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리맨
- 감독
- 아니타 킬리
- 제작년도
- 2009
나쁜 놈들에게 개과천선은 가능한 걸까? 성악설을 따로 들먹이지 않아도 늑대, 뱀, 피라냐, 상어, 거미 등 오래 전부터 무섭고 위험한 존재로 취급 받아온 이들이 새롭게 거듭나겠다며 착한 일에 도전한다. 하지만 기니피그로부터 제안된 이 실험은 시작부터 그리 녹녹치가 않은데,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 탓에 뭔 일을 시도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숨마저 내어줄 만큼 가장 친한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 배드 가이즈 >는 변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서투른 고백이자 위로이고, 환대받지 못한 아싸들의 진솔한 우정을 그린 헌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15권까지 출간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호주의 배우 출신의 아동 작가 애런 블레이비의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영화는 크게 1권과 3권의 기둥 줄거리를 바탕으로 < 펄프 픽션 >과 <오션스 시리즈> 등의 전통적인 범죄 장르 영화들과 < 루팡 3세 >나 < 명탐정 번개 (홈즈)> 그리고 <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 같은 다양한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아 재해석되었다. 특히나 실사적인 움직임을 강조해오던 그간의 미국 전통적인 CG 애니메이션 경향에서 벗어나 만화 특유의 과장된 움직임과 가변 프레임적인 연출을 강조하는 스타일은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공유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음악을 맡은 이도 다니엘 펨버튼으로 동일하다는 것! 다니엘 펨버튼 1977년생의 다니엘 펨버튼은 현재 가장 핫한 영화음악가인 동시에,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뮤지션이다. 1994년 그의 나이 약관에도 미치지 않은 16살 때 만든 데뷔 앨범을 들은 TV연출자 폴 윌름스우스트(다큐 연출을 하다 방향을 틀어 <스트라이크 백>과 <다빈치스 데몬스> 등의 시리즈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베테랑) 눈에 띄어 픽업돼 그때부터 17년간 TV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다. 그 필모 안에는 <핍쇼>나 <헬스 키친>, <공룡 구출 대작전>,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사무소> 등 제법 우리 귀에도 익숙한 영국 프로그램들도 보인다. 그러다 2011년 비로소 경력에 비해 늦은(그러나 여전히 젊은 나이인 30대 중반에) 닉 머피 감독의 < 어웨이크닝 >으로 장편 극영화음악 데뷔를 한다. 그 후 리들리 스콧과 대니 보일, 가이 리치, 아론 소킨 등 여러 잘 나가는 감독들을 단숨에 만족시키며 영화계 주류 작곡가로 편입되었다. 그가 이처럼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명징한 멜로디 감각과 탁월한 아이디어, 재기발랄한 편곡 솜씨를 보유한 실력 덕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지한 드라마를 필두로 다큐멘터리, 범죄물, 블록버스터 액션 히어로, 시대극, 판타지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편식 없이 가리지 않고 모든 스타일의 음악을 매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길고 길었던 TV시절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배드 가이즈>에서도 이런 그의 유연한 다재다능함은 빛이 난다. 다니엘 펨버튼은 이번 애니메이션이 전통적인 하이스트 영화들에 기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 1960-70년대 사이에 제작됐던 수많은 할리우드 케이퍼 영화들이나 캅 영화들의 스코어에 경배를 바치고 있다. 헨리 맨시니의 < 핑크 팬더 >이나 <피터 건>, 퀸시 존스의 < 이탈리안 잡 >, 랄로 쉬프린의 < 블리트 >, 데이빗 사이어의 <지하의 하이젝킹(펠햄 123)>, 돈 엘리스의 <프렌치 커넥션>, 그리고 존 배리의 007시리즈 등 당대 가장 인상 깊었던 그 쿨한 재즈 사운드가 고스란히 그의 손에 의해 재현되는데, 이를 위해 휘황찬란한 브라스 섹션에 그루브한 하몬드 오르간과 펑키한 퍼즈 기타,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리드미컬한 봉고 드럼, 짜릿한 무그 신디사이저 등 그 당시 악기들을 이용했다. 이미 앞서 다니엘은 그 시절 첩보물의 리메이크인 < 맨 프롬 엉클 >과 오션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 오션스 에이트 > 그리고 진지한 누아르 < 머더리스 브루클린 >에서 재즈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실력을 마음껏 피력한 바 있기에 <배드 가이즈> 스코어의 완성도를 의심하는 건 시간낭비에 가깝다.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적재적소에 위치하는 활력 넘치는 레트로 사운드는 교활함과 긴장감, 위트와 낭만, 감동과 눈물을 동시에 아우르며 10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중 거의 내내라 할 수 있을 정도인 80여 분간 깔리며 기둥 분위기를 잡아준다. 