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쌍검녀
- 감독
- 지용구
- 제작년도
- 1972
- 출연
- 신미나, 임석봉, 이훈, 허은, 장정국, 김상순, 이철, 강주희, 김기범, 최일, 장인한, 정성균, 김기원, 노응래, 손전, 태일, 박석순, 최민규, 김영길, 장순국, 장진웅, 김태진, 강신원, 정하근, 신인섭, 박용모, 유동철, 서명종, 똘똘이, 최연수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아마 제목을 보고 먼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 원한의 두 꼽추 >는 무협영화이다. 그렇게 부르기는 했지만 그 시절 충무로에서는 일부러 (해서는 안 될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칼쌈’ 영화라고 부르거나 칼 소리가 부딪친다고 해서 의성어를 빌려 ‘짠짠바라’라고도 불렀다. 물론 이 표현은 일본영화에서 시대활극이나 임협물(任俠物)의 ‘殺陳’ 활극 시퀀스를 부르는 짠바라(チャンバラ)에서 온 말이다. 임권택 의 영화에서 무협영화는 1967년 < 풍운의 검객 >으로 일시적으로 나타났고 그런 다음 < 잡초 > ‘이후’ 그의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진 장르이다. 종종 무기력한 방향상실. 나는 지금 < 뇌검 > < 월하의 검 > < 비검 > < 요검 >, 그리고 < 삼국대협 >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 제목들을 연도별로 순서대로 썼다. 이 영화들이 기괴해 보이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간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점점 나빠져 갔다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들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시절 연달아 서울에서 개봉한 호금전의 < 용문의 결투 >와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 )>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영화적으로 아무런 공명을 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임권택은 이 실패들을 이미 준비된 결과처럼 받아들였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직업감독으로 그저 제안을 받으면 찍어야 했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던” 영화들이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권택은 이 영화들을 만들면서 반대로 직업감독으로서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사라져 가는 과정에 놓인 증명은 아닐까. 몰락해가는 영화산업. 참혹한 이중검열. 한국영화에서 1970년 혹은 1971년은 설명하기 까다로운 시간이다. <뇌검> <월하의 검> <삼국대협> 이 영화는 제목이 두 개다. 다른 제목은 <흑룡가의 쌍검>인데 (영진공 시절에 정리한) 예전의 감독 연보에는 두 편의 제목이 마치 다른 영화처럼 각각 등재되어 있었다. 같은 영화사. 같은 감독. 같은 배우, 같은 각본, 같은 촬영. (정리된 문헌에 따르면) 거의 같은 내용. 그래서 처음에는 한 편의 영화 스텝들과 배우들을 이끌고 동시에 두 편의 영화를 만들 줄 알았다. 1970년대에는 종종 그렇게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들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감독이 제작자일 때 스텝들과 배우와 한 편의 영화 계약을 한 다음 시침 뚝 떼고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척하면서 약간씩 대사와 세트를 바꾸면서 두 편의 영화를 찍고 나중에 편집해서 둘로 나누어 개봉했다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정리된 자료에서 <흑룡강의 쌍검>이라는 제목은 사라졌고 영화 자막에 올라오는 대로 < 원한의 두 꼽추 >만 남았다. 그런데 사라진 제목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우선 이 영화에는 중국 동북부와 내몽고 국경 사이를 흐르는 헤이룽강(黑龍江)은 고사하고 강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쌍검은 한 명의 무사가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인데 아무도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자루의 검이 각자 나뉘어서 운명을 따라 순환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문제가 되는 천검(天劍)은 단 한 자루의 명검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기구한 운명으로 서로 헤어져 자란 두 쌍둥이 형제를 비유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조롱하듯이 말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좀 기묘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내 관심은 여기에 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난 < 원한의 두 꼽추 >는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임권택 에 대해서 미처 다른 영화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거의 외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자포자기가 항상 가로막고 있던 어떤 방어선을 일시적으로 치워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방어선? 그렇다. 내가 1960년대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약간 추상화된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문법과 다소 두렵다는 듯이 공동체의 운명에 복종하기라도 하는듯한 굴복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공백이다. 서로 비대칭인 둘 사이의 거리는 임권택이 그것을 조선 시대, 혹은 한국전쟁의 전쟁터, 그리고 휴전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려는 데서 발생한 것(들)이다. 그런 다음 그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임권택은 풍경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혹한 삶을 보았고, 다시 한 번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의 시간이 근대의 역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밀고 나아갔다. 나는 먼저 임권택이 이상할 정도로 웨스턴 영화들에 대한 열렬한 애호가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물론 웨스턴이 일본 시대활극 영화들을 경유하여 홍콩에 도착했고 그런 다음 대만 무협소설과 결합하여 무협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임권택은 그런 계보에 관심이 없었다. 분명히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 돌아온 왼손잡이 > < 황야의 독수리 >나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를 만들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자신이 본 웨스턴 영화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누군가는 안소니 만을 볼 것이고, 누군가는 오토 플레밍거를 찾아낼 것이며, 아마 대부분은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스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들은 웨스턴 영화들의 거의 끝나가는 종말기에 마주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악당들은 이제 더 이상 바깥에서 찾아오지 않으며, 주인공은 불안에 떨고 있고, 정의가 지켜지는 것은 종종 서사의 차원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계보를 그려보는 것은 좀 더 나중에 할 생각이다. 하지만 임권택에게 좀 이상한 방법으로 할리우드영화의 고전주의가 지닌 우아한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다소 당혹스러워진다. 이를테면 드라마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한순간 그 신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를 몰두하는 것만 같은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예상치 않은 상황이 나타난다. 임권택은 고전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을 가진 것처럼 보존하고 싶어 한다. 단지 이것은 권선징악이라든가 아니면 비극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여튼 결말을 맺어야 한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의 비극은 다른 데서 온다. 임권택은 어떤 경우에도 차라리 주인공이 희생될지언정 세상이 몰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영화에서 기쁜 엔딩이 드문 이유인지도 모른다. 약간 과도할 정도로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가끔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이미 바로크 시대에 접어든 웨스턴 영화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감명받은 데서 오는 흔적일 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이 바로크적 미장센들은 1969년 혹은 1972년을 통과하면서 대부분 망가져 버렸다. 장기적인 과정에서 그 자신의 탈색과정, 하지만 일시적으로 그것이 이 시기의 임권택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원한의 두 꼽추>는 이 시기에 놓인 영화이다. 첫번째 시간: 약을 탄 술을 마시는 지원필 두번째 시간: 꼽추가 된 지원필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여기서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한 파편 속에서 무엇을 물구나무 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몹시 번잡한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다소 따분하지만 도식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우선 세 개의 시간. 첫 번째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이다. (이 장면은 이야기 도중에 흑백으로 되돌아간 다음 (flash_back) 진행된다) 검술의 한 유파에서 다음 장문을 가리는 자리인데 사형인 지원필은 가장 무술이 뛰어나지만 장문의 딸인 달래는 그의 경쟁자인 진수왕을 사랑한다. 그래서 장문을 가리는 자리에서 진수왕이 이길 수 있게 음모를 꾸며 지원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척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을 탄 술을 권한다. 지원필은 대결을 하다 쓰러지고 진수왕은 그의 등을 내리쳐 꼽추로 만든다. 뛰어난 무술을 가진 남자의 약한 마음을 파고든 사악한 계획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의 비열한 애인. 공모 앞에서 좌절한 미래의 시간. 그러므로 이 남자는 이제 미래의 시간을 되찾고자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구가 되어버린 이야기. 두 번째 시간은 첫 번째 시간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벌려놓은 다음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가 영화의 첫 장면이다) 꼽추가 된 지원필이 돌아와 진수왕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무술로는 지원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진수왕에게 그의 아내가 된 달래가 그의 친구인 정태성을 찾아가 모든 검을 잘라버리는 명검 천검(天劍)을 빌려오면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는 검을 빌려 줄 리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빼앗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재촉한다. 새로운 음모. 새로운 적. 새로운 복수의 계열이 여기서 생겨난다. 진수왕은 그의 친구를 죽이고 후환이 두려워 마침 절에서 아이를 낳은 그의 아내까지 참하려 한다. 그의 아내는 쌍둥이 청과 용을 낳았는데 진수왕의 부하들이 절에까지 찾아오자 자신은 청을 감싸 안고, 그리고 하인은 용을 안고 도망친다. 낳자마자 헤어진 형제, 그들의 기구한 사연. 그들은 성장한 다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째 시간의 복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둘로 나뉜 그들 사이를 확인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나를 둘로 나누고 그런 다음 이중으로 동여맨 세 개의 이야기. 아내는 부하들에게 쫓기다가 청을 절에 숨겨놓은 채 자신의 몸만 피신하고, 하인은 용을 나무에 숨겨놓고 부하들의 눈을 자신에 돌린 다음 죽음을 맞는다. 마침 진수왕과 대결을 하러 가던 지원필은 숲에 숨은 진수왕의 부하들과 싸우다가 그만 나무에 숨겨놓은 아이를 적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상처를 입히고 급히 달려간 의원으로부터 이 아이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미처 계산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던 실수. 자신의 원수에게 꼽추가 된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이번에는 자신이 꼽추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운명에 떨어진다. 무엇이 무엇을 삼켜버리고 있는 것일까. 비극 안의 비극. 참극 속의 참극. 죄 값을 받기 위해 찾아간 자가 새로운 죄 값을 치르는 자리에 간다. 지원필은 진수왕과의 대결에서 천검에 그의 칼이 잘리자 몸을 피신한 다음 꼽추가 된 아이와 함께 산에 묻혀 살아간다. 여기까지 영화가 시작된 지 17분 동안의 이야기이다. 세번째 시간: 꼽추가 된 용 그런 다음 세 번째 시간이 시작한다. 마치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의 서론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서 갑자기 긴 시간을 건너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벌어질 사건들은 시간의 기호들을 놓고 다투는 해독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꼽추가 된 용은 어른이 되었고 지원필을 아버지로 삼아 산속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청은 산사의 절에서 스님으로부터 무술을 전수받고 속세로 돌아온다. 