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격명령
- 감독
- 홍성기
- 제작년도
- 1954
- 출연
- 염매리, 이집길, 김일해, 전택이, 노경희, 권일청
<벤허>(1925)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동원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는 식민지 통치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제국은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기 위한 ‘무단통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강자’가 곧 ‘적자’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일반 문관뿐 아니라 교사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해 왔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3.1운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한꺼번에 상경했지만 치안 당국의 대응은 미온적인 수준에 그칠 따름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되었으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만세운동의 기운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가며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러모로 ‘3.1운동’은 제국의 통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비껴난 장면들을 연출해 냈던 셈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물리적 폭력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뚜렷한 한계에 부딪혔다. 만세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부담을 느낀 제국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유화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이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눈에 띄기 쉬운 헌병의 수는 줄었을지언정 실질적인 경찰력은 증대되었으며, 언론의 창간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했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동향을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통치의 요체는 감시와 처벌을 짝패로 한 안정적 관리 기술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극장 이 새로운 식민통치 기술의 주요한 시험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통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해도, ‘3.1운동’의 전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은 집단을 이룬 조선인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정치적 상상력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종족의 회집 장소였다. 극장업은 엄연한 합법의 영역 속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은 극장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안 유지에 유용한 기관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돌발적 사건에 의해 쉽게 자극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치부되었다. 비록 극장에서의 소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여파에 대한 추정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전거를 환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대 들어 검열 규정 들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1922년에 공포된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취급심득」은 공연에 대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무단 공연 시의 처벌조항도 적시했다. 이어 1923년에는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에 소재한 극장 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개선사항을 주문한 바 있었다. 특히 비밀결사와 음모단이 활동하는 내용의 활극은 유해하므로 피할 것, 변사가 사전 검열 내용과 다른 풍자적 언어를 쓰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1] 1926년부터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일본의 법규를 소급적용한 것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별도로 적용된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또한 이 규칙은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급성장한 영화 를 명백한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름 상영 전에 검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검열 기준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상영 시의 임검을 비롯한 현장취체 규정도 명문화되었다. 한편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가장 명시적인 표적은 외화 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에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가 제작된 이래 조선영화계는 본격적인 생산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상영된 영화의 절대 다수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떤 이유로 먼 나라의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상이한 풍속의 세계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기 극장이 형성해 온 무성영화의 상영 관습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극장에서 상영된 무성영화는 자족적인 텍스트라 보기 어려웠다. 