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툰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연속간행물
- 보관위치
- —
애니메이션 < 생각보다 맑은 >은, 과거 김운기 , 연상호 , 장형윤 감독의 단편을 묶었던 < 인디애니박스: 셀마의 단백질 커피 >(2008)와 안재훈 , 한혜진 감독이 만들었던 <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2014) 등과 마찬가지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옴니버스 형태로 묶어서 개봉한 작품이다. <럭키미> < 사랑한다 말해 > < 코피루왁 > < 학교 가는 길 > 등 한지원 감독이 만들어온 4편의 단편 작품을 77분 분량으로 묶어 2015년 1월에 개봉했는데, 애니메이션 팬들과 비평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각기 다른 시기에 별도 주제로 만들었던 단편 작품들을 묶어 내놓다 보니, 작화나 그림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고 내용면에서도 직접적인 공통점이 많지 않다는 것을 개봉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한지원 감독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즉 어떤 내용상의 공통점보다는 ‘감독(연출자)’을 중심으로 묶어낸 작품이라고 보면 될 텐데, 애니메이션에 있어서도 소위 ‘작가주의’라고 칭할 만한 요소를 중시하는 국내 비평 신scene에서는 이 부분이 단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국내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나 타카하타 이사오, 오시이 마모루 그리고 < 아키라 >의 오토모 카츠히로나 <기동전사 건담>의 토미노 요시유키 등 개성 강한 ‘작가’로서의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해 비평적 평가가 후하기도 하다. < 별의 목소리 > < 초속 5센티미터 >를 만든 신카이 마코토의 국내 선호도가 높은 이유도 그가 ‘사실상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별의 목소리> 이후의 작품은 더 이상 혼자서는 만들지 않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통해 만들고 있긴 하지만...) 필자는 2001년 그의 데뷔작 <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를 우연히 본 후 호감을 갖게 되어 신카이 마코토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아마 그로서도 최초의 인터뷰였을텐데, 그 후 <별의 목소리>가 개봉하면서 신카이 마코토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작가의 데뷔작부터 호감을 가진 상태에서 그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경험. 한지원 감독의 < 코피루왁 >을 처음 봤을 때부터 2015년 < 생각보다 맑은 >이 개봉되었을 때까지,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가 한지원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것은, 그가 학생 시절이었던 2009년 내내 제작하여 2010년에 개인 DVD를 제작해 판매했던 < 코피루왁 >을 우연히 보았을 때였다. 아마도 2010년 이후였을 텐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렸던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 부스의 <코피루왁> DVD를 보고 그 인상적인 그림체에 이끌려 구입하게 되었다. 단편애니메이션 < 코피루왁 >이 수록된 DVD(필자 개인 소장품) 애니메이션 잡지 「애니메이툰」 88호(2010년)에는, 당시 < 코피루왁 >으로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에서 대상 수상을 한 한지원 감독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웬만한 단편애니메이션보다 긴 20분의 러닝타임을 1년 내내 완성해냈는데, 그것도 스토리보드 작업 없이, 동화(動畵)를 만들면서 도중에 바로 연출 작업을 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주얼 적인 면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보다 이야기를 최대한 무리 없이 매끄럽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편집에서 어긋나면 바로 오류가 보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스토리보드가 없는 점은 편집할 때 다소 유연성있게, 장면을 넣고 빼고 할 수 있어 좋았지만 굉장히 힘들었다.” (「애니메이툰」 88호, 2010년) < 코피루왁 >을 통해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데뷔한 후 < 천년여우 여우비 >의 이성강 , < 사이비 >의 연상호 , <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의 장형윤 감독 등이 응원과 칭찬을 하며 한지원 감독의 역량을 인정해주었는데, 예를 들어 이런 내용이었다. “정말 혜성 같은 신인이 등장했다. 이게 졸업작품도 아니고 실습작품이라니. 긴 러닝타임을 소화해 내는 저력, 세련된 스타일, 선명한 주제의식. 단연 올해 최고의 작품이다.” ( 장형윤 감독 발언, 네이버캐스트, 2015년) 그리고 5년 후. < 생각보다 맑은 >이 개봉했다. 이 작품의 내용에 대한 시시콜콜한 소개 보다는 필자가 알고 지내는 일본의 한국애니메이션 팬의 코멘트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생각보다 맑은>은 2015년 10월 31일~11월 3일까지 일본에서 개최되고 있는 ‘신치토세공항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新千?空港國際アニメ-ション映畵祭’에서 2회에 걸쳐 상영되었는데, < Clearer Than You Think >라는 영문 제목을 내걸고 ‘한국발, 현대 젊은이들의 싱싱한 이야기’라고 소개되었다. “리듬감, 시선, 빛과 그림자. 말이 아니라 시각을 통해 가슴에 아픔을 느낄 만큼 인물의 심정을 전달해준다. 한지원 감독만큼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인물은 없다.” (닉네임 massando) 일본에는 외국 애니메이션의 팬이 ‘극단적으로’ 적다. 자국 애니메이션이 워낙 절대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보니 외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논의가 거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그런 와중에 한국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외국 애니메이션 마니아는 나름대로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도 최근 인디애니페스트 등에 소개되는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이나 여러 작가주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팬층도 소수이나마 조금씩 증가 추세이다. 위와 같은 감상을 전해준 인물도 그 중 하나다. 한지원 감독 작품을 DVD로는 이미 접했다고 하는데, 이번 신치토세공항 영화제를 통해 직접 스크린에서 볼 수 있게 되어 감개무량하다는 반응이었다. 이처럼 국내외의 한국 애니메이션 신에서 많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의미이겠다. 한지원 감독은 현재 <피아노 마주보기>라는 웹툰 작품을 연재 중이다. 원래는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로 만들다가 웹툰으로 먼저 발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인터뷰(2015년 1월 30일)에는 이 작품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계획이 있다는 발언이 실려 있다. 한지원 감독의 차기작이 빨리 나오기를 기대한다.
