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이들
- 감독
- 이승준
- 제작년도
- 2008
1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는 이것을 시인해야만 한다. 영화 관람이 끝나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그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라는 말로 롤랑 바르트는 「영화관을 나오며」를 시작한다. 나도 그 순간을 좋아한다. 문제는 영화관을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관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콜릿이 코팅된 아이스크림 콘의 꼬다리를 먹기 위해서는 먼저 나머지 부분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나이를 먹으며 어느 순간 군것질을 하면 곧바로 군살이 붙는다(대사량이 떨어져서)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늙었다(만나는 사람만 만나서)는 사실도. 나는 시간으로 둥글어진 다른 이들의 얼굴에서 나의 늙음을 본다. 굴뚝을 청소하는 두 아이가 등장하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혹은 그냥 거울처럼. 바르트는 계속해서 쓴다. “영화관 안에서는, 아무리 멀리 앉아있더라도, 나는 스크린이라는 거울에, 나 자신을 자기애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타자의” 상상적 세계에, 코가 납작하게 짓눌릴 정도로 바짝 들이댄다(스크린에 최대한 가까이 앉는 관객은 어린아이이거나 영화광(cinéphiles)이라고들 한다).” 그러니 그날 내가 극장에서 너무 많은 늙음을 보았다고 해서 너무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내가 어린아이가 아닌 만큼 씨네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린아이와 함께 살며 몇 명의 영화광을 알기는 한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나는 종종 씨네필이 아닌 한 인간(=나)에게 얼마나 많은 씨네필-지인들이 필요할까 자문해보곤 한다. 내 대답은 늘 같다: 한 명도 너무 많다! 오해하면 안 된다. 체스터턴을 따라 말하면,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을 사랑할 수는 있으며 사랑하기도 한다. 여기에 솔직한 마음을 덧붙인다면,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극장에 갔다. 아이도 씨네필도 없이. 아내와 나 둘이서.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었고, 우리가 함께 극장에 갔던 건 < 극한직업 >이 마지막이었다. 주말 오후에 아이를 어머님께 맡기고 다녀온 것이었다. 힘들 때 하는 선택이 그 사람의 본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이 맞다면 나는 3년 만에 가는 극장에서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지 않고 주저없이 < 탑건: 매버릭 >을 고르는 사람이다. < 헤어질 결심 >이나 < 브로커 >가 아니라… 문득 임재철(=씨네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무슨 길을 잃었냐고. 내가 보기엔 한국 영화에 들어간 적도 없는데, 안 그래?” 3 <극한직업>과 <탑건: 매버릭> 사이 나는 극장에 모두 다섯 번 갔는데, 그중 네 번은 JD와 함께(나머지 한 번은 혼자)였다. 가장 최근은 지난 6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GV를 진행하기 위해 영자원에 갔던 것이다. 장학퀴즈 우승자, 베스트셀러 작가, 천재 감독으로 불리지만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씨네필에 따르면 “그저 딜레탕트일 뿐”인 이규형의 1987년 작품으로 서울 관객 26만 명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참고로 같은 해 개봉한 외국 영화들의 대략적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오버더톱 >, < 록키4 >, < 코브라 >, < 플래툰 >, < 스타워즈:제다이의 귀환 >, < 백 투 더 퓨처 >, < 프레데터 >, < 죠스3 >, < 작은 신의 아이들 >, < 컬러 오브 머니 >, < 파리, 텍사스 > 그리고 < 탑건 >. 4 그날 우리가 길을 잃기는 했다. 오랜만에 찾은 웨스턴돔은 기억보다 훨씬 복잡했고, 낡았다. 그리고 그건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중간 공실이 된 상가와 저녁 시간에도 텅 빈 식당들과 달리 극장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지만 직원은 적었고 관리가 되지 않은 티가 곳곳에서 났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관객이 줄고 그에 따라 인원을 감축했지만, 관객이 다시 늘어난 이후에도 충원을 하지 않아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렇지. 