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동이 틀 때
- 감독
- 심훈
- 제작년도
- 1927
- 출연
- 심훈, 신일선, 한병룡, 강홍식, 이시이, 김정숙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시네마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이 유명한 말은 한국의 수많은 시네필에게 영화 사랑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주1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영화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 창작 욕구가 없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영화 사랑 정도가 트뤼포가 말한 저 세 단계 중 어느 경지에 있는지 재본 적이 있지 않을까? 게 중에는 실제로 영화 창작의 꿈을 펼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영화에 관한 글 혹은 영상을 쓰거나 만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저 영화 보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사랑의 정도를 단계로 매겨 고수와 하수로 평가할 일은 사실, 아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 정해진 단계란 있을 수 없다. 트뤼포가 말한 세 단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도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사진첩’의 소장자, 고(故) 홍영철(1946~2016)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여느 영화팬과 마찬가지로 영화 보는 걸 즐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영화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영화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영화를 즐겨 보면서 입장권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같은 것을 함께 모으다 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러다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이다. 영화에 빠지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변변한 자료집 하나 없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 “ 한국 영화사 연구가 홍영철에게 ‘영화도시 부산’의 길을 묻다 ”, 《부산시보 부산이라 좋다》, 2014. 8. 25.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젊은 시절, 영화를 즐겨 보며 입장권을 모으던 데서 시작해, 영화 포스터와 스틸, 전단 등 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부산의 여러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극장 간판 사진을 찍었고, 영화관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했다고 하니, 201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45년 동안 수집한 자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한국영화도서자료편람 1925~1990』(한국영상자료원, 1991)과 『부산영화 100년』(한국영화자료연구원, 2001), 『부산근대영화사: 영화상영자료 1915~1944』(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산지니, 2009), 『부산극장사』(부산영상위원회·한국영화자료연구원 엮음, 부산포, 2014) 등의 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2017년, 홍영철 선생의 유족은 그가 반평생을 넘게 수집한 자료들을 부산시에 기증했다. 자료의 원본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보존·관리하기 시작했는데, 2019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일부 자료를 디지털 복사본의 형태로 기증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번에 공개한 “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은 바로 이들 자료 중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을 정리해 해제를 덧붙인 것이다. 이 컬렉션에는 1923년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연출한 < 춘향전 >부터 1944년 방한준 감독의 < 거경전 >까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제작된 극영화 70여 편의 스틸 132점이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언뜻 영화 스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스틸이 아닌 것도 섞여 있다. 사진 속에는 그 유명한 영화 < 아리랑 >(1926)의 감독이자 배우로도 인기 많았던 나운규 가 등장하고, 그와 함께 <아리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남궁운 과 주인규 가 출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심훈 이 1926년 11월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소설 「탈춤」의 스틸이다. 극의 한 장면을 실사(實寫)로 촬영한 스틸인데 영화가 아닌 소설의 스틸이니, 그렇다면 ‘소설 스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까? 