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락원의 별
- 감독
- 홍성기
- 제작년도
- 1957
- 출연
- 김동원, 주증녀, 노경희, 한은진, 문정숙, 전택이, 이민, 변기종, 김승호, 주선태, 유춘, 복혜숙, 석금성, 고선애, 양미희, 민혜련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
한국영화의 전설로만 내려오는 1955년의 <춘향전>(이규환)에서 이몽룡 역을 맡아 불시에 ‘영화계의 귀공자’로 떠오르며 장안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이민은 1950년대 또 다른 흥행작 <자유부인>(한형모)과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표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문화의 홍수 속에서 한국영화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는 영화의 스타일이나 배우들의 이미지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민은 특히 미국식 스타일과 미국문화를 전달하는 ‘스타’로 상징되었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영화가 범람하던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 속에서 이민이 어떠한 과정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를 획득하게 되었는지 구술 1) 과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림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홍보용 스틸, 이몽룡 역의 이민과 성춘향 역의 조미령 영화 스타 이민의 탄생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이민(본명 이시중)은 영화 속 이미지를 통해 얻은 ‘귀공자’라는 호칭이 무색하리만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 앞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며 울며 보채던 어린 소년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 대학진학을 위해 장기간의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하여 “꼬박 3년 동안 광고 철판을 모아 팔아” 어렵게 여비를 마련한 그는 1940년 스무 살의 나이에 “무릎 기운 옷을 입은 거지꼴”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명문’ 우라와(浦和)고등학교의 입학시험에 강원도 산골 청년이 합격한 ‘사건’은 급기야는 신문 기사화되어 조선의 유지들로부터 집 한 채 값에 버금가는 장학금을 지원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숙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 예과를 거쳐 당시 졸업 후 가장 전망이 좋다는 광산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강춘 감독의 눈에 띠면서 평탄할 줄만 알았던 미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춘 감독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16밀리 영화인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와 <연화>(강춘, 1949)에 출연하며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한두 번의 외유로 그칠 줄 알았던 영화 일은 전쟁 때문에 지속되었다. 엘리트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영화계의 그 누구보다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그는 한국전쟁 시기 피난지의 영화인들에게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며 필연적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어나갔다. 영화 현장에서 도움이 되었던 서울대 출신이라는 타이틀과 배경은 활동하는 내내 그가 맡은 배역과 스타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2)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 신문광고 (그림 3) <연화>(강춘, 1949) 신문광고 한국전쟁 시기 그는 전장에서는 군영화 <화랑도>(강춘, 1951)의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인들의 새로운 아지트가 되었던 피난지 대구에서는 환도 후 같이 작업을 하게 되는 전택이, 노경희 부부와 홍성기, 한형모 감독뿐만 아니라 평생 잊지 못할 가르침을 준 스승 이규환 감독을 만났다. <춘향전>(이규환, 1955)의 이몽룡 역을 맡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이때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구술에서 그는 전쟁시기의 경험으로 <화랑도>의 촬영을 맡은 이학순에게는 미군부대 PX를 통해 현상 재료를 조달한 것을, <춘향전>의 감독 이규환에게는 대구 은성다방에서 차 대접을 한 것을 에피소드로 풀어놓기도 했다. (그림4) <화랑도>(강춘, 1951)의 신문광고 전쟁 후 제작된 <춘향전>의 대구 촬영현장에서도 본의 아니게 인맥을 총동원해 현장에 도움을 주었다. 산 속에서 진행된 촬영현장에 조명기를 설치하기 위해 이민은 광산학과의 인맥을 동원해 인근의 달성광산에서 전신주 17개를 설치해 전기를 조달했다. 그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촬영을 못했을 수도 있었던 이 일화에 대해 “망신은 당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쳐 흥행으로까지 이어져 다행”인 일로 회고했다. 얼결에 발 디딘 당시의 한국영화계는 이렇듯 그가 배우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림5) <춘향전>(이규환, 1955)의 경복궁 촬영 스틸, 방자 역의 전택이와 이도령 역의 이민 (그림6) 연출 중인 이규환 감독(가운데)과 전택이(좌), 유현목 조감독(우) 한편 춘향 역의 조미령을 비롯해 변사또 역의 이금룡, 방자 역의 전택이, 향단 역의 노경희 등 <춘향전>에 함께 출연한 대부분의 배우들은 식민지시기부터 영화와 무대에서 숙련된 연기를 보여준 노련한 연기자들이었다. 