당신이 상상하는 다음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청과 용은 형제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여기에 지원필이 가세해서 진수왕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그렇게 풀려나간다면 < 원한의 두 꼽추 >가 당신을 안심시키기는 하겠지만 너무 진부해서 더 이상 볼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세 번째 시간이 복수의 활극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임권택 은 차례로 우리의 기대를 차단시킨다. 우선 지원필은 용에게 복수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진수왕에게 복수를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는 그냥 주어진 세계 자체를 인정한다. 그는 마치 복수 대신 다른 어떤 것을 하면서 살 수도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어떤 것? 아버지의 자리.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리. 그는 용이 자기 품에 안겨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게 자신의 진정한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은 지원필로부터 어떤 무술도 전수받지 못했다. 청은 (아마도 과거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하는)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며 속세에 나가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무술을 지닌 고수들이 있으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그러므로 청은 자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동생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다. 그 둘이 쌍둥이이기는 하지만 둘 사이를 오간 재빠른 이미지의 교환을 통해서(parallel_editing)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좀 더 중요한 순간은 스승의 교훈이다. 늙은 노승은 청이 지닌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 복수 따위란 처음부터 청이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는 기회를 준다. 의무로부터 풀려난 자유. 하지만 영화가 이제부터 할 일은 당연히 청의 자유를 다시 의무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때 여기에는 정말 그 의무가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뒤따라 올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두 사람을 셈에서 빼놓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은 물론 복수를 하기 위해 두 번째 시간에 돌아온 지원필이다. 만일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진수왕은 친구 정태성의 명검 천검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청과 용은 헤어질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되면 용은 꼽추가 될 이유가 없으며, ...으로 이어질 연쇄적인 사건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이 되자 용을 키운 지원필은 정반대로 복수를 완전히 포기한다. 그는 용에게 마을로 내려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 이유는 다시는 진수왕과 다시 얽히는 순간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용이 모피를 팔기 위해 마을에 내려가 진수왕의 아들과 만나면서 마찰이 벌어지고 지원필은 자기 발로 진수왕을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 그 둘 사이의 멋진 대결의 순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지원필은 이미 대결할 수 없는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지팡이에 의지하고 몸을 불균형하게 뒤뚱거리면서 가까스로 진수왕의 성에 이른 다음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용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복수를 포기한 지 오래이며 이미 그럴 수도 없는 처지임을 몇 번이고 호소한다. 여기엔 나중의 결정적 장면을 위한 카타르시스를 상승시키기 위해 무언가 우리를 괴롭히면서 준비된 어떤 카드도 없다. 정말 그는 복수할 의사가 없으며 또한 그 순간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오로지 감옥에 갇혀있는 용을 구하겠다는 생각뿐이다. 말하자면 지원필은 여기서 완전히 아버지가 되어있다. 그가 겉보기에는 비루해졌지만 오히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복수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에 누구보다도 충실해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두 번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원한의 두 꼽추 >가 몹시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원인이 있자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통적인 주인공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에게 부여된 의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고전적인 주인공에로의 어떤 점핑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임권택 은 분명 여기서 카타르시스와 냉소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청과 용의 어머니 두 번째 인물은 아마도 당신이 잠시 잊었을 청과 용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두 번째 시간에서 청을 버리고 무사히 도망쳤으며, 그런 다음 의미심장하게도 용과 청이 진수왕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녀도 마을의 주막을 찾아온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야겠다. 그녀는 청과 함께 마을에 들어선다. 물론 아직 그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마치 거기에 모성의 직감이 작동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러이 그녀 얼굴로 다가간 카메라(zoom_in)를 통해 드러난 약간의 놀라움을 담은 표정이 말없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야 용이 빼앗긴 모피를 찾기 위해 주막에 찾아오면서 세 사람은 처음 한자리에 모인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두 쌍둥이의 어머니는 청을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용을 볼 때에는 그저 사태를 구경하듯이 쳐다본다. 이 장면만을 떼어놓고 보면 잘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한참을 더 지난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롱 테이크와 마주하게 된다. 문제의 신. 마침내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이자 정태성의 아내를 만났을 때의 장면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장면의 대사는 전부를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임권택은 수없이 잘게 쪼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을 끊지 않고(long_take) 한 번에 찍었다. 지원필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대사를 하고 두 번 마치 심리적인 마음의 동요를 찍는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에 다가간(zoom_in) 다음 다시 물러난다(out). 01:06:59 ~ 01:08:18 롱테이크 _ “용을 어디다 숨겼나?” _ “당신이 가진 검법을 용에게 전수해준다는 약속을 해주면 만나게 해드리죠” _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_ “용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진수왕을 죽여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남편의 원혼을 위로해드려야죠” _ “용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_ “아직은...” _ “댁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_ “물론...” _ “댁은 내가 용을 어떻게 키웠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핏덩이 어린 것을 그저 안고 비바람 눈보라 치는 긴긴 세월 헤매면서 이집 저집 돌며 동냥젖을 빌어 먹이며...” _ “말씀을 안 하셔도 짐작은 갑니다. 하지만 용은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_ “어린 것을, 그 불쌍한 어린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 _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 _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 드린다면?” _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_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 _ “...물론” 나는 처음에 이 장면 앞에서 몹시 당황한 나머지 이제까지 영화를 보면서 이들 사이의 인물 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했다. 대사를 따라가면서 차례대로 열거해보자. 우선 첫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을 만난 다음 용을 그동안 길러준 것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용을 납치한 사람은 그를 낳은 어머니이다. 그런 다음 기른 아버지를 협박하고 있다. 그녀는 용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히거나 혹은 따뜻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용에게 검술을 가르쳐줄 것을 요구한다. 누구라도 반대의 판본을 떠올릴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지원필이 이제 생모가 나타났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며 내 갈 길을 가야겠소, 그러니 나머지 일은 당신들이 서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난 이미 복수를 포기했소, 라고 해도 사실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다. 그런데도 용의 어머니는 용을 볼모로 삼으면 지원필이 반드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의 이상한 주술관계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여기서 마치 그 두 사람은 부모의 자리가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넷째, 용의 어머니는 용이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면서 그에게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용은 왜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그의 행위는 복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용의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면 용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다섯 번째, 더 이상한 것은 지원필의 반응이다. 그는 생모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 역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용의 부모는 그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를 키운 지원필인 것처럼 보인다. 여섯 번째, 가장 이상한 대화는 마지막 순간에 벌어진다. 지원필은 차마 용이 피를 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준다면?”이라고 말을 한다. 잠깐만. 그런데 진수왕은 동시에 지원필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이 꼽추가 된 사연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말하겠다. 여기서 지원필에게 첫 번째 시간의 계열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제부터 지원필은 그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용을 위해서 진수왕과 “죽음 속에 몰아넣는” 대결로 뛰어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용의 어머니이다. “그 불쌍한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은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 행위는 사실상 자살적 몸짓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을 계산해보고 싶다. 지원필은 복수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경고하는 데 그래도 그걸 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용의 어머니는 만일 그걸 할 수 없다면 자식으로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머니로서의 그녀뿐만 아니라 죽은 남편의 아내로서의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다음 가장 이상한 질문과 대답이 등장한다. 지원필은 그래서 자신이 대신 복수를 하겠다는 질문을 하자 용의 어머니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 앞에 약간 멍해졌다. 용은 물건이 아니다. 혹은 금은보화가 아니다. 용은 사람이다.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심지어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먼저 지원필의 뜻을 잘 알기라도 하듯, 그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한 번 더 반복하자면)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심지어 지원필은 그 대답을 받아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고 다시 묻는다. 