유에서 삭제됐던 것이다. (그림12) <로보트 태권 V 제2탄 우주작전> 마사오의 머리길이가 보이는 장면이다. 애니메이션에서도 장발단속이 행해져 바람에 날리는 마사오의 장발이 삭제되었다. <로보트 태권V>는 극영화처럼 지방투자자의 투자금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CF 스토리보드로 직접 돈을 모아 대부분 자비로 제작했다. 처음에는 18,000매로 계획했다. 일본 TV만화영화가 30분에 4,000매가 들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많은 18,000매면 1시간 16분 정도를 유연한 동작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제작에 들어가자 32,000매가 필요했고 이 숫자는 작화 뿐 아니라 트레이싱, 컬러링, 셀까지 이어지다보니 각각의 재료비가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들게 되었다. 총제작비 4500만원 중 유현목 감독으로부터는 지방투자자에게 단매하고 받은 진행비 200만 원과 후반 작업비용을 제공받았다. 나머지 금액은 김청기 감독의 사비로 빚을 져서 해결했다. 당시 애니메이션 재료들이 고가였고 또 많이 부족했기에 셀은 군사용 항공 필름과 엑스레이 필름을 구해 물에 불린 후 하이타이로 닦아서 사용했다. 종이며 연필 모두 질이 안 좋아 마루펜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다. 포스터 칼라도 국산은 색을 배합하면 색감이 탁해지는 등 재료에서 오는 고통이 컸다. (그림13) <로보트 태권V> 신문 광고 (그림14) <로보트 태권V) 개봉일 대한극장 앞에 즐비한 관객들 (그림15) <로보트 태권V) 극장 매표소 앞 행렬과 매진표시 작품을 완성시켜 개봉할 때도 고통은 이어졌다. <로보트 태권V> 1탄은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극장의 횡포가 심했다. 표돌리기로 극장은 관객수를 줄였고 상영중단 커트라인이 1200명이었지만 개봉 21일이 되자 1800명이 들어도 간판을 내리게 했다. 현금으로 수입을 챙긴 극장은 제작사에 어음으로 대금을 줬다. 그가 최종적으로 얻은 수입은 유현목 감독과 서울흥행수입 절반을 나눈 것이 전부였고 유현목 감독은 서울흥행수입의 절반과 부산흥행 수입을 가져갔다. 결국 그는 빚을 다 갚지 못해 당시 1800만원 상당의 사당동 단독주택을 팔아야 했다. 극장의 횡포에 부당함을 느낀 그는 <로보트 태권 V> 3탄부터 극장이 아닌 시민회관에서 개봉하며 어린이 영화의 새로운 흥행 관행을 만들어냈다. (그림16) <똘이장군> 포스터 그는 <똘이장군>(김청기, 1979)에서 수익을 냈고 <로보트 태권V>로 얻은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키프로덕션 시절 기획했던 이 작품은 『정글북』과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소재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동아광고에서 대명해 제작했고 제작비의 일부는 지방 선판매로 해결했다. 개봉관 상영이 힘들어 서울 2번관 서너 개를 잡았는데 오히려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똘이’ 라는 이름은 <코주부> 김용환 선생의 <똘똘이의 모험>을 참고해서 지은 작명이다. (그림17) <혹성 로보트 썬더 A>(김청기, 1982) 포스터 그는 <똘이장군>의 흥행이 성공한 후 다시 로봇만화로 돌아온다. 로봇만화가 나오면 각종 완구들이 덩달아 인기였는데, 완구업체 ‘뽀빠이과학’은 <로보트 태권 V와 황금날개의 대결>(김청기, 1978)부터 완구를 만들어 수익을 보고 있었다. <혹성 로보트 썬더 A>(김청기, 1982)때부터 완구업체 ‘뽀빠이과학’은 독점 판매권을 얻고자 김청기 감독에게 제작비의 일부를 대고 판권을 사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완구 모델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할 때라 뽀빠이과학은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합체로봇을 가져와 “이런 모델로 영화를 만들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화되지 않는 모델일 경우에 한해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금씩 변형시켜 작품에 사용했다. 회사를 유지하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뽀빠이과학의 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뽀빠이과학은 제작비의 3분의 1 정도를 부담했다. (그림18) <초합금 로보트 쏠라 원투쓰리>(김청기, 1982) 포스터 (그림19) <로보트군단과 메카3>(김청기, 1985)의 한 장면 (그림20) <똘이와 제타 로봇>(김청기, 1985)의 한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합금 로보트 쏠라 원투쓰리>(김청기, 1982), <로보트군단과 메카3>(김청기, 1985)는 이름을 빼고 싶을 정도로 작가로서 자부심에 상처를 입힌 작품이었다. 하지만 흥행을 위해서는 그의 이름이 필요했다. <똘이와 제타 로봇>(김청기, 1985)도 뽀빠이과학에서 제공한 완구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그래도 어려운 시기를 만회시켜준 영화였다. 소인국의 ‘파라셀 공주’가 완구 비행기에서 뚜껑이 열고 등장하는 것이 당시 아이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슈퍼 태권V>(김청기, 1982)의 경우 합체는 뽀빠이과학의 요구대로 갔지만 캐릭터의 얼굴과 태권브이의 이미지는 벗어나지 않았다. 1980년대 들면서 태권브이 모델이 조금씩 변하는데 이 또한 완구업체의 영향이 있었다.