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딱마을 통통아저씨
- 감독
- 세러 볼
- 제작년도
- 1999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 - < 바보사냥 >(김기영, 1984) 중 토끼를 부러워하는 세 남녀가 토끼섬을 찾아 떠나고 있다. 이게 웬 깜찍한 발상인가 싶은데 실상은 꽤 심오하다. 세 주인공 중 두 남자 강식( 배규빈 )과 홍익( 김병학 )은 정신병동에서 이제 막 탈출한 사람들이고, 한 여자 석호( 엄심정 ) 역시 만만찮게 특이하여 통상적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인간이다. 여하튼 세 사람이 왜 토끼섬을 찾느냐 하면 그곳이 이들의 이상적인 대안 세계인 탓이다. 강식은 공해 공포증으로 인해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완연한 원시의 자연 사회를 원한다. 그 방법이라 하니 무인도에 벌과 토끼만 풀어 놓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생태계를 자생시킨단 것이다. 사회에 살면서 자살 강박에 시달리던 홍익은 강식을 따라 토끼섬을 쫓고, 탄광 마을에서 아버지를 잃은 석호도 둘을 따라나선다. 이 괴기한 여정과 인물들의 특이함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영화평론가란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기자로서 영화평론가란 분들을 자주 만난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 중에 영화평론가들과 가장 자주 이야기하고 만나는 직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비평, 안녕하십니까’에 연재를 청탁받았나 싶기도 하다. 청탁을 덥석 물어버리고 “영화비평가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 의도를 들은 뒤엔 꽤 놀라버렸다. 지난해 12월 무렵인가에 영화평론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본 적 있는 탓이다. 평소 자주 만나는 영화평론가께 이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얘기하자마자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며 아주 작은 반발을 듣긴 했으나 지금도 그 꿈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일상이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하다거나 그들에게 기막힌 사연이 있어 보여서는 아니다. 자고로 영화는 재밌어야 하는데 그들의 일상을 찍는다면 분명히 재밌는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단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들이라 하여 모두가 항시 재밌는 사람이라는 등 완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진 않다. 모든 편의점 점주님이 똑같은 사람은 아니듯 모든 영화평론가를 하나로 묶기는 다소 어렵다. 굳이 공통점을 도출해 보자면 대개 자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정도일까. 그들이 <바보사냥>의 강식처럼 극심한 공해 공포증에 시달려서는 아닐 것이고,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박예지 , 이광호 평론가가 먼저 밝혔듯 다소간의 현실적인 생활상에 결부한 문제일 순 있겠다. 또 굳이 찾아보자면 수상할 정도로 카톡 답장이 느리고 전화를 안 받는단 정도일까. 특히 원고 마감에 관한 연락이라면 더욱더···. 또 영화평론가들은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에 꽤 강고한 편이다. 겉으론 조용조용, 다소 유순해 보이며 실제로 아주 친절하신 평론가조차도 맘속의 칼을 갈아 글 쓸 때가 많다. 놀랄 때가 잦다. 이 강고함에서 평론가 개인 간의 지극한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진정 재밌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치킨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칠 때 평론가 A는 절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양배추샐러드만 우걱우걱 먹고 평론가 B는 무조건 바삭한 게 좋다며 치킨의 껍질만 뜯어 먹는다. 당황한 영화기자 한 명은 결국 닭의 맨살만 먹게 된다. 눈치를 보던 B가 “기자님 이거 맛있으니까 드셔보세요”라며 치킨 껍질을 주섬주섬 건네준다. 그래서 잘 받아먹고 맛있다고 대답하면 막상 상대가 실망해 버리는, 그런 신묘한 일을 종종 겪어본 적이 있다.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니.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퍽 과장한 우화이지만 이 우의의 골자야말로 영화평론가란 업의 중요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왼쪽부터 강식(배규빈), 석호(엄심정), 홍익(김병학) 1970~80년대를 거쳐온 유명 시네필 한 분(평론가 C)의 주위로 젊은 영화평론가 몇몇이 모인 자리에 있던 적이 있다. C 선생님은 영화평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고한 ‘베팅’임을 역설하셨다.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확고히 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틀렸다면 판돈을 모두 잃을 결사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한번 닭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면 아무리 입에 집어넣어도 안 먹어야 한다. 