용의 어머니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지은 다음(zoom_in)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라고 했나요? 그 질문에 대해서 용의 어머니의 올바른 대답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이라는 일망의 망설임이 거기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그 요구에 대해서 “...물론”이라는 대답이 가져오는 의미의 반사적인 메아리는 얼마나 이상한가. 그 대답에는 만일 당신이 아들을 대신해서 남편의 복수를 수행한다면 나는 기꺼이 아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이 압축되어 있다. 그건 남편의 복수가 아들의 의미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용의 존재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인지, 잠시 동안 그 둘 사이에서 어리둥절해진다. 지금 이 두 사람의 거래는 얼핏 보기에는 장르의 규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서로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이런 거래를 보는 영화는 무협영화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이다. 그때 이 두 사람은 언제나 아이를 사이에 놓고 낳은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의 만남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낳은 어머니가 찾아오고 기른 어머니는 차마 기른 정 때문에 아이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다소 아이러니한 심정으로, 희미하게라도, 하지만 누구라도, 정소영 의 < 미워도 다시 한 번 >을 떠올렸을 것이다. 1968년 7월 16일에 개봉한 다음 가장 유명한 멜로드라마 중의 한편이 된 영화. 어린 아들 김정훈을 사이에 둔 두 엄마 문희와 전계현. 물론 둘의 거래는 여기서 갈라선다. 가난한 형편의 낳은 어머니는 부잣집 기른 어머니를 만난 다음 그녀가 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를 부탁하고 돌아선다. 아이를 낳지 못해 기른 엄마는 낳은 엄마에게 그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맹세한다. 물론 그다음 다시 우여곡절이 있다. 하지만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와 낳은 어머니라는 비대칭을 사이에 둔 다음 고통스럽게 대중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감의 감상적인 눈물을 냉소적으로 뒤틀기 시작한다. 낳은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에게 그 정을 미끼로 하여 자기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얼핏 보면 그녀는 아내로서 충실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비대칭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죽은 남편은 아내가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포기하는 것과 이제 돌이킬 수 없게 이미 죽은 자신의 헛된 복수를 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권했을까. 지금 지원필이 빼앗으려는 것은 사실상 용의 아버지의 자리, 그러니까 용의 어머니의 남편의 자리인 것이다. 차라리 그녀는 용을 지원필로부터 빼앗아 강제로 삭제된 남편의 자리에 돌려보내서 가문을 잇게 만드는 것이 진정해야 할 일이 아닌가. 좀 더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령이 되어버린 남편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아들인 용이 가문으로 돌아와 공백을 메울 때 비로소 그녀의 진정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마더>(2009) 그러나 우리를 좀 더 복잡한 심경으로 이끄는 것은 그 둘의 자리 그 자체이다. 우리들에게 모성애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문화의 거의 모든 코드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자식에게 희생적이며, 자애롭고, 언제든지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가족 안의 희생양. 이 사랑의 과잉을 실재의 자리에서 가까스로 다룬 영화가 봉준호 의 < 마더 >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이 자리에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것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 기른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낳은 어머니를 대립시킨다. 그런데 그 대립은 성립하는 것일까. 누구라도 여기서 멈칫 한 다음 그 둘 사이에 어떤 비밀이 담긴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가질지 모른다. 그런 건 없다. 이 설명을 위해서 여기에 미처 등장하지 않았지만 셈에 포함시켜야 할 세 번째 등장인물을 생각할 차례이다. 그건 이 자리에 없는 다른 한 명의 쌍둥이 청이다. 내가 영화를 다 본 다음 다소 의아하게 여긴 것은 청과 용 둘 사이에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단 한 번도 구분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는 물론이고 이 순간을 지난 다음 마지막 장면까지 그들은 서로를 부른 적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이 형제는 끝내 힘을 합쳐 아버지의 원수 진수왕과 싸우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지원필이 힘겹게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의 아들과 싸우는 동안에도 청은 자신의 원수를 위해 용과 싸우다가 (이미 그럴 필요가 지난 서사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목 하나를 잘라버리기까지 한다. 청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어떤 때는 지원필과 용을 돕고, 어떤 때는 진수왕의 식객으로 머물면서 그의 편을 든다. 마침내 청이 용의 칼에 찔려 숨지면서 그의 옷 속에 숨겨져 있는 형제임을 밝히는 문신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둘은 비로소 포옹한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중인 것일까. 임권택 에게는 기이한 계산법이 있다. 너무나 이상한 계산법. 누군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공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어느 쪽에 서서 바라보건 계산법 자체를 무시한다면 그 이후를 더 이상 따라오기 힘들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신기하게 바라본 것은 청과 용이 힘을 합치는 대신 죽을 때까지、장르의 컨벤션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정말 죽을 때까지, 그 둘이 마주 싸운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만 남아야 한다는 듯한 칼부림. 이때 이 장면을 거슬러 올라가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처음부터 둘 중 하나만 남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머니는 용에 대해서 별다른 욕심이 없다. 그녀는 두 명의 쌍둥이 중에 청은 알아보면서 용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다음 용이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은 지원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아들을 담보로 하여 지원필을 협박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본 청에게는 단 한 번도 복수를 요구한 적이 없으며 그걸 전달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지금으로 충분하고 앞으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달라는 것만 같은 태도. 자식과 어머니 사이에 벌어진 이 이상한 채무관계. 이와 비슷한 관계를 임권택 의 영화에서 십 년 후에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영화는 < 길소뜸 >이다. 물론 <길소뜸>과 < 원한의 두 꼽추 > 사이에는 단순하게 시간적인 간극 이상의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요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태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줄거리의 환기. 낳은 어머니 화영은 한국전쟁 때문에 그만 아들을 피난통에 잃어버린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재혼을 하고 다른 자식들을 낳는다. 그 아이의 아버지 동진은 그녀를 오랜 시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역시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는다. 그런 다음 KBS 방송국이 벌인 이벤트인 ‘이산가족 찾기’를 위해 여의도에 펼쳐놓은 만남의 광장에서 우연히 (필연적으로?) 다시 만난다. 잃어버린 자식을 함께 찾던 두 사람은 어쩌면 아들일 지도 모르는 석필이라는 사내를 만나러 춘천에 간다. 석필도 결혼을 했고 자식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석필은 고아로 함부로 자랐으며, 교양도 없이 거칠고, 사사건건 화영과 부딪친다. 아니, 그보다 화영은 석필을 보자마자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이 사내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한다. 단지 세월이 이 두 사람을 낯설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놓인 계급이 어머니와 아들을 갈라놓는다. 그 둘 사이엔 어떤 정도 없다. 석필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돈 많은 여자가 나타난 것이며 자신을 어떤 조건도 없이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경제적인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화영은 그걸 느낀다. 이 사내가 지금 자기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복원 혹은 화해)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본다. 화영은 유전자 검사를 요구해서 그걸 구실로 하여 석필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다음 현재의 가족들을 만나러 떠난다. <원한의 두 꼽추>의 아들과 어머니 <길소뜸>의 아들과 어머니 두 어머니는 거의 동일한 이유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부정한다. 그것은 그 아들의 사회적으로 추락한 지위이다. 그리고 그 추락의 과정을 통해 학습된 행동이 즉각적으로 거부의 태도를 불러일으킨 다음 그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다. 좀 더 괴상할 정도의 유사한 장면을 지적할 수 있다. (< 원한의 두 꼽추 >에서) 용은 죽은 동물의 껍질을 벗긴 모피를 들고 와 진수왕의 아들과 흥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머니와의 첫 번째 대면이다. 좀 더 정확하게 용은 어머니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어머니는 그가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쳐다본다. 서로에 대한 지식의 바깥에 놓여있지만 총체적인 국면의 지식 속에 놓인 그들. (< 길소뜸 >에서) 화영과 동진, 그리고 석필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지나가던 개를 그만 치어 죽인다. 석필은 피 흘리며 죽은 개를 안고 횡재를 한 표정으로 보신탕을 해먹자고 할 때 화영은 그 모습을 보고 치를 떨며 내다 버리라고 소리 지른다. 여기서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차이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세월의 간극이 이 둘 사이에서 공백의 정치학을 작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물론 임권택 은 그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역사적인 인과관계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현존재의 시간이 자기 앞에 놓인 공백의 간극과 마주쳤을 때 그 앞에 놓인 가늠할 수 없게 깊은 심연의 무시무시한 재난을 임권택은 영화라는 방법을 동원해서 그 두 개의 시간을 오간 다음 몸서리치게 쳐다본다. 내 질문은 여기에 있다. 한쪽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설명되는데(< 길소뜸 >) 다른 한쪽은 어떻게 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장면에서 작동하는 모성애의 기계는 완전하게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여기서 기계라는 말은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완전하게 (캉길렘에서 출발하여 푸코를 경유한 다음 가타리를 거쳐 흘러들어 간) 들뢰즈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무언가 잘못 배치된 것 같은 이 장치들은 얼핏 보면 오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임권택 의 영화 안에서 그것은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중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순간에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동일하게 작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이 대답을 임권택의 전기로 덮어쓰고 싶지 않다. 그건 아무 해결도 아닐 것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복수는 성공적이었다. 지원필은 진수왕이 여전히 천검을 지니고 있는데도 대결 끝에 죽이는 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진수왕과 결혼한 달래를 죽이는 데도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청이 죽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때 청은 이 대결 끝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용과의 싸움에서 죽은 것이다. 그는 죽기 전 끔찍하게도 용의 한쪽 손을 자르는 데 성공한다. 