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terTV]새 아이패드와 아이패드2 무게 차이 블라인드 테스트
- 제작년도
- 2012
짧은 여행의 기록 1-1: 파주행 성공한 사람 곁에는 성공한 사람이나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 모인다. 실패한 사람 곁에는 실패한 사람이나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모인다. 그리고 외톨이 곁에는 외톨이만 모인다. 구분하자면 나는 외톨이에 가깝다, 라는 말로 오한기는 [바게트 소년병]을 시작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굳이 따지자면 말이지만. 나는 지금 파주를 향하고 있다. 자유로를 타고, 피치포크 선정 90년대 최고의 노래 250곡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늘 그런 것처럼 내가 가야하는 장소가 파주가 아니라 블레인 카운티라는 가벼운 착각 속에서… (좌: T맵, 우: [GTA5] 맵) 하지만 그곳에는 샌디 해안이 없고, 칠리아드 산이 없다. 보기만 해도 팔이 아픈 것 같은 할리 데이비슨을 모는 폭주족들이 모여 사는 트레일러촌도, 깊은 산 속의 컬트 본부도, 마약을 제조하는 버려진 수퍼마켓나 최신형 기관 단총을 등에 매고 자전거를 타는 시골 힙스터들도, 모래 바람 부는 누런 황야도, 회전초도, 야생 늑대도 없다(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마지막 세 개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개쯤 더 있을 수도 있고…). 지금 나는 수상할 정도로 서로 닮은 남자들이 운영하는 집단 농장을 불태우러 가고 있지 않다. 오한기를 만나러 간다. 그러니까 외톨이가 외톨이에게, 그런데 이제 자동소총 대신 바게트빵을 곁들인… 1-2: 메타포 외톨이와 외톨이가 모이면 그들은 여전히 외톨이일까요 외톨이가 아닐까요, 만약 아니라면 그들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외톨이야+외톨이야=Daridaridara du? 내가 묻자 오한기가 말했다. 정연씨, 좋아보이시네요. 우리는 출판단지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인쇄에 쓰이는 기계들이 전시된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시간, 영원함, 이 세상과 그다음 세상, 책, 출판업자, 가능한 문제, 불가능한 문제를 두고 날이 어둑해지도록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소설이라는 것에 대해서.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사실이 아닌 문장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나의 무능과 아직도 오한기의 소설을 영화화 하지 않은 세상의 무능에 대해서… 문득 그런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오한기가 말했다. 영화 < 파주 >에서 서우가 이선균한테 이렇게 묻잖아요.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 그러자 이선균은 얼빠진 표정으로 담배를 한모금 피우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 처음엔 멋져 보여서 한 거 같고,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 나, 라고요. 나는 물었다. 도대체 그런 대사는 어떻게 외우고 있는 거예요? 언제 봤는데요? 그런 나를 오한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대꾸했다. 안 봤는데요. 정연씨, 그건 그냥 메타포에요. (상: 서우, 하: 이선균) 1-3: 총 맞은 것처럼 아직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문학동네 편집자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천변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헤르만하우스 옆길로 들어섰다. 심학산 입구쪽으로 올라가는데, 식당이며 커피숍들이 보였다. 어쩐지 엠티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식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이게 오늘의 첫 끼니라는 사실이 떠오르며 미친 듯이 배가 고파졌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당장 먹을 걸 준다면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딴딴딴 따단 따단, 딴딴딴 따단 따단, 리듬에 맞춰서, 배고픈 사람의 춤을, 밤이 깊도록. 춤을 추지 않아도 음식은 나왔고 날은 저물었다. 파스타와 피자를 먹고 카페에 갔다. 멀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였다. 창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그렇게 사라져서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원고를 쓰느라 꼬박 밤을 샜다. 이제 인스타 라이브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일은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모레는 광주에도 가야 하는데.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니지만 촬영을 시작하면 늘 긴장하게 된다. 지금도 그렇다. 담당자의 시작 신호를 못 알아듣고 몇 분 동안 멀뚱하게 카메라와 아이패드 화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만 있었다. (좌: 오한기와 금정연, 우: 장 뤽 고다르) 작가로서 본인의 10년을 되돌아본다면, 어떠세요? 출판사 분들이 쿠팡에서 주문했다는 고소한 빵 냄새가 나는 모형 바게트를 앞에 두고 내가 물었다. 저는 작가로서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건 진짜 어려운 질문 같은데, 질문을 들으면서 딱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제가 회사에 다닐 땐데, [의인법]을 냈는데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 [의인법]에 대한 이야기가 문예지에 실렸다, 문예지를 보내주겠다, 그래서 저는 어? 문예지를 보내줄 정도면 되게 좋은 이야기가 실렸겠구나. 그래서 기다렸죠. 마침내 와서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진짜 제 소설에 대한 완전한 악평. 두 분이 대담을 하셨는데 서로 주고 받으시면서 제 기억에는 되게 안 좋은 말들, 비판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총 맞은 기분? 그 기억이 자꾸 났어요. 이 질문을 들으면서. 그게 제 작가인생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슬펐다. 