살면서 처음 듣는 의견이 아닌 데다가, 독립 영화잡지를 출판했을 때 영화 저널리즘의 본질은 비판과 발굴 두 개뿐이라고 말하고 다닌 전적도 있기에 아주 신선한 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땐 감상이 남달랐다. 원래 알고도 안 하는 것이 가장 나쁜 법이다. 혼자 반성하던 때와 직접 혼났을 때의 차이가 극명했고, 이 ‘베팅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속으로 남몰래 타진해 보기도 했다. 이 가능성의 타진이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듯싶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은 팟캐스트 ‘ 조용한 생활 ’을 통해 말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의 완성도에 주목하는 시네마의 시대는 지났고,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해석 과정이 가장 중요”해졌단 것이다. 강덕구 평론가를 필두로 모인 팟캐스트 ‘ 회랑 ’에서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는 어떤 영화나 예술을 대하는 원본성의 경험이 자기 자신에게만 남아있다. 내가 느낀 경험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모든 비평가의 글은 점차 에세이로 변할 것”이란 맥락이다. 요컨대 이광호 평론가의 말처럼 “취향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 취향을 글과 이론으로 견고하게 정제해 특정 영화를 정전으로 수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 시대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한계를 거꾸로 매달아 바라볼 수도 있겠다. 영화평론가들의 자아란 C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전히, 심지어 더욱더 비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남을 설득하기가 아주 무용한 상황일 때, 본인의 생각과 세상의 여론이 서로를 너그러이 흡수할 수 없을 때야말로, 모호한 타협을 요구하기보단 외려 세상을 매질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수도 있겠단 뜻이다. 누군가를 크게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야 지나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자기 말만 하는 강식과 홍익과 석호들의 비평적 에세이가 읽고 싶달까.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곳 이쯤에서 <바보사냥>의 두 남자를 재론할 수 있을 법한데, 두 남자의 기행이 전술한 비평적 태도와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에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에 매진한다. 한 번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식자재 거래처가 병아리를 참새라고 속이며 납품한 일을 알게 된다. 거래처 사장이 “요즘 시대에 어떻게 참새를 잡냐?”라며 다들 이렇게 장사한다고 넌지시 설득하지만,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목을 차마 비틀 수 없던 둘은 “병아리를 죽일 바엔 병원에 다시 들어가자!”라며 포장마차를 부수고 만다.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변주돼 반가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요즘은 이런 게 영화라며 속삭이는 남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 버럭 화내며 극장에나 다시 들어가자고 외치는 불통 영화평론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돈벌이는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소에게 억지로 물을 가득 먹인 뒤 한껏 매질하여 소의 살이 불게 만들어야 한다. 도축할 때 고깃값을 더 받기 위해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둘의 질문에 작업 현장의 선배가 “이게 기술이고 예술이야!”라며 일갈하고, 소의 눈망울을 보며 부모님을 떠올린 홍익은 ‘어머니 죄송합니다. 당장 저녁 먹을 돈이 없어 두들깁니다.’라며 속으로 한탄한다. 어디에선가 본 상황 같다. 영화란 늘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몸체를 불려야 하는 매체이며 필연적으로 양쪽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그 간극 속의 영화평론가들은 저녁 먹을 돈을 위해서 타자를 흠씬 두들겨 성미에 맞지 않는 글을 써야 할 상황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고해하듯이 뇌까리지 않을까. ‘시네마여 죄송합니다. 전 오늘 몇만 원의 고료를 위해 싫어하는 영화를 무난하다고 썼습니다···’ 포장마차를 부수고 매질해야 하는 송아지를 바라보다가, 탄광에 다다른 강식과 홍익 강식과 홍익은 병아리의 경우와 비슷하게 결국 소의 매질을 그만둔다. 대신 소를 때리라고 시킨 사람들을 흠씬 두들겨 팬 뒤에 탄광 마을에 가서 광부 일을 시작한다. 그들이 들어간 어두운 무저갱은 흡사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광 마을의 한 아저씨가 이곳을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 말하는데 이 선언이 신묘할 정도로 극장의 비유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비단 물리적 극장이 아닐지라도 영화광 각자가 뿌리내린 영화의 공간, 그곳이 독립예술영화관이든 골방의 컴퓨터 앞이든 멀티플렉스든 시네마테크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이든 간에 그 어둠의 장소는 영화평론가들에겐 천국이자 지옥이 되기 마련이다. 