무성영화는 항상 변사와 악사를 비롯한 인간매체의 개입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상영이라기보다는 연행 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표징으로 지목했던 영화의 성격이란 적어도 식민지기 극장에서는 유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를 관람하던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에 나타난 낯선 시각적 코드 와 변사를 통해 중계된 익숙한 구두적 코드 를 결합시켜야 했다. [2]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방식이라 해도 관객들은 극장 경험을 축적해 나가며 이를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문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무성영화의 관객들은 ‘소리’를 들었다고(혹은 상상했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 역시 외국 배우의 벙긋거리는 입술에서 모국어 발화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하다. 그리고 변사의 연행은 그러한 상상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수용은 매우 혼종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즉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코드에 의해 토착화되고 전유 되었으며 더 나아가 종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또한 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간자막의 내용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변사의 수준이란 관객이 지참해야 할 손수건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그들의 해설은 객석을 선동하여 집단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오독에 가까운 변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제멋대로인 해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관객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사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일종의 창작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을 자극하는 해설을 통해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유선영은 헐리우드 영화 < 동도(Way Down East)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20)가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 해설을 동반하여 상영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다소 비껴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동도>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미혼모 신세가 된 젊은 여성이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선한 행실을 통해 끝내 행복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도>는 권선징악의 시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둔 전형적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본 데이빗의 구애를 받게 되지만, 과거 그녀를 버렸던 레녹스와 다시 만나 과거사를 폭로 당했고, 데이빗의 아버지인 스콰이어는 부정한 행실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안나를 면전에서 모욕한다. 쫓겨난 안나는 눈보라 속에서 기절하고 강물에 휩쓸려 흘러가다가 폭포로 추락할 위기를 맞이하지만 뒤쫓아온 데이빗은 유빙들을 징검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극적으로 안나를 구해내게 된다. 이 장면은 <동도>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될 만큼 스펙터클의 요소가 부각되는 곳이며, 내용 측면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환이 가장 ‘통쾌’한 대목으로 회고했던 것은 데이빗이 아버지 스콰이어에 대해 ‘후레질’을 하며 대드는 장면이었다. 특히 데이빗은 ‘종교, 도덕, 법률’이 부재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데, 아버지의 ‘종교와 도덕’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장면이나, 안나에게는 ‘종교, 도덕, 법률’ 어느 것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선영은 이러한 반복이 다분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에 따라 취택되고 덧붙여진 장면에 가깝다고 보았다. 즉, 김영환이 느꼈던,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통쾌감’은 낡은 구질서와 도덕의 파괴, 자기혁신을 통한 개조,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절박한 기대감, 식민지민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자의식이 결합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4] 변사 김영환 / <동도>(1920) 중 (사진: “ Way Down East ”, IMDb) 이처럼 변사의 해설은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세계를 식민지의 서사로 환치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관객들은 은밀한 해석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전유의 독법을 체화해 나갔다. 더군다나 인간매체인 변사는 복제매체와 달리 돌발적 수행성 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설 대본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 배우의 애드립처럼 변사 역시 현장 분위기에 맞추어 임의로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필름 검열과 별도로 임석경관을 동반한 현장취체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대구 만경관 활동사진 순업단이 지난 팔일 진주에 도착하여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십일 밤 영사하는 사진, <암흑의 시(市)>에 설명 변사 김성두 군이 동 영화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빈한한 사람을 위하야 일하다가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전기의 판결을 담임한 판사의 아들이 역시 법망에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면서 현대사회 조직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법률이 없어도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잇다는 설명 을 마치자 곧 임석경관이 검속을 시키고 다음 사진도 못하게 함 에 오백여 군중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고함을 쳐 장내는 대소란을 일으켰는데 활동사진 설명까지 가혹히 취체함은 처음 일이며 진주경찰서의 근래 언론취체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더라. (진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6 』, 한국영상자료원, 2014, 177쪽. - 기사, “활동사진 설명 중 – 변사 돌연 검속”, 《조선일보》, 1926. 