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 감독
- 김지환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박신혜, 재희, 양금석, 박명신, 양진우, 한여운, 배윤범, 정상훈, 유선희, 오순태, 문수희, 조현숙, 김보영, 김미영, 방은미, 송태영, 음수강, 박설하, 김보라, 정민정, 최수한, 정수현, 최승희, 신태양, 이경기, 홍성민, 김화영, 최원석
1967년 홍콩 쇼브라더스의 <대취협>(호금전)이 한국 시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이 새로운 ‘장르’ 영화가 이후 한국에 미칠 막강한 영향력을 예상했던 자는 거의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이 낯선 장르영화는 당시 한국 영화시장의 강력한 흥행 장르인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제목을 빌려서야 이 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셀지오 레오네의 A Fistful of Dollars(1964)가 ‘황야의 무법자’로 개봉, 대히트를 기록하며 불붙기 시작한 이 이탈리안 웨스턴들의 제목은 거개가 원제와 상관없이 황야, 석양, 결투, 무법자를 선호하곤 했다). 그리고 이 영화 <대취협>=< 방랑의 결투 >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상적 흥행기록’을 세웠다. 곧이어 쇼브라더스산 무협영화 세 편이 이 시장을 강타했다. 1968년 신필름이 수입한 <독비도>(장철, 한국 개봉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변성삼협>(장철, 한국 개봉제목 < 삼인의 협객 >), <금연자>(장철, 한국 개봉제목 < 심야의 결투 >)의 총 관객수는 무려 65만 명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단연 압권은 <독비도>였다. 홍콩영화 최초로 백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낸 이 영화는 1960년대 중반 ‘무협 신세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로이 무협영화를 일신함으로써(모더나이제이션) 시장을 확대하고자 한(글로벌라이제이션) 쇼브라더스 ‘신파 무협영화’ 전략의 혁혁한 성과이자 1960, 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수많은 신체상해 히어로의 액션활극이라고 할만한 것들에 강력한 영감의 기원이 되었다.(아마도 이 중 가장 ‘급진적’인 실천의 사례를 들자면 1969년에 발빠르게 만들어진 < 팔없는 검객 >(임원식)이 될 것이다. <독비도>의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차용한 이 영화는 한쪽 팔이 아닌 양팔을 모두 잃고 입과 발가락으로 검을 휘두르는 주인공을 선보인다!) 또한 <독비도>의 외팔이 왕우는 한국 관객들을 열광시킨 최초의 홍콩 스타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과 소비의 방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이름이 되었다(그리고 알다시피 이 스타를 향한 열광은 홍콩영화의 장르 변천 속에서 이소룡, 성룡, 주윤발 등으로 이어질 터이다). 이 새로운 열광을 자국 내 영화로 흡수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게다가 당시 ‘중국검객영화’ 혹은 ‘검객활극’이라고 불려졌던 이 장르영화는 자국 시장을 넘어서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들은 어떤 계층, 어떤 젠더, 어떤 세대, 즉 도시의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강력히 어필하는 것이자 이 지역 공통의 산업화 속에서 발생한 이 관객들은 국경을 넘어 이곳과 저곳에 모두 존재하고 있었다. 곧이어 어떤 한국영화들이 일시에 ‘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 쌍용검 >, < 비호 >, < 대검객 >, < 유랑의 검호 >, <신룡검객>, < 무정검 >, < 3인의 여겸객 >, < 괴도의 검 >, < 단장의 검 >, < 필살의 검 > < 팔도검객 >......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임권택은 < 뢰검 >, < 월하의 검 >, < 비검 >, < 요검 >을 만들었다. 어떤 영화들은 단독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영화들은 홍콩 혹은 대만과 합작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영화들은 한국 국적의 감독이나 배우를 빌미로 합작을 주장하였다. 어떤 영화들은 재편집과 한국어 더빙을 거쳐 합작영화라고 주장되었다. 이를테면 장철의 < 철수무정 >과 <십삼태보>(한국어 개봉제목 < 13인의 무사 >)는 한국어로 더빙되어 한국-홍콩 합작영화로 공개되었다. 당시 쇼브라더스 전속 감독이었던 정창화가 만든 < 아랑곡의 혈투 >는 그의 국적을 이유로 합작영화라고 소개되었다. 식자들은 근심과 탄식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누군가는 “한결같이 잔혹성에 의한 쇼킹도”로 극장 가를 석권한 이 “국적도 고증도 없는 검객물”의 홍수를 한탄했으며, 누군가는 “관객들의 양식을 뒤집어 보게끔” 할만한 것이라고 아연실색했다. 누군가는 “한국 배우가 중국식 칼장난이나 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우리의 얼을 모독하는 무의미한 상행위”에 불과하다고 분노하였다. 요컨대 이 영화들은 도저한 내셔널 시네마의 담론 내에서 긍정되기 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덧붙이자면 홍콩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이 식자들의 우환은 1990년대 초까지 줄기차게 반복될 터이다.) 1968년의 영화 <쌍용검>은 이 영화의 원작인 『정협지』까지를 포함하여 말하자면 ‘무협’이 어떻게 한국의 남성 하위문화에 기입되고 있는지, 한국영화에 도착한 트랜스내셔널한 실천의 양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먼저 김광주의 『정협지』. 