최근에 《애니메이툰》에서 한국 애니메이션 50년사를 돌아보는 취지로 인물 열전을 기획했다. 사람이 모이고 이야기가 쌓여 한국 애니메이션사를 돌아볼 수 있는 한 권의 오롯한 책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인터뷰의 첫 주인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 홍길동(1967) >을 연출한 신동헌 감독님이었다. 그 뒤로 네댓 분을 더 만나 뵙고 이제 막 80년대를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그 세월을 짚고 오르기가 숨이 차다. 이제는 백발노인이 된 그들이 작품의 연도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이구동성으로 “말도 못한 고생”을 외치는 걸 연거푸 듣다보면 내가 전쟁사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감독님은 애니메이션의 ‘애’자도 듣기 싫어했다. 원로 감독님들이 가난과 고생, 눈물을 섞지 않고 애니메이션을 말할 수 없었던 근거는 ‘창작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 고혈을 짜내 애니메이션 만드는 걸 당연하게 여긴 것도 문제지만, 일본에서 ‘아톰’이 히트를 치면 ‘아텀’이라도 만들게 했던 힘센 자본의 논리도 큰 산이었다. 게다가 70년대 들어서는 아류작보다 더 돈이 되는 하청제작의 붐이 일었고, 여기에 부응하지 않고 창작을 하기란 더 어려웠다. 애니메이션이 가난과 직결되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과 달리 하청제작이 쏠쏠한 사업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몇은 창작을 그만뒀고, 몇은 아예 애니메이션을 그만뒀다.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건만 다루는 손길은 엉성하고 거칠었다. 신동헌 감독님의 < 홍길동 >은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2007년 일본에서 발굴될 때까지 필름 없이 기록으로만 존재했다. 장편보다 앞서 1961년 제작된 최초의 단편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은 완성 당시, 정작 고생해서 만든 정도빈 감독님은 필름프린트를 받을 수 없었다. 자료는 보관하던 사람의 분실로 몇 장의 콘티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이제는 중풍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 손으로 정 감독님이 인터뷰 때 그려준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 캐릭터는 그냥 유치원생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소중한 가치들이 증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가와모토 기하치로 감독이 얼마 전 작고한 일은 알아도 50년 전 한국의 여관방에서 셀 200여 장을 물로 씻어가며 첫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이 백발이 성성한 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만들 때나, 만들고 나서나 빛을 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진데 누군들 애니메이션 하고 싶을까. 그렇게 많은 작가가 재능을 등지고 애니메이션계를 떠났다. 놀랍게도 창작애니메이션하기 어려운 환경은 먹고살기 어려웠던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주 오래 전에 애니메이션을 그만 둔 한 원로 감독님이 “지금은 컴퓨터가 있어서 환경이 많이 좋아졌지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딱히 꾸며낼 말을 찾지 못했다. 셀을 씻어서 찍을 필요도 없고, 여러 지원기관도 생겨 좋은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창작애니메이션을 고난과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 익숙한 것은 왜일까.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자기 돈으로 만들라”는 어느 지원기관 전문가의 조언처럼 아직도 한국애니메이션에서 창작은 곧 외로운 싸움이다. “한국의 ???를 만들자”는 힘찬 구호는 “아텀을 만들라”는 예전의 강요와 약간의 온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대세를 따르지 않은 창작물은 원로 작가들의 작품이 사라졌던 것처럼 선보일 새도 없이 증발하고 있다. 그런 2010년을 지나고 있는 애니메이션사에서 또 몇 명의 작가가 창작을 그만두고 떠나게 될지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고난과 역경을 섞지 않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터뷰가 끝나면 책의 제목을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한국 애니메이션사》 혹은 《한국 애니메이션 전쟁사》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다. 더 이상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가 역설적으로는 가장 고됐던 시기가 되지 않기를.