그런데 잠깐만! ‘소설 스틸’이 무슨 말이냐고? 문자를 존재의 수단으로 삼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시각 요소가 핵심인 ‘스틸’이라는 용어가 붙은 합성어가 말이 되냐고? 하신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 영화소설 ’이라는 문화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까지 ‘영화 관람의 시대’를 보낸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는 1919년 < 의리적 구토 >를 시작으로 본격 영화를 만드는 시대를 맞았다. 이와 함께 영화의 대중적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신문은 연재 소설에 삽화 혹은 연출된 사진을 수록하고, 여기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소설’이 일련의 공통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른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당시 신문들이 앞다투어 사용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는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영화소설을 문학 장르가 아닌 ‘문화현상’이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연재된 것은 김일영의 「삼림의 섭언」이라는 작품으로, 이는 《매일신보》를 통해 1926년 4월 4일부터 5월 16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2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민간 신문 발행을 허용했던 때로, 1910년대까지 총독부 기관지로 독주했던 《매일신보》는 이제,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6년에 《매일신보》가 처음 도입한 ‘영화소설’은 당시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신문 판매 부수로 견인하려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도 잇달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단 작품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주2 영화소설을 신문 마케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매일신보》에 「삼림의 섭언」이 연재되고 약 6개월 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탈춤」(1926. 11. 9.~12. 16., 총 34회 연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탈춤」 연재를 시작하기 하루 전, 다음과 같은 홍보 기사를 게재했다. 사진: " 창작 영화소설 탈춤(예고) 심훈 작 ", 《동아일보》, 1926. 11. 8., 3면 심훈의 「탈춤」을 “조선서 처음되는 영화소설”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수개월 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연재된 작품이 있기에,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 홍보 기사에서 방점을 찍어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삽화를 수록했던 최초의 영화소설 「삼림의 섭언」과 달리, 「탈춤」은 “매일 삽화 대신으로 미려한 실연 사진”을 수록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용했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다른 신문 다른 작품에 뺏겼지만,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소설에 “실연 사진”을 도입하는 차별화 전략으로 신문 독자들에게 영화 관람 못지않은 기대감을 심으려 했을 것이다. 비로소 그 실상이 공개된 「탈춤」의 스틸은 화려한 캐스팅마저 자랑했다. 연재 첫 화의 스틸에는 같은 해 공개돼 화제를 모았던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스타 배우 나운규가, 또 같은 해 < 장한몽 >(이경손, 1926)의 심순애 역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김정숙 을 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어지는 회마다 차례로 공개된 스틸에는 <아리랑>에서 현구 역으로 큰 인기를 끈 배우 남궁운과 악역 연기의 일인자로 정평이 난 주인규가 등장했다. 스틸 캐스팅만으로도 당대 소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소설 「탈춤」을 읽는 재미는 이뿐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재되는 사진 위에는 상황을 요약한 지문 내지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말풍선으로 제시되었다.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속 영화소설 「탈춤」 스틸 역시 연재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풍선과 함께 실렸다. 소설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말풍선으로 제시되는 대사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재미까지 의도한 듯한 구성은 어느새 독자들에게 ‘진짜로’ 만들어진 혹은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특히 보통의 소설처럼 서술되던 내용이 연재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 형식으로 제시되었을 때, 이러한 의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심훈은 연재 중 불쑥 등장해,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기도 했다. 