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 제작년도
- 2006
지난해 12월 12일,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자원’)은 “스크린 케미스트리: 스타로 보는 한국영화사”라는 제목으로 1950~1990년대 한국영화계 스타 커플의 관계성을 분석하는 시네포럼을 개최했다. 한국영화사 연구를 수행하는 아카이브로서, 영화연구자는 물론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진 참여자들이 한국영화사와 관련해 새롭게 논의될 만한 지점을 발견하며 대화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영자원은 매년 이와 같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학술적인 분석 중심의 발제나 토론이 아니라 발표자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시네포럼의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내 주요 스타 커플이 등장한 시기를 네 구간으로 구분하고, 각 구간별로 등장한 스타 커플과 당시 한국영화나 대중문화의 특성 간의 상관관계를 조명했다. 시기별로 논의될 만한 스타들을 미리 설정해놓기는 했지만, 이들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발표자가 스스로 고민한 후 관객에게 제안하도록 열어뒀다. 1950~1990년대 급변한 한국사회의 분위기와 영화산업의 지형을 참고하면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이 대중에게 남긴 여운을 발표자와 참여자가 함께 추적할 수 있었던 포럼 현장을 요약한다. 1950~1960년대 스크린 속 스타 커플 영화평론가·영화사가 김종원 김종원 평론가는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커플로 등장한 스타들 간 케미스트리를 발견했다. 1950년대 스타 커플의 역사는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실제 부부가 되어 < 춘향전 >(이규환, 1955)에서 향단과 방자를 연기한 전택이 와 노경희 부터 시작한다. 배우 노경희는 < 내가 넘은 삼팔선 >(손전, 1951)을 비롯해 < 피아골 >(이강천, 1955) 등에서 해방 이후 스크린을 통해 강렬한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여성 배우로 거듭나고 있었으며, < 아리랑 3편 >(나운규, 1936)으로 데뷔한 전택이와 여러 작품에 동반 출연하며 20세기 중반 한국영화사에서 함께 활약했다. 이후 김승호 와 황정순 이 강대진 감독의 < 박서방 >(1960), < 마부 >(1961), 김수용 감독의 < 굴비 >(1963)에서 돋보이며 또 다른 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 는, 커플을 구성하는 인물들 간 관계가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당시 시대적 한계에서 벗어나, 케미스트리를 주도하는 여성 인물로 떠올랐다. 김진규 와 신영균 의 상대역으로 등장한 신상옥 감독의 < 동심초 >(1959), < 상록수 >(1961), < 산 >(1967)과 같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진다. 한편, 스타 커플의 일원으로 거론된 적은 드물었지만 멜로드라마 위주의 문예영화 영역 밖의 상업영화 작품들에도 다수 출연하며 입지를 다진 김지미 배우의 행보도 독특했고, 그의 활약은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불나비 >(조해원, 1965)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 김종원 영화사가는 배우 엄앵란 , 윤정희 , 문희 를 꼽았고, 그들과 배우 신성일 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했다. 엄앵란은 < 청춘교실 >(김수용, 1963), <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등에서 그와 함께 연기하며 ‘청춘영화’의 전성기를 불러왔으며, 두 배우의 호흡은 한국영화계에서 ‘스타’의 존재를 부각함과 동시에, 이전까지 외화에 치중됐던 국내 관객의 관심이 한국영화로 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윤정희는 데뷔작 < 청춘극장 >(강대진, 1966)부터 < 안개 >(김수용, 1967),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1960년대 한국 예술영화의 주축을 구성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다. 문희 역시 이만희 감독의 < 흑맥 >(1965)과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등에서 신성일의 상대역을 연기하면서 트로이카의 구성원으로서 영화계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성일 중심의 트로이카 구도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스타 커플 구조는, < 결혼교실 >(정인엽, 1970) 속 신성일과 윤정희, 문희, 남정임 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윤정희 X 신성일: 1960~1970년대 개발독재시대의 ‘밀고 당기기’ 영화평론가·영화연구자 금동현 금동현 평론가는 1960~1970년대 대표 배우이자 청춘스타였던 신성일과 윤정희가 동반 출연작에서 연기한 인물들의 관계를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재해석했다. 극중 그들의 배역이 점하는 위치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함께 출연한 87편에 달하는 작품들에서 거듭 역전되고,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두드러진 <안개>와 < 야행 >(김수용, 1977)에서 이 점이 선명히 관찰된다. 배우 신성일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로 데뷔한 이후 유수의 작품에서 줄곧 주연을 맡았고, 특유의 소년미로 ‘청춘의 영원한 아이콘’이자 현대사회에 완전히 정박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도회적이고 지적인 여성 인물을 대표했던 배우 윤정희는 1972년 석사 논문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를 발표하면서, 배우이자 여성인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면모를 보이며 ‘멜랑콜리’한 정서를 중심으로 스타 이미지를 갱신했다. <안개>와 <야행> 중 신성일, 윤정희 / © ㈜태흥영화 일례로, <안개>에서만 해도, 윤정희는 주변 소품이나 인물들 사이에 갇혀있고 신성일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야행>의 몇몇 장면에서 윤정희는 자신을 향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활성화하는 성취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신성일과의 케미스트리를 일으킴과 동시에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구축된 윤정희의 스타 이미지를 참고하면, 금동현 평론가는 그가 ‘보여지는(보이는) 여성’에서 ‘보여주고 보는’ 여성으로 변화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 한국고전영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두 작품의 영화사적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당대 형성된 두 배우의 스타 이미지를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는 관점도 공유했다. 