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장검
- 감독
- 신영일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김희라, 명희, 이순재, 문오장, 윤영지, 김동원, 장훈, 최창호, 박동룡, 황건, 전호진, 임예심, 박예숙, 안숙, 조학자, 김용학, 박달, 김수천, 권일정, 김신명, 이정애, 정규영, 김승남, 김대현, 안창훈, 최재호, 손전, 김지영, 심상현, 마도식, 김경오, 최석, 최무웅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한국 여자감독이 된 황혜미 는 1970년대 유일하게 활동했던 여성감독이었다. 홍일점 영화감독 자체로도 유명했지만, 더욱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었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 아름다운 생존 >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있었을 뿐 소르본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느를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되었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라고 등록만 해놓고 수업을 거의 불참했고 대신 하루에 3편을 볼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관에 다녔다고 술회한다. 1) 인터뷰에서는 그 당시 <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 >(1959) 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본 추억을 생생히 기억해내고 있다. 황혜미는 어릴 때부터 이미 영화광이었는데 중학교 2-3학년이었던 부산 피난시절부터 미성년자 입장불가의 극장을 출입하는데 능숙했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억나는 영화로 <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이나 < 망향(Pepe Le Moko) (>(1937)을 몰래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부터 유럽영화에 깊이 심취해있었으며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유럽 모더니즘 영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혜미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전후 세대로 규정하면서 성장과정에서 카뮈나 사르트르에 영향받았고 헤르만 헤세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특히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푸도프킨의 서적을 중요하게 참조했음을 밝혔다. 2) 첫 경험 미국에서 돌아와 김승옥 의 소설을 읽고 매료되었던 황혜미는 남편 김동수 의 도움으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 안개 >(1967)의 감독을 맡기 위해서 소공동의 사무실에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였던 제작자 김동수와 황혜미 커플을 만났고 그 자리에는 당시 신문에 열정적으로 글을 쓰던 이어령도 참석하고 있었다. 3) 태창흥업의 대명제작을 하는 프로듀서로 황혜미는 <안개>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녀의 표현처럼 ‘처음이라서 재미있으니까 일일이’ ‘로케이션 헌팅까지 쫓아다니’면서 완성한 영화였다.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밀어붙여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하였고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황혜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예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획득한 2편의 외화수입권은 영화계의 초짜였던 황혜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4) 차기작으로 < 감자 >(1968)를 선택했고 김승옥에게 감독을 맡겼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검열에 시달렸던 <감자>는 원래 기획의도와 멀어지면서 흥행에도 실패하였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겪은 후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는 1970년 마벨코리아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첫 작품으로 황혜미 각본, 감독의 < 첫경험 >(1970)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말 영화사는 보한산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첫경험>은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영화예술』에서 선정한 1970년 베스트 영화 4위에 올랐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황혜미는 신인상을 받았고 흥행 역시 무난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을 황혜미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영화의 시장조사 및 수출-입 문제에 관한 현지답사”를 위해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황혜미에게 이러한 성공을 안겨준 영화 <첫경험>은 중년을 바라보는 부부인 기준( 남궁원 )과 지숙( 김지미 )은 권태로운 일상을 다룬다. 5) 부산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기준은 대학자퇴생 인애( 윤정희 )와 만나게 되고 밀회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를 눈치 챈 지숙은 방황하게 되고 탈선을 시도한다. 그러자 인애가 기준과의 지난날을 소중한 첫경험으로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의 가정은 파탄직전에서 구출된다. 당시 유행하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평범할 수 있으나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 그리고 탈선 및 좌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다. 슬픈 꽃잎이 질 때 이후로 황혜미는 < 슬픈 꽃잎이 질 때 >(1971)와 < 관계 >(1972)를 연이어 제작, 각본, 감독한다. 황혜미가 사업차 3개월의 외유 끝에 돌아와서 집필한 작품인 <슬픈 꽃잎이 질 때>는 고아인 서은희( 문희 )가 수녀님의 소개로 부호인 엄상훈(남궁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상훈은 이름난 바람둥이 홀아비이고 방치 속에 자라는 두 자녀는 개구쟁이들이다. 은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아이들과 친해진다. 이 과정에서 점차 상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전부인의 가족이 벌인 흉계에 휘말린다. 결국 상훈과 은희는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게 되지만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은희는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및 등장인물들의 구도는 < 제인에어 (Jane Eyre)>(1944)와 <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1965)의 구조를 차용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크게 실패하였다.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관계 세 번째 작품인 <관계>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 < 졸업(The Graduate) >(1967)을 패러디한 것인데 원래의 설정에서 남녀를 변경한 영화이다. 홀어머니( 김신재 )와 살고있는 인애( 박지영 )은 근무하는 회사의 전무 기택( 남궁원 )의 유혹에 몸을 버리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이를 알게된 어머니는 충격으로 숨진다. 여행사에 취직한 인애는 손님인 준호( 신영일 )의 적극적 구애로 사귀게 되고 준호의 부모님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기택임을 알게되고 결혼을 피하게 된다. 힘들어하는 준호에게 기택은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인애는 자살을 기도하나 준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된다. 너무 힘들어하는 준호를 보던 준호의 어머니( 문정숙 )은 사실 준호가 기택의 자식이 아님을 밝힌다. 진실을 알게 된 기택은 깊은 참회에 괴로워하고 인애는 병실에서 나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지만 준호는 차를 몰고 와서 버스를 막아서며 인애와 재회한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성역할을 변경시켰을 때 그 이야기는 당시 흔한 불륜의 소재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과 결국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준호와 인애가 맺어질 수 있다는 결론은 한 신문평의 언급처럼 “<졸업>의 경우 기존윤리를 정면에서 초극하려했던데 비하면 <관계>는 끝내 한국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6) 현재 황혜미가 감독한 이 세 영화 모두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인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재는 안타깝다. 