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자
- 감독
- 프랭크 해리스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Leo Fong, 카메론 미첼, 트로이 도나휴, 아코수아 버시아
올해 나는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부활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게 되었다. 감히 꿈꿀 수 없는 성스러운 부활보다는 ‘평범한’ 사람 라자로의 이야기가 희망이 되어주었다.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는 예수의 부름에 응답해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걸어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희망뿐만 아니라 좌절도 안겼다. 신체의 형상을 묘사한 대목이 특히 그랬다. 부활을 꿈꾸기 위해서는 일단 신체가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죽은 몸은 보존되기보다는 대부분 화장된다. 부수어져 가루가 되어버린 몸의 부활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상상하기를 포기할 수 없던 나는 잘게 부수어진 입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는 광경을 기어이 상상했다. 머릿속에 재생된 그 장면은 마치 21세기 SF 판타지 영화처럼 보였다. 과장된 상상은 부활과 무관하다고 여긴 영화를 부활의 서사로 보게 했다. < 3000년의 기다림 >에서 알리테아는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작은 유리병을 전동 칫솔로 닦다가 그 속에 존재했던 정령 지니를 깨운다. 뚜껑이 달린 작은 호리병은 축소된 유골함이고, 그래픽화된 연기는 기체처럼 흩날리는 뼛가루와도 같다. 뚜껑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죽음(혹은 영원한 기다림)의 시간은 삶의 시간으로 역행한다. 거대한 몸이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트인 장소에서 나타나곤 했던 지니가 이번에는 고개조차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의 호텔 방에 구부정한 상태로 등장한다. 일상성과 구체성은 그것이 리얼하다고 느끼게끔 하는 데 기여한다. 호리병 속 생명체가 죽음에서 삶으로, 입자에서 거대한 몸으로, 거대한 몸이 점차 부피를 줄이며 생체 순환을 역행하듯, 이야기의 방향도 전환된다. 소원 성취 스토리에서 사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소원의 주체에게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간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니의 오랜 사연이 중심에 놓인다. 알리테아는 구멍이자 심연이었던 지니의 삶을 깨우는 눈이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섭렵한 훌륭한 서사학자로 소원의 무용함을 진작에 간파한 인물이다. 지니가 기나긴 사연을 늘어놓게 된 이유도 알리테아가 소원 기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3000년 동안 좁은 병에서 깨어났다 갇히기를 반복한 지니의 인생 이야기가 불러오는 연민과 공감 그리고 사랑은 결국 알리테아의 마음을 돌린다. 알리테아의 첫 번째 소원은 정령을 향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에는 지니에게 바쳐진 소원들에 대한 메타적인 시선이 잠재해 있다. 모든 소원은 그것이 사람에 관해서든, 부와 명예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관해서든 소원을 비는 현장에 연루되지 않은 인물 혹은 사물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이후에 존재할 무수한 변수를 차단해 소원이 지닌 근본적인 모순을 벗어나는 해결책처럼 보인다. 알리테아의 소원을 통해 소원의 실행자이자 대상이 된 지니는 거의 소원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알리테아의 소원 역시 다른 소원 성취 서사와 마찬가지로 실패의 과정을 겪는다. 지니가 알리테아의 곁에 머무는 것이 그에게 고문과도 같아지면서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소원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은 소원의 내용보다는 소원에 내재한 구조에 있다. 소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 가지인 이유는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다. 소원은 소원 빌기,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한 실패, 폐기 혹은 수정의 삼단계를 거쳐 완전해진다. 구조 속에 소원의 실패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이를 바꿀 순 없을지라도 인간에게는 남은 기회가 한 번 더 있다. 알리테아의 선택은 소원의 완료 이후에 덧붙은 저주의 해제를 자신의 소원으로 삼는 것이다. 소원 이야기의 최종 결말은 지니의 자유에 있다. 알리테아는 변치 않는 조건을 소원 삼아 실패 없는 결말을 만든다. 반면 영화가 주는 감동은 알리테아가 소원 성취 서사의 허점을 간파해 지혜로운 방식으로 그 굴레에서 빠져나왔다거나 익숙한 정령의 이야기를 새롭게 썼기 때문이 아니다. 감동의 자취를 따라가 보면 구조에 눈을 돌리면서 누락한 내용 쪽으로 다시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세계가 버겁다면 당신이 있을 곳으로 가요. 그곳이 어디든지.’ 소원이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운 알리테아의 말에는 소원의 구조 분석 따위는 무화시킬 힘이 있다. 마지막 소원은 첫 번째 소원의 전제였던 지니에 대한 알리테아의 사랑을 증명하며 이것이 결국 사랑의 서사임을 긍정하게 한다. 모든 행복한 사랑 이야기의 결말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합일에 바쳐진다. <3000년의 기다림>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나란히 언덕 너머를 향해 걸어가는 알리테아와 지니의 뒷모습은 합일의 증거처럼 보인다. 다만 이 아름다운 장면 위에 깔리는 내레이션은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다. 둘은 그 뒤로도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했으리란 것, 알리테아는 죽을 때까지 지니를 기다리리라는 것을 예감케 할 뿐이다. 영화의 결말이 아름다운 이유는 알리테아가 홀로 있던 순간들 때문이다. 알리테아가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결에 고개를 돌리면 지니는 어김없이 나타난다. 이를 한낱 환상으로 치부하든, 영화적 사실로 받아들이든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전까지 지니가 나타난 장소들이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장소인 것과 달리,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개인 컴퓨터의 기본 바탕 화면 속 그래픽화된 들판과 하늘을 연상시키는 가공된 자연 이미지다. 정령은 여전히 정령이며,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다만 알리테아는 인간과 정령이 어울릴 수 있는 환상의 장소를 마련해 두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사실도, 거짓도 없다. 다만 이야기가 있다. 인간과 정령은, 알리테아와 지니는 서로에게 아우라를 형성한다. 기나긴 시간에 대한 상상과 오랜 기다림이 바로 아우라의 정체다. 그것은 이야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올해는 새삼스럽게 서사의 위기에 관한 진단이 부활한 해였다. 위기론은 서사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서사로 주어를 바꾸어 반복된다. 