더불어, 두 사람이 우울하지 않은 명랑한 얼굴로 콤비를 이룬 작품 <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정인엽, 1970), < 모범운전사 갑순이 >(이형표, 1972) 역시 언급하면서, 둘의 케미스트리를 다른 방식으로도 재조명하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며 발표를 마쳤다. 장미희 X 안성기 198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 커플 영화연구자 이윤종 이윤종 영화연구자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 장미희 와 안성기 를 다루면서, 당대 한국영화 주요작에 출연하며 강력한 케미스트리를 발휘한 이들을 ‘황금 커플’로 지칭했다. 안성기는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 황혼열차 >에서 아역 배우로 데뷔해 연기 활동을 지속하다가 < 애수의 언덕 >(김대희, 1969) 이후 10여 년간 휴식기를 보내고 < 병사와 아가씨들 >(김기, 1977)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 바람불어 좋은날 >(이장호, 1980),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등 1980년대 화제작의 주연으로서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을 연기하며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시기 장미희와의 동반 출연이 특히 빛났다. 장미희는 < 성춘향전 >(박태원, 1976)으로 데뷔하고 흥행작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에 출연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어 당대 여성 배우 트로이카에도 합류한다. 이후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등에서는 안성기와 상대역으로 만나 열연함과 동시에 흥행까지 거두면서 두 배우 모두 영화계 입지를 굳히게 된다. <적도의 꽃>와 <깊고 푸른 밤> 중 장미희, 안성기 / © ㈜동아수출공사 그런데 이들이 동반 출연한 1980년대 작품들에서 각자가 욕망의 주체(안성기)와 대상(장미희)으로 설정되면서 둘 간의 케미스트리가 ‘파국’의 결말을 통해 발휘된 점이 인상적이다. 안성기는 순수함부터 비열함에 이르기까지 중·하층민 남성의 변화무쌍한 얼굴을, 장미희는 세련된 외관을 지닌 채 심리적 결핍을 겪는 부유한 여성 인물을 자주 연기했다. <적도의 꽃>에서는 중년 사업가에게 착취당하는 오선영(장미희)에게 반한 미스터 M(안성기)이 그를 구출하려 하지만 결국 화합에 실패한다. < 황진이 >(배창호, 1986)에서 황진이(장미희)에 대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갓바치(안성기)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고, <깊고 푸른 밤>에서는 미국 영주권과 돈벌이에 집착하는 백호빈(안성기)이 계약 결혼을 통해 제인(장미희)을 이용하며, 두 인물이 파멸로 치닫는 과정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 드러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두 배우는 이렇게 산업화와 군부 독재의 한가운데 드리운 감정 소외나 우울감의 그림자를, 불행의 케미스트리로 스크린에 옮겨왔다. 김혜수 X 한석규: 1990년대 소비문화와 트렌드 신화, 도시의 얼굴 영화평론가·성결대학교 교수 정민아 이전까지 언급된 배우들의 활동이 과거 한국사회의 시대별 흐름에 맞춰 전개됐다면, 정민아 평론가는 1990년대에 두각을 드러내 현재까지도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갱신하고 있는 배우로서 배우 김혜수 와 한석규 를 조명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그들이 함께 출연한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로맨틱 코미디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 닥터봉 >(이광훈, 1995)에서 처음 협업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 < 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으로 다시 만났다. 그래서 그들이 한 작품에서 발생시킨 케미스트리보다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각자의 역량을 개발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감을 분석했다. (상) 영화 <쉬리>, 드라마 <신사장 프로젝트> 중 한석규 / (하) 영화 <첫사랑>, <내가 죽던 날> 중 김혜수 © ㈜필름쿡플러스, tvN 1990년대 국내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화와 세계화가 본격화되며 대중문화 산업의 규모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중의 취향과 ‘트렌드’에 부합하는 다양한 콘텐츠나 인물이 주목받았던 때로, 이때 등장한 스타들은 대체로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로 팬덤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도 김혜수와 한석규는 외모와 목소리, 연기,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당시 대중이 선망한 ‘세련됨’을 구현했고, 데뷔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품 속에서 쉼 없이 대중과 호흡해왔다. 한석규는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도시 남성의 이미지를 표방했지만, 드라마 <서울의 달>(1994)에서처럼 냉정한 현대사회에서 불운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처연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기억된다. 이는 최근까지 그가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소시민적’ 영웅의 리얼리티와도 맞닿아있다. 또한 감독에 의해 ‘선택받는’ 배우를 넘어 자발적인 비전에 따라 작품과 장르를 선택하고 신인 감독의 성장까지 견인하는 흥행보증수표 영화인의 시초 격이기도 하다. 