라이브가 끝났다. 밤의 자유로를 달려 오한기를 합정에 내려준 다음 나는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바게트 소년병]을 펼쳐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었다. 오한기는 이렇게 썼다. 희망을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고, 비공식적으로는 전 세계 백 등 안에 든다고 확신한다. 착각일까. 언제나처럼, 아마도 그렇겠지? 데뷔할 때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라는 제목의 수상 소감을 썼던 게 기억난다. 수상 소감 속에서 나는 볼링장에서 일하는 포르노 작가였고, 시상식장에서 한 원로 작가에게 수상 소감이 허구여서는 안 된다고 꾸지람을 들었다. 왜 안 될까. 글쎄. 도무지 모르겠네. 2-1: 뉴욕에 간 사나이 오늘의 일정. 일산 집에서 은평 작업실에 간다, 다시 일산으로 돌아와 나윤이와 장모님을 태우고 안산에 간다, 안산에 차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학로로 간다, 대학로에서 일산으로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대학로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윤이 데리고 소아과 다녀와서 작업실로 운전해서 가는데 정지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이 그날이라 이것저것 이야기도 할겸 미안하고 고마워서 전화했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됐고 뉴욕은 어떻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지돈이 대답했다. 여러분이 없는 뉴욕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여기 사람들은 진짜 말이 안 통한다고, 물론 그건 거의 전적으로 제 잘못이겠지만 너무 안 통해… 근데 지돈씨 지금 뒤로 들리는 이게 뉴욕의 소음인가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정지돈이 대답했다. 그렇죠, 들리나요? 뉴욕의 소리가. 근데 지금 길거리는 아니고 카페에 있는데 여기가 무슨 카페냐면 밥 딜런이 단골인 완전 유서 깊은 카페로 여기에 또 누가 단골인줄 알아요? (이하 생략)(이하 생략)(이하 생략)… 나는 지금까지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런저런 영화를 통해 보았고, 음악을 통해 들었으며, 책을 통해 읽었다. 그래서 종종(실은 자주) 뉴욕이 어릴 때 떠나온 옛 고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끔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우탱 클랜의 [Enter the Wu-Tang(36 Chambers)] 앨범을 들으며 살인적인 주거비용 때문에 직주근접을 이루지 못하고 밤의 고속도로를 달려 뉴욕의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뉴저지 사람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but <I’m not there>) 2-2: In Between Dyas 안산에 도착하니 3시 15분이었다. 금요일이라서 그런가? 낮인데도 차가 제법 막혔다. 대학로까지는 딱 두 시간이 걸린다고 나왔다. 아슬아슬했다. 77번 버스 타고 초지역에 갔다. 4호선을 타고 지상구간을 지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도시들, 이미지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음악도 듣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문득 [나의 해방일기] 구씨 생각이 났다.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 건강은 좀 어떤지, 염미정이랑은 잘 만나고 있는지… 언젠가 정지돈은 여행이 좋지만 공항에 가고, 비행기를 타고, 환승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서 여행까지 싫어질 때가 많다고 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아침부터 적지 않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지만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나는 그게 전혀 싫지 않다. 정확히 그 반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진실은 이렇다. 나는 그냥 자동차에 앉은 채로 한 장소를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 행복한 순간 은 오직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뿐이다. 나는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만 행복하고, 도착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된다. 어디에 도착하든지 상관없이, 도착하는 순간 나는 불행하다.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장소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오직 떠나 온 장소와 도달할 장소 사이에 있을 때만이 행복한 인간에 속한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이라도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고 [GTA4]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그냥 택시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리버티시티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리버티 시티에서 택시 타기) 2-3: 치질에 대해서 (ㄱ) <스위밍 풀>에서 샬럿 램플링이 했던 말 기억해요? 편집장이 20년 전에 자기를 세뇌시켰던 말이라면서 이렇게 말하잖아요. 상은 치질 같은 거라고, 모든 작가들이 언젠가는 받게 된다고요. 지돈씨, 네 번째 치질을 축하합니다.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해요? 서울국제도서전에서였잖아요. 지돈씨는 출판사 부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저는 다른 친구와 같이 도서전을 구경하고 있었죠. 그 친구는 지돈씨랑 아는 사이였고요. 아, 네,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녕하세요 인사하던 지돈씨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이 새낀 또 뭐야? 같은 눈빛이었는데. 그날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다시 각자의 일로 돌아갔죠.