극장의 위기는 여름과 추석 시즌에 연달아 부진한 성적을 낸 한국 상업영화만이 아니라, 견고할 것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현주소인 마블 유니버스의 부진에 의해서도 견인되었다. ‘서사의 실패’에서 은폐되는 건 논의 대상이 ‘거대’ 서사라는 점이다. 마블 코믹스 유니버스에 기생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대 서사의 세계는 망각의 수혜 속에 몇 번이고 다시 새롭게 무너질 수 있는 세계처럼 보였다. 그런데 더는 무너질 것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무너진 것일까. 이를 논하는 데는 거대 서사라는 말보다는 ‘메타 서사’가 더 익숙하고 적합한 단어 같다. 영화에 관한 영화가 점해온 메타라는 수식은 이제 평행 우주를 오가는 메타버스 영화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지금 여기의 세계 바깥에 평행한 세계를 지으며 도망치고 부활하는 세계는 단 몇 시간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 여기 실존의 감각을 점차 훼손시켰다. 부활도 죽음도 심드렁하거나 곧 잊혔다. 어쩌면 부활이 가장 시급한 대상은 부활 그 자체다. 부활이 전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 지금, 부활은 부활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여전히 우리 곁에는 근사한 부활이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영화에 관한 영화, 혹은 자전적인 영화로 돌아온 반가운 이름이 유독 많았다. 마치 ‘메타’를 되가져오려는 비밀스러운 집단 공모가 진행 중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배우가 극 안에서 다른 배우로 등장해 세트장 사이를 평행 우주처럼 만들기도 했고( 애스터로이드 시티 ), 감독이 극 중 다른 감독으로 등장해 영화 존재의 부활을 견인하기도 했다( 파벨만스 ). 브레송의 당나귀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당나귀로 부활해 신성은 인간의 형상을 요구하지 않음을 드러냈으며( 당나귀 EO ), 시대를 초월한 채 영속하는 것 같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인물을 마주하기도 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 충고와 모방으로부터 도망치던 홍상수의 인물들은 도망치는 대신 도망을 유발하는 방식을 통달했으며( 우리의 하루 ),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여겨졌던 빅토르 에리세의 배우와 필름을 찾는 여정은 득도의 체험처럼 느껴졌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 인물의 구원을 차단하는 냉정함에 부활의 염원을 덧씌워 보기도 했고( 토리와 로키타 ), 잔소리꾼 수다쟁이 감독이 한 명쯤은 존재해도 괜찮지 않을까 괜스레 긍정적인 마음이 되기도 했다( 찬란한 내일로 ). 리스트를 뽑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인 요약지만, 그렇게라도 기다림에 대한 응답의 증거나 여전한 기다림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3000년의 기다림>은 다시 기다림의 역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영화 내부에만 소용되는 데서 벗어나 개별 관객의 삶을 두루 자극하는 방식으로 메타를 쓴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수작 < 데이 워 익스펜더블 >(1945)과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를 잇달아 내놓은 존 포드는 마음속에 오래 품어온 영화 한 편을 완성한다. 그래엄 그린 Graham Greene의 소설이 원작이며 우울한 떠돌이 성직자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어떤 제작자도 원하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여기엔 결투도 로맨스도 없었으며 멕시코 올 로케이션 촬영이어서 제작비 부담도 컸다. 포드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릴 자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건 돈을 걸만한 상업영화가 분명히 아니야. 하지만 내 심장과 믿음은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이 영화를 위해 포드는 폭스의 연봉 60만 달러 계약을 거절하고, 자신의 프로덕션 브랜드인 아고시 Argosy를 법인화해 직접 제작에 나섰다. 결과는 처참했다. 아고시는 1백만 달러의 빚을 짊어지게 되었고 이 영화가 성공하면 포드의 또 다른 개인적 프로젝트 < 조용한 사나이 >를 지원한다는 RKO와의 계약도 무용지물이 됐다. 포드가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거의 전부 뜯어고치는 바람에 시나리오 작가 더들리 니콜스와의 사이도 틀어졌으며, 원작자 그래엄 그린도 “포드의 아일랜드식 카톨릭주의 때문에 내 원작이 희화화되었다”며 비난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멀어져갔다. 평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쁜 편이었다. 포드의 열렬한 지지자인 린지 앤더슨조차 이 영화가 “과도하게 장식적이고 감상적”이라고 평했고 장 미트리는 “이론적 리얼리티를 지닌 이론적 드라마이며... 탈개인적이고 차갑다”고 비판했다. 오직 포드 자신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변호인이었다. “나는 이 영화 보는 게 즐겁다. 내게 이 영화는 완벽하다.” 무엇이 포드 스스로 ‘완벽’이라는 단어까지 쓰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왜 그토록 폄하되었는지도 짐작하기 힘들다. 1997년 이국 도시에서 낡은 VHS 테이프로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 기억한다. 우울한 표정의 한 사내가 대의도 명분도 없이 죽음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줄곧 어둠과 불안으로 가득했고,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야 사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이게 정말 존 포드 영화인가? 사내의 선택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그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형언하기 힘든 압도적인 공기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재발견을 기다리는 포드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들판을 지나 무너진 성벽을 넘어 무엇엔가 쫓기듯 비틀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가 이 영화의 영웅인 신부(헨리 폰다)이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영웅의 등장이 이토록 불길하고 초라하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면 그는 아치형의 기둥이 끝없이 도열해 있는 회랑을 지나서 걸어온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마을을 향해 간다. 그리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진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경에서 시작된 옛날이야기이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이며 세계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영화의 촬영지는 멕시코이며 멕시코 정부 및 영화계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배경이 된 마을은 적도와 멀리 떨어진 허구의 공간이다. 누가 알겠는가.” 