하지만 단순한 스타일의 재현과 답습을 넘어 자신만의 색채를 입히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힙합 비트에 심포닉 사운드를 섞어 삽입곡들과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새로운 슈퍼히어로 스코어를 완성시켰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처럼 다니엘 펨버튼은 고전 하이스트 장르물 스코어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색다른 악기들이나 모티브를 도입해 기발한 재미와 흥미를 자아내게 만든다. 인도의 전통 악기 ‘반수리(대나무 플루트)’로 재즈에서 사용되는 플루트를 대체해 작전 이나 잠입 시 독특한 은밀함과 영화 중반 등장하는 크림슨 포의 신비주의를 선사한다던지, 하프와 아코디언, 치터가 뒤섞인 것 같은 음색을 들려주는 일본의 전통악기 ‘다이쇼고토(大正琴)’를 들고 와 그 특유의 서늘한 공명감으로 섬뜩한 빌런의 음모를 암시하는 등 기존 장르 스코어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실험을 펼쳐 보인다. 복잡한 사연을 지닌 입체적인 기니피그 캐릭터 마멀레이드 교수를 위해선 바흐에서 영향을 받은 피아노(대체적으로 영화에서 컨벤션화 된 악당 캐릭터들이 바흐 음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를 대입하고 있으며, 후반 들어선 의도적으로 역시 바흐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프로콜 하럼의 히트곡 “A Whiter Shade of Pale”의 하몬드 오르간 전주를 따와 반전의 전조로 써먹는 재치도 발휘한다. 시종일관 질주하는 다니엘 펨버튼의 음악은 마치 갱단의 노련한 움직임처럼 지치거나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앤서니 라모스 이기 팝과 함께 작업한 영화 <골드>의 주제가 “Gold”로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셀리스트와 함께 한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의 주제가 “Hear My Dream”으로 오스카 주제가상에 올랐던 만큼 다니엘 펨버튼의 송 라이팅 실력 또한 무시 못 하는데, 이번 <배드 가이즈>에선 흥겨움을 담당하는 두 곡 “Good Tonight”과 “Brand New Day”를 들려주고 있다. 영화 중반 스네이크가 위기에 빠지자 피라냐가 마이크를 잡고 주위 환기용으로 불렀던 “Good Tonight”는 실제 목소리를 맡은 앤서니 라모스의 출중한 노래 솜씨를 맛 볼 수 있는 곡인데, 그는 뮤지컬 <해밀턴>과 < 인 더 하이츠 >, < 트롤: 월드 투어 > 등으로 이미 검증된 바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주제가라 할 수 있는 “Brand New Day”는 영국의 소울 충만한 펑크 락 밴드 더 헤비가 소화해 그들 특유의 신명나는 그루브함과 화려한 스윙감을 선사한다. 그 외 배우이자 코미디언 롭 슈나이더의 딸로도 알려진 엘르 킹이 부른 “Feelin' Alright”도 쿨한 <배드 가이즈>만의 색채를 빛내주고 있으며, 사운드트랙 안엔 포함돼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 흐르던 줄리 런던이 부른 고전 스탠다드 팝 “Fly Me to the Moon”이나 아니타 오데이의 “Whisper Not”이 분위기를 돋아주고, 더 블랙키스의 “Howlin' for You”, 케미컬 브라더스의 “Go”, 캔트 스톱 원트 스톱의 “Stop, Drop, Roll” 등이 유쾌함을 더한다. 개봉 전 예고편에선 재밌게도 빌리 아일리시의 딱 한글자만 틀린 제목의 노래 “Bad Guy”가 사용되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에 제작되고 상영돼 제약이 많았음에도 전 세계적으로 2억 5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올린 <배드 가이즈>이기에 속편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있다. 실제로 넷플릭스에선 23년 연말을 목표로 홀리데이 스폐셜이 제작 중에 있다. 다니엘 펨버튼이 직접 참여할 진 미지수지만, 현재 애플TV+에서 <에프터파티>와 <슬로 호지스> 시리즈를, 24년 개봉 예정이었다가 무기한 밀린 대망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삼부작을 마무리 짓는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를 작업하는 등 바쁜 스케줄을 이어가고 있어 그의 주가는 더욱 폭등할 것으로 보인다. 거장이 되어갈 다니엘 펨버튼을 지켜보며 <배드 가이즈>라는 제목과 달리 썩 나쁘지 않은 비장의 OST 하나를 기억해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Track List 1. The Big Bad Wolf 2. Meet The Bad Guys 3. Let's Bounce 4. Push Pop 5. Step 3 6. Security Surprise 7. The Dolphin Heist 8. Going to Go Good 9. Turn on the Charm 10. Marmalade Prelude 11. A Heist for Good 12. The Sharing Laboratory 13. Save the Cat 14. "Good Tonight" by Anthony Ramos 15. So Long Suckers 16. The Lair of Loot 17. Loot Loops 18. Bedtime Story 19. Double Crossed 20. Tricky Fox 21. The Crimson Paw 22. Secret Hideout 23. Evil Masterplan 24. The Sad Guys 25. One Last Push Pop 26. Finish Them 27. Huff + Puff 28. Just Robbing This Place 29. Freeway Escape 30. Who Said It Was the End? 31. Redemption 32. The Old Switcheroo 33. "Feelin' Alright" by Elle King 34. "Brand New Day" by The Heavy