이 한계는 황혜미의 문제의식과 그 영화들이 가지는 당대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와 당대의 평가들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조망해볼 때 우리는 당시 남성감독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감성 혹은 윤리적 길항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황혜미가 감독으로 활발하게 작업했던 1970년대 초반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경험>이 상영된 해인 1970년을 평가하면서 이영일 은 해당년도 영화계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하나는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로 떠오른 < 미워도 다시한번 >류의 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확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7)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1,2,3편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197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의 주류서사가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항상 ‘한 남자의 비틀거리는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와 다른 하나의 동거여인 사이에 ...끝없는 자기희생’을 반복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8) 반면 이러한 보수적 이데올로기 반대편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을 그린 성 주제 영화들이 존재했다. 이영일은 <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1960) 나 < 페드라(Phaedra) >(1962) 처럼 파격적인 윤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성을 타부시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성을 주제로 한 이 영화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체제적인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9) 황혜미의 <첫경험>은 위의 두 경향이 기묘하게 길항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는 불륜의 소재를 차용하지만, 불륜으로 인한 신파적 희생은 부재하다. 더구나 불륜 자체는 등장인물들에게 기성의 사회가 가지는 틀에 박힌 질서나 윤리의식을 벗어나는 상황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불륜이 무겁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은 별다른 윤리적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된다. 그들이 느끼는 탈선의 근거는 징후적으로 소품이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거나 간결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설명이 결여된 채 이미지의 단상들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권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평론가들이 호평하였던 영화의 도입부인 기준과 지숙의 섹스 장면은 “차가운 금속성의 탁상시계 소리를 에펙트로 넣고 그 속에서 부부의 냉각된 섹스”를 보여줌으로써 “부부의 성 자체가 이미 단순한 생활 속의 반복으로 리듬같은 일상으로 변했음”을 드러낸다. 10) 인애 역시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에서 막 벗어난 젊은 여성으로 둘은 부산이라는 비일상적 휴양지에서 해방 혹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에 쉽게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영화들에서 섹스와 불륜은 엄중한 도덕적 문제였다. 성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결혼을 전제로 하는 약속된 행위여야만 했고, 남성의 기만에 속아서 순결을 지키지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첫경험>에서 섹스는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둘의 밀회는 계속되고 눈치를 챈 지숙은 배반감에 탈선을 시도한다. 기준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인애 역시 유부남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무게감이 점점 힘들어진다. 지숙의 탈선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되고 인애는 담담하게 기준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일상은 봉합된다. 게다가 ‘첫경험’을 한 인애가 파멸을 한다는 암시도 없다. 영화는 치정이나 불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정적 격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일상성을 강조하며 영상언어를 통해 그 감성들을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공허함을 느낀 지숙이 아들이 동물원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거대한 코끼리와 대조되는 지숙의 왜소함을 이미지화함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이 느끼는 위축감을 드러내거나 기준과 인애의 이별 장면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외부에 있는 남성과 내부의 젊은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젊은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각각 속해있는 세대 차이를 강조하는 장면 등 11) 은 어떠한 발화적인 설명 없이 결국 각자의 벗어나려했던 기존의 틀로 돌아가는 행위의 당위성을 납득시켜준다. 12) <첫경험>의 불륜을 보는 여성적 시선이나 <관계>가 드러내는 한 여성을 둘러싼 부자관계의 비윤리성은 한국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황혜미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안도할만한 결론을 내면서 그 저항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무뎌지는 저항의 감각이 그녀 본래의 윤리의식의 한계인지 상업성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 압박이 아니었다면 황혜미는 더 강하게 도전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개>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던 1967년 9월, 그녀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밑지는 일이 싫어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13) 아이러니 하게도 <안개>는 황혜미가 관여한 영화 중 가장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을 했다. 그러나 <첫경험>과 이후 작품을 통해 작가적 의식과 상업성은 점차 균형을 잃었다.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녀가 가진 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감각, 그리고 1970년대라는 현실상황은 매끄럽게 조화되지 못했다. 황혜미는 세 편을 끝으로 영화활동을 접었으며 몸담고 있던 보한산업주식회사 역시 1973년 이후에는 제작을 중단했다. 1)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8면. 2) 이 글에서 주가 없는 황혜미의 소회나 발언 및 인용문은 모두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2001)에서 채록한 것이다. 3) 김수용, 『나의 사랑 시네마』, 시네21, 2005. 105쪽. 여타 자료나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을 참조하면 이어령은 시나리오의 감수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 황혜미, 「연패 끝에 <첫경험>의 메가폰」, 『여성동아』 1970년 12월호, 179쪽. 5) 기준이라는 이름은 <안개>의 남주인공 이름과 동일하다. 그 연결점을 의도적으로 설졍한 것으로 보인다. 6) 「타협으로 끝난 애정모럴의 갈등- <관계>」, 동아일보 1972.4.25.8면. 7) 이영일, 「마비와 혼미의 시대」, 『영화예술』 1970년 12월호, 32-36쪽. 8) 이영일, 위의 글, 34쪽. 9) 이영일, 위의 글, 35쪽. 10) 이서림, 「참신한 영화감각의 가작」, 『영화예술』. 1971년 1월호, 72쪽. 11) 「<첫경험>, 처녀의 불장난을 영상화」, 동아일보, 1970.11.28. 5면. 12) 이러한 서사구조와 영상미의 성취는 당시 프랑스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1966)와 <파리의 정사>(Vivre Pour Vivre, 1967)의 표절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3)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 8면. 황혜미 감독