포드의 영화적 무대는 대개 미국의 서부이거나 아일랜드의 마을이었으며, 지리적 좌표와 역사적 시간과 연루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 도망자 >는 자신의 예외성을 처음부터 공표한다. 여기엔 특정한 시대와 장소도 지정되지 않고 신부를 비롯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이 자의식적 우화의 원본은 그래엄 그린의 소설 이전에 신약성경이다. < 3인의 대부 Three Godfathers >가 서부극의 세팅 위에서 예수 탄생기를 원용했다면, <도망자>는 초시대적 알레고리로 예수의 최후를 우울증적 서사와 표현주의적 영상으로 번안한다. 도입부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정체불명의 마을에 진입한 사내는 언덕 위의 폐건물과도 같은 버려진 성당으로 들어간다. 이어지는 3분여의 짧은 성당 숏 안에 포드는 극도의 간결함과 압축미로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단번에 드러내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1 #2 #3 #4 #5 신부는 긴 그림자로 성당에 입장한다(#1). 실루엣으로만 그의 모습이 드러나며 카메라 위치를 반대로 잡은 장면에서도 그는 여전히 검은 실루엣이다(#2). 그는 그림자 혹은 어둠의 존재이다. 그의 지친 듯 얼빠진 표정이 드러나면(#3), 그에게 드리워진 어둠이 그가 단순히 도망자라는 신분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의 상실과 밑 모를 불안이라는 내면의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형 십자가도 성상도 없는 성당에서 그를 맞은 건 부서질 듯 왜소한 나무 십자가들이다(#4). 남자의 뒤를 따라 성당에 들어온 여인 마리아 돌로레스와의 만남 장면에서 그의 불안한 존재감은 더 강조된다. 여인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둘러싸이지만 사내는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다(#5). 이 명암 대조는 관습적인 조명법을 교란한다. 신부는 어둠의 편에 여인은 빛의 편에 속해 있는 것이다. 여인이 묻고 남자가 대답하는 짧은 대화가 이어진다. “누구세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여기가 내 집이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 마을 남자들은 내가 다 알아요.” “........................” “혹시 경찰인가요?” “경찰을 피하고 있습니다.” “범죄자인가요? 도둑질하거나 살인을 저질렀나요?” “아닙니다. 난 신부입니다. 내 성당이지요.” 이 단문의 대화만으로도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단번에 드러난다. 아이를 안은 여인은 창녀이고 남자가 로마군에 쫓기는 예수처럼 경찰에 쫓기는 신부이며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인이 “교회가 다시 열리나요?”라고 묻자 사내는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여인이 “세례를 못 받은 아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신부님이 여기 오신 건가요?”라고 묻자 사내는 역시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자신이 이곳에 온 돌아온 이유와 자신이 할 일을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매춘부인 여인은 지금 빛을 받으며 구원자의 자리에 서 있고, 신부인 사내는 범죄자처럼 어둠 속에서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 창녀=구원자라는 암시가 < 역마차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일곱 여인들 7 Women>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 도망자 >는 무엇보다 먼저 < 젊은 날의 링컨 >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내의 망설임 때문이다. 역시 헨리 폰다가 연기한 젊은 링컨에게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망설이듯 전진하는 우아하고도 기묘한 움직임이었다.(4회 참조) <젊은 날의 링컨>애서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인지 운명의 간계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동체 영웅, <도망자>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성직자는 동질의 인물이다. 그들을 일반적 대중영화에서의 고결한 속인과 대비되는 범속한 성인(聖人)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 포드의 영화를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범속성의 몸짓이다. 그들에게 종교적(혹은 공동체적) 소명은 고결한 사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대의에 투신하는 게 아니라 대의의 실행자라는 자리에 불려 나온 것이다. 하여 그들은 종종 그 자리에 가기를 원치 않는 듯 느리게 움직이고 엉뚱한 심술을 부리며, 불안과 공허의 몸짓으로 프레임을 채우고 때로 자신의 지위를 부인하기도 한다. < 도망자 >의 사내에게 목숨을 걸고 자신의 교회로 돌아온 결단과 “아마도요”라는 망설임의 발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요”라는 말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소극적이고 우회적이지만 그러나 완강한 부인의 몸짓이다. 사내가 신부임을 알게 된 마리아가 몸을 숙여 그의 손에 입 맞추려 하자, “그러지 마세요”라고 만류한다. “그러지 마세요”라는 말은 이후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는 지금 성직자의 임무를 위해 돌아온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계속 부정하려 한다. 정확히 말하면 짧은 순간이나마 소명을 잊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슬픔에 젖은 표정과 느린 동작, 낮고 우울한 목소리는 그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임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는 다시 소명을 부인하고 탈출을 시도하겠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덧없는 시도의 여정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불안하며 고요한 성당 장면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예감케 한다. < 도망자 >를 보고 로베르 브레송의 <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1951)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고 불안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성직자, 그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환경, 사제의 죽음이라는 귀결 등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병렬의 구조, 연극적인 말투와 연기, 인물의 텅 빈 표정과 동작에 대한 모더니즘적 몰두에서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는 종교적 외피 아래 숨겨진 리비도가 점액질의 촉감을 만들어내지만, <도망자>는 엄연히 고전적인 캐릭터 스터디의 면모를 갖고 있다. 일견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망자>는 포드적인 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여기엔 신부 외에도 두 사내가 더 등장한다. 신부를 추적하는 장교, 그리고 현상수배범 그링고(워드 본드)이다. 돈을 밝히고 천박한 총독 일당에 비하면 장교는 잔인하지만 품위 있는 혁명가이다. 그는 내세의 구원을 경멸하고 현세의 행복을 부르짖는다. 