김광주가 대만 작가 위지문(尉遲文)의 동시기 소설 『검해고홍 劍海孤鴻』을 번안한 이 소설은 1961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래 이 신문의 지가를 올렸으며 1963년 신태양사에서 출판되어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소설가이자 루쉰의 한국어 번역자였던 김광주가 어떻게 무협소설을 번안해오고 있는지 그 구체적 경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무협 장르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 파급력에 그 누구보다 민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광주는 1920년대 중후반 상하이 문예비평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상하이는 지난 글에서 다뤘던 바, 무협이 대중문화의 자원으로서 등장한 바로 그 시공간이기도 하다. 쇼브라더스가 그러한 것처럼(이 영화사의 전신인 천일영화사는 1920년대 후반 무협영화를 양산했던 상하이의 주요 프로덕션 중 하나였다) 김광주 또한 이 시기 무협에 대한 대중의 열광, 그 매혹의 한 가운데를 통과해갔다. 즉, 그는 이 장르의 효용성을 그 누구보다도 실감했던 자이다. 『정협지』가 누린 인기를 염두에 둔다면 무협영화의 저 붐 속에서 이 텍스트가 재빨리 불려져 나온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실제로 『정협지』의 영화화를 둘러싼 영화사들 간의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한국영화사의 이재명과 제일영화사의 홍성칠이 영화화 판권을 둘러싼 공방을 벌였는데, 한국의 김광주와 대만의 위지문, 한국 내 에이전트, 친우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공방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와중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일영화사였다. 이 영화사는 홍콩의 옥련영화사와 손을 잡고 <쌍용검>과 또 한편의 김광주의 번안 무협소설 『비호』의 동명영화를 동시제작하였다. 이 영화들은 검술영화 열풍으로 달아오른 자국 시장 뿐 아니라 동남아 시장에도 예상대로 어필 가능하였다. 제일영화사는 1969년 한해에만 네 편의 합작 무협영화를 만들었으며, 이 해에 이 영화사의 수출액은 30만불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1968년의 전체 한국영화 수출액이 8만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숫자의 크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짐작 가능하리라.(1969년의 한 영화잡지 기사는 대종상에 올해의 수출상이 있다면 이 영화사가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사례는 1970년대 횡행하게 될 한국과 홍콩과 대만과 여타 동남아시아 영세 영화제작자들의 합종연횡이라고 할만한 소위 ‘합작’의 계기들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외화수입 쿼터라는 정책이 마련해놓은 구조, 정기적으로 가해지는 홍콩산 무협영화의 수입규제 하에서 자국 영화로 카운트될 수 있는 합작은 충분히 선호될 만한 것이었다. 종종 그것이 소위 ‘위장합작’의 형태였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이제 막 이런 영화들에 호응하는 관객집단이 발견되었으며, 변두리 싸구려 극장에서 환호하는 이들을 통해 무협은 한국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화려하게 등극할 수 있었다. 무협이란 그리 오래된 단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단어는 동아시아 근대의 산물이다. 무(武)에 협(俠)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조합시킨 최초의 인물은 일본의 초기 모험소설가인 오시카와 슌로로 알려져 있다. 오시카와 슌로는 1903년 『무협의 일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고, 『무협세계』라는 소년잡지를 만들었다. 이 열렬한 ‘군인칙유’의 신봉자는 무(武)와 이미 무를 포함하고 있는 협(俠)을 겹쳐놓음으로써 근대 일본의 무력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일본 내에서 정착되지 못했으며, 일본의 중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파되어간 이래 전술한 것처럼 1920년대 중반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드디어 강력한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기입되었다. 일본에서 이 단어는 1970년대 이전까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왜 이 조어는 일본이 아닌 근대 중국에서 정착할 수 있었는가? 무가 말 그대로 무력을 뜻하는 것이라면, 협은 이보다 좀더 복잡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이 오래된 개념은 한비자에 의해 가장 처음 정식화되었다. 그에 따르면 협(俠)은 무로써 禁(法)을 범하는 것이다(俠以武犯禁). 법가 한비자에게 이 개념은 두 가지 점에서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협객이란 현존하는 법질서를 깨고 자신들만의 룰로 움직이는 도당의 무리이기 때문에 그렇다(『수호지』의 양산박을 떠올려보라). 