‘청춘대로망’ <청춘극장> 1) <청춘극장>은 김내성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김내성의 『청춘극장』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3년에 걸쳐 5권으로 출간되어 당대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 1990년대까지도 역대 가장 재미있는 대중소설 중 하나로 회자되었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이 소설은 영화화만 세 번 되었는데, 2) 세 편의 영화 또한 모두 크게 흥행했다. 한편 영화 <청춘극장>은 공모를 통해 주연 여배우를 발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와 1970~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주역이었던 윤정희와 정윤희가 각각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을 통해 데뷔하였다. 영화 <청춘극장>은 1959년, 1967년, 1975년에 제작되었다. 원작소설은 1939년 2월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 8월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1939년 2월부터 1943년까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는 1967년과 1975년 영화이고,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1959년 영화가 성공했기에 이후 영화들이 리메이크될 수 있었음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시대 배경 설정은 1959년 영화에서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원작의 비극적 결말이다. 원작에서는 해방과 함께 귀환한 주인공 백영민이 결국 자살하고 만다. 영화에서는 해방 전인 1943년 시점에서 마무리함으로써 해방을 희망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고 원작의 부담스러운 결말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화 <청춘극장>은 원작이 보여준 해방기의 비극성은 은닉한 채 식민지시기를 배경으로 청춘의 사랑과 모험을 집약한 ‘청춘대로망’이 되었다. 이 영화의 서사는 크게 로맨스와 청년들의 모험으로 구성된다. 우선 로맨스는 지주의 아들로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다니는 ‘백영민’과 그의 고향집에 있는 정혼자 ‘운옥’, 그리고 백영민이 일본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유경’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진다. 청년들의 모험은 전문학교 동창생 관계인 삼총사, 즉 법관을 꿈꾸는 ‘백영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장일수’, 문학청년 ‘신성호’의 역정을 통해 전개된다. 여기에 삼총사의 동창이면서 친일파로 살아가는 ‘최달근’과, 백영민을 짝사랑하는 기생 ‘춘심’, 그의 오빠이자 운옥을 노리는 밀정 ‘준길’, 그리고 백영민의 은사이면서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태평양전쟁 막판에 참전하는 일본인 지식인 ‘야마모토’ 등이 이야기를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인물들이 조선, 일본, 중국에 걸쳐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이 영화는 백영민을 가운데 둔 두 여성과 두 청년의 파란만장한 청춘을 보여준다. 1975년 <청춘극장>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러한 영화의 정체성을 집약해준다. 장일수 군의 예언대로 우리는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전쟁의 불길 속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중국에 걸쳐서 펼쳐졌던 우리들의 청춘대로망도 일단 그 막을 내렸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되어 대륙으로는 길이 끊긴 채 실질적으로는 섬이 되어 버린 남한에서 광활한 땅, 즉 한반도, 일본열도, 중국에 걸친 사랑과 모험의 세계는 그것이 비록 식민지 시기라 하더라도 낭만적인 상상계로 구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대중의 호응은 이 영화가 보여준 상상계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했다. (그림 1) (그림 2) (그림 3) 위쪽부터 1959년,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의 포스터. 1959년 영화에서는 김진규, 황정순, 김지미가, 1967년 영화에서는 신성일, 고은아, 윤정희가, 1975년 영화에서는 신영일, 김창숙, 정윤희가 각각 백영민, 허운옥, 오유경 역을 맡았다. 세 편의 <청춘극장>은 낭만적이고 파란만장한 서사에서 주인공을 맡은 스타들의 면모와 그에 따른 각 편의 변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이러한 흥미로움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가 8년에 한번 꼴로 제작되면서 달라지는 검열제도의 적용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에 동일한 원작, 유사한 서사로 리메이크된 세 편의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를 비교해보면 각 시기 검열의 변화가 한눈에 포착된다.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현전하지 않으나 다행히 검열서류는 남아있어서 이러한 고찰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1959년 <청춘극장>(홍성기)과 왜색의 문제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서류에는 상영허가신청서, 작자승낙서, 작곡자승낙서, 검열위원위촉의 건, 검열의견서, 그리고 대본이 첨부되어 있다. 사전 시나리오 검열이 명문화되어 체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1966년 제2차 영화법 개정부터이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않았을 뿐 시나리오 검열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기 검열은 문교부에서 주관하였으며 검열위원으로는 내무부 치안국장, 서울지방 검찰청, 국방부 정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이 위촉되었다. 검열의 주관 부처와 참여 기관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기본적으로 치안, 교육, 안보에 관련된 기관은 계속 검열에 개입하게 된다.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59년 3월1일에 문교부에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했고, 3월2일에 검열위원이 위촉되었다. 위촉된 각 기관의 검열위원들은 문교부 검열실에 모여 검열 회의를 진행하고 각 기관별로 검열의견서를 따로 작성하였는데. 검열의견서는 3월2일부터 3월4일 사이에 제출되었다. 그리고 <청춘극장>은 3월4일에 바로 상영이 ‘무제한 허가’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승만 정부에서 승인한 ‘무제한 허가’는 무효가 된 것으로 보인다. 3년 후인 1962년 2월22일에 <청춘극장>의 재상영허가신청서가 공보부에 제출되고, 3월20일에 재상영허가 결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허가기간은 1962년 3월20일부터 1963년 3월19일까지 1년간이었다. 이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국립영화제작소 3) 에서 제작한 문화영화 <국토방위 이상 없다>가 재상영허가의 조건으로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 4)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위원 위촉의 건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의 건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은 왜색의 문제였다. [그림 5]를 보면 검열자들이 이 영화를 “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이라고 요약하여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화면 중 일본복색에 관하여는 국정회의에서 논의하였고 차관님께 보고하였음.”이라는 참고 사항을 말미에 달고 있다. 식민지시기를 재현하는 영화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일본복색’이 국정회의에서까지 논의되었다는 기록은 당시 ‘왜색’ 문제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대하게 취급되었는가를 말해준다. 해방 이후 ‘일본’과 관련된 남한의 정책은 1960년 4.19와 1965년 한일수교, 그리고 1972년 유신헌법 공포를 기점으로 변화한다. 4.19 직후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한일 문화교류에 대한 기대 심리 속에서 식민지 경험에 대한 접근이나 일본에 대한 재현이 잠시나마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현해탄은 알고 있다>(김기영, 1961)이다. 이 영화에서는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이 일본 여성을 사랑하면서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먹으며 일본의 전통 음악과 춤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비하면 1959년 <청춘극장>은 불과 1년 전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왜색에 대한 비교적 자유로운 재현은 1965년 한일협정 이전까지만 허용된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왜색’에 대한 검열이 오히려 강화되는데 이는 반공주의 강화와 연관된다. 한일수교로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 유치에 성공한 박정희 정부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강화한다. 