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마님
- 감독
- 고영남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강미애, 박옥초, 김정옥, 성소민, 김웅, 안성혜, 최남현, 조미령, 남정임, 박병호, 장혁, 김희갑, 이낙훈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내가 주증녀 를 처음 만난 것은 해방되던해 가을이 었다. 우리 고향 안성읍에는 논바닥을 메꾸고 건축된 애원극장이 유일한 문화시설이었으며 건물 주인 피아니스트 애원은 대지주의 아들이면서 좌익운동의 멤버 였고 그래서 극장에는 소위 프로레타리아 연극이 늘 공연되고 있었다. 그무렵 지금은 극단이름도 연극의 제목도 잊었지만 서울에서 지방공연을 온 일행중에 정득순 , 주증녀의 이름이 끼어있었다. 우리학교에서는 극장을 빌려 음악회와 연극공연을 하게 되었고 나는 김세중(작고한 조각가)이 쓴 <해방전야>란 연극 연출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남학교이기 때문에 부득이 남자가 여자로 분해야 했으며 도대체 여배우란 어떤 사람들인가 관찰하고 싶어서 무작정 그들이 투숙하고있는 여관으로 찾아 간 것이다. 가을 바람이 부는데 썰렁한 여름옷을 입고 배우들은 얼굴이 피곤해 보였지만 마지못해 우리를 만나주었다. 그때 '주증녀'는 젖먹이를 업고있었고 주로 '정득순'이 설명을 해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금은 생각도 나지않지만 우수에 젖은 '주증녀'의 얼굴이 퍽 예뻤었다고 생각되었다. 그후 18년 우리는 감독과 여배우로 재회하게 되었고 주증녀 는 그때 그이야기를 송두리채 잊어버리고 있었다. 먼저 주증녀가 내 작품에 출연한 영화를 열거해 본다. < 일편단심 >, < 월급봉투 > ,< 저하늘에도 슬픔이 >, < 고발 >, < 만선 >, < 사격장의 아이들 >, < 산불 >, < 애인 >, < 동경특파원 >, < 춘향 >, < 피해자 >, < 작은 꿈이 꽃필 때 >, < 극락조 >, < 본능 >, < 내마음의 풍차 >, < 황토 >, < 발가락이 닮았다 >, < 야행 > 등 18편이다. 편지 주증녀 선생! 당신이 이승을 떠난 지도 2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당신의 철부지였던 세아이는 훌륭하게 자라 잘살고 있습니다. 촬영장에 졸졸 따라다니던 막내는 사업가가 되어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혜성이는 좋은 대학에서 물리과를 졸업하고 과학자 신랑을 맞았습니다. 결혼식이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의 부군 Y씨는 힘껏 딸의 행복을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신부는 세아이를 낳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딸이 보고싶으면 그렇게 황망히 데려가느냐고 했지만 당신은 정말 그리운 딸을 만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요. 문정숙 도 떠났고 남정임 도 세상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한은진 , 황정순 도 병석에 누워있습니다. Y씨는 작년 동경영화제에서 만났는데 활기찬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촬영하던 그많은 시간들을 회상하며 작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정사씬 <山불>은 전남 월출산 빨치산의 실화를 극화한 차범석 의 희곡이다. 낮에는 태극기가 날리고 밤에는 인공기가 걸리는 산골짜기 대밭마을에 벌써 쓸만한 사내들은 없다. 모두 어느쪽인가 편이 되어 집을 떠났기 때문이며 그들의 아내는 고독과 굶주림을 참으며 혼자 살아가야 한다. 빨치산의 아내 도금봉 과 국군의 아내 주증녀 는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앙숙처럼 지내는 어느날 젊은 사내가 마을로 잠입해 들어와 '주증녀'의 구원을 청한다. 산에서 도망한 사내는 굶주림에 지쳐있었으나 여자를 보자 먼저 본능이 발동한다. 대밭에 굴을 파놓고 남과 여는 갈증을 풀게 되는데 이 광경을 도금봉이 보게된다. 결국 두여자는 협의 끝에 사내를 사육하며 번갈아 욕구를 채운다. 나는 당시 섹스의 심볼이었던 도금봉과 점잖은 안방마님 주증녀를 두여자로 캐스팅했다. 촬영은 광주근처 담양의 대밭촌에서 시작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여배우 30여명을 끌고간 현장은 구경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증녀가 감독이 묶고 있는 토담집 사랑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마을사람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장과 의상을 끝마친 여배우였다. 남루한 옷차림과 기름기 없는 머리, 파리한 얼굴에 거친손 어디서 구해입었느냐고 물었다. 주증녀는 마을 사람중에 가장 적합한 모습을 찾아 자기옷과 바꾸어 입었다고 한다. 조감독은 여배우들에게 마을 사람들과 옷을 바꾸어 입으라고 지시했고 다음날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은 이곳주민들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주증녀의 의상 설정은 늘 현실감을 살리고 있었다. '도금봉'과 사내의 숨막히는 정사씬을 감독옆에서 보고있던 여배우는 물었다. 점잖은 캐릭터도 저 장면을 소극적으로 연기해야하느냐고, 그럴필요가 있겠나 싶어 비장의 무기가 있느냐고 했더니, 자신이 정사 할때의 얼굴이 궁금해서 거울을 보며 혼자 연구했다고 한다. 섹시한 것을 과시하는 여자나 점잔빼는 여자나 희열을 표현하는 것에 차이가 없어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후 나는 카메라앞에서 적어도 정사씬에 한에서는 주증녀에게 연기지도나 설명을 생략하게 되었다. 매맞는 연기 < 만선 >은 주증녀 의 대표작이지만 현재 필름이 실종된 상태다. 천승세 의 어촌 연극을 영화로 옮긴것인데 그무협 당국에서는 해외영화제 출품을 금지시켰다. 