때문에 무대 경험도, 35밀리 영화 출연의 경험도 없던 그는 모든 역할의 대사를 철저하게 암기하고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촬영에 임했다. <춘향전>의 경험은 이후 카메라가 ‘타르르륵’ 돌아가면 극중의 인물이 될 수 있는 연기습관을 몸에 배게 하고, 영화와 연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은 기존의 관중을 끌어들이던 무대극들을 쓰러뜨리고, “귀신이 붙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영화의 붐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민 개인에게도 영화배우라는 정체성을 깨우치게 한 중요한 작품이 된 것이다. (그림 7) <춘향전>의 대구 촬영 현장 스틸, 이민(맨 뒷줄 왼쪽), 조미령, 석금성, 이금룡, 이규환 감독(위에서부터 셋째 줄 가운데)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춘향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그는 또 한편의 성공작인 <자유부인>(한형모)에 출연했다. <춘향전>에 이은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 무대예술의 쇠퇴 등에 힘입어 한국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손>(1954)부터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운 한형모 감독은 당대 한국사회의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에 할리우드 스타일을 매치해 ‘양화’와 경쟁할 수 있는 ‘방화’를 탄생시켰다. 당시 파격적인 신인의 기용(김정림)과 더불어 화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전 해 폭발적인 흥행으로 한국영화의 재건을 알렸던 <춘향전>에서 이몽룡으로 분했던 배우 이민을 주인공 김정림에 춤바람을 불어넣는 대학생 춘호 역으로 캐스팅 한 것이었다. (그림 8)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주인공 오선영(김정림)에게 춘호(이민)가 춤을 가르치는 장면 유려한 춤 솜씨를 자랑하는 “이민이 아니면 안 될 영화”였다는 이야기는 “학생 시절 책으로 배운 춤과 전쟁 시기 대구의 미군부대와 공군 댄스홀에서 춤을 춰봤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춘향전>의 이몽룡으로 쌓아올린 이미지에 손상이 날 법 한데도 화려한 춤 실력을 뽐내며 유부녀를 유혹하는 건들건들한 바람둥이 청년의 역할을 맡은 것은 아마도 주연 배우보다 높게 책정된 출연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역할에 대한 도전의식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문화가 대중의 일상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전쟁 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풍자한 <자유부인>에서 대학생 춘호는 특히나 미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젊은이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춘호 역에 이몽룡을 맡았던 이민이 캐스팅된 것에 세간의 비판과 비난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기 변신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민의 프로필에서 <춘향전>의 이몽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역할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 역할 이후 이민은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전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미국과 미국문화를 상징하고 동경하게끔 하는 스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림 9) <자유부인>의 댄스홀 장면의 현장 스틸, 뒷줄 가운데 이민, 아랫줄 왼쪽부터 김동원, 김정림, 한형모 감독, 한 사람 건너 노경희, 안나영. 이민은 구술을 통해 사진에서 보이는 크레인을 댄스홀 장면을 위해 제작했다고 증언했다. 미국영화의 공세와 영화 스타 시대의 도래 1950년대 할리우드영화를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의 공세는 한국영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전쟁 전에 비해 한국 내 개봉 시차가 줄어들고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영화의 인기는 더욱 더 높아져갔다. 여기에 미국에서 들어온 소비재 또한 미국영화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망의 대상이자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남아있는 미국적 생활양식과 소비는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스타의 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방은 원용진의 표현처럼 “영어로 말하기, 다방에서 커피 마시기, 할리우드 영화 보기 등은 단순히 언어, 물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표 역할을 했” 2) 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방을 가능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잡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문화 열풍”으로 영화잡지뿐만 아니라 여성지에도 영화소개와 더불어 미국 여배우의 이미지, 사생활, 섹슈얼리티 등이 전시되고 상품화 되었다. 3) 이러한 모방 혹은 “이름표 역할”은 할리우드영화와 경쟁해야만 하는 한국영화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1950년대 제작 편수가 많지 않은 한국영화에서 배우를 스타로서 ‘추대’해주는 방식이 할리우드 스타의 모방이었고 이는 주로 잡지의 화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영화잡지에서 배우를 지칭하는 방식은 “한국의 ◯◯◯”였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김지미”, “한국의 잉그릿드 버그만=최은희”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모방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한국배우의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데 있어서 유용했을 것이다. (그림10) 『스크린』 1957년 2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최은희 (그림11) 『현대영화』 1958년 1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조미령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영화와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계의 재편으로 무대 출신의 스타 배우들이 급격히 영화로 이동한 것은 한국영화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기력과 스타성이 담보되는 배우들의 합류는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영화 제작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국산영화 면세 조치’가 영화를 흥행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매체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에 수반되는 배우들의 유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급속한 성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춘향전>과 <자유부인>으로 한국영화가 흥행 경쟁력을 인정받은 1950년대 중후반은 바야흐로 배우가 흥행 시장에서 중요한 카드로 기능하는 ‘영화 스타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무대 출신의 배우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숙련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영화에서 각자의 이미지에 맞는 연기 스타일을 빠른 속도로 구축해나갔다. 스타 이미지는 1950~1960년대 내내 겹치기 출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한국영화산업 내 인적 규모에 대비해 대량의 영화가 제작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대 출신이 아닌 영화로 데뷔한 배우들 역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연기 경험과 수련의 부족으로 이들은 시대물보다는 주로 현대물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전적인 이미지보다는 외형적인 세련됨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야 했다. 대표적으로 김지미, 최지희, 김의향 등의 여성배우들은 아프레걸 이미지로, 남궁원, 윤일봉, 김석훈 등의 남성배우들은 수트 차림의 엘리트 이미지로 멜로드라마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아직 다양한 장르 영화가 등장하기 전이었던 1950년대 중‧후반 흥행작을 내놓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이 그려지는 한국영화의 이면에는 이렇듯 배우들의 스타 이미지 찾기의 과정 또한 존재했다. (그림12) 잡지 『영화세계』 1956년 1월호에 실린 이민 화보. 왼쪽 페이지의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실린 모습이 흥미롭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이민은 미국을 경험한 지식인 엘리트 혹은 미국문화의 수혜를 받은 젊은이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자유부인> 이후 이민이 출연한 다양한 영화들에서 그는 ‘트렌치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든 ‘가장 최신식 스타일’을 한 도시적인 청년의 이미지를 전달했다.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을 비롯한 1950년대 전성기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뿐만 아니라 <촌색씨>(박영환, 1958), <모정>(양주남, 1958),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관되게 미국화된 엘리트 남성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전성기로 기록할 수 있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작품목록을 살펴보면 외려 <춘향전>의 이몽룡이라는 역할이 생경해보일 정도로 그는 현대물에 최적화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민이 전달한 미국의 이미지 그 중에서도 <자유부인>의 춘호는 미국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당시 젊은 세대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다. 블루종과 비니를 착용하고 사진기를 손에 든 춘호는 ‘굿모닝’과 ‘굿나잇’ 같은 인사말을 비롯해 ‘마담’, ‘익스큐즈 미’, ‘아이 러브 유’ 등 영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서양음악에 맞춰 댄스를 추며 위스키를 즐긴다. 키스하는 모습을 들켜도 “그저 프렌드인 여성과 뭐 키스 좀 했다고 해서 뭐가 상관” 있느냐고 반문하고 상대가 유부녀일지라도 “사랑하는 건 제 자유”라고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춘호는 전쟁 후 가치관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감정에 솔직하고 전통적인 규범에 반항하는 청년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입체적으로 완성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후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그림13) <자유부인>에서 춘호가 오선영의 사진을 찍어주는 장면 (그림14)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의 한 장면. 