그리고 영화계에도 ‘반공영화에 대한 포상’이라는 당근과 ‘용공에 대한 엄격한 제재’라는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정책을 편다. 1965년을 전후로 하여 일본은 북송선 문제로 남북한의 대결을 격화시키는 데 매개가 된 국가였기 때문에 한일수교가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반공주의 차원에서 볼 때 용공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은 영화에서 재현하기에 껄끄러운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재현이 한일수교 이후에 오히려 과거 식민지 시대로 집중되고 일본이 ‘적’과 ‘악’으로만 재현되며 북한과 유사한 표상을 지니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1) <청춘극장>에 대한 정보와 분석은 졸고, 「남한영화에 나타난 태평양전쟁의 표상」, 『한국극예술연구』 44집, 한국극예술학회, 2014, 123-130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청춘극장>은 KBS 22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1993년 10월23일~1994년 1월2일에 방송되기도 했다. 3) 국립영화제작소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에 공보처에 설치되어 뉴스, 기록영화, 문화영화 등을 만드는 부서로 존속했다. 그런데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에 개정된 정부조직법 규정에 따라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홍보 및 선전을 위한 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하게 된다.
< 삼국대협 > 신문광고 다소 장황하긴 하지만 먼저 약간의 회고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때 몹시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1972년 가을. < 삼국대협 >이라는 영화 앞에서 보기도 전에 마음껏 비웃고 경멸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홍콩 쇼 브라더즈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이제 막 중학생이었던 소년은 호금전의 < 용문의 결투 >를 시작으로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 돌아온 외팔이 >,그리고 < 심야의 결투 >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삼국대협>의 신문광고를 노려보듯이 쳐다보았다. “最後의 勝者는 누구냐! 映畵史上 類例없는 殘酷! 激情! 興趣! 의 크라이막스!! 中國의 외팔이, 日本의 盲俠, 韓國의 一枝梅가 한꺼번에 나온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조건반사적으로 그해 여름에 본 < 외팔이와 맹협 >이 떠올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 나는 트랜스 내쇼널 시네마를 알지 못했고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영화적 개념 자체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그저 이건 쇼 브라더즈 ‘짝퉁’을 다시 ‘짝퉁’으로 한 번 더 버전 ‘다운(!)’시킨 것이라는 생각에 분노를 거의 참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때 나는 막 열 살이 넘었을 뿐이다. 용돈은 충분하지 않았고 그래서 동네 극장에서 상영하기를 기다렸다. 오랜 교훈. (보기도 전에) 일단 적의가 생기면 영화는 어떤 장점에도 모두 눈이 멀어버리는 법이다. 물론 나는 이 자리에서 <삼국대협>이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보고 난 다음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에 빠졌다. <삼국대협>은 영화 자체가 몹시 불쾌하다는 어떤 긴장의 유지랄까,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 단지 이 영화가 형편없어, 라거나 나는 이 영화가 싫어,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내팽개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그 무언가의 방해에 맞닥트린 것만 같은, 그런 기묘한 거부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나는 그걸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어떤 장면이, 이를테면 과도하게 폭력적이거나 혹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성적인 순간들이 돌발적으로 분출하는, 말하자면 그런 이미지나 쇼트, 혹은 대사가 문제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받아들이기 힘든 심리적인 관계가 설정되었거나 숨겨져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건 내가 미처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삼국대협>은 (그것이 부정적이었다 할지라도) 내게 하나의 에너지로 등록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나는 그것을 영화를 보면서 셈을 하는 항수(恒數)로 등록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어떤 상처를 받았다. 잘못으로서의 세계. 속임수와 그 무언가 그 사이에 숨어버린 어떤 방법.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방법이다. 두 번째 만남은 이상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 삼국대협 >이 임권택 의 영화라는 사실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은 시절에 보았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게다가 임권택의 영화들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 잡초 >조차 찍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1987년 그해 겨울, 임권택 감독님과 인터뷰를 위해서 작품 목록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거의 난데없이 이 영화 제목과 다시 마주쳤을 때 망연자실하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나의 심정을 한 번 상상해주기 바란다. 순서대로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결국 이 영화에 대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다.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다음 “내가 그런 영화도 찍었어요?” 라고 반문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정리한 줄 알고 다시 작품 목록을 찾아보았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일일이 신문광고를 찾아보아야만 했다. 물론 <삼국대협> 신문광고에는 ‘監督 林權澤’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확인을 하고 다시 질문을 했을 때 한참을 들어보시더니 “전혀 기억이 안 나요”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이 질문은 거기서 끝났다. 정말 기억이 안 나시는 건지 아니면 기억을 안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1972년 그해에 임권택은 ( 변장호 , 최인현 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 명동 잔혹사 >와 <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 >, 그리고 <삼국대협> 세 편을 찍었다. 한 가지 더. 다소 의미심장하게 <삼국대협>은 임권택의 마지막 무국적 무협활극영화이다. 그는 < 장군의 아들 >로 ‘다찌마와리’ 장르에 돌아온 적은 있지만 두 번 다시 무협활극을 찍지 않았다. 그런 다음 2013년 부산영화제에서 다시 한 번 임권택 전작전을 (2010년 영상자료원 회고전에 이어 두 번째로) 하면서 이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삼국대협>을 포함시켰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B무비의 열렬한 팬이자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던)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 감독인 샤를 테송은 뉴 커런츠 심사를 하는 바쁜 와중에도 달려와서 이 영화를 본 다음 앉아서 해설까지 듣더니 내게 기쁘게 악수를 청했다. 샤를 테송은 올리비에 아사이야와 함께 1984년 9월호 카이에 뒤 시네마 특집호 「홍콩 시네마」의 특집호를 만들었던 비평가이다. 아마 그는 토니 레인즈와 함께 홍콩영화에 매혹된 서방세계의 첫 번째 세대일 것이다. 이때 샤를 테송은 이미 소림사 영화의 계보를 썼으며, 쇼 브라더즈 영화사의 대표 런런쇼와 인터뷰를 했다. 물론 이 특집호에는 호금전과 장철의 인터뷰뿐만 아니라 (< 매트릭스 >가 등장하기 20년 전에) 무술감독 류가량과의 인터뷰와 무술 동작지도의 장면 분석(shot_by_shot)도 실려 있다. 말하자면 그는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의 존재를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 ‘찬바라’ 장르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는 비평가이다. 샤를 테송은 <삼국대협>을 본 다음 약간 흥분상태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This is so funny lovely treasure!”라고 약간 외치듯이 말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피하거나 아니면 자리를 떠나는 비교적 예의바른 프랑스 비평가이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그냥 맞받아치거나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자기의 반대 의견을 반드시 전해서 기어이 그 자리를 망쳐놓는다.) 