이 개념에 의(義)를 개입시킴으로써 정치적 의제로 이동시켜온 것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유협열전」에서 “무로써 법을 범하고 권위를 무시하지만 언신행과(言信行果)의 행동규범에 입각하여 약자와 액곤(厄困)한 자를 도와줌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 자의 속성으로 이를 정의내림으로써 협을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전화시키고자 했다.(『사기』) 그러나 유협의 유(游)와 자객의 객(客)이라는 명칭이 이미 보여주듯 시스템 바깥의 행위자들에 의한 시스템의 파괴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협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개념이다. 즉, 현존 법질서를 초과하는 폭력으로서 협에는 언제나 법정립적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제국의 패권적 질서를 위한 강력한 무력을 상정하는 일본이 아닌 반(半)식민지 중국에서 힘(武)을 통해 이 상황을 깰 수 있는 협에 대한 상상은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무협의 핵심 공간은 현실 세계의 법과 무관한 강호-무림의 세계이다. 이 상상적 세계란 1920년대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국에서 발견된 판타지 공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마도 협이 내포하고 있는 어떠 시스템의 파괴, 폭력의 가능성이야말로 무협영화가 1960년대 홍콩에서 홍콩영화 최초의 영컬처로서 재등장하고, 나아가 한국과 같은 장소에서 이제 막 하나의 관객층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그토록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또한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들에 쏟아졌던 저 식자들의 우환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무협영화는 그 장르적 후신으로 1970년대 초 맨몸의 싸우는 영화, 이후 ‘쿵푸영화’로 이름붙여질 영화로 옮겨갔다. 홍콩영화의 장르 변동과 민감하게 연루되어 있던 한국의 어떤 영화들은 검술영화에서 권격영화, 당시 용어로는 ‘태권도 영화’로 이름붙여질 장르로 넘어갔다. 이제 유신 시대 한국의 변두리 극장에서는 정책과 장사꾼들과 특정 관객들의 욕망이 단단하게 엉킨 채로 소위 위장합작의 복마전이 펼쳐질 터이다.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외팔이'의 도래, 1960년대 후반의 무협붐 - 2021.06.30. 4. 태권도 영화- 챠리 셀과 바비 김, 이국적 이름들의 행렬에 관하여 - 2021.07.23. 5. 이소룡적 신체 - 2021.08.24. 6. 김두한과 협객물, 유신 시대의 가장 안전한 쾌락 - 2021.10.01. 7. 브루스플로이테이션과 한국영화 - 2021.11.01. 8. 춤추는 괴수, 1967의 '트위스트' 용가리 - 2021.12.02. 9. 우리는 왜 그때... - 2021.12.24. 10. 용팔이, 1970년대의 과잉과 잉여 - 2022.02.24. 11. 1970년대식 섹스와 폭력, 여감방 영화와 <여수 407호> - 2022.03.22. 12. <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 2022.04.20. 13.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 <정도>/<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 2022.05.30.
<성벽을 뚫고>의 육군 하사로 시작 1미터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황해(黃海)가 극장 화면에 처음 얼굴을 비친 것은 1949년 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김보철프로덕션 제작)부터였다. 이 영화는 해방 후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을 배경으로, 육군 소위(이집길)인 처남과 공산주의자(권영팔)인 매부 사이에 벌어지는 이념의 갈등과 반목을 그린 것이다.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실패하자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황해는 이 작품에 조연급인 육군 하사 역으로 출연했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동족상잔의 비애를 담은 최초의 영화였다. [사진]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서의 황해 이렇게 영화계에 나왔으나 황해는 한동안 후속 출연작을 내지 못했다. 6.25전쟁과 연극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한 것은 ‘뚱뚱이 양훈’과 겨룬 코미디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이었다. 이후 <나는 고발한다>(김묵, 1959)를 비롯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1959),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정창화, 1960),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폭력지대>(김묵, 1965),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 등 액션물과 <한많은 청춘>(권영순, 1958), <자장가>(하한수, 1958), <목포의 눈물>(하한수, 1958), <울지 마라 두 남매>(서석주, 1960),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 등 신파 멜로, <박서방>(강대진, 1960), <마부>(강대진, 1961) 등의 서민영화,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 <심봤다>(정진우, 1979) 등 문예영화에 출연했다. [사진] <자장가>(하한수, 1958)의 황해. 