한편, 김혜수는 활동 초기에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나 영화 < 첫사랑 >(이명세, 1993)을 통해 젊고 발랄한 청춘스타의 면모와 특유의 건강미로 호응을 얻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보다 다채로운 배역을 맡아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으며, 특히 2020년대 즈음에는 < 굿바이 싱글 >(김태곤, 2016)과 <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19), < 밀수 >(류승완, 2023) 등을 통해 독립된 여성 자아가 돋보이는 씨네페미니즘의 상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비디오 에세이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연구원 윤서연 비디오 에세이스트 이무언 과 영자원 학예연구팀 윤서연 연구원은, ‘비디오 에세이’라는 작업의 의미를 소개하며 포럼 주제에 맞는 작업 결과물 한 편을 직접 제작해 선보였다. 이무언은 관객이나 연구자로 하여금, 각자가 작품에서 발견한 특별한 지점을 중심으로 연출과 편집을 주도하면서 영화와 한층 더 친밀해지는 기회로 비디오 에세이를 인식했다. 윤서연 연구원 역시 비디오 에세이가 주제가 되는 대상(물)과 이를 둘러싼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통찰”한 결과이자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한다는 논의 [1] 를 인용하며,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으로서 비디오 에세이의 영역이 지닌 비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이날 소개한 작업은 영자원이 올해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 제작 및 배포 사업’을 수행하던 도중 두 사람이 기획하게 됐다. 우수영상물 다국어자막 DVD는 영화사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한국영화 몇 편의 공통 소재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별 본편 영상과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자막, 그리고 코멘터리 영상 등을 수록한다.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해외에 소개할 목적으로 매년 해외 공관이나 문화원 등에 비영리적으로 배포되고 있다. 작년에는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스타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DVD에, 한국사회의 일면과 시대의 감성을 머금고 있는 남성 인물들이 인상적인 한국영화 6편을 수록했다. 그리고 감상자들이 한국에 대해 간략히 소개받을 수 있는 짧은 콘텐츠를 기획해 부가 자료로 함께 수록하고자, DVD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배우 6인 중 한 명에 대한 비디오 에세이를 기획했다. 내부 논의 끝에 최종 선정하게 된 에세이의 주인공은, 순정과 헌신, 소시민의 나약함, 일그러진 욕망 등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한 국민 배우이자 고전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스타로 기억되는 한국영화의 얼굴, 안성기였다. 실제 연령대로 비춰볼 때, 안성기는 에세이를 제작한 이무언의 아버지 세대이면서 작품 촬영 당시에는 그(이무언)와 같은 또래였다. 또한 안성기가 극중 인물을 형상화하며 선보인 특유의 ‘얼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각기 다른 국면을 관통함에 따라, 1980년대의 시절이 하나로 통합되는 듯한 느낌 역시 받았다고 이무언은 전했다. “이미지들의 느슨하고 싱거운 연결”을 통해 이러한 인상이 에세이를 감상하는 이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반면 윤서연 연구원은 안성기가 각기 다른 영화에서 선보인 대사들 중 인상 깊은 부분들을 모아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특정 의미를 강조하여, 작품과 쇼트들의 의미를 비교적 명료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2017년 시네마테크KOFA에서 그에 관한 특별전을 개최했을 때 제작된 영상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을 참고하고, 구술채록 사업 진행 중 그의 구술 내용이 녹음된 파일들을 다시 들어봤으며, 그가 출연한 수많은 작품 중 10편을 골라 실제로 삽입할 쇼트를 신중히 선택했다. 쇼트마다 배어있는 정서를 자막과 음악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특히 서로 다른 작품에 속한 장면을 소품이나 장소 등을 매개로 연결하며 안성기가 작품과 작품 사이를 유기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출 중 하나는,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중 덕수궁의 벤치에서 각각 아내( 황신혜 )와 딸에게 자상함을 베풀지만 냉대를 받고 마는 두 장면을 한 화면에 나란히 배치해 동시에 재생한 대목이다.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아내와 딸을 향한 그의 행동이 중첩되는 순간들이 보이는데, 이는 필름이 아닌 디지털 영상이 보편화된 시대에 두 개의 영상을 2채널로 나란히 배치하며 가능해진 실험이라고 윤서연 연구원은 덧붙였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이미지 클릭 후 재생) 관객과의 대화 (질문1)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스타’들에게는, 할리우드 스타들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국내 관객의 욕망이 투사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부터는 이들만의 영역이 독립적으로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는데, 한국영화의 각 시기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에 대해 발표자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답변_이윤종 영화연구자)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산업은 몇몇 주류 영화 스튜디오가 제작과 배급, 상영을 전담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배우들 역시 각 스튜디오에 소속된 채로 활동했다. (하지만 1948년 미국 대법원에서 이러한 영업 활동이 ‘독점’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여러 스튜디오가 해체됐고, 여기에 소속됐던 배우들이 개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이러한 스튜디오 중심의 스타 시스템 