나는 이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삼국대협>이 내 앞에서 걸작으로 둔갑한 것은 아니다. 그건 그의 견해이다. 내 관심은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본 다음 불쾌라는 기분, 너무 사소하게 느껴져서 이론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대답하고 싶어졌다.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 돌아온 외팔이 > 포스터 22번째 ‘자토이치’ 연작 <신 자토이치, 물리쳐라! 당나라에서 온 검객> 다소 어색하더라도 먼저 < 삼국대협 >에 이르는 과정을 약간 추리소설처럼 생각해보자. 물론 가장 앞에 있었던 영화는 홍콩 무협활극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와 < 돌아온 외팔이 >일 것이다. 장철과 왕우. 과도할 정도로 커다란 성공.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스타일. 고전주의적 규범들을 중단시킬 만큼의 어떤 단절감. 물론 이 장르를 열어놓은 사람은 < 용문의 결투 >의 호금전이었지만 장철은 그 방향을 완전히 틀어놓았다. 뭐랄까, 장철은 마치 이 장르에서 (제한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셀지오 레오네가 서부극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장르 안에서 반칙으로서의 자기 순환의 에너지. 두 편의 ‘독비도(獨臂刀)’는 홍콩영화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 안에서 법칙은 단순하게 영화 안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쇼 브라더즈는 일본 영화사들의 방식을 받아들였고 소속 영화인들을 월급제로 운영하였다. 왕우는 두 영화의 성공 이후 쇼 브라더즈를 떠났다. 우연의 일치. 쇼 브라더즈에서 경력을 쌓은 제작 프로듀서 레이먼드 쵸우(鄒文懷)도 마침 떠나서 새로운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를 세웠다. 레이먼드는 영화사의 핵심은 스타라고 생각했고 재빨리 왕우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골든 하베스트는 화어권 영화 극장 체인을 장악한 싱가폴 화교출신의 소씨(邵氏) 두 형제가 세운 쇼 브라더즈의 독과점 방식의 배급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했다. 중국 본토는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서방세계의 시장은 너무 멀었다. 아시아의 가장 활발한 영화시장 일본. 만일 동경을 점령할 수 있다면 홍콩영화를 들고 미국 시장을 두들겨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골든 하베스트는 왕우라는 스타를 일본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쇼 브라더즈는 초기 무협영화에서 무술 동작지도를 위해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의 활극장면 미장센을 연출하는 살진(殺陣) 감독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레이먼드는 비교적 일본 영화계의 인맥과 잘 알고 있었다. 골든 하베스트는 한편으로는 화어권 내에서의 새로운 ‘독비도’ 연작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에서 자토이치(座頭市) 연작과의 합작을 타진하였다. 떠돌이 장님 안마사이자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뛰어난 검술을 지닌 자토이치는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악인들을 물리치고 서민들을 돕는 정체불명의 협객이자 방랑자이다. 1962년에 시작한 ‘자토이치’ 연작은 단숨에 가츠 신타로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눈이 먼 자토이치가 흰자위를 껌뻑거리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맹인 지팡이인 줄 알았던 막대기에서 불현듯 칼을 빼내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사무라이들을 물리치는 장면은 하나의 컨벤션이 되었다. 이 연작 중의 한 편도 보지 못한 분들은 기타노 다케시가 다소 패러디하듯 (그 자신의 인터뷰를 빌리면) “흉내를 내면서 리메이크한” < 자토이치 >의 활극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자토이치 연작은 너무 많이 만들어졌고 게다가 매번 귀신같은 칼 솜씨를 뽐내는 자토이치와 일대 일 막상막하의 대결 장면을 펼치기 위해서 다른 텍스트로부터 라이벌을 꺼내 들었는데 미야모토 무사시까지 등장했을 때 사실상 이 연작은 거의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 골든 하베스트의 제안은 자토이치 구미(組)에게도 흥미로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왕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단 한 편의 ‘독비도’ 영화도 동경에 개봉하지 않았지만 절정의 무술을 지닌 장님과 중국 대륙에서 온 외팔이가 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색다른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시리즈 번외편’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 영화산업으로서는 (이차세계대전 이후)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영화가 수입 금지되거나 (한국도 그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극심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 영화의 배급망을 통해 대표적인 일본 대중영화의 시리즈물이 알려지는 것은 여러모로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야스다 기미요시가 감독을 하고 외팔이 검객 왕강이 혈혈단신으로 (쇼 브라더즈 버전의 외팔이 검객의 이름은 방강이며 아내가 있다) “단지 조용히 살고 싶어서” 일본을 찾아왔다가 그만 왕족 행렬에 휘말려 들어 우연히 만난 중국인 부부가 죽고 거기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개된 끝에 결국 오해에 오해가 반복되면서 자토이치와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자토이치’ 연작 22번째 영화 <신 자토이치, 물리쳐라! 당나라에서 온 검객(新 座頭市, 破れ!唐人劍)>이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화어권 개봉을 위해서 일본판과 홍콩판을 별도로 편집했고 각 버전은 각 나라의 주인공이 최후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홍콩판은 서증굉(徐增宏)이 다시 편집했고 제목은 <獨臂刀大戰盲俠>이다. 세 개의 후일담. 그 하나. 쇼 브라더즈로서는 황당무계한 상황을 맞이한 꼴이 되었다. 아마 장철의 입장에서도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나는 1971년 홍콩의 판권분쟁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골든 하베스트의 왕우판 ‘독비도’ 제작을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대신 장철은 자신의 새로운 주인공인 (그때는 ‘깡따위’로 알려진) 강대위를 주연으로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오른팔을 자기 손으로 자른 다음 왼팔 검법을 익힌 주인공을 내세워 <신 독비도(新 獨臂刀)>를 연출하였다. 이 영화가 나쁘지는 않지만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장관이다) 이 연작에 감돌던 그 어떤 매혹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장철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독비도’ 연작을 찍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왕우는 온갖 변주를 만들면서 ‘외팔이’ 시리즈를 계속해서 제작하고 종종 연출도 직접하면서 주연 영화에 출연하였다. 장르와 연출과 스타의 삼각형 중 한쪽 꼭짓점이 괄호 쳐졌을 때 도형은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에 관한 하나의 사례. 후일담 그 둘. 일본 진출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관객들은 이 영화를 홍콩에서 온 새로운 스타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자토이치’ 연작의 외전(外傳)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오히려 전 지구적 DVD 마켓이 (말 그대로) 개방된 다음 좀 괴상한 경로를 거쳐서 (일부 서방세계 자토이치 ‘덕후’들의) 컬트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진정한 의미에서 골든 하베스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왕우의 다음 세대, 이소룡이 그들을 찾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첫 번째 영화 < 당산대형 >, 그리고 < 정무문 >, 하지만 그건 이 글과 상관없는 후일담이다. 후일담 그 셋. 그런 다음 ‘자토이치’ 연작은 네 편이 더 만들어진 다음 거기서 끝났다. 다음 세대들이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새로운 ‘자토이치’를 연출했지만 그건 오마주거나 향수로만 반복되었다. 가츠 신타로 없는 ‘자토이치’는 아마도 왕우 없는 ‘외팔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외팔이와 맹협 > 신문광고 이제 세 번째 이야기의 차례. 1972년 7월 30일 서울 단성사. 그때 일본영화는 아직 수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일본에 관한 대중적 상품들은 종종 적대적이거나 경멸을 담아서 (그리고 반민족적이라는 위협적인 어조로) 왜색문화로 불리었으며 영화와 대중음악은 모두 금지되었다. 