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에서는 3단 변신합체로봇과 칼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뽀빠이과학과 연출자의 의견 차이로 태권브이의 얼굴이 완구와 애니메이션이 차이가 날 정도였다. (그림21)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의 한 장면 (그림22)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의 한 장면 훌쩍 커버린 깡통로봇과 미나 <84 태권브이>(1984)는 <로보트 태권 V>(1976)를 본 아이들이 성장해서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주인공인 훈이, 미나, 영희의 외모나 체형 또한 성장하고 분위기도 현대적으로 바뀌는 변화를 보여줬다. 하지만 <84 태권브이>의 흥행은 LA 올림픽과 문화생활의 변화 때문에 기대 이하의 실망을 안겨줬다. 자가용이 늘어 아이들과 교외로 이동하는 레저가 생겨났고 주차가 힘들었던 극장에는 발길이 뜸해졌다. 게다가 1980년대 컬러TV가 보급되어 화려한 원색의 어린이 만화가 연일 방송되었다. 어린이 영화가 퇴조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림23)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 포스터 어린이 영화의 퇴조라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새로운 도전으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로봇 영화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를 만들게 된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는 <황금날개>의 스토리를 각색해 만든 것이다. 순진하고 어벙한 주인공이 덤블링을 하면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에 디즈니의 <메리 포핀스>(1964)처럼 실사와 만화가 어우러지는 형식을 더해 만든 작품이었다. 마침 뽀빠이과학이 독수리가 로봇이 되는 우뢰매 완구를 가져왔는데 썩 괜찮았다. 하지만 실사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각각 따로 찍은 뒤 합성해야 했기에 제작비가 상당했다. 결국 뽀빠이 과학이 제작비 5천만을 투자해 제작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림24)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장면. 우뢰매가 악당 로봇 캉가를 공격하려는 장면 코메디언 심형래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다행히 덤블링이 가능해 <우뢰매>시리즈에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심형래를 주인공 ‘에스퍼맨’으로 설정하고 ‘데일리’ 또한 <로보트 태권 V>의 메리와 같이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가져갔다. 그는 이때도 만약 데일리가 지구인일 경우 검열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림25)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의 한 장면. 에스퍼맨 심형래와 데일리 천은경 <외계에서 온 우뢰매>(1986)가 흥행에 성공하자 그 수입과 <외계에서 온 우뢰매 2>(김청기, 1986)의 선판매금을 합쳐 잠실에 세를 얻고 3억을 들여 올림피아극장을 만들었다. 마침 소극장 붐이 일었을 때였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2>는 겨울방학시즌 개봉 때 올림피아 극장에서도 상영했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2>부터는 <스타워즈>를 모델로 특수촬영을 해보고자 애니메이션과 모형을 사용했다. (사진26) <외계에서 온 우뢰매 2>(김청기, 1986) 데일리 송금란과 에스퍼맨 심형래가 모형으로 된 우뢰매를 출동시키는 장면 그는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의 성공 후 성인 히어로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이오맨>(조명화·김청기, 1988)을 제작한다. 이 작품도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주인공을 <6백만 불의 사나이>나 <소머즈> 같은 사이보그로 그리고자 한 작품이었다. 홍콩, 태국 등지로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하는 등 평균제작비가 1억이던 시절 5억의 제작비를 투자한 대작이었다. (그림27) <바이오맨>(조명화·김청기, 1988) 홍보전단 <바이오맨>은 국도극장에서 개봉하기로 했으나 마침 개방화 물결 속에서 1988년부터 공산권 국가들의 작품이 대거 국내에 상영되고 화제를 모을 때였다. <바이오맨>은 갑작스럽게 중국영화에 밀려 국도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게 된다. 지방의 흥행사들은 서울 상영관의 개봉 이력과 선전물을 받아 흥행을 해야 했기에 궁여지책으로 어린이회관에서 <바이오맨>을 개봉하게 된다. 작품의 성격과 상영관이 전혀 맞지 않아 흥행은 요원했다. (그림28) 만화잡지 《월간 우뢰매》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의 흥행 속에서 1988년에는 잡지 《월간 우뢰매》를 창간한다. 본격 로봇 만화잡지였는데 어린이 대상 잡지여서 광고수입이 없었고 결국 적자를 보며 운영하다 18권까지 발매하고는 폐간한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국세청으로부터 잡지 90만 권의 판매에 대한 소득세가 부과된다. 당시 열악한 출판업계 관행상 영수증 처리가 미비해 제대로 된 비용 증빙을 할 수 없어 공제 없이 고스란히 세금을 내야만 했다. 