이곳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만끽하며 그것을 글로 재생산할 수 있는 유토피아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끊임없이 세상에 설명하며 끊임없이 거부당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한 것이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라는 석호의 귀여운 싫증엔 다음과 같은 홍익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에 반해 사람은 자기의식이 있고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 한없이 불행하군.” 그렇다. 영화를 향한 자기의식이 너무도 뚜렷하여 되려 불행을 마주하는 족속, 다시 비유하자면 억지로라도 닭의 살이 아니라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사람들, 하여 자유로운 토끼를 은근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 속성이 바로 영화평론가들의 주요 조건이자 가장 뚜렷한 공통점일 듯하다. 이 모순 속의 긴장에서 번지는 찌릿함을 다들 끊기 어려워한단 것 역시 비슷할 테다. <바보사냥>의 결말, 잦은 고초에도 홍익은 결국 토끼섬을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이 항해는 과연 타의 없이 자아와 자생만이 존재하는 곳을 향해 간 구원의 발로일까, 혹은 그저 타의에 떠밀려 도망치는 자의 흔들흔들 피난길일까. 둘 중 무엇이 됐든 우리도 결국은 섬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토끼가 부럽다. 이우빈(영화기자) l 친구가 없어서 영화 보러 다닌 1997년생. 《 씨네21 》 기자. 2023년 《 쿨투라 》 영화평론 신인상. 독립 영화잡지 《 섭씨 233 》 편집장. 비평 웹진 《 코아르 》 필진 등.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하얀 눈밭 위에 놓인 빨간 자동차일 것이다. 이는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치유하는 서사의 정점이다. 끌어안은 두 사람의 형상에서는 다소 직접적이고 고전적인 위로와 연대가 묻어난다. 감독은 전작 <아사코>, <우연과 상상>에서도 두 인물의 만남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했다. 아사코는 우연히 전 남자친구와 동일한 얼굴의 남자를 만났다. <우연과 상상>3부의 나츠코는 우연히 첫사랑과 닮은 여자를 만난다. 여기 <드라이브 마이카>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배정된 드라이버는 꼭 가후쿠처럼 가족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여기서도 가후쿠가 우연의 힘을 빌려 위로받고 나아가도록 만들까? 앞서 언급한 설산의 이미지를 보면 이는 결과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카>에는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의 서사에서 연기자는 주인공이 아니라 상대편에 부여된 몫이었다. 주인공은 첫만남에 상대를 오인하는 쪽인 관객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인공 가후쿠가 아예 연극배우로 설정되었으며 그의 연극은 극중극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아사코>와 <우연과 상상>을 떠올리면 주인공을 미사키로 설정하는 서사도 있음직하다. 그녀가 연극배우인 가후쿠와 그의 연극을 차례로 만나 상실을 극복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왜 이번에는 관객, 즉 연기를 듣는 위치(청자)의 시선이 아니라 연기자, 즉 연기를 발화하는 위치(화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여줄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그렇게 되면 난 이 역에 자신을 바칠 수가 없어.” 부인 오토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이어지는 씬은 가후쿠의 클로즈업한 눈물도, 오토가 떠난 빈 집도 아니다. 그것은 연극<바냐 아저씨>의 실연 장면이다. 여기서 가후쿠는 공연 도중 연기를 중단한다. 무대에서 뛰쳐 나온 가후쿠의 등 뒤로 “나도 말할거야. 내 아내는 달아났다고.”라는 대사가 지나간다. 영화를 위해 발췌된 <바냐아저씨> 대사들은 매번 가후쿠의 상황에 부합한다. 하지만 이를 보고 대사가 곧 그의 속마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1차원적이다. 그보다는 연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선언하는 이 장면이 영화 2부의 시작임에 집중해보자. 시간이 흘러 2부의 마지막은 이전처럼 연기가 가능해진 상태의 가후쿠를 보여주며 닫힌다. 사실 그는 배우들의 뒷모습만 보고도 ‘무언가 일어났음’을 캐치하는 능숙한 연기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2부는 그가 대사를 발화할 수 없는 순간에서 시작해 대사를 발화할 수 있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영화는 연기불가능 상태에서 출발해 가능 상태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우리가 따라가게 만든다. 발화의 사전적 의미는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를 하다’이다. 