이민은 극중에서 잡지사 편집장 역할을 맡았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착용하고 카메라를 손에 든 이민의 이미지는 미국영화 스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춘호라는 캐릭터로 극단화된 ‘미국적인 연애 방식’은 이민의 스타 이미지에도 꾸준히 적용되어 ‘아프레 역할’을 대표하는 남성배우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이미지 캐스팅을 바탕으로 이민은 약혼자(<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나 아내(<돌아온 사나이>)의 굴곡진 과거를 고뇌의 과정 없이 ‘쿨’하게 인정하거나 하룻밤 연을 맺은 여성에게 명함을 건네며 웃으며 헤어지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모정>)으로 그려졌다. 여성 캐릭터들이 규범에 얽혀 감정과 상황에서 극단의 상황에 왕왕 처하는 것에 비해 이민의 캐릭터들은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구애(<촌색씨>, <비오는 날의 오후 세 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림15)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에서 명철(이민)과 영숙(최은희)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민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 또한 ‘미국행’을 앞두고 있는 춘호의 상황설정은 앞서 설명한 그의 이질적인 행동들을 설득하는 배경이 된다. ‘미국행’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춘호라는 캐릭터는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비현실적인 상황의 드라마적 첨가나 갈등 국면의 요소로 활용된다. <자유부인> 이후 그가 맡은 역할들의 다양한 ‘미국행’은 배우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행’ 혹은 ‘미국에서의 귀환’은 <자유부인>뿐만 아니라 <촌색씨>나 <비오는 날의 오후3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극의 갈등 상황을 유발하거나 해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건의 내부에서 얽히고설키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관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외부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동경하고 선망하지만 우리의 내부로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 4) 이 이민이 맡은 역할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비 오는 날의 오후 세 시>에서 그가 맡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은 <자유부인>의 춘호와 더불어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이민이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가 집대성되어 있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16)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에서 이민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극중에서 군복 차림에 사진기를 소지하고 지프차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림17) 헨리 장은 사진을 찍으려 방문한 탑골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수미(김지미)를 숙소 아래층에 있는 클럽에 데려와 밴드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스타 이민에게는 아이로니컬하게도 195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산업의 규모가 성장하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오히려 한정되기 시작했다. 1959년까지만 해도 그가 가진 스타성으로 출연료와 작품 편수에 있어 톱스타로 분류되긴 했지만 다양한 배우들의 등장으로 경쟁력에서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착된 이미지는 오히려 그에게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가 영화 제작에 직접 나선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제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흐르는 별>(김묵, 1958),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1959) 등을 연달아 제작한 그는 흥행과 운영의 실패로 2년 여 간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재기를 위해 다작을 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 나가는가 했지만 <춘향전>과 <자유부인>처럼 대중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사업에 매진하며 영화에서 멀어졌고, 대중에게도 이민은 과거의 스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시대를 투영하는 이미지로 여전히 존재한다. 1) 공영민,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02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1』, 이채, 2005 ; 이순진,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1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 대구 경북 지역 영화사』, 한국영상자료원, 2011. 