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강
- 감독
- 이규웅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박노식, 김지미, 김혜정, 허장강, 최남현, 양훈, 박암, 이예춘, 최성호, 김칠성, 독고성, 성소민, 박민호, 최성, 이해룡, 박광진, 박철, 김용학, 윤일주, 정애란, 신미림, 양일민, 김효진, 이현, 용승운, 임해림, 김기범, 김기종, 김태환
약초극장은 대정관의 운영자 오카모토 세이지로(岡本淸次郞)가 대정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1935년 12월 경성부 약초정 41번지에 설립한 영화관이다. 약초극장의 설립은 대정관과 관련이 있다. 1934년 7월 쇼치쿠가 오랜 파트너인 대정관을 대신하여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쇼치쿠의 경성 개봉관으로 바꾸자, 쇼치쿠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1934년 10월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에 이어 대정관을 운영하게 된 오카모도 세이지로는 대정관이 쇼치쿠 2번관으로 남느니 후발주자인 PCL의 경성 봉절관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동년 11월 15일 PCL과 경성 봉절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대정관은 서울의 가장 오랜 영화관이자 낙후한 극장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에 PCL의 경성 봉절관의 지위도 동아구락부로 넘어가게 된다. 대정관에서는 다이토(大都)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향후 쇼치쿠영화의 경성봉절관이 되기 위해 약초정 큰길가에 약초영화극장을 신축하기로 한다. 1935년 7월 건축허가를 얻은 오카모도는 9월 말 상량식을 거행하고 극장 설립 공사를 시작한다. 극장의 설계는 조선공업협회 부회장 가와자와 미치마사(川澤道正)가 담당했으며, 건축은 이쿠타구미(生田組)에서 맡았다. 총 공사비 218,000원을 들인 이 극장은 대지 면적 약 300평, 건축연면적은 658평에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지상 4층 건물이었으며 총 좌석수 1,172석(1943년 현재 1,000석)의 대형극장으로 2개층의 관람석을 가진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 1935년 12월 16일 대정관이 문을 닫았고 경성 최초의 신양식 대영화극장(“京城 最初의 新樣式 大映畵劇場)”으로 광고된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개관 기념 작품으로 유니버설 초특작 괴기영화 <화석인간>(Night Life of the Gods, 1935)과 다이토(大都)영화사의 <검운용호당>(劍雲龍虎黨)과 <말괄량이와 소년>(ジャジャ馬と坊や)이 상영되었다. 쇼치쿠의 경성 봉절관이 되려는 시도는 쇼치쿠가 명치좌(明治座)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와 손을 잡으면서 실패했다. 약초극장은 1930년대 들어선 1,000석 이상의 거대한 토키극장의 효시였다. 황금좌, 명치좌, 경성극장과 더불어 4대 상설관으로 조선의 극장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보니 당국에서는 이들 1류급 극장들을 각종 선전활동에 이용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12월 본정경찰서에서는 약초극장과 더불어 명치좌, 황금좌, 낭화관에 아래와 같은 방첩표어를 게시하도록 했다. 1. 우리들 총후국민은 힘을 다하여 스파이의 암약을 방지하자. 2. 우리들 총후국민은 군기를 잘 지킴으로써 군기보호를 다하자. 3. 우리들 총후국민은 정치경제 각반의 국정의 비밀을 잘 지킴으로써 국방력을 한층 더 굳세게 하자 4. 우리들 총후국민은 황도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항상 눈과 귀를 잘 활용함으로써 스파이를 없이하자. 오카모토흥행부가 맡아 운영하던 약초극장은 개관 초기 서양영화를 위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가 점차 일본영화를 늘려나갔다. 서양영화의 경우 계통과 상관없이 자율 배급이던 상황에서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상영이 금지된 이후에는 독일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일본영화의 경우 개관 초기 다이토영화가 토키영화관에 걸맞지 않은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자 1936년 4월 이후에는 PCL 영화로 계통을 바꿔 상영하였다. 경성의 PCL 봉절관으로 인식되던 약초극장은 1940년에 일어난 9개월에 걸친 흥행권 분규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0년 2월 약초영화극장이 PCL의 후신인 도호(東寶) 영화의 경성개봉관 지위를 포기하고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와 계약을 체결하여 신코의 개봉관이 되자 도호가 위약금 5만원을 청구하였다. 