그는 세금을 벌기 위해 비디오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당시 포화상태였던 비디오업계에 진입해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태권브이’의 아버지이자 한국 로봇애니메이션 영화의 창시자인 그는 1990년대 중반 안타깝게도 파산을 선언하고 낙향한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만으로 사업을 운영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이후 방송국과 주변인들의 요청으로 애니메이션 몇 편을 만들었고 1999년에는 영화사 ‘신씨네’ 신철 대표에게 <태권브이>의 저작권을 넘기고는 제작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림29) 2016년 ‘태권브이’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 ‘엉뚱산수화전’의 작품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며 조용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는 위기마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로보트 태권브이>와 <외계에서 온 우뢰매>라는 성공적인 시리즈를 만들어내 국내 애니메이션과 어린이 영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놓지 않고 있다.
R(문성근)과 J(강수연), 둘은 끊임없이 서울 시내를 배회한다. 1990년대 초중반 한국 사회와 영화계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이듬해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올림픽 이후에도 노동자와 학생들이 탄압받는 공안 정국은 계속되었고, 여당은 정권 재창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0년 1월 ‘3당 합당’을 깜짝 발표한다. ‘민주투사’ 김영삼이 평생을 싸워온 그들과 손잡은 것이었고, 결국 그는 1993년 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이라기보다 인위적인 결단에 의해, 즉 정치적 야합으로 인해 한국의 ‘이념의 시대’는 몰락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문화의 시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비의 시대’로 들어섰다(「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권」). 1990년대 초반 한국 소비문화의 핵심적인 이미지는 바로 자가용이다. 1992년 자동차 대수가 500만 대를 돌파하며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로 접어들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자동차 산업은 정경유착의 산물이었고, 할부 판매 그리고 이와 결합한 광고라는 ‘판촉’(마케팅을 당시 사용하던 용어로 표현하자면) 기술은 은행과 언론에도 호황을 안겨주었다. 1991년 4월 시인 유하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이듬해 4월 소설가 이순원이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내놓은 것은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소비문화와 한국식 자본주의를 예단한 것이었다.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10대가 부상한 것도 바로 이때다. TV의 트렌디 드라마와 그 스타들이 출연하는 광고는 대중문화를 소비문화에 밀착시키며, 우리의 일상 깊숙이 소비라는 감각을 안착시켰다. 현대 한국 사회의 자본 중심적 가치관과 그 양상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영화계도 변화의 기로에서 요동쳤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지만, 외화 직배로 상징되는 글로벌 기업의 시장 진입은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1989년 110편, 1990년 111편, 1991년 121편, 1992년 96편 제작된 한국영화는 1990년대 중반 들어 60편대로 제작편수가 줄었고, 한국영화의 상영 비중 역시 1990년 28.7%에서 1993년 15.4%로 준 이후 1990년대 내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할리우드 직배 영화가 보여준 흥행 파워는 시장 개방의 결과를 명백히 보여줬다. 상영 외화 중 직배의 비중은 15% 내외였지만, 동원 관객 수로 치면 50%를 훨씬 넘겼기 때문이다. 파라마운트와 유니버설이 합자한 비디오 회사 CIC가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고, 뒤이어 대기업들이 판권 경쟁에 뛰어들며 형성된 비디오 시장은 한국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관 흥행 외에도 수익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작자유화 조치로 생겨난 영화사들의 제작 기반이 되어준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다수의 프로덕션이 비디오용 에로티시즘영화에 몰두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1990년대 초 영화기획사의 영역이 만들어지고 이른바 ‘기획영화’가 등장한 것은 산업의 변화가 가져온 순기능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했고, 대통령 연례보고에 할리우드영화 < 쥬라기 공원 Jurassic Park >(스티븐 스필버그, 1993) 한 편이 벌어들인 수익이 자동차 150만 대의 판매 수익과 맞먹는다는 보고가 올라가면서, 영화는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비디오와 케이블TV 프로그램이라는 창구 효과(window effect)를 기대한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속속 진출하면서, ‘흥행업’으로 비하 받던 충무로 영화산업은 혁신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지방 흥행업자의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들던 방식에서, 조사기획을 거치고 대기업의 결제 라인을 통해 자금이 집행되는 제작 환경으로 바뀐 것이다. 