자체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할리우드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방 이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이 당시 국내 영화산업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에 근접한 운영 양태를 보였는데, 1970년대부터는 이마저도 쇠퇴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감독과 배우, 영화 스태프들 모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1980년대까지는 1990년대 이후에 비해, 영화를 비롯해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얻지는 못했던 시점인데, 와중에 안성기와 같은 ‘국민 배우’가 탄생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질문2) 20대 관객의 입장에서는 < 라디오스타 >(이준익, 2006)나 < 실미도 >(강우석, 2003) 등의 200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안성기 배우를 기억하게 되는데, 과거의 다양한 출연작들을 통해 그의 활동을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돌이켜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면서, 여러 출연작 중에서도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장면들을 구분해내고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예상된다. 작업 도중 겪게 되신 고충 이 있다면 듣고 싶다. (답변_이무언 비디오 에세이스트) 감상을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인상 깊은 장면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장면을 확인할 때마다 영상의 일부를 이미지로 캡처해두고, 작품 안에서의 타임코드와 함께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메모했다. 에세이에서 다룰 모든 작품에 대해 이 작업이 완료되면, 캡처된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관련 장면을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각 이미지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안성기의 연기를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인상들(‘아버지’, ‘남성’ 등)이 쇼트들의 유기적인 연결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지각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성기 개인의 삶이 연상되거나 관객 스스로가 처한 ‘현실’ [2] 과 작품 속의 ‘허구’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흥미로웠던 장면들도, 어렵지만 제시하고 싶었다. 또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안성기의 ‘얼굴’ 외에 다른 요소들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잔을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미지, 수면 위에 반사된 이미지, 극중 시계를 비춘 이미지 등이, 매 장면 돋보이는 그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연결해줬다. 한국고전영화 에세이 - ‘기쁜 우리 젊은 날 그리고 안성기’ 중 시계와 잔이 등장하는 쇼트 (질문3) 1960년대 한국영화의 멜랑콜리적 지식인 주체성에 대해 연구한 바가 있는데, 금동현 평론가의 발표에서 <장군의 수염>과 <안개>가 다뤄져서 반가웠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담지하고 있는 멜랑콜리적 주체성 이 무엇일지에 대해 여쭙고 싶다. (답변_금동현 영화평론가) 오늘 분석한 작품들에서는 멜랑콜리를 자아내지 않고 ‘체현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물론 1960년대에는 멜랑콜리를 재현하는 몇 가지 요소가 발견될 뿐 멜랑콜리라는 감수성 자체가 이 시기에만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멜랑콜리의 흔적이 관찰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대목을 꼽자면, ‘코미디’라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한국 코미디영화에서 웃음은 모종의 이유로 ‘경직되어버린’ 무언가를 조롱할 때 자주 발생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웃어야 하는 데 웃지 못하는 순간( 이봉래 감독의 영화에서의 몇 가지 장면이 예가 될 수 있다)이 어떻게 보면 멜랑콜리한 상태에서 받는 느낌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질문4) 오늘 언급된 배우 중, 배우 김혜수가 유독 눈에 띈다. 1990년대 당시 그는 확고한 ‘무비스타’로 자리매김한 상태가 아니었고, 광고나 드라마를 통해서도 아직 다른 스타들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김혜수 가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것이 독특한 지점이다. 이 시기 스타로서 김혜수의 부상을 분석하실 때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어떤 접근법을 적용하셨는지가 궁금하다. (질문5)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까지 배우 김혜수와 한석규가 선보인 연기 스타일이, 그들이 1990년대에 수행하던 방식과는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셨다. 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방향성이 재정립되는 데는, 영화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변화하는 현상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시대별로 이념이나 정치성, 관객의 욕망 등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변모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지 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답변_정민아 영화평론가) 두 질문에 대해 한 번에 답변 드리고 싶다. 말씀하신 대로 김혜수 배우가 영화계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다른 배우들에 비해 다소 늦다. 