도호의 소송에 약초극장이 신코키네마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도호영화를 상영하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신코키네마에서 약초극장에 대해 7만원의 소송을 시작했다. 도호와 신코를 대상으로 한 흥행권 계약 문제는 결국 약초극장 운영자 오카모도 세이지로가 신코에 위약금 1만 5천원을 지불하고 도호영화를 계속 상영하기로 확정하면서 9개월에 걸친 분규는 일단락된다. [자료] 1941년 6월 설립된 약초악극단(《매일신보》, 1941.06.08)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어 필름 부족현상이 일어나자 약초극장에서는 어트랙션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악극을 영화와 함께 상연하기로 하고 전속의 악극단을 두기로 하고, 1941년 6월 조선연예기업사 사장 안익조가 주재하는 신흥악극단을 전속으로 삼았다. 신흥악극단이 이름을 바꾼 약초악극단 내에는 정대택, 김영택, 백란, 김연실 등 연극,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과 밴드까지 60여명의 단원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개막 공연작은 박운학 연출의 <그리운 멜로디>, <반도의 선율> 등이었다. 약초극장의 어트랙션의 큰 인기를 끌면서 1941년 7월 말부터는 <바다의 카니발>(전13곡)로 프로그램을 바꿔가며 연장공연을 계속했다. 전속의 악극단을 둔 약초극장은 1941년 8월 8일부터 9월 2일까지 무대공연에 걸맞게 개축하게 된다. 1943년에는 무대 공연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극장 전속의 가극단을 조직했다. 이번에는 기성의 극단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약초극장 주인 오카모토 세이지로가 대표가 되어 가극단을 조직한 것이다. 총무는 약초극장의 지배인 우라노 하지메(浦野元), 연출은 김승구, 작곡은 이면상, 단원으로는 김옥춘, 현정남 등이 포진되었다. 1943년 7월 27일 당국에 정식 인가를 받은 약초가극단은 8월 8일 약초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자료] 연극전용관으로 전환한 약초극장 전속 약초가극단의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4.11.23) [자료] 약초흥행주식회사 직속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5.05.15) 영화관으로 운영되던 약초극장은 1944년 11월 23일 연극전문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약초극장에서는 예원좌(<별의 합창>, <봄바람>, <어머니와 아들>, <눈 나리는 밤>), 고협(<흰독수리>, <삼남매>, <만리장성>, <상아탑에서>, <양자강>), 현대극장(<백야>, <청춘의 윤리>, <대추나무>, <에밀레종>, <애정무한>), 극단 태양(<야화>)의 연극공연과 후생악단, 경성교향악단의 음악회, 후지하라 요시에의 독창회, 약초가극단(탐정활극 <여간첩>), 경성악극단, 조택원무용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1945년 5월에는 약초가극단 이외에 유치진이 주재하던 현대극장을 약초흥행주식회사의 직속극단으로 두었으며 약초극장에 뿌리를 둔 약초흥행주식회사는 해방 전까지 약초가극단과 현대극장을 거느린 흥행전문회사로 진화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약초흥행주식회사의 간부로 있던 홍찬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으며 약초극장을 인수하였으며 이름도 수도극장으로 바꾸었다. 해방 직후 수도극장의 프로그램은 연극과 악극이 주였으나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하자 서울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다. 수도극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우던 홍찬은 무리하게 안양촬영소를 건설하면서 생긴 자금난으로 1959년 부도가 났고 수도극장은 매각되었다. 1962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 수도극장은 이름을 스카라극장으로 바꾸었다. 2005년까지 존속하던 이 극장은 정부에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호하려 하자 소유주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헐어버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약초영화극장의 기공을 알리는 신문기사(《조선신문》, 1935.07.17.) [자료] 《 조선중앙일보 》 , 1936.03.29. 조택원 ( 趙澤元 ) 무용회 , 4 月 6 日 , 10 日 까지 , 약초극장 에서 무용가 조택원 ( 舞踊家 趙澤元 ) 씨는 오는 사월 육일부터 십일까지 약초극장 ( 若草劇場 ) 에서 무용회를 연다는 바 무용 종목은 『 일허진 혼 ( 魂 ) 』 외 아홉까지나 된다는 바 조택원 씨 외 연구소원 일동이 총출연하는데 이번에는 주야 공연이라고. [자료] 《 매일신보 》 , 1937.07.15. 