2) 원용진, 「한국 대중문화, 미국과 함께 혹은 따로」, 김덕호‧원용진, 『아메리카나이제이션: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화』, 푸른역사, 2008, 173쪽. 3) 강소연, 「1950년대 여성잡지에 표상된 미국문화와 여성담론」, 상허학회, 『1950년대 미디어와 미국표상』, 깊은샘, 2006, 116~117쪽 참조. 4) <비오는 날의 오후3시>가 갖는 미국에 대한 양가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조영정, 「미국영화에 대한 양가적 태도 :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를 중심으로」, 『매혹과 혼돈의 시대』, 도서출판소도, 200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옥화 스틸>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영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물론 영화는 크든 작든 자본의 투자와 회수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산업임이 틀림없고, 분명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영화인들에게는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 같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를 파악하고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로 한국영화 지원책을 단행한다. 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의 <춘향전>(1955)이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 한 관에서 개봉한 이 작품에 관객들은 2개월간의 장기 흥행으로 보답했다. 영화인들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영화로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으로 이듬해까지 <심청전>(이규환, 1956) <장화홍련전>(정창화, 1956) 등 사극·시대극이 유행했고, 관객들이 싫증을 낼 틈도 없이 멜로드라마 현대극 장르가 열기를 이어갔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한형모인데,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의 각기 다른 연애를 다룬 <자유부인>(한형모, 1956)으로 전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후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역시 멜로드라마였다. 특히 홍성기가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상업영화 감독으로서는 1인자의 자리를 누렸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특히 <자유부인>에 방점을 찍어 “시대 풍조의 멜로드라마”로, 홍성기의 영화는 “전형적인 애정 멜로드라마”로 정의하지만, 이 시기 어떤 멜로드라마든 전후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리를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무명의 영화청년 신상옥의 등장 잘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의 영화적 스승은 ‘남한’영화의 시원이라 할 최인규다. 한형모가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도제를 시작했다면, 그는 해방 이후 최인규의 문하에 참가하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장르에 충실하고 기술에 뛰어난 한형모가 테크니션으로서 최인규의 적통이라면 신상옥은 이는 물론이고 영화작가로서의 면모까지 확실히 이어받았다. 어쩌면 1950년대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최인규의 영화세계를 완전히 계승한 이가 바로 신상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말기 최인규의 영화에서 미완에 그쳤던 리얼리즘의 화법과 장르적 세계의 결합은 신상옥이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일곱 번째 작품<지옥화>다. 사실 신상옥의 초기 영화들은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흥행에 실패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26세 때 만든 데뷔작 <악야>(1952)는 전쟁 시기 양공주를 그린 작품인데, 그 역시 증언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염세적인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 전쟁 중 대표 장르였던 세미 다큐멘터리 <코리아>(1954) 그리고 시대극 <젊은 그들>(1955), <꿈>(1955), <무영탑>(1957)을 연출했다. 영화계의 주류가 아니었던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한형모가 보여준 참신함이나 세련됨이 느껴지지 않는다. 훗날의 신상옥다운 과감함이 제대로 발현된 작품은 1958년 만들어진 <지옥화>였다. 현대극·멜로드라마의 유행과 1958년부터의 악극을 원작으로 한 이른바 ‘신파물’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경향에서 완전히 돌출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악야>에서 다룬 바 있는 양공주를 소재로 전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리얼리즘 화법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강렬한 파토스(pathos)를 드러내는 멜로드라마적 화법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었다. 물론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기지촌을 통해 드러낸 전후 한국 사회 <지옥화>는 동두천 기지촌을 배경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과 미군 부대의 물건을 훔쳐 암시장에 내다 파는 갱단이 등장하는, 한국영화사 전체를 훑어봐도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영화다. 