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 감독
- 신재인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신미경, 송남희, 한가영, 전용미, 이효준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파울 클레, 1920) / 펜과 수채, 이스라엘 박물관, 예루살렘.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던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그림을 기억해? 벤야민은 그의 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파울 클레의 이 그림을 보며 역사의 잔해 더미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지. 날아오르려는 천사는 역사의 잔해 더미 앞에서 눈을 감지도, 날개를 접지도 못해. 폐허가 된 현재를 바라보고 있지. 과거의 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진보라는 폭풍 앞에서 말이야. 우리는 산개해 있는 역사의 잔해 더미를 더듬는 영화를 보려 했고, 글을 읽으려 했고, 그러한 글을 쓰고자 해왔던 것 같아. 우리는 영화 앞에서 눈을 감을 수 없었지. 아마 늘 주변화된 것에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의 성정을 감히 벤야민과 천사에 이입해 왔던 것일지도 몰라. 사실 이렇게 글을 계속 쓰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우리는 그저 늘 함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필요로 해왔고, 그렇게 기꺼이 서로에게 동료의 자리를 내어주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글을 찾아 헤매다 결국에는 스스로 읽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글을 끝내는 찾지 못했잖아.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 ‘그’ 영화와 그 ‘영화’, 그리고 ‘영화’ 자체에 관해 말하는 글. 그러니까, 그러한 글은 어디에 있을까?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질문을 되뇌면서, 이 끝없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처음에는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가 점점 질문에 대한 문장을 찾았지. 문장의 끝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우리의 것이 되었어. 글로써 완성되는 영화. 그럼 이건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물음과는 상반되잖아. 결국 영화에 대해 말하는 글은 없고, 주변을 맴도는 글만 남아있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것만 말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비평의 흐름에서 아주 작은 귀퉁이의 잔해가 되겠지. 오늘날 한국에서의 비평은 주류와 비주류, 프로와 아마추어가 구분되어 있다기보다는 사실 모두가 비주류라는 조각으로 맞춰지지 않은 채(혹은 프로는 아마추어인 체하고, 아마추어는 짐짓 프로인 체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비평과 작품의 ‘쓰루패스’를 지향하는 《마테리알》, 서버와 리시버가 편지를 보내고 응답하는 ‘비평의 편지’, 《씨네21》이나 《필로》… 그들까지 우리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어. 더는 비평의 독자를 상상하지 못하게 된 걸까? 우리가 비평과 한 발짝 떨어진 존재인지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퍽 만족스러워. 우리는 사라질 기회를 찾고 있어. 천사 앞에 놓일 잔해가 될 날을 기다리며. 우리가 사라지게 될 날은 매년 갱신하는 《 해파리 》의 도메인을 결제해야 하는 가을이 될까? 행방불명이 되자. 사라진 작가들처럼, 사라진 배우들처럼, 사라진 감독들처럼, 사라진 영화관들처럼, 사라진 필름들처럼. 그리고 신재인 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화를 위해. (좌)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중 (사진: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KOBIS ) (우)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신재인 감독은 2000년대 초반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어. 단편영화 < 소세지 >(2000),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2001),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2002), 그리고 장편영화 < 신성일의 행방불명 >(2005)을 끝으로 사라져 버렸지. <김갑수의 운명>, <심은하의 잠적>, <어머니가 상했다>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말이야. 신재인은 『포도주』(2007)라는 책을 한 권 남기기도 했는데(사실 로맨스 소설을 꾸준히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책은 그가 쓴 66개의 단편을 한 데 묶었고, 2000년에 대산문화재단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세상에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에 출판의 형태로 공개됐어. 『포도주』의 단편 「남이 먹을 때1」과 「너의 진실1」은 영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의 원전이기도 해. 단편의 화자는 모두 다른 듯 보이지만, 신재인 스스로가 ‘작가의 말’에서 화자는 “다중인격자”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처럼, 한 사람의 목소리로 느껴지기도 해. 「리얼 드림1」에서 주인공 ‘나’는 꿈을 꿔. 