북촌 유일의 영화극장 단성사 , 연극으로 전향 , 중앙무대와 계약 성립 북촌 유일의 양화전문 영화극장으로서 남북촌의 영화 『 팬 』 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잇든 단성사는 강력한 경쟁 상대의 진출에 의하야 순 ( 純 ) 영화극장으로서 경영해 나가기 곤란을 느끼게 되어 벌서부터 연극상설관으로 전향한다는 풍문이 돌드니 드듸어 칠월 삼십일일부터 연극을 상연하기로 극단 중앙무대와 간에 계약이 성립되였다고 한다 . 수년전ᄭᅡ지는 경성 유일의 양화봉절관으로 독보 ( 獨步 ) 해오든 단성사도 경성의 흥행시장을 노리는 외래의 대자본의 진출에 의해서 명치좌 약초극장 갓흔 대 ( 大 ) 영화극장들이 생기게 되자 이 영화 『 팬 』 유치에 비책을 다하게 되엿스나 단성사는 극장의 협착 ( 狹窄 ) 이라는 『 핸듸 - 캡 』 이 잇슬 뿐 아니라 경쟁이 초래한 양화가격의 등귀 ( 騰貴 ) 로 인하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잇드니 최근에는 해마다 잇는 일이나 하절이 되자 관람객이 붓적 줄어버리고 말았음으로 그 타개책을 연극으로 전향하는데서 구해보게 된 것이다 . 금후로는 흥행기업에 이해를 가진 대자본의 적극적 진출에 의하야 냉방 , 온방 , 장치 등 새로운 설비를 구비한 대극장을 신축하기 전에는 일류 양화극장으로서의 존속은 허락지 않는 정세에 잇슴으로 만일 단성사가 영영 연극극장으로 전향하야 버린다면 이로써 조선인 경영의 영화극장은 그 자최를 감춰버리게 되는 세음인데 중앙무대와 단성사 간의 계약 성립에 관하야 양측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위선 ( 爲先 ) 삼주간의 계약 , 중앙무대 홍찬 ( 洪燦 ) 씨 담 ( 談 ) 중앙무대는 제 2 회 공연ᄭᅡ지를 부민관에서 햇고 삼회 공연 역시 이십일일부터 부민관에서 할 예정이나 부민관은 연극을 상연하기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만흘 ᄲᅮᆫ 아니라 집대 ( 貸 ) 가 워낙 비싸기 ᄯᅢ문에 경비가 만히 들고 해서 단성사와 위선 칠월 삼십일일부터 삼주간의 계약을 매젓습니다 . 앞으로 장기계약을 맺을지 어ᄯᅥᆯ지는 두고 보아야 알겟습니다 . 시험적으로 연극을 해볼터 , 단성사 박응면 ( 朴應冕 ) 씨 담 아시는 바와 가티 최근의 양화가격이 무척 비싸진 데다가 협착한 단성사로서는 수용인원이 수배되는 상대와 경쟁하기에는 힘이 들고 기외에 말못할 불리한 사정이 잇는데다가 금년에는 웬일인지 소위 『 하고 ( 夏枯 ) 』 가 우심 ( 尤甚 ) 함으로 이 타개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ᄭᅳᆺ해 연극을 해보기로 햇습니다 . 중앙무대와 결정적으로 계약이 확정된 것은 아니나 금명간 확정을 볼 것입니다 . 여름 『 씨 - 슨 』 이 지나고 가을에도 역시 연극을 계속 할지 ᄯᅩ는 다시 영화를 상영할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 좌우간 연극을 공연시켜보아 그 성적 여하에 따라 결정할 작정입니다 . 최근 더욱이 악해진 흥행계에서 적은 자본으로 다수한 경쟁자를 상대로 싸워 나가기에는 남이 모르는 여러 가지 고심이 숨어잇습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5.05.16. 현대극장과 약초의 제휴 국민극 수립을 표방하고 성립된 현대극장은 그동안 고정한 극장이 없어 상연할 적마다 장소가 갈니여서 그 활동이 얼마간 ○○ 되어 왓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약초흥행주식회사와 특수계약 ( 特殊契約 ) 이 결성되여 매월 정기 공연을 하게 되엇다 . 압흐로 동 극단은 약초극장을 중심으로 하야 연극활동을 하게 될 것으로서 이와 갓흔 극단과 극장의 합리적 제휴는 크게 그 장래가 주목된다 .
영화계에서는 지사의 풍모를 가진 엄격한 선배로, 가정에선 자상하고 인자한 아버지로 알려진 전창근 (全昌根) 감독은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평소 자주 드나들던 남대문 근처의 다방에서 친구들과 담소하며 구상 중인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의 호방하고 다정다감한 기질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두드러졌다. 그가 있는 자리에는 늘 활기가 넘쳤다. 동작의 폭도 컸고 사람을 끄는 힘도 있었다. 그의 몸짓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말할 때 상대방의 어깨를 툭 치는 일이었다. 이 버릇은 친근감을 나타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분을 반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모신 적이 있다. 창립 초기 서울 만리동에 자리 잡은 동성영화공사(대표 정병준 ) 시절이었다. 1962년 봄부터 가을이었을 것이다. 영화사 이름보다 만리동 촬영소로 더 잘 알려진 동성영화공사에는 고문인 전창근 선생 외에 시나리오작가 이정선 씨가 기획실장으로 근무했다. 