하지만 1990년대 화보와 예능, TV를 포함해 대중매체 전반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한 여정을 고려하면, 그리고 이 시기 관련 콘텐츠를 향유했던 경험을 되새겨보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김혜수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는 오늘날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영화’와 그밖의 영역(방송 등)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와 다르게,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배우’의 활동 분야가 대폭 확장됐고 분야 간 경계도 거의 사라졌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모두 ‘배우’로 호명되며, 그들이 연기를 선보이는 분야 역시 한 가지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크린을 통해서만 스타로 거듭나기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파급된 각기 다른 매체에서 강렬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만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한 김혜수가,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복합적 차원의 배우상을 1990년대부터 선구자적으로 확립한 이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 현장 BEHIND CUT * *** [1] 박진희, “ 복혜숙과 석금성을 헷갈려하다 ”, KMDb 영화글, 2023. 7. 27. [2] < 개그맨 >(이명세, 1988) 중 이발사가 이종세(안성기)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 방면에 재능이 많으셨죠?”라고 물어 아역 배우 시절 안성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거나, < 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중 “우리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라는 대사 이후 배우 박중훈과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 등이 있다.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그래서 우리는 유튜브 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20년 5월에는 정지돈의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출간 기념 라이브 북토크를 했고(촬영하던 아이패드 배터리가 중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강제 종료됐다), 2021년 5월에는 오한기의 『인간만세』 출간 기념으로 셋이서 라이브 북토크를 했다(오한기가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줌을 통해 진행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라이브 경험은 더 많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라이브냐고, 너무 민망하다고, 식은땀 흘리며 새하얘진 머리로 아무 말이나 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이제 멀쩡한 정신으로 차분하게 아무 말이나 한다). 그렇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정말로… (하나, 둘, 셋-) (심호흡) 1. 23 아이덴티티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영한사! 지금부터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신년 특집 유튜브 라이브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K정연이고요, 제 옆에는- -안녕하세요 JD입니다. -처음 연재 제안 받고 서교동 카페에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도대체 뭘 써야 하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어요. 신년인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근황부터 좀. -네, 저는 요즘 누워 있는데요. 누워서 책도 보고 누워서 소설도 쓰고 밥도 누워서 먹고 지금도 사실 누워 있어요. -세상에, 지금 라이브 스트리밍 중이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독자들을 기만하시는 건가요? How dare? -어차피 안 보이잖아…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이게 뭐야 진짜. 그러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나는 유튜브 채널까지 만들었다. 이름은 레코드 디스코드(검색해도 안 나옴), 오디오 비주얼 전문(일단은) 채널이다. 계획은 이랬다. 영자원에 미리 양해를 구해서 라이브 시작과 동시에 유튜브가 임베드 된 연재 페이지를 올린다, 스페셜 게스트들과 함께 2시간 남짓? 지난 10화 동안의 연재를 돌아보고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남은 11화 동안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는 AI 노트 어플을 통해 자동으로 푼 녹취를 연재 페이지에 추가한다, 클립 일부를 NFT로 판매해서 에세이 필름 제작비를 확보하고 남는 돈은 사회에 환원한다… 다시 봐도 완벽한 계획이다. 단 하나, 유튜브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려면 구독자가 1000명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금 구독자가 몇 명이죠? -사실 좀 아까워요. 딱 23명이… -23명이 모자라다고요? -딱 23명이라고요. -그게 뭐가 아까워요? -그럼 안 아까워요? -?? 2. 그는 사막에 서서 인생의 순간들을 세고 있다 1954년 12월 10일 요나스 메카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동생 아돌파스 메카스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다른 백수들과 함께 전설적인(그때는 아니었지만) 영화 잡지 [필름 컬쳐]를 창간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돈이라고는 고작 120달러가 전부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돈은 700달러. 메카스는 심플한 해결책을 떠올린다. 편집위원들에게 100달러씩 갹출하는 방법이었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전국민에게 100원씩 받아서 놀고먹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지는 남미 여행을 준비하느라 빈털터리 신세였다. 루이스는 잡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줄 수 있다고 했다(“돈만 빼고”). 메카스 형제는 원래 돈이 없었다. 