결혼식까지 하게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층절이 잇서 좀 더 세밀한 묘사를 해야 할 것이나 “스티-ㄹ”(삽화 사진)이 부족 해서 부득이 겅정겅정 뛸수밧게 업시되얏고 결혼식 장면은 전문용어만 쓰지안코 원 영화 각본을 꿈이는 체로 시험삼아 써봄니다. - " 탈춤(26) ", 《동아일보》 1926. 12. 6., 3면 그런데 작가의 이 말은 또 다른 혼란을 가중한다. 심훈은 극 중 혜경이 준상의 강압으로 그와 결혼식을 치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전개하지 못한 이유를 스틸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스틸의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뒷받침해 주는 보조 수단이 스틸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 순간부터는 역으로 소설이 스틸의 스토리를 보완하는 장치가 되어버린다.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연재가 기획된 것인지 아니면 연재하던 중에 영화화가 결정된 것인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소설 「탈춤」은 연재가 끝난 그 이튿날, 영화 제작 소식을 전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할 영화 < 탈춤 >은 원작자 심훈이 각색을, 나운규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나운규를 비롯해 소설 스틸에 출연한 남궁운과 주인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할 계획이지만, 여배우만큼은 전격 신인으로 교체하리라고 발표되었다. *주3 그러나 영화 촬영은 예고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7월, 《조선일보》는 그간의 각색 작업을 마치고 계림영화사 제작 아래 심훈이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알렸다. 배우 역시 선정 중이라고 밝혀, 영화소설 「탈춤」 스틸에 출연한 배우들마저 전격 교체될 것임을 시사했다. *주4 그러나 영화 <탈춤>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5 대신 심훈은 1927년 9월, 자신이 쓴 시나리오 < 먼동이 틀 때 >를 촬영하며 첫 메가폰을 잡았다. 심훈의 연출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 공교롭게도 영화소설 「탈춤」이 신문에 연재 중이던 때에 「탈춤」 스틸에 출연한 나운규, 김정숙, 남궁운, 주인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의 < 풍운아 >에도 출연했다(1926년 11월 19일 크랭크인, 1926년 12월 1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 그 때문인지 나운규가 자동차 뒤에 매달린 스틸은 훗날, 영화 <풍운아>의 스틸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스틸이 영화소설 「탈춤」에 수록된 날짜(1926. 11. 15.)가 <풍운아>의 공식 크랭크인 날짜보다 나흘 앞선다는 점에서, 그 정보는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주1. 정성일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을 경유하며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트뤼포는 ‘시네필로서 어떤 순간에 감독 혹은 비평가가 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반추하며, 자신의 비평집 『내 인생의 영화(Les Films de ma vie)』에서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감독을 적어 두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연출의 자리에 가서 내가 선택한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성일, 「트뤼포,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사람처럼」,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을유문화사, 2006, 980~981쪽. 주2. 《매일신보》의 영화소설 게재 배경 및 특징에 대해서는 배현자·이혜진, 「근대 영화소설의 처음과 끝- 『매일신보』 영화소설」, 『한국 근대 영화소설 자료집: 매일신보편 上』, 소명출판, 2019, 3~34쪽 참고. 주3. 《동아일보》 , 1926. 12. 17., 5면. 주4. 《조선일보》, 1927. 7. 23., 2면. 주5. 심훈은 “촬영을 개시하기 6일 전에 초지(初志)를 뒤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탈춤」은 부르주아의 생활 이면을 유치하게나마 그린 것이 되기 때문에 스케일이 여간 크지가 않고 출연 인원도 엄청나게 많은 동시에 한 이천 원 한도하고 촬영비를 내게 되는 터라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심훈, 「『먼동이 틀 때』의 회고-조선영화감독고심담」, 『심훈문학전집 1』, 탐구당, 1966, 577쪽; 주인, 「영화소설 정립을 위한 일고- 심훈의 탈춤과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34권 2호, 2006, 267쪽에서 재인용.