우연히 마을에 도착하는 무법자 그링고는 내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서부극의 전형적 인물이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신부의 탈출을 돕다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세 인물의 공통점은 고결함 혹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다. 이 점이 근본적으로 관능적인 브레송과의 차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실패한다는 것이다. 무법자는 총 맞아 죽고 신부는 사형대에 오른다. 장교는 세속적 승리자이긴 하지만 그가 부르짖는 행복한 공동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되며, 신부를 총살할 때 그의 가책의 몸짓은 그 실패를 예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드는 세 인물을 유기적으로 엮는 서사에는 무관심하다. 대신 세 인물을 한 공간에 모아놓고 그들의 선택과 행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세 사내는 서부사나이를 셋으로 나눠놓은 것 같다. 우울하고 불안한 성직자, 잔혹하고 강인한 혁명가, 무도하지만 따뜻한 무법자. 세 인간 유형은 실은 동일한 존재의 변주들이다. 자신의 신념 혹은 운명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 도망자 >를 그런 점에서 포드적 영웅의 해부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어 보이는 이 영화야말로 포드적 세계의 훌륭한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엔 그가 사랑한 인물들의 어두운 심연이 있고, 강렬한 표현주의적 영상과 아름다운 구도가 있으며, 실패한 구원의 서사가 있다. 다만 여기엔 포드가 그토록 사랑한 것처럼 보였던 유머와 헛소동이 없다. 포드는 왜 이 영화를 두고 ‘완전한’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2차 대전의 체험이 그의 마음을 유희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일까. 이 질문은 제대로 답해질 수도 없고 실은 불필요한 질문일 것이다. 평자로서 말할 수 있는 건 창작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일 뿐이다. 대신, 이 질문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영웅의 선택의 과도함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신부의 선택은 표면적으로 과도하다. 죽음 직전에 이른 한 사내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위해 그는 자신이 방금 탈출한 곳으로 목숨을 걸고 되돌아간다. 두 번 스치듯 만난 것 외엔 어떤 인연도 없는 한 사내(신부는 이 현상범이 자신의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을 모른다)의 구명이 아니라 고해성사가 자신의 생명을 걸 만큼 중대한 소명일까. 이 대목은 전 회에서 말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걸려 있는 것이 목숨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간 가려지긴 했지만, 프리스트 판사에게 장례식 주재라는 행위의 사소성에 비해 너무 큰 희생의 결단이 요청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상황과 행위의 비대칭, 다시 말하면 상황의 과소함과 그것이 요청하는 행위의 과도함의 불균형이라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도식이 S-A-S′(문제적 상황-해결의 행위-개선된 상황)라면 포드의 두 영화에서의 도식은 s-A-s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의 소문자 s는 과도한 행위를 요청한 상황이 영웅의 행위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변함없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이 도식은 두 서사에서 결국 행위를 표시하는 대문자 A가 가장 문제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면서 이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으로 요약한 바 있다. 그런데 < 도망자 >를 보고 나면 이 수정된 도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껴진다. 신부는 첫 시퀀스에서 돌아온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신부가 다시 탈출한 뒤 은신처에서 의사에게 하는 말에서 들을 수 있다. “자만에 도취해서 생각했어요. 혹시 알아? 순교자가 될지.” 그에게 순교라는 선택은 상황으로부터 독립적이며 그 자체가 자기목적적인 행위이다. 신부를 되돌아가게 만든 죽어가는 이의 고해성사는 바로 이 순교를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볼 수도 있다. A는 s는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식은 s…A…s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순교 혹은 최종적 결단의 자기목적성, 자기충족성은 정말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자기완결적 행위인가. 오히려 우리가 포드의 영화에서 보는 건 공동체의 완고한 부도덕의 표정, 세계의 되돌릴 수 없는 타락의 그림자, 혹은 순교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몸짓이 아닌가. < 도망자 >를 지배하는 그림자와 폐소공포증적 어둠, 그리고 불안한 말투와 망설임은 그것의 표상이 아닌가.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영웅은 결단했지만 창녀들은 예정대로 추방되었고(< 태양은 밝게 빛난다 >), 마을은 잔인한 혁명가가 그대로 지배한다(<도망자>). 영웅의 결단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동일하다면 그 견고한 s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고 궁극적 행위자이며 영웅의 행위는 순교든 희생이든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정말 과소한 것은 A이다. 그렇다면 이 도식은 다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S)-a-(S)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S-A-S′의 여러 변형 도식들로 말하려는 건 그들의 분석적 효용성이 아니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고전기의 원형적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S와 A는 끊임없는 불안정과 비대칭의 관계에 놓인다는 것이다. 종종 뒤돌아 떠나는 영웅의 뒷모습으로 은유 되는 주인공의 죽음은 이런 물음을 남긴다. 그것은 과도한 A, 혹은 과대망상적 행위의 증상인가. 아니면 과소한 a, 혹은 행위의 근본적 무기력의 증상인가. 이 물음은 포드 영화 이력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 #6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말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엉뚱하게도 금주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신부는 가까스로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바로 다음 장면은 정갈하고 평온한 휴양지와도 같은 곳이다. 그리고 ‘IN ANOTHER STATE(다른 나라 혹은 다른 주)’의 ‘SANCTUARY’(은신처 혹은 성역)이라는 이 영화의 유일한 중간 자막이 떠오른다(#6). 유성영화에서 중간 자막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포드가 여기서 굳이 이 자막을 쓴 이유는 짐작하기 힘들다.