용은 이기기는 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다른 형제로부터 한쪽 손을 잃는다. 이제부터 용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 그 형제로부터 자신의 한쪽 손을 잃었다는 분노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청은 지원필과는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청이 죽은 것은 지원필에게 어떤 감정도 끌어내지 않는다. 남은 또 한 사람. 쌍둥이의 어머니는 자신의 소원대로 복수에 성공하긴 하지만 자신이 한눈에 알아본 아들 청을 잃고 기꺼이 지원필에게 양보하기로 약속한 용은 살아남는다. 그녀는 분명히 지원필에게 약속했다. 만일 지원필이 대신 복수를 한다면, 그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다음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는 지원필의 요구를 지키지 못했다. 그만 대결 중에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가 끝난 다음이다. 용을 볼모로 지원필을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복수를 해준다면 자신이 용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용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지원필과 용, 그리고 용의 어머니가 무수한 시체를 뒤로하고 떠나가는 뒷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긴 하지만 이 장면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유사 가족의 성립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완전한 파국이다. 마지막 장면, 은실의 시선, 참혹한 쇼트들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pont_of_view)에 있다. 나는 아직까지 거의 이 영화의 서사에서 얼룩에 가까운 한 인물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건 진수왕과 달래 사이의 딸 은실이다. 은실은 지원필이 용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성을 찾아왔을 때 갑자기 등장한다. 그런 다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저 영화에 의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오로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필과 용의 편을 들면서 아버지에게 자비를 요구한다. 나는 이런 장르에서 적의 딸이 갑자기 주인공 혹은 그이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순간을 수없이 알고 있다. 다만 이 서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계열의 탄생. 거기에는 예상치 않게 두 사람 사이에, 혹은 둘 중 한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여기엔 그런 코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은실은 용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는 어떤 기호도 제공하지 않으며, 용은 그녀의 호의에 대해서 단 한 순간도 의심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 둘 사이는 어떤 감정의 계산도 없이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희생만이 있는 것만 같은 윤리적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가 은실웰염≠랜옇泉飴句옅개ぐ?#영?사이에서 나눌 감정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임권택 은 사실상 이 서사에서 완전히 외곽에 놓여있는 은실의 시선으로 어느 순간부터 이 마지막 신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시선의 논리에 아주 엄격하게 대응하듯이 차례로 쇼트를 소개한다. 그래서 구태여 서사의 관점으로나 혹은 감정선의 흐름에서나 아니면 리듬의 화음에서 무언가 불균질 하거나 불편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죽은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 둘 사이의 아들의 시체를 은실의 시선으로 차례대로 보여준다. 세 개의 참혹한 쇼트. 딸이 바라보는 부모의 시체. 여동생이 바라보는 오빠의 시체. 그런 다음 떠나가는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은실을 보여준다. 그때 우리는 은실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호의는 가장 나쁜 형식으로 돌려받은 것인가.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은실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장 불쌍한 사람의 시선.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가족 모두를 잃었으며 뿐만 아니라 성의 태수의 딸로서 안락하게 살아가던 삶 전체를 상실한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 결말 ‘이후’에 복수를 맹세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녀를 탓할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가면 즉각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원한의 두 꼽추 >는 아직 충분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표면의 설명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권택 의 이상한 계산법에는 어떤 메타 서사가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은밀하게 감춰진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계산법 아래 숨겨진 침묵은 무엇일까. 대부분 숨은 듯이 가려져 있다가 때가 되면 갑자기 나타나 셈을 치르기 시작한다. 나는 수없이 예를 들 수 있다. 이 계산법은 < 화장 >의 마지막 시퀀스에까지 이어진다. 김훈 작가가 미처 쓰지 않은 오상무와 추은주 사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 이상한 작별의 방식, 이때 거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선택의 전도가 있다. 여기에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있는가? 없다. 그러기는커녕 이야기를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위태로울 정도로 어리둥절해진다. 기른 아버지 지원필은 용을 위해서 모든 희생적인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는 용이 자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마을에 내려와 소동을 벌인 끝에 진수왕에게 붙잡히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옛 원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빈다. 달래가 황금불상을 훔쳐오면 교환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둑질을 오로지 용을 위해서 한다. 하지만 황금불상을 훔쳐오는 데 성공을 했음에도 진수왕은 교활하게 지원필이 그 과정에서 무공을 되찾은 것임을 걱정한 나머지 그의 한쪽 팔마저 잘라버린다. 하지만 꼽추에 한쪽 팔마저 잃은 지원필은 이 지경이 되어도 단 한 번도 용을 원망하지 않는다. 당신은 임권택의 계산법이 이 모든 우여곡절을 치르고 난 다음에 낳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제안이라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 계산법은 어떤 법칙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극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환상이 침입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때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 환상이란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계산법이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에서 모든 계산법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수식화이다. 핵심은 이 계산법이 어떤 이득을 취하느냐가 아니라 이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임권택은 자신의 계산 과정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때 진실이란 실재의 일부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계산속에서 우리는 임권택이 드러내는 진실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영화의 방법이란 자신의 계산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힘겹게 그 셈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용은 꼽추가 되고 한쪽 손이 잘려나가면서 기꺼이 그 계산의 미끼가 되었다. 나는 <원한의 두 꼽추>를 가혹한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점점 더 가혹해질 것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맞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공포. 진실이라는 네트워크의 공포. 찢어진 네트워크 사이의 실재의 공포. 무엇보다도 방법의 공포. (계속) 1971년 7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영화 각본 박철민 촬영 구문석 안길원 김택수 한숙 김청자
(두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상황. < 일대종사 >는 < 장군의 아들 >과 정확하게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쪽이 상승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내내 하강한다. <일대종사>는 모두가 추락하는 이야기이다. 그들 모두가 처음 시작했을 때 절정에 올라있었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엽문은 간단하게 말한다.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사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문파가 잘 났는지, 그런 건 떠들 거 없지, 쿵후, 그건 둘 중 하나지, 수평과 수직, 지면 눕고, 세로로 남는 자, 말할 자격이 있는 법이지, 내 말이 맞지 않나?” 모두가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런 다음 한 명씩 가로눕는다. 물론 왕가위는 단순하게 엽문의 대결로 이어가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다른 데 있다. <일대종사>는 어떤 의미에서 < 멀홀랜드 드라이브 >, 혹은 < 열대병 >처럼 둘로 잘린 영화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중간에 중단되고 (1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뛴 다음)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플래시백의 형식으로) 돌아본다. 물론 이 시간은 지나가 버렸고 이미 펼쳐져 버린 시간은 다시 그걸 되감싸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수직으로 진행된 시간. 수평으로 멈춰 선 시간. 이 시간을 감히 누가 이길 수 있을까. 두 개의 힘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걸 익혔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 자기가 속해있던 고유한 세계의 법칙이 바뀌었고, 그 안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간다. 다시 한 번 하는 말. 궁가 64수 노원괘인의 필살기,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영화에서 돌아본다는 말. 플래시백. <일대종사>의 필살기. 회상. 그걸 배운 자는 궁이 뿐이다. 그래서 엽문과 궁이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은 궁이의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엽문과 궁이의 아버지 궁보산이 생각으로 대결했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걸 엽문은 이번에는 그저 지리멸렬하게 받아칠 수 있을 뿐이다. 엽문은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 필살기의 뼈아픈 결점을 깨닫는다. 그는 회한에 차서 말한다. “궁이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만 졌다” 이 필살기의 결정적 약점은 누구에게도 이길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의 패배라는 점이다. 나는 두 개의 장면, 궁이와 엽문의 금루에서의 대결과, 궁이와 엽문의 플래시백의 대결 안에서의 궁이와 마삼의 대결을 뒤에 다시 다룰 것이다. 사망유희 死亡遊戱 나는 재빨리 금루(金樓)로 되돌아오고 싶다. 왕가위는 여기서 (아마도) 이소룡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 사망유희 >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우리는 금루가 얼마나 높은 건물인지, 이 건물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 한 쇼트도 금루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금루라는 건물 자체가 정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 장면 전체가 일종의 실내극이다. 이소룡은 <사망유희>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시퀀스를 찍기 위해서 이 영화에 매달렸다. 그건 물론 사망의 탑에 오르는 이소룡과 그와 겨루기 위해서 매 층마다 기다리고 있는 무술의 달인들과의 대결이다. 이소룡의 때 이른 죽음은 <사망유희>를 미처 완성시키지 못했다. 왕가위는 이소룡의 스승 엽문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아마도 조건반사처럼 이 에피소드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내게 금루의 시퀀스 전체가 거꾸로 세운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스승이 제자에게 보내는 위로. 이소룡의 영화를 본 세대가 보내는 답례. 엽문은 남방 무술계를 대표하여 인사를 드리기 위해 금루에 있는 북방 무술계의 대가인 궁보산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래층부터 차례로 올라와야 한다. 