내 기억 속 극장은 대부분 새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하지만 이내 그것이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우리 세대의 특별한 경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내가 스무 살이 될 무렵 멀티플렉스가 생겼다. 처음에는 강변으로, 다음에는 코엑스로. 우리는 각자의 친구들과 함께 새로 생긴 극장을 찾아다녔고, 그러는 동안 여기저기 지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가깝고 새로운 상영관을 찾았고, 다시 더 가깝고 새로운 상영관을 찾았다. 더 이상 가까운 곳에 새로운 상영관이 생겨나지 않을 때까지. 그러면서 시간과 함께 서서히 낡아가던 기존의 극장들은 팬데믹을 거치며 급격히 쇠락한다, 뭐 이런 이야기 아닐까? 그리고 그건 (상업) 영화 자체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아니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문화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이거나. 한 마디로, 메인스트림 문화가 적절한 세대 교체의 리듬을 놓친 채 동일한 인물들, 주제들, 스타일들과 함께 고인물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5 결론부터 말하면 <탑건: 매버릭>은 좋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시험비행단을 해체하러 온 에드 해리스 위로 탐 크루즈가 모는 전투기가 지나가는 장면부터 눈물이 날 뻔한 걸 참느라 혼났다. 다만 제목이 <탑건: 매버릭>이 아니라 <탑건: 우리들의 블루스>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도 후반부 공중전 장면 재밌었고, 잘 찍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씨네필이 말했다. 전편의 편집이나 데쿠파주를 거의 똑같이 따라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전편에서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젊은이로 등장했던 톰 크루즈가 속편에서는 늙은이(young sixty)가 되어 반항하는 새로운 젊은이와 함께 등장하지만 영원한 대위(captain)로 머물며 스스로 기성세대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말하면 아직도 윗세대에는 반항하면서 그렇다고 아랫세대에게 자리를 내주거나 당해주지는 않은 채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잘난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곱게 받아주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런 나를 위로하려는듯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씨네필이 말했다. -탐 크루즈가 내한했잖아요. 영상이 있는데, 중년 남성 관객이 영화를 보고 막 울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탐 크루즈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괜찮아요! 마음껏 우세요! 이건 바로 당신을 위한 영화에요!” 6 이 글을 마감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내게 유운성(=씨네필)은 유럽의 어느 영화 평론가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름도 정확한 국적도 기억나지 않지만 주간지에 매주 빠짐없이 영화평을 쓰던,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단명한 평론가를 회고하며 다른 이가 쓴 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글쓴이가 집에 가려는데 문제의 영화 평론가가 하얀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더란다. 마감 날이라서 원고를 쓰고 있나보다 생각하고 집에 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없어서 다 쓰고 집에 갔나보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나온 잡지를 보니 그의 영화평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의 이름만 있고 본문이나 제목은 없이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원고를 펑크낸 게 아니다. 하얀 백지를 원고로 제출한 것이다. 바로 그거다! 나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표절을 할 순 없기에 이 글을 쓴다. 내가 <탑건: 매버릭>처럼 그 영화 평론가의 속편도 아니고… 7 <탑건: 매버릭>에서 또 재미있었던 점은 영화가 이런저런 세부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부분에서 <탑건: 매버릭>은 온전한 서사라기보다는 설정집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이를테면 젊은 파일럿들을 다루는 방식이 그렇다. 