제목만으로는 도무지 내용을 추측할 수 없다. 무려 세 가지 작품에서 핵심을 가져와 지은 것이니 단어의 조합이 요상할 만하다. < 셀마의 단백질 커피 >는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의 일선에 있던 세 명의 젊은 감독 김운기, 연상호, 장형윤이 통속성에 기대지 않고 자신들만의 색감으로 풀어낸 세 편의 중편 애니메이션 종합선물세트다. 요즘 같은 국산 애니메이션 불경기에 추천이라도 한국 작품으로 하려는 뻔한 심산은 아니다. 애국심만을 이유로 삼기에는 < 셀마의 단백질 커피 >가 품고 있는 애니메이션으로서의 매력들을 모른척하기 아깝다. 특히 현실감과 거리가 멀다고 오해받는 장르임에도 실사와는 다른 매력으로 현실을 제대로, 맛깔나게 표현해낸 점을 애국심보다 앞에 놓고 싶다. 가장 익숙하지만 쉽게 다뤄지지 않았던 우리의 현주소를 감독 저마다의 상상력과 감성을 통해 체감해 보는 것이 이 작품의 관람 포인트다. 그럼, 종합선물세트의 구성을 살펴볼까. 첫 번째 단어, ‘셀마’는 김운기 감독의 작품 < 원티드 >에 나오는 미스터리한 노파의 이름이다. 1987년 한국에서 큰 사상자를 낸 태풍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노파가 상징하는 진짜 의미를 더 빨리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음산한 분위기로 공포심을 유발하는 셀마의 등장과 함께 평화롭던 마을은 큰 비로 아수라장이 된다. 셀마에 대한 궁금증으로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어지는 정부의 실속 없는 재난 지원책에 대한 풍자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들춰내며 작품의 핵심을 지난다. 이국적인 느낌의 김운기 감독 특유의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는 왠지 익숙한 정치 행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두 번째 단어, ‘단백질’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 < 사랑은 단백질 >에서 먹는 혹은 먹히는 대상을 구성하는 성분이다. 배고픈 자취생들이 통닭을 시킨다는 너무나 일반적인 에피소드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닭 사장이 자신의 아들 ‘닭돌이’를 튀겨 오면서 경악할 만치 잔인한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 모두 모른 척하고 있지만 까발려보면 누구나 누군가를 죽이고, 먹고, 짓밟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노골적인 상상력이 더해졌으니 충격은 배가된다. 작품에서는 그런 상황에 대해 인간 군상들이 취하는 입장을 세 명의 자취생을 통해 그리고 있다. 현실의 통렬함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묵인하거나, 죄책감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거나. 우리 모습도 그들 중 하나를 닮아있다. 세 번째 단어, ‘커피’는 장형윤 감독의 작품 < 무림일검의 사생활 >의 주인공 검객 ‘진영영’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음료다. 전생에 강적과의 대결로 목숨을 잃은 진영영은 소원처럼 찔려도 죽지 않는 강철로 환생하지만 그것이 ‘커피 자판기’일 줄이야. 수시로 몸이 자판기로 바뀌는 불편한 상황에도 사랑은 찾아오고, 가슴에서 따뜻한 커피를 뽑아낸다는 텍스트 그대로 말랑말랑한 멜로액션을 보여준다. 앞의 두 작품처럼 해학적으로, 혹은 통렬하게 현실을 관통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형윤 표 어설픈 그림으로 그려낸 익숙한 서울 풍경은 우리가 사는 곳을 색다르게 투영한다. < 셀마의 단백질 커피 >는 세 가지 다른 그림체, 다른 성격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리는 대상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현실이기에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실제로 가시화할 수 없는 상상의 영역까지 그려낸 점은 애니메이션만의 묘미를 보여준다. 우리가 과연 어느 장르에서 괴기스런 노파로 분한 태풍을 마주치고, 아들을 튀겨온 닭 사장의 소름끼치는 통곡을 들으며, 커피 자판기가 사랑을 나누는 홍대 앞 골목을 목격할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현실과 반대쪽에 위치하는 허무맹랑한 ‘덕후’들의 세상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더욱 추천한다. 이 작품 안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살 부대끼며 상승하는 온도를 체감해보자. /글 : 이현진 《애니메이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