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굴왕
- 감독
- 나운규
- 제작년도
- 1932
- 출연
- 나운규, 극단 신무대원일동
- 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 <애니메쥬> 1986년도에 실린 독자 인기 캐릭터 순위. 1위는 해당 잡지에 만화판이 연재되고 있던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의 주인공 나우시카가 엄청난 격차로 압도적인 수위를 차지했지만, 2위와 6위에 < 천공의 성 라퓨타 >의 두 주인공 시타와 파즈가 올라 1986년 개봉 당시의 <라퓨타>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추천애니 코너에서 쭉 한국 애니메이션만을 다뤄왔다. 이번에는 일본의 고전 명작 애니메이션인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기에 일본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 있어서 처음으로 일본 작품을 다뤄볼까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를 연출한 키타쿠보 히로유키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 천공의 성 라퓨타 >(이하 <라퓨타>)를 미야자키 감독 스스로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밝혔다가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 라퓨타 >를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중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키타쿠보 히로유키씨가 트위터에서 발언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 천공의 성 라퓨타 >를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이 일본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다. 키타쿠보 히로유키씨는 1979년 15살 때에 <기동전사 건담>의 원화를 담당하면서 애니메이터로 데뷔한 감독으로, 1985년 첫 감독작품인 (< 크림 레몬 > 시리즈) 이후 옴니버스 작품 <로보트 카니발>에서 <메이지 기계문명 기담 ∼홍모인 습래지권∼>의 감독과 시나리오를 맡았다. 그리고 <블랙매직 M-66>(감독·캐릭터디자인), <죠죠의 기묘한 모험>(감독), (감독) 등의 작품에 참여했으며, 극장애니메이션인 <노인Z>(1991년/감독), (2000년/감독) 등을 연출한 바 있다. 그런 베테랑 감독이 한 발언인 관계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정확한 발언 내용을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트위터에서 한 발언인 관계로 구어체로 써있는 것을, 필자가 어느 정도 의역해서 문장으로 만들었다.) 2012년 5월 18일 23시 29분 19초∼5월 19일 00시 20분 30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말해보자→ ‘대디’ 미야자키 감독 자신은 < 천공의 성 라퓨타 >를 실패작이라고 싫어한다.” “대디 미야자키 감독이 아니더라도, 창작자라면 < 라퓨타 >가 ‘실패작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 상식. Boy meets Girl로 시작되는 스토리에서 ‘주인공은 파즈’, 즉 구조상 주브나일로 성립시켜야 하는데도 설정은 물론이고 가치관까지 전부 부자연스럽게 밸런스가 무너져 있다.” “주브나일, 즉 모험소년이야기로서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우선 탄광부스러운 일을 하면서 미트볼 하나 덤으로 받은 것 가지고 좋아하던 소년이, 부모님도 없이 그렇게 많은 비둘기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정보부가 시타를 잡아가면서 넘겨준 금화를 버리지도 못할 정도이면서.” “스토리의 고조점이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시타 구출 장면이 되면서 본래 가장 중요한 모티베이션인 ‘아버지가 발견한 천공의 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단순한 통과점이 되어버렸다는 점.” “게다가 모험 이야기의 왕도인 ‘주인공의 성장과 활약으로 곤란을 극복하여 카타르시스를 얻’어야 하는데도, 사실상의 최종 결정은 파즈가 아니라 시타가 이미 결심을 하고 있었고, 파즈의 선택도 마찬가지로 멸망의 주문을 외치는 할복 자살 만세 공격일 뿐. (중략)” “가장 가치관이 붕괴했다고 보이는 상징적인 부분으로는, 라퓨타에 도착한 병사들이 보물을 꺼내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에 대해서 ‘정말 나쁜 짓을 하네’라고 시타한테 말해놓고서, 라스트에서는 도라 일행이 몰래 숨겨온 보물을 보며 미소짓는 황당함. 세세한 부분까지 예를 들자면 끝이 없으니까 이 정도로 멈추겠다.” (※주브나일(juvenile) - 소설 장르의 하나로, 영미권에서는 ‘영 어덜트 픽션(young adult fiction)’이라고 한다. 