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써클
- 감독
- 데이비드 A. 프리어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제프리 콤스, 애쉴리 로렌스, 레오 롯시, 찰스 네이피어, 데이비드 워너, 조 돈 베이커, 랜스 핸릭슨, 코리나 에버슨, 레드 웨스트, 존 보이드 웨스트, 디크 앤더슨, 버치 로빈스, 에릭 스타인슨, 빌 빈트, 빌리 다모타, 크리스 윌리암스, 앤디 리, 마이클 존슨, 데이비드 가드너
힘겨운 일상을 보내는 중년 여성들의 지친 삶과 발랄하고 분방한 소녀들의 삶이 교차되는 < 써니 >를 보노라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문정희 시인의 질문에 <써니>는 웃음과 눈물겨운 전복적 답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이 품고 가는 80년대 대중음악과 춤을 타고 넘치는 에너지는 복고열풍과 더불어 관객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전작인 < 과속스캔들 >에서 가족을 둘러싼 코믹정신을 폭발시켜 낸 강형철 감독의 연출 에너지는 <써니>로 시대결합과 세대전복을 유쾌하게 달성해낸다. 제3의 인류처럼 ‘아줌마’로 불리는 여자들. 그러나 그녀들도 한때 꿈을 가졌던 소녀들이었다. 25년을 간격으로 두고 과거 소녀와 중년 여성을 오가는 서사는 우정의 힘으로 부활하는 자신의 얼굴을 가진 여성들의 새로운 인생 만들기와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나미( 유호정 )는 무덤덤한 가족관계 속에 시들어가던 전업주부이다. 그런 나미가 어머니 문병 차 들린 병원에서 고교 시절 친구 춘화( 진희경 )를 만나면서 인생이 다시 시작된다. 병실 벽에 기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를 부르며 이루어지는 이 둘의 재회가 친구 찾기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시한부 환자인 춘화가 ‘죽기 전 친구를 보고 싶다’는 유언이 미리 집행되는 셈이다. 그녀들은 그 때 그 시절, 학교를 주름잡던 불량서클 ‘7공주파 써니’였고, 춘화( 강소라 )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들어진 대장이자, 벌교에서 전학 온 나미( 심은경 )가 왕따당하기 직전 챙겨준 왕언니이기도 했으니까. 수업 중에도 쌍꺼풀 만들기에 매진했던 장미( 김민영 , 고수희 )는 영업실적에 시달리는 보험설계사. 입에 욕을 물고 살던 진희( 박진주 , 홍진희 )는 성형과 내숭 기술로 사모님으로 변신했다. 문학소녀 금옥( 남보라 , 이연경 )은 시집살이에 지친 눈치보기 주부가 되었고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복희( 김보미 , 김선경 )는 남루한 술집 여자로, 약자 중의 약자로 전락해버렸다. 냉정한 얼음공주 수지( 민효린 )는 찾아내기도 힘들지만 그녀가 냉랭했던 이유도 서사가 진행되며 점차 드러난다. 영화보기의 재미는 불량서클 소녀들의 일상과 80년대 문화풍경이다. 음악다방, 기차여행과 민주화 거리투쟁 재현이 거기에 얹혀진다. 또 다른 불량써클 ‘소녀시대’와 ‘써니’가 맞장뜨는 장면은 ‘청년 대 전경’과 몽타주되어 80년대 거리 자체를 ‘터치 바이 터치 Touch by Touch’ 음악으로 풀어낸다. 일상과 사회상의 오버랩, 음악과 이미지의 공감각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80년대 장안을 풍미한 음악들, 나미의 ‘빙글빙글’, 영화제목이기도 한 보니 엠의 ‘써니’가 폭발력을 과시하며 우정의 힘을 25년 만에 회복시킨다. 결말 씨퀀스에서 상복을 벗어 던지며 시작되는 춘화가 원했던 ‘춤추고 노래하는 연대의 힘’은 아이러니의 묘미를 선사한다. “써니, 예전 내 인생엔 비가 내렸지. 써니, 네가 미소 짓자 고통이 지워졌지. 이제 어두운 날들은 가고, 밝은 날들이 왔어.” 노랫말처럼 옛 친구와의 우정 회복은 망가진 인생, 나 아닌 누군가의 부속물로 살아가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라 감수하며 시들어가던 중년 여성들의 삶에 자기 뜻대로 살아보는 제2의 인생을 예고하는 죽음과 삶의 파티이다. 한국영화에서 매우 드물게 여성의 생동감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펼치게 된 덕인지, 진희경, 김장미 등등... 모든 배우가 멋지다. 그들의 십 대 시절 역을 맡은 소녀배우들도 멋지다! 인물의 이름들은 그 시절 가수들과 일치한다. 나미, (하)춘화, (윤)복희 등등. 마치 그녀들을 추억하며 기리는 것처럼.