부인 오토가 죽던 날, 가후쿠는 자동차 안에서 시간을 끌면서 대화를 미루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실은 가후쿠를 이 상황 속에 가둔다. 오토는 첫 등장부터 흐릿한 형체와 또렷한 목소리를 보여주었고 딱 그 모습대로 자동차 속에서 반복재생된다. 2년 후,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는 여전히 카세트테이프의 릴과 겹쳐 보인다. 가후쿠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청자인 오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바냐아저씨’의 자리를 빌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후일 미사키에게 ‘아내는 2년 전 죽었어. 그 테이프를 듣기가 무서워졌니’라고 물은 적이 있다. 2년 전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는 행동은 스스로도 무섭다고 생각한 걸까. 그럼에도 오토에게 할 말이 남아있는 한 가후쿠가 선택할 수 있는 언어는 ‘바냐의 언어’밖에 없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아저씨>에는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다국적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대사를 하되 연극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이다. 2부가 새롭게 시작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가후쿠가 이 ‘다국어 연극’의 연출직을 위해 히로시마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곧 2부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바냐의 언어’에 갇힌 가후쿠의 앞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연기의 바탕에는 불안이 깔려 있다”는 사고방식을 밝힌다. 이 말은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의 연출가 가후쿠를 떠올리게 한다. 연기 현장의 하마구치 감독과 가후쿠는 둘 다 ‘날 것의 섬세한 무언가를 어떻게 지켜낼지’ 고민하며 그 불안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한다. 야외 리허설 장면에서 소냐와 엘레냐 역의 배우들은 연기 도중 가후쿠를 등지고 선다. 가후쿠는 연기를 볼 수 없음에도 확신있게 “방금 무언가가 일어났어”라고 외친다. 여기서 가후쿠가 발견한 ‘무언가’를 탄생시킨 주체는 잎사귀를 주워 내민 이유나의 손이다. 수화언어로 연기하는 이유나의 등장마다 우리는 그녀의 손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빨려 들어간다. 첫 등장인 오디션 장면에서 카메라는 ‘손의 언어’를 복잡한 동선과 숏의 변화 없이 차분하게 보여준다. 다른 배우들의 다국어 오디션이 카메라로 쪼개지고 붙여지는 동안에도 침묵 속 ‘손의 언어’는 굳건하다. 유나와 윤수가 마련한 식사자리 장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카메라가 나머지 세 사람 의 등을 비추며 어둠 속에 위치할 때도 그녀의 손은 중앙의 빛나는 공간에 놓여있다.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만난 새로운 언어는 ‘손’외에도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침묵하되 매번 섬세한 응답을 보내 주는 드라이버 미사키의 언어이다. 미사키는 어디든 가 달라는 가후쿠의 질문에 긴말없이 ‘있다가 없어진 흔적의 공간’으로 차를 몬다. 가후쿠의 과거사를 들은 뒤엔 “소중하게 대해 온 게 느껴져 그의 자동차가 좋다”는 말을 고른다. 그 정점은 가후쿠가 생각할 만한 장소를 물을 때 그녀가 자동차를 툭툭 두드린 몸짓이다. “차 안이 좋겠네요”같은 말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어쩌면 겉으로는 상응하지 않는 듯 보이는 문답이지만 드라이버 미사키가 가진 ‘운전수의 언어’는 결국 가후쿠를 아픔에서 건져낸다. 그를 설산 위의 빨간 자동차까지 데려간다. 다시 하마구치의 말로 돌아와 보자. 섬세한 연기의 탄생은 불안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그 불안은 ‘바냐의 언어’를 붙잡고 싶은 가후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정해둔 청자를 놓치기 싫은 불안감이다. 자신이 선택한 언어는 곧 자신이 선택한 청자와의 연결통로를 만든다. 이 다국어 연극 속에서는 상대배우의 낯선 언어가 끊임없이 낯선 연결통로를 만들고 있다. 가후쿠는 이 연극의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감정을 제외하고 대본의 글자만 읽게끔 지시한다. 미리 결정하고 외워서 재현하는 감정표현과 그것을 서로의 큐사인으로 사용하는 순간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정작 가후쿠 자신은 그것에 실패했다. 그는 오토가 가진 ‘꿈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되돌려 주었을 뿐이다. 꿈이야기의 소녀처럼 징표를 남기고 싶어한 오토의 부유를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가후쿠가 ‘대본의 언어’뒤로 숨고, 오토가 ‘꿈의 언어’뒤로 숨었을 때 둘은 ‘좀 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다. 경계했어야 했다. 야외 리허설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유나가 상대 배우를 등 뒤에서 껴안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는 불쑥 상대의 눈 앞으로 수화를 등장시킨다. 