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 감독
- 빌 어거스트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제레미 아이언스, 멜라니 로랑, 잭 허스턴, 크리스토퍼 리
1. 시네마테크 파사주 여정의 시작: 영화관의 문 시네마테크 여행기 프로젝트의 제목을 ‘시네마테크로 가는 통로(길목)’라는 의미를 담아 ‘시네마테크 파사주(Cinematheque Passage)’로 결정했던 날이었다. 나는 그 늦은 새벽 시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은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Prenzlauer Berg),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Kastanienallee 77, Berlin)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의 정면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를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지구 카스탄니엔알레 77번가에 위치한 32석 규모의 단관극장 ‘희망의 빛 영화관(Lichtblick Kino).’ (사진: LICHTBLICK KINO ) 나는 분명 이 영화관의 출입문에 매료가 되었던 것 같다. 영화관을 세상과 연결하는 문은 영화를 보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지만,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 문은 접촉할 수 없는 사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복합상영관, 영화를 소비문화로 바꾼 이곳에는 문이 없기도 하다. 보통 쇼핑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드넓게 매표소와 팝콘과 음료 판매대가 보인다. 영화관 입장 시간이 되면 입구는 이미 열려 있다. 건물 입구부터 영화관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문은 자동으로 열리기도 한다. 수많은 유동 인구를 위해 모든 통로는 최대한 개방되고, 자동으로 여닫힌다. 하지만 ‘희망의 빛 영화관’의 문은 영화만을 위한 통로를 지키듯이,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를 고수하는 파수꾼과도 같이 서 있다. 문 옆 창문에는 아마도 현재 상영 중인 듯 보이는 장-뤽 고다르의 < 네 멋대로 해라 >(1960), 제베타 스틸이 부른 ‘Calling You’가 떠오르는 퍼시 아들론의 < 바그다드 카페 >(1987),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 (1979)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다음 사진에서는 좁은 직사각형 모양의 극장 내부가 보였다. 한 열에 2~4석 정도밖에 없는 좁고 길쭉한 아주 작은 영화관이다. 내부는 흰색 벽에 몬드리안풍의 단색의 장식이 군데군데 걸려 있다. 이 화려하지 않은 영화관 내부는 어딘지 모르게 창백한 배우의 얼굴과 같이 보였지만, 어떤 소박한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건 내 시선을 빼앗긴 스크린 앞에 놓인 참나무색 피아노 때문이었다. 음악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성영화 반주용으로 사용되리라 생각했다. 2. 시네마의 유토피아 파리 드골 공항에서 파리 13구에 있는 오스떼를리츠(Gare d’Austerlitz)역으로 이동해 첫 번째 시네마테크 파사주 목적지이자, NECS(European Network for Cinema and Media Studies, 유럽 영화미디어학 네트워크) 학회가 열리는 몽펠리에로 가는 야간열차를 탔다. 출발이 지연되어 열차는 11시 가까이 되어 출발했다. 열차 출발과 동시에 거의 잠이 들었다. 시차로 인해 잠에서 깼을 때 새벽 4시가 조금 지났다. 생각보다 깊은 잠을 잤다. 열차 침대가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에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새벽을 달리는 기차, 창밖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잠시 어느 역에 정차했다. 내리는 이는 없을 것 같은 그런 기차역. 아마 기차도 잠들 시간이었나 보다. 다시 잠들 수도 있는, 잠의 통로에서 난 이 여정에 대해 생각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는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등 이 영화관 기행문을 구상하면서, 찾았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이미지를 역사 개입의 도구로 사용하는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말을 영화관의 설립 취지에 넣은 시애틀 컬럼비아 시티(Columbia City, Seattle)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 ‘비콘 시네마(the Beacon Cinema)’를 알게 되었을 때 다른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특히 영상 아카이브와 같은 곳은 야누스 얼굴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난 한 곳에 있으면서 다르게 존재할 수가 있지.’ 여러분들이 요청하는 좀 더 다른, 아카이브에는 없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그것은 몽타주 철학이어야 합니다. 몽타주는 재개입의 가능성과 새롭게 재설정된 목적을 가지고, 즉 다른 야망을 지니고 이미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1] 그렇다. 영화관은 이미지의 낙원이어야 한다. 처음 나의 계획은 각 국가의 대표적 시네마테크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히트블릭크 키노와 비콘 시네마(모두 빛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처럼 도시 곳곳에 흩어져서 자생하는 보통 아트하우스 시네마라 불리는, 예술영화 전용관에 관해 알게 되면서(이렇게 무작정 표를 끊고 의자에 앉아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를 보고 싶은 영화관은 찾을수록 나왔다), 나는 시네마테크의 범위를 국립 영화 아카이브에서 유럽 전역의 예술영화관으로 넓혀야 한다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시네마(cinéma)와 도서관(bibliothèque)의 합성어인 시네마테크는 영화와 영화 관련 자료를 수집, 보존, 상영하는 장소다. 