왼쪽은 배우 한미나(사진제공: 김종원) 황해가 <자장가> 유의 신파와 액션 연기에 강한 것은 일찍이 악극단 등에서 쌓은 15년 경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버라이어티 쇼적 재능과 과장된 표정연기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차츰 탈색돼 69년 <독짓는 늙은이>를 계기로 내적 연소의 연기양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단지>(이원세, 1975), <부초(浮草)>(이한욱, 1978)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장의 한계 극복한 무대 경험 황해는 1920년 3월 6일 동해의 푸른 물을 끼고 뒤쪽으로는 외금강 줄기가 뻗어나간 강원도 고성군 장전읍 경동(京洞)에서 태어났다. 정어리 기름공장을 경영하는 전병근(全炳根)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과 네 살 터울인 그에게 홍구(弘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큰 아버지 댁에 보내 주교(舟橋)국민학교를 다니게 했다. 졸업 후 경신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년제인 경성상공업 기계과에 들어갔다. 졸업(1936년) 후에는 미쓰비시(三菱)백화점 식료품 점원을 거쳐 중앙우체국 집배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집배원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변두리 로 나설 때면 무료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어느새 동료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집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이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형과 함께 아버지가 하는 정어리 가공 일을 도왔다. [사진] <독짓는 늙은이>(최하원, 1969)에서 황해와 윤정희 그런데 이 무렵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열여덟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서울의 성보(城寶)악극단이 전국순회 공연 중에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 악극단은 관객동원의 수단으로 공연 첫날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는데, 홍구 청년도 참가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한 여단원이 소질이 있으니 서울에 가서 가수의 길을 걸어보라고 권했다. 그녀가 바로 ‘성보의 간판스타’인 가수 신 카나리아였다. 이에 용기를 얻어 성보악극단의 연구생 모집광고를 보고 응모, 1천 2백여 명의 경쟁자 가운데 12명을 뽑는 성보악극단의 제1기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렇게 들어간 극단에서 처음 출연하게 된 것이 신 카나리아 주연의 <춘풍일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객석에 나와 다른 배우들이 하는 동작이나 대사, 표정을 관찰하고, 화장술을 익혔다. 그런 열성 탓인지 그는 1년이 채 되지 않아 지방공연의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지방공연은 밤차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달픈 일이었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신명이 났다. 이렇게 시작한 연극이 1938년부터 4년 동안 10여 편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신 카나리아의 부군인 김화랑이 제일악극단을 조직하자 성보악극단을 떠났다. 2차세계대전으로 해초 가루로 만든 빵이나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제일악극단에 머물렀다. 그런데 계속 조여 오는 징용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천진에 내리자 미리 와있던 신 카나리아, 박단마 등과 함께 손목인이 이끄는 신태양악극단에 입단했다. 백파진(白波進)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사진] <인간단지>(이원세, 1975)에서의 황해(사진제공: 김종원) 군예대원으로 아내와 평양까지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잠시 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으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6월 그는 간절히 기다리던 귀국선에 오르게 된다. 인천항에 내린 그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그리던 황해 바다, 밟고 싶던 조국의 땅이 아닌가. 그는 “한국남자는 황해 바다처럼 넓고 거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던 한 광복군 노인의 충고를 떠올리며 예명을 다시 황해(黃海)로 바꾸었다. (황해, 「藝에 살다(13) 최초의 액션 스타(13)」,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이렇게 3년 만에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신 카나리아 부부가 만든 새별악극단에 가담했다. 이 무렵 <자유만세>(1946)를 찍은 한형모(韓瀅模) 촬영기사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 왔다. 