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이 중간자막은 그 존재감 때문에 앞 장면과의 근본적 단절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탈출한 마을과 신부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이제 곧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마을에서 온 뱀과 같은 사내가 신부의 침실에 숨어들어 신부를 다시 꼬드긴다. 총에 맞은 무법자가 죽어가니 신부로서 마지막 고해성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신부는 금방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 죽음이 기다린다는 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나라의 은신처’는 마을에 인접한 곳에 불과했다. 중간자막이 가져다준 단절과 평온의 예감은 한순간에 붕괴한다. 이 붕괴의 느낌은 충격에 가깝다. 주인공이 탈출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완전히 갇혀있다는 느낌. 신부의 소명이 벗어날 수 없는 감옥으로 실감되는 것, 앞서 말한 도식을 원용하자면 s가 (S)로 한순간에 변하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어떤 영화에서도 중간자막이 이처럼 감각적 충격의 진원이 되는 순간을 겪지 못했다.(계속)
오래 쉬고 다시 시작한다. 9월까지 ‘영예의 시대’를 중심으로 존 포드라는 거대한 세계의 일단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존 포드 영화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첫 번째 영화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를 < 젊은 날의 링컨 > < 웨건 마스터 > < 도망자 > 등과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감독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화는 가장 좋은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그의 개인적인 영화라는 뜻일 것이다.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서 작업했고 성공했지만 존 포드는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의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는 그 시도가 낳은 한 정점이다. 1. 1900년대 초, 미국 켄터키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죽은 창녀를 실은 영구 마차가 막 출발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에는 동료 창녀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마차는 마을 초입에서부터 지방판사 선거가 진행 중인 마을 회관을 지나 장례가 치러질 교회에 이를 것이다. 영구 마차의 등장은 마을 전체를 긴장하게 만든다. 죽은 창녀는 전직 남군 장성 페어필드의 아들과의 사이에 오래전 딸을 낳았고, 그 아들은 불명예스럽게 죽었으며, 레이크 박사에게 입양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딸 루시는 최근에야 자신의 출생 비화를 알게 되었다. 프리스트 판사와 몇몇 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근엄한 페어필드 장군은 루시가 자신의 손녀임을 부인해왔다. 병든 창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동료 창녀들은 전날 밤 프리스트 판사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했다. 재선을 노리는 프리스트 판사는 이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자신이 낙선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미 그는 술꾼으로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막강한 부인회가 창녀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려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을 미룬다. 창녀들의 영구 마차는 서서히 마을 중심부로 다가온다. 길 가에 서 있던 프리스트 판사는 말없이 장례 마차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부인들은 질겁하지만 몸집 큰 한 부인도 무리에서 빠져나와 판사 뒤를 따라 조용히 걷는다. 늙은 의사와 목수도, 식료품점 주인도, 이름 없는 노인들 몇몇도 그들 뒤를 따라 묵묵히 걷는다. 선거를 치르느라 떠들썩하던 마을 회관 앞에 마차가 이르자 모두 침묵에 빠진다. 그를 지켜보던 죽은 창녀의 딸 루시는 마차에 올라타 창녀들 옆에 앉고, 그녀를 사랑하는 방탕하지만 순정적인 청년 애쉬비도 그 뒤를 따른다. 우드포드 노인은 집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집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장례 행렬은 그렇게 교회 앞에 도착한다. 이 영화를 본다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발자국 소리와 장례 행렬의 느린 움직임 외에는 대사도 배경음악도 없이 7분 가까이 지속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흔든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눈앞이 흐려져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자문해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 장면을 그토록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장례식 행렬 2. 우선 이 장면에서 장례행렬에 가담하는 인물들의 결단 자체가 주는 감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 도덕이 아니라 윤리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 여기서 도덕은 공동선의 규범과 실천의 영역을 지칭하는 단어로 한정해 사용한다. 도덕은 주체의 외부에서 주체 쪽으로 요구되는 준칙이다. 반면 윤리는 공동선이라는 공리적 판단이나 효용성과는 무관하게 주체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자기 명령을 지칭한다. 존 포드가 그 장르의 대부처럼 여겨지는 서부극은 가장 도덕적인 장르로 간주되어 왔다. 공동체의 악과 그에 맞선 도덕적 영웅인 서부사나이의 대결 이야기.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는 도덕적 대립 구도가 없다. 이 공동체에서 제거되어야 할 악은 특정한 실체로 등장하지 않으며, 한 에피소드의 소재인 인종주의 외에는 특정한 악덕도 지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관념을 명확히 갖고 있는 주체는 부인회이며, 그들은 술과 창녀촌을 공동악이라고 생각한다. 프리스트 판사는 기묘한 존재다. 그는 판사이고 정치인이며, 전통을 중시하는 남군의 장교 출신으로 군인의 정체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판사, 정치인, 군인은 제도가 세속적 도덕의 실행을 위탁한 직업들이다.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름(Priest)이 뜻하는 성직자다. 물론 그는 교회에 복무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직자가 아니며 성직자 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수준 즉 종교적 수준의 선택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상황이 그를 다른 의미의 성직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창녀들이, 어떤 목사도 자기 앞길을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게 뻔해, ‘친절한’ 프리스트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요청했을 때, 판사, 정치인, 군인으로서의 프리스트는 이 난제에 답할 수 없다. 