기획실 벽에는 알랑 레네, 유현목 공동감독의 <파리에 간 한국여대생>(알랑 로브그리에 원작)을 비롯한 6편의 호화 라인업을 자랑하는 작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 가운데 안익태의 교향악적 환상곡 ‘<코리아 판타지>(1936)’를 원작으로 한 <한국환상곡>이 창립 기념작으로 결정돼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조선호텔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작곡가 안익태 씨는 물론 주한 외교관들과 노기남 대주교까지 참석했다. 당시로선 유례없는 행사였다. 사회는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이진섭 씨가 맡았다. 그는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작곡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데다 프랑스어에도 능했다. 나는 이전에 그가 구사하는 프랑스어를 들은 적이 있다.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내한 공연 때였다. 그런데 전창근 선생이 <한국환상곡>의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나는 다음 날 그를 따라 안익태 씨가 묵고 있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로 찾아가 앞으로 나올 시나리오의 방향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록 허드슨과 필립 안을 출연자로 내세워 홍보한 <한국환상곡>은 얼마 못 가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과욕이 빚어낸 일장춘몽이었다. 아니, 한국영화제작사(史)에 남을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 회사의 기획실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정병준 사장의 친구이자 문학도였던 대학 선배 김희로(전 부산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씨의 소개로 시나리오의 집필을 부탁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회사가 마련해준 만리동 고개의 영화촬영소 앞 봉래여관에 묵으면서 나는 미리 정해준 <아내 일곱 가진 사나이>라는 제목에 맞춰 시나리오 집필에 매달렸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짬짬이 회사의 일을 도와야 하는 데다 밤늦게 영화의 녹음을 끝낸 성우들이 여관으로 몰려와 술자리나 포커판을 벌이는 바람에 속도가 붙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야간 통행금지 제도가 있어 여관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대개 이런 날엔 전창근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침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김군, 아직도 자나?”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방 앞에까지 와서 “종원이, 방에 있나?” 이렇게 깨우곤 했다. 그는 비록 <한국환상곡>은 무산되었지만, 대안으로 내놓은 자작 시나리오 < 운명의 골짜기 >에 대한 소감을 묻고, 촬영에 들어가면 아내( 유계선 )와 딸( 전향이 )을 출연시킬 생각이라는 계획까지 들려주었다. 그는 보통 나를 “김군!”으로 지칭하다가도 얘기가 마음에 들거나 기분이 좋을 때면 농담조로 “어이 내 사위!”하며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시나리오 대신 부여된 일이 기획실 상근이었다. 무엇보다 글쓰기의 족쇄에서 풀려난 데다 유명한 감독과 한방을 쓰게 된 것이 더욱 기뻤다. 게다가 제작 현장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 선생은 평소에도 입이 건 편이었다. 그전에도 그가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특히 영화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명동 나일구다방 시절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가깝게 지낸 유두연 (劉斗演) 감독(영화평론가 유지나 교수의 부친)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자네, 미로뎁보 맞아보니 어때? 죽여주지?”이런 말을 하며 크게 웃던 모습이 대표적인 예다. 미로뎁보는 1960년대 초 일부 남성들 사이에 성행한 정력제 주사였다. 쾌활한 투사의 이미지로 남은 영화인 1908년 1월 18일 나운규를 배출한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전창근 선생은 회령소학교를 다녔다. 그가 고등과 시절부터 활동사진과 연극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이런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나운규 의 도움에 힘입어 윤백남프로덕션의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은 < 심청전 >( 이경손 , 1925)을 끝내고 다음작품을 준비할 때였다. 