영화에서는 굳이 다루지 않겠지만 이런 인물들이니 원한다면 마음껏 2차 창작을 해보라고, 라고 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혹은 내가 출처를 잊어버린 일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감옥에 간 사람의 이야기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너무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던 탓에 매일 똑같은 농담들을 주고 받았고, 어느 순간 농담에 번호를 붙여서 매번 번거롭게 농담을 이야기하는 대신 번호를 부르는 것으로 갈음하게 되었다. “45번.” 누군가 말하자 사람들이 웃었다. “125번.” 사람들이 뒤집어졌다. 그렇게 번호들이 이어지고 깔깔 대잔치가 벌어지던 와중에 영문을 모르던 신참이 시험 삼아 말했다. “77번.” 그러자 순식간에 감방이 조용해진다. 잠시 후 누군가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그건 적절하지 않은데. 사과하세요.” 그러니까 <탑건: 매버릭> 또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반복되어온 세부들을 번거롭게 이야기하는 대신 번호를 부르듯 간략한 설정만 제시해주고 넘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의 나머지를 번거롭게 일일이 쓰는 대신 몇 가지 아이디어를 질문의 형태로 제시하며 영화의 예를 따를 생각이다. -비와 신세경이 주연한 한국의 항공 블록버스터 < R2B >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탑건>의 아류라기보다는 <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의 속편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R2B>가 <탑건>과 <탑건: 매버릭>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고 주장하는 건 가능할까? -<탑건>과 <탑건: 매버릭>과 <R2B> 중에서 비천한 영화는 무엇이고 비천하지 않은 영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몇몇 유튜버를 비롯한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전에 참전하겠다며 불법 출국을 감행한 사건이 <탑건: 매버릭> 같은 영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혹은 < 라이언 일병 구하기 >를 두고 “아주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그리고 스필버그의 재능이 최고도로 발휘된 그런 훌륭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정말 감동적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미국인, 미국 국적이라는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한 박찬욱 감독이 <탑건: 매버릭>을 어떻게 평가할지 유추한다면? -왜 이번 화에는 JD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가? 그것은 지난 화의 마지막에 임창정의 신곡 <나는 트로트가 싫어요>의 유튜브 링크를 보낸 것에 대한 일종의 앙갚음인가? -기타 등등… 8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는 이것을 시인해야만 한다. 원고를 마감하고 워드프로세서를 종료하는 순간을 그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의 집’은 단순히 놀이로만 규정하기엔 지극히 연구대상이다. 장난감 인형 하나의 문제 같지만 이 ‘놀이’에는 꽤 복잡하고 정교한 세계가 구현된다. 대게 소유주인 아이를 중심으로 일종의 역할극이 완성되는데, 인형이 기거할 집안에는 가재도구가 즐비하며 남녀로 구성된 부모와 (대게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다. 아이가 경험한 실제 세계에 따라 인형의 집은 가정을 넘어 학교, 상점으로 확장되며 가재도구의 수준도 달라진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놀이’처럼 규정되지만 인형의 집 놀이는 절대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성장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나이에 맞는, 자신의 이상을 투영한 ‘인형의 집’을 필요로 한다. 첫 장면을 웨스 앤더슨 방식의 정갈한 인형의 집으로 시작한 < 문라이즈 킹덤 >은 이제 소녀를 어린 동생들과 다르게 만드는, 캠핑으로 안내한다. 좋아하는 소년과 함께하는 일탈에, 소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챙겨 넣은 가방을 챙겨 들고 나간다. 텐트는 이제 소녀의 세계를 완성할 다음 단계의 ‘인형의 집’으로 자리한다. 조던 복트-로버츠Jordan Vogt-Roberts 감독의 코믹 드라마 < 킹 오브 썸머 The Kings of Summer >(2013)는 < 문라이즈 킹덤 >과 같이 자기만의 영역을 갈구하는 사춘기 소년들의 이상이 투영된 일종의 ‘인형의 집’ 놀이다. 영화의 또 다른 제목으로 알려진 ‘Toy’s House’로 설명하면 조금 더 그들이 목적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사춘기에 접어든 열다섯 살 소년 조(닉 로빈슨)는 간섭이 심한 아빠를 피해 집을 나갈 궁리를 한다. 숲 속에 어른들이 모르는 집을 짓기로 결심한 그는 절친한 친구인 패트릭(가브리엘 바쏘)을 설득한다. 위험천만한 이 도전에 흥미를 느낀 친구 비아지오(모이세스 아리아스)가 가세하면서 이들 도주 멤버가 완성된다. 조의 집짓기 프로젝트는 학교에 있는 비밀 공간을 아지트로 삼는 것과는 스케일부터 다르다. 