그의 난제가 걸려 있는 영역은 공동선의 도덕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했던 창녀는 이미 죽었고, 다른 창녀들은 조만간 추방될 것이며 프리스트는 부인회의 창녀 추방에 반대한 적이 없다. 곧 추방될 창녀들이 주재하는 장례 참여 여부라는 극히 사소한 행위는 공동선과 무관할 것이다. 그는 또한 직업적 성직자가 아니므로 교회 제도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교리 해석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는 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달리 말하면 그의 행위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보증이 그에게는 없다. 그를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대답 없는 신의 뜻을 어떤 보증도 없이 따른다고 간주될 때이다. 여기서 대답 없는 신의 뜻과 윤리의 자기 명령은 정확히 동격이다. 두 부류의 종교적 인간이 있을 수 있다. A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뜻이 이러하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그러한 뜻을 따른다.’ B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의 뜻을 모른다... 나는 신의 뜻을 따른다.’ 프리스트는 후자에 속한다. 윤리의 자기 명령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다. ‘나는 이것을 해야하는 다른 이유를 모른다... 다만 나는 그것을 해야하므로 한다.’ 프리스트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 행위의 동기를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을 때, B의 경우라면 그 동기를 귀속시켜야 할 신의 뜻이 텅 비어있을 때, 그것은 온전히 자기 명령이 되며 우리는 그 행위를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도 크게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지금 질문에 정확히 답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그래야 하니까 그랬다’라는 건 대답이 아니다. 자기 명령으로서의 윤리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동기, 이유, 원인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하는 사람보다 대답을 찾지 못해 난처해 하는 사람이 더 윤리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가 윤리의 중핵이 온전히 자기 명령에 있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고전적 서부극이 도덕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서사의 차원이고, 서부사나이는 오히려 윤리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의 준칙은 ‘남자는 할 일을 한다’는 것이고 일이 끝나면 말없이 뒤돌아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의 과묵함은 단순한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결단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윤리적 차원에 있음을 방증하는 표지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이 단순하고 흔해빠진 표현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다. “정언명법은 더 이상의 어떤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실천이성비판」) 가언명법은 반대로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칸트는 윤리의 자기명령이라는 차원을 가혹할 만큼 엄격하게 정식화한다. 윤리(도덕적 가치)는 정언명법에 따라 “오직 의무로부터” 행위할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은 공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념을, 심지어 우리가 보통 선하다고 간주하는 감정인 연민과 동정심마저 배제한다. 만일 아이를 구한 의로운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이므로’, 혹은 ‘아이가 불쌍해서’라고 대답한다 해도 칸트는 그 행위에 ‘도덕적 가치’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윤리는 ‘순수 형식’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으로서의 윤리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많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정언명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실은 사회적 규범이 내면화된 초자아가 아닌가(프로이트). 순수 형식이 어떻게 행위를 촉발하는 동기라는 질료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욕망 혹은 충동의 문제가 아닌가(라캉). 칸트의 의무는 결국 선험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악을 전제한 뒤 그것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자명한 규범들의 체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바디우).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는 치열한 사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사유가 진리의 윤리학으로 귀결되지 않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진리(혹은 실재, 사건)에의 충실성이 윤리라면, 윤리라는 영역이 따로 설정될 필요가 있을까. 달리 말해, 진리가 총체적이거나 규범적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사건적(혹은 위반적)이며 열린 지평으로 개시되는 것이라면 윤리의 내용은 이미 진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정신분석학자들의 논변 혹은 진리의 윤리학이 흔히 인용하는, 자기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의 사례에서처럼 상징계의 의미가 완전히 소진되고 실재와의 대면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윤리가 드러난다면, 일상적 영위에서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반문은 이론적인 수준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서 프리스트의 행위를 진리-사건-실재의 영역에 위치 짓지 않고도 윤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는 빵집 주인의 행위는 진리나 미의 추구와 무관한 지극히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윤리적 행위가 아닌가. 