이 흐름과 맞물린 것이 바로 ‘기획영화’라고 기록되는 제작 방식이다. 제작자유화 물결을 타고 1980년대 후반 영화판에 들어온 젊은 기획자들은 비디오 판권 형식으로 대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며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시작은, 1992년 신씨네의 기획으로 익영영화사가 지방배급업자와 삼성으로부터 제작비를 투자받아 만든 < 결혼이야기 >(김의석)다. 영화는 서울에서만 52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하며, 한국영화의 ‘산업’적 모델을 만들었다. 현대 한국영화의 특질을 특유의 완성도 높은 상업영화로 정의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영화가 출발점일 것이다. 산업으로서의 성장이 길을 넓히면서, 한국영화의 미학도 확장되어갔다. 1990년대를 작가주의 감독의 시대로 명명하는 이유인 것이다. 바로 직전인 1980년대 말 ‘코리안 뉴웨이브’의 작가주의 감독군과 ‘장산곶매’ 등 독립영화 진영의 장편 극영화 활동이 있었고, 특히 장선우 는 이후 작가주의 감독들의 미적 터전을 마련하며 홍상수 , 이창동 등의 작업을 예고했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 작업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이후의 작가주의 영화를 연결한 가장 핵심적인 흐름이었다. 장선우 감독 도발적 화두와 거침없는 실험, 가장 논쟁적인 감독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선우는 197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진학해 1976년 시위 주도의 여파로 방위병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민중문화운동의 최선전에서 활동했다. 영화판으로 발을 옮긴 것은, 1980년 복학 후 민주화운동에 합류했다가 6개월간의 징역을 살고 나서였다. 이효인 교수와 한 인터뷰(「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에 따르면, 합법적이고 생활이 되는 예술을 하고 싶었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영화예술로 표현해야 한다는 판단 역시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다. 1980년 11월 이장호 의 < 바람불어 좋은 날 >을 관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장선우는 이장호 감독의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1981)의 각본(크레디트: 장민승 )과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한 후,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며 영화평과 시나리오를 썼다. 이장호 연출부의 조감독이던 선우완 과 같이 < 서울황제(원제: 서울예수) >(1986)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검열의 수모 끝에 극장 개봉에도 실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둘은 <MBC 베스트셀러극장>에서 작가와 PD로 호흡을 맞추며 영화 복귀를 준비했다. 장선우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 성공시대 >(1988)다. 자본주의 사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며, 그의 이름을 충무로에 각인했다. 그가 비평적으로 주목받는 지점은 영화적 화두와 미학적 스타일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영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우묵배미의 사랑 >(1990)과 하일지의 소설을 영화화한 < 경마장 가는 길 >(1991)에서는, 사회에 대해 직접 발언하는 것에서 한발 물러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환했다. 전자는 서울 근교 하층 계급의 삶을 해학과 연민 어린 시선을 통해 보여주며 ‘묘사의 진실성’을 화두로 삼았고, 후자는 지식인 계층의 허약한 내면을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포착하며 ‘주관적 객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후 < 화엄경 >(1993)으로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도 인정받았고, 1995년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씻김>을 거쳐, 1996년 최윤의 원작을 영화화한 < 꽃잎 >을 내놓으며 광주항쟁을 대중예술 매체인 영화로 표현하겠다는 그의 목표를 이루게 된다. 한국의 영화 문화가 폭발하던 1990년대 중반, 이 영화는 비평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하며, 충무로의 상업영화를 통해 처음 광주를 환기시켰다는 작품의 가치를 배가했다. 한편 그는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994년 성을 전면에 내세운 장정일 원작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로 흥행과 화제의 중심에 선 후, 1997년에는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문제작 < 나쁜 영화 >를 디지털 질감으로 선보였다. 