틴에이저(10대 청소년)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을 말하는데, 1802년 영국 작가 사라 트리머(Sarah Trimmer)가 14세부터 21세까지의 독자를 ‘영 어덜트후드(young adulthood)’로 구분지은 데에 유래한다. 19세기에 발표된 작품 중 <올리버 트위스트> <몽테 크리스토 백작> <톰 소여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보물섬> <정글 북> 등을 주브나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1970~80년대에 ‘영어덜트소설’보다 ‘주브나일’이란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1990년대 이후 ‘라이트노벨’이란 신조어에 밀려 이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일종의 역사적 단어이다.) ■ “< 라퓨타 >는 실패작” 발언에 대한 반발과 키타쿠보 감독의 본의 물론 키타쿠보 감독의 이 발언에는 여러 가지 이견과 반발이 일어났고, 그에 대해 추가로 이런 발언도 남기고 있다. “가치관이 무너져 있지만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또한 < 라퓨타 >의 실패가 없었다면 < 이웃집 토토로 >의 대성공도 없었을 것이기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따져본다면 약간 플러스겠죠.” “작품으로서 감독 본인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좋아하는 관객 분들이 계시고, 흥행적으로도 물론 성공했습니다. 그와 유사한 사례라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기억하고 있습니까>가 있겠죠.” 또한 키타쿠보 감독은 팬들의 반발에 대해 “내가 언제 < 라퓨타 >가 재미없다고 했느냐”, “제작자와 관객은 같은 사고 루틴을 가질 수는 없는 법”, “제작자에겐 좌절이 있기 때문에 다음 번에 꼭 만회하겠다는 강한 모티베이션으로 이어지는 것”, “설령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자기자신이 느낀 반성점을 회피하는 태도로는 작품의 질이 향상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발언도 추가하고 있다.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키타쿠보 감독 역시 관객으로서 < 라퓨타 >를 싫어한다거나 개인적으로 재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창작자, 크리에이터로서의 입장에서, <라퓨타>란 작품이 설정된 캐릭터를 올바르게 스토리로서 구성해내지 못한 작품, 즉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 미야자키 감독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참고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 라퓨타 >를 실패작으로 손꼽고 있다는 근거에 대해서는 키타쿠보 감독은 “미야자키 감독이 직접 실패였다고 발언한 것을 들은 스태프가 여러 명 존재한다. 다만 팬의 심경을 고려해서 공공연하게는 발언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 창작자와 관객의 입장 문제는 실제로 < 라퓨타 >가 실패작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든, 수용자가 그것을 신경쓸 필요는 없다는 점은 이번 트위터 논쟁에서도 많은 일본인들이 발언하고 있다. 당연히 <라퓨타>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지금까지 일본에서도 TV방송을 여러 번 하면서 매번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011년 12월에도 일본 TV에서 방송되었는데, 작중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주인공 파즈와 시타가 하는 대사 “바르스!”는 당시 트위터 상에서 1초당 2만5천개의 글이 올라오면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2011년 12월 14일의 트위터 공식 발표에 따르면, 12월 9일 일본에서 TV 방영된 <라퓨타>의 방송 중에 1초당 25088건의 투고가 이루어져 당시까지의 트위터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 라퓨타 >는 1980년대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작품이었다. < 미래소년 코난 >이란 TV애니메이션이 국내에서도 8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작으로 자리잡았는데, 그 감독이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내놓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소개에 <라퓨타>를 접했던 이들이 <코난>을 연상케 하면서도 또 다른 스타일에 반했던 것이다. 필자 역시 1980년대에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미’를 다시금 느꼈으니만큼, 당연히 이 작품이 주는 재미를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키타쿠보 히로유키 감독 역시 앞서 말했듯이 <라퓨타>가 재미없다는 말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라퓨타>를 재미있게 본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라퓨타>가 본래 좀 더 긴 작품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는 등, 아직 오리지널 장편 극장 애니메이션을 처음 만들던 당시의 미야자키 감독으로서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느꼈을 가능성은 높다. 