이번에 <성벽을 뚫고>라는 영화로 ‘입봉’하게 되었는데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해는 이렇게 하고 싶었던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연극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새별악극단을 인수하고 전성기로 올려놓을 무렵 가수 백설희(白雪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자 동거생활을 결행하였다. 그들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것은 살림을 꾸린지 15년 만인 1960년 서대문 밖 백련사(白蓮寺)에서였다. 그는 6.25전쟁을 겪으며 아내와 함께 군예대(軍藝隊)에 들어가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사진] <부초>(이한욱, 1978)에서의 황해와 윤세라(오른쪽)(사진제공: 김종원) 배우로서는 불리한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승부욕으로 관객 앞에 다가선 ‘작은 거인’ 황해는 1965년 장동휘, 허장강과 함께 동인프로덕션을 설립, 파월장병의 용맹상을 그린 <맹호작전>(1965)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2월 9일 슬하에 노래하는 배우 전영록을 남기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최근 뉴스영화와 문화영화를 중심으로 비극영화(非劇映畫)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데에는 해방 후의 문화공보선전에 관한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역시 구술사 프로젝트와 수집⋅발굴 활동을 통해 꾸준히 비극영화(非劇映畫)에 관한 연구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발간된 구술 편집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시리즈를 비롯해 2008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와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그리고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시어도어 R.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의 문화영화 컬렉션과 수집자료 해제 『이방인이 기록한 전후 한국, 영화: 시어도어 코넌트 컬렉션』 등이 소위 비극영화에 해당하는 다양한 영화인들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 2006년 구술을 진행한 양종해(梁宗海, 1929~2009)는 문화영화 감독으로는 첫 번째 구술자로 선정되어 이후 문화영화 구술을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60년 <발전은 협력으로>로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수상하며 1950~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한 후에는 서울문화프로모션을 설립해 다수의 문화영화와 광고영화를 제작했다. 양종해 감독의 구술이 문화영화 조사⋅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데에는 그가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기도 했지만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문화영화의 제작 배경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구술을 바탕으로 국립영화제작소와 대한원조의 상관관계를 살펴 볼 것이다. [사진 1]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 1955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기자로 취직한 양종해는 대학 시절부터 관심 있던 영화 일을 하고 싶어 안양촬영소 설립을 기획 중이던 수도영화주식회사 사장 홍찬을 찾아간다. 당시 안양촬영소 설립을 통해 한국의 할리우드를 꿈꾸던 홍찬은 양종해에게 영어를 공부해서 다시 찾아올 것을 조언한다. 안양촬영소의 개소를 기다리며 서울대학교 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하던 양종해는 1956년 우연히 공보실 공무원 채용 소식을 듣고 응시하여 합격한다. 공보실 영화과에 입사한 그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영화과 업무의 통과의례나 마찬가지인 <대한뉴스>의 기획이었다. “테레비(television)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여서 “노상 청탁이 올” 정도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대한뉴스>를 담당하게 된 그는 공보실 영화과 대한영화사에서 녹음과 현상, 편집 등의 후반작업을 “곁눈질로 배우며” 습득했다. "그 당시는 나이 들은 오래된 사람들이 있었지. 그 사람들한테 배운 거지, 곁눈질로. 기술진은, 그때 영화관데 영화과의 방계(傍系)회사가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가 있었어. 기술진 다 거기 속해 있는 거야. 왜 그러냐 하면 영화과의 공무원 직급 가지고는 이 사람들 월급을 줄 수 없어. 그리고 직급이 없잖아. 녹음 기사라는 직급이 없으니까 그렇게 대한영화사라는 방계회사를 만들어가지고 거기 다 있어가지고. …… 영화제작소 생기기 전에는 대한영화사에 다 있었어. 그 안에 있었어. 그 후에 영화제작소가 생겨나서 이건 없어진 거지." 1 양종해의 구술은 1950년대 중반 당시 공보실 영화과와 대한영화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1월 설치되었는데 미군정청 공보국 영화과가 담당했던 행정업무를 이어받았다. 