그는 눈을 뜨자마자 꿈을 기록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꿈을 꾸는 시간은 더욱 길어져만 가. 꿈도, 어머니도 없는 그의 사적 시간은 줄어만 가고, 그는 결국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게 돼. 완결 없는 결말로 향해 가는 그의 이야기는 신재인의 영화와 같아. 신재인의 영화는 절대 문턱을 넘지 않아. 지점을 향해 나아갈 뿐, 그저 시도할 뿐이야. 2006년 신재인 감독의 <어머니가 상했다>(가제) 연출팀 모집 공고글 발췌 신재인의 영화는 체제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등장으로 하여금 규범을 흔들어. 이방인은 체제의 안과 바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해. 그의 세계에서 규범이란 죄의식과 위선, 성스러운 것과 천한 것, 그리고 신성모독으로 뒤틀린 정상성의 형태야. 그리고 이방인, 혹은 메시아는 뒤틀린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정상의 세계를 뒤흔드는 시도에 가까워. <신성일의 행방불명>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먹는 행위는 죄악이 돼. 보육원의 아이들은 아버지(신)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음식을 보급받으면, 불이 켜짐과 동시에 흩어져 버리는 바퀴벌레처럼 재래식 화장실이나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 공중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수평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배설과 섭취를 등가로 만들어. 먹는 행위가 수치스러운 행동이 되는 보육원에서 남들보다 ‘뚱뚱한’ 성일( 조현식 )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천사를 만나. 성일은 이 뒤틀린 세계를 구원할 메시아일까? 보육원에는 바깥에서 들어온 이영애( 문슬예 )가 있어. 영애는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아이야. 영애는 권사의 주방에 들어가 몰래 음식을 훔쳐 먹거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배고파”를 외치며 음식을 먹어. 아이들은 영애를 두려워하면서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보육원의 규범은 점차 흔들리고, 마침내, 그곳을 통치하던 원장( 예수정 )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영애를 교단에 올려 억지로 음식을 먹는 벌을 줄 때, 아이들이 반기를 들려고 하는 순간, 폭력의 문턱을 넘어가려는 바로 그 순간, 영화는 폭력을 중지하고, 보육원 안과 바깥의 경계를 만드는 철문 앞에 서 있는 성일의 쇼트로 이동해. 보육원 바깥에 있던 카메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상승’하여 문을 넘어 다시 성일을 쫓지. 흑백의 영화는 컬러로 전환되고, 보육원의 성일은 터미널에서 눈을 뜨게 돼. 성일은 행자와 같은 모습으로 모텔촌과 먹자골목을 돌아다니며,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먹고, 사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지. 신재인이 영화에서 흑백과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 또한 흥미로운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 “흑백은 아름답기에 억압받는 보육원 장면은 흑백으로 아름답게, 해방 공간인 바깥세상은 현실적으로 추하게 담고 싶었다”라고. (상2) 흑백의 보육원 장면 (하2) 컬러의 바깥세상 아이들을 통치하던 원장이 벌을 받는 뒤집힌 보육원의 시간과 성일이 돌아다니는 시간은 이리저리 중첩돼. 성일은 보육원의 안과 밖, 모든 시간에 있어. 아이들이 교단 위의 원장에게 돌을 던지고 음식을 던질 때, 바깥의 쇼트와 교차되던 성일이 보육원 안에서 폭력을 막는 장면이 프리즈 되고, 반복되며, 영화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폭력의 물리적 접촉을 막아. 영화의 마지막, 성일이 원장과 그의 아들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치킨을 뜯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들과 동석하게 됐을 때, 카메라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창의 바깥에서 점점 물러나지. 흥미로운 점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을 은유하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도, 보육원 건물에 높이 매달려 있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낡은 나팔형의 스피커라는 존재야. 신재인 영화에서 신을 위시하는 카메라는 신이 될 수 없어. 오히려 신은 낡고 기능하지 않는 버려진 모습을 하고 있지. 이러한 시점의 카메라는 신재인의 다른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해. <소세지>는 남성, 여성, 아이로 구성되는 소위 ‘정상 가정’으로 보이는 구도를 유지해. ‘소세지’는 남성 성기의 직접적 대리물이 되고,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소세지를 핥을 때, 아이는 “나도 먹어보자”라고 말해. 재미있는 점은 여성-남성-아이의 구도가 계속 바뀌고 있음에도 삼각형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이 같은 구도는 가부장을 환기하면서도, 남성의 소세지를 핥는 데 집중하던 여자가 아이가 재촉하니, 남성 성기와 가부장을 대리하는 소세지를 다른 길쭉한 야채들과 함께 싹둑싹둑 절단 내고, 소세지 야채볶음으로 만들어내는 코미디로 무너지지. 여자와 아이는 소세지 야채볶음을 맛있게 나눠 먹고, 카메라는 투샷에서 물러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을 보여줘. 