고든은 돈이 있다, 하지만 돈을 낼 수는 없다, 그건 신념의 문제다, 라고 말했다. 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 가수와 동명이인이자 훗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토마스 에이킨스, 미국 영화의 기원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될 고든 헨드릭스가 메카스를 쏘아붙였다. 왜 돈도 없으면서 잡지를 시작한 거야? 최소한 3호나 4호 정도는 낼 돈은 쥐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만약 우리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면 [필름 컬쳐]를 시작하기 위해 22세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메카스는 말했다. 세상에는 돈도 있고 사업 수완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돈도 없고 사업 수완도 없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신은 잔인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메카스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법원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함. 인쇄비를 주지 않았다며 인쇄소에서 우리를 고소했다. 783달러 91센트를 갚아야 한다, 일주일 안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예요. -돈도 없고 구독자도 없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요? -신은 잔인하다고요. 3. 볼륨을 높여라! 최근 나는 오디오와 엘피에 빠져 8개월 할부(그 이상은 무이자가 안 됨)로 너무 많은 것을 샀다. 최소한 3/4분기까지는 뭘 사기는커녕 마리모처럼 꼼짝없이(움직이면 돈이니까) 누워 지내야 할 판이다. 마감은 늘 밀려 있고 시간은 부족하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23명이다(아마 다 아는 사람이지 싶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의욕이 넘치고 동시에 홀가분한 마음이기도 하다.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인 42(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참고)살이 되어서 그런가? 마치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장편소설의 초고를 끝낸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기분이다. 1952년 5월 14일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챈들러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것을 내가 원하던 대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물론 나는 챈들러가 아니다. 일기나 트윗, 심지어 메모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쓰지는 못한다. 영상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영상을 다룰 줄도 모르고 다루는 법을 배울 여유도 없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이중의 우회로가 마련되어 있다. 1)이건 글이 아니라 유튜브 라이브임 2)유튜브 라이브지만 글을 통해서 송출되는 라이브임 말하자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일종의 회색지대가 있고, 그곳에서 나는 중력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굴 준비가 되어 있다. 개연성과 물리법칙을 가볍게 무시한 채 라이브 스트리밍 도중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하기도 하고(이렇게), 중간중간 의미없고 지루한 부분을 빠르게 건너뛰며 플래시 포워드를 하기도 할 것이다(저렇게). 서두르자. 어쨌거나 밤은 짧을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4. 비카인드 리와인드 -21세기 한국 영화가 < 박하사탕 >과 함께 시작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2000년 1월 1일이 딱 되자마자 개봉했대요. 자정에, 특별 이벤트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나 다시 돌아갈래! 하는 절규와 함께 시작한 셈이죠. How ironic? -2000년 1월이면 20세기잖아요. 21세기는 2001년부터고요. -…넷플릭스에 있길래 다시 봤는데 저희가 그동안 연재를 통해 이야기했던 한국 영화의 특질들, 그러니까 목욕탕이니 노래방이니 화면을 가득 채운 K-얼굴의 스펙터클 같은 것들이 전부 나오더라고요. 종합선물세트처럼요. 정말이지 깜짝 놀랐지 뭐예요. 우리가 더듬더듬 어떻게든 길을 찾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버렸고요, 하핫. -저기요? -그럼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창동 감독은, 그 전직 문화부장관은, 아니 미래의 문화부장관은 과연 <박하사탕>을 통해 어디로 돌아가고자 했던 걸까요? -K정연? 제 말 안 들려요? - 설경구 가 기차 선로에 서서 문제의 대사를 외쳤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설경구와 충돌한 기차는 뒤로 가기 시작하고요. 1994년 여름으로, 1987년 봄으로, 1984년 가을로, 1980년 5월로, 1979년 가을로, 그리고… -야. 물론 <박하사탕>은 회귀물이다. 그리고 이창동은 21세기 한국 대중서사의 우세종이 된 웹툰과 웹소설의 트렌드를 선취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의 외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재구성한 ‘60년생 김영호’(아마도 그의 생일은 4월 19일일 것이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창동이 [82년생 김지영]의 성취를 선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창동의 영화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떠밀리다가 흐름 그 자체가 되는 문제적-남성-개인의 픽션을 보여준다면, 조남주의 소설은 거대서사 속에서 매번 남자주인공의 아내(김여진)로, 정부(서정)로, 작부(고서희)로, 첫사랑(문소리)으로 주변화되고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삶-이야기들을 통계와 기사를 재료로 픽션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주 가까스로(소설이 지영을 진료한 남의사의 진술을 통해 성립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근대적 양식의 본질이다). 