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선(야만인과 게이샤)
- 감독
- 존 휴스턴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존 웨인, 안도 에이코, 샘 자페, 야마무라 소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귀하의 나라에 백정은 살 수 있습니까, 노비는 살 수 있습니까?” 류승완 감독은 < 군함도 > 개봉 초기, ‘친일영화’라는 여론에 부딪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반일 감정에 기대지 않겠다.” 나는 살짝 감동받았다. 대규모 자본과 스타들... ‘천만 관객’까지 생각했을 시스템에서 일하는 영화감독이, 이런 소신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워낙 그의 팬이었으나(< 짝패 >!) 그를 다시 ‘봤다’. 그러다가 최근 김은숙 작가의 24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군함도>의 기시감이 되살아났다. 정확하게는 대중의 반응에 대한 기시감이다. 방영 초기, <미스터 션샤인>이 “역사를 왜곡했다”며 28,481명이 한 달 동안 청와대에 이 드라마를 막아 달라는 청원을 낸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청와대나 문화체육관광부가 TV 드라마의 스토리를 바꿀 수 있는가? 나는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위 기관들은 그럴 권한이 없다. 지면 등 사회적 문제 제기를 통한 ‘역사 왜곡’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에 대한 불만을 청와대에 호소하다니...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청원인들의 주장은 이렇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피해국과 가해국 입장이 묘하게 전복되어 있습니다. 극에서 연출된 악역들의 대부분이 조선인이며, 자기 장인(도공)의 제자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등장하고, 조선의 문화가 ‘미개’하다는 연출이 계속해서 보입니다. 극을 끌고 나가는 주축, 주·조연들이 여주인공 고애신을 제외하면 일본인들이며 그들 개개인에게 부여된 서사 역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피해국이 아닌 그것을 ‘자초한 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근대와 자본주의는 ‘원인이 없다.’. ‘자본의 운동’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고, 한반도의 고통스러운 현대사는 그들의 대리전, 후폭풍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 우리는 ‘한류’를 무기로 삼아 아류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미스터 션샤인>도 그 ‘무기’ 중의 하나로 기획되었다. 식민 지배에, “우리의 자초”나 “저들의 의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의미한 얘기다. 약육강식론도 한탄일 뿐, 원인이 아니다. 서구가 비서구를 점령했을 때, ‘우리’ 입장에서는 침략이지만 ‘그들’은 야만인에 대한 문명화 사명에 고뇌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젠더 혹은 계급으로 비유해보자. 남성 중에서 부자 중에서, 자신이 여성과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오히려 “역차별”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미스터 션샤인>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조선 명문가를 대표하는 고사홍( 이호재 )은, 미국인 유진 초이( 이병헌 )가 “조선은 귀댁을 보호하지 못하니, 원하신다면 저희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다음과 같이 위엄을 내세운다. “양이(서양 오랑캐)의 보호를 받느니, 차라리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노라.” 물론, 유진 초이의 목적은 고사홍 집안의 손녀인 고애신( 김태리 )을 친일파 낭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사적인 마음’의 발로였다.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말에, 나는 표현력을 잃었다. 연인 사이의 대사로 바꿔보자. “사랑하는 그대가 나를 죽이더라도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무슨 노예근성 혹은 피학증인가.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 주인이 바뀌었을 뿐 고사홍 대감이 미군의 보호를 거절한 이유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그 자신이 조선 왕조 500년의 기득권자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인격적인 양반이나 근대적 낭만으로 “불꽃으로 살고 싶은 자”(고애신) 혹은 ‘사명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간직한 자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러나 사리사욕이 앞선 자, 원래 핍박받았던 자들은 공동체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국가를 비롯해서 어느 공동체나 그 구성원들은 평등하지 않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 역시 신분 사회지만, 조선은 아예 그것이 법으로 규정된 사회였다. 노비의 입장에서, 백정의 입장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인이 바뀔 뿐이다. 군 ‘위안부’ 동원도 그녀들의 아버지, 한국인 업자 등 한국 남성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피해 경험을 들어보면,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과 남편에게 구타당한 것이 더 억울하고 몸을 상했다는 증언이 꽤 나온다. 국가 내부에서 모든 사람이 국민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국민이기보다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지방 사람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은 일상적으로 찢어지고 다시 꿰매지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터져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주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비록 서구와 달리, 나라의 사정은 근대와 식민 지배와 함께 찾아온 자신도 모를 운명의 비극을 맞았지만, 구한말 개인들의 사정은 모두 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노비 유진 초이와 백정( 유연석 ), 이양자( 김민정 )의 신분은 바뀌었다. 낮은 계층의 여성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집 밖으로 나와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원래 국가 내부의 차이가 국가 내외부와의 차이보다 큰 법이고 격동기에는 더욱 그렇다. 