금지는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었고, 소문은 덧칠이 된 전설을 만들었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은 화면에 피 칠갑을 하고 시체들은 칼바람에 사지 절단되어 온 사방에 뒹굴고 대결장면들은 너무나 눈부셔서 화면을 마주 보기도 전에 끝난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홍콩영화로 둔갑한 < 외팔이와 맹협 >이 개봉을 한 것이다. 모두들 말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가 일본 사무라이 활극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중학생이었던 나도 알고 있었다. 맹렬하게 홍콩영화를 보던 나(와 내 친구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였다. 정말로 불가능한 순간이 이루어진 화면을 보고 싶었다. 꿈의 영화. 당신은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무엇을 상상하고 있어도 그보다 더 훌륭한 영화를 우리는 기적처럼 마주치곤 하지 않았던가. 각자의 비장의 목록들. 그러나 <외팔이와 맹협>은 나를 완전히 실망시켰다. 장철의 영화처럼 비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미지의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로운 비밀 따위도 없었다. 액션 시퀀스는 시시했고 왕우는 홍콩 쇼 브라더스 영화에 비해서 눈에 띄게 둔해 보였다. 게다가 가츠 신타로가 연기하는 맹협은 무언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두 팔 중의 하나를 제거한 다음 던져진 제한적인 조건. 두 눈을 멀게 만든 다음 시각적인 암흑 상태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의 청각 기호들. 두 개의 조건을 바탕으로 마주한 세상의 상이한 재구성. 나는 아직 육체의 권리를 놓고 신체훼손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질문할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외팔이와 맹협>은 그해 여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아무 정보도 없이 <외팔이와 맹협>이 ‘독비도’ 연작의 팬들을 능멸하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가 성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해 추석, 9월 22일에 < 삼국대협 >이 개봉하고 말았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대중적 성공의 재생산. 이제 여기에 조선의 일지매를 더해서 ‘독비도’를 한국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황당무계한 전술적 배치. 그런데 여기에는 그나마 <외팔이와 맹협>에 출연했던 왕우도, 가츠 신타로도 없다. 물론 누구든 한쪽 팔을 숨기고 외팔이 검객 방강을 연기할 수 있으며, 흰자위를 드러내고 눈을 껌뻑거리면서 맹협 자토이치를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배우가 장르 안에 들어가 고유한 스타가 된 다음 텍스트의 주인을 자처할 때 그 자리를 훔쳐내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주인의 자리에 들어선 고유한 상대와 사랑에 빠진 관객들의 연애감정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나타난 다음 그 사람이라고 허풍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 그건 정말이지 마치 같은 옷을 입고 나온 전혀 다른 상대와 데이트를 하라는 요구만큼이나 무례한 짓이다. 일단 연애감정이 발생하면 내가 사랑한 상대방이 왕우인지 외팔이 방강인지 그 경계선이 애매모호해진다. 흐릿해진 경계. 이때 경계를 두고 마술이 벌어진다. 그 둘은 서로를 교환하면서 매혹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시시각각 밀어내거나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데이트는 미묘해서 아주 작은 부분들까지도 때로는 능동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대부분 그냥 지나쳤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된 것들이 그 어느 것보다도 힘들의 관계 안에서 (정감으로서의) 무드를 자아내거나 (가시적인 형식으로서의) 모드를 이룬다. <삼국대협>은 어린 내게 허풍 뒤에 나타난 거짓말처럼 보였다. 여기엔 물론 어떤 종합도 없고 마찬가지로 어떤 분화도 없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주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다시 그 안에서 같은 것 안의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여기엔 우스꽝스러운 위장이 있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줄거리. 1598년 선조 31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 사신의 방문을 앞둔 조정은 중신들이 모여 의논하면서 “상감의 신표나 다름없는 귀중한 나라의 보물인 천하의 명검 천룡검마저도 왜놈들에게 약탈당했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 나라의 체면이 뭐가 되며 우리들은 무슨 면목으로 상감을 대할 수 있단 말이요”라며 탄식하자 다른 중신이 “그저 사생결단 하고 일본 땅으로 건너가 천룡검을 찾아오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는 줄 아오”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렇다고 군사를 파병할 수는 없는 일...” 하자 “허나 지모를 겸한 고수급 검객을 한 사람 밀파한다면 일루의 희망은 있을 것 같소이다만...” 라고 덧붙인다. 구태여 길게 대사를 옮긴 것은 조정에서 중신들의 대화 장면이 녹음대본에는 남아있지만 현재 복원된 판본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극장 상영판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고, 현재 디지털 복원판은 이 씬이 녹음대본에만 있고 상영판본에서는 편집된 것이 아닐까, 라는 추론을 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 장면이 없기 때문에 (혹은 없다면) 일지매가 왜 일본까지 와서 악전고투 끝에 천룡검을 빼앗아 조선에 가져가야 하는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외팔이 검객과 맹협의 사연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면서 일지매만 어떤 과거의 장면도 없기 때문에 마치 신비한 인물처럼 감춰진다. (현재의 복원판본의) 첫 장면은 요란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느닷없이 검은 복면을 두르고 지붕에서 나타난 일지매가 자신의 무술을 뽐내듯이 뛰어내려 일당 수십 명의 검사(劍士)들을 추풍낙엽처럼 무찌른다. 그런 다음 거만하게 칼집에 칼을 꽂으며 복면을 벗으면 곁에 ‘일지매 신영일’이라는 자막이 뜬다. 두 번째 등장인물. 한쪽 팔이 없는 무사가 건물의 실내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열댓 명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자 순식간에 그들을 물리치고 마찬가지로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그러면 곁에 ‘외팔이 김기주’라는 자막이 오른다. 두 가지 지적. 이미 충분히 설명했지만 ‘독비도’는 왕우여야만 한다. 두 번째 불만. 아마도 임권택 은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를 보긴 했지만 (인터뷰에서 질문하자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대답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것 같다. 혹은 이 연작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독비도’는 장철의 버전이건 ‘외전편’ < 외팔이와 맹협 >이건 언제나 ‘외팔이 검객’ 방강은 절반으로 동강난 칼을 사용하였다. 그건 하나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팔이 잘려진 후 새로 검법을 익히는 중에 온전한 검을 사용하면 균형을 잡기에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반검(半劍)을 선택하였다. 이건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에 영감을 얻어 연출된 (아마도 최상의 리메이크 버전일) 서극의 < 칼 >에서도 지켜진다. 그러나 임권택 버전의 ‘외팔이’ 검객은 삼국의 협객 중 어떤 결함도 없는 가장 큰 칼을 사용하고 있다. 한 가지 더. 왕우 버전의 ‘외팔이’ 검객은 마치 단 한 벌의 옷을 지닌 것처럼 검은 옷만을 입었다. 임권택 버전의 ‘외팔이’는 단 한 번도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 장르 영화에서 옷은 기호 체계일 뿐만 아니라 신화를 구성하는 다소 복잡한 코드군(群)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어떤 의미나 상징이 개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혹은 그 어떤 해석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능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만들어지는 즐거움이라는 유혹이 당신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중이다. 무언가? 잘 설명되지 않는 쾌락. 그 안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머물고 있는 알 수 없는 섬세함. 어떤 비평적 시선도 거절하면서 거기서 비로소 온전하게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의 은밀한 유희가 시작된다. < 삼국대협 >은 이 유희를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거나, 혹은 모르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있)다. 