통상의 음성언어에서는 두 사람이 한 방향으로 서 있을 때 껴안지 않아도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낯선 손의 언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나뭇잎을 주워 주며, 바냐 아저씨의 가슴과 턱을 두드리며 말한다. 이 낯선 연결통로의 생성은 ‘무언가’를 만든 힘이고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를 안아주게 한 동력이다. “실제로 섬세한 연기가 탄생하는 것과 가후쿠를 비롯한 상처받은 영혼들이 재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감독의 대담 속 한 구절을 통과하며, <드라이브 마이카>의 차별점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물론 영화는 전작들의 장기인 ‘어긋남과 기다림’의 테마를 가후쿠-오토의 관계 속에 능숙하게 녹여낸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숏은 ‘오토를 외면한 가후쿠가 상처를 직면하고 나아간다’는 하마구치 식 서사구조 역시도 또렷히 전달한다. 다만 이번에는 여기에 연기자 가후쿠의 시선을 덧붙인다. 연기 불가능 상태인 가후쿠에서 시작해 연기 가능상태인 가후쿠에 도착하는 과정. 가후쿠가 연극을 둘러싼 새로운 언어들을 만나 불안을 겪고, 그 불안에서 탄생한 섬세한 위로를 경험하는 과정. 왜 이번에는 맞은편인 연기자의 시선을 경험하게 하면서 이 서사구조를 보여주었을까. <아사코> 속 아사코의 맞은편에는 새 남자친구인 료헤이가 있다. 료헤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아사코가 전 남자친구와 갔던 사진관에 놓인다. <우연과 상상> 속 나츠코의 맞은편에는 미카가 있다. 미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 속 첫사랑의 자리에 놓인다. 이때 주인공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대를 오인하고 맞은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가후쿠의 시선을 경유하며 이 시간이 단순한 오인이나 관찰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연기를 ‘요구’하는 중임을 안다. 맞은편의 상대에게 낯선 언어와 낯선 연결통로를 제안하는 중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제안이 상대방의 재생을 촉구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는 그동안 스크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객석에도 해당된다. 우리도 가후쿠처럼 하마구치 영화에서 주인공의 맞은편에서 자리한 채 낯선 언어를 제안받아 재생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냐는 야외리허설 장면과 동일한 정면샷으로 가후쿠를 안아준다. 하지만 객석을 등을 지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보며 안아준다. 그렇게 연습 당시 두 배우 사이에 일어난 ‘무언가’가 드디어 객석의 미사키에게도, 스크린을 보는 우리에게도 허락된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라고 18세기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은 말했다. 그러나 금정연은 SNS에 음식 사진을 올리지 않는 사람이다. 셀카도 안 올리고 남이 찍어준 자기 사진도 안 올린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는데 관심이 없는 걸까. 금정연이 요즘 업데이트하는 건 자기 블로그 캡쳐 사진인데, 이것도 자기 어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속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은 아니다(참고로 그는 오디오 전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가 석달 만에 그만뒀다. 구독자는 2022년 7월 기준 40명. 가장 최근 올린 영상은 6개월 전의 것으로 GENE의 <I Say A Little Prayer>을 바이닐 판으로 재생한다. 조회수는 96. 댓글은 2개. 댓글 내용은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참고로 한 사람이 두개의 댓글을 달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의 SNS는 중구난방이다. 트위터에선 트위터의 법을 따르고 인스타그램에선 인스타그램의 법을 조금 따르긴 하지만, (육아 때문인지 마감 때문인지) 대체로 정신이 나가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개인적으로 아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의 SNS 자아는 실제와 거의 같다. 샤토브리앙은 이렇게 썼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프랑스 작가 중에서 자신의 작품과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바꿔 쓰면,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작가 중에서 자신의 SNS와 비슷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금정연이 유일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그가 3년 만에 극장에 가서 < 탑건: 매버릭 >을 보고 < 헤어질 결심 >도 보고 트위터에 소감도 남겼다. 심지어 한영한사 지난 연재에는 탑건에 대한 글도 남겼다. 나는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연재에 왠 탑건이냐고 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 R2B >가 있잖아요, <창공>도 있고, 라고 했던가. <창공>이 뭐예요? 