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요. 제가 지돈씨를 두 번째로 본 건 문지 신인상 시상식 자리였습니다. 예의 친구가 지돈씨에게 초대를 받았다며 저를 불렀는데, 시상식장에 조금 늦게 도착해서 인사는 하지 못했어요. 그때 저는 화정동에 있던 영화 창작공간 시나리오작가존에 입주해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날이 자리를 빼야 하는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가방 가득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지돈씨가 상을 받는 모습을 보고, 시상식이 끝나기 전에 친구와 둘이 그곳을 빠져나왔죠. 그날 지돈씨가 수상 소감을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멋진 재킷을 입고 단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죠. 준비해온 소감이 있어서 그걸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멋진 재킷의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물론 지돈씨는 본인의 목소리는 원래 떨린다고 말하겠지만요), 아주 긴 수상 소감을. 저는 지금 지돈씨가 제게 선물한 재킷을 입고 있습니다. 안주머니에는 지돈씨가 쓴 수상 소감도 들어 있고요. A4 6장이면 짧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오늘은 지돈씨의 대리 수상을 하는 자리인만큼,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지돈의 시상식을 최대한 재현하는 것이 오늘 저의 목표입니다. 잘할 수 있을까요? 굳이 잘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벌써 다음 역이 혜화네요.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겠어요. 곧 다시 연락할게요. 안녕! (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서 베른하르트가 했던 말 기억해요? 시상식이란, 상이 주는 돈만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역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이런 시청과 강당 안에서 남들이 내게 똥물을 뿌리도록 놓아두었다. 상이란 한 사람에게 똥물을 뿌리는 행위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남들이 내 머리 위에 똥물을 뿌리도록 허용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상금이 지불되니까. 지돈씨, 오늘 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위트 앤 시니컬 2층이었어요. 그 안에서 남들이 내게 똥물을 뿌리도록 놓아두었죠. 심지어 상금도 없이… 지돈씨,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죠? 맹세컨대 시상식이 이런 건줄 알았다면 저는 아무리 지돈씨의 부탁이라도 결코 대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 [더 보기] (좌:정지돈, 우: 신해욱) (다음 회에 계속)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그래서 우리는 유튜브 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20년 5월에는 정지돈의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출간 기념 라이브 북토크를 했고(촬영하던 아이패드 배터리가 중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강제 종료됐다), 2021년 5월에는 오한기의 『인간만세』 출간 기념으로 셋이서 라이브 북토크를 했다(오한기가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줌을 통해 진행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라이브 경험은 더 많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라이브냐고, 너무 민망하다고, 식은땀 흘리며 새하얘진 머리로 아무 말이나 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이제 멀쩡한 정신으로 차분하게 아무 말이나 한다). 그렇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정말로… (하나, 둘, 셋-) (심호흡) 1. 23 아이덴티티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영한사! 지금부터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신년 특집 유튜브 라이브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K정연이고요, 제 옆에는- -안녕하세요 JD입니다. -처음 연재 제안 받고 서교동 카페에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도대체 뭘 써야 하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어요. 신년인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근황부터 좀. -네, 저는 요즘 누워 있는데요. 누워서 책도 보고 누워서 소설도 쓰고 밥도 누워서 먹고 지금도 사실 누워 있어요. -세상에, 지금 라이브 스트리밍 중이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독자들을 기만하시는 건가요? How dare? -어차피 안 보이잖아…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이게 뭐야 진짜. 그러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나는 유튜브 채널까지 만들었다. 이름은 레코드 디스코드(검색해도 안 나옴), 오디오 비주얼 전문(일단은) 채널이다. 계획은 이랬다. 영자원에 미리 양해를 구해서 라이브 시작과 동시에 유튜브가 임베드 된 연재 페이지를 올린다, 스페셜 게스트들과 함께 2시간 남짓? 지난 10화 동안의 연재를 돌아보고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남은 11화 동안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는 AI 노트 어플을 통해 자동으로 푼 녹취를 연재 페이지에 추가한다, 클립 일부를 NFT로 판매해서 에세이 필름 제작비를 확보하고 남는 돈은 사회에 환원한다… 다시 봐도 완벽한 계획이다. 단 하나, 유튜브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려면 구독자가 1000명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금 구독자가 몇 명이죠? -사실 좀 아까워요. 딱 23명이… -23명이 모자라다고요? -딱 23명이라고요. -그게 뭐가 아까워요? -그럼 안 아까워요? -?? 