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영 프로젝트
- 감독
- 노영빈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박안나, 노영빈, 김진태
1971년 말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영화정책의 급변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영화검열 체제는 매우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는 주로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검열(외화의 경우 수입 허가 단계)에 집중되었다. 이중검열 혹은 삼중검열의 혼란을 낳은 60년대 후반 시나리오 검열은 1970년에 이르러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적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변화와 혼란의 시발은 1971년 12월 갑작스럽게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12월 6일, ‘중공’의 유엔 가입으로 안보가 더 불안해졌고, ‘북괴’의 도발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 태세를 확립한다, 2.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 불안요인을 배제한다, 3.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 논의를 삼가야 한다” 등 6개항 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11일 문화공보부는 국가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영화 분야에 다음과 같은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1.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성실, 근면, 검소한 생활자세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상을 그린 내용의 영화제작을 권장한다. 2. 건전한 국민정서로 순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의 영화, 민족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의 영화를 정선, 수입하도록 한다. 3. 국내영화제작의 질적 향상을 위해 72년도 제작편수를 1백50편으로 한정하고 안보관계 영화를 연 30편 이상 제작하여 매월 최소한 2편 이상 상영토록 의무화한다. 72년도 외화수입을 50편으로 한정하되 안보관계 영화를 15편 정도 수입하도록 한다. 4. 음란, 선정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있는 내용,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내용, 사치와 낭비 등 소비성향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내용은 배격한다. 1) 국가비상사태 선포 내용을 담은 일간지 기사(『동아일보』, 1971년 12월 6일) 이러한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영화시책”은 안보 위기 상황을 맞아 그간 “섹스 퇴폐풍조 눈물 한숨 패배의식 등을 철저히 규제” 2) 함으로써 한국영화를 수정하겠다는 정책당국의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 체제 이후 1972년 신년부터 검열이 강화되었는데, 이를 단순히 강화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간 진행되었던 시나리오의 검열은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무수정, 개작, 부분 개작, 반려 등의 단계에 따라 절차가 진행된 반면, 새로운 체제에서는 신청된 시나리오를 심사하여 제작될 수 있는(외화의 경우 수입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검열의 수준을 벗어나는 조치다. 왜냐하면 기존 우리가 생각하는 검열은 주어진 작품에 대한 수정과 (예외적으로) 반려를 포함하는 것이지, 제작할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어느 면에서는 최고 수준의 검열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에 따라 시나리오 단계의 검열 과정은 6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이중화된다. 이에 당시 문공부 장관 윤주영은 “저질영화 제작과 무분별한 외국영화 수입을 막고, 국가 안보 우선의 영화제작 장려책으로” 제도를 바꾸었다고 밝혔다. 3) 문제는 시나리오 심사에서 통과한다 하더라도 제작쿼터를 부여받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었다. 즉 문공부는 예륜에서 사전심의한 작품에 대해 20인의 “쿼터” 심의위원을 두어 재심사 과정을 거친 후 국산영화 제작권을 부여했다. 그 결과 1972년의 한 글에 따르면 320여 편의 시나리오 가운데 1백 50편이 제작쿼터를 부여받았고, 최종적으로는 29편만이 영화화되었다고 언급된다. 4) 물론 이는 감독들의 대담 가운데 나온 발언이라 수치가 정확한지 확인할 수 없고, 1972년의 한국영화제작편수가 29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후술하겠지만 영화진흥공사 자료집의 통계는 이 해 제작된 편수가 122편이라 밝힌다). 1971년으로부터 넘어온 제작쿼터가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5) 아마도 1972년에 부여된 제작쿼터의 상당량은 다시 1973년으로 이월되기도 했을 것이다. 