세기말에는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 거짓말 >(1999)을 내놓으며 한국 사회의 오래된 논쟁거리인 창작물의 표현 수위 문제를 부각했다. 당시 장정일의 소설은 음란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장선우의 영화는 무혐의 처분과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성냥팔이 소녀」를 모티프로 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을 연출했으나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차가운 평가를 받았고, 현재 시점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지식인 남자 R의 비루한 현실 영화는 공항을 나서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R( 문성근 )이 돌아왔다는 ‘누군가’(실은 감독의 목소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5년 만에 돌아온 R은 파리에서 동거한 J( 강수연 )와 재회한다. 하지만 J는 한국과 프랑스는 다르다는 석연찮은 말로 R과 섹스하기를 거부하고, 화가 난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간다. R은 오랜만에 아내( 김보연 )와 자식들을 만나지만 이미 이혼을 통보한 탓에 전혀 반갑지 않다. R은 오로지 J와 섹스하기만 갈망한다.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그녀를 만나 다방과 식당을 전전하며 관계를 요구하지만, 여관행은 번번이 거부당한다. 한편 대구의 집에 내려가면 아내는 이혼을 거부한다. R은 자신이 써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J가 자신이 써준 글로 문학비평가로 데뷔한 사실을 알고, 또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며 그를 떠나려고까지 하자 극도의 배신감을 느낀다. 하지만 R은 좀처럼 J를 떠나지 못하고, 되레 한국을 떠나 같이 프랑스로 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J는 끝내 R을 거부한다. 영화의 중심 인물은 지식인 남자 R이다. 그는 프랑스라는 1세계와 한국이라는 3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인데, 특히 3세계에 처한 그의 비루한 현실은 대구의 가난한 고향집을 통해 그려진다. R은 J를 만날 때마다 프랑스를 떠올리며 “우리 모처럼 산책이나 할까”라고 제안하지만,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걷는 건 산책이 아니라 노동일 뿐이라고 대꾸한다. R은,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 동거한 서울의 J 혹은 그녀와의 섹스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J는 계속 R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그는 (한동안 회자된 대사인) “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라며 지식인의 허세를 노출한다. 그는 그녀를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하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섹스를 거부한다. R의 추궁에 J가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고백을 하자 그의 비참함과 지질함은 극에 달한다. R은 J에게, 결혼할 남자에게 프랑스에서 3년 반 동안 동거한 이야기를 했느냐며 “그런 소릴 하면 너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그 사람은 충격을 받을 것이고 그 고통 때문에 바람을 피우게 되고 끝내는 파탄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R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말이기도 한데,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 사유로 나를 키워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지만, 실은 아내의 혼전 남자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J가 R의 글을 문예지에 내서 당선되었다고 사실을 털어놓은 후, 그의 요구는 애걸과 협박 사이에서 후자로 무게를 옮긴다. 급기야 R은 J에게, 자신의 글로 문학박사가 되고 문학평론가가 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재판을 걸겠다는 것이다. 결국 섹스는 하게 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에도 둘의 지난한 만남은 계속된다. J가 R이 아닌 결혼할 남자를 택하겠다고 말하자, 이제 그는 J에게 한국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3,0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한다. 둘은 또 관계를 가지지만 결국 J는 R을 떠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갈 곳을 잃은 R이 시외버스를 타고 우유를 마시려 하다, 시골 아낙들이 있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우유를 흘리는 장면이다. 장선우가 “일종의 경련처럼 찾아온 깨달음”이라고 표현한 이 장면은, 한국영화사의 가장 불가해한 상징 중 하나일 것이다. 도대체 R은 불현듯 무엇을 깨닫고 메모하는 것일까. R(문성근)과 그의 아내(김보연) 카메라와 합일하는 남자 R 이 영화는 완결된 이야기를 목표로 하지 않고, R과 J, 두 남녀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에 치중한다. 