둘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20년의 시간을 회귀해 스무살의 천변으로 돌아간 김영호는 첫사랑 순임을 다시-처음 만난다. 손으로 뷰파인더를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나중에 사진을 찍고 싶다고, 사진기를 메고서 이런 이름 없는 꽃들을 찍고 다니고 싶다던 영호는 순임에게 말한다. -이상해요. 여기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옛날에 한 번 와본 데 같아요. 저 철교랑 강이랑 다 낯익어요.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 -정말 꿈이었을까요? -영호 씨, 그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그 꿈은 좋은 꿈이 아니고 악몽이고 그 속에서 영호는 스스로 다른 이들이 꾸는 악몽의 주재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는 손뼉을 치며 ‘나 어떡해’ 노래를 부르다가도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돌바닥에 누워 철교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혹은,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지만 그 꿈에서 깰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역사의 열차를 뒤로 가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궤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따라서 이건 회귀물이라기보다는 루프물이다(“나 ‘다시’ 돌아갈래!”). 정해진 루트를 반복해서 달리는 열차의 운동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만약 충분히 많이 되돌린다면 어떨까? 20년이 아니라 아예 100년 쯤을 되돌린다면? 처음으로,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가 도착하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규모의 전쟁이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크툴루의 부름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으며 원한다면 누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이름 없는 꽃을 찍고 서정시를 쓸 수 있었던 시대로. 그땐 어쩌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더 길고 다채로운 꿈이라도. 그리하여 영호(와)의 악몽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수 있도록. 물론 이것은 비약이다. 왜 아니겠는가? -차라리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박하사탕>의 회귀(루프)는 가리봉 봉우회에서 야유회를 갔던 천변에서 시작하고 또 끝나지만, 21세기 한국 영화는 설경구의 외침과 함께 과거(트라우마적)-현재(망가진)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대과거(기원)로의 동반 회귀를 감행했다고요. -요즘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에요? -그곳에서 한국 영화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현실이 아직-도래하지-않은-척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 영화는 ‘정치적인 것’을 생산해내기를 멈추고, ‘정치’를 서사 내부에 가둔 채 극의 논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멸되고 해소될 수 있는 스펙터클을 더 잘 만드는well-made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마크 피셔를 따라 말하자면 21세기 첫 20년 동안 한국 영화의 장르는 단 하나,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입니다! -그만!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강우석의 < 실미도 >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물론 그 영화는 웰메이드가 아니지만요. 거기서 설경구는 1971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비겁한 변명입니다… 5. 노 홈 무비 2001년 1월 1일 <박하사탕>과 함께 시작한 21세기 한국 영화의 첫 20년은 2019년 12월 26일 지각 개봉한 허진호 의 < 천문: 하늘에 묻는다 >와 함께 끝난다.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7월 24일에 개봉한 송강호 박해일 주연의 < 나랏말싸미 >와 함께 끝났다고 해도 좋다. 둘 다 세종대왕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무척 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진정한 끝은 2019년 12월 31일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문 기사와 함께 왔다(뉴시스, “中 우한서 원인불명 폐렴 환자 집단 발병...당국 긴장”). 돌아보면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는 대규모 물량 공세와 와이드릴리즈를 통해 누가 천만이라는 깃발을 가져갈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극장전(劇場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충무로의 토착자본이 CJ나 롯데 같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재편된 21세기 한국 영화가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어쩌면 스튜디오 제작 체계가 확립되던 무렵의 헐리우드,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절의 헐리우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더는 불가능해진 지금 한국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덩달아 내 인생도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들 그렇듯 나 역시 종종 새로운 인생을 꿈꾸긴 했다. 회귀나 빙의나 이세계 같은 황당무계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삶은 아니었다. 한동안 내가 그렸던 미래는… 우리 가족이 살 수도 있었을 그것은… 솔직히 나는 <나랏말싸미>가 천만 영화가 될 줄 알았다… 6. 내 차 봤냐? -요즘에도 극장 자주 가세요? -요즘에도 극장 안 가세요? -작년에는 한 번 갔던 것 같아요. 같이 갔잖아요, < 라스트 듀얼 > GV하러. 아 GV 전에 미리 보느라 시사회도 갔었으니까 두 번이죠. 아내가 시간 나면 지돈씨랑 같이 영화나 보라고 유효기간이 12월 31일까지인 라이카 시네마 초대권 두 장 줬는데 결국 그건 못 갔네요. 