제작쿼터가 부여되었음에도 제작이 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앞의 잡지기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해당 연도인 72년도 배정 코타분의 제작 진척이 극히 부진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화계의 전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당해연도의 「코타」가 과년도 「코타」에 비해 제작완성율이 뒤떨어진다는 상례에 비유하기에 앞서 최근의 영화산업이 사양의 문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세계적인 조류의 축소판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겠다. 또한 예로는 「선각본 심사제」라는 큰 변화가 처음으로 실시됨에 따라 제작에서 다소 주춤했던 제작자들의 태도도 영향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 6)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산업의 부진이 급격히 진행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관객수의 경우 1969년까지는 1.71억명에서 1.73억명으로 소폭이나마 증가하였으나, 1971년 처음으로 1.46억명으로 2천만명이 줄었고, 1972년에는 1.18억명으로 거의 3천만명이 줄어들게 된다. 제작편수는 1969년 229편을 정점으로 1971년 202편으로 줄었다가 1972년 122편으로 급감하였다. 말하자면 1970년 시작된 불황은 1972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어쩌면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이후 강경해진 영화정책 변화일 수 있을 것이다. 유신과 4차 개정 영화법 이러한 상황에서 1972년 10월 말 다시 유신이 선포되었다. 유신과 함께 1972년 검열체제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유신 체제 하 예륜은 새로운 18개의 심의기준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기존의 검열사항 외 “1.10월유신 조치를 왜곡, 비방하거나 유인비어 날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는 내용, 2.총력안보에 역행하거나 국토 통일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3.남북적십자 회담을 비방하거나 이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 등 사항이 눈에 띈다. 7) 1973년 2월에는 영화법이 개정, 4차 영화법이 공포되었다. 4차 개정 영화법은 70년 3차 개정영화법이 시행했던 제작과 수입의 분리 정책을 이전으로 되돌려 제작사만이 외화수입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영화 제작사의 독점적 권리를 보장했다. 또한 제작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강화하여 마찬가지로 제작사를 독점화했다. 표면적으로 이는 60년대 내내 추진되었던 영화정책의 중점 방향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이저 기업화 정책이 이미 파탄의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고 정부의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소수의 제작-수입사를 통해 영화콘텐츠 전반의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짐작된다. 이와 함께 기존의 영화진흥조합은 영화진흥공사로 개편되었다. 광의의 검열 행정체제와 관련하여 사단법인 한국영화배급협회의 창립을 별도로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배급협회는 1973년 5월 11일 창립총회를 통해 발족했다. 지방배급사(흥행사)의 부당한 간섭과 영화 수입의 누출을 막고 전국적으로 일원화된 배급체제를 구축하고자 설립된 배급협회의 초대 이사장은 김태수, 상임이사는 안재홍이었고, 이사진으로는 제작(수입)사 쪽 2명, 공연자 쪽 2명, 영화진흥공사 1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배급협회는 중간배급업자(지방흥행사)를 배제함으로써 중간 유출되는 수입을 줄이고, 제작자와 상영자라는 직접 이해당사자간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8) 이에 따라 문화공보부는 “①모든 영화는 영화배급협회 이외의 경로를 통하여 배급하지 못한다. ②영화의 배급에 관하여 임의로 계약하여 이를 위장해서는 안된다. ③모든 공연장은 배급협회를 통하지 아니한 여하한 극영화도 상영해서는 안된다. ④ 영화배급신청서는 제작신고 및 수입추천 시에 영화배급협회에 제출해야 한다” 9) 등 배급협회에 관한 행정방침을 시달하여, 모든 영화의 배급은 배급협회를 거치도록 강제했다. 1973년 6월 21일 진행된 영화배급협회 현판식 사진(김태수 배급협회 이사장(좌), 문공부 이치순 예술국장(우) 출처: 『영화』, 1973년 8월호) 이와 함께 매년 영화정책의 구체안을 포함한 영화시책이 1973년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발표되었는데, 4차 개정 영화법이 공포된 1973년 영화시책은 영화검열의 내용과 체제에 있어서 강화된 안을 담고 있다. 10) 우선 우수영화 제작방침에서 “10월유신을 구현하는 내용,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시킬 수 있는 내용, 의욕과 신념에 찬 진취적인 국민정신을 배양할 수 있는 내용,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는 내용, 협동·단결을 강조하고 슬기롭고 의지에 찬 인간상록수를 소재로 한 내용” 등 유신 이후의 변화된 상황을 담았고, 우수외화의 기준으로 “유신이념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영화, 민족주체성과 애국, 애족정신을 북돋아줄 수 있는 영화, 새마을운동의 가치관을 설득시킬 수 있는 영화” 등 유사한 기조의 15개 항이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검열에 있어서의 주안점 역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민총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내용의 지양, 음란 선동적인 묘사 등 퇴폐성향이 짙은 내용의 지양” 등 6개 항이 별도로 제시되었다. 