그리고 층마다 엽문을 맞이할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시퀀스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라는 아쉬움을 안고 있다. 여기서는 왕가위와 보여준 대로 나도 순서대로 쫓아 올라갈 생각이다. 시녀들 여기서 장면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준 사람은 벨라스케스를 읽은 푸코이다. 그는 <말과 사물>의 첫 장의 시작 첫 문장에서 화가는 자기의 캔버스로부터 조금 물러 서 있다, 라고 쓴 다음 바로 가까이 다가선다. 물론 푸코가 목표로 한 것은 단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읽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상호가시성이라는 방법을 배웠다. 내게 약간의 인용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푸코는...) 상호가시성이라는 이 가느다란 선은 불확실한 것과 교환과 전위 같은 것들로 구성된 복잡한 조직을 전체적으로 포괄한다. 화가는 우리가 우연히 그의 주제와 동일한 장소를 차지할 때에만 그저 그의 눈을 우리에게 돌릴 수 있다. 감상자인 우리는 하나의 부가적인 요소이다. (잠시 동안 이 그림을 보아주기 바란다.) 설령 우리가 화가의 시선과 마주쳤다 해도 그 시선은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가버릴 수도 있으며 우리에 앞서 거기에 항상 존재했던 것, 즉 모델 그 자체가 우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그림 밖에서 그에게 직면해 있는 허공으로 향한 화가의 시선은 감상자들이 존재하는 만큼 많은 수의 모델을 용인하고 있다. 바로 이 중립적인 장소에서 응시자와 피 응시자는 끊임없는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푸코는 지나쳐가듯이 맞은편의 광경이라는 말을 꺼내 든다. 장 삐에르 우다르는 여기서 봉합(Suture)이라는 개념을 (라캉의 수사를 빌려) 발전시켰다.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 이때 핵심은 시선이 아니라 광경의 내밀성이다. 우리는 개념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종종 의도를 지나쳐서 우리 자신이 느끼는 기쁨의 내밀성 안으로 다가간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거리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선 다음 무엇이 나를 멈춰 세웠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나는 맞은편의 광경을 보여주는 것 안에 있는 본 것의 발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발견이라고 쓰는 대신 의도적으로 발명이라고 썼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안정한 설명이다. 나는 여기서 거기 있는 것 이상으로 그 무언가를 덧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의 방점, 장면의 디테일에 이끌릴 것이다. 궁보산 궁이 면의 배경. 이 장면에는 두 개의 시선이 엽문을 바라보고 있다. 한 명은 궁보산이고, 다른 한 명은 궁이이다. 혹은 이 자리는 궁이에게 엽문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처럼 보인다. 비 오는 날 궁보산은 엽문이 그에게 도전을 해온 자와 그의 무리들을 수평으로 눕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궁보산은 엽문이 자기를 눕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물러날 때가 온 것이다. 금루에 궁이를 데려온 궁보산이 말한다. “세상사 가운덴 안 보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지. 봐둬도 나쁘진 않아. 어떤 이는 등불이 어떤 이는 그림자가 되지. 다 시류에 따르는 법. 널 남방에 불러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싶었다. 잘 봐둬라, 아비가 어떻게 물러나는지” 이제부터 시작될 금루에서의 엽문의 대결 장면 전체가 궁이의 조심스러운 클로즈업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 궁보산의 말을 듣고 궁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조심스럽게, 약간 망설이는 듯한 동작으로, 하지만 마치 이끌리듯이 살짝 고개를 돌리면서 실내 창문 바깥을 내다본다. S#_1 S#_2 S#_3 S#_4 S#_5 하지만 궁이가 시선을 돌린 것은 아버지의 말에 이끌려 돌린 것이지 엽문이 거기 있어서 그곳으로 시선이 향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궁이가 시선을 돌리자 엽문이 도착한다. 마치 궁이의 시선이 엽문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엽문이 거기에 온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영화 안에서 누가 누구 앞에 있는 것일까. 이 영화가 엽문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자꾸만 궁이가 다가오면 영화의 중심은 엽문에서 궁이에게로 옮겨가는 것만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 S#_1) 금루로 들어서는 엽문. 클로즈업. 이때 엽문을 본다기보다는 반사하는 엽문을 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거울에 비쳐 보이거나, 혹은 유리에 굴곡을 일으키며 반사하는 엽문. 이때 이것이 궁이의 시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말하자면 시선의 일방적인 통로. 엽문은 이 시선을 아직 알지 못한다. 금루에 들어설 때 엽문은 그를 반기지 않는 북방 무술계 인사들에 둘러싸인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시선에 포위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엽문은 반사를 지나쳐서 금루 안에 들어선다. 그런 다음 멈춰 서는 엽문의 클로즈업은 이상할 정도로 그 앞에서 본 궁보산과 대화하다가 문득 어딘가를 초점 잃은 듯이 보던 궁이의 마지막 쇼트에 대해서 마주 보는 것 같은(reverse_shot) 거리와 크기로 맞은 편의 광경을 채워 넣는다. < 일대종사 >는 여기서 빈 것을 저기서 채워 넣는 다소 이상한 방식의 보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교환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마치 쇼트 사이의 행동 프로그램이 작동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하지만 분명히 상호 가시성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걸 좀 더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온 가여운 토끼를 반기기라도 하듯이 엽문을 반기면서 두 손을 모으며 “엽(葉)사부, 강호에는 인물이 많지, 오늘 두각을 나타내는 날이라 금루 사람들과 축하해주러 왔네”라고 인사하는 첫 번째 환대의 인사를 하는 쇼트에서 인물은 프레임 바깥에서, 같은 말이지만, 엽문의 시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 S#_2) 혹은 두 개의 쇼트는 비스듬히 마주한다. 환대가 없는 환대의 자리. 그때 누가 엽문을 환대하고 있는가. 엽문의 표정의 클로즈업. ( S#_3) “고맙습니다. 아저씨” 마치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맞은편의 인사. ( S#_4) “별말을, 어려워말고 들어가세” 그제 서야 엽문은 주변을 돌아본다. ( S#_5) 그때 이 시선은 올려다보지 않고 여전히 수평으로 돌아본다. 이 시퀀스는 차례로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상승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퀀스에서 왕가위는 단 한 번도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쇼트를 찍지 않았다. 종합적인 장면과 가시적인 쇼트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 그는 다음 층으로 이동할 뿐이지 올라가지 않는다. 엽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S#_6 S#_7 S#_8 S#_9 S#_10 S#_11 하지만 엽문의 시선은 덧없는 것이 된다. 그는 수평으로 돌아보았지만 다음 쇼트는 누군가 위에서 사선으로 계단을 걸어서 내려온다. 우리가 금루에 들어서서 처음 듣는 미메시스의 음악. ( S#_6) 수평의 시선. 사선의 동선. 위에서 아래로, 명백히 지금 막 금루에 들어선 맨 아래층의 엽문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발걸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치파오 의상을 입은 것으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계단 안쪽에서 찍었고 그녀는 카메라 앞을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때 여자가 빠져나가자 아래층에 머물던 엽문은 등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거의 반사적인 신경. 자기에게 다가오는 공격적인 힘을 느끼는 제스처. 위에서 아래로, 그런 다음 아래서 위로, 동선과 시선의 교차. 이 선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두 개의 선 사이를 마치 파고들듯이 다음 쇼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온다. ( S#_7) 부채질을 하며 들어온 두 번째 환대의 인물. 치렁치렁 늘어진 구슬커튼 발.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가고, 사선으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본 다음, 수평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갈 때 금루라는 건물의 미로와도 같은 선이 거미줄처럼 이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한다. 얼굴을 드러낸 남자는 거만하게 부채질을 하면서 말한다. ( S#_8) “우리도 기루 아가씨들을 대표해서 축하해주러 왔어요” 이 말에 엽문은 사내를 바라보는 대신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엽문의 돌아보고 올려다보는(double_action) 제스처를 연속된 두 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 S#_9, S#_10) 물론 이건 쇼트의 낭비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리듬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시선의 분산을 느낀다. 왜 분산이 필요해진 것일까. 사방의 시선. 모두가 엽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모두를 찍는 대신 엽문의 시선을 보여주는 쪽이 반대로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쇼트의 부등가교환은 종종 간접적 장면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왕가위는 이 문제를 때로 우회적으로 해결한다. 이를테면 < 2046 >의 거의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시네마스코프 안의 장면들의 모델들 사이의 교환. 그렇다면 엽문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 올려다본 것일까. ( S#_11)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 정확하게는 올려다보는 엽문. 아름다운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우아한 곡선. 하지만 이 시선은 엽문의 위치가 아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다소 애매하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살짝 상승하기 때문이다. 엽문은 그 자리에 서 있고 카메라는 이동한다. 물론 그걸 시선을 올려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다. 엽문은 사내의 말에 대답하듯이 말한다. “기세가 대단한 걸” 하지만 이 대답은 화면 바깥에서 들린다. (voice_out_of_frame) S#_12 S#_13 S#_14 S#_15 이때 쇼트는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아직도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거의 무한정으로 이어진 계단. ( S#_12) 이 신발을 따라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겉으로 보기에는 비단결처럼 보이는 이 신발은 마치 쇠로 만든 것처럼 무겁고 둔탁한 울림을 낸다. 그 계단을 따라 이어져 내려올 것 같은 그 신발이 두 걸음을 걸은 다음 갑자기 ( S#_13) 계단 위에서 뛰어내린다. 첫 번째 대결의 상대. 팔괘장의 달인 삼저. 이때 그녀의 낙하는 나선형으로 내려온다. 이 나선형의 동선을 기억할 것. 팔괘의 동작. 삼저의 액션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선형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왕가위는 액션의 인물들에게 선을 부여한 다음 그 선을 따라 다른 선과 다시 이어간다. 그 선이 신체를 이끌고 몸에 붙어있는 손과 발이 법칙에 따라 점에서 시작하여 활동을 시작하는 곡선과 직선으로 이어간다. 쇼트는 그걸 어떻게 이어 붙이고 떼어 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긴장. 이들은 서로 다른 법칙의 세계를 동일한 공간 안으로 끌고 들어온 다음 같은 규칙의 경기장에서 수평과 수직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때 계단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삼저를 계단 아래서 엽문의 시선으로 올려다 본 다음 ( S#_14)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하강하는 삼저를 바라본다. (double_action) 하강, 혹은 낙하. 엽문의 시선과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의 시선의 교차. 바닥에 착지하는 삼저의 발, 아니 신발. ( S#_15) 이 장면은 신발의 클로즈업이 아니라 신발이 내려앉는 소리의 클로즈업이다. 이미 우리는 계단에서 이 신발의 무거운 소리를 들었다. 엽문 앞에 뛰어내렸을 때 이 신발은 사뿐하게 내려앉는 대신 무언가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이 신발은 그녀의 무기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녀의 경공술이 아니라 신발이 매우 무거운 것, 아니 차라리 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벼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리가 아니다. 한 가지 더.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일종의 중력감이다. 중력을 본다는 문제. 비가시성의 가시성. 이 무거운 신발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여덟팔(八)자 걸음으로 옮겨갈 때 그 보폭의 움직임이 그녀의 무술의 일부이며 이제 곧 활동하게 될 팔괘장의 기본 동작임을 알려준다. 신중하지만 자신 있는 걸음. 카메라는 그녀의 발길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난다. 