영화는 형 영식(김학)을 찾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동식(조해원)이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어지러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의 가방을 훔치는 날치기를 쫓으려던 동식은 불량배들의 시비로 자기 가방마저 잃어버려 망연자실하고, 이를 본 남대문의 지게꾼들은 세상을 한탄한다. 결국 동식은 남대문시장에 장물을 팔러 온 형을 발견하고 동두천으로 따라가게 된다. <지옥화>의 서두는 마치 기록영화인 듯 미군 부대 앞 시장통 풍경, 미군과 양공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영화 곳곳에서 다큐멘터리적 질감이 활용되는데, 단순히 기록영화적 화면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르영화의 문법과 결합시키는 연출이 무척 흥미롭다. <자유부인>에서 한형모가 영화 속 볼거리로 댄서의 장면을 보여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신상옥 역시 당시 관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미군 부대의 댄스홀 장면을 넉넉히 보여주지만, 영식 일당이 양공주들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에 잠입해 물건을 훔치는 장면까지 덧붙이고 있다. 즉 댄서들의 공연 장면을 기록영화를 보는 듯한 숏들로 구성하는 한편, 교차 편집을 통한 장르적 긴장감까지 만들어내는 것이다. 리얼리즘 화법과 결합한 멜로드라마 양식 영화는 영식과 그와 동거하는 양공주 쏘냐(최은희) 그리고 동식과 그를 좋아하게 된 주리(강선희)를 주요 인물로 배치한다. 쏘냐가 동생 동식을 유혹하고 둘이 가까워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한다. <지옥화>의 전단지에 붙은 “물결치는 관능의 파도”라는 문구처럼 사실 이 영화의 애정 묘사는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키스신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해진다. 영식과 쏘냐가 침대나 풀밭 또는 강변에서 보여주는(마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프레드 진네만, 1953)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러브신, 쏘냐가 동식을 유혹하는 장면과 이후 둘의 러브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는 것이다. 영화학자 벤 싱어(Ben Singer)는 무대 멜로드라마에서 시리얼 퀸(serial queen)의 연속 영화(serial film)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적 특성으로 파토스, 과도한 감정, 도덕적 양극화, 비고전적인 내러티브 구조뿐만 아니라 육체에 위험을 가하는 스펙터클, 스릴, 폭력, 액션의 강조로 정의되는 ‘선정주의’를 거론한 바 있다. <지옥화> 역시 멜로드라마의 이러한 관점에 정확히 일치하는데, 영화는 영식, 동식, 쏘냐의 복잡한 관계로 야기되는 액션 신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전체 러닝타임(86분) 중 후반부 30분 동안 펼쳐지는 기차 액션신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스펙터클이다. 신상옥 사단이자 훗날 스릴러·액션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떨친 강범구 감독이 달리는 열차 위에 밧줄로 몸을 묶고 촬영했다는 바로 그 장면이다. 영식 일당은 미군 부대의 물자를 실은 열차칸을 탈취하기 위해 떠나고, 쏘냐는 동식과 달아나기 위해 헌병대에 이들을 신고한다. 일당은 탈취에 성공하지만 헌병대가 이들의 차량을 쫓고, 이를 안동식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이들을 쫓아가고, 쏘냐마저 영식을 쫓아가는 3중의 추격전이 펼쳐진다. 헌병대와 총격전을 벌이던 영식 일당의 차량이 전복되고 영식은 겨우 살아남아 동식에게 발견되지만, 뒤따라온 쏘냐를 본 그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지금 성수대교 근처의 당시 사근동 늪지대에서 찍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단연코 이 영화의 백미다. 쏘냐와 동식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며 사투를 벌이고, 칼로 쏘냐를 찌른 영식 역시 죽은 그녀 옆으로 기어가 운명을 다한다. 진흙으로 가득 찬 늪은 영화의 초입 남대문의 지게꾼이 말한 “어지러운 세상”의 축도였다. 다행히 영화는 동식과 함께 시골로 떠나는 주리의 장면으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쏘냐는 ‘지옥화’로 남았고, 동식과 주리만이 그 지옥을 탈출해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다 이후 신상옥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 서구영화를 지향한 세련된 멜로드라마를 선보이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성춘향>이 크게 성공한 1961년, 신필름을 설립한 그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반을 리드하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계를 부르는 별칭 ‘충무로’는 신필름과 그 외 영화사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신필름이라는 영화왕국의 군주였다. 영화제작자로서 양산 체제를 지휘하는 한편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작가로서의 작업도 유지한, 세계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축복받은 존재였다. 1960년대 초반 영화산업의 외양이 급격히 확대되었고, 1962년부터 연간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게 된다. 한국 영화산업은 규모의 경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성으로 깊이가 확보될 때 힘을 받았다.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앞둔 1996·1997년 홍상수·김기덕·이창동이 차례로 데뷔한 것처럼, 1960년 김기영이 <하녀>를, 1961년 유현목이 <오발탄>을, 신상옥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걸작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