한편 전년 크게 문제가 되었던 시나리오의 심의는 “예륜 심의를 거쳐 다시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된 심의회에서 심의 결정하던 것을 예륜 심의를 강화하여 당부가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972년의 번거로웠던 시나리오 검열의 단계, 그리고 이로 인한 제작 부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개선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의 변경이 반드시 소위 이중검열의 폐단을 개선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문공부 담당자의 직접 결정은 양면의 날과 같아서, 강화의 기조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제작권은 1972년 제작편수의 급감을 의식한 탓인지 전년 150편에서 130편으로 줄었다. 요컨대 1971년 말 선포된 “국가비상사태선언” 이후 진행된 영화정책은 4차개정영화법까지 권위주의 강화를 향해 치달았다. 단순히 영화검열만의 문제는 아니다. 60년대 영화산업정책의 폐단이 4차개정영화법을 거치며 반복강화되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바로 이 시기에 영화산업의 불황이 시작되었다. 산업적 불황과 정권의 권력유지 욕망의 산물로서의 영화정책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며 199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산업의 장기불황이 진행된다. 각주 1) "안보 우선 주체의식 고취, 대중연예에 새 기풍, 문공부서 쇄신책 마련, 영화검열 기준강화, 제작편수를 연 1백50편으로 한정", <매일경제신문> 1971년 12월 11일 2) "줄지을 「안보영화」, 국민총화 담긴 외화 우선 수입, 사회불안·섹스 등 다룬 작품 철저 규제, 방화도 새 가치관 따라서 개작", <동아일보>, 1972년 1월 12일 3) "「선심사」 「후 수입쿼터배정」, 윤문공 안보 우선의 영화정책 마련", <조선일보>, 1972년 4월 14일 4) “신춘좌담: 바람직한 새해 영화풍토는”, 『코리아시네마』, 1973년 1월호, 46-47쪽 5) 당시 한 잡지의 다른 기사에 따르면 1972년 11월 14일 현재 시점에서 1971년 이월쿼터 73편 중 63편이 검열을 끝냈고, 72년도의 경우 93편이 제작신고 된 가운데 29편이 검열을 필했다. “72년도 국산영화 개황, 「건전」 「우수」로 경향 바꿔져”,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39쪽 6) 앞의 기사, 39쪽 7) “뉴스토픽, 「문화유신」을 다짐, 연예계 인사 간담회에서, 예륜 18항의 새 심의기준 발표”, 영화진흥조합, 『코리아시네마』, 1972년 12월호, 57쪽 8) “배급협회 발족: 영화계 숙원인 배급 일원화 위해”,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7월호, 73쪽 9) “[알아둡시다] 영화배급에 관한 행정지침을 시달”,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8월호, 67쪽 10) 이하 영화시책 내용은 “영화시책”,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1977, 225-227쪽 참고
유신체제기 | 1975~1979년 197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유신헌법에 근거해 1974년부터 발동된 긴급조치와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의 시행은 한국 사회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국회 동의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행위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시행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집회·시위 그리고 언론이나 표현물을 일절 금지했다. 물론 영화 검열도 강화됐다.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영화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1974년 41% 수준이던 수정·반려 비율이 1975년에는 80%에 이르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의 수치도 불황을 증명한다. 한국영화 제작/상영 편수는 1975년 94/115편, 1976년 134/106편, 1977년 101/66편, 1978년 117/69편이었고, 외화 상영 편수는 1975년 70편, 1976년 71편, 1977년 47편, 1978년 41편, 1979년 68편이었다. 편수로는 한국영화와 외화가 엇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관람객도 상영 일수도 외화 쪽이 2배 이상 많았다(서울개봉관 기준). 