연말 리스트 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원래부터 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소위 ‘객관적인’ 리스트들을 짜다 보면 정작 그해에 진짜로 좋게 본 영화들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리스트에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넉넉하게 가기로 했다. 이들은 심지어 가장 재미있게 보거나 좋게 본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 기억 속에 달라붙은 영화들이고 또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들이다. 일단 < 그랜마 >는 릴리 톰린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면서 뻔뻔스러운 할머니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동스럽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는 노장의 힘을 보여주는 거의 완벽한 장르물이었다. < 무서운집 >은 심지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노장감독이 컬트 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 팔로우 >는 오래전에 바닥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던 ‘십 대 아이들 괴롭히기’ 호러의 영역에 미개척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 월드 오브 투모로우 >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올해 최고의 SF다. 60년대의 폴란드와 대화를 나누는 < 이다 >의 교령의식은 오싹한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깜찍한 퀴어 소녀의 성장물인 < 아니타의 마지막 차차차 >는 여성영화제 바깥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은 영화였고 < 나이트 크롤러 >는 대한민국에서 뉴스와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 전에 한 번은 의무시청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에 대해 말할 거 같으면... 어떻게 크레디트에 “Perfume by Je Suis Gizella”라고 박는 영화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 28일 후 >의 작가 알렉스 갈란드의 감독 데뷔작인 < 엑스 마키나 >다. 최고의 SF는 < 월드 오브 투모로우 >가 차지했고 그 뒤는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가 뒤에 바짝 붙어 있으니 올해의 SF로는 3위 정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영화이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 < 엑스 마키나 >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그 전형성이다. <엑스 마키나>는 인간형 로봇 이야기다. 굉장히 흔해빠진 설정이고 역사도 깊다. SF만 따져도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로 거슬러 갈 수 있고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도 있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드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따지고 보면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창조 신화들이 담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 엑스 마키나 >에 대한 기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척 봐도 아름다운 여자 모습을 한 로봇 이야기이니 이성애자 남성 작가의 판타지가 노골적이다. 그리고 판타지나 SF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작가의 욕망 자체이다. 이야기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욕망에 충실해 포르노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포르노의 외설성이 아니라 지루함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이야기는 지겹기 마련이다. 오히려 그 뒤에 나올 닐 블롬캠프의 < 채피 >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예측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모습을 한 여성 로봇 에이바에 대한 쾌락적인 추구가 무시할 수 없을 비중으로 존재한다. 