세 번째 등장인물.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다리 위를 걸어오는 자토이치는 갑자기 나타난 사무라이들이 자기를 둘러싸자 언제 그런 걸음을 걸었나 싶게 재빨리 칼을 꺼내 순식간에 쓰러트린다. 그러면 곁에 ‘맹인 김희라’ 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포스터에도 ‘盲俠’이라고 소개하면서 정작 영화 자막에 ‘맹인’이라고 써 있는 것은 좀 어리둥절하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일본을 무대로 해서 (물론 모두 한국에서 찍었다)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 맹협이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사소한 오해를 반복하다가 세 명이 힘을 합쳐 모두의 원수이기도 한 구로다 시게야쓰의 적진에 쳐들어가 함께 물리치고 천룡검을 되찾은 일지매는 일본을 떠난다, 는 줄거리이다. 나는 구태여 이야기의 디테일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 삼국대협 >의 모든 장면이 ‘독비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임권택 이 <삼국대협>을 연출하기 위해서 < 돌아온 외팔이 >를 보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장면. 장철은 이 장면을 쇼 브라더즈 세트 안에서 찍었다. 외팔이 협객 방강은 대나무 숲에 숨어있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재빨리 경공술로 날아오른 다음 대나무를 베고 쓰러진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잘려나간 대나무를 밟아가면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한다. 임권택은 대나무 숲에 가서 이 장면을 찍었다. 잠입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위장을 하여 구로다의 편에 선 일지매가 (그의 돈을 훔치려다가 그만 사랑에 빠진) 은월과 함께 대나무 숲을 거닐다 그를 찾던 (기다리던?) 외팔이 검객과 맹협을 마주친다. 하지만 이건 구로다의 무사들이 파 놓은 함정이었다. 대나무 숲에서 모두들 칼을 뽑고 활극이 펼쳐진다. 임권택은 진행을 하던 영화의 물리적 리듬이 갑자기 변주를 만들어내는 것을 즐기지 않는 감독이다. 그래서 101편의 영화에서 슬로우 모션을 마주치는 것은 이례적인 순간이다. 나는 1980년 < 짝코 >에서 슬로우 모션을 본 다음 임권택이라는 영화의 속도 안에서 두 번 다시 슬로우 모션을 보지 못했다. < 장군의 아들 >에서 김두한이 골목에서 학생 깡패 오찌아리를 물리칠 때의 짧은 스텝 프린팅, 그리고 <서편제>에서 동호가 누이를 떠올릴 때 이미 눈이 멀어 지팡이를 짚고 서성거리는 송화, 그런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눈 내리는 날 소녀의 손에 이끌려 떠나가는 송화를 보여주는 장면에서의 옵티컬 프린팅을 제외하면 영화의 이미지들은 질서정연하게 24분의 일초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에서 활동하는 슬로우 모션은 아름답다. < 협녀 > 포스터 먼저 장소. 대나무 숲은 호금전이 < 협녀 >에서 빛과 안개, 바람으로 가득 채운 다음 동양화의 풍경으로 만든 공간이다. 무협영화 안에서 대나무 숲의 전통은 리안의 <와호장룡>과 장이모우의 <연인>에서 매너리즘의 대상이 되었다. 임권택 이 <협녀>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서울에서 개봉한 적이 없고, 아직 DVD는 발명되지 않았으며, 1969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첫 상영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 삼국대협 >은 <협녀>에 지나치게 가깝게 있다. 여기서 임권택이 대나무 숲을 선택한 것은 풍경(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 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의 힘)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들의 방향과 칼로 베어 쓰러트릴 때 만들어내는 빗변의 대각선 운동 때문이다. 그런 다음 사방으로 서 있던 대나무들이 쓰러지면 새롭게 확보할 수 있는 시야의 확장과 활동 반경의 접선을 더 멀리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다음 동선. 이 장면은 세 사람이 서로 대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구로다의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면서 살진(殺陣)은 세 개의 집합으로 분화된다. 여기에 일지매와 숲에 함께 온 여인 은월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녀는 무술을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집합의 어느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다. 만일 구태여 끌어들이려면 일지매가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을 연출해야만 한다. 재빠른 무술과 전혀 대결의 리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위험한 생명의 자리 사이의 불협화음이 만들어내는 긴장의 구도. 그런 다음 예정된 장르의 (따분한) 약속. 그 둘 사이에서 주인공은 희생을 무릅쓰고 자신의 리듬에 대한 제약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임권택은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녀를 세 개의 집합 바깥으로 내보내는 대신 이 삼각형의 구심점으로 활용한다.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에는 지금 하나의 극(劇)을 바탕으로 한 기승전결이 없었을뿐더러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 맹협은 각자 싸우고 있기 때문에 장소의 공집합 이외에 어떤 이접적 접합의 이음새도 갖지 못하고 마치 다 각자의 활동영역 안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하나의 씬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들은 검의 활동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서 시야 앞의 대나무를 계속 베어나간다. 그때 대나무는 어느 각도에서 베어도 은월을 향해서 쓰러져 내린다. 말하자면 은월은 이 씬에서 대나무들이 쓰러져 내리는 방향을 유도하면서 움직이는 자석의 미장센이다. 그래서 세 개의 집합의 쇼트들은 매번 은월을 중심으로 오가면서 왕복운동을 계속한다. 세 번째 문제. 이접적 종합을 위한 모멘트. 검의 활동. 대나무 숲 장면이 무심코 볼 때는 그저 살진(殺陣)의 교집합을 단순하게 변주시키면서 숲 안에서 이동하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여기서 동선의 모멘트는 접촉의 괴상한 무효로 이루어져 있다. 분명히 이 장면은 그것이 일대 일이건, 일대 이건, 일대 다수이건 서로 검을 겨루면서 진행되는데 정작 검과 검이 서로 부딪치는 순간이 거의 없다. 끊임없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휘두르는 장면만이 서로의 검의 곡선을 그은 다음 그 반경 거리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지거나 바깥에서 마주하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된다. 무심결에 볼 때에는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과도하게 사운드 효과를 사용하고 있어서 마치 검에서 어떤 힘(劍氣)이 반경거리를 확장한 것 같은 착시를 이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단지 쇼트가 짧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연결 지점 없이(match_cut) 어떤 생략의 순간들만으로 (jump_cut)으로 편집했기 때문에 칼과 칼이 부딪치는 순간이 없는데도 그걸 생략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이유가 좀 기괴하게 보인다. 이 씬에서 검술 장면을 전개하면서 동작을 연출한다기보다는 마치 그 동작의 어떤 순간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서 찍은 것만 같은 순간들의 쇼트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슬로우 모션은 하나의 장치이다. 샘 페킨파는 액션의 방점을 찍기 위해서 갑자기 어느 순간을 멈추듯이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 와일드 번치 >. 몹시 인상적인 < 가르샤 (의 목을 가져와라)>. 장철은 할 수 있는 한 늦추기 위해서 시간의 확장으로 이용한다. 막상막하의 < 심야의 결투 >와 < 복수 >. 그리고 리듬의 인상주의라고 할 만한 왕가위의 < 화양연화 >. 임권택은 단락(短絡)의 순간에 갑자기 사용한다. 거의 카오스에 가까운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들은 쇼트가 제각각일 뿐 아니라 사실상 검술 대결의 순간이 없기 때문에 쇼트들의 콜라주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렇게 되면 고전적 영화의 규칙 안에서 유기적 구성의 윤곽이 부서질 수 있는 순간을 서로 다른 리듬의 교차라는 불협화음의 몽타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몽타주의 프로그램에서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르의 대가들이 만들어낸 계보를 경유하여 만들어진 이 장면은 활극장면이기 때문에 우리와의 약속안에서 허용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이 씬 전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건 열세 살의 나이에 볼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지금은 그걸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의 디테일이 미학적으로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곤궁에 처한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설명하려는 장면은 거기가 아니다. 