대부분의 창작자가 특히 본인의 초기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자기반성이 없는 창작자는 발전이 없을 테니, 거장으로 평가받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라면 본인의 초기작인 <라퓨타>를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다만 이처럼 ‘고전 명작’으로 자리잡은 작품에 대해서도 크리에이터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판단을 해야할 수 있다는 점을 키타쿠보 감독은 지적하고자 했던 듯 하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스토리상의, 설정상의 문제점은 창작자로서 충분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창작자 입장에서의 발언에 대해 대부분 관객 입장일 다수의 일본 트위터 이용자들이 반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트위터라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이트 자체가 일종의 ‘채팅’과도 같은 형식으로, 140자라는 짧은 분량으로 제한적인 발언이 가능한 공간이다 보니 키타쿠보 감독이 표현에 있어서 부족했던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명백히 창작자의 입장에서 < 라퓨타 >란 작품에 이러이러한 면이 설정상 모순이고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는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설명 부족인 채 건너뛰었다는 지적은 비단 창작자만이 아니라 평론가이든 누구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 사건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 발언했다는 것임에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창작자, 표현자의 SNS 이용 방법에 관한 문제라든지 대중의 리터러시(literacy) 등 다양한 논의점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 <천공의 성 라퓨타 >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간단히 < 라퓨타 >란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86년 작품으로, 원작이 없이 처음으로 원작·각본·감독을 전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맡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다. 프로듀서로는 타카하타 이사오(< 반딧불의 묘 >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감독), 음악은 전작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에 이어 히사이시 죠가 이어서 맡았다. (히사이시 죠는 이후 최신작 < 벼랑 위의 포뇨 >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 전부의 음악을 맡았다. 그 외에는 한국영화 < 웰컴 투 동막골 >의 음악도 담당.) 참여 애니메이터를 살펴보면, 일본의 ‘스타 애니메이터’인 카나다 요시노리가 ‘원화 팀장(原畵頭)’이라는 독특한 직책명으로 참가하고 있다. (보통 일본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직책명을 카나다 요시노리만을 위해 따로 만든 것.) 카나다는 < 나우시카 >부터 < 모노노케 히메 >까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 쭉 원화로 참가했고, <무적초인 잠보트3> <무적강인 다이탄3> 등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로봇 애니메이션에도 참가하여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외에도 원화 애니메이터로 마에다 마히로(<청의 6호> <암굴왕> 감독), 코사카 키타로(<가지(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 감독), 콘도 카츠야(< 바다가 들린다 > < 코쿠리코 언덕에서 > 캐릭터디자이너), 나쿠라 야스히로(<천사의 알> 작화감독, < 메트로폴리스 > 캐릭터디자이너·총작화감독), 나베시마 오사무(< 괴도 세인트 테일 >=한국 제목 <천사소녀 네티> 감독), 토모나가 카즈히데(< 명탐정 홈즈 >=한국 제목 <명탐정 번개> <루팡 3세 후마 일족의 음모>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 작화감독) 등,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 라퓨타 >는 그 내용은 물론이고 제작 스태프 측면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영화의 사극 분야에서 일가견을 지녔던 <카메라의 황소>. 고 최인현 감독은 90년 11월11일 타계했다. 영화계의 커다란 대들보 하나를 놓친 셈이 됐다. 인생 무상이 새삼 느껴지는 것은 그가 불과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것. 단단한 체격에 늘 머플러를 둘러 메고 싱긋 웃음을 먹으면서 충무로를 거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필름의 전성기였던 60년대 초부터 75년 이 회사 메이커 허가가 취소 될 때까지 영화 인생 모두를 신상옥 감독과 콤비로 일관한 그는 궁중의 복잡 미묘한 예의 범절은 물론 의상 소품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때를 영화계에서는 신상옥을 주축으로 좌최인현 우 이형표 라고 불렀을 정도. 