이런 추구는 소노야 미즈노가 연기한 쿄코에겐 더욱 노골적이다. 그리고 이름이 에이바가 뭔가. 꼭 이런 여자 모양의 로봇에겐 이브에서 파생된 이름을 붙어야 하나? 하지만 갈란드는 자신의 욕망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과학적 정직성을 잃지 않는다. 이 점이 큰 기대를 모았지만 확실하게 망해버렸던 로봇 영화 < 채피 >와 < 엑스 마키나 >를 갈라놓는 부분이다. 여기서 < 채피 > 이야기를 조금 하겠다. 이 영화는 < 엑스 마키나 >의 거의 정확한 대척점에 있어서 비교용으로 거의 이상적이다. 얼핏 보면 대량생산된 투박한 경찰 로봇인 채피가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에이바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사실적인’ 외양 밑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라. 과학, 논리, 철학 중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다. < 채피 >에서 주인공 로봇은 그냥 로봇 시대의 피노키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원형적인 이야기에 채피를 맞추기 위해 그들은 뭐든지 하는데 그 과정 중엔 최소한의 고민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은 채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림은 예술이고 예술을 할 줄 아는 존재라면 영혼이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정작 채피가 그린 그림은 아이패드 그림 앱으로 사진을 가공해 프린터로 찍은 것처럼 기계적이다. 구도에서부터 붓놀림에 이르기까지 해석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를 보고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중요한 질문이지만 < 채피 >는 안 한다. 영화 내내 그렇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질문을 한다. SF 영화로서 <엑스 마키나>의 가장 큰 장점은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가 줄 부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화된 TED 강의’라고도 이죽거리기도 한다던데, 이게 그렇게 큰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그 질문과 대답이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정확하며 재미있다면 그게 문제가 되나? 내가 미리 설정해 놓은 기준점을 < 엑스 마키나 >가 넘은 순간은 에이바의 성을 건드렸을 때였다. 많은 SF가 당연시하고 넘어가지만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형 로봇은 여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남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로 인간 여자나 남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근거가 있는가? 많은 작가들이 이 부분을 건너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감정 이입하는 남자 주인공과 로봇이 섹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로봇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섹스는 할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그 질문을 한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게 영화의 핵심이다. 에이바를 만든 천재 과학자 네이든은 자신이 에이바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이바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에이바의 내면은 강제로 분석할 수 없는 블랙박스이기 때문에 그에겐 일종의 튜링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회사의 직원인 카일렙을 불러와 테스트를 시킨다. 카일렙은 에이바를 사랑하게 되고 그 로봇을 네이든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뭐든지 할 생각이다. 하지만 에이바는 어떤가? 에이바는 네이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그 감정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만약 에이바가 인간 여성의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행동할 것인가? 게으른 작가들은 ‘그냥 그렇게 프로그램했다’라고 얼버무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엑스 마키나>는 답을 갖고 있다. SF는 오래된 장르이다.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1세기가 넘었다. 과학이 매서운 속도로 발전한 20세기와 21세기를 통과하면서 1백 살의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옛날엔 당연한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었던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린 레이 브래드베리가 그린 로맨틱한 고대의 화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나사가 보낸 로봇들이 보내온 자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고 SF는 현대 과학의 논리에 맞추어 계속 전진을 해야 한다. 