아쉬워라. -정말…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그래도 올해는 벌써 한 번 다녀왔다. 3시간짜리 영화였으니 1.5번이라고 해야 하나? 맞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 드라이브 마이 카 > 이야기다. 타임라인에 쏟아지는 트네필들의 기립박수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영화는 재밌었다. 중간중간 지루할 법도 한데 3시간짜리 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2시간 26분 정도로 느껴졌달까? 물론 엉덩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욱신욱신 쑤시는 꼬리뼈와 함께 도서관에 갔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 앉아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새삼 느낀 하루키의 인기 비결: 그건 그가 통속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제로 콜라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보다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결정적인 ‘X’를 제거한 채 그것에 조금 미달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다르다. 내 생각에, 그건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이 통속성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인생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생이 통속성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략…) (…중략…) 다시 말해보자. 가후쿠에게는 맹점이 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발견된 맹점은 아내가 죽은 후 더 커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것이 커지지 않은 이유는 가후쿠가 때마다 안약을 넣기 때문이다. 즉, 가후쿠가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보려하지 않는가? 그건 바로 통속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통속성 자체가 바로 맹점이다. 통속성이란 어떤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인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주인공의 녹내장은 나은 건가요? -의사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되면 완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저도 재밌고 잘 찍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몇몇 장면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특히 마지막 눈밭에서 연설하는 부분. 보면서 진짜 와 저래도 돼? Really? -엄청 뻔뻔하죠. 저도 그 부분 보면서 좀 그랬는데,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아마 그 부분까지 좋아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다만 뭐랄까,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더 좋아할 수는 있겠죠. 어떤 결정적인 작은 흠이 전체를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고, 나아가 옹호해주고 싶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러니 우리도 좋은 이야기만 하죠. -저는 운전하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담배 피우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어요. 원래 이렇게 잘생겼나? 얼굴을 좀 고쳤나? -잠깐, 왜 우리가 <드라이브 마이 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거죠? 지금? 한국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에도 모자랄 판에. 7.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런데 한국 영화가 도대체 뭘까요? 이제 와서 새삼 묻는 것도 우습지만, 연재가 지속될수록 한국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언젠가 이승훈 시인(하늘에서 평안하시기를)은 시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한국 영화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 필요도 없겠죠.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이유도요. -한국 영화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내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 왜 갑자기 반말…? -정신 차리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격식이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틱톡 틱톡!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한국 배우들이 셋이나 출연하고 한국말도 자주 나오죠. 한국인 스텝들도 여럿 참여했고요. 에필로그 같은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부산이기도 한데요, 그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국 영화일까요 아닐까요? A)한국 영화라면 그 이유는? B)한국 영화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갑자기 그런… -그만! 대답하지 마세요.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까!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국 영화냐 한국 영화가 아니냐가 아니에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가 문제인 거죠. -받아들인다고요? -아카데미 위원회가 21세기의 새로운 20년을 맞아 < 기생충 >을 미국 영화로 받아들인 것처럼요. -도대체 누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건데요? 무슨 자격으로요? -그건… 그때 갑자기 화면 멈추고, 멈춘 화면 위에 빨간 자막이 뜬다. (자막) “K-씨네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K-inephile)” (To be continued…)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