전쟁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의 주요업무는 검열과 극장에 관한 정책수립과 이행이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시기까지 부족한 기재와 인력으로 인해 사실상 영화제작을 통한 교육⋅선전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외국영화의 극장 상영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 업무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가 영화제작을 중심에 둘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한정된 영화 인력들이 공보실뿐만 아니라 미공보원, 미502부대, 육군, 해군, 공군 등에 설치된 영화과 또는 영화촬영대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복⋅관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1949년 영화과 산하에 영화제작 업무를 담당하는 대한영화사가 설치되었지만 이곳에서 실질적인 제작 업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휴전 후인 1953년 이후로 볼 수 있다. 공보실 영화과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 2~3회 <대한뉴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환도 후에는 미공보원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이하 UNKRA) 영화과에 재직했던 이형표를 사무장으로 촉탁하고, 박희영, 유장산(촬영), 김흥만(편집), 이경순(녹음) 등의 영화 인력들을 영입해 대한영화사를 재정비했다. [사진 2] 이형표 감독 1950년대 중반 <춘향전>(이규환, 1955)과 <자유부인>(한형모, 1956)의 흥행 성공으로 한국영화 제작 열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공보실 영화과는 극영화의 인력을 활용하여 문화영화를 기획⋅제작했다. 이 시기 극영화 인력과 결합해 제작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한형모⋅이성휘 촬영의 한국 홍보 기록영화 <한국의 시각(Korean Perspective)>(이형표, 1953~1954)과 전창근 감독, 한형모 촬영, 나애심 주연의 극영화 <불사조의 언덕>(1955) 등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보다 더 활발해진 이후에도 대한영화사는 반관반민의 성격을 유지하며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문화영화 제작소의 역할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한국 극영화 후반 작업을 수행하는 포스트프로덕션의 역할을 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촬영 현장 대한원조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 설치 1958년 공보실 영화과에 미국의 원조가 이루어지며 양종해는 본격적인 문화영화 감독으로서 활동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때는 영화과고. 나중에 어떻게 됐냐면 이 영화과가 그때 미국이 전쟁복구 원조를 많이 했다고. 미국 원조기관이 크게 있었어. 운크라(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국제연합한국재건단)도 있고, 거기에서 우리나라 영상 관계의 진흥을 위해서 120만 불이면 큰 돈이야.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도 그래 이제 문교부하고 우리 공보처하고 서로 가져갈라고 싸움이 붙은 거야. 결국 공보처가 이겨가지고 우리한테 온 거야. 그래 오니까 엄청난 큰 돈이거든. 그때 영화제작소를 짓고 거기서 뭣이 왔는고 하면 우리 교육 시켜주는 미국 시라큐스대학에서 왔어. 거기서 뭐 하여간 일곱 명이 왔어. 제일 책임자가 매카론(James W. McCaron). 그리고 또 연출하는 사람이 있었어, 메이브리(Mably)라고." 2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의 전경(출처: e영상역사관) 양종해의 이 간략한 설명에는 1950년대 후반 공보실 영화과에 이루어진 대한원조의 세부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원조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국립영화제작소의 설립과 전문 인력을 투입한 교육이 그것이다. 공보실 영화과는 대한원조의 카운터파트로서 원조정책 홍보와 교육계몽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상영했다. "변화가 많았지. 우선 시설이 동시녹음 스튜디오가 생기고, 칼라 현상을 하고, 기자재가 많이 들어오고 사람들도 뭐 한 열댓 명이 더 늘어서 120명 정도 늘어나고 공채를 하고 그런 식으로 외적으로 변화가 많았고, 내적으론 영화는 우리나라 별로 예산이 많지 않아 가지고 많이 못 만드는데, 미 원조기관에서 몇 십 편 만들었잖아. 그래서 바빴고, 농촌 순회하는 것도 그때 생긴 거고." 3 양종해가 설명하는 것처럼 <대한뉴스> 제작을 제외하면 극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던 공보실 영화과는 원조를 통해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원조는 공보실 영화과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산업이 변화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외원조의 결과로 영화 인력의 이동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영화에 대한 미국과 UN의 대한원조는 직접적인 재원 원조(UNKRA, ICA), 전문 인력의 파견과 연수(ICA, OEC), 시설과 기재 원조(UNKRA, 아시아재단) 등 여러 기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조의 직접적인 수혜대상이 공적기관인 공보실 영화과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 공보실 영화과는 이러한 원조를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1958년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이자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 4 영화제작소의 완성을 앞두고 공보실과 OEC는 이 시설의 향후 운영과 활용을 위해 시라큐스 계약 교육진을 투입하고, 연출, 촬영, 미술 등 영화제작 각 분야의 신진인력을 공채 모집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USIS 출신의 인력을 일부 흡수했다. 