3. 13. (나) 지난 십육일 밤에 시내 조선극장에서 다수한 격문을 살포한 사건 이 있은 이후 경찰 당국의 극장 경계는 더한층 삼엄하여져서 시내 단성사 , 조선극장 , 우미관 등의 각 극장의 입구는 말할 것도 업고 밑의 층 위층에는 두어 간통만큼씩 십수 명의 정, 사복경관이 벌려서서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잇는데 그중에도 무대 정면에는 바로 변사 옆에 순사부장 한 사람이 걸상에 걸어 앉아서 활동사진을 영사하는 암흑한 속에서 끊임없이 관중과 눈싸움 을 하고 잇는 등 일찍이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진기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32쪽. - 기사, “각 극장마다 수십 경관 배치 – 변사 옆에 순사가 앉아”, 《조선일보》, 1930. 1. 19. (가)는 임석경관이 변사의 임의적 해설을 문제 삼아 흥행 자체를 중지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대구 만경관 소속의 활동사진 순업단이 진주에서 영사회를 열었을 때, 변사 김성두는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볼온하게 해석될 만한 해설을 덧붙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 불합리하며, 법률이 없어도 충분히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연한 인도주의적 발상에 기댄 이 해설이 명시적인 불온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년도 5월부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 국사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시행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치안 당국은 법률 무용론을 설파한 해설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기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치안 당국을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극장은, 동맹휴학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학교와 더불어 경찰의 일급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들었던 극장은 격문을 살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나)는 조선극장 격문 살포 사건 이후 임석경관의 감시가 매우 노골적으로 표변한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는 객석의 가장 뒤편,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5] 그런데 격문 살포 사건이 발생하자, 경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순사부장이 아예 변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중과 눈싸움”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당국의 주안점이 변사의 해설 자체보다 그것이 촉발하는 객석의 정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러나 가시화된 임석경관의 존재는 외려 극장에 내재한 정치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석경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국의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현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극장에 내재된 불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임석경관에 의해 중지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기에, 임석경관은 극장에 모여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임석경관으로 대표되는 감시기제의 존재는 관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응시하면서 극장을 둘러싼 심상지리를 ‘불온한 공간’으로 스케치했으며, 관객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극장 흥행주들은 이러한 불온성을 흥행 코드로 치환 하는 데 은근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족의 수난 서사와 해방서사를 담아 낸 외화들은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컨대 1928년에 개봉되었던 <가우초>와 <이스라엘의 달>은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의 해방서사를 그려 낸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가우초>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터전을 둔 유목민 ‘가우초’의 영웅담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들의 수령인 주인공은 신전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관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신전의 보물을 노린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열세에 처한 주인공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신출귀몰한 책략”을 발휘하여 끝내 신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6] <십계>의 ‘자매편’이라 소개되었던 <이스라엘의 달>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 왔다. 그들을 동정해 왔던 이집트 왕자 세티는 ‘이스라엘의 달’이란 별칭을 가진 메라피와 만나게 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신문에 게재된 감상평은 동포의 자유를 위해 “어여ᄲᅳᆫ 청춘”을 바친 메라피의 희생을 ‘잔 다르크’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된 이집트 왕의 최후를 “확연한 인과의 결실”이라 규정한 바 있다. [7] <가우초>, <이스라엘의 달> 포스터 이듬해 식민지 조선에서 개봉한 < 벤허 >(프레드 니브로, 1925)는 유대민족의 수난사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극장 운영자와 실무자들은 서양영화를 경유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관객몰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필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단성사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며 <벤허> 검열 과정에 참여한 이구영 의 ‘무용담’은 흥행 실무자의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당대 검열행정의 공백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구영) 영화검열을 이거 통과해나가면, 대본을 보니까 이거 암만해도 위태로워요, 내가. 