우리는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심훈의 <상록수>는 식민지시대 대표 농촌계몽소설이며, 영화 < 상록수 >는 1960년대 계몽적 문예영화다. 대중의 상식에서 문예영화는 문학작품의 충실한 재현이다. 신상옥 의 <상록수>는 사실 이러한 문예영화적 충실성에서 벗어나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록수>를 발견의 영화로 재고해야 한다면 신상옥만의 각색과 연출의 특이성에 놓여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신상옥의 대표 문예영화는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다. 하지만 1961년 명보극장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이어 선보인 영화가 <상록수>였음을 기억하는 자는 드물다. <상록수>는 < 동심초 >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신상옥 영화의 고유한 아름다움, 즉 풍경을 정서로 이어가는 로케이션 촬영의 형식적인 특징을 잇고 있다. 다른 한편 < 로맨스 빠빠 > 및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한국적 교양의 보편적 지평을 넓히는 영화로 과잉과 신파성을 배제한 담백한 연출도 <상록수>로 이어진다. 영화 <상록수>는 식민지 영화인 심훈 의 이루지 못한 영화의 꿈이었다. 소설가,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심훈은 영화 < 장한몽 >(1926)의 주연 배우, 영화소설 <탈춤>(1926)을 비롯한 다수의 시나리오 작가, 영화 < 먼동이 틀 때 >(1927)의 감독이자 1920년대 중반 이후 중요한 글들을 남긴 영화평론가였다. 스스로도 “처음부터 문필로써 미염(米鹽)의 대를 얻으려 함이 본망(本望)이 아니었”으며 벽촌에 은거할 때조차 생활이 단조로울수록 “‘인’이 박힌 것처럼 영화”를 애착했던 시네필이었다. 1) 심훈의 영화 <상록수>는 당시 신문연재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고려영화사에서 감독 심훈, 촬영 양세웅, 주연 강흥식에다 총 출연 2000명이 넘는 대규모 발성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시나리오만 남긴 채 심훈은 36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좌측부터 영화 <상록수>의 각본 심훈, 주연 강홍식, 촬영 양세웅, 제공 이창용(동아일보,1936.3.18.) 소설 <상록수>는 잘 알려져 있듯 1961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1978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2차례 영화화되었다. 신상옥의 <상록수>는 원작 및 심훈(의 시나리오)과 임권택의 동명 영화와 상당히 다른 전개를 보인다. 소설 <상록수>는 동혁의 시점에서 시작해 서신 왕래라는 장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혁과 영신의 시점을 오가다 최후에는 동혁의 시점에서 끝난다. 심훈의 남겨진 시나리오도 남주인공 ‘동혁’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임권택의 영화 <상록수> 역시 동혁과 그의 고향마을 농우회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지며 영신의 야학활동은 영신의 전언을 통해 플래시백 장면으로 에피소드화 된다. 반면 신상옥의 <상록수>는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여성인물 영신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깊은 산골마을에 버스가 도착하고 짐을 싸매고 온 아가씨가 버스에서 내려 깊은 산골의 호젓한 길을 걸어간다. 배경으로 놓인 눈 덮인 산맥은 그녀가 겪을 인생에 대한 인유적 풍경인 양 놓여있다. 마치 2차례 영화화 된 <무정>이 원작소설처럼 근대적 지식인 이형식을 중심으로 한 계몽과 각성의 서사가 아니라 구여성 영채를 중심으로 한 ‘영채전’의 멜로드라마로 소비되었듯, 대다수 한국인들의 관람의 무의식 속에서 (영화와 소설을 포괄한 서사체로서의) ‘상록수’는 헌신적인 여선생 채영신의 이야기로 기억되는데, 그 기억의 원형을 제공한 영화가 신상옥의 <상록수>인 것이다. ‘상록수’에 대한 원형적인 서사로 기억되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신상옥의 <상록수>가 저평가된 까닭은 무엇일까. <상록수>가 2차례 영화화된 시기는 1961년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시절부터 1978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말기에 이르는 시기다. 그런 탓인지 영화화 된 <상록수>는 박정희 정권기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계몽영화로 알려져 있다. <상록수>가 개봉한 것은 1961년 9월 20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농촌계몽을 소재로 한 영화 <상록수>를 국민에게 추천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1962년 1월 19일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진흥을 위해 삶을 바친 소재를 다룬 심훈 원작의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상록수>와 같은 영화를 많이 만들어 농촌으로 보내도록 지시한다. 박정희가 <상록수>를 좋아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며,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의 전기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일련의 과정은 <상록수>라는 영화가 자체의 작품성을 떠나 5.16 군사 쿠데타와 군부정권에 의해 ‘사후적’으로 정권의 계몽영화의 상징이 된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듯 전형적 농촌 계몽영화라는 표지는 영화 <상록수>를 정권홍보용 문화정치 영화라는 관념으로 둘러쌓아 두었던 것은 아닐까. <상록수>가 신상옥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1960년대식 개발주의 영웅서사로 자리매김했다는 역사학의 평가는 영화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역사적 우연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는 아닐까. 