마치 이 모든 움직임은 발과 손, 팔과 몸의 안무에 종속된 것처럼 이끌린다. 때로 자석처럼 따라가고 있으며, 때로 마치 너무 빨라서 놓쳤다는 듯이 순식간에 손과 발, 팔과 몸이 빠져나가버리기도 한다. 왕가위의 표현을 빌리면 이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S#_16 S#_17 S#_18 첫 번째 대결의 시작. 동선이 누구에서 시작하는가, 라는 문제. 삼저가 자세를 먼저 취하는 것을 ( S#_16) 정면으로 바라볼 때 부채를 든 사내가 말한다. 화면 바깥의 목소리. “삼저는 공연단 잡인 중 최고야” (voice_out_of_frame). 차라리 이 목소리는 해설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엽문은 지금 최고 중의 한 명과 마주해야 한다. 공격이 시작될 때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프레임의 공간 안으로 침입해야만 한다. 액션은 상대를 바라보는 장면(single_shot)과 두 사람이 대결하는 장면(two_shot)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교환 사이의 선택이다. 이때 누가 그 프레임의 주인인가. 누가 그 영역을 침범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점유할 것인가. 거기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혹은 쫓겨나는가, 그런 다음 어떻게 다시 들어갈 것인가, 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프레임은 균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 속에서 동선은 새로운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새로운 운동들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프레임 그 자체의 힘이 지속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액션은 시간 그 자체이자 힘의 형태이며 선의 운동이다. 우리는 이 형상을 언제나 지속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삼저의 제스처를 반복해서 보면서(double_action) 재빨리 정반대의 뒷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삼저와 엽문은 한 쇼트 안에(two_shot) 교집합을 이루게 된다. ( S#_17) 두 개의 다이어그램을 하나로 합쳐놓을 때 거기서 생겨나는 긴장. 그런데 엽문은 정반대로 그저 뒷짐을 지고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남자의 목소리. “팔괘장을 좀 하지” 그때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삼저의 신중하고 날렵하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엽문에게 다가가는 몸동작을 보는 우리는 “...좀 하지”라는 말이 엽문을 업신여기는 경고임을 알아차린다. 거기에 사내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형님이 한 수 알려줘” ( S#_18) 이때 사내는 왼쪽에 서서 오른쪽으로 엽문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 S#_8)의 연장이 아니라 그보다 하나 더 앞의 쇼트( S#_7)의 연장이다. 왜 이 장면은 정면으로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되면 거기서 리듬은 멈출 것이다. 멈춘다는 문제와 빠져나간다는 문제. 마치 시선의 운동은 굴곡을 만들듯이 거기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정면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빠져나간다. S#_19 S#_20 S#_21 S#_22 비로소 삼저를 맞이하는 엽문. ( S#_ 19) 아래서 위로 수직으로 카메라가 살짝 올라갈 때 엽문은 45도로 서 있다. 대화의 구도. 무술의 언어. 대결의 대화. 말하자면 엽문은 이 남자를 보는 게 아니라 삼저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때 예를 갖추는 것은 삼저만이 아니라 카메라도 함께 예를 다한다. 엽문과 같은 방법으로 카메라가 아래서 위로 올라가면 삼저는 주먹을 손바닥에 가지런히 모아 인사를 하면서 자세를 잡는다. “그럼” ( S#_20)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엽문의 손의 클로즈업. ( S#_21) 그 손은 방어나 공격의 자세를 취한다기보다는 삼저의 말에 대해서 허락의 제스처를 보여준다. 당신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말하자면 대결의 예. 그런 다음 엽문의 얼굴, ( S#_22) 만면에 지은 미소. “그럼”. 사실 이건 중복 쇼트이다. < 일대종사 >에는 액션이 아니라 (그리고 물론 그럴 뿐만 아니라) 제스처의 중복 쇼트를 계속해서 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중복 쇼트가 하는 역할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중복은 방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시선을 붙들어 매 둔 다음 거기서 우리들의 시선의 경로를 동요시키려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다. 그때 장면은 쇼트의 중복에 의해서 종종 치명적인 간극이 생길 수도 있다. 왜 다시 이것인가. 갑자기 시선은 분해당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혹은 진부하게도 강요받은 인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중복이 이미지를 영화적인 순간에로 이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을 잠시 뒤로 돌려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허락의 제스처를 말의 허락과 떼어내서 그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냈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쇼트의 진행은 과정의 디테일이다. 이때 중복은 재현이나 서사의 과정이 아니라 지각의 과정이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을 둘로 나눈 것이 아니라 보고 다시 본 것이다. 그때 하나가 객관적인 쇼트라면 이어지는 쇼트는 객관적인 앞의 쇼트에 대한 주관적인 쇼트의 역할이라는 착시의 지각을 불러일으킨다. 왜 여기서 주관적인 쇼트가 필요해진 것일까. 엽문의 미소를 다시 바라보기 바란다. 왕가위는 이 대결에서 액션이 아니라 엽문의 인격을 찍기 원한다. 비가시적인 대상. 그가 취하는 예. 그가 대하는 태도. 다가갈 때와 물러서야 하는 순간의 결정. 이 대결의 마지막 상대가 북방 무술의 최고의 자리에 있으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대가 궁보산이며, 그와의 대결이 손과 발이 아니라 생각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소는 하나의 기호이자 동시에 신호이다. 그것이 어쩌면 배치 전체를 무너트릴 지도 모른다. 왕가위는 그걸 무릅쓰고 그걸 한다. 두 개의 예술적 결정, 그것. S#_23 S#_24 S#_25 S#_26 S#_27 삼저는 허락을 받자마자 바로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쳐들어오면서 엽문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 S#_23) 자기의 영토를 침범당한 엽문. 삼저가 밀고 들어올 때 카메라는 삼저를 올려다보면서(low_angle)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다가 멈추고 앞으로 나서자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마치 자석처럼 따라붙는 카메라. 몹시 가까이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짧은 초점 거리의 렌즈를 사용한 이 촬영은 삼저의 동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카메라와의 사이의 약속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다가와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의 무술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선 이외의 배경을 모두 지워버릴 거예요, 라는 듯한 거리. 삼저는 엽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팔괘장의 지식을 일러준다. “팔괘장은 검술을 본땄지” 그러면서 자세를 취하고 한 손을 내밀면서 “단환장은 일검”, 다시 두 손을 모아서 “쌍환장은 쌍검”이라고 말한 다음 한 바퀴 도는 자세를 취하면서 ( S#_24) 그 발이 회전을 하면서(double_action) “여덟 팔(八)자 보법에” ( S#_25) 이어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삼저를 보여주면 그녀가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미소 짓는 얼굴로 덧붙인다. “64개의 변화가 있고”. 이때 엽문의 쇼트는 그녀의 대사 중간을 잘라 들어간 것이다. ( S#_26) 화면 가득한 클로즈업의 미소. 난 준비가 끝났어요, 라는 대답의 표정. 어쩌면 이미 삼저의 약점을 본 것일까. 무언가 이 신비로운 미소는 우리들로 하여금 소설을 쓰고 싶은 유혹을 한다. 물론 이것은 중복 쇼트가 가져온 주관적인 효과가 지금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순간적인 미소를 본 것일까. 삼저는 한쪽 손을 올리고 다른 손을 내린 다음 웃는 얼굴이 갑자기 바뀌면서 “기습에 유리하지”라고 덧붙인 다음 엽문에게 재빨리 첫수를 내지른다. ( S#_27) 물론 기습에 유리하다고 말한 다음 하는 공격은 이미 기습이 아니다. 말하자면 기습의 예. S#_28 S#_29_A_1 S#_30 S#_31 S#_32 S#_33 S#_34_A_2 대결의 시작. 삼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레임 인 하면서 대결이 시작된다. 엽문은 그 삼저를 맞는다. ( S#_28) 이때 삼저가 엽문의 공간,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영화의 규칙은 무협영화가 아니라 무술영화이다. 손과 발이 닿은 거리가 자기의 영토이다. 그 안으로 들어올 때 서로의 무술이 지닌 규칙들이 대결의 구도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때 대결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엽문과 삼저의 대결이지만 다른 하나는 엽문의 무술과 삼저의 무술, 영춘권과 팔괘장의 술(術)이 각자의 규칙에 따라 활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때 두 개의 선이 부딪치고 때로 엉켜들고 하나가 다른 하나는 끊으려 할 때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을 것이며 다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묶으려 할 때 그것을 풀어헤쳐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동선. 영화는 그 선을 이어가면서 따라갈 것이다. 왕가위는 승패를 따라가지 않는다. 물론 그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장르의 운명을 알고 있다. 만일 여기서 엽문이 패배한다면 이야기는 어떤 수를 써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 것이다. 바보들이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왕가위는 그들을 버려두고 쇼트를 진행한다. 여기서 무술의 동선들은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엽문과 삼저는 그 규칙이 활동하는 선의 양태이다. 그때 쇼트는 선의 집합이자 운동의 선이다. 거기서 무엇이 중심에 놓여있는가. 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살과 뼈, 신경조직과 피부로 이루어진 하나의 무게. 무술은 결국 몸을 다루는 기술이다. 몸과 몸의 만남. 영화는 몸을 바라보고, 몸에 다가갔다가 떨어져 나가고, 그런 다음 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다이어그램과 블록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때 마치 엽문과 삼저의 대결 자체가 두 개의 다이어그램의 교환처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다음 쇼트는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수직으로 내려다본다. 두 개의 점. 나는 이 장면을 먼저 A_1 이라고 부르겠다. ( S#_29_A_1) 우리는 이 구도를 이미 < 장군의 아들 >에서도 보았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이 쇼트를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건 대역을 촬영하기 위한 속임수에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대역 촬영을 위해서라면 이것 말고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 그리고 < 일대종사 >에서 이 장면은 대역이 아니다. 우선 성립이라는 문제. 이 쇼트는 누가 보는 것인가. 설명을 하려면 난간에 서 있는 기루의 아가씨들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결이 끝날 때까지 기루의 아가씨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reverse-shot) 시선의 교차점.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이 쇼트는 앞의 쇼트를( S#_28) 그대로 위로 올린 다음 90도로 내려다본 것이다. 그래서 삼저가 왼쪽에 있고 엽문이 오른쪽에 있다. 그런 다음 다시 내려온 카메라는 재빨리 엽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 S#_30) 방어하는 엽문. 무엇을? 자기의 공간, 자기의 프레임. 그때 이 공간 안으로, 마치 프레임을 찢듯이, 삼저의 주먹이 왼쪽에서 들어오고 이것을 막는다. 천장에서 엽문의 곁 가까이 다가온 장면 바로 다음 순간 ( S#_31) 갑자기 상상선을 뒤집어서 엽문과 삼저를 배치했다. 그냥 간단하게 그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왼쪽에 놓인 엽문. 오른쪽에 있는 삼저. 이때 위로 올라간 다음 카메라가 반대 방향으로 내려간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바로 앞 장면( S#_30)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장면은 점프 컷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도 없다. 물론 너무 짧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핵심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때 엽문은 반대로 마치 유리 사이에 비춰 보이면서 거울에 반사되어 보는 것 같다. 이게 거울인지 유리인지는 너무 순간적이어서 분명치 않다. 하지만 유리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사의 구도 바깥에 있는 삼저는 성립되지 않는다. 액션은 멈추지 않았고 동선은 상상선을 넘어서서 끊기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상상선 반대편으로 넘어와서 ( S#_32) 삼저의 발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오른쪽에 있는 엽문을 공격한다. 