거기 몇 마디 다이알로그가 이건 아주 불온 천만한 얘기란 말이에요, 저 노예선이..., 거 지중핸가 거기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부 철사로 묶이고 거기에 이제 그..., 이... 저...? (면담자) 북? (이구영) 네, 북을 울리면서 리듬 맞춰가지고 노를 젓지 않습니까? 거기에 소위 선장이라고나 할까? 그게 나왔어. 나와서 채찍으로 갈기는 겝니다. 막! 덜 움직인다고... 그래 반항하는 거야. 이쪽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오스인가요? 반항하는 거야. 직접 대고. 그 선장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저어서 한 시간씩 늦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빨리 배를 저으란 말이야. 그 때 반항하는 거야. 그래서 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너의 한 시간은 말이야, 우리 유태 민족의 백 년이단 말이야.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알겠느냔 말이야. 그 대사가 하나 탁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하나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겝니다. 이것이 통과되야만, 되면 이거 아주 히트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데 검열관은, 소위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까라고 하는 검열관한테 이것이 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전부 가위질 다 당해서 아마 한 200피트 이상은 없어질 겝니다. 그 화면 전체를 막 끊고, 그런데 다행히 내가 거기 급사로 있던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대본이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가는 걸 알아다오. 그래 나중에 전화를 걸으니깐드루 요시다란 사람의 손으로 갔다, 길전(吉田)이한테... 됐단 말이야. 그럼 내가 성격을 아니깐 이거 꼭 내가 방법론을 써야 되겄다. 이제 검열실에 올라갔어요. 영화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소위 하이꾸라고 해서 그 배구(俳句)를 좀 할 줄 압니다. (면담자) 네, 하이꾸? (이구영) 네, 그게 경무 월간지가 있어요. 《경무월보》라고...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일부러, 그래서 고 문구를 외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줄담배입니다. 줄담배, 소위 아사히라고 하는 것을 밤낮, 이놈을 입에다 종일 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눈이 좀, 시력이 이상해서 아주 그냥 안경을 굉장한 걸 썼습니다. 도수가 깊은 것, 그래서 이제 고 화면이 한 5분이면 벌써 나타나기 쉬운 방면까지 왔어요, 벌써. 그래 내가 화면 보면서 대본 읽으면서 얘기하면서 이거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때는 그 배구에 대한 것, “당신 참 배구 참 멋지다 말이지. 이런 문구, 암만 생각해도 이건 정말 걸작인데, 이런 걸 왜 문단에 발표하지 않고 이런 데다 이렇게 내슈?” 막 칭찬하구 말이야. “당신, 자꾸 쓰슈, 자꾸 이런 글을. 이래야지, 우리도 좀 보지. 당신이 나 이런 걸 쓰는지 몰랐단 말이야. 오까~ 같으면 이런 걸 안 쓴단 말이야. 당신이니까 썼지.” 그렇게 하니까 칭찬해서 누가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아, 그러냐?구,’ “그래 평판이 대단하단 말이야, 요시다상, 이거 정말 문학에도 이렇게 조예가 있고 검열관으로 있기에는 참 아깝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 그렇냐’고 말이야. 그래 그러는데 그 화면이 지나가요. (면담자) 네, 그걸 지키기 위해... (이구영) 내 아주 잊질 않죠, 이제. 그 지나갔어요. 지나가서 얘기 딱 끊고, 뭐 참, 얘기가 너무 길었단 말이야. 그러고 영화 보는 게죠. 그러니까 지나갔죠. 그러니까 이제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 콱콱 내줬어요. 내가 춤을 추고 혼자 나오는데,(웃음) -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83~284쪽. <벤허>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벤허>는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 집안 출신의 자제이며, 체제에 반항하는 동족들을 밀고하라는 로마인 친구의 부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주목했던 것은 벤허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노예선 위에서 학대 받는 장면이었다. 채찍질하는 노예선의 선장에게 맞서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부르짖었던 대사가 “히트”를 예감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구영이 보기에도 반항기가 농후했던 이 대사가 온전히 검열을 통과할 리 만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구영은 ‘꼼수’를 동원한다. 어떤 검열관이 배정되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필름 검열 당시 문제의 장면이 지나갈 때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그의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 실력을 일부러 추켜세웠다는 것이다. 결국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을 받아 낸 이구영은 희희낙락하며 검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벤허>가 상영되었을 때, 이 대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즉각 임석경관의 중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벤허>는 필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었던 데다가 변사가 설명대본에 없는 대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열 당국은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영이 회고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검열관들 사이에 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큰 난리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벤허>는 계속 상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장상영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검열 역시 사람의 손으로 수행하는 작업인 이상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구영은 그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며,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이 발성영화로 전환된 1930년대 이후부터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성영화는 별도의 소리 연행자를 둘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텍스트였기에 필름 검열만으로도 불온한 장면들을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성영화의 사운드와 충돌할 때가 잦았던 변사의 목소리는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재래의 취향’으로 낙인찍히며 점차 주변화되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돌발적 수행성이 발휘될 여지(餘地)가 급격히 좁아져 간다는 점을 의미했다. *** [1] 기사, “활동사진 개선의 요점 - 비밀결사나 모험뎍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 《조선일보》, 1923. 