내가 묻자 정연씨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지돈씨. 왜 저랑 다른 세대인 척 해요? 네? 류시원이랑 김원준 나온 드라마 있잖아요. 류시원이요? 지돈씨도 알죠? 김원준이 류시원 데뷔시켜준 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정연씨가 왜 탑건에 대해 썼을까. 비천한 영화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서? 아니면 어쩌다 극장에서 <탑건: 매버릭>을 봤고 마감은 다가왔고 억지로 논리를 맞춰야 해서? 모든 연재가 그런 식 아닌가? 그러나 어디서도 말한 적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톰 크루즈고 정연씨는 물론 그 사실을 안다. 지친 아저씨 류의 배우를 좋아하는 정연씨는 예순이 되어도 지칠 기색이 없는 톰 크루즈가 이해되지 않는지 내게 종종 묻기도 했다. 지돈씨, 지돈씨는 톰 크루즈가 왜 좋아요? 글쎄, 왜일까. 사실 이번 글에서 이렇게 답할 생각이었다. 톰 크루즈야말로 자본주의적 추상의 현현이라고,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히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마크 피셔는 말합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닐 매콜리야말로 포스트 포드주의의 화신이라고. 닐 매콜리는 “익명의 이름, 가짜 여권의 이름, 역사가 없는 이름이다. … 하나의 스크린, 암호, 깊이를 알 수 없는, 냉정하고 전문가적인, 완벽한 준비.” 닐 매콜리에게 도덕이나 윤리, 역사는 무의미하거나 나중 문제다. 그는 단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까 마이클 만이 21세기 초에 찍은 영화가 뭡니까. 바로 < 콜래트럴 >이죠. 포스트포드주의적 가치관으로 무장한 탈역사적 회색 킬러와 낭만주의적이고 포드주의적이며 아메리칸 드림의 신봉자인 택시기사의 대결. 그 킬러가 바로 톰 크루즈죠. 떠올려보세요, <탑건: 매버릭>에서 적의 존재를. 헐리웃 영화 역사상 가장 추상적인 적군이 나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애국주의적 영화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 어느 나라에 충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나라가 있다면 그건 톰 크루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톰 크루즈와 <탑건: 매버릭>의 감독인 조셉 코진스키가 함께 했던 2013년작 < 오블리비언 >에서 예고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오블리비언>의 외계인은 외계+인도 아니고 사실상 유기체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로, 표면적으로는 인간을 복제해서 내세우는 추상적 도형(원, 세모, 네모)의 형상을 한 추상 그 자체인데 이 추상적 존재에 의해 끝없이 복제되는 톰 크루즈의 적은 다름 아닌 톰 크루즈입니다. 영화를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지만 물론 정연씨가 이 영화를 볼 리는 없겠죠. 하지만 < 엣지 오브 투모로우 >를 떠올려보세요. 여기서 톰 크루즈는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리셋-존재로 현현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영화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정말 단지 그 이유일까요. 제 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는 탑 배우 중에 내면이 없는 사람은 톰 크루즈 하나라고요. 그러므로 “하나의 스크린, 깊이를 알 수 없는”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톰 크루즈가 복제 가능하고 복제될수록 (존 말코비치처럼) 거북해지는 게 아니라 매력이 더하는 이유는 그에게 내면이나 깊이, 모순 따위가 없기 때문이죠. 그는 사실상 아무것에도 충성하지 않고(이단 헌트는 가족도 없고, 직책도 없고 상급자도, 국가도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충성하고 적과의 싸움만 반복하는데, 그것은 그가 표면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추상성을 재현하는 일은 디지털 이미지도 포스트 시네마틱한 확장 영화도 아닌 복제 톰 크루즈가 하고 있다고, 마블 영화가 자본주의의 변명으로서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면 톰 크루즈의 영화는(사실상 지금의 헐리웃 영화는 이 둘로 나뉩니다) “서사를 포기한 채 충격과 스릴, 흥분이라는 감각적 경험에 모든 것을 내거는 것처럼 보인다” 1) 고 나는 정연씨에게 답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다는 엔데믹 이후 다시 원래의 자리를 복귀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에 대해서, SNS에 줄을 잇고 있는 영화 인증에 대해서 묻기로 했다. 그러니까 왜 내 주변에는 < 헤어질 결심 >과 < 애프터 양 >과 하마구치 류스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인지,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왜 “헤결”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은 건지(한 신문 기사에 의하면 “헤결” 각본집은 7월 18일 예약 판매 시작후 하루만에 6,000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2) …), 왜 어떤 사람들은 <탑건: 매버릭>은 보고 “헤결"은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 왜 < 토르: 러브앤썬더 >를 본 사람은 한명도 없는지에 대해 묻기로 했다. 