2. 그는 사막에 서서 인생의 순간들을 세고 있다 1954년 12월 10일 요나스 메카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동생 아돌파스 메카스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다른 백수들과 함께 전설적인(그때는 아니었지만) 영화 잡지 [필름 컬쳐]를 창간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돈이라고는 고작 120달러가 전부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돈은 700달러. 메카스는 심플한 해결책을 떠올린다. 편집위원들에게 100달러씩 갹출하는 방법이었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전국민에게 100원씩 받아서 놀고먹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지는 남미 여행을 준비하느라 빈털터리 신세였다. 루이스는 잡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줄 수 있다고 했다(“돈만 빼고”). 메카스 형제는 원래 돈이 없었다. 고든은 돈이 있다, 하지만 돈을 낼 수는 없다, 그건 신념의 문제다, 라고 말했다. 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 가수와 동명이인이자 훗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토마스 에이킨스, 미국 영화의 기원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될 고든 헨드릭스가 메카스를 쏘아붙였다. 왜 돈도 없으면서 잡지를 시작한 거야? 최소한 3호나 4호 정도는 낼 돈은 쥐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만약 우리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면 [필름 컬쳐]를 시작하기 위해 22세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메카스는 말했다. 세상에는 돈도 있고 사업 수완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돈도 없고 사업 수완도 없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신은 잔인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메카스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법원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함. 인쇄비를 주지 않았다며 인쇄소에서 우리를 고소했다. 783달러 91센트를 갚아야 한다, 일주일 안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예요. -돈도 없고 구독자도 없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요? -신은 잔인하다고요. 3. 볼륨을 높여라! 최근 나는 오디오와 엘피에 빠져 8개월 할부(그 이상은 무이자가 안 됨)로 너무 많은 것을 샀다. 최소한 3/4분기까지는 뭘 사기는커녕 마리모처럼 꼼짝없이(움직이면 돈이니까) 누워 지내야 할 판이다. 마감은 늘 밀려 있고 시간은 부족하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23명이다(아마 다 아는 사람이지 싶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의욕이 넘치고 동시에 홀가분한 마음이기도 하다.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인 42(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참고)살이 되어서 그런가? 마치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장편소설의 초고를 끝낸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기분이다. 1952년 5월 14일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챈들러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것을 내가 원하던 대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물론 나는 챈들러가 아니다. 일기나 트윗, 심지어 메모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쓰지는 못한다. 영상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영상을 다룰 줄도 모르고 다루는 법을 배울 여유도 없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이중의 우회로가 마련되어 있다. 1)이건 글이 아니라 유튜브 라이브임 2)유튜브 라이브지만 글을 통해서 송출되는 라이브임 말하자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일종의 회색지대가 있고, 그곳에서 나는 중력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굴 준비가 되어 있다. 개연성과 물리법칙을 가볍게 무시한 채 라이브 스트리밍 도중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하기도 하고(이렇게), 중간중간 의미없고 지루한 부분을 빠르게 건너뛰며 플래시 포워드를 하기도 할 것이다(저렇게). 서두르자. 어쨌거나 밤은 짧을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4. 비카인드 리와인드 -21세기 한국 영화가 < 박하사탕 >과 함께 시작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2000년 1월 1일이 딱 되자마자 개봉했대요. 자정에, 특별 이벤트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나 다시 돌아갈래! 하는 절규와 함께 시작한 셈이죠. How ironic? -2000년 1월이면 20세기잖아요. 21세기는 2001년부터고요. -…넷플릭스에 있길래 다시 봤는데 저희가 그동안 연재를 통해 이야기했던 한국 영화의 특질들, 그러니까 목욕탕이니 노래방이니 화면을 가득 채운 K-얼굴의 스펙터클 같은 것들이 전부 나오더라고요. 종합선물세트처럼요. 정말이지 깜짝 놀랐지 뭐예요. 우리가 더듬더듬 어떻게든 길을 찾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버렸고요, 하핫. -저기요? -그럼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창동 감독은, 그 전직 문화부장관은, 아니 미래의 문화부장관은 과연 <박하사탕>을 통해 어디로 돌아가고자 했던 걸까요? -K정연? 제 말 안 들려요? - 설경구 가 기차 선로에 서서 문제의 대사를 외쳤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설경구와 충돌한 기차는 뒤로 가기 시작하고요. 1994년 여름으로, 1987년 봄으로, 1984년 가을로, 1980년 5월로, 1979년 가을로, 그리고… -야. 