그때만 해도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매달 30원의 학비를 받는 학생 신분(중앙고보 2학년)이었다. 그런데 고려키네마와 공동 제작한 이 프로덕션의 두 번째 작품 < 개척자 >(이경손, 1925)에서 미치광이 역을 맡아 카메라 앞에 선일이 알려지면서 송금이 끊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운규가 광대가 된 자식 때문에 낙심해하는 회령의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다시는 활동사진에 나오지 못하도록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뒤에 야 겨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운규는 전창근 선생보다 여섯살 위였지만,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전 선생의 학비는 물론 하숙집 밥을 축내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팬티까지 얻어 입을 정도였다. 01) 전창근 청년은 윤백남프로덕션이 해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이후 정기탁 감독의 <애국혼>(1930)과 이경손 감독의 < 양자강 >(1931) 등에 출연하고, 1938년 고국으로 돌아와 < 복지만리 >(1941)를 각본, 감독, 주연을 맡아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관객에게 심어준 인상은 각본을 쓰고 연출하는 영화작가로서보다는 < 자유만세 >( 최인규 , 1946)의 지하 독립운동가나, <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전창근, 1959), < 아아 백범 김구선생 >(전창근, 1960)의 경우처럼 항일 독립투사의 이미지였다. 항상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와 혈색 좋은 모습으로 장년의 힘을 과시했던 만능 영화인 전창근 선생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1973년 1월 19일 요양 중이던 경기도 고양군 삼각산의 작은 절효자암에서 예순여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6, 70년대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중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솔직히 이 좁아터진 한반도에선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가 있으니까. 만주벌판을 누비면서 싸나이의 기상을 과시하려면 일단 대륙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시나리오에 ‘광활한 만주벌판’이라고 나와 있는 걸 어떻게 찍는다? 걱정도 팔자지. 그들에겐 한강 고수부지가 있었다. 한강을 개발한다고 고수부지를 시멘트로 발라버렸을 때 얼마나 많은 영화쟁이들이 피눈물을 흘렸을까. 주동운 이 각본을 쓰고 이신명 이 감독한 < 지평선은 말이 없다 >의 액션도 대부분 중국에서 벌어진다. 이미자의 노래와 제목이 같은데, 둘 다 66년에 나왔으니 주제곡으로 쓰인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지금도 자주 들리는 노래와는 달리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필름도 사라져버렸지만. 영화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은 윤명철이라는 싸나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헌병 대장을 총으로 쏴 죽이고 상해행 특급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는 할 일이 참 많다. 우선 상해에 있는 임시 정부 동지와 접선해야 한다. 다음엔 외삼촌 한진산이 어렸을 때 데려간 여동생 명숙을 찾아야 한다. 아버지를 밀고해 죽게 한 원수인 엄성칠이란 악당도 상해에 갔는데 그를 찾아 복수 하려던 형 명덕도 생사를 알 수 없으니 그 역시 찾아야 한다. 명철이 탄 열차는 진영방이라는 두목이 이끄는 마적의 습격을 받는다. 마침 헌병에게 의심을 받던 터라 위기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이긴 했는데, 명철은 한 수 더 뜬다. 자기 물건을 빼앗기고 진영방을 쏘려는 일본인 상인을 쏴 죽이더니 이번엔 진영방이 강탈한 가방을 다시 훔쳐서 마적 떼의 말을 타고 달아난다. 한참 추격전을 벌이던 그들은 서로가 모두 일본에 맞서 싸우는 항일투사임을 알게 된다. < 카사블랑카 >의 험프리 보가트라면 ‘이것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라고 말했을 장면이다. 물론 당시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보가트식 냉소 같은 건 몰랐다. 이 영화의 각본은 72페이지 정도로, 보통 50페이지 안팎인 다른 작품에 비해 긴 편이다. 