선호하는 작품이 다르고 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평가가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정연씨는 지금도 그러한 사실에 깜짝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역사의 불의를 처음 마주한 마르크스처럼 말이다. 똑같이 훌륭한 시민인데 어떻게 같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정반대의 말을 할 수 있는가. 문학에선 그런 일이 흔치 않다. 기본적으로 같은 문학 작품을 읽은 경우가 드물고 읽었다면 이미 그들은 합의의 공동체 또는 장에 속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은 끝났고 영화는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임재철 평론가가 말했던 것 같다고 정연씨는 말했다. 정확히는 맨날 보는 애들만 보면 뭐하냐, 안 볼 사람도 봐야 진짜 예술이지, 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안 볼 사람이 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것들의 인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영화를 무엇으로 변형시키는 것일까. 영화는 사바랭의 음식이 된 걸까. 며칠 전에 미팅을 진행한 어느 출판사는 사내 행사로 직원들이 다 같이 <헤어질 결심>을 봤다고 했다. 다른 업종의 회사도 “헤결”을 볼까? 아니면 < 범죄도시2 >? 노동자들이 함께 보는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케빈 켈리는 <통제 불능>에서 생명과 유사한 특성을 갖는 복잡적응계를 비비시스템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벌이나 개미처럼 개별적으로는 연약하지만 군집이 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들이 그 예다. 개별적일 때는 존재하지 않는 특성이 창발하는 것이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픽사의 공동 창업자인 로렌 카펜터는 라스베이거스의 회의장에서 5000명의 군중들과 실험을 했다. 사전 준비 없이 비디오 스크린 화면을 보며 다 같이 하나가 되어 비디오 게임 <퐁>을 하거나 카드섹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절정은 비행기 조종 시뮬레이션이었다. 왼쪽에 앉은 사람들은 비행기의 좌우기울기roll을 조종하고 오른쪽 사람들은 상하요동pitch를 조종했다. 대형 스크린 위에 비행기는 떠 있고 조종사는 경험이 전무한 5,000명의 사람이다. 비행기는 분홍 산들 사이의 분홍 계곡에 있는 활주로를 향하고 있었다. 상황은 곧 급박해졌다. 회의장은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군집은 혼란을 일으켰고 비행기는 갈지자를 그리며 추락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5,000명의 조종사는 착륙 시도를 중단하고 고도를 높이고 기수를 돌렸다. 그들이 갑자기 어떻게 합의한 것일까? 지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선회했다. 그러더니 아무런 논의 없이 함께 날개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평선이 어지럽게 돌아가면서, 비행기는 크고 아름답게 360도 회전을 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케빈 켈리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철새떼들이 하는 행동, ‘무리지어 날기’를 했다고 썼다. 새들은 그들이 어떤 모양을 만드는지, 규모나 배열, 형태 등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들은 단지 군집에 감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패턴을 만들어내고 개별일 때보다 더 놀라운 반응과 움직임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별 영화가 새라면, 시네마는 철새떼, 개별 영화가 벌이라면, 시네마는 벌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한편의 영화를 보고 거기에 대해 말하고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영화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영화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화에 대한 사유는 걸작이나 비천한 영화 개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뛰어난 작가-감독이나 명배우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숫자와 그것들의 연결에서 온다. 루이스 부뉴엘은 “노동자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이들의 노하우가 부럽다”고 말하며, 안제이 바이다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 편의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흘러가는 비밀스러운 연속성 속 무언가가 내게 감동을 준다.” 3) *** 1) 서동진, "시네마 이후의 이미지 : 자본주의적 추상은 재현 가능한가"(2021) 2) 이투데이, "N차 관람→'왜놈 칠 결심' 밈까지...'헤어질 결심'의 조용한 신드롬" 3) 루이스 부뉴엘, 이윤영 옮김 <루이스 부뉴엘>(을유문화사, 2021)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