신상옥의 <상록수>는 시작부터 영신의 시골행을 보여주며 맑고 깨끗한 여성 주도적 서사를 분명히 했다. 소설의 전개과정과 달리 영화는 영신이 청석골에 들어가 야학을 일구고 농촌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과정을 덤덤히 보여준다. 그저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고학으로 학문을 익혔고 이념과 생활이 일치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입장도 분명했다. 영화 속 동혁과의 만남은 과거회상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영신 중심 시점은 임권택의 <상록수>가 동혁과 농우회 즉 남성 영웅과 남성 집단성을 강조한 경우와 반대가 된다. 신상옥과 임권택의 두 영화의 각본은 김강윤으로 동일하므로 이 차이는 연출의 차이임이 분명하다. “여자가 배우면 생지랄이야”라며 딸 교육을 홀대하는 시골 어른들을 설득해서 여자도 배우면 판사도 하고 변호사도 한다고 부드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품성,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독립적인 면모,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일도 중요한 굳건하고 부드러운 성격. 영신이 이끌어가는 여성 중심적 서사는 신상옥 감독이 195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온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에 대한 섬세한 연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구시대적이며 내성적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달리 진취적이며 자립적인 여성 영신을 선보인 <상록수>가 신상옥 감독의 연이은 문예물이며 주연배우 또한 최은희라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1) 심훈, 「다시금 본질을 구명하고 영화의 상도에로」, <조선일보> 1935.7.13. >> 상록수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사진] 한국전쟁 중 미군 위문공연을 하러 온 마릴린 몬로와 함께 한 최은희 최은희는 좌우익의 분열이 본격화되기 전인 민족영화 건설기에 모처럼 얻은 수확이다. 1947년 청구영화사가 제작한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에 발탁되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여배우의 삶이 시작된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 나갔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어촌 청년들이 마을 처녀들과 힘을 모아 황폐한 어촌을 재건해 나간다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잘사는 집 외동딸 역을 맡아 애인 역인 최운봉과 그의 어머니 김연실 등과 함께 공연했다. 은막으로 이끈 순진한 얼굴 <노도(怒濤)>를 개작한 최금동 각본의 <새로운 맹서>는 46년 기획 단계부터 여주인공은 신인을 쓰기로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마땅한 후보 깜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에 투자할 전주(錢主)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회현동에 있는 영화사 사무실로 한 손님이 찾아왔다. 신경균 감독은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기 주연 깜이 한 명 나타났으니 와서 보라고. 이 처녀가 바로 최은희(崔銀姬)였다. 감독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람은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카메라맨, 뒷날 그녀의 남편이 된 김학성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최은희는 ‘큰 키에 때 묻지 않은 촌스런 얼굴, 가꾸지 않은 엉성한 몸매에다 집안에만 있다가 배우가 되겠다고 뛰쳐나온 순진한 모습’이었다. (김학성, 「30년을 하루 같이(6) 원로 연예인의 수기」, 『일간스포츠』, 1978.3.20.)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좋게 본 감독과 작가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영화사 사무실을 찾게 된 데는 이 무렵 토월회 연극무대에 함께 섰던 최운봉이 제 상대인 배역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며 지원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촬영에 들어가자 감독으로부터 오버 액션이라는 질책을 받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준 돈이 애인의 서울 유학비에 쓰인 사실을 알고 꾸짖자 딸이 용서를 비는 장면이었다. 관객들이 없이 스태프들만 바라보는 가운데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해야 하는 연기는 허공에 뜬 것처럼 와 닿지 않았다 .(최은희, 『고백』 영화에 데뷔하다, 2007, 랜덤하우스 코리아, 46쪽)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듯이 하다 보니 감정이 과장됐던 것이다. <새로운 맹서>는 제재(題材)와 내용이 과거 무성영화 <바다와 싸우는 사람>이나 <바다여 말하라>에 비하여 별다른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금룡, 최운봉, 김연실 등과 함께 신인 최은희가 열연했다. (「신영화평, ‘새로운 맹서’」, 『대동신문』, 1947.6.30.) 는 평을 들었다. 이 영화에 이어 캐스팅된 것이 수도청 경우회가 제작한 <밤의 태양>(1948, 박기채)이었다. 