알 수 없는 불쾌감.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기분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을 때 나는 (여기서 서로 다르게 사용한 두 개의) 무언가에 대해서 대답하고 싶어졌다. 그것이 < 삼국대협 >을 간절할 정도로 다시 보고 싶게 만들었다. 여기엔 내가 미처 듣지 못한 소음과 같은 영화적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마저 세우고 싶게 만들었다. 명백히 실패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는 통과할 수 없게 만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떤 메아리랄까, 말하자면 내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어둡고 축축한 불길함이 거기 버티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보면서 단지 그게 기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시퀀스가 되었을 때 어떤 대답을 거기서 보았다. 구로다의 성에 붙잡혀 온 외팔이 검객과 맹협, 그리고 정체가 탄로 난 일지매는 감옥에 갇힌다. 여기에 목숨을 걸고 (일지매와 사랑에 빠진) 은월이 구하러 온다. 그들은 이제 힘을 합쳐 구로다의 사무라이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구로다와 대결을 한다. 구로다는 명검 천룡검을 뽑아든다. 말하자면 <삼국대협>의 클라이맥스. 이때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구로다가 천룡검을 휘두르자 이 세 사람의 칼이 모두 잘려나간다. 무시무시한 검. 게다가 구로다는 (영화 속의 설명에 따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에 오른 장군 중의 한 명이다.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칼이 모두 잘려나간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부터 미로처럼 이어진 일본식 다다미방의 방문 사이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게 전부이다. <삼국대협>은 유머가 있긴 하지만 희극이 아니다. 이들이 구로다를 피해 도망 다닐 때 천룡검에 그만 바지가 찢겨져 나가 속옷 바람이 되고, 그나마 흘러내려 엉덩이를 보일까봐 두 손으로 치켜 올리면서 겅중겅중 뛰면서 칼을 피해 도망 다닌다. 구로다는 이들을 뒤따라 천룡검을 움켜쥐고 이 방 저 방 뛰어다닌다. 헛 칼질. 전혀 위험해 보이지도 않은 채 절대로 천룡검에 베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 다니는 세 사람. 이때 약간 프레임의 속도를 빨리해서(slow_speed_shooting) 마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왜곡되고 깨어진 표면. 잘못 작동되기 시작한 장르의 장치들. 나는 중얼거렸다. 아아, 이 노골적으로 잔인한 장면이여. <삼국대협>은 안티 클라이맥스의 영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나는 이미 대나무 숲에서의 활극 장면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임권택 은 이 장면을 장르에 충실하게 묘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부분적으로나마 만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자해하는 심정으로 스스로 장면 전체를 부숴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왜 그런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다. 그건 소설의 영역이다. 그 대신 여기서는 어떻게, 에 대해서만 쳐다볼 생각이다. 임권택은 일지매와 외팔이 검객과 맹협의 검술을 여기서 보여줄 생각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검을 모두 잘라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구로다의 검술이 가히 절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도 이미 잘려나간 상대방의 검 앞에서 달리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의 장면이 없다. 정말 이상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여줄 게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때 이 말을 비틀고 싶다.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이 씬의 중요한 특징은 갑자기 장르를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까지 왜곡되고 부풀려진 방식의 긴장을 갑자기 망쳐 버리면서 재빨리 지금까지 전혀 건드리지 않았던 (혹은 금지되었던) 상황으로 몰아넣은 다음 무언가를 교란시킨다. 무언가? 여기에서 저기에로, 혹은 저기에서 여기에로. 말하자면 도약. 아니, 그 말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면 단지 추락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건 도약이자 추락이다. 내 대답은 의미 안에서 갑자기 그 자체의 효과를 무의미하게 만덫였模?어리둥절한 횡단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수평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마지막 장면 전체를 기괴하게 만들어버린다. 여기에는 유머도 없고, 역설도 없고, 패러디도 없고, 어떤 냉소도 없다. 게다가 여기서 무언가를 하려다가 실패했다기보다 오히려 그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냥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걸 해버렸다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엔옙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무의미.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달리 말하기 힘든 우울증이다. 무언가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눈앞에 있는 것을 증오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영화 자체를 나쁜 것으로 규정 내려 버리고 마는 이 이상한 감정 상태 앞에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임권택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알 수도 없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영화의 규칙 안에서 자기가 펼쳐놓은 상황에 대해 쓸모없음을 탄식하는듯한 슬픈 웃음이다. 여기에는 자기 안에 들어온 나쁜 것과 저항하며 싸우는 대신, 혹은 달래며 자기편을 만드는 대신, 거기에 편승하는 대신, 거기에 의지하는 대신, 그저 상처받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미 벌어진 상황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치 남의 일이기라도 한 듯, 그냥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채, 결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고통받고 있는 듯한 방법을 택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알았다. 쇼 브라더즈 영화를 보면서 언제나 내가 즐긴 것은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매번 비극의 영웅적 승화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삼국대협>은 그 순간을 무의미와의 만남이라고 선언해버리듯이 만든 다음 어떤 불연속성의 자리에로 데려가 망쳐놓았다. 우울한 목소리. 거기엔 볼 것이 없어. 만일 멜라니 클라인이라면 훨씬 정교하면서 시적으로 내 마음의 상태를 설명했을 것이다. 거기서 내 즐거움은 토막 난 상태가 되어버렸다. 영화는 (그때라면) 미처 반격도 하기 전에, (지금은) 더 설명을 할 수 있기 전에 재빨리 끝난다. 나는 <삼국대협>을 다시 보면서 하여튼 대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나를 우울한 슬픔에 젖게 만들었다. 거기엔 임권택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시행착오의 힘도, 무언가를 참고 견디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다시 만들어내는 의지도, 아니 최소한의 영화에 대한 긍정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을 내게 안겨 주었다. 그 마지막 장면의 순간에서 내가 본 것은 고통받는 시간뿐이었다. 하여튼 이 이야기를 마치기는 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장면 없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장면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고통을 거기에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어떤 비장감도 없이, 지나칠 정도로 통속적인 상황 안에서, 그저 거기서 덧없다는 듯, 거기서 끝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영화가 끝난다. 나는 여기서 영화가 또 다른 의미에서 과정의 예술이라는 것을 배운다. 악순환은 중단되어야 하고 주사위는 다시 던져져야 한다. 임권택은 이듬해 < 잡초 >를 찍었다. (계속) 1972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우진필름 각본 권용 촬영 최호진 조명 최입춘 편집 김희수 음악 황문평 신영일 ... 일지매 김기주 ... 외팔이 김희라 ... 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