이러한 과정은 1958년부터 급증한 한국영화 제작 편수로 알 수 있는 한국영화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부분으로서, 이 과정 자체가 기존의 반관반민의 성격을 갖고 있던 한국영화가 상업 극영화와 비극영화로 분명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기존의 영화 인력들인 이형표(신필름), 이경순, 손인호(안양촬영소→한양녹음실)를 비롯한 상당수의 인력이 극영화로 이동하고, 그 자리에 신진 인력이 충원됨에 따라 공보실 영화과의 세대교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58년을 전후로 충원된 영화과의 인력은 USIS에서 이동한 배석인(연출), 정윤주, 백명제(이상 음악), 김형중(기술, 녹음‧현상), 김영권(아나운서, 행정), 정도빈(작화), 공채로 입사한 양종해, 김행오, 임학송, 한호기, 나한태, 강대철, 황왕수(이상 연출), 한규설(촬영), 박영일, 김인태, 봉상균(미술), 이은덕, 강신규, 이재웅(이상 녹음), 배동순(연출/행정) 등이다. [사진 5]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 영화과의 기존 인력들은 교육영화보다는 뉴스영화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문화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감독도 양종해, 배석인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이 제작한 문화영화도 실상은 <대한뉴스>의 특별판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시라큐스 계약의 영화교육이 시작되자 제작 경험이 있는 양종해와 배석인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일 연출력을 인정받아 국내 교육용 영화뿐만 아시아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 출품용 비극영화와 해외 배포용 한국 홍보영화를 도맡으며 국립영화제작소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어찌되었든 경력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신규 인력들과 함께 영화제작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시라큐스 계약의 개요는 “시라큐스 인력들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규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글쓰기, 연출, 촬영, 편집 및 사운드 녹음 분야에 대해 매주 교육을 실시하고, 프로그램 목표에 부합한다면 영화 관련 행정 업무, 프로그래밍 등의 관련 업무에 관해서도 기술 지원을 제공하는 것” 5 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2년에 걸친 교육과정을 ‘정규 교육’과 ‘현장 실무(on the job training) 교육’, 2단계로 나눠 계획을 세웠다. 작업보고서에는 “시나리오 작가-감독은 50%의 시간을 정규 교육에, 50%의 시간을 ‘현장 실무’ 교육에 할애” 6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제로 감독 양종해는 오전에는 콘티 작성법을 비롯해 실무에 필요한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작업을 했다고 증언했다. 7 학교 수업처럼 진행된 이와 같은 정규 교육은 대략 1년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사진 6] 시라큐스의 인력들(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7] 시라큐스와의 계약 서류 (콘티 작성법을) 교육받으면서 배운 거야, 이건. 이게 아주 좋아. 그러니까 첫째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거지. 이걸 벽에 탁 붙여 놓거든 매일 본다고. 봐야 돼. 누구 불러다 “너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야. 이런 식으로 시나리오 하기 전에 이 기본 골격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돼. 그래 안하면 그림 생각해야지, 효과 음악 생각해야지, 복잡하다고. 이건 예를 들어서 효과 무슨 효과다. 음악이 뭐다. 문화영화엔 하나 또 있어, 해설. 그러니까 해설이 있어야 되거든, 문화영화는. 이게 제일 좋은 것이 해설 있고, 음악 있고, 또 해설 있고, 효과 있고, 이런 식의, 이게 바란스(balance)가 잘 맞아야 돼. 너무 음악만 있으면 그렇고 너무 해설만 있으면 그렇고. 이것도 종이로다 해보면 여긴 해설 두고, 여긴 음악 두고, 이런 식으로 해두면 녹음해두면 비슷하게 바란스가 맞는 거지. 8 [사진 8] 양종해 감독과 연출 교육을 담당했던 메이블리 위의 구술에서 알 수 있듯이 시라큐스 교육진이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명확한 주제 전달을 위한 연출 기법이었다. 