혹은 TV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곧 요양원으로 보내져야 하는 치매 노인을 콜라텍으로 데리고 가서 마지막 춤을 추게 도와주는 창만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를 종종 감동케 하는 건 그 순간의 충만함 외에는 어떤 효용도 어떤 깊이도 없는, 카버 소설의 제목대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런 단순한 선의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프리스트와 빵집 주인과 창만에게 행위의 동기를 듣지 못했고, 그들의 행위를 자기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물론 말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정념적 동기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그 행위가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일정한 기쁨과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을 그 텍스트들은 감추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동의한다 해도, 일체의 정념 배제라는 차원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어려우며, 윤리와 정념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사유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의제임을 뜻한다.(이것은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칸트의 윤리를 재해석하려는 「실재의 윤리」(알렌카 주판치치)의 중심 의제이기도 하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와 연관 짓는 것은 사실상 엄격한 사유로부터 퇴각하는 것이다. 윤리에서 선의의 정념을 배제하지 않으며 진리-사건-질재의 영역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지향한다고 가정되는 진, 선, 미의 영역을 어느 정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선을 ‘(진리의) 깊이도 (공동선의) 효용도 없는 자기충족인 선의’라는 선험적인 명제로 받아들여 이것을 윤리의 내용 가운데 하나로 삼는 절충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사실상 진리의 윤리학과 (공동선이 아닌) 선의 윤리학을 동시에 긍정하는 엄격하지 않은 지적 태도다. 그것이 자기명령인 한 주체의 수만큼 많은 윤리학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윤리가 일반 명제의 주어가 아니라 개별 진술의 술어 자리에 놓여야 함을 뜻한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이런 퇴각과 절충이 불가피해졌다. 절충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의 길을 탐색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내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혹시 사소한 선의에 대한 이런 열중이 일종의 도피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진리의 개시, 해방의 정치에 대한 체념과 반지성적 염세주의가 ‘투쟁의 형식’으로서의 윤리가 아니라 사소한 선의에 몰두하게 만든 건 아닐까. 혹시 절충이라고 말하면서 내심으로는 진리의 윤리학을 사실상 포기하고 이젠 사소한 선의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서부사나이는 더 이상 ‘남자는 할 일을 한다’가 아니라 이제 ‘남자는 (사소한 선의의 행위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요컨대, 21세기의 관객인 내가 프리스트의 선택에 감동받는 건 이런 도피의 차원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질문을 짊어지고 있을 뿐 그것에 정확히 답할 수 없다. 다만 이 질문이 존 포드 서부극의 근본적 질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 상기하고 싶다. 단지 ‘서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만 빼면 여타 서부극과 무관해 보이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존 포드의 서부극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질문 때문이다. 그 질문을 말하기 위해 하나의 도식을 제시하고 싶다. 3. 고전적 서부극에서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 일은 공동악을 제거하는 것 즉 공동선으로서의 도덕적 행위이다. 도덕적으로 자명한 일을 서부 사나이는 윤리적으로 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일치는 사후적인 것일 뿐 선험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전적으로 임의적이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서술하는 이순신의 태도도 이것이다. 이순신을 움직이는 건 왕에 대한 충심도 애국심도 아니다. 다만 그가 ‘해야할 일’이 충과 애국에 결과적으로 부합했을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적의 적’이라는 이미 주어진 자리였을 뿐이다.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바랐다.” 도덕과 윤리의 동반은 임의적이고 불안정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그 임의성과 불안정성을 노출한다. 포드 서부극에서도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우연히’ 공동선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죽은 형제의 복수를 위해 플러머 형제를 처단한다. 그런데 마침 그들은 공동체의 악이었다.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는 형의 가족의 복수와 납치된 조카 데비의 구출을 위해 코만치 일당을 추격한다. 그런데 마침 코만치 일당은 공동체의 위협이었다. 링고와 이산은 공동체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링고는 탈옥수이자 범법자로서 결국 공동체를 떠나며, 이산은 자신의 복수 시도가 공동체에 더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을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한다. < 황야의 결투 >에서 와이어트 업은 자신의 소 떼가 도둑맞지 않았다면 툼스톤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도덕과 윤리는 위태롭게 연대하거나 간혹 대립한다. 어느 경우에도 공동선의 도덕은 자명한 것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영웅의 사적 복수와 공동선의 사후적 일치의 서사 조작술은 오늘의 대중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동선을 사적 복수라는 정념으로 보충하는 데 그친다. 공동선의 도덕은 질문되지 않은 채 다만 사적 복수라는 공동선 외부의 동기로부터 정념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이다. <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1976)는 이 임의적 일치의 가장 냉소적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며, 미국 TV드라마 < 덱스터 >는 가장 영리한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다. <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 2007)는 임의적 일치 여부를 놓고 벌이는 교활한 게임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영화의 영웅서사에서 그 일치의 임의성은 감춰진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공동체에는 공동악이 등장하지 않으며 복수 서사도 작동하지 않는다. 남군 문화와 북군 문화, 백인과 흑인, 부인과 창녀의 차이가 갖가지 갈등을 빚어내지만,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 걸려있던 다른 서부극에 비하면 이런 갈등들은 사소한 것이다. 이 사소한 갈등들을 정돈할 수 있는 공동선의 도덕적 규범은 불투명하다. 