마치 르네 지라르가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서 욕망은 욕망하는 대상과 욕망의 주체, 그리고 욕망을 모방하도록 하는 매개자가 있다고 했을 때, 영화는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던 남성을 결말부에 욕망으로부터 아예 배제해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신재인 영화는 오히려 욕망의 매개자를 영화 바깥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세계의 질서와 규범을 계속해서 조롱하는 거야.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중 (사진: "아카이브-역대상영작-KAFA 40주년 특별전", 전주국제영화제 ) 마찬가지로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는 주인 없는 시점 쇼트가 많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의사( 홍승환 )는 환자의 머리에 진실을 넣었고 그것을 깨끗하게 봉합했다고 말해. 이때 카메라는 환자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환자는 죽고, 법정에 선 남자는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바라봐. 떨어지는 물의 시점은 남자를 내려다보고, 영화는 법정과 교회의 연단, CCTV의 시점 쇼트를 제외하고는 의사의 시점을 제외한 인간의 시점으로 느껴질 만한 쇼트를 배치하지는 않아. 의사가 진실을 넣은 환자의 머리를 봉합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영화는 영화의 안과 바깥을 시점으로 연결해 봉합하는 데에도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거지. 의사는 교회와 법원을 오가며 자신의 죄를 고하는데, 목사( 정인기 )와 판사( 권택기 ) 앞에서 물을 토해내며, 자신이 토해내는 진실에 잠겨 버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남자 앞의 모두는 도망을 가. 판사, 목사, 변호사, 소위 “‘사’짜”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경건한 십자가 앞에서 진실은 마침내 물고문실로 연결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은 진실을 고해야 하는 그의 정신세계에 빠져 있다가 CCTV 화면을 통해 빠져나와. 이러한 주인 없는 시점과 그것의 물성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규칙이나 명령, 진실과 거짓, 그리고 성경의 인용이라는 언술로부터 순응주의적 진실을 전복해. 마치 신재인이 유명인의 고유명사를 쓰면서 실제 세계의 아우라, 숭고를 벗겨내는 방식을 전유하는 것처럼 말이야. (특히 재미있는 점은 ‘성일’이 영화감독 신성일과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모두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고.)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비위가 좋은 사나이인 소년 준섭이 지우개나 배설물을 먹을 때, 그를 보여주는 부감 쇼트와 같은 방식은 영화 바깥의 타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지. 준섭은 이 영화에서 똥을 먹음으로써 사랑을 쟁취하고, 외계인의 우주선을 먹음으로써 인간을 구하며, 음식난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자폐적 상상력은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에서처럼 망가진 메시아의 형상으로 작동하는 거지. 신재인 영화는 일상적이고 동질적인, 즉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기능을 수행하는 영화 플롯과 규정적 한계의 바깥에서 규범을 소격화하여 불균질하게 연결함으로써 자아로 필연적으로 빠져버리는, 영화와 영화 바깥에 초월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우리는 이런 조각나고 어긋난 것 같은, 주인공의 상상으로 치부될 법한 영화의 장면들이 산란함으로써 ‘진실’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해. 그래서 신재인이 『포도주』에서 말하듯 영화들은 모순 없는 매끄러운 이야기로서 영생하지 않고 언젠가 사라지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필멸하기에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장면은 진실로 향하게 되겠지. 신재인은 운동하는 진실을 포착해 불쑥 솟구쳐 오르도록 글과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너머의 무언가는, 현실에 천착해야 하지만 현실에서의 도망침을 꿈꾸는 우리에게 닿으며 필연적으로 주변화되는 비평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그러므로 신재인 영화는 영화 속 세계 바깥에서도, 그저 쌓이고 잔해가 되어, 사라짐 후에도 우리 앞에 놓인 영화처럼 ‘새로운 천사’ 앞에 놓일 거야. 다시 돌아와,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과거를 들여다보되 지금의 시간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야. 메시아를 이야기하면서도, 메시아를 신격화하지 않는 벤야민처럼, 우리는 신재인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이고, 복수적인 시간의 공존과 긴장을 경험해. *** 주1. 1) 배장수, " 장편 데뷔작으로 주목 받는 두 감독 '신재인·박성훈 '", 《경향신문》, 2006. 2. 16. 해파리(영화웹진) l www.haepari.net.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및 전시 도록을 쓰거나, 영화계 인력을 인터뷰하고, 독립상영회를 기획한다.