명백하게 외화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 시기 제작사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국산영화를 만들었다. 1975년을 기준으로 보면 서울 소재 극장에서 일주일 이상 상영한 6편을 기준으로 수입권 1편을 부여하는 식이었다. 또 분기별로 5편을 뽑는 우수영화에는 각 1편의 수입쿼터가 주어졌다. 1976년부터는 정의조차 모호한 ‘우수영화’ 제작이 아예 의무화되었고, ‘국책영화’를 제작할 경우 수입쿼터를 주는 조항도 추가되었다. 제작사들은 일단 저예산 제작으로 작품 편수를 채우는 데 치중했으므로, 작품의 질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액션 장르를 중심으로 호스티스·에로영화가 판을 쳤다. < 바보들의 행진 >은 1975년 1월 말까지 진행된 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곳곳에 개작과 삭제 통보를 받았고, 그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2월부터 2개월간 촬영을 마친 후 4월 초 다시 본편 심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15군데의 삭제와 단축 통지를 받았다. 영화는 4월 3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 49일 동안 17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검열에 시달린 감독으로서는 예상조차 못한 히트였다. 그리고 당국은 이 작품에 ‘우수영화’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국가의 폭력과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새긴 영화를 통해 당대 관객들은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 하길종 감독이 있었다. 뉴웨이브의 기수 하길종 1941년 4월 부산에서 태어난 하길종 은 1959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데모대의 최전선에서 4·19 혁명을 경험했다. 문학 활동을 했지만 후배 김승옥 등에 비해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졸업 후 항공사에 입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를 만든다. 1965년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해 정규 영화교육을 받았고 M.A(이론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영화계 데뷔 전 하길종의 일부 이력에 대해서는 신화화된 점이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지만(안재석, 「하길종 감독 바로보기」, 『영화연구』, 2009), 그의 미국 체류가 이후 영화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미국은 저항운동과 청년 문화가 주도한 변혁의 시기였고, 특히 그가 미국에 도착한 1960년대 중반은 미국영화의 뉴웨이브 즉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태동한 때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또 영화언어적으로 청년 하길종의 이성과 감성의 각 회로는 쉴 틈조차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1970년 한국에 돌아온 하길종의 연출 활동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김지하와 야심만만하게 개발한 시나리오 「태안전쟁」은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효석 원작을 동생 하명중 이 각색한 < 화분 >의 촬영도 예산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972년 데뷔작 <화분>을 완성했지만, 영화가 내포한 정치성으로 대중적인 호응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시나리오들 역시 대중성 부족과 검열의 문제로 좌초되었다. 미학적 실험이 이어진 1974년 < 수절 > 역시 흥행에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1975년 세 번째 연출작 < 바보들의 행진 >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청년들의 감수성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최인호 의 원작이었고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단성사 시사가 끝난 후 김수용 감독이 영화의 대중적 감각을 칭찬하자 하길종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는 그래서 유명하다. 검열로 인해 117분의 영화가 99분가량의 작품이 되었지만, 청년 관객들은 열광했다. 물론 감독 하길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지만, 그는 이 영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한국영화 10선으로 선정될 만큼 높게 평가받는 작품이고 하길종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대표작으로 <화분>을 뽑았다. 