물론 <박하사탕>은 회귀물이다. 그리고 이창동은 21세기 한국 대중서사의 우세종이 된 웹툰과 웹소설의 트렌드를 선취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의 외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재구성한 ‘60년생 김영호’(아마도 그의 생일은 4월 19일일 것이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창동이 [82년생 김지영]의 성취를 선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창동의 영화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떠밀리다가 흐름 그 자체가 되는 문제적-남성-개인의 픽션을 보여준다면, 조남주의 소설은 거대서사 속에서 매번 남자주인공의 아내(김여진)로, 정부(서정)로, 작부(고서희)로, 첫사랑(문소리)으로 주변화되고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삶-이야기들을 통계와 기사를 재료로 픽션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주 가까스로(소설이 지영을 진료한 남의사의 진술을 통해 성립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근대적 양식의 본질이다). 둘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20년의 시간을 회귀해 스무살의 천변으로 돌아간 김영호는 첫사랑 순임을 다시-처음 만난다. 손으로 뷰파인더를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나중에 사진을 찍고 싶다고, 사진기를 메고서 이런 이름 없는 꽃들을 찍고 다니고 싶다던 영호는 순임에게 말한다. -이상해요. 여기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옛날에 한 번 와본 데 같아요. 저 철교랑 강이랑 다 낯익어요.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 -정말 꿈이었을까요? -영호 씨, 그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그 꿈은 좋은 꿈이 아니고 악몽이고 그 속에서 영호는 스스로 다른 이들이 꾸는 악몽의 주재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는 손뼉을 치며 ‘나 어떡해’ 노래를 부르다가도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돌바닥에 누워 철교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혹은,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지만 그 꿈에서 깰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역사의 열차를 뒤로 가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궤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따라서 이건 회귀물이라기보다는 루프물이다(“나 ‘다시’ 돌아갈래!”). 정해진 루트를 반복해서 달리는 열차의 운동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만약 충분히 많이 되돌린다면 어떨까? 20년이 아니라 아예 100년 쯤을 되돌린다면? 처음으로,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가 도착하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규모의 전쟁이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크툴루의 부름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으며 원한다면 누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이름 없는 꽃을 찍고 서정시를 쓸 수 있었던 시대로. 그땐 어쩌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더 길고 다채로운 꿈이라도. 그리하여 영호(와)의 악몽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수 있도록. 물론 이것은 비약이다. 왜 아니겠는가? -차라리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박하사탕>의 회귀(루프)는 가리봉 봉우회에서 야유회를 갔던 천변에서 시작하고 또 끝나지만, 21세기 한국 영화는 설경구의 외침과 함께 과거(트라우마적)-현재(망가진)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대과거(기원)로의 동반 회귀를 감행했다고요. -요즘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에요? -그곳에서 한국 영화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현실이 아직-도래하지-않은-척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 영화는 ‘정치적인 것’을 생산해내기를 멈추고, ‘정치’를 서사 내부에 가둔 채 극의 논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멸되고 해소될 수 있는 스펙터클을 더 잘 만드는well-made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마크 피셔를 따라 말하자면 21세기 첫 20년 동안 한국 영화의 장르는 단 하나,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입니다! -그만!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강우석의 < 실미도 >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물론 그 영화는 웰메이드가 아니지만요. 거기서 설경구는 1971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비겁한 변명입니다… 5. 노 홈 무비 2001년 1월 1일 <박하사탕>과 함께 시작한 21세기 한국 영화의 첫 20년은 2019년 12월 26일 지각 개봉한 허진호 의 < 천문: 하늘에 묻는다 >와 함께 끝난다.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7월 24일에 개봉한 송강호 박해일 주연의 < 나랏말싸미 >와 함께 끝났다고 해도 좋다. 둘 다 세종대왕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무척 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진정한 끝은 2019년 12월 31일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문 기사와 함께 왔다(뉴시스, “中 우한서 원인불명 폐렴 환자 집단 발병...당국 긴장”). 