김준겸 감독의 단편영화 < 여자여 >는 그 제목만큼이나 이상한 이야기를 가진 영화다. 인적 드문 해변, 한 남자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무료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낚싯대의 반응은 없다. 핸드폰이 울린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자의 아버지다. 이왕이면 큰물에서 노는 큰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하는 아버지에게, 남자는 큰사발 먹고 큰 사람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전화를 끊고 다시 낚시에 집중하려는데, 이번에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녀는 아들에게 성경 속의 어부 베드로를 이야기한다. 이왕이면 사람을 낚으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황당한 전화를 차례로 받으면서 남자가 보이는 반응이 좀 특이하다. 그는 세상에 무심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남자의 얼굴은 평온함을 잃지 않는다. 의미가 미끄러지는 전화 통화가 모두 끝나고 나면 이제 해변엔 완벽히 남자 혼자다. 새들만 바다 위를 날아다닌다. 그때, 갑자기 찌가 흔들린다. 남자는 낚싯대와 격렬한 사투를 벌인 끝에 무언가를 낚는다. 그가 낚은 것은 사람이고 여자다. 여자의 이름은 놀래미,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횟집으로 간다. 횟집에서의 데이트, 여자의 다리 밑으로 자꾸만 물이 흘러내리고, 식당 아줌마는 물기를 닦으라고 성화다. 여자는 갯지렁이를 먹고, 수조의 물을 받아 마신다. 이 모든 괴상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남자는 그 일들이 일상적인 것처럼 반응한다. 조금 더 관계가 깊어졌다 싶었을 때, 여자가 몸이 다 말라 버릴 것 같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따라나선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해변에서 남자는 다시 혼자 남는다. 남자는 여자가 사라진 바다 쪽으로 격렬하게 뛰어간다. 멀리 바다에서 여자가 돌고래처럼 뛰어오르는 광경을 보는 동안, 나훈아 의 <해변의 여인>이 간드러지게 흘러나온다.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은 마치 나라를 잃은 사람 같이 장엄하지만 얼굴 표정만은 평온하다. 영화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끝난다.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의미 없는 세상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우리들에게 이 영화의 남자는 ''''''''당황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일상적으로 반응할 것. 그것만이 지금 여기를 통과할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영화들이 있다. 막 나가자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낯선 세계가 낯익은 무엇인가로 변모하는 느낌을 주는 영화들. 의미에 저항하면서, 의미 사이의 결을 파악하는 영화들. 말로 파악되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있는 영화들. 명확함보다는 모호함의 상태로 빠져드는 영화들. 그런 영화가 독립영화 계의 주류를 이루던 시절도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었던 신재인의 영화들. 혹은 이종필 의 < 달세계 여행 >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런 영화의 계보에 놓기에 김준겸 의 < 여자여 >는 너무 소품인 데다가 시각적인 야심이 작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리 없이 강하다. 문득 다가와 낯선 세계를 펼쳐 보인 다음, 홀연히 사라진다. 거기에 조우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조우했다면 몇 번이고 돌아보게 된다. 돌아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인다.
똥을 먹는 장면이 가장 유명한 영화는? 단연코 존 워터스의 < 핑크 플라밍고 >를 들겠다. 쓰레기 영화의 영원한 히로인, 드래그 퀸이자 게이였던 디바인이 방금 배출된 따끈따끈한 실제 개똥을 주워 먹는 장면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 쓰여 충격을 통해 이 영화가 묘사하는 쓰레기 같은 세상이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 핑크 플라밍고 >의 똥 먹기 신재인 감독이 영화아카데미 재학시절 만든 < 재능 있는 소년 이준섭 >은 그 장면의 확장판 같은 영화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창시절을 그리 달콤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다. 왕따를 당하거나 힘든 환경에 놓이지는 않았었지만 그랬다. 선생들하고 나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몇몇 친한 친구를 제외하면 딱히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늘 동네 오락실에서 시간과 돈을 축내곤 했다.) 아마 지금 20대 초중반이 되었을 영화 속 준섭이는, 나보다 조금 더 외로워 보인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허술한 아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 때문에(나이가 적든 많은 어떤 조직이든 그런 ‘다름’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따돌림을 당하는 준섭이는, 남다른 재능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비위다. (이 재능이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있기도 하다.) 먹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사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샤프심을 씹어 먹거나, 지우개를 조금 떼어먹거나 하면서 친구들을 웃기기 위해 노력하는. 준섭이는 그런 친구들의 심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이런 행동을 ‘웃기기 위해서만’ 하지는 않는다는 게 다른 점이다. 준섭이는 일련의 행동들을 본인의 사회적 생존과 직결 지어 생각한다. 