그 과학과 논리는 현재의 지식일 수도 있고 이전 것보다 발전된 가설일 수도 있으며 그냥 이전엔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잘못된 상식이나 관습의 수정일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과 특이점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나왔다. < 엑스 마키나 >와 < 채피 >를 빼더라도 < 빅 히어로 >와 < 그녀 > 같은 작품들이 있는데, <채피>를 제외한 모든 영화들은 다가올 인공 지능에 대한 21세기 초의 상상력을 반영한다. 물론 이 상상력의 결과물이 정확한 예측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특이점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이게 오긴 할까? 정말 인공지능은 스스로의 자아를 갖게 될까? 상관없다. SF가 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토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도시. 밤 12시가 되면 모든 게 멈추고 모두가 잠든다. 신데렐라 속 마법처럼 자정은 환상이 깨지는 시간이다. 깨어있는 건 기억을 잃고 벌거숭이로 호텔 방에서 발견된 남자와 그런 그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주겠다고 사정하는 말더듬이 박사, 그리고 창백한 안색에 검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수수께끼의 대머리 집단뿐. 그 멈춰버린 시공간에선 은밀하게 거대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잠든 도시를 동분서주하는 남자의 이름은 존 머독.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누명을 뒤집어쓴다. 존의 뒤를 집요하게 뒤쫓는 건 시니컬한 형사와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옷의 대머리 사내들. 그가 기억에 한발 한발 접근할수록 그들의 방해도 더욱 직접적이고 거칠게 다가온다. 우연히 도시가 조용히 ‘튜닝’되어지는 걸 목도한 존은 박사의 도움을 얻어 도시를 깨우고 광명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어두운 도시 알렉스 프로야스의 < 다크 시티 >는 저주받은 걸작이다. 기존의 온갖 SF 컨벤션들과 만화적 설정을 가져와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비전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재미를 선사한 결과물은 상당히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프란츠 랑의 < 메트로폴리스 >나 < M >을 떠올리게 만드는 누아르적인 스타일뿐만 아니라 오토모 카즈히로의 < 아키라 >와 같은 재패니매이션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만화적 비주얼까지 결합시킨 이 잡탕의 영화는 이미 봤지만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작품을 창출해냈다. ‘위대한 영화’의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를 그 해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선택했으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비슷한 주제와 분위기를 가진 < 매트릭스 >보다 <다크 시티>를 먼저 뽑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매트릭스>는 이 영화의 자양분 위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다크 시티>의 세트를 가져다 일부 장면을 촬영했으니 기시감이 생기는 것도, 유사점이 발견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장대한 스케일과 허를 찌르는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SF 누아르임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2,700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됐지만 흥행엔 처참히 실패하고 만다. 제목처럼 어둡고 지나치게 무거운 탓 외에 개봉한 지 2개월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극장가를 맹폭한 < 타이타닉 >이라는 거대한 빙벽 때문이었다. 스틸 어레이란 독특한 영상기법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매트릭스>와 달리 <다크 시티>의 비주얼은 초라한 예산에 걸맞게(!) 아날로그적이며 투박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를 완벽하게 커버해준 건 바로 음악, 트레버 존스의 압도적인 사운드트랙 덕택이다. 