영화가 성공한 그해 하길종은 ‘영상시대’ 동인이 되었고,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그는 < 여자를 찾습니다 >(1976)와 < 한네의 승천 >(1977, 미개봉)으로 다시 주춤했고, < 별들의 고향(속) >(1978, 32만), < 병태와 영자 >(1979, 18만)로 흥행에 성공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세 작품 모두 최인호의 원작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점은, 서구의 ‘뉴웨이브’ 영화언어라는 이상과 통속적 대중문화라는 현실 사이에 놓인 하길종의 복잡한 고민을 짐작하게 만든다. 1979년 2월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단 7편의 극영화를 남기고 요절한 하길종 감독 빛나는 감각 그리고 검열의 흔적 사운드 없이 대학생들이 팬티만 입고 연병장을 행진하는 장면으로 갑갑한 병영 사회임을 암시하며 시작하는 < 바보들의 행진 >은 검열과의 고투를 텍스트 곳곳에 노정하고 있는 영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102분 버전의 영화(블루레이 출시본)는 당시 개봉 때보다 2분 29초 더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네거티브(원본) 필름 자체에서 삭제된 15분 정도의 분량은 심의대본을 통해서만 상상해볼 수 있다. 병태( 윤문섭 )와 영철( 하재영 )이 참가한 입대 신체검사 장면이 끝난 후, 영화는 대학 캠퍼스로 자리를 옮겨 철학과 학생들이 인근 여대 불문과 학생들과의 미팅을 계획하는 장면을 담는다. 목욕탕에서 광을 낸 병태와 영철은 미팅 장소로 향하다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린다. 이 에피소드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영화 화법을 고민하고 완성시킨 하길종의 감각이 제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경찰과 마주친 순간 병태와 영철이 도망가기 시작하면 송창식의 ‘왜 불러’가 흘러나오고, 가사와 이미지가 맞아떨어지는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이 계속된다. 촬영된 화면에는 구경하는 인파가 그대로 등장하지만 경찰과 장발 대학생들의 추격전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결국 둘은 경찰서로 잡혀가고, 경찰은 미팅이 있다는 둘에게 “흔해빠진 게 대학생인데 너희들은 혼이 나야 해, 너희들은 괴질이야”라고 나무란다.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경찰조차 장발이라는 점이다. “순경의 머리 긴 장면 클로즈업된 곳 단축”이라고 지시한 심의서류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연히 검열 과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102분 버전에는 살아있는 덕분에, 정부 권력에 대한 하길종 의 조롱과 야유를 읽어낼 수 있다. 둘은 경찰이 한눈판 틈을 타 경찰서에서 도망가고, 경찰이 “야 임마, 학생” 하고 둘을 부르자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 왜 불러”라는 가사가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온다. 이후 영화는 대학생들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분위기와 암울한 정서를 오가며 ‘파편적’으로 진행된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의 심의 사항을 반영한 117분의 텍스트에서 또 20분 이상 잘라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요구 사항을 반영한 영화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신을 흩트리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수없이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입의 ‘왜 불러’ 시퀀스가 보여주는 영화적 감각이, 전체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가면서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불균질한 텍스트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특히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이후 급격히 무너지는 리듬은 프랑스 누벨바그식의 형식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 포기한 채 단순히 나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유다. 심의대본에서 영화로 옮겨지며 크게 바뀐 장면 중 하나는 학생들의 시위로 휴강하는 신이다. 대본상으로는 학생들의 시위가 묘사되고(물론 이는 유신 반대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시위로 표현된다), 교수는 참가할 사람은 나가라고 말한다. 결국 교수는 휴강하겠다며 강의실을 떠나고, 칠판을 지우던 병태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상국가’의 획을 지우고 덧붙여 ‘사구라’로 바꾼다. 원래의 연출 의도는 학생들의 시위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한 캠퍼스 풍경과 강의실에 홀로 앉아 고민에 빠진 병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에는 시위 장면을 모두 연고전으로 추정되는 여러 운동 경기의 실사 영상으로 바꿨다.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이 더 진전한 부분도 있다. 최종 대본(녹음대본)에는 아예 글자를 고친다고만 지시하며 한발 물러나 있지만, 사구라에서 ‘사쿠라’로 한 획을 더 쓰려고 하는 순간 커트하는 것이다. 이상국가에서 바뀐 사쿠라는 일본어로 벚꽃이기도 하지만 사기꾼, 야바위꾼, 한통속 같은 의미도 있다. 한국에서는 가짜라는 의미로도 즐겨 쓴다.