대규모 밀수단을 추적한 끝에 일망타진하는 경찰관의 이야기로, 김동원의 상대역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자 수도청 기자단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언론인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장면이 있으니 삭제해 줄 것과 사과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최은희는 <마음의 고향>에서 젊은 미망인 역을 맡았으나 연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세 번째 출연한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에서는 홍역을 앓다가 죽은 어린 아들의 49제를 지내려 절을 찾아온 젊은 미망인 역을 했다. 정적 연기가 요구되는 캐릭터 때문이었는지 주지 역(변기종)과 미망인 어머니 역할(석금성)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태우, 「조선영화의 발전, ‘마음의 고향’을 보고」, 『경향신문』, 1949.1.6.) 모두 6.25전쟁 이전의 출연작들이다. [사진] <젊은 그들>에서 남장 여인으로 분한 최은희 최은희의 연기 활동은 그로부터 5년 만인 1954년 신상옥 감독의 문화영화 <코리아>(1954)를 계기로 재개된다. 잇따라 신 감독의 <꿈>(1955)을 비롯한 <젊은 그들>(1955), <무영탑>(1957), <지옥화>(1958)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승려 조신의 꿈을 통해 애욕의 덧없음을 깨우치게 되는 이광수 원작의 〈꿈〉, 실각한 대원군의 복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열혈 청년들의 사투기 김동인 원작의 <젊은 그들>(1955), 불국사의 석가탑 건립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엮은 현진건 원작 〈무영탑〉(1957)에서는 승려를 홀린 달례(꿈)와 정혼자가 있는 남장 여인(젊은 그들), 그리고 석공 아사달을 사랑한 구슬아기(무영탑) 등 다양한 역할을 해낸다. 그녀는 어느새 ‘신상옥의 전속배우’나 다름없는 부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전미에 상응한 도발적 여성의 욕망 그러나 <지옥화>에서는 앞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전후 아프레 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기지촌의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양공주 쏘냐 역 최은희는 미군부대의 창고를 털어 내다 파는 일이 주업인 사내(김학)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도 그의 동생을 유혹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쏘냐는 동생과 도망가기 위해 정부 일당의 음모를 헌병대에 신고하지만 도망쳐 나온 정부의 칼에 찔려 죽고 사내도 총에 맞아 죽는다. <지옥화>에는 통속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6.25전쟁을 겪은 궁핍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식이 담겨 있다.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와 짙은 화장으로 빗나간 여성의 욕망을 표출하고 그동안 한복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농염한 몸매를 드러내면서 기존의 정적 이미지를 탈색시키는데 성공한다. [사진] <지옥화>에서 최은희는 형제를 동시에 유혹하는 악녀 쏘냐 역을 맡아 변신에 성공한다 이 작품을 전후하여 농촌을 무대로 한 김소동 감독의 <돈>과 김성민 감독의 액션 영화 <형제>(이상 1958)에 출연했으나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고아인 법대생이 부정한 방법으로 신분을 세탁, 변호사의 꿈을 이루게 되는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과 <동심초>(1959)의 전쟁미망인 역할에 이르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동심초>의 경우 양장점을 경영하다가 사기꾼에 걸려 파산상태에 이르렀을 때 도움을 준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물러서는 미망인의 연기는 ‘최은희가 발산하는 고절(高節)한 미망인다운 애절감이 좋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연일 대성황을 이룬 이 영화는 신상옥프로덕션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다. [사진] <동심초>에서의 최은희와 김진규 김기영 감독의 <슬픈 목가>로 1960년대 신년 벽두를 연 최은희는 <동심초>의 변주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포함, <청춘의 윤리>(김화랑), <려인(麗人)>(이봉래),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등 타사 영화 5편과 신상옥프로덕션 10주년 기념작 <이 생명 다 하도록>을 비롯한 〈로맨스 빠빠〉, 〈사랑의 역사〉, 〈백사부인〉(이상 신상옥 감독) 등 4편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 <이 생명 다 하도록>은 6,25 전쟁 때 참전했다가 척주마비로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김진규)과 어린 딸을 돌봐야 하는 인고(忍苦)의 여인상을, <로맨스 빠빠>에서는 가부장적 질서와 해체의 경계를 넘나든 영악한 맏딸의 모습을 보여 관심을 끌었다. 이 시기에 그녀와 대적할 만한 여배우는 연배가 비슷한 황정순과 주증녀, 이민자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아 내 가슴에>(1958)의 히트 이후 기세가 오른 젊은 김지미였다고 할 수 있다. 최은희에게 신상옥이라는 배경이 있듯이, 김지미에게도 남편인 홍성기 감독이 있었다. 그래서 영화계에서는 그들의 판세를 ‘연기와 미모의 대결’로 받아들였다 .