돌아보면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는 대규모 물량 공세와 와이드릴리즈를 통해 누가 천만이라는 깃발을 가져갈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극장전(劇場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충무로의 토착자본이 CJ나 롯데 같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재편된 21세기 한국 영화가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어쩌면 스튜디오 제작 체계가 확립되던 무렵의 헐리우드,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절의 헐리우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더는 불가능해진 지금 한국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덩달아 내 인생도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들 그렇듯 나 역시 종종 새로운 인생을 꿈꾸긴 했다. 회귀나 빙의나 이세계 같은 황당무계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삶은 아니었다. 한동안 내가 그렸던 미래는… 우리 가족이 살 수도 있었을 그것은… 솔직히 나는 <나랏말싸미>가 천만 영화가 될 줄 알았다… 6. 내 차 봤냐? -요즘에도 극장 자주 가세요? -요즘에도 극장 안 가세요? -작년에는 한 번 갔던 것 같아요. 같이 갔잖아요, < 라스트 듀얼 > GV하러. 아 GV 전에 미리 보느라 시사회도 갔었으니까 두 번이죠. 아내가 시간 나면 지돈씨랑 같이 영화나 보라고 유효기간이 12월 31일까지인 라이카 시네마 초대권 두 장 줬는데 결국 그건 못 갔네요. 아쉬워라. -정말…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그래도 올해는 벌써 한 번 다녀왔다. 3시간짜리 영화였으니 1.5번이라고 해야 하나? 맞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 드라이브 마이 카 > 이야기다. 타임라인에 쏟아지는 트네필들의 기립박수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영화는 재밌었다. 중간중간 지루할 법도 한데 3시간짜리 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2시간 26분 정도로 느껴졌달까? 물론 엉덩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욱신욱신 쑤시는 꼬리뼈와 함께 도서관에 갔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 앉아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새삼 느낀 하루키의 인기 비결: 그건 그가 통속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제로 콜라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보다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결정적인 ‘X’를 제거한 채 그것에 조금 미달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다르다. 내 생각에, 그건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이 통속성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인생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생이 통속성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략…) (…중략…) 다시 말해보자. 가후쿠에게는 맹점이 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발견된 맹점은 아내가 죽은 후 더 커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것이 커지지 않은 이유는 가후쿠가 때마다 안약을 넣기 때문이다. 즉, 가후쿠가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보려하지 않는가? 그건 바로 통속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통속성 자체가 바로 맹점이다. 통속성이란 어떤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인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주인공의 녹내장은 나은 건가요? -의사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되면 완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저도 재밌고 잘 찍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몇몇 장면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특히 마지막 눈밭에서 연설하는 부분. 보면서 진짜 와 저래도 돼? Really? -엄청 뻔뻔하죠. 저도 그 부분 보면서 좀 그랬는데,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아마 그 부분까지 좋아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다만 뭐랄까,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더 좋아할 수는 있겠죠. 어떤 결정적인 작은 흠이 전체를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고, 나아가 옹호해주고 싶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러니 우리도 좋은 이야기만 하죠. -저는 운전하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담배 피우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어요. 원래 이렇게 잘생겼나? 얼굴을 좀 고쳤나? -잠깐, 왜 우리가 <드라이브 마이 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거죠? 지금? 한국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에도 모자랄 판에. 7.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런데 한국 영화가 도대체 뭘까요? 이제 와서 새삼 묻는 것도 우습지만, 연재가 지속될수록 한국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언젠가 이승훈 시인(하늘에서 평안하시기를)은 시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한국 영화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 필요도 없겠죠.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이유도요. -한국 영화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내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 왜 갑자기 반말…? -정신 차리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격식이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틱톡 틱톡!