러닝타임 때문이 아니라 지문이 차지하는 분량이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액션이 엄청나게 많다. 읽다 보면 각본가가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가상의 영화를 보면서 필을 받아 흥분한 게 보인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열차가 전복되고 총알이 날아다니고 말 탄 사나이들이 만주벌판을 질주한다. 총알 날아가는 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빠-- 빠-- ㅇ! 파파파--ㅇ! 시나리오 48페이지 이걸 어떻게 다 찍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 달리는 장면에서는 마법의 고수부지가 도움을 주었을 거라 생각해본다. 만주 서부극 장면이 끝나면 명철은 상해에 와 있다. 하필이면 호텔에서 접선하려는 애꾸눈 동지는 살해당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는 인신매매범에 쫓기던 카바레 가수 미향을 위해 맞서 싸우던 미향의 오빠 대열을 돕는다. 애꾸눈 동지의 이름을 빌려 임시 정부 동지와 접선한 그는 또 정체불명의 악당들의 습격을 받는다. 무기를 운송 중이던 독립군의 정크선과 악당이 탄 보트의 007스러운 액션이 양자강에서 펼쳐진다. 동지들은 모두 죽고 명철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아무리 봐도 일본군은 아닌 거 같은 그 악당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진산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나? 명철의 동생 명숙을 데리고 떠났다는 외삼촌 말이다. 그도 상해에 살고 있다. 그는 각본에는 영란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젊은 여자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영란은 당연히 명숙의 다른 이름이다. 하필 영란은 미향과 같은 클럽에서 일하고 대열과 그렇고 그런 사이다. 한진산은 역시 카바레를 운영하는 마천호라는 중국인에게 조카를 천 원 받고 넘겨주는데, 그 마천호라는 사람은 바로 정크선 안에 있던 독립군 무기를 판 친한파다. 중국 대륙이 넓다고 누가 그랬는가. 한편 아편굴에서는 마천호의 경쟁자인 홍대선이라는 자가 헌병 대장 사천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의 계획은 금괴 안에 구멍을 파 그 안에 아편을 숨겨 한국 땅으로 밀수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금덩어리로밖에 안 보입니다. 이 속에 아편이 들었다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안다, 안다! 말이 안 된다는 거. 그러나 잠시 기다리시길. 인물 관계도 한진산이 영란뿐만 아니라 미향까지 마천호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대열은 마천호의 카바레로 쳐들어가고 명철은 그를 도우러 같이 들어간다. 깽판. 그런데 위기일발의 순간에 명철을 구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그동안 명철에 미행을 붙여놨던 진영방이다. 명철은 당연히 깽판 치는 동안에도 영란이 동생인 걸 모른다. 그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지금은 마약중독자가 된 형 명덕이 홍대선의 부하로 일하고 있었고 얼마 전에 동생을 만나러 한진산을 찾아갔다가 동생이 병으로 죽었다는 거짓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분명 목표는 미향 구출작전이었을 텐데, 그 소동 이후 얼떨결에 명철은 박철이라는 가명을 쓰며 마천호의 부하로 들어가게 된다. 금괴 안에 아편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명철은 열차 강도질을 해서 금고를 탈취한다. 누가 훔쳤는지 알아낸 홍대선은 마에게 연락해 물건을 돌려달라며 약속장소를 잡는데 그 장소에 나타나 명철의 총에 맞는 건 하필이면 명덕이다. 명덕은 명철에게 외삼촌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죽는다. 명철이 찾아가자 한진산은 이번엔 동생을 홍대선에게 팔아넘겼다고 또 거짓말을 한다. 슬슬 속도를 내자. 알고 봤더니 홍대선이 보내려고 했던 건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려 했던 진짜 금괴였다. 알고 봤더니 마천호는 아버지의 원수 엄성칠이었다. 명철과 영란은 아직 둘이 남매 사이란 걸 모르고 연애감정을 느낀다. 명철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다. 진영방이 명철을 구출한다. 영란은 자기를 괴롭히던 마천호로부터 박철이 오빠임을 알게 된다. 명철은 영란을 구출하고 역시 동생임을 알게 된다. 작가가 필 받아 쓴 10페이지의 액션 신이 이어진 뒤 총에 맞은 명철은 결국 마천호를 죽여 원수를 갚고 진영방의 품에서 죽어간다. 알고 봤더니 진영방은 한국인으로 지금까지 모은 돈은 다 한국 독립군에 전달했고... 하지만 지금 독자들은 둘 사이의 브로맨스에만 신경 쓰고 있겠지.