(「라이벌」, 『씨나리오문예』 4호, 40쪽, 1959, 12) 이 무렵 최은희는 연기 잘 하는 스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40고개를 바라보아도 잔주름을 연기력으로 너끈히 카버하고 젊은 주역을 해내는 데보라 카처럼 연령적 육체적 조건을 극복하고 톱스타의 자리를 차지할 것’ (「‘배우동서(俳優東西)’ 데보라 카와 최은희」 , 『경향신문』, 1960.8.13.) 이란 전망을 갖게 했다. [사진] 흥행 신기록을 세운 <성춘향>의 한 장면. 오른쪽은 월매 역을 맡은 한은진 그런 점에서 1961년 시네마스코프 색채 대형화면 시대를 연 구정 대목 프로 <성춘향>(신상옥)은 이와 같은 세간의 평가와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더욱이 최은희는 역대 <춘향전> 영화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35세의 중년 춘향 역에 도전했다. 같은 시기에 경쟁한 21세인 <춘향전>(홍성기)의 김지미와는 무려 14년이라는 차이가 났다.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1935)의 문예봉이 19세에, 1955년 한국영화 중흥기의 <춘향전>(이규환, 1955)의 조미령이 27세에, 그리고 뒷날 <성춘향>(박태원)의 장미희가 21세에 춘향 역할을 맡은 것과는 대비되는 무리한 캐스팅이었다. 감당하기엔 어려운 배역이었으나 당시의 매스컴은 <성춘향>에 대해 성의 있는 고증과 색조, 허장강의 방자 역에 호의를 표명 (「예술과 기업의 대결, 매니큐어 반짝이는 두 편의 춘향전」, 『조선일보』, 1961.1.30.) 하면서도 최은희의 과년한 춘향 역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손에 바른 ‘반짝이는 매니큐어’만 지적했을 뿐이다. 이는 분장과 연기력으로 나이의 약점을 극복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성춘향>(명보극장)은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국제, 국도극장)에 참패를 안겨주며 서울에서만 74일간 3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기업적 기반을 마련한 신상옥은 신필름을 확장하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영화사로 키워 나갈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성춘향>에 이어 최은희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연산군>(이상 신상옥),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등 5편과 이만희와 유심평의 감독 데뷔작 <주마등>과 <군도(群盜)> 등 2편이 포함된 9편에 출연하였다. 여섯 살 소녀 옥희를 화자로 내세워 어머니와 사랑방에 세든 중년 남성과의 애틋한 사랑을 보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의 여주인공은 <마음의 고향>(1949), <동심초>(1960)에 이은 미망인 소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깨끗이 빗어 올린 쪽진 머리와 하얀 저고리, 절제된 미소, 조신한 동선(動線)으로 ‘동양적인 청결과 멜랑콜리한 분위기’ (「신영화, 담담하고 격조있는 가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국일보』, 1961. 8.26.) 를 자아내며 인내와 수절이 미덕, 가부장 중심 사회의 단면을 애잔하게 보여 주었다. 그 반면에 <상록수>(원작 심훈)에서는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에 나선 일본 식민지시대의 농촌 여성 채영신으로 변신해 역할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 시기야말로 최은희 연기 생애에 있어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최은희 연기 인생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산색시〉(박상호), <29세의 어머니>(이강원), <무정>(이강천) 등 외부 작품을 포함 12편에 캐스팅되면서 최다 출연 기록을 세운 62년은 <열녀문>과 <로맨스그레이>(1963, 이상 신상옥)로 자칫 굳어질 뻔한 ‘청상과부’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는 효과를 거두게 했다. 그런 잔제는 <29세의 어머니>와 같은 캐릭터에 남아 있긴 했으나 <열녀문>의 경우처럼 양반집 과부 며느리(최은희)가 머슴(신영균)과 정분에 빠져 임신을 하거나, <로맨스그레이>에 나타나듯이 단란한 가정의 가장인 대학교수(김승호)를 유혹해 돈을 뜯어내는 꽃뱀 수준의 호스티스(최은희)로 전환,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여성상을 그려 보였다. 특히 <로맨스그레이>에서 여주인공 민자의 입술 오른쪽 볼에 그려놓은 검은 점은 화류계 여성다움을 나타낸 차밍 포인트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캐릭터는 <지옥화>의 양공주 쏘냐와 함께 최은희 연기세계의 동적인 한 축을 형성하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로맨스 그레이>에서 김승호와 한 장면 [사진] <민며느리>에서 최은희는 연출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벙어리 삼룡>(1964, 신상옥)과 직접 메가폰을 잡은 <민며느리>(1965), 신상옥 감독의 옴니버스 사극 〈이조여인잔혹사〉(1969) 등에 출연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봉건주의적 인습에 희생 되는 여성의 틀을 유지한 채 <날개부인>(1965, 김수용),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 나봉한) 등에 출연, 밀수품 장사에 뛰어든 공무원(김진규)의 아내, 쇄국정책을 펼치는 대원군(김승호)의 섭정에 맞서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하다가 죽음을 맞는 민비 역 등을 통해 연기의 폭을 넓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