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 맨 아래 줄 왼쪽이 소설가 최인호, 오른쪽은 코미디언 이기동 한국의 ‘뉴 시네마’가 태어나다 < 바보들의 행진 >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비롯해 전 세계적 뉴웨이브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청년 문화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그들이 놓인 배경을 다큐적 질감으로 제시하고 또 거칠지만 인상적인 숏 배열을 보여준다. 과감하게 줌을 쓰는 장면들도 그렇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기성곡을 영화음악으로 활용하며 뮤직비디오 신을 만든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을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해 영화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날이 갈수록’은 영화가 엔딩을 준비하면서 흘러나온다. 무기한 휴강이 결정된 캠퍼스에서 “들립니까”라는 외침이 들리고 병태는 구역질을 하는 듯 괴로워 보인다. 그리고 예쁜 고래를 잡겠다고 버릇처럼 얘기하던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 ‘고래사냥’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영철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신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뽑힌다. ‘그냥’ 입대를 선택한 병태는 빡빡 머리를 하고 입영열차에 타고 있고, 영자( 이영옥 )가 플랫폼으로 뛰어와 그를 찾아낸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병태에게 영자가 키스하려 하고, 낭만적이게도 헌병이 그녀를 들어 키스를 도와준다. 심의대본에서 “입술을 맞추는 영자, 말리는 헌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당대의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한국영화의 뉴웨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는 검열이었을지 모른다. 할리우드에서 작가주의 영화가 자본과 제작 현장의 소음을 뚫고 나온 것이라면 1970년대 한국영화의 작가주의는 당국의 가위질을 견디는 것까지 추가해야 했다. 하길종이 만들고 싶었던 ‘새로운 영화’는 당국의 집요한 검열로 파편화된 불균질한 텍스트가 되었고, 이는 당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의 ‘뉴 시네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검열과 자본과 창작자가 빚어낸 한국영화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은 1980년대로 이어졌다. 영철 역의 하재영(왼쪽)과 영자 역의 이영옥(오른쪽) 침체의 연속 197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낸 것은, 1960년대 대표적인 감독들과 영상시대 동인 덕분이었다. 유현목 , 이만희 , 정진우 가 각각 < 장마 >(1979), < 삼포가는 길 >(1975), < 심봤다 >(1979) 등을 내놓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고, 김호선 , 홍파 , 이원세 등 영상시대 동인들의 작품이 또 다른 축을 버텨냈다. 특히 영상시대 활동은 동인으로 참가한 평론가 변인식 의 평가처럼 비록 ‘바보들의 행진’으로 끝났지만, 1980년대 초반의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영화, 더 나아가 ‘코리안 뉴웨이브’의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 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신군부의 영화 정책은 유신 체제의 기조를 이으면서 반공안보영화의 제작을 추가했다. 당국의 요구대로 반공영화를 만들었지만, 반공영화가 아닌 반공영화가 등장한 것도 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장르영화로 연마한 임권택 의 구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박노식 은 배우 ‘용팔이’가 아닌 ‘감독 박노식’으로서도 여러모로 연구해볼 만한 사람이다. 단언컨대, 감독 박노식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진짜 ‘컬트’ 영화를 만든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먼저 박노식 스스로 ‘주먹 배우’라 지칭할 정도로 악명을 떨쳤던 그는, 경찰 폭행으로 인한 구치소 생활 중에 감독이 되어 자신의 영화인생을 확 바꿔보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가 세상을 뜬 1995년 출간된 자서전 「박노식 은막 43년의 고백: 뻥까오리 백작」을 보면, 그 순간에 대해 “마치 인생 사표를 쓰고 인간답지 않은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 번 든다. 갑자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지금 내가 느낀 이 아픔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심판을 받아보자. 나는 연기, 감독, 제작에 시나리오까지 1인 4역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고 쓰고 있다. 사실상 박노식 이 즉흥적으로 영화감독을 꿈꾼 것이라면 거기에는 어떤 ‘결핍’이 있었을 것이다. 