창녀들의 장례식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갈등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것이다(예컨대 창녀들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창녀 추방 여부보다 훨씬 사소하다). 가장 사소한 의제에 프리스트 판사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 전부가 걸려 있다. 포드는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관계로부터 오직 윤리만이 문제 되는 상황으로 이행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도덕의 서부극이 아니라 윤리의 서부극이다. < 역마차 >의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내가 누구라고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겠어”라고 중얼거리는데, 포드의 영웅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오직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포드 서부극의 윤리의식이 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리스트 판사는 공동선으로 보충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윤리의 실행자라는 점에서 포스트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스트가 사는 세상은 이런 것이다. 적이 사라지거나 비가시화하면 적의 적이라는 나의 자리도 확정되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나쁘지만 희생양(강간범의 누명을 쓴 흑인 소년)을 가상의 적으로 삼아 분노를 해소하려는 것은 집단적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일상의 진부함과 그 진부함을 버텨내는 기교만 남아 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심장박동이 회복되지 않으며 적의 적으로 싸웠던 시절의 향수에 젖는 것 외엔 낚시와 춤과 소란, 로맨스의 대리만족에 몰두한다. 이 모든 건 프리스트의 증상이다. 그러다 죽은 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가장 사소한 요청에 응하기 위해선 목숨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 사소한 행위야말로 이 늙은 서부사나이에게 남겨진 마지막 윤리이다. 그의 선택이 감동적이라면 그 감동은 승리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이 사소성에 새겨진 거대한 퇴각의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운명적 비애감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 4. 상황과 선택이라는 서사적 요소만으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아름다움은 포드의 다른 걸작들이 그러하듯 질서와 소란, 심판과 축제, 이성과 도취, 비극과 유머의 종잡을 수 없는 배열이 빚어내는 천의무봉한 합주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례행렬 장면은 다른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 프리스트는 말없이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자였고 권력과 법의 인간이었지만 이제 권력도 법도 없이 그냥 걷는다. 작고 늙은 그가 걷는 형상은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내려다보인다. 카메라는 접사도 앙각도 없이 대개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 왜소한 노인의 걸음을 보여준다. 그는 행진 장면의 어느 쇼트에서도 프레임을 물리적으로 장악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사소한 피사체로 아니 그저 피사체들의 하나로 느리고 조용히 움직인다. 행렬을 따라 걷는다는 이 사소한 동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프리스트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기에 걷는다. 장례행렬은 마을의 큰 길을 따라 창녀촌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출발해 마을 사람들의 생활공간 그리고 정치와 사교의 공간인 마을 회관을 거쳐 교회라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세속적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 운동이다. 존 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말이 달리는 모습과 커플이 왈츠를 추는 모습”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찍은 사람이다. 그가 말하진 않았지만 포드가 좋아한 또 다른 모습은 행진이다. 한 감독의 영화에서 그처럼 많은 행진 장면이 등장하는 다른 사례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행진이 일상인 전쟁영화나 유사 전쟁영화들을 제외해도 포드 영화에서 행진은 때로 승리의 자축연으로(< 저지 프리스트 >), 때로 죽음 같은 공포의 형상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때로 그 자체가 거대한 축제로(< 조용한 사나이 >), 때로는 삶 자체의 율동으로(< 도노반의 산호초 >) 빈번하게 등장한다. 행진이 시작되면 마치 행진 스스로 저 자신의 생동에 도취되어 서사를 잊어버린 듯 하염없이 지속된다. 존 포드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행진과 같지 않다. 이 행진은 창녀촌에서 교회로의 이동이라고 해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혹은 세속에서 숭고로, 혹은 죄에서 대속으로의 은유적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차이를 행진의 느리지만 강력한 운동성으로 일거에 무화시키는 움직임이다. 오직 하나의 운동이 존재한다. 이 운동이 시작되면 어떤 다른 방향의 움직임도 상상될 수 없다. 장례 행렬이 출발하고 프리스트가 그 뒤를 따라 걷는 순간 누구도 이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조용하고 느린 걸음에 한 노인의 생애 전체 어쩌면 그보다 더 거대한 것이 걸려있어 어떤 힘이 그를 멈춰 세우려는 순간, 그가 폭파되든 세상이 폭파되든 둘 중 하나다. 그 운동의 힘이 서사 안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라고 이제 물을 수 없다. 이 기적 같은 운동은 더 이상 서사적 탐문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그것에의 감화를 요청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행진에 이어진 장례와 선거가 이 영화의 결말이다. 행진 장면의 기적과도 같은 힘을 생각하면 결말은 오히려 느슨한 후일담처럼 느껴진다. 프리스트가 마지막으로 투표하고 단 한 표 차이로 승리한다는 만화 같은 설정은 차라리 유머에 가깝다. 잊혀지지 않는 건 마지막 쇼트다.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무리들이 집 앞을 지나갈 때 프리스트는 물끄러미 지켜보다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에 잠겨들고 문이 닫힌다. 사건 전개와는 무관하게 장례 행진의 운동은 바로 이 쇼트로 맺어진다.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며, 그는 이제 어둠 속에 머물 것이다. 세속적 승리와 은유적 죽음 사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대체될 수 있는 사건과 결말은 관심을 둘만큼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좀 전에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영화적 순간을 이미 경험해버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