영화의 초반부 R이 J에게 대전까지 같이 가자고 할 때, 둘의 대사와 풍경을 잡는 숏들을 통해 당시의 한국 사회에 대한 발언이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서울은 이제 차가 많아지고 올림픽대로가 생기는 등 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는 J의 말과 함께 보이는 자동차 광고판이 그것이다. 또 십자가 가득한 서울 도심의 야경을 보여주는 숏 다음에 마치 유럽의 공동묘지 같다고 말하는 R의 대사가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원래의 목적대로 곧바로 둘의 관계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줄곧 자동차 안, 다방과 여관방의 R과 J를 포착하며, 지식인 남녀의 내면을 해부라도 하려는 듯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장병원의 지적처럼, “그럴듯한 이야기의 창출보다 현실의 표면을 기록하는 것”에 치중하는 이 영화의 목적은, 분명 이후 홍상수의 작업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는 R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누군가’(나)의 내레이션으로 열고 닫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프랑스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R이다. 장선우 역시 포착했듯, 하일지의 원작 소설은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3인칭을 탈피해 나라는 존재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R이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한편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3인칭 주인공의 시점을 합치는 방식으로 감독이 목적한 ‘주관적 객관성’을 실험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절대적인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주관적인 관찰자를 벗어난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R이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확인할 수 있다. R의 주관적 시점으로 마중 나온 환영 인파가 보이지만, 카메라가 옆으로 회전하면서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전환해 R을 잡는 식이다. 또 R을 포착하던 카메라가 즉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R의 주관적 시점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R이 지나가는 사람이나 들려오는 소리에 관심을 가지면 카메라 역시 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다. R이 다방에서 껌을 사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점으로 시작된 숏이 껌 파는 여성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의 주관적 시점으로도 활용된다. 또 J와 만난 다방 장면에서, R을 비추던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따라 다방의 어항을 비추다가 다시 돌아오면 카메라의 숏이 되는 식이다. 하지만 다음 숏이 J를 향한 그의 시점 숏이라는 점에서 숏의 논리는 한층 복잡해진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1인칭 화자가 날짜를 혼동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시간은 순전히 R의 주관적 감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카메라와 R의 주관적 시점이 합쳐지는 숏 운용은, 객관적 진실을 거부하는 감독의 태도를 지지하는 동시에 시간의 모호성을 탁월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1990년대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 ‘코리안 뉴웨이브’ 작업은 1990년대에도 진가를 발휘했다. 장선우의 영화는 물론이고, 박광수 의 < 그 섬에 가고 싶다 >(1993),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95), 정지영 의 < 하얀전쟁 >(1992), <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1994), 이명세 의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1990), < 첫사랑 >(1993) 등이 작가주의 미학과 대중적 감각 사이의 균형점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임권택 은 < 서편제 >(1993)의 흥행 성공으로 국민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1996년과 1997년은 2000년대 해외 영화제를 통해 인정받은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 김기덕 , 이창동이 각각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 악어 > (1997), < 초록물고기 >(1997)로 데뷔한 해다. 특히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과 연출부에 참여하며 영화계에 입문한 이창동은, 소설가 출신다운 이야기꾼으로서의 내공에 영화 매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결합하며 작가주의 감독으로서 신중한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