4. 11. [2] 유선영, 「초기 영화의 문화적 수용과 관객성 : 근대적 시각문화의 변조와 재배치」, 『언론과 사회』 12,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2004. [3] 백문임, 「식민지 극장의 무성영화 관람성」, 『한국언어문화』 38, 한국언어문화학회, 2009. [4] 이러한 전유의 구조를 적용해 본다면, 안나는 피억압 약소민족으로 치환되며, 레녹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식민지를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으로, 스콰이어는 종교와 도덕을 말하면서도 침략자인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서구 강대국들로, 데이빗은 약소민족을 대변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인도와 정의를 구현하는 선인으로 전치될 수 있을 것이다. (유선영, 「식민지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전복적 전유와 징후적 영화경험」, 『미디어, 젠더 & 문화』 26,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3.) [5] 광주극장은 1930년대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임검석’의 위치도 보존해 놓았는데, 객석의 가장 뒤편인 출입구 바로 옆에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기사, “신영화 - 『더글라스』의 가우초”, 《조선일보》, 1928. 2. 15. [7] 기사, “내가 본 이스라엘의 月”(一), 《동아일보》, 1928. 2. 10.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문화영화는 특정한 사상의 전파와 일반 대중의 계몽 혹은 지식의 전파를 증진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각종 형태의 영화를 일컫는 용어이다. 보통은 관에서 주도하여 제작한 홍보영화와 계몽영화 등이 이러한 범주 안에 들어가는데 이러한 영화의 상영은 관에서 조직한 활동사진반의 순회영사 등을 통해 무료로 상영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문화영화를 통한 시국선전활동이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1939년 제정된 일본영화법 15조에서는 문화영화에 관한 규정을 두어 그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도 문화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조선문화영화사, 조선문화영화협회와 같은 영화제작회사가 설립되었고 조선영화사와 고려영화협회 같은 기존 극영화제작사에도 문화영화부가 설치되는 등 기존의 영화회사도 문화영화 제작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문화영화를 위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의 설립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문화영화 전용관의 설립은 기존에 영화관 출입이 어려웠던 학생 관객들을 수용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일본정부가 든 문화영화관 설립의 주된 이유는 정부에서 지정하는 문화영화 혹은 각 지방 장관이 문화영화로서 추천하는 영화를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널리 구경시켜 지적인 면을 함양케 하는 동시에 정서 교육으로 많은 도움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문화영화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도 문화영화 관람 기회를 늘리기 위해 문화영화관 설립이 가시화 된다. 조선에서 문화영화관은 백화점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설립이 추진되었다. 일반 영화관처럼 대극장이 아니어도 괜찮을 뿐더러 많은 관객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도 고려되었다. 당시 백화점 업계에서는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지속적인 불황을 타개하려 백화점 내에 극장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국의 문화영화관 설립 움직임과 맞아 떨어지면서 백화점 안에 영화관 설립이 추진된다. 1939년 서울의 백화점들은 상품선전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영업방식을 강구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 백화점으로 알려진 미쓰코시(三越),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아(丁字屋) 등 남촌의 세 백화점은 연합하여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영화관을 지어 일정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무료입장권을 제공해주는 계획을 세운다. 문화영화관 설립을 추진 중이던 조선총독부는 백화점 업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치하는 것을 허가해 준다. 총독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에 영화관을 설립, 많은 이들이 시국선전용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선전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1939년 12월 23일, 미나카이 백화점 뒤편 소화통에 경일문화영화극장이 준공되어 개장식을 거행하였다. 경성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이 영화관은 200석의 좌석을 가졌으며 어른 20전, 군인과 소학생은 10전씩 요금을 받았으며 매일 오전 10시 개관하여 <경일세계 뉴-스>와 <요미우리신문 뉴-스>와 같은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상영했다. 이 영화관에서 문화영화를 감상한 임화(林和)는 극장의 규모가 좁아서 기분이 아담하고 저렴한 가격, 상대적으로 짧은 상영시간(1시간 반), 아이들과 어른들 누구나 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의 프로그램과 같은 장점들을 나열한 후 북촌에도 조선어신문사가 운영하는 이런 문화영화관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문화영화가 극영화 중심의 재래영화의 신생면의 하나라면 문화영화극장은 영화흥행 및 감상에 새로운 경지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임화, ““뉴-스”와 만화 경일문화영화극장“, 《매일신보》, 1940.2.9.) 