남아프리카의 오래된 영화관 맞은편에 살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영화음악이 가진 힘과 매력에 경도돼 장래희망으로 영화음악가를 지망했던 이 조숙한 소년은 영국으로 건너가 12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존 부어맨 감독에게 발탁돼 바그너와 칼 오르프의 클래식 사이에 들어갈 부분적인 스코어를 작곡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가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솜씨를 발휘한 존스는 이후 < 폭주기관차 >나 < 라스트 모히칸 >, < 클리프 행어 > 등 굵직굵직한 작품에서 가슴에 각인되는 테마들로 자신만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며 과거 바람대로 성공한 영화음악가의 길을 걷는다. < 노팅힐 >이나 < 니키와 지노 >, < 로잔나 포에버 > 등 서정적이고도 아름다운 사운드도 일품이지만, 뭐니 해도 그의 진가가 유난히 발휘되는 장르는 < 프롬 헬 >이나 < 미시시피 버닝 >, < 엔젤하트 > 등과 같은 다크한 스릴러나 < 다크 크리스탈 >, <대마법사 멀린>, <클레오파트라>, < 젠틀맨 리그 > 등과 같은 시대극/판타지 계열에서였다. 단선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사적이고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구사하되 감상적으로 빠지지 않는 절제되고 냉철한 시각은 그를 여타의 영미권 작곡가들과는 확연하게 구분 짓게 만든다. 트레버 존스 <다크 시티>는 그런 트레버 존스의 잿빛 색채감이 잔뜩 묻어나는 스코어로 여태껏 나온 그 어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육중하고 파워풀한 쾌감을 선사한다. 마치 트레일러를 잔뜩 싣고 달려오는 화물열차를 바로 코앞에서 마주친 것과 같은 압도적인 위용의 사운드인데 둔탁한 무게감을 전달하는 금관악기의 진한 쇳소리는 물론, 공(gong)과 팀파니, 스네어, 거기에 힘차게 박동하는 일렉트릭 리듬을 덧입힌 다양한 퍼커션까지 결합해 묵직한 깊이의 울림을 만들어내며 황당무계한 상상력과 만화적인 비주얼을 진중하게 눌러준다.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따로 살리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암울하게 부유하는 엠비언스와 낮디 낮은 남성성부의 샘플링과 신디 톤, 섬세하고 잔망스러운 스트링이 합류하는 몇몇 큐들을 통해 감성적이고 스산한 디스토피아의 잔재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존이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삼촌네 집을 방문했을 때 깔리는 ‘Memories of Shell Beach’나 제니퍼 코넬리가 연기한 엠마라는 캐릭터의 테마 ‘Emma’, 박사가 도시에 대한 진실을 알려줄 때 흐르는 ‘Living an Illusion’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일곱 개의 음으로 구성된, 짧지만 강렬한 상승과 하강의 기운을 담아낸 <다크 시티>의 모티브다. 묵시록적인 비장함과 존재론적 고독을 토해내듯 뿜어내는 금관악기의 거친 포효는 영화 내에서 여러 차례 변주되며 존과 이방인들이 대치된 상황에서 ‘힘’의 주도권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닝 타이틀 격으로 나온 ‘Into the City’를 제외하곤 이 테마는 그들의 대결이 펼쳐지는 액션 씬에서 주되게 흘러나오는데(‘No more Mr. Quick’이나 ‘The Wall’), 특히 후반 액션 및 결말 시퀀스 13분을 통째로 책임지는 대곡 ‘You have the Power’는 가히 사운드트랙의 백미라 말할 수 있다. 기존 모티브에서 몇 배 이상 알레그로, 크레센도된 강력한 편곡으로 스피드와 박력, 고통과 환희, 그 온갖 감정들과 두 종족 간의 운명을 건 대결을 담아낸 채 힘껏 내지르는 사운드의 위력은 한마디로 굉장하다. 그 어떤 비주얼이나 연기로 커버할 수 없는 사운드의 깊이와 크기를 간직한 이 장엄한 스코어는 영화가 가진 예산상의 한계를 음악적 상상력으로 훌륭하게 커버해냈다. 아니 오히려 그 파워가 너무 세서 초라한 영상을 압도할 정도다. 대결이 끝나고 난 뒤 곡의 후반으로 접어들며 절대자가 되어 도시를 새로 건설하는 존의 뒷모습에 덧입혀지는 오르간 사운드나 서정적인 스트링 위주의 편곡은 종교적인 후광에 숭고함과 거룩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트레버 존스의 미칠 듯한 존재감의 스코어 외 사운드트랙엔 모두 6곡의 삽입곡이 실려 있는데, 그중 3곡은 영화상에 등장하지 않는 상업적인 선택이라는 점이 많이 아쉽다. 이방인들이 주문처럼 쓰던 말을 제목으로 삼은 휴즈 홀의 ‘Sleep Now’는 짧지만 몽롱한 기운을 선사하고, 극 중 클럽 가수로 나오는 제니퍼 코넬리가 부르는 달달하고 섹시한 올드 넘버 두 곡 ‘Away’와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는 모두 아니타 켈시 버전으로 커버되어 영화의 감흥을 더한다. Track List 1. Sway - performed by Anita Kelsey 2. The Information - performed by Course of Empire 3. Just a Touch Away - performed by Echo & The Bunnymen 4. Dark - performed by Gary Numan 5. Sleep Now - performed by Hughes Hall 6.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 performed by Anita Kelsey 7. Into the City 8. No More Mr. Quick 9. Emma 10. The Strangers are Tuning 11. Memories of Shell Beach 12. The Wall 13. Living an Illusion 14. You Have the P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