빈곤한 한국 어촌이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노사갈등의 심각성과 무엇보다 어민들의 절망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지만 60년대의 한국영화는 거의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서 절망적이 었다. 그때의 영화정책이 오늘처럼 관대했다면 세계도처에서 우리 영화는 이미 개가를 올렸을 것이다. 남해안 어느 갯마을, 모래밭에서는 남편( 김승호 )와 아내(주증녀)의 처절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수평선을 향해 가물가물 떠내려가는 빈배에는 갓난아이가 실려있다. 장대같은 자식을 바다에 모두 잃은 어미는 막내아이 하나만이라도 뭍으로 떠나가 사람답게 살기를 기원했지만 애비는 한사코 그애를 어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맞선다. 카메라앞에서는 처절한 부부싸움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남배우가 못하겠다고 연기를 멈춘다. 이럴 땐 사정없이 여편네를 두들겨 패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주증녀'가 말했다. "선생님 괜찮으니까 막때리세요." 카메라는 다시돌아갔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주먹이 난무하고 발길질에 여배우는 휴지조각처럼 파도에 어풀어졌다. 그런데도 사내의 폭력은 이어진다. 어미는 사내의 다리에 매달려 필사적이다. 3분간이어진 한컷이 이작품을 살리고 있었다. 물론 여배우의 온몸에서는 피멍이 들었다. 눈물 < 만선 >은 통영에 숙소를 정하고 촬영지 외딴섬을 향해 2시간 정도의 뱃길을 어선을 빌려 스탭, 캐스트 50여명이 왕복했다. 가을해는 워낙 짧아 촬영을 끝내고 서둘러도 밤바다를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점심도 빵조각으로 때우고 온종일 중노동을 했기 때문에 갑판에 누워 별을 쳐다보며 돌아왔다. 그날 배가 절반쯤 왔을 때 갑자기 엔진소리가 멈췄다. 잠시후 당황한 기관사가 올라와 엔진고장인데 수리불능이라고 한다. 배위는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지만 별수 없이 우리는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칠흑같은 밤바다에서 표류하는 배는 바위와 충돌하는 순간 난파를 면할 수가 없다. 언제 침몰할지도 모르는 공포속에서 우리들은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김승호 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하느님 당신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거야, 우린 영화하는 죄밖에 없어, 정말 이러면 재미없어' 공갈인지 구원인지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섞인다. 변기종 선생의 기도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 소리에 열중하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누군가 '흑'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허장강 씨가 울기시작했고 그 옆에서 주증녀 는 눈물을 펑펑흘리고 있었다. 두사람으 그때 가정이 깨진 충격속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아이들을 이웃에게 맡기고 촬영나온 상태였었다. 우정 우리집 근처에 문정숙 씨가 살고있었는데 이만희 감독과 나는 그녀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일이 있다. 그날밤은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주증녀 는 먼저 와서 음식을 거들었다. 네사람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분위기는 쉽게 달아오르지 않는다. 왜나하면 문정숙과 주증녀는 늘 라이벌관계를 면치못했다. 물론 그것은 캐스팅을 놓고 제작사가 두여배우를 저울질 하다가 끝내는 한쪽으로 결정짓기 때문에 장본인들은 대책이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나쁜 사이로 단정 지었다. 그것은 감독인 우리 둘도 마찬가지였다. 신문기사는 이만희와 나를 이유없이 앙숙처럼 써놓고 있었다. 물론 내심 선의의 라이벌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수준은 아니다. 취기가 오르자 내가 먼저 실마리를 풀려고했다. 당신들 두 여배우는 얼굴 모양도 연기스타일도 전혀 다르지만 지금 똑같은 운명의 강을 건너고 있다. 뭐가 똑같으냐고 두사람이 달려들었다. 아들 하나씩을 데리고 서방한테 쫓겨난 처지부터 이북에서 가족버리고 남하한 신세가 같지 않느냐, 그따위 위인들과 살면서 어떻게 배우를 하냐, 누가 여배우아니랄까봐 신발 바꿔신느냐, 이 쬬다야. 스켄달 하나 없는게 감독이냐. 우리는 취중에 한꺼번에 스트레스를 토해냈다. 집주인이 전축을 틀었다. 부르스에 엉키고 맘보에 껑충거리며 빈양주병이 몇 개나 뒹굴었다. 나는 이 취객들이 끝내는 한방에서 쓰러져 잘것같은 예감이 들어 주증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길은 미끄럽고 몸은 중심을 잃어 허우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문정숙이 뒤따라나왔다. 자기가 주증녀네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했다. 나는 찬스처럼 발길을 돌였는데 두사람은 금호동 신당동을 서로 바래다 주느라 밤을 새웠다는 말을 들었다. <프로필> 1925. 2. 10 함남 영흥군 덕기면 출생, 1980. 9. 18 사망 데 뷔 : 1949년 윤대룡 감독 < 조국의 어머니 > 수상경력 : 대종상영화제 여우 주연상 등 다수 주요작품 : < 여성일기 >, < 심판자 >, < 애인 >, < 고려장 >, < 산불 >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