가령 그는 김진규, 신영균, 신성일, 남궁원 등과 비교해 손색없는 주연급 배우였지만 수상경력이나 비평적 인지도에 있어서 다소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례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지난 2004년 펴낸 「한국영화사 공부 1960-1979」를 보면 박노식이라는 이름은 그들과 달리 아예 색인조차 없다. 아무래도 ‘작가영화’의 주인공이기보다는 ‘성격파 배우’ 혹은 ‘용팔이’로 대표되는 상업적 아이콘으로 더욱 각인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감독 데뷔작은 어딘가 당시 구치소 시절의 기억이 투영된 것 같은 제목을 지닌 < 인간 사표를 써라 >(1971)였다. < 인간 사표를 써라 >부터 ‘복수극’과 ‘멜로드라마’라는, 이후 박노식 감독의 작품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두 개의 테마가 보인다. 직접 주연까지 도맡은 그의 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위험한 스턴트와 더불어 당시로선 무척 드물었던 자동차 추격 장면은 물론, 자신의 두 눈을 뽑아 주려고 하는 극단적 신체 훼손의 묘사가 난무했다. 물론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영웅 서사의 답습이었다. 그런데 이후 < 나 >(1971), < 쟉크를 채워라 >(1972), < 지프 >(1972)를 차례로 연출한 뒤 또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사회 각층의 대표적인 폭력배를 검거하라는 지시에 의해 억울하게도 2년 전 폭력사건이 빌미가 돼 시범 케이스로 걸린 것이다. “하도 집행유예를 많이 당해서 <집행유예>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실제로 < 집행유예 >(1973)를 만들었고, 연출자적 광기는 더욱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된다. 형무소에 수감된 그가 복수를 위해 탈옥하려고, 스스로 나병 환자가 된 것처럼 꾸미려 하는 장면이 단연 압권이다. 그런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이 캐릭터에 녹아든 게 아닐까 싶다. 이후 박노식 감독의 극단적인 영화관과 세계관을 가장 절묘하게 드러낸 < 왜? >(1974)와 < 광녀 >(1975)를 지나, 그의 인장이 뚜렷이 새겨진 마지막 작품이 바로 <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 >(1977)다(물론 감독으로서의 유작은 1983년에 만든 < 돌아온 용팔이 >다). 두 눈을 잃고 장님이 된 박동혁( 박노식 )과 한예지( 안보영 )의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로, 광복 이후 일본군 패잔병들에 의해 눈이 멀게 된 동혁이 세월이 흘러 복수를 꿈꾼다. 아예 두 눈을 잃어버려 복수하기가 도무지 힘들어 보이는 상황을 연인이 도와준다는 설정은, 그 특유의 ‘복수의 멜로극’이라는 테마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장르적으로 접붙인 것이다. 동혁을 위해 눈이 돼 주는 예지의 모습과, 눈이 먼 채로 동혁이 갖가지 살인 기술을 익혀 사용하는 모습이 현재의 시선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더불어 카체이스신 등 그가 선호했던 상업적 요소 또한 소홀하지 않는다. ‘일본군’과 ‘금괴’라는 이른바 ‘대륙물’로 대표되는 당대 한국액션영화의 단골 소재들도 뒤엉켜, 극과 극이 맞부딪혀 끝까지 나아가는 당대 한국 장르영화의 기이하고 뒤틀린 욕망을 보여주는 것. 보통 배우 출신 감독은 함께 오래도록 작업한 감독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 황야의 무법자 >(1964)를 통한 셀지오 레오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관계다. 그런데 박노식 은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 중 스타일 면에서 유사한 이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극단적 연출자적 광기는 과연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앞서 얘기한 자서전의 첫 문장은 “난 원래부터 평범한 삶은 싫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것은 배우 박노식과 감독 박노식의 세계관 모두에 적용되는 말이다. 어떻게든 남과 달라야 한다는 필요 이상의 강박관념이 늦깎이 감독의 조바심에 깊숙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남들이 괴상하다고 여길지언정 뭔가 색다르다고 받아들인다면 성공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불균질함을 넘어 거의 무질서하기까지 한 그 영화들의 내적 리듬과 디테일이 심지어 묘한 매혹으로 다가온다. 당시 그의 영화들은 한국영화사를 통틀어도 주변 감독들과의 유사성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컬트’였다. 그처럼 ‘감독 박노식 ’은 ‘용팔이 박노식’과 달리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후 박노식은 마치 아무 것도 보기 싫다는 듯, 마치 눈이 먼 영화 속 주인공처럼 미련 없이 한국영화계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 스스로는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남과 다르고 싶다는 욕망이 기어이 기존의 장르영화들을 작파하게 만든, 진짜 B무비를 만든 당대 거의 유일한 한국 감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