나는 이 ‘시네마테크’에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의 의미를 더 확대하고 강조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찾지 않는 서점이 문을 닫듯이 영화관도 그럴 운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야 보존과 수집도 의미가 있고, 그 반대로 계속해서 상영되기 위해서 수집하고, 보관하고, 보존하는 등의 수고롭고, 때로는 시간을 다투는 영화적 실천을 누군가는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시네마테크에 수집될 영화들이 이 수많은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시네마테크에 보관된 영화들은 이 영화관들에서 빛의 이미지가 되어 새로운 관객을 만난다. 스위스 바젤에 위치한 예술영화 전용관 키노 쿨트(Kult Kino)로 가는 길에 놓인, ‘THEATERPASSAGE’라는 이름의 굴다리. AI를 이용해 ‘CINEMATHEQUE PASSAGE’로 수정. ‘시네마테크 파사주’ 프로젝트를 떠올렸던 시점에 내게 많은 예술영화관 정보의 원천이 되었던 곳은 유럽의 예술영화 전용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Europa Cinemas)에서 구축한 ‘유로파 시네마 지도’였다. 이 온라인 지도 에는 소속 예술영화관들의 좌표가 붉은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지구본 형태의 유럽 대륙 지도에 붉은 점으로 환원된 예술영화관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서, 한 나라의 영화문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구상했다. 프랑스에는 총 107개 지역에, 208개의 예술영화관이 곳곳에 퍼져있다. 총 스크린은 440개이다. 아마 유로파 시네마에 속하지 않은 예술영화관을 포함하면 그 이상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보기 어려운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지금의 영화들을 만날 수가 있다. 이탈리아에는 208개의 영화관이 있고, 스크린 수는 254개이며, 총 116개 지역에 고르게 흩어져 있다. 이들 예술영화 전용관은 모두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대체로 그해의 대표적 예술영화, 독립영화를 상영하지만, 각 영화만의 고유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이 정체성은 영화관 이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프랑스에는 영화 종주국답게 감독의 이름을 딴 영화관이 많다.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감독은 대체로 있다. ‘시네마 장 비고’, ‘자크 타티 시네마’, ‘시네 막스 린더’, ‘마르셀 파뇰 시네마’. 시네마테크의 창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이름을 딴 극장도 물론 있다(‘시네 앙리 랑글루아즈’). 배우의 이름을 딴 ‘장-폴 벨몽도 시네마’, 그리고 아마 이즈음에 여러분들이 기대할 장-뤽 고다르의 이름을 딴 영화관은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어 아쉽지만, 누벨바그를 함께 이끌었던 프랑수아 트뤼포의 이름을 딴 영화관(Cinéma François Truffaut)과 그의 영화 제목을 딴 ‘400번의 구타 영화관’이 있다. 이탈리아에는 당연하게도 문학가의 이름을 딴 ‘시네마 단테’가 있다. 특히 문학 또는 예술 사조를 딴 영화관들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작은 도시 카스텔 볼로네제에 있는 ‘시네마 모데르노(Cinema Moderno)’와,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PostModernissimo Cinema)’다. 아마도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곳, 가장 출입구가 아름다운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페루지아에 있는 '포스트모데르니시모 시네마'로 들어가는 문. (사진: POSTMODERNISSIMO ) 유럽 전역에는 총 779개 지역에 1,246개의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다. 총 스크린은 2,921개다. 이렇게 전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예술영화관을 모아 거대한 시네마테크 집합체를 이룬다면 그것은 아마 오직 ‘세계의 영화관’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영화(시네마)의 유토피아이지 않을까? 어쩌면 시네마테크와 예술영화 전용관은 하나의 건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보관된 필름과 자료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오래된 영화가 다시 상영되고, 누군가는 작은 극장의 문을 열고, 다른 누군가는 어둠 속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본다. 이 모든 장소와 시간과 영화가 연결될 때,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시네마테크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걷고 이어서, 지도책을 만들고 싶었다. 시네마테크 파사주. 영화관을 찾아가는 길. 영화관의 문으로 이어지는 통로. 3. 6월 20일 밤의 기억: 시네마 유토피아 나는 오늘, 시네마 유토피아(Cinema Utopia) 체인 중 하나인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Cinema Utopia Montpellier) 문 앞에 서 있다. 문은 닫혀있다. 