라며 문화영화관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남촌의 백화점이 적극적인 영업정책을 세우자 북촌에 자리한 화신백화점도 백화점 6층의 다목적 홀을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관으로 개조하여 영업활동에 이용하기로 한다. 1940년 5월 28일 화신백화점 6층에 개관한 화신영화관은 경일문화영화관과 마찬가지로 뉴스영화, 문화영화, 만화영화를 비롯해 각종 선전영화들을 상영하게 된다. 1940년 11월 1일부터는 문화영화가 모든 극장에서 강제상영 된다. 아울러 조선 내에서 문화영화 제작도 활발해진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도 문화영화관의 설립이 추진되는데 1941년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상인천역 앞의 400여 평에 현대식 건축물로 문화영화와 뉴스영화를 상영할 극장을 세웠다. 경일영화문화관과 화신영화관 같은 문화영화 전용관이 들어서면서 백화점 업자들은 극장을 운영하는 것에 더해 독점적 영화제작이나 영화배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특히 일제가 중일전쟁 장기화를 이유로 영화산업의 신체제를 천명하고 독점화로 산업재편을 꾀하자 백화점업자들은 이 독점기업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경성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다나카 시계점을 운영하던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郞)를 중심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발족했다. 이 당시 조지야백화점의 고바야시 겐로쿠(小林源六)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朴興植) 등이 발기인 겸 주주로 참여하였다. 또한 문화영화관을 운영하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각각 독점적 영화배급사인 조선영화배급사가 설립될 당시에 자본금 총 15만원 중 각각 2만5천 원씩을 투자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선전활동의 주요한 장소로 큰 역할을 담당했던 문화영화관들은 해방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이중 화신영화관은 일반상영관으로 전용되었으며 경일문화영화극장은 폐관 되었다. * [사진](상단) 미나카이백화점 뒷편 경일문화영화관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12.24. 경일 ( 京日 ) 문화영화극장 준공되어 성대히 개관 본정 ( 本町 ) 삼중정 ( 三中井 ) 백화점 뒤에 짓기 시작하든 경일문화영화극장 ( 京日文化映畵劇場 ) 은 저간에 준공되어서 23 일 개장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 이 영화극장은 반도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 전당으로서 각 방면에서 오래전부터 긔대하던터이라 개장하는 날 각 방면 인사가 만히 와 관람하얏는데 좌석은 200 명을 수용할 수 잇고 입장료금은 어른 이십전 , 군인과 소학생은 십전씩이며 매일 오전 열시부터 개관하는데 경일세계 『 뉴 - 스 』 와 독매 ( 讀賣 ) 신문 『 뉴 - 스 』 문화영화와 밋 만화 등을 상연한다고 한다 . ( 사진은 경일문화영화극장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3.07.23. 예술가들도 총동원 , 호화롭게 전개될 징병축하행사 오는 팔월 일일부터 일주일간에 걸쳐 전개될 징병제 실시 감사의 기ᄲᅳᆷ은 전 동아에 펼쳐질 것으로 이 경축행사의 감격은 바야흐로 반도에 물 ᄭᅳᆯ듯 이러나고 잇는데 경성에서는 조선연맹 , 경기도연맹 , 경성부 등 삼연맹의 주최로 문화행사를 거행하기로 되엇다 . ▼ 팔월 삼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경성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조선영화배급회사 , 조선음악협회 , 조선축음기제조협회 찬조로 음악과 영화의 밤을 개최할 터인데 제일부 음악데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연주와 이인범 ( 李仁範 ) 씨의 국민가요 독창 , 현제명씨의 군가독창 등이 잇고 영화부에는 조선시보 , 일본 『 뉴 - 스 』 , 무적전차 ( 無敵戰車 ) 공의 신병 ( 神兵 ) 의 상영이 잇슬 터이다 . ▼ 그 이튿날 사일 오후 일곱시부터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연극협회 , 조선문인보국회 , 조선영화제작회사 , 조선축음기제작협회 협찬으로 연극과 낭독의 밤을 열 터이다 . 영화극으로 조선해협 ( 朝鮮海峽 ) 의 상연이 잇슬 터인데 이 극에는 조영배우 일동이 출연하고 연극으로는 제일악극대 ( 第一樂劇隊 ) 의 『 격멸하고야 만다 』 일장의 상연이 잇게 되엿는데 참관 희망자는 이십육일ᄭᅡ지 왕복엽서로 조선연맹문화과에 신청하여 주기 바란다 . ▼ 그리고 미술과 문학전람회는 팔월 일일부터 칠일간 삼월 ( 三越 ) 백화점 조선 미술협회 조선문인협회 협찬으로 문인보국회 동인의 작품을 미술가들이 붓을 든 작품전시와 육해군에 관한 회화와 만화의 전람회를 개최할 터이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1.02. 고려영화 신작 풍년가 스틸전 ( 展 ) 정자옥 ( 丁字屋 ) 서 개최중 고려영화 신작 방한준 『 씨나리오 』 , 연출 金井成一 카메라 , 『 풍년가 』 는 저간 경성서 제작종료 하야 십월 중순경 방한준씨가 원판을 동경으로 가저가 전부 완료하야 래 ( 來 ) 오일 『 프린트 』 와 함께 귀성하기로 되엿는데 , 이에 압서 고영 ( 高映 ) 선전부에서는 지난 삼십일일부터 삼일간 확대 『 캐비네 』 백여점을 정자옥 사층 홀에 진열하고 『 풍년가 』 스틸전람회를 개최중이다 . 동 『 스틸 』 전람회는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잇는데 오전 중에는 출연배우 김신재 , 최운봉 , 전택이 제씨가 『 푸로마이트 』 에 싸인을 해주기로 되어 잇는데 방금 신곡감사제 ( 新穀感謝祭 ) 로 풍년제를 각 기관에서 거행 중인 이ᄯᅢ 영화 『 풍년가 』 는 큰 의의를 가진 작품으로서 그 봉절이 자못 기대되어 잇다 . ( 사진은 스틸 전람회장 ) [ 자료 ] 《동아일보》 , 1940.05.28. 화신 ( 和信 ) 영화관 입팔일 ( 廿八日 ) 부터 개관 , 화신백화점 ( 和信百貨店 ) 에서는 뉴 - 스 영화관을 계획 중이엇는데 요즈음 준비가 되어 이십팔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상영영화는 내외 뉴 - 스 급 문화영화 등으로 장안 종로 일대에 영화오락기관의 한 거름을 앞서 뉴 - 스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제공하기로 되엇다 .