최감독은 이때 이같은 모든 사극에 관한 것을 노트에 빼곡히 정리, 지니고 다녔는데 아마 지금은 후배이자 콤비였던 이은수 감독이 갖고 있을 것이다 임금 면전에서 물러 날 때는 뒤 돌아서지 않고 마주 한 채 뒷걸음으로 나가야하며 수행할때는 절대로 그림자를 피해 3보 뒤에서 따르되 지위에 따라 좌우로 갈라 서야 한다는 것은 그가 찾아낸 고증이다. 이밖에도 수없이 많으나 요즘 가끔씩 제작되는 사극영화나 TV드라마를 보면 엉터리가 자주 튀어 나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1962년 < 눈물어린 발자국 >으로 데뷔한 최감독이 활짝 꽃피운 것은 64년 본격적인 홍콩 합작으로 만든 < 달비 >. 중국 발음으로 <달기>라고 개봉한 이영화는 대히트, 대만 홍콩에서도 난리 법석을 피웠다. 당시 약1천만원 (현재 약1백억 추산)으로 신필름이 제작하고 홍콩이 배급을 맡았으며 일본 촬영기사를 데려다 만들었다. 주연은 신영균 과 당시 홍콩의 세계적 스타였던 린 다이 ,그리고 최은희 김승호 가 공연했다. 달기라하면 중국에서 가장 미녀였던 왕비 4명 중 하나로 진나라 때 인물. 반정에서 구사 일생한 왕자가 성장한 후 왕좌 복귀에 성공하지만 사랑하던 공주는 끝내 불에 산화한다는 얘기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성곽 세트 등을 지어 불 태움으로써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곤 했다. 이 작품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최감독은 < 태조 이성계 >(1965) < 태조 왕건 >(1970) < 이조상노비사 >(1974) < 홍길동 >(1976) < 집념 >(1976) < 관세음보살 >(1978) < 세종대왕 >(1978) < 소명 >(1984) 등의 작품을 내놓았다. 평생 만들어 낸 영화64편 중 사극만 30여 편이나 된다. 이같은 사실은 학계나 평단에서 깊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태조 이성계>는 얼마전 KBS TV 드라마 < 용의 눈물 >로 공전의 히트를 한 모태이며 < 태조 왕건 >역시 같은 상황이다. 두 작품 모두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 했다는 것은 당시가 그 들의 전성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니까 TV에서 이성계를 연기했던 유동근 이나 왕건 역의 최수종 이 모두 신영균 의 남성미로 그려졌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아끼고 싶어하는 작품으로 < 李箱의 날개 >(1968)와 < 집념 >을 꼽곤 했다. 마지막 작품은 타계하기 6개월전 끝내고 9월달에 개봉한 < 친구야 친구야 >.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드라마틱 하지 않은가. 영화계에서는 그의 대표작으로 <집념>을 꼽는다. 동의보감이라는 제목으로 TV에서 방영했던 것을 원작자이자 각본도 썼던 이은성 씨가 '다시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제작하게 됐었다. 당시 최 감독은 허 준의 초상화까지 입수하여 사실적 묘사에 애를 썼으며 주인공을 맡았던 이순재 에게 이 같은 이미지를 계속 요구하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게 추억담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76년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최감독은 당시 '사람이 뜻을 세우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소신을 성취하는 인물상을 그리는 게 영화감독의 사명'이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에 대한 해박한 현장 이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내색치 않았으며 평소 넉넉한 품새로 일관, 생활이 어려워 고양군으로 이사를 한 말년에도 낡은 차이지만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곤 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현장에서는 호랑이로 돌변, 한치의 착오도 용납치 않았다. 특히 수백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는 몹신(군중 장면)에 일가견을 가져 동료 감독들이 지원을 요청하면 흔쾌히 현장에 달려 가는 의리파이기도 했다. 80년이던가. 동남아 취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머무를 때일 게다. 느닷없이 최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서울에서는 TV만화 <캔디 캔디>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대인기인데 만화가를 만나서 영화화 권을 얻어다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럽시다 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그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단지 무기가 있다면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국제 저작권 연맹에 가입이 되지 않아서 거절하면 일방적으로 만들겠다고 얘기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작가 찾기에 나섰다. 물어물어 작가와 통화를 하니 여자가 아닌가. 