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한국 배우들이 셋이나 출연하고 한국말도 자주 나오죠. 한국인 스텝들도 여럿 참여했고요. 에필로그 같은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부산이기도 한데요, 그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국 영화일까요 아닐까요? A)한국 영화라면 그 이유는? B)한국 영화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갑자기 그런… -그만! 대답하지 마세요.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까!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국 영화냐 한국 영화가 아니냐가 아니에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가 문제인 거죠. -받아들인다고요? -아카데미 위원회가 21세기의 새로운 20년을 맞아 < 기생충 >을 미국 영화로 받아들인 것처럼요. -도대체 누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건데요? 무슨 자격으로요? -그건… 그때 갑자기 화면 멈추고, 멈춘 화면 위에 빨간 자막이 뜬다. (자막) “K-씨네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K-inephile)” (To be continued…)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연말 리스트 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원래부터 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소위 ‘객관적인’ 리스트들을 짜다 보면 정작 그해에 진짜로 좋게 본 영화들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리스트에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넉넉하게 가기로 했다. 이들은 심지어 가장 재미있게 보거나 좋게 본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 기억 속에 달라붙은 영화들이고 또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들이다. 일단 < 그랜마 >는 릴리 톰린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면서 뻔뻔스러운 할머니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동스럽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는 노장의 힘을 보여주는 거의 완벽한 장르물이었다. < 무서운집 >은 심지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노장감독이 컬트 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 팔로우 >는 오래전에 바닥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던 ‘십 대 아이들 괴롭히기’ 호러의 영역에 미개척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 월드 오브 투모로우 >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올해 최고의 SF다. 60년대의 폴란드와 대화를 나누는 < 이다 >의 교령의식은 오싹한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깜찍한 퀴어 소녀의 성장물인 < 아니타의 마지막 차차차 >는 여성영화제 바깥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은 영화였고 < 나이트 크롤러 >는 대한민국에서 뉴스와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 전에 한 번은 의무시청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 더 듀크 오브 버건디 >에 대해 말할 거 같으면... 어떻게 크레디트에 “Perfume by Je Suis Gizella”라고 박는 영화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 28일 후 >의 작가 알렉스 갈란드의 감독 데뷔작인 < 엑스 마키나 >다. 최고의 SF는 < 월드 오브 투모로우 >가 차지했고 그 뒤는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가 뒤에 바짝 붙어 있으니 올해의 SF로는 3위 정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영화이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 < 엑스 마키나 >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그 전형성이다. <엑스 마키나>는 인간형 로봇 이야기다. 굉장히 흔해빠진 설정이고 역사도 깊다. SF만 따져도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로 거슬러 갈 수 있고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도 있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드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따지고 보면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창조 신화들이 담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 엑스 마키나 >에 대한 기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척 봐도 아름다운 여자 모습을 한 로봇 이야기이니 이성애자 남성 작가의 판타지가 노골적이다. 그리고 판타지나 SF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작가의 욕망 자체이다. 이야기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욕망에 충실해 포르노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포르노의 외설성이 아니라 지루함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이야기는 지겹기 마련이다. 오히려 그 뒤에 나올 닐 블롬캠프의 < 채피 >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예측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모습을 한 여성 로봇 에이바에 대한 쾌락적인 추구가 무시할 수 없을 비중으로 존재한다. 이런 추구는 소노야 미즈노가 연기한 쿄코에겐 더욱 노골적이다. 그리고 이름이 에이바가 뭔가. 