그들이 발견한 숲은 도심과는 한참 떨어져 있어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완벽한 도피의 공간이며, 통나무집 설계도는 실제 집의 구조를 연구해 차근차근 그럴듯하게 만들어진다. 건축의 재료 역시 여기저기서 주워온 재활용이긴 하지만 통나무집의 재료로 하등 손색이 없는 것들이다. 그렇게 완성된 집의 모양새도 나쁘지 않다. ‘전원라이프’같은 이름을 가진 잡지 커버로 소개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통나무집 조와 친구들에게 통나무집이 주는 자유의 크기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통나무집에서의 아침, 찬란한 햇빛에 눈을 뜬 패트릭에게 조는 말한다. “숲에는 시간이 없어.” 숲의 생활은 규칙, 규율, 복종, 명령이 존재하는 바깥세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이상향, 유토피아다. 조에게는 ‘욕실에서 마스터베이션하는 것’을 부끄럼 없이 지적하고, 여자 친구와 전화 통화에도 물색없이 끼어드는 창피한 아빠로부터의 도피를 뜻하며, 패트릭에게는 ‘햄버거 먹은 뒤에 감자튀김 먹는’ 것도 ‘주머니 없는 파란 셔츠’를 입었다고 사사건건 지적하는 아빠와 알레르기가 생길 정도로 귀찮게 질문을 퍼붓는 엄마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저 괴짜처럼 보이지만 ‘나한테는 성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비아지오에게도 사회로부터 자체적으로 격리된 이 공간이 이상적으로 다가오는 건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집을 나간 후 경찰서에 신고하러 간 부모들은 ‘납치범의 소행’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에는 “가출할 이유가 전혀 없는” 당신의 아이들이 집을 나갈 이유는 족히 100가지도 넘는다. 사춘기는 그런 나이다. < 킹 오브 썸머 >에는 1950년대 미국, 약자인 여성들을 억압하던 제도에 맞선 소녀들의 일탈을 그린 로랑 캉테의 < 폭스파이어 >(2012)를 연상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많다. 소녀들은 세상을 향한 복수를 꿈꾸며 자신들만의 비밀동맹을 맺고 함께 살 공간도 마련한다. 하지만 애초 가졌던 동맹의 순수성과 달리 남성과 권력, 자본이라는 사회에 맞서 복수를 하는 과정에는 점차 과격한 행동과 범죄가 수반된다. 소녀들은 이로 인한 내부의 분열을 감당할 해결책을 결국 찾지 못하며 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어른의 통제를 벗어난 4주간 감행된 숲에서의 생활, <폭스파이어>의 소녀들이 꿈꾸던 거창한 전복에서 오는 실패와는 강도를 달리하지만 <킹 오브 썸머>의 소년들의 생활에도 점점 고통이 뒤따르기 시작한다. 조는 패트릭에게 닭고기를 자급자족했다고 하지만, 실은 식료품점에서 구입해 와서 갈등이 깊어진다. 통나무집에 기거하는 근본취지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사춘기 이성 간의 꼬인 관계를 푸는 것도 쉽지 않다. 조가 좋아하던 소녀는 실은 자신이 아닌 패트릭에게 마음이 있었다. 상처받은 조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공고했던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고 즐거웠던 공동체 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숲이라는 대안을 찾기 전, 조가 먼저 독립해 집을 나간 누나에게 자신도 아빠에게서 벗어나게 제발 데려가 달라고, 집을 나가게 해달라고 조르는 장면이 있다. 그때 누나는 “2년만 지나면 아빠가 널 못 보내서 안달일 걸”이라며 그를 설득한다. 조와 친구들이 그토록 절실히 열망했던 도피의 시간은 그 반항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신기루 같은 것일 수 있다. 소년들에게 결코 짧지 않은 4주간의 여름. 그들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무균실 같은 도피처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소년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반목했던 어른들과 화해하며, 그렇게 각자의 성장하는 시간이 지나간다. < 킹 오브 썸머 >(위), < 스탠 바이 미 >(아래) < 킹 오브 썸머 >는 지금 시대로서는 좀 유별난 형태의 고전적 성장담이다. 조는 ‘말 안들을 거면 내 집에서 나가’라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버지의 독단에서 벗어나 ‘삐뚤어질 때로 삐뚤어지겠다’고 마음먹지만, 의외로 자연의 공간인 숲으로 발길을 돌린다.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도심으로 가 악행을 저지른다거나 익명의 공간인 SNS로 숨어들어 분노를 표출하는 요즘 아이들의 해소 방식과 비교해보자면 풋풋하기 그지없는 선택이다. 아무리 봐도 이 정도면 사뭇 건전한 비행이다. 이 영화의 숲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영화의 배경과는 달리, 시종 햇살이 비치는 밝고 명랑한 숲이다. 