“우리는 아직껏 이 땅에 영화는 있었어도 영화예술은 부재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영화부재’의 책임을 미래의 우리들 스스로에게 묻고자 한다 …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 이것은 구각을 깨는 신선한 바람, 즉 무덤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이어야 한다. 과연 이 땅에서 단 한번의 ‘누벨바그’나 ‘뉴 시네마’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영상시대’ 동인 선언문 中, 1975.7.18) ‘한국영화의 예술화운동’을 기치로 내건 ‘영상시대’는 다섯 명의 영화감독( 김호선 , 이원세 , 이장호 , 하길종 , 홍파 )과 한 명의 평론가( 변인식 )로 구성된 30대 소장 영화인들의 동인회였다. 변인식은 일찍이 ‘비평가의 자세’란 “영화제작에 영향을 끼치고 관객들의 감상수준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영화평단은 자유항인가: 비평의 모랄과 순수성’ <영화예술> 1965년 12월호) 그는 ‘단문(短文)의 인상비평’이나 ‘사이비 논객’ 이 횡행하는 기성평단의 평론을 신랄하게 비평하거나 수작으로 평가되던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 글쓰기(‘< 안개 >는 예술영화인가’, ‘< 장군의 수염 >과 영화의 본질’ 등)를 함으로써 크고 작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참여했던 ‘< 화분 > 논쟁’(‘영화적 색맹성: 영화 <화분>이 제기한 문제들’)은 당시 큰 이슈가 되었음은 물론, 한국영화비평사의 주요 논쟁을 넘어 이후 『한국논쟁사』 에 실릴 정도였다. 변인식 은 청소년기 미군부대 근처에 살면서 봤던 할리우드 영화들과 고교시절 스승의 소개로 프랑스• 이탈리아 명화들을 접한 후 영화광이 되었고, 대학시절 4•19를 경험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는 고려대 국문과 재학중 ‘영상’이라는 동인회를 조직하고 <고대신문>에 영화평을 기고하는 한편, 유현목 , 이강천 등의 감독과 이영일 같은 평론가를 초청해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변인식은 이영일이 발행했던 <영화예술>의 신인평론가 추천으로 등단후(‘영화현실과 포토제니: 이탈리안 리얼리즘과 한국영화’ 1965.6,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 1965.7) 활발한 활동을 하던중, 1968년 서울신문의 제 1회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한국 문예영화의 허점’으로 당선된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산업의 확대와 매체의 증가로 영화평론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했던 한편 비평의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영화전문잡지의 추천과 신춘문예라는 공인된 절차를 두루 거친 첫 번째 평론가였던 셈이다. 변인식은 수십년간 한국영화평단을 함께 이끈 이영일, 김종원 등과는 다소간의 데뷔시차와 이력의 차이가 있다. 이영일, 김종원이 문학에서 출발해 1960년대 이후 <영화예술>,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의 주축멤버로 오랜 파트너십을 보여왔다면, 그는 영화인생 내내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38년간을 재직해왔고, 1960년대부터 비평활동을 시작했지만 1970년대 들어 더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또한 대학내에서 영화 써클을 만들고 서구영화에 매혹되며 비평과 토론회 등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했던 씨네필 출신 평론가의 첫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인식 은 부조리한 한국영화의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글쓰기로 1972년 한국 최초의 본격영화평론집 『영화미의 반란』을 출간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한국영화가 반세기의 역사를 지났음에도 단 한번도 영화미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거나 반역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없었다는” 점을 개탄한다. 이는 전세계의 영화들이 ‘새로움’으로 물결치고 있던 1960•70년대에 최악의 현실로 치달아 가고 있던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에 대한 젊은 평론가의 가차없는 성찰이었다. 