말하자면 다시 한 번 뒤집은 것이다. 나는 내 감각을 믿고 싶다. 31번째 쇼트는 인서트가 아니다. 세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액션의 동선이 일치한다. 만일 이 쇼트가 없다 할지라도 두 개의 쇼트는 연결하는데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 필요가 생긴 것일까. 나는 두 개의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하나는 장소의 환기이다. 왕가위는 우리들이 단지 동선을 쫓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는가. 이 장면 전체가 하나의 실내극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장소에서 영화를 진행하는 것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처럼 상상선이 문제를 일으킬 때 우리들은 문득 장소를 보게 된다. 다른 하나. 기이하게도 이 쇼트는 동선을 쫓아가다가 마치 상황을 물끄러미 쳐다보듯이 빠져나갔다는 인상을 준다. (establishing_shot) 이때 이 쇼트가 굴곡진 유리를 걸었다는 점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 쇼트는 궁이의 시점 쇼트라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대결 바깥에 있는 그녀. 비밀의 복도에서 훔쳐보는 시선, 마치 쌓아 올라간 블록 중의 하나가 갑자기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은 쇼트. 돌아온 위치의 쇼트는 재빨리 삼저와 엽문의 대결을 이어받는다. ( S#_33) 같은 크기. 같은 각도. 이어지는 액션. 재빠른 데쿠파주. 순간적인 투 쇼트. 이때 이 쇼트를 받는 것은 재빨리 다시 천장에 올라간 A_2이다. ( S#_34_A_2) 천장에 올라갈 때마다 마치 정확하게 다시 상상선을 복기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이 있다. S#_35 S#_36_A_3 S#_37 S#_38 S#_39 S#_40 S#_41 S#_42 S#_43 하지만 왕가위가 쇼트 진행을 패턴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섬광 같은 순간. 삼저가 뒤에 있고 엽문이 앞에 있는데 삼저의 손이 재빨리 허공을 가르고 순간적으로 엽문이 피한다. ( S#_35) 이때 왕가위는 갑자기 슬로우 모션으로 속도를 바꾼다. 이상할 정도로 이 쇼트는 인상적인데 약간의 트릭이 있다. 물론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속도를 변속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이 쇼트만 사운드가 없다. 그래서 마치 이 장면을 단지 느리게 본 것 이상으로 찰나의 순간을 확장시켜 놓은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순간적인 괄호 치기. 물론 이 장면은 위험하다. 쇼트의 편집이라는 순서의 리듬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두 개의 쇼트는 잘못된 각도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그때 왕가위는 재빨리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서( S#_36_A_3) 마치 상상선을 재설정이라도 하듯이(re-establishing_shot) 다시 고스란히 반복한다. 이 쇼트는 앞의 쇼트( S#_35)를 이어받는다기보다는 더 앞의 쇼트를( S#_34)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슬로우 모션으로 파고 들어간 쇼트는 마치 인서트처럼 작동한다. 엽문은 삼저의 팔을 뒤로 꺾고 이때 ( S#_37) 삼저의 얼굴로 다음 쇼트를 받는다. 팔과 손으로 연결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엽문은 그 팔의 연결이며 바로 곁에 있다. 카메라의 바로 앞. 이때 그건 삼저의 표정을 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표정의 쇼트.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여기서 승부는 결판이 난 것인가. 그 순간 갑자기 정면으로 찍으면서 삼저는 팔을 비틀어서 엽문의 손을 빠져나간다. ( S#_38) 약간의 현기증. 말 그대로 브레송 효과. 팔과 몸을 분리한 다음 팔의 운동에 대해서 몸이 마치 그 일부처럼, 마치 나사처럼, 회전하면서 빠져나간다. 재빠른 슬로우 모션. 마치 몸과 몸이 부딪쳐서 일으키는 듯한 사운드 효과. 그때 삼저의 팔은 엽문의 손아귀를 나사가 박혀 있다가 비틀어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삼저가 계단을 내려올 때, 그리고 계단에서 뛰어내릴 때, 그런 다음 엽문에게 다가오면서 팔자 보폭을 걸었을 때, 매번 그녀의 동선에서 나선형의 운동을 보았다. 엽문의 금나수(擒拏手), 삼저의 동일한 운동. 말하자면 두 개의 쇼트( S#_35, S#_38)는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것이다. 만일 앞의 쇼트가 없었다면 뒤의 쇼트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두 개의 쇼트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그것은 이 두 개의 쇼트가 모두 손의 운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슬로우 모션의 이미지. 손의 활동. 여기서 방향을 잃으면 안 된다. 엽문과 삼저의 투 쇼트. ( S#_39)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 왕가위는 갑자기 상상선을 넘지만 그러나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알고 있다. 왕가위가 때로 법칙 바깥에서 감각적으로 편집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대부분 부주의한 비평가들이 편집의 맹점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그가 지나치게 고전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맹점의 봉합. 경계 사이의 보충. 그는 일단 선을 정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제자리로 돌아온다. 반대로 종종 바깥으로 나간 다음 완전히 새로운 선을 따라가는 것은 차이밍량이다. 나는 그가 때로 원칙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혼란스러운 극장.(< 안녕, 용문객잔 >) 건물 사이의 미로.(< 표정 >) 물론 그렇게 하면서 차이밍량은 완전히 새로운 선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미학적 원칙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왕가위는 동선을 끊은 다음 재빨리 다시 연결한다. 마치 일사불란한 동작처럼 삼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손을 모은 다음 엽문에게 뻗는다. ( S#_40) 왕가위는 삼저와 엽문을 떼어내고 다시 엽문의 쇼트를 만든다. 이때 삼저가 이 쇼트 안으로 침입하듯이 들어온다. ( S#_41) 이걸 재빨리 쇼트를 나누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장면이다. 그러나 왕가위는 하나의 장면 안에서 하나의 행동을 성립시키는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n개의 쇼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왕가위의 장면은 n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도 정식화 할 수 있다. 왕가위의 쇼트 나누기의 원칙은 간단하다. 한 씬 안에서 단지 여러 개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액션을 미분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서로 각자 공존해야 한다. 대신 그 둘은 하나로 섞이면 안 된다. 그게 같은 방향이건, 같은 사이즈이건 그건 관계하지 않는다. 왕가위는 이미지로 쇼트를 분류하지 않는다. 그걸 <화양연화>에서 우리는 보았뇩?씬 안에서의 분리. 쇼트들 사이의 칸막이. 그뇩옳碩오?여러 개의 쇼트로 나눈 것이 아니라 여러 개로 나눈 쇼트들을 하나로 구성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 일대종사 >는 동일한 원칙을 액션의 장면 안에서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S#_42) 여기서 엽문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삼저를 어깨로 부딪쳐 바깥으로 내보낸다. 이때 이 구도는 엽문이 마치 프레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쇼트 사이즈를 더 안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 S#_43) 이때 삼자가 왼쪽에 있는데도 엽문은 정면을 향해 서서 마치 어떤 생각에 잠긴 듯, 그저 영춘권의 무술이 요구하는 동작의 규칙에 따라 지금의 자세를 취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심저를 몸으로 밀어 낸다. 그리고 이 몸에 밀려서 삼저가 다시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간다. 말하자면 프레임의 소유라는 문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사방으로 열린 프레임. 통로들. 계속해서 다시 설정되는 공간. 그 중심에 선 몸. 수직과 수평. S#_44 S#_45 S#_46 S#_47 S#_48 S#_49 S#_50 S#_51 S#_52 S#_53 S#_54 S#_55 S#_56 S#_57 S#_58 S#_59 S#_60 S#_61 나는 여기서 제작의 흔적을 복기하고 싶은 유혹마저 느낀다. 동선과 카메라의 혼연일체. 이 믿기 힘들 정도의 호흡의 일치. ( S#_44) 삼저가 밀려나면서 기둥을 발로 차고 그 반동으로 다시 엽문 쪽으로 향한다. 이때 왕가위는 기둥을 발로 차면서 되돌아오는 삼저를 따라 밀려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이 짧은 순간에 펼쳐지는 후진과 전진의 운동.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만 우리에게 이상할 정도로 그 장면을 정확하게 다시 복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운드의 효과이다. 마치 동선을 설명하는 것만 같은 청각기호들. ( S#_45) 이어지는 쇼트는 44 쇼트의 반복이자 디테일이다. 삼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팔괘의 팔(八 )자 보행을 따라서, 엽문으로 향하는 발길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것은 정확하게 삼저가 앞서 보여준 여덟 팔(八)자 보행의 재빠른 운동이다. 마치 바닥에 나선형을 그리는 것처럼, 그래서 여덟 팔(八)자를 신발로 쓰기라도 하듯이, 미끄러지듯, 향하는 발걸음. 말 그대로 팔괘장의 활동. 이때 엽문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삼저가 취하는 제스처는 단지 팔괘장의 기본 자세를 보여주는 이상으로 마치 하나의 안무를 보는 것만 같다. ( S#_46) 슬로우 모션. 이때 사운드 효과는 삼저가 엽문의 손아귀를 빠져나올 때의 반복이다. 온 몸을 비틀면서 하나의 나사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자세. 말하자면 나선형의 운동. 이 장면은 순간적으로 삼저의 몸 절반을 보여줄 수 있는 정도만큼 물러난 다음(medium_size) 얼굴에서 발 아래로 수직으로 내려간다. (tilt_down) 이 장면은 엽문을 공격하려 든다기보다는 이 자체로 완결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이 쇼트에서 이 제스처에 대한 삼저의 어떤 나르시시즘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뭐랄까, 이건 너무 아름다워서 공격하려는 의도보다는 마치 그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왕가위는 승부에 관심이 없다. 그는 지금 차례로 중화 무술을 전시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걸 이어받을 수 있을까. ( S#_47) 이때 왕가위는 카메라를 엽문과 삼저 사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삼저는 손을 내밀어 엽문을 공격한다. 순식간에 파고 들어간 이 쇼트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다. 마치 하나의 쇼트 안에 두 개의 장면을 접합시키기라도 하는 것만 같은 이음새. 이 쇼트를 재빨리 수평으로 잡아서 엽문이 삼저의 손을 막아내는 것으로 연결하였다. ( S#_48) 이때 엽문은 삼저의 손을 프레임 바깥까지 밀어낸다. ( S#_49) 말 그대로 손과 손. 재빠른 손의 율동들. 하나는 밀고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밀쳐낸다, 두 개의 힘. 우리는 이때 두 개의 손을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이 두 개의 손은 엽문과 삼저 그 자체이며 몸 전체이다. 이 두 개의 손의 속도와 리듬, 그 활동이 만들어내는 선이야말로 순간적으로 이 장면을 시각적인 운동에서 촉각적인 운동에로 옮겨놓는다. 마치 물리적 단위를 벗어난 듯한 활동. 여기서 순식간에 밀려나는 삼저. ( S#_ 50) 삼저의 당황스러운 표정. 이때 이 쇼트는 이상하게도 엽문의 등 뒤에서 삼저를 바라보고 있다. (over_the_shoulder_shot) 동시에 엽문의 등을 통해서 삼저의 표정을 볼 때 그것은 엽문의 표정이기도 하다.(reverse_shot) 말 그대로 투 쇼트. 그때 왜 엽문의 등이 필요해진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삼저의 새로운 공격은 갑자기 바닥에 누우면서 발로 엽문을 걷어차려는 것이다. ( S#_51) 계단을 무겁게 내려오던 그 신발. 위에서 아래로. (C_1) 그때 카메라가 삼저의 공격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구도는 물론 다시 한 번 카메라가 천장으로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천장에서 내려다 본 세 번째 쇼트. 마치 이 공격을 위해서 준비해두었던 것만 같은 구도. 그때 내지른 삼저의 발을 엽문이 붙잡는다. 발과 손의 클로즈업. ( S#_52) 이 대결에서 엽문은 줄기차게 삼저의 공격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격과 방어. 나선형과 포획. 두 개의 힘. 그런 다음 한 쪽의 정지. 누워서 꼼짝 못 하게 된 삼저, ( S#_53) 사실상 여기서 대결은 끝난 것이다. 정확하게 대구라도 이루듯이 엽문이 내려다본다. ( S#_54) “삼저, 가볍게 겨루는 자리인데 건물을 부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다음 삼저의 발을 놓아준다. 손에서 빠져나간 발. 여기서부터 쇼트는 단순하게 진행된다. 별다른 기교도 없고, 다만 대사를 따라갈 뿐이다. 마치 이 진행은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제 엽문은 겨우 첫 번째 관문을 지나갔을 뿐이다. 더 힘든 상대들이 엽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S#_55) 승부는 끝났고, 패배를 인정해야 할 시간이다. 누워서 웃는 삼저. ( S#_56) 일어나면서 대답한다. ( S#_57) “하도 부숴봐서” ( S#_58) “별일 아니야” (voice_out_of_frame) 그런데 이 대사를 할 때 장면은 삼저를 소개한 부채를 든 사내의 얼굴이다. 별일이 아닌 것이 아닌 표정. 