잔뜩 기대를 품고 숲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 조, 여름 한낮을 숲에서 낚시하고 뛰어노는 소년들의 모습, 모닥불이 타오르는 정경, 숲 속의 동식물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몽타주 장면들이 주는 감흥은 마치 집나간 아이들의 성장담을 그린 지난 세대의 걸작 < 스탠 바이 미 >(1986)의 소년들의 모습과 포갠 듯 겹쳐진다. 특히 배경이 된 오하이오 주의 숲과 어우러진 오리지널 스코어는 심각하지 않은 소년들의 일탈을 완성해주는 훌륭한 재료다. <쥬라기 월드>의 테마파크에 발을 들인 자크 역으로 알려진 닉 로빈슨이 조 역할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데, ‘미소년’의 모습이 가장 빛을 발하는 시기의 포착인지라 보는 순간 빠져들 각오를 해도 좋다. 2013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영해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호수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순간을 캡처한 포스터의 이미지가 이 영화로 들어갈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정확한 규칙이 오히려 익숙하고 편해진, 일탈이 딱 싫은 어른의 나이를 지금 통과하는 중이라면,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나만의 룰을 원했던 그 시절의 열망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소한 감상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최근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 사람의 모습을 지닌 신비한 존재에 대한 영화, 드라마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 늑대아이 > 역시 이러한 트렌드에 부합하는 작품 중의 하나라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감독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섬세한 감성연출은 <늑대아이>를 통해 더욱 성숙해졌고, 이야기는 깊이를 더했다. 평범한 여대생 ‘하나’는 사랑으로 인해 강해진다. 강의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그’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고, ‘그’가 늑대인간이라는 충격적 사실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동화같은 사랑은 너무나 짧았고, 그녀와 ‘유키’와 ‘아메’ 두 아이만이 험한 세상에 덩그라니 남겨진다. 하나는 믿고 의지했던 사랑을 잃었지만 모정이란 다른 이름의 사랑으로 홀로 서기에 나선다. 우선 아이들을 위해 사람의 왕래가 뜸한 시골 외딴 집으로 무작정 이사한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하고, 늑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지조차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녀의 꿋꿋한 의지와 노력은 버려져있다시피 한 집을 깔끔하게 바꿔 놓고, 척박한 땅은 농토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아이들은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그녀를 폐쇄적이라 생각하던 마을 사람들도 차차 마음을 열고 도움을 주면서 세명의 단촐한 가족 뿐이었던 집은 서서히 사람들의 온기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두 아이들이 성장하며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다. 활발한 성격의 누나 유키가 남들과 다른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반면, 심약한 아이였던 남동생 아메는 오히려 강인한 늑대인간으로서의 본능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하나는 자신의 아이들이 더 이상 엄마를 찾으며 품을 파고 들던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느새 자신의 길을 결정할 만큼 훌쩍 커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왔음을 깨닫게 된다. < 늑대아이 >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연출 뿐 아니라 최초로 원작 및 각본에까지 참여하며 공을 들인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에 국한되지 않고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실사 영화의 미술 감독, 의상 감독 등이 참여했다. 작품은 늑대 인간이란 판타지적 요소를 소재로 사용하고 있지만 부모의 헌신적 사랑, 아이들의 성장통 등 우리 주변의 보편적 이야기를 담아내려 하고 있다. 판타지의 세계가 아닌 전형적인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점에서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자연스레 공감대를 느끼게 되고, 남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모습에서 전해지는 감동은 더욱 증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