이 무렵 그는 소장파 대학교수, 평론가, 저널리스트 20명 정도로 구성된 ‘현대영화비평가그룹(1972년 12월)’을 창립하고 회장직을 맡는데, 이는 하길종 의 < 화분 >의 청룡상 심사를 둘러싸고 보수적인 기존 영화평단과 발생했던 갈등으로 인해 뜻을 같이하는 젊은 동조자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인식은 또한 1970년부터 발족된 ‘소형영화동호회(발기인: 유현목 , 하길종, 정일성 , 유영길 , 변인식, 최일수)’ 활동을 통해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신일고의 영상을 담은 8mm 교육문화영화 두 편을 각본•감독했다(1972). 소형영화동호회를 통해 배출된 영화감독으로는 배창호 , 장길수 , 신승수 감독 등이 있다. 1975년 누벨바그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상적 모델로 ‘한국영화 예술화’를 내걸었던 ‘영상시대’ 동인들의 활동은 다양한 방면(신인 연출자/연기자/스탭 선발, 관객운동, 순수영화예술동인지 발행 등)에서 ‘새로운 물결’을 갈망하며 한국의 영화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변인식 에 따르면 1975년에서 78년까지 ‘영상시대’ 기간 동안 동인감독들이 만든 작품 11편중( 하길종 < 여자를 찾습니다 >, < 한네의 승천 >, 이장호 < 그래그래 오늘은 안녕 >, < 너또한 별이 되어 >, 김호선 < 여자들만 사는 거리 > < 겨울여자 > 등) 대다수가 대중소설을 영화화했고, 그들이 지향했던 예술영화, 작가영화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변인식이 발행인이었던 계간지 <영상시대>(1977년 여름 창간, 편집위원: 김승옥 , 김화영, 안병섭 , 최인호 , 하길종) 또한 <카이에 뒤 시네마>나 <필름 컬처>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영화문화운동을 꿈꿨지만 2권 발행에 그치는 좌절을 겪었다. 1970년대 ‘영상시대’의 영화운동에 대한 영화사적 평가는 지면을 달리해 논의되어야겠지만 이들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는 당대 한국영화계가 직면했던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예술과 산업’, 그리고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의 딜레마들이 존재하고 있다. 변인식 은 왕성한 필력으로 40여년 동안 두 권의 평론집(『영화미의 반란』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과 수십 편의 논문을 쓰고, 현대영화비평가그룹 회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 ‘영상시대’ 동인활동과 잡지<영상시대> 발행, <영화평론> 발행, 한국소형영화동호회, 동서영화연구회, 대학강의, 영화제 심사위원 활동 등을 하면서 2000년 신일고등학교의 교감으로 명예 퇴임했다(홍조근정훈장 수상). 제자들에 따르면 교단에서의 변인식은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액션 배우이자 영화이야기꾼, 한 마디로 ‘영화에 미친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서구 모던 시네마와 이론들의 강렬한 세례를 받은 변인식 의 비평세계가 한국의 대중적 장르영화들을 논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다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변인식을 비롯한 ‘영상시대’ 동인들이 제기했던 ‘새로움’의 의의와 한계, ‘한국적 리얼리즘’ 전통과의 단절과 지속의 역사성은 1970년대와 이후 영화(비평)사를 구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주의적(씨네필)이고 객관적인 비평을 추구했던 그의 비평을 관류하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과 논쟁적 글쓰기, ‘영화미학’에 대한 천착 등은 주제비평과 인상비평이 주류를 이뤄온 한국영화평단에 비평정신이 살아있는 글쓰기로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 글: 이선주
가난한 독립 다큐멘터리스트에게 1월과 2월은 보릿고개다. 그나마 안정적인 수입원인 대학 강의료는 방학과 함께 사라지고, 계절 탓인지 영화 관련 아르바이트도 다소 뜸해지기 때문이다. 바닥을 드러낸 보릿고개 시기의 통장은 외풍으로 서늘하다. 그런데 2012년의 보릿고개는 서늘하다못해 다소 싸늘하다. 아무런 일감이 없는 것이다! 원인을 곰곰 따져보니 아무래도 내 위치의 변화 때문인 것 같다. 작년 < 종로의 기적 >을 개봉하며 얻게 된 ‘감독’이라는 직함 때문에 편하게 일을 맡기기엔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혹시 예전에 하던 알바거리 없냐고.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들이 한결 같다. “어휴, 감독님께 어떻게 그런 알바를 시켜요?”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일의 품격 따지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정승 같이 쓸 수 있는데, 어느새 정승 나리처럼 일을 부탁하는 것조차 부담스런 사람이 된 것인가. 