[사진] 한국전쟁 중 미군 위문공연을 하러 온 마릴린 몬로와 함께 한 최은희 최은희는 좌우익의 분열이 본격화되기 전인 민족영화 건설기에 모처럼 얻은 수확이다. 1947년 청구영화사가 제작한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에 발탁되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여배우의 삶이 시작된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 나갔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어촌 청년들이 마을 처녀들과 힘을 모아 황폐한 어촌을 재건해 나간다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잘사는 집 외동딸 역을 맡아 애인 역인 최운봉과 그의 어머니 김연실 등과 함께 공연했다. 은막으로 이끈 순진한 얼굴 <노도(怒濤)>를 개작한 최금동 각본의 <새로운 맹서>는 46년 기획 단계부터 여주인공은 신인을 쓰기로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마땅한 후보 깜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에 투자할 전주(錢主)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회현동에 있는 영화사 사무실로 한 손님이 찾아왔다. 신경균 감독은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기 주연 깜이 한 명 나타났으니 와서 보라고. 이 처녀가 바로 최은희(崔銀姬)였다. 감독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람은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카메라맨, 뒷날 그녀의 남편이 된 김학성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최은희는 ‘큰 키에 때 묻지 않은 촌스런 얼굴, 가꾸지 않은 엉성한 몸매에다 집안에만 있다가 배우가 되겠다고 뛰쳐나온 순진한 모습’이었다. (김학성, 「30년을 하루 같이(6) 원로 연예인의 수기」, 『일간스포츠』, 1978.3.20.)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좋게 본 감독과 작가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영화사 사무실을 찾게 된 데는 이 무렵 토월회 연극무대에 함께 섰던 최운봉이 제 상대인 배역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며 지원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촬영에 들어가자 감독으로부터 오버 액션이라는 질책을 받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준 돈이 애인의 서울 유학비에 쓰인 사실을 알고 꾸짖자 딸이 용서를 비는 장면이었다. 관객들이 없이 스태프들만 바라보는 가운데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해야 하는 연기는 허공에 뜬 것처럼 와 닿지 않았다 .(최은희, 『고백』 영화에 데뷔하다, 2007, 랜덤하우스 코리아, 46쪽)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듯이 하다 보니 감정이 과장됐던 것이다. <새로운 맹서>는 제재(題材)와 내용이 과거 무성영화 <바다와 싸우는 사람>이나 <바다여 말하라>에 비하여 별다른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금룡, 최운봉, 김연실 등과 함께 신인 최은희가 열연했다. (「신영화평, ‘새로운 맹서’」, 『대동신문』, 1947.6.30.) 는 평을 들었다. 이 영화에 이어 캐스팅된 것이 수도청 경우회가 제작한 <밤의 태양>(1948, 박기채)이었다. 대규모 밀수단을 추적한 끝에 일망타진하는 경찰관의 이야기로, 김동원의 상대역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자 수도청 기자단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언론인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장면이 있으니 삭제해 줄 것과 사과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최은희는 <마음의 고향>에서 젊은 미망인 역을 맡았으나 연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세 번째 출연한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에서는 홍역을 앓다가 죽은 어린 아들의 49제를 지내려 절을 찾아온 젊은 미망인 역을 했다. 정적 연기가 요구되는 캐릭터 때문이었는지 주지 역(변기종)과 미망인 어머니 역할(석금성)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태우, 「조선영화의 발전, ‘마음의 고향’을 보고」, 『경향신문』, 1949.1.6.) 모두 6.25전쟁 이전의 출연작들이다. [사진] <젊은 그들>에서 남장 여인으로 분한 최은희 최은희의 연기 활동은 그로부터 5년 만인 1954년 신상옥 감독의 문화영화 <코리아>(1954)를 계기로 재개된다. 잇따라 신 감독의 <꿈>(1955)을 비롯한 <젊은 그들>(1955), <무영탑>(1957), <지옥화>(1958)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승려 조신의 꿈을 통해 애욕의 덧없음을 깨우치게 되는 이광수 원작의 〈꿈〉, 실각한 대원군의 복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열혈 청년들의 사투기 김동인 원작의 <젊은 그들>(1955), 불국사의 석가탑 건립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엮은 현진건 원작 〈무영탑〉(1957)에서는 승려를 홀린 달례(꿈)와 정혼자가 있는 남장 여인(젊은 그들), 그리고 석공 아사달을 사랑한 구슬아기(무영탑) 등 다양한 역할을 해낸다. 그녀는 어느새 ‘신상옥의 전속배우’나 다름없는 부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전미에 상응한 도발적 여성의 욕망 그러나 <지옥화>에서는 앞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전후 아프레 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기지촌의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양공주 쏘냐 역 최은희는 미군부대의 창고를 털어 내다 파는 일이 주업인 사내(김학)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도 그의 동생을 유혹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쏘냐는 동생과 도망가기 위해 정부 일당의 음모를 헌병대에 신고하지만 도망쳐 나온 정부의 칼에 찔려 죽고 사내도 총에 맞아 죽는다. <지옥화>에는 통속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6.25전쟁을 겪은 궁핍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식이 담겨 있다.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와 짙은 화장으로 빗나간 여성의 욕망을 표출하고 그동안 한복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농염한 몸매를 드러내면서 기존의 정적 이미지를 탈색시키는데 성공한다. [사진] <지옥화>에서 최은희는 형제를 동시에 유혹하는 악녀 쏘냐 역을 맡아 변신에 성공한다 이 작품을 전후하여 농촌을 무대로 한 김소동 감독의 <돈>과 김성민 감독의 액션 영화 <형제>(이상 1958)에 출연했으나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고아인 법대생이 부정한 방법으로 신분을 세탁, 변호사의 꿈을 이루게 되는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과 <동심초>(1959)의 전쟁미망인 역할에 이르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동심초>의 경우 양장점을 경영하다가 사기꾼에 걸려 파산상태에 이르렀을 때 도움을 준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물러서는 미망인의 연기는 ‘최은희가 발산하는 고절(高節)한 미망인다운 애절감이 좋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연일 대성황을 이룬 이 영화는 신상옥프로덕션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다. [사진] <동심초>에서의 최은희와 김진규 김기영 감독의 <슬픈 목가>로 1960년대 신년 벽두를 연 최은희는 <동심초>의 변주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포함, <청춘의 윤리>(김화랑), <려인(麗人)>(이봉래),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등 타사 영화 5편과 신상옥프로덕션 10주년 기념작 <이 생명 다 하도록>을 비롯한 〈로맨스 빠빠〉, 〈사랑의 역사〉, 〈백사부인〉(이상 신상옥 감독) 등 4편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 <이 생명 다 하도록>은 6,25 전쟁 때 참전했다가 척주마비로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김진규)과 어린 딸을 돌봐야 하는 인고(忍苦)의 여인상을, <로맨스 빠빠>에서는 가부장적 질서와 해체의 경계를 넘나든 영악한 맏딸의 모습을 보여 관심을 끌었다. 