몽펠리에를 떠나기 전날 밤, 난 시네마 유토피아로 갔다. 마지막 상영작 중 하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정류소에서 몽펠리에 폴 발레리 대학(Université Paul-Valéry Montpellier)으로 가는 5번 트램을 탔다. 지난 18일부터 오늘 20일 오후까지 내가 참석했던 NECS 학회가 이 대학에서 열렸다. 몽펠리에 도착 후 학회 일정과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저녁 시간에 이곳에 가는 것을 연일 놓쳤기에,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학회장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쳤던 곳이기에 익숙한 발걸음으로, 이미 마지막 영화가 시작했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1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 마호가니색의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가와세 나오미(Kawase Naomi) 감독의 <야큐시마의 환상>은 시작한지 40분이 지났고, 히치콕이 아닌 캉탱 뒤피외(Quentin Dupieux) 감독의 공상과학 미스터리 코미디 애니메이션 <현기증(Le Vertige)>은 곧 있으면 끌날 시간이었다. 내가 희망을 품고 뛰어온 영화인 마르코 응웬(Marco Nguyen)과 니콜 아타네(Nicolas Athané) 감독의 애니메이션 <짐 퀸(Jim Queen)>은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매표소 직원이 먼저 눈짓과 손짓과 말로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 주었다. 마치 오늘의 막차를 놓친 마음으로 난 포스터가 걸린 벽에 놓인 붉은색 벨벳 의자에 앉았다. 의자 옆으로 영화관 1, 2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길게 이어졌다. 물론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차단기 앞으로 지나가는 열차의 속도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너편 내가 가야 할 곳의 풍경의 빛줄기처럼, 영화관의 닫힌 문 틈새로 이미지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돌아서 떠나야지만 사라지는 빛의 소리였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일종의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으로, 프랑스 남부 및 북부 지역의 주요 도시에 흩어져 공동의 영화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있다. 몽펠리에에서 동쪽으로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비뇽(Avignon)’에, 서쪽으로 3시간 거리에는 ‘툴루즈(Toulouse)’에, 그리고 거기서 북서부 방향으로 더 2시간 30분을 기차로 가면 도착하는 ‘보르도(Bordeaux)’에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북쪽 지역에는 트루와(Troyes)에서 멀지 않은 마을인 ‘퐁생트마리(Pont-Saint-Marie)’와 파리 북서부 발도와즈 주 생투앙라우몬(Saint-Ouen l’Aumône)에 다른 2곳의 시네마 유토피아가 있다. 시네마 유토피아는 모두 유럽 예술영화관 협의체인 유로파 시네마 회원관이다. 특히 시네마 유토피아의 독특함은 자체 프로그램에도 있지만, 이 영화관이 추구하는 영화를 알리기 위해 사용한 광고 문구에서 드러난다. “Cinéma garanti sans 3D.” 직역하자면, “3D가 없는 영화임을 보장합니다.” 다소 프랑스식 또는 시네마 유토피아식의 유머로 이해하자면, ‘겉모습만 화려하거나 속임수 같은 효과가 가미된 영화가 아님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일종의 식품이나 농산물에 유전자 조작이 아님을 알리는 ‘GMO-Free’ 표시와 같은 것이다. 오로지 조작되지 않은 현실의 기록으로서의 영화를 추구하는 이 영화관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시네마 유토피아를 수호하는 존재는 그래서 천사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예술영화 전용관 체인 ‘시네마 유토피아’의 로고. (사진: Utopia Montpellier ) 나에게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수신호를 알린 점원이 물과 음료는 원하는 금액을 내고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지갑에 있던 1유로를 음료 테이블에 놓인 돼지 저금통에 넣고 시원한 물을 한 컵 따랐다. 매표소와 관객 대기 장소는 마치 가정집 응접실처럼 아담했고, 이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고풍스러운 의자와 커다란 괘종시계가 우아하게 놓여있었다. 매표소 옆 계단을 통해 3관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있지 않아 <현기증>이 끝나고, 관객들이 나왔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살짝 영화관 내부로 들어갔다. 마치 예배당과 같이 고요한 침묵이 흐르는 분위의 영화관이었다. 스크린 오른쪽에 걸린 회화 때문에 더 그러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회화 속에는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여인의 고요하고 평온한 몸짓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경책이 놓여있을 법한 나무로 만들어진 스탠드 위에, 이달 몽펠리에 시네마 유토피아 영화 프로그램 책자가 놓여있다.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을 찾아 떠난, 아니면 영화의 본질을 찾아 떠난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놓여있다. 에필로그: 밤이 오면, 우리는 시네마테크에 간다. 세실리아: “오늘 밤에 새 영화를 개봉한대” - <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디 앨런, 1985) © Orion Pictures Corporation 여러분은 어떤 날에 시네마테크에 가시나요? ‘시네마테크 파사주, Episode 2&3’부터 뤼미에르 영화박물관, 판테온 시네마, 로잔 시네마테크, 그리고 룩셈부르크 시네마테크 방문기가 펼쳐집니다. *** [1] Haley Weiss, “ John Akomfrah and the Image as Intervention ,” Interview Magazine , June 27, 2016. (접속일: 2026. 8. 2) 정찬철(영화미디어학 연구자) l 국립부경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영화와 미디어에 관한 논문과 글을 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장면을 선택하고 버려야 하는지는 언제나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장면마다 미묘하게 다른 표현과 뉘앙스가 영화 전체에 무슨 효과를 가져올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튀르키예의 여성감독 펠린 에스메르의 2017년 작품인 < 유용한 것 >에 이끌린 것은 이런 이유와 맞닿아 있다. ‘유용한 것’이라는 제목은 과거에 시인이자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라우라의 삶의 태도에 걸쳐 있는 실존적 질문을 가리키지만, 범위를 넓혀 생각해본다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선별하고 삭제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화 작업에 대한 지시적인 자문(自問)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적 경험에 있어 무엇이 유용한 것이고 무용한지 규정하는 기준은 분명치 않다(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복수형의 기준과 판단이 있다는 식으로 회피하기란 쉽지만, 장면은 언제나 하나의 오케이컷만을 요구한다). 어떤 장면은 의미와 상징을 과시하지만, 어떤 장면은 선뜻 유용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쓸모없는 요소들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로만 이루어진 장면에도 관객이 받아들이는 쓸모와 의미는 불쑥 생성되어 영화적 경험에 남겨진다. 영화는 무의미와 의미가 끊임없이 긴장을 이루며 충돌하는 장소다. 영화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확신 없는 장소에서 모든 순간 결정을 거듭해야 하는 조건 앞에서 흥분을 느끼거나 불안에 몸서리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연극>과 <망루>를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된 작품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영화에 사로잡혔다. 일견 산만하게 느껴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역에 도착한 변호사 라일라의 예기치 않은 여행을 다루는 이 영화는, 플랫폼 문 앞에서 결혼사진을 찍는 커플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잠시 뒤에 문밖에서 서성이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이고 카메라는 화면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라일라를 담아내기 위해 그녀의 걸음에 맞춰 좌우로 이동한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화면 바깥의 목소리는 라일라의 복합적인 성격을 말해준다(“그녀는 낭만적이고, 내향적이었으며, 조금은 사회성이 부족했다”). 짧지 않은 롱테이크로 구성된 첫 장면은 중심적인 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시각적/청각적 차원의 초점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의 지속은 하나의 움직임에서 다른 움직임을 불러들이고 여러 가지의 활동을 결합하는 형식이다. 그것은 영화의 화면을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한 인물의 내면을 다른 사람의 얼굴과 대면케 한다. 망설이듯 우왕좌왕하던 라일라가 문을 열고 나선다. 그녀가 문을 열고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데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러므로 화면을 개방하는 다양한 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결혼사진을 촬영 중인 커플을 바라본다. 이 순간에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커플뿐만이 아니라 우연히 그들 옆에서 촬영에 필요한 액자를 들어주던 카난이라는 어린 여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는 어렵지만, 다음 장면에 카난의 아버지가 라일라에게 혼자 오디션을 보러 간 어린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두 사람은 여행의 경로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다른 목적지로 향하지만, 생각지 않게 같은 곳을 경유하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다른 말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이 다시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곳은 야간열차의 내부에서다. 여러 형태의 문으로 형성된 다양한 ‘틈’의 장소다. 라일라는 한밤의 창문을 거울처럼 관찰하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카난과 맞닥뜨린다. 창문의 반영과 문틈의 개방은 그렇게 서로 다른 얼굴들을 만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한 순간은 야간열차의 식당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초반부의 장면에 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라일라와 카난의 옆자리로 우연히 두 여인이 합석하게 된다. 