말하자면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각 부처 정책에 따른 주제를 변주해야 하는 영화제작소 교육영화의 특성에 맞춰 기본적인 틀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자본과 인력으로 진행해야 하는 제작 여건상 연출자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교재로 삼을 풍부한 견본들이 필요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견본을 밑그림으로 영화제작소의 감독들은 소위 1인 제작 시스템이라 불린 환경을 조성하고 영화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진 9] 문화영화 촬영 현장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된 <발전은 협력에서> 시라큐스 계약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농촌 지도’를 주제로 하는 다수의 교육영화들이 만들어졌는데 <발전은 협력에서(둑)>(1959)는 이러한 원조정책의 대표적인 영화였다. 양종해 감독의 대표작이기도 한 <발전은 협력에서>는 강원도 명주군 모전리 주민들의 협력으로 제방이 건설된 것이 화제가 되며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완성 후 대대적인 상영회를 통해 농촌 각 지역에 ‘협력과 자립’이라는 교훈을 주었고 모전리는 성공한 시범부락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영화가 1960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영화제 비극영화 부문에서 기획상을 수상하며 원조 당국과 공보실 그리고 한국영화계 모두에 서로 다른 의미의 성공을 안겼다. 그리고 이 수상 경력은 이후 <발전은 협력에서>가 공보실 영화제작소와 국립영화제작소의 대표적인 문화영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시아영화제 수상으로 <발전은 협력에서>는 원조 당국으로부터 대한 경제 기술 원조의 성공사례로 활용되는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선전물로 활용되는 모순을 보여주는 아이로니컬한 상황에 직면했다. [사진 10, 11] <발전은 협력에서(둑)>(양종해, 1959) 속 장면들(출처: e영상역사관) 실제 현장에서 주민들이 참여하는 이러한 방식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영화의 특징을 강조하는 동시에 실제 지역사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업이 아닌 특정 마을의 사업을 원조기관과 정부 부처의 신(新)사업의 성과로 포장하여 시범마을과 농촌교육영화의 역할모델로 활용해 선전에 활용하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기획은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 되어 향후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사업의 보급⋅육성에서 핵심적인 선전영화의 역할모델로 이용되었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의 대대적인 선전에서도 사업 시행에 앞서 완성형의 마을 혹은 마을 지도자의 성공사례를 ‘실화’라는 특징을 앞세워 마치 새마을운동의 성과물처럼 제작한 경우가 다수 있는데 이 영화들의 형식과 구성은 명백하게 <발전은 협력에서>를 모델로 하고 있다. [사진 12] 1960년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의 모습(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사진 13] 제7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는 비극영화 부문 기획상을 수상했다. 사진 왼쪽부터 남우주연상을 받은 김승호, 당시 영화과 과장으로 있었던 이성철, 감독상을 받은 성동호(출처: 이성철 기증 자료) 덧붙여 정치적 격변 속에서 공보실 영화제작소가 오히려 그 위세를 확장해 독립된 국립영화제작소로 재탄생하게 된 배경에 선진화된 시설과 영화제작 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을 갖춘 영화제작소의 시스템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자금투자가 필요 없는 최적화된 공보선전 기관으로 활용 가능한 영화제작소의 존재를 매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출범 후 공보국이 공보부로, 영화제작소가 ‘국립’영화제작소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전은 협력에서>를 비롯한 한미협조 교육영화들은 문화영화로 재구획 되고 국립영화제작소 농촌계몽 문화영화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주) 1.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3쪽. 2. 공영민,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한국영화사구술총서03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이채, 2006, 256~257쪽. 3. 공영민, 「2006년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양종해 편>」,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52쪽. 4.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 5. "Work Plan-Contract No. ICA/W-644 between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Syracuse University",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앞의 책, 171~178쪽. 6. Ibid. 7. 앞의 책, 「양종해 편」, 256~258쪽. 8. 앞의 책, 「양종해 편」,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