만나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작가는 자기이지만 판권은 출판사와 만화 영화사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결국 레스토랑 저녁 식사 대접에 근사한 외국인 전용 스탠드바에까지 가며 설득 끝에 다음날 판권을 얻어냈지만 자신을 꼭 촬영 현장에 초청해달라는 부탁이 첨부됐다. 귀국해서 보니 웬걸. 최감독과 스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만든다는 전략이었다. 당시는 우리 영화사상 드물게 흥행이 안되던 시기. 이를 어린이영화로 뚫어 보자는 기획이었으나 첫날만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뿐 파리를 날렸다. 겨우 본전 조금 넘겨 막을 내렸는데 이때 주연을 한 배우가 나중에 탤런트가 된 최선아이다. 물론 일본 작가에겐 전화로나마 사정해서 빌 수밖에. 그런데 그 작가가 오히려 위로를 하는게 아닌가. 일본에서 이미 조사를 했던 것이다. 그후 그녀는 친구처럼 되었는데 90년 이후 신문사 간부가 된 이후로는 일본에 들러도 하루 이틀만에 돌아오니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도 슬하에 자식을 둔 할머니가 됐으리라.. 최감독은 1928년 10월 24일 생이니 생존했으면 75세이다. 경남 진주 태생으로 집안이 부호였다. 진주 농대를 나와 고등학교 교편 생활을 하다가 영화계에 입문한 ,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모두 고인이 된 소설가 이병주씨, 테너 섹스폰의 달인이었던 이봉조 씨와 동문이기도 하다. 사극 전문이니 그럴 법 할 것이라고 들 생각하겠지만 작가 신봉승 씨와의 우정은 너무 각별하다. 영화 평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작품이 된 < 친구야 친구야 >도 신봉승씨의 오리지널 작품이다. 출감한 운동권 학생의 사랑과 우정, 배신과 의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원 등을 다룬 이 영화는 범작 수준이었다지만 60이 넘은 세대로 고통의 세월을 산 젊은이들 얘기를 다루면서 시대를 읽고 싶어했을 것이다. 전영록 이 주연한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을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며 이리 뛰고 저리뛰고 했으리라. 술만 들어가면 '진주라 천리길'을 굵직한 목소리로 불러 제키던 최인현 . 한때는 흥행 성공으로 서울 삼청동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며 장안에서 몇대 되지도 않던 지프차를 타고 다니던 호기도 잇따른 제작 실패로 가정의 파국까지 불러왔으며 이 때문에 재기하려고 몸부림 쳤는지 모르겠다. 최감독의 타계가 안타까운 것은 그 동안 영화계의 의례로 상사 때마다 치러져 왔던 영화인장이나 영협 감독위원회장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소문 없이 가족장으로 묻힌 것 일게다. '허 허'하는 호걸풍의 웃음에 말술을 마다 않던 황소 같은 대인 최인현 감독도 덧없이 사라져 갔다. 김량삼 (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28. 10. 24일 경남 진주 출생 1950. 6 경남 진주 농과대학 졸업 1950. 9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정훈공작대장 근무 1951. 4 경남 대곡중학교 교사 근무 1990. 11. 16 향연 62세로 타계 <주요 경력> 1956. 10. 영화계 입문( 김소동 감독 극영화 < 아리랑 > 조감독) 1968. 4. < 삼현육각 >(전남일보 주최 백상영화제 수상작) 1968. 10. 최인현 프로덕션 설립 1970. 4. < 삼호 탈출 > 제10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 수상 한국연극영화예술대상 작품 대상 수상 1986. 8. 공연윤리위원회 전문 심사위원 1989. 10. 은성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작품 연보> 1962 피어린 발자국 1963 쌍검무 1964 비련의 왕후 달기 / 사자성 1965 태조 이성계 / 정조성 / 한많은 대동강 1966 오복문 / 너와나 / 양반전 1967 천도화 / 총각원님 / 나그네 임금 / 풍운 삼국지 / 칠부 열녀 / 상감마마 미워요 / 두 나그네 1968 언니의 일기 / 백야 / 자주댕기 / 삼현육각 / 오월생 / 로맨스 마마 / 암굴왕 / 방랑대군 / 이상의 날개 / 순덕이 / 내 생애 단 한번만 1969 인의 여검객 / 부각하 / 동경의 왼손잡이 / 젊은이의 태양 / 춘원 이광수 / 만고강산 1970 일요일밤과 월요일 아침 / 굿바이 동경 / 엑스포 70 동경작전 / 삼호탈출 / 황금70 홍콩작전 / 동경의 무정가 / 태조 왕건 / 한없이 기다려도 / 극동의 무법자 1971 미워도 정 때문에 / 기러기 남매 / 암흑가의 공포 / 타이페이 3만리 / 고향을 묻지마라 1972 인간 낙제생 / 명동잔혹사(2화) / 어머님 용서하세요 / 아빠라 부르는 연인 1973 열궁녀 / 출발 1974 숙녀 초년생 / 이조상노비사 1975 소림사의 결투 1976 홍길동 / 집념 1977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1978 관세음보살 / 세종대왕 / 안개 속의 여인 1979 영원한 유산 1981 캔디-캔디 1982 고통의 멍애를 벗으려고/ 젊음의 광장 1983 후송열차 / 사랑하는 전우야 1984 소명 / 자동차 오늘과 내일 그리고 미래 1985 쌍용 사람들 1987 마지막 선물 1988 우리 하나 되어 1990 친구야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