새로운 긴장. ( S#_59) 삼저 웃으면서 덧붙인다. “엽선생, 팔괘는 악랄하니 조심하시오” 엽문은 먼저 삼저를 바라보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다음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본다. ( S#_60) 이때 엽문을 찍은 45도의 위치는 삼저를 맞이하던 쇼트( S#_19)의 반복이자 시작에 대한 마무리이다. 하나의 마무리. 두 번째 대결을 준비하는 입구. 더 많은 대결. 이때 엽문을 내려다보는 금루 난간의 아가씨들. ( S#_61) 저 무심한 표정들.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곳에 와서 겨룬 것일까. 얼마나 많은 대가들이 걸어 들어와서 여기서 수평이 되어 누웠을까. 형의권의 고수 엽문은 다음 층에서 형의권의 고수를 만난다. 그런 다음 궁보산과 대결한다. 가장 높은 산. 이때 궁보산은 무술을 겨루는 대신 생각을 겨루자고 제안한다. 단지 대결만을 놓고 말한다면 이 장면이 끝났을 때 < 일대종사 >에서 엽문의 절정은 지나간 것이다. 궁이와의 대결이 있지만 그다음은 허접한 대결로 허송세월한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결정적인 장면을 피했다. 엽문과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은) 마삼의 대결. 대신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전부이다. 왕가위는 이 이야기를 인물들의 서사에 내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세월 속에서, 스러져간다. 가여운 존재들. 그 존재들이 가여운 것은 < 장군의 아들 >도 다르지 않다. 김두한과 종로패들은 으스대기는 하지만 세월 속에,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하에서, 제대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간다. 임권택도, 왕가위도, 그 안에서 디테일의 조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대신 각자의 대결의 각각의 장면들에 홀린 듯이 매혹된다. 영화 안의 벡터. 그것은 언제 활동을 시작하는가. 규칙들. 거기서 동선이 시작한다. 그 선이 만들어내는 힘과 개념. 나는 그 힘에서 영화의 이것임, 을 생각하게 된다. 장면 안의 형태들. 이때 이 장면들 속에서 나는 두 사람 사이의 친화성을 느낀다. 쇼트의 진행이라는 방법. 오로지 방법의 세계. 그건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액션 그 자체에 대한 두 사람 사이의 매혹의 공감을 발견한다. 나는 거기서 활동사진의 사유를 복구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내게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오로지 방법만을 물어보는 이유이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의 창조의 자리, 제작과정, 그 영화를 연출하는 순간을 복원시키고 싶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본 것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오는 것이다. 장면을 눈앞에 다시 가져오기. 이번에는 다시 임권택의 장면을 가져올 차례이다. (두 번째 이야기 끝, 세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1990년 108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윤삼육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 방은희 화자
우리영화의 사극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녔던 <카메라의 황소>. 고 최인현 감독은 90년 11월11일 타계했다. 영화계의 커다란 대들보 하나를 놓친 셈이 됐다. 인생 무상이 새삼 느껴지는 것은 그가 불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것. 단단한 체격에 늘 머플러를 둘러 메고 싱긋 웃음을 먹으면서 충무로를 거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필름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초부터 75년 이 회사 메이커 허가가 취소 될 때까지 영화 인생 모두를 신상옥 감독과 콤비로 일관한 그는 궁중의 복잡 미묘한 예의 범절은 물론 의상 소품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때를 영화계에서는 신상옥을 주축으로 좌최인현 우 이형표 라고 불렀을 정도. 최감독은 이때 이같은 모든 사극에 관한 것을 노트에 빼곡히 정리, 지니고 다녔는데 아마 지금은 후배이자 콤비였던 이은수 감독이 갖고 있을 것이다 임금 면전에서 물러 날 때는 뒤 돌아서지 않고 마주 한 채 뒷걸음으로 나가야하며 수행할때는 절대로 그림자를 피해 3보 뒤에서 따르되 지위에 따라 좌우로 갈라 서야 한다는 것은 그가 찾아낸 고증이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으나 요즘 가끔씩 제작되는 사극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엉터리가 자주 튀어 나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1962년 < 눈물어린 발자국 >으로 데뷔한 최감독이 활짝 꽃피운 것은 64년 본격적인 홍콩 합작으로 만든 < 달비 >. 중국 발음으로 <달기>라고 개봉한 이영화는 대히트, 대만 홍콩에서도 난리 법석을 피웠다. 당시 약1천만원 (현재 약1백억 추산)으로 신필름이 제작하고 홍콩이 배급을 맡았으며 일본 촬영기사를 데려다 만들었다. 주연은 신영균 과 당시 홍콩의 세계적 스타였던 린 다이 ,그리고 최은희 김승호 가 공연했다. 달기라하면 중국에서 가장 미녀였던 왕비 4명 중 하나로 진나라 때 인물. 반정에서 구사 일생한 왕자가 성장한 후 왕좌 복귀에 성공하지만 사랑하던 공주는 끝내 불에 산화한다는 얘기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곽 세트 등을 지어 불 태움으로써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이 작품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최감독은 < 태조 이성계 >(1965) < 태조 왕건 >(1970) < 이조상노비사 >(1974) < 홍길동 >(1976) < 집념 >(1976) < 관세음보살 >(1978) < 세종대왕 >(1978) < 소명 >(1984)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평생 만들어 낸 영화64편 중 사극만 30여 편이나 된다. 이같은 사실은 학계나 평단에서 깊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얼마전 KBS TV 드라마 < 용의 눈물 >로 공전의 히트를 한 모태이며 < 태조 왕건 >역시 같은 상황이다. 두 작품 모두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 했다는 것은 당시가 그 들의 전성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니까 TV에서 이성계를 연기했던 유동근 이나 왕건 역의 최수종 이 모두 신영균 의 남성미로 그려졌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아끼고 싶어하는 작품으로 < 李箱의 날개 >(1968)와 < 집념 >을 꼽곤 했다. 마지막 작품은 타계하기 6개월전 끝내고 9월달에 개봉한 < 친구야 친구야 >.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드라마틱 하지 않은가. 영화계에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집념>을 꼽는다. 동의보감이라는 제목으로 TV에서 방영했던 것을 원작자이자 각본도 썼던 이은성 씨가 '다시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제작하게 됐었다. 당시 최 감독은 허 준의 초상화까지 입수하여 사실적 묘사에 애를 썼으며 주인공을 맡았던 이순재 에게 이 같은 이미지를 계속 요구하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게 추억담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76년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최감독은 당시 '사람이 뜻을 세우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소신을 성취하는 인물상을 그리는 게 영화감독의 사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에 대한 해박한 현장 이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내색치 않았으며 평소 넉넉한 품새로 일관, 생활이 어려워 고양군으로 이사를 한 말년에도 낡은 차이지만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곤 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현장에서는 호랑이로 돌변, 한치의 착오도 용납치 않았다. 특히 수백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는 몹신(군중 장면)에 일가견을 가져 동료 감독들이 지원을 요청하면 흔쾌히 현장에 달려 가는 의리파이기도 했다. 80년이던가. 동남아 취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머무를 때일 게다. 느닷없이 최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서울에서는 TV만화 <캔디 캔디>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대인기인데 만화가를 만나서 영화화 권을 얻어다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그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단지 무기가 있다면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국제 저작권 연맹에 가입이 되지 않아서 거절하면 일방적으로 만들겠다고 얘기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작가 찾기에 나섰다. 물어물어 작가와 통화를 하니 여자가 아닌가. 만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는 자기이지만 판권은 출판사와 만화 영화사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결국 레스토랑 저녁 식사 대접에 근사한 외국인 전용 스탠드바에까지 가며 설득 끝에 다음날 판권을 얻어냈지만 자신을 꼭 촬영 현장에 초청해달라는 부탁이 첨부됐다. 귀국해서 보니 웬걸. 최감독과 스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만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는 우리 영화사상 드물게 흥행이 안되던 시기. 이를 어린이영화로 뚫어 보자는 기획이었으나 첫날만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뿐 파리를 날렸다. 겨우 본전 조금 넘겨 막을 내렸는데 이때 주연을 한 배우가 나중에 탤런트가 된 최선아이다. 물론 일본 작가에겐 전화로나마 사정해서 빌 수밖에. 그런데 그 작가가 오히려 위로를 하는게 아닌가. 일본에서 이미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후 그녀는 친구처럼 되었는데 90년 이후 신문사 간부가 된 이후로는 일본에 들러도 하루 이틀만에 돌아오니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도 슬하에 자식을 둔 할머니가 됐으리라.. 최감독은 1928년 10월 24일 생이니 생존했으면 75세이다. 경남 진주 태생으로 집안이 부호였다. 진주 농대를 나와 고등학교 교편 생활을 하다가 영화계에 입문한 ,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모두 고인이 된 소설가 이병주씨, 테너 섹스폰의 달인이었던 이봉조 씨와 동문이기도 하다. 사극 전문이니 그럴 법 할 것이라고 들 생각하겠지만 작가 신봉승 씨와의 우정은 너무 각별하다. 영화 평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작품이 된 < 친구야 친구야 >도 신봉승씨의 오리지널 작품이다. 출감한 운동권 학생의 사랑과 우정, 배신과 의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원 등을 다룬 이 영화는 범작 수준이었다지만 60이 넘은 세대로 고통의 세월을 산 젊은이들 얘기를 다루면서 시대를 읽고 싶어했을 것이다. 전영록 이 주연한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며 이리 뛰고 저리뛰고 했으리라. 술만 들어가면 '진주라 천리길'을 굵직한 목소리로 불러 제키던 최인현 . 한때는 흥행 성공으로 서울 삼청동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며 장안에서 몇대 되지도 않던 지프차를 타고 다니던 호기도 잇따른 제작 실패로 가정의 파국까지 불러왔으며 이 때문에 재기하려고 몸부림 쳤는지 모르겠다. 최감독의 타계가 안타까운 것은 그 동안 영화계의 의례로 상사 때마다 치러져 왔던 영화인장이나 영협 감독위원회장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소문 없이 가족장으로 묻힌 것 일게다. '허 허'하는 호걸풍의 웃음에 말술을 마다 않던 황소 같은 대인 최인현 감독도 덧없이 사라져 갔다. 김량삼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28. 10. 24일 경남 진주 출생 1950. 6 경남 진주 농과대학 졸업 1950. 9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정훈공작대장 근무 1951. 4 경남 대곡중학교 교사 근무 1990. 11. 16 향연 62세로 타계 <주요 경력> 1956. 10. 영화계 입문( 김소동 감독 극영화 < 아리랑 > 조감독) 1968. 4. < 삼현육각 >(전남일보 주최 백상영화제 수상작) 1968. 10. 최인현 프로덕션 설립 1970. 4. < 삼호 탈출 > 제10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수상 한국연극영화예술대상 작품 대상 수상 1986. 8. 공연윤리위원회 전문 심사위원 1989. 10. 은성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작품 연보> 1962 피어린 발자국 1963 쌍검무 1964 비련의 왕후 달기 / 사자성 1965 태조 이성계 / 정조성 / 한많은 대동강 1966 오복문 / 너와나 / 양반전 1967 천도화 / 총각원님 / 나그네 임금 / 풍운 삼국지 / 칠부 열녀 / 상감마마 미워요 / 두 나그네 1968 언니의 일기 / 백야 / 자주댕기 / 삼현육각 / 오월생 / 로맨스 마마 / 암굴왕 / 방랑대군 / 이상의 날개 / 순덕이 / 내 생애 단 한번만 1969 인의 여검객 / 부각하 / 동경의 왼손잡이 / 젊은이의 태양 / 춘원 이광수 / 만고강산 1970 일요일밤과 월요일 아침 / 굿바이 동경 / 엑스포 70 동경작전 / 삼호탈출 / 황금70 홍콩작전 / 동경의 무정가 / 태조 왕건 / 한없이 기다려도 / 극동의 무법자 1971 미워도 정 때문에 / 기러기 남매 / 암흑가의 공포 / 타이페이 3만리 / 고향을 묻지마라 1972 인간 낙제생 / 명동잔혹사(2화) / 어머님 용서하세요 / 아빠라 부르는 연인 1973 열궁녀 / 출발 1974 숙녀 초년생 / 이조상노비사 1975 소림사의 결투 1976 홍길동 / 집념 197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1978 관세음보살 / 세종대왕 / 안개 속의 여인 1979 영원한 유산 1981 캔디-캔디 1982 고통의 멍애를 벗으려고/ 젊음의 광장 1983 후송열차 / 사랑하는 전우야 1984 소명 / 자동차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 1985 쌍용 사람들 1987 마지막 선물 1988 우리 하나 되어 1990 친구야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