꼭 이런 여자 모양의 로봇에겐 이브에서 파생된 이름을 붙어야 하나? 하지만 갈란드는 자신의 욕망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과학적 정직성을 잃지 않는다. 이 점이 큰 기대를 모았지만 확실하게 망해버렸던 로봇 영화 < 채피 >와 < 엑스 마키나 >를 갈라놓는 부분이다. 여기서 < 채피 > 이야기를 조금 하겠다. 이 영화는 < 엑스 마키나 >의 거의 정확한 대척점에 있어서 비교용으로 거의 이상적이다. 얼핏 보면 대량생산된 투박한 경찰 로봇인 채피가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에이바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사실적인’ 외양 밑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라. 과학, 논리, 철학 중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다. < 채피 >에서 주인공 로봇은 그냥 로봇 시대의 피노키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원형적인 이야기에 채피를 맞추기 위해 그들은 뭐든지 하는데 그 과정 중엔 최소한의 고민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은 채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림은 예술이고 예술을 할 줄 아는 존재라면 영혼이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정작 채피가 그린 그림은 아이패드 그림 앱으로 사진을 가공해 프린터로 찍은 것처럼 기계적이다. 구도에서부터 붓놀림에 이르기까지 해석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를 보고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중요한 질문이지만 < 채피 >는 안 한다. 영화 내내 그렇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질문을 한다. SF 영화로서 <엑스 마키나>의 가장 큰 장점은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가 줄 부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화된 TED 강의’라고도 이죽거리기도 한다던데, 이게 그렇게 큰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그 질문과 대답이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정확하며 재미있다면 그게 문제가 되나? 내가 미리 설정해 놓은 기준점을 < 엑스 마키나 >가 넘은 순간은 에이바의 성을 건드렸을 때였다. 많은 SF가 당연시하고 넘어가지만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형 로봇은 여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남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로 인간 여자나 남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근거가 있는가? 많은 작가들이 이 부분을 건너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감정 이입하는 남자 주인공과 로봇이 섹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로봇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섹스는 할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 엑스 마키나 >는 그 질문을 한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게 영화의 핵심이다. 에이바를 만든 천재 과학자 네이든은 자신이 에이바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이바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에이바의 내면은 강제로 분석할 수 없는 블랙박스이기 때문에 그에겐 일종의 튜링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회사의 직원인 카일렙을 불러와 테스트를 시킨다. 카일렙은 에이바를 사랑하게 되고 그 로봇을 네이든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뭐든지 할 생각이다. 하지만 에이바는 어떤가? 에이바는 네이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그 감정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만약 에이바가 인간 여성의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행동할 것인가? 게으른 작가들은 ‘그냥 그렇게 프로그램했다’라고 얼버무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엑스 마키나>는 답을 갖고 있다. SF는 오래된 장르이다.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1세기가 넘었다. 과학이 매서운 속도로 발전한 20세기와 21세기를 통과하면서 1백 살의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옛날엔 당연한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었던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린 레이 브래드베리가 그린 로맨틱한 고대의 화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나사가 보낸 로봇들이 보내온 자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고 SF는 현대 과학의 논리에 맞추어 계속 전진을 해야 한다. 그 과학과 논리는 현재의 지식일 수도 있고 이전 것보다 발전된 가설일 수도 있으며 그냥 이전엔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잘못된 상식이나 관습의 수정일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과 특이점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나왔다. < 엑스 마키나 >와 < 채피 >를 빼더라도 < 빅 히어로 >와 < 그녀 > 같은 작품들이 있는데, <채피>를 제외한 모든 영화들은 다가올 인공 지능에 대한 21세기 초의 상상력을 반영한다. 물론 이 상상력의 결과물이 정확한 예측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특이점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이게 오긴 할까? 정말 인공지능은 스스로의 자아를 갖게 될까? 상관없다. SF가 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토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