그렇다고 사람들마다 붙잡고 ‘저는 꽤 저렴한 사람이랍니다’라며 광고를 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다. 나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연분홍치마의 다른 감독들도 아마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이런 와중에 연분홍치마는 용산 참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 두 개의 문 >의 극장 개봉을 결정했다. 곧바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어마어마한 지출 항목들. 통장의 잔고가 줄어들수록 빚더미와 다크 써클만 늘어간다. 늘 개탄스러워하던 영화계의 임금 체불과 외상 거래를 우리 스스로가 자행하며 한숨은 더더욱 깊어진다.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가 있으니, 이 정도면 참으로 혹독한 보릿고개가 아닐 수 없다. 이쯤되면 ‘대체 우리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러고 있나?’라는 회한이 밀려온다. 춥고 배고픈데 수중에 돈은 없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러다보니 꿈꾸게 된다. ‘내가 만든 다큐로 수익을 창출해 생계를 해결하고 차기작 제작비를 확보’하는 지당한 과정을. 그러나, 꿈은 이루어지긴 개뿔, 전설이나 신화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대체 생존과 다큐 제작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할까. 결국 안정적인 제작 예산 확보가 가장 시급할 텐데, 비빌 언덕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영화 제작 지원 정도다. 하지만 정권의 눈치를 보셔야 하는 그 분들께 무언가 기대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의 다큐멘터리라면 더더욱.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담은 이 한동안 상영되지 못했던 사건은, 정부를 향해 날을 세우는 독립영화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기회였다. 게다가 이후 새롭게 들어설 정권이 더 나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정부 지원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기는 건 로또 맞을 확률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물론 각종 영상 관련 단체와 영화제 등에서도 다양한 제작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이런 경우일수록 주최측이 요구하는 조건이 더욱 까다로워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게다가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피칭’은 멋진 그림이 필요한 주최측의 장단에 맞춰 재주만 부리다 팽 당하게 되는 야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 어디 남의 돈으로 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이겠냐만은, 참으로 구차한 삶이다. 그래서 나와 연분홍치마는 2012년의 모토를 ‘자력갱생’으로 정했다. 비록 정부 비판적인 다큐이지만, 그래서 무슨 불이익을 당할 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 두 개의 문 >의 개봉에 총력을 기울일 참이다. 개봉 과정을 통해 용산참사와 공권력에 대한 우리의 고민을 더 많은 대중과 함께 나누며,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기회를 만들어내고 싶다. 물론 이미 많은 독립 다큐인들이 앞서 걸었던 길이다. 실패담은 차고 넘친다. 예산 규모는 너무나 초라하여 출발부터 불리하다. 쓸 돈은 없으니 마케팅에는 결국 몸을 써야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력갱생,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 같다. 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자. 시도때도 없이 엄습하는 가파른 보릿고개, 이제는 수월하게 넘고픈 이 뜨거운 욕망을 승화시켜 그럴듯한 자력갱생의 사례를 만들어보고 싶다. 하지만 도박 같은 개봉, 어찌될 지 모르는 일이니 보험 삼아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 “여러분, 저는 꽤 저렴한 사람이랍니다. 무슨 일이든 일단 맡겨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