이렇다 할 다른 재능이 전혀 없기 때문일까? (배역을 연기한 배우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렇게 보인다.) 그는 미래에 본인이 하고 싶은 일, 꿈을 모두 이 비위에 연결하여 생각한다. 이를테면 지구침공을 위해 화성에서 온 외계인의 비행기에 잠입해 내부 부품들을 다 먹어버려 전쟁을 막는다던가, 언젠가 식량자원이 부족해질 때 마치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뭐든 먹어도 살 수 있다’고 복음을 전파해 기아를 해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진리를 영접한 노숙자들은 밥이 아니라 그릇을 먹고 빵이 아니라 빵을 싸고 있는 비닐을 먹으며 감격한다.) 그 꿈에는 항상 준섭이가 좋아하는 소녀 같은 반 은혜가 있다. 뭐 물론, 잘하는 게 이상한 걸 먹는 것뿐이라 소년은 소녀 앞에 가서 연필을 씹어 먹거나... 하는 게 애정표현의 전부다. (가끔 지우개도 먹는다.) 소년의 상상 그러던 어느 날, 은혜는 준섭에게 “너 나 많이 좋아하니?” 라고 묻는다. 딱히 잘하는 것 없는 준섭이 고백을 할 리가 없다. 우물쭈물하는 소년에게 소녀는 말한다. “너. 내 똥도 먹을 수 있어?” 준섭이가 얼마나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인지는 이다음부터 절절하게 나타난다. 준섭은 은혜의 똥을 먹어치운 후, 은혜와 여자 친구들의 환호를 받고 다른 여자에게 고백 비슷하게 양말을 먹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옆에 있는 친구는 “얘는 아무거나 먹는 줄 아니?” 라고 말한다.) 그를 괴롭히던 남자친구들도 “내가 졌다.” 며 화해를 청하고, 급기야 담임선생님의 주례로 은혜와 결혼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모두 허구이다. 은혜가 싼 똥이 들어있는 양은 도시락통(이른바 ‘벤또’로 더 널리 통하는)을 바라보며 상상한 밝은 미래. 이 대책 없이 밝기만 한 소년은 수저를 들고 도시락통을 연다. 도시락통 속의 똥 2001년 제작된 < 재능 있는 소년 이준섭 >은 신재인 이라는 감독을 세상에 알린 영화다. 위의 글을 읽어봐서 알겠지만 참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적절한 연출과 힘 있는 이미지를 엮어 이준섭이라는 소년이 처한 곤경을 잘 표현해 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준섭이의 기행이라기보다는 다른 아이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이다. 보고 나면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예쁜 아이들이 취하는 잔혹한 태도들 때문일 테다. 그들은 “저런 걸 먹어도 괜찮은 거야?” “애초에 저런 걸 먹는 건 잘못된 거 아니야?” 라고 말은 하지만, 그에게 기어코 똥을 내민다. 단 한 사람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 세계에서, 준섭이는 늘 자신의 놀라운 비위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고 보면 그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은, 똥도 먹을 수 있는 미칠 듯한 비위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상황을 상상해내고야 마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었을까. 신재인 감독은 이후에도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나 < 신성일의 행방불명 >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힘 있는 이미지에 우화 같은 이야기가 얹혀 당시 단편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 재능 있는 소년 이준섭 >이 ‘남들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던 한 아이에게 가해진 폭력을 다룬 영화라면,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는 고문,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무조건적으로 주입되는 신앙이 가진 폭력의 속성을 다뤘다. 그녀의 영화가 특별했던 것은 ‘탐구’, ‘연구’, ‘구성’ 같이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다루는 많은 영화에 달리는 수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성경 구절에 있는 문장인 것처럼 썼지만 영화 마지막 크레디트에 ‘창작한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거나, 심각하게 바라보고 분석하며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변은 따로 보고 밥은 같이 먹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하는 식이다. 본인 스스로 ‘원형질의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창작의 비밀은 그녀의 영화가 대부분 우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영화 정보 사이트를 뒤지면 어머니가 좀비가 되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가진, 2007년에 제작된 <어머니가 상했다>는 영화를 연출했다고 올라가 있지만 어디서도 볼 수가 없다. 한국 영화판에서 몇 안 되는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시킬 능력을 갖춘 감독의 오래 지속되고 있는 안식일은 언제쯤 끝날까? 누군가가 말했던 ‘슈퍼 울트라 영화천재’ 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말한 ‘한국에 없었던 재능’이라는 데엔 충분히 공감하는 데 있어, 언제가 되었든 좋으니 꼭 신작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가장 최근 활동은 신아가 , 이상철 감독의 < 밍크코트 >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감독: 신재인 각본: 신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