이 시기에 그녀와 대적할 만한 여배우는 연배가 비슷한 황정순과 주증녀, 이민자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아 내 가슴에>(1958)의 히트 이후 기세가 오른 젊은 김지미였다고 할 수 있다. 최은희에게 신상옥이라는 배경이 있듯이, 김지미에게도 남편인 홍성기 감독이 있었다. 그래서 영화계에서는 그들의 판세를 ‘연기와 미모의 대결’로 받아들였다 .(「라이벌」, 『씨나리오문예』 4호, 40쪽, 1959, 12) 이 무렵 최은희는 연기 잘 하는 스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40고개를 바라보아도 잔주름을 연기력으로 너끈히 카버하고 젊은 주역을 해내는 데보라 카처럼 연령적 육체적 조건을 극복하고 톱스타의 자리를 차지할 것’ (「‘배우동서(俳優東西)’ 데보라 카와 최은희」 , 『경향신문』, 1960.8.13.) 이란 전망을 갖게 했다. [사진] 흥행 신기록을 세운 <성춘향>의 한 장면. 오른쪽은 월매 역을 맡은 한은진 그런 점에서 1961년 시네마스코프 색채 대형화면 시대를 연 구정 대목 프로 <성춘향>(신상옥)은 이와 같은 세간의 평가와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더욱이 최은희는 역대 <춘향전> 영화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35세의 중년 춘향 역에 도전했다. 같은 시기에 경쟁한 21세인 <춘향전>(홍성기)의 김지미와는 무려 14년이라는 차이가 났다.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1935)의 문예봉이 19세에, 1955년 한국영화 중흥기의 <춘향전>(이규환, 1955)의 조미령이 27세에, 그리고 뒷날 <성춘향>(박태원)의 장미희가 21세에 춘향 역할을 맡은 것과는 대비되는 무리한 캐스팅이었다. 감당하기엔 어려운 배역이었으나 당시의 매스컴은 <성춘향>에 대해 성의 있는 고증과 색조, 허장강의 방자 역에 호의를 표명 (「예술과 기업의 대결, 매니큐어 반짝이는 두 편의 춘향전」, 『조선일보』, 1961.1.30.) 하면서도 최은희의 과년한 춘향 역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손에 바른 ‘반짝이는 매니큐어’만 지적했을 뿐이다. 이는 분장과 연기력으로 나이의 약점을 극복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성춘향>(명보극장)은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국제, 국도극장)에 참패를 안겨주며 서울에서만 74일간 3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기업적 기반을 마련한 신상옥은 신필름을 확장하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영화사로 키워 나갈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성춘향>에 이어 최은희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연산군>(이상 신상옥),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등 5편과 이만희와 유심평의 감독 데뷔작 <주마등>과 <군도(群盜)> 등 2편이 포함된 9편에 출연하였다. 여섯 살 소녀 옥희를 화자로 내세워 어머니와 사랑방에 세든 중년 남성과의 애틋한 사랑을 보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의 여주인공은 <마음의 고향>(1949), <동심초>(1960)에 이은 미망인 소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깨끗이 빗어 올린 쪽진 머리와 하얀 저고리, 절제된 미소, 조신한 동선(動線)으로 ‘동양적인 청결과 멜랑콜리한 분위기’ (「신영화, 담담하고 격조있는 가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국일보』, 1961. 8.26.) 를 자아내며 인내와 수절이 미덕, 가부장 중심 사회의 단면을 애잔하게 보여 주었다. 그 반면에 <상록수>(원작 심훈)에서는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에 나선 일본 식민지시대의 농촌 여성 채영신으로 변신해 역할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 시기야말로 최은희 연기 생애에 있어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최은희 연기 인생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산색시〉(박상호), <29세의 어머니>(이강원), <무정>(이강천) 등 외부 작품을 포함 12편에 캐스팅되면서 최다 출연 기록을 세운 62년은 <열녀문>과 <로맨스그레이>(1963, 이상 신상옥)로 자칫 굳어질 뻔한 ‘청상과부’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는 효과를 거두게 했다. 그런 잔제는 <29세의 어머니>와 같은 캐릭터에 남아 있긴 했으나 <열녀문>의 경우처럼 양반집 과부 며느리(최은희)가 머슴(신영균)과 정분에 빠져 임신을 하거나, <로맨스그레이>에 나타나듯이 단란한 가정의 가장인 대학교수(김승호)를 유혹해 돈을 뜯어내는 꽃뱀 수준의 호스티스(최은희)로 전환,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여성상을 그려 보였다. 특히 <로맨스그레이>에서 여주인공 민자의 입술 오른쪽 볼에 그려놓은 검은 점은 화류계 여성다움을 나타낸 차밍 포인트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캐릭터는 <지옥화>의 양공주 쏘냐와 함께 최은희 연기세계의 동적인 한 축을 형성하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로맨스 그레이>에서 김승호와 한 장면 [사진] <민며느리>에서 최은희는 연출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벙어리 삼룡>(1964, 신상옥)과 직접 메가폰을 잡은 <민며느리>(1965), 신상옥 감독의 옴니버스 사극 〈이조여인잔혹사〉(1969) 등에 출연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봉건주의적 인습에 희생 되는 여성의 틀을 유지한 채 <날개부인>(1965, 김수용),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 나봉한) 등에 출연, 밀수품 장사에 뛰어든 공무원(김진규)의 아내, 쇄국정책을 펼치는 대원군(김승호)의 섭정에 맞서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하다가 죽음을 맞는 민비 역 등을 통해 연기의 폭을 넓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