드라마에서 이 문제는 경어체 여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대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고도의 한국적 맥락이 필요하다.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다. 김은숙 작가의 대사와 스토리 전개 방식은 이제까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듯하다(예를 들어, “통성명, 악수, 포옹 그다음은 그리움이더이다” 이 말, 정말 맞다). 이 드라마의 설정상, 반말과 존대어가 뒤섞어 어떨 때는 정신이 없다. ‘원래 신분’과 외국(미국과 일본)에 다녀와서 바뀐 신분, 장 포수와 고애신처럼 반상과 사제 관계가 겹친 경우, 나이, 성별 등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말투가 다 다르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구한말을 총체적으로 본다. 유관순 누나? 민족의 대표가 여성일 때 윤종찬 감독의 < 청연 (靑燕, Blue Swallow)>(2005)은 그의 걸작인 < 소름 > 이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역시 친일 문제로 고난을 겪었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을 다룬 <청연>의 첫 장면은 남루한 옷을 입은 조선의 소녀들이 들판에서 뛰쳐나오는 데서 시작한다. 내게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처럼 보였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소녀들의 힘찬 달리기. 그들의 꿈을 재현한 듯 한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영화는 조선인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민족주의’ 영화다. 다만, 민족의 대표가 기존과 달리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뿐이다. 그 한 가지 이유로, 이 영화는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 사회에서 늘 재연되는 장면. 맹목적 대중 심리가 배타적 국가주의와 만나 ‘생각 정지’ 상태에 이르고, ‘일본 앞에 우리는 공동 운명’이라는 퇴행적 민족주의가 저항적 민족주의로 둔갑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 사이의 차이(이 경우는 성차별)는 은폐되고, 시선은 모두 ‘외부의 적’을 향하게 된다. 여성이 자아실현을 하는 데 일본인의 도움을 받으면 ‘친일 행적’이고 ‘친일 영화’인가? <청연>은 여성에게 ‘친일’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여성은 민족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을 재현하는 대상일 때만 유용하다. 유관순은 종종 ‘열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윤봉근 열사’에 비해서는 그 경우가 훨씬 적다. 그것도 “유관순 누나”다. (나는 “유관순 언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남성이 “레즈비언이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대표 친일파’로 기억하는 이광수나 김활란에게 ‘반민족행위자’라고 하면, 두 사람 모두 억울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강하게 정체화했으며, 친일을 함으로써(‘근대를 지향함으로써’)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민족을 살리는 길’은 사람마다 이렇게 다양하다. 창씨개명이나 단발령 등 일제의 정책을 거부한 이들 중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교 규범을 수호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친일이 불가피했다거나, 사소하다거나, 모든 민족주의는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친일 청산은 절대 선, 당위적인 진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언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친일파닷!” 이 한마디가 경합해야 할 담론장의 다른 목소리를 모두 내쫓는다는 데 있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결혼하면 국적을 잃는데 여성에게 국가가 어디 있나. 아직까지도 남자가 ‘출세’하면 여자가 따르고 남자들은 그에게 아부하지만, 여자가 ‘성공’하면 남자는 떠나고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한다. <청연>은 기존의 이성애 법칙에 도전한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김주혁 )이 박경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가 ‘똑똑하고 야망에 불타며 고집이 센’ 데다가, 특히 “너를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연>에서 남성은 여성을 통해 공적 영역에 진출하며, 여성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주인공 박경원( 장진영 )과 비슷한 시대를 산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남편 연구실에서 더부살이했고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핵분열을 발견하여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첫 여성회원이 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연구소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성들 때문에 정문을 사용하지 못하고 청소부용 반지하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우리는 < 히든 피겨스 >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다. 당시는 무려 1960년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히든 피겨스 박경원은 어땠을까? 일제 강점기 너무 가난했던 한 소녀가 현모양처 + 독립운동가 + 훌륭한 비행사… 이것이 가능했을까? 아니면, 관객의 바람 대로 위 모든 것을 다해 내거나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만’ 헌신해야만 했을까. 개인의 삶도 복잡한데, 국제 정세가 얽힌 나라를 되찾는 일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원(始原)인 프란츠 파농은 말했다. “민족해방투쟁(독립운동)은, 빼앗기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탈식민주의, 즉 포스트콜로니얼(post colonial, 후기식민주의)은 형식상의 주권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이전의 식민 국가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가해국에 대한 피해의식, 동일시 욕망, 경쟁심, 원한 등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 가장 ‘웃긴’ 사례가 영연방 경기 대회(英聯邦 競技大會, Commonwealth Games)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정체성인가? 같은 주인을 모신 나라들의 운동 경기? 사족 - 우연일까, <청연>의 두 주인공 장진영과 김주혁은 지금 우리 곁에 없다.