화면에는 라일라와 카난의 대화와 더불어, 합석한 두 여인의 몸짓이 붙잡힌다. 카난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화는 테이블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라일라는 합석한 이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연인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기차 칸 뒤편에서 심각한 얼굴로 통화하는 카난에게 시선을 던진다. 보고 듣고 만지고 먹는 일상의 감각들이 통일성 없이 쏟아지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몸짓과 목소리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면서 이전까지 진행되던 대화가 중단되고 타인의 반응이 화면 내부로 침범하는 것이다. 쓸모 있고 유용한 인물과 대화를 중심에 두고 그 밖의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는 구성이 아니라 중심과 주변을 산만하게 뒤섞고 얼굴과 말의 위계를 배척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다큐멘터리의 방법을 픽션에 가져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메르는 다큐멘터리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이고 주목할 만한 작업인 <연극>은 농촌에 사는 아홉 명의 여자들이 자기 삶에서 가져온 소재로 연극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었다. 에스메르가 그리는 삶은 다성적이고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의 권리로 구성되어 있다. 열차가 전하는 매혹은 내부와 외부를 통과하며 무작위로 형성되는 만남에 있다. 누군가 자리를 비우고, 누군가는 우연히 도착하는 장소다. 그런 장소에서라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무용하거나 비밀스러운 말을 주고받는 낯선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관에 가는 행위와도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라일라와 카난이 탑승한 야간열차는 이따금 이런저런 이유로 불이 꺼진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잠기고 창밖의 풍경과 눈앞에 있는 상대방의 얼굴만이 간신히 보인다. 그런 공간적 조건에서 카난은 처음 만난 라일라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배우를 꿈꾸는 지망생이자 간호사인 그녀는 친구를 대신해 죽음을 원하는 남자의 조력 자살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바로 이런 면모로 인해 <유용한 것>은 의도치 않게 코로나 이후 시기의 영화의 유용함을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면서, 고다르의 죽음 이후에 삶의 유용성을 고려하는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아버지조차 알지 못했을 카난의 비밀을 듣게 된 라일라의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방향과 성질이 덧붙는다. 그들의 여행은 밤에 속해 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내밀한 무대는 한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인물 뒤편의 유리창 너머로는 아름다운 밤거리의 풍경이 지나가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간다면, 라일라는 자살을 택하는 남자(그는 라일라와 만나 그녀가 쓴 시집의 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와 대화를 나누고, 오랜만에 재회한 동창들과 기나긴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밤의 야간열차에서 속삭여지는 말과 다른 성질의 대화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열차의 풍경들에서 이런 우연한 마주침과 내밀한 대화는 사라져가고 있다. 크리스티안의 펫졸트의 < 트랜짓 >의 마르세유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게오로그는 상처 입은 동승객이 고통 끝에 죽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미코 레베레자의 <노 데이터 플랜>에서 기차 내부의 이민자들은 얼굴을 숨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나타나고 있다. 카말 알자파리의 <암피옥서스는 멀어요>에서 기차는 도착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대기실에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열차는 정치적 망명의 얼룩진 기록으로, 불법 체류자들과 난민들의 피로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로 재편되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고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장소의 기능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코로나 시기를 통과한 영화관의 곤경과 유사한 맥락을 갖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시 영화의 장소라는 문제와 만나게 한다. <유용한 것>에서 변모하는 여행자의 ‘무용한’ 상태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건네는 조건이 된다. 그런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여행하는 영화가 제안하는 삶의 조건일 것이다. 의도를 갖지 않는 무작위에 의한 만남 속에서 영화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만남을 전제하는 장소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디서 영화를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