< 본 토마호크 >라는 영화가 재미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호러영화, 고어를 좋아하는 지인들이었다. 그런데 서부극이었다. 서부에서 식인 부족을 만난다는 이야기. 이상하지는 않다. 공포영화 장르에서, 외딴곳에 사는 식인종이나 괴물을 만나는 것은 익숙한 관습이다. 토비 후퍼의 <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1974)과 웨스 크레이븐의 < 공포의 휴가길 The Hills Have Eyes >(1977)부터 롭 슈미트의 < 데드 캠프 Wrong Turn >(2003)로 이어지는 살인마 계보도 있고, 루게르 데오다트의 <카니발 홀로코스트>(1991)처럼 오지의 야만인을 찾아가는 유형도 있다. <카니발 홀로코스트>를 리메이크한 일라이 로스의 < 그린 인페르노 >(2013)는 한창 개발이 되고 있는 아마존에 살고 있는 식인 부족의 기괴한 풍습을 전시한다. < 본 토마호크 >는 공포영화의 관습을 투영시킨 서부극이다. 서부 개척시대, 시골 마을인 브라이트 호프에서 사람들이 납치된다. 의사인 사만사와 보안관 조수. 보안관인 헌트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팀을 꾸린다. 나이 든 보안관 조수인 치코리, 사만사의 남편인 아서, 한때 사만사를 짝사랑했고 사격술이 뛰어난 브루더. 겨우 네 명이다. 하지만 식인 부족도 인원이 많지 않다.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식인 부족은 겨우 종족을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원주민들에게는 끔찍한 적일 수밖에 없고, 식인만으로 살아가기에 식량도 부족하다. 심심할 수밖에 없다. 단 네 명이 나섰는데, 아서는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상태다.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거동이 불편하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둘뿐이다. 적들도 계속 나오는 게 아니다. 부족이 살고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별다른 사건도 없다. 좀도둑들이 나타나 말을 훔쳐가려는 정도. 너른 서부를 달려가니 마주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들러 작은 에피소드를 보여줄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네 명의 소소한 갈등이 벌어질 뿐이다. 시나리오 작가이며 촬영도 했던 S. 크레이그 찰러는 < 본 토마호크 >가 연출 데뷔작이다. 러닝타임도 짧지 않다. 무려 2시간 12분이다. 그런데도 크게 지루하지 않고, 적절한 긴장을 유지한다.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고, 갈등의 지점도 날이 서 있다. 커트 러셀이 연기하는 헌트는 거의 도인 같은 풍모를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모든 것을 헤아리며 해결책을 찾는다. 누구에게도 굽히거나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치코리는 말이 많다. 생각도 많고, 말도 많고, 겁도 많지만 선을 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은 분명하게 한다. 그가 해야 할 일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아서는 사만사를 사랑한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상태다. 소를 몰고 먼 길을 오고 가는 카우보이인 아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사만사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성격이 급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할 줄 아는 남자다. 브루더는 수염을 멋지게 기른 신사다. 수백 명의 원주민을 죽였다고 말하는 남자. 하지만 그 사실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이어 말한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순진하지만 다혈질인 아서와 자주 충돌하지만 팀으로서의 그들은 잘 어울린다. 크레이그 찰러는 헌트, 치코리, 아서, 브루더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작은 긴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 본 토마호크 >는 결코 과장하거나 대단한 스펙터클로 눈길을 끌려 하지 않는다. 고어 마니아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은 분명히 있다. 머리 가죽을 벗기고, 몸을 둘로 갈라내고, 팔다리가 잘리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사람이 죽는 것도 별 게 아니다. 이곳은 공정한 결투가 벌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부족은 식량을 얻기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고, 헌트와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어쩔 수 없이 서로 죽여야만 한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심각하게 고민할 일도 아니다. 그런 고어 장면들이기에 오히려 눈에 확 들어온다. 일라이 로스가 < 그린 인페르노 >에서 의도적으로 식인의 풍경을 전시했던 것과는 반대다. 이곳에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식인 부족은 단지 먹는 것만이 아니라 여성을 대하는 야만의 풍습 등 모든 면에서 끔찍하다. 그들에게 소위 ‘인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고, 종족을 유지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그런데 인간은 어떨까? 소위 ‘인간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과연 그들과 다를까? < 본 토마호크 >의 첫 장면은 무법자들이 야영을 하는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지나가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돈과 소지품을 가로챈다. 그런 살인자들이 도망을 치다가 식인 부족의 신성한 표식을 건드리고, 하필 살아남은 이가 브라이트 호프로 들어오게 된다. 그들을 쫓아온 부족들에게 함께 있던 의사도 납치되고. 식인 부족의 행태는 아주 끔찍하지만, 가장 야만적인 행태로 드러난다는 것 이외에는 문명인들의 행태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 본 토마호크 >는 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헌트 역의 커트 러셀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배우다. 존 카펜터의 < 뉴욕 탈출 >(1981), < 괴물 >(1982), < 빅 트러블 >(1986)의 커트 러셀은 최고였다. 싸구려 장르영화의 주인공으로 딱 어울리는 역할을 연기하면서도 커트 러셀은 품위가 있었고, 과장되지 않았다. 그런 커트 러셀의 캐릭터를 가장 잘 이해한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그리고 < 데쓰 프루프 >와 < 헤이트풀8 >에서의 커트 러셀은 다시 한 